1부

1967년,
한국의 마을제당을 조사하다.

문화재전문위원 장주근

마을제당 조사를 계획하다.


안녕하세요. 저는 문화재관리국 민속 담당 상근 문화재전문위원 장주근이라고 합니다. 작년(1966년) 10월까지 한국민속관(현 국립민속박물관) 전시 개관 작업을 마치느라 무척 바빴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올해 연말에(1967년 11월) 갑자기 문화재관리국 문화재과 지정계에서 예산이 조금 남아서 불용시키기 가까우니 뭔가 좋은 사업이 없는지 요청이 들어왔답니다. 행정기관 예산은 금년도 안에 전부 지출하고 사업까지 마무리해야 하기에 11월에 시작해서 12월까지 결과를 얻기에는 상당히 촉박한 시간이었습니다.

학술발표중인 장주근


고민 끝에 현재 진행 중이던『한국민속종합조사』사업 추진 과정에서 떠오른 행정조직을 활용한 서면 설문지 조사 방식을 이번 사업에 사용해 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조사대상은 제가 평소 궁금하게 생각하였던 한국의 마을제당의 여러 유형, 요소, 지역적 분포였습니다. 그 동안 파편적으로는 개별 마을제당과 마을제의에 대한 연구 조사는 있었지만, 전국적인 양상을 한번에 파악한다는 것은 인적·물적인 한계로 불가능했었습니다. 매우 좋은 기회였기에 의욕이 불타올랐습니다.

마을제당 설문지 원본


바쁜 상황이었지만 설문지 내용을 구상하고 학술적으로 가치있게 작성하여 올해 12월 초에 우편으로 각급 학교 교사님들께 발송하였습니다. 설문지는 총 4쪽이었고 1만 2천부였습니다. 여러 행정조직 중 학교를 선택한 이유는 당시 우리 문화재관리국이 문교부(현 교육부) 소속이었기에 협조가 잘 되리라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전국 마을제당 조사지 원본


설문지 1만 2천부는 각도 교육청과 군을 거쳐서 각급학교로 하달되고 다음 해(1968년) 2월까지 회수가 완료되었습니다. 회수된 설문지는 총 5,942부로 대략 50퍼센트 정도 회수되었습니다. 일부 설문지에는 별첨 형식으로 2개 이상의 당을 기록한 사례가 있어서 실제 조사된 마을제당의 수는 6천건 넘었습니다.


각 지역별로 회수된 설문지 부수는 다음과 같습니다.
많은 설문지가 회수되었지만 지역별로 큰 편차가 있어서 좀 실망스러운 부분도 있었습니다. 특히 충청남도, 전라북도의 회수율이 무척 저조하였고 반대로 경상남북도의 회수율은 매우 높았습니다. 아직도 이 점은 많이 아쉽습니다. 다만 미래의 후학들에게 1967년 당시의 마을제당의 모습을 부족하나마 보여줄 수 있었다는 점이 매우 기뻤습니다.


설문을 위해 열심히 근처의 마을제당을 수소문하여 글을 작성하고 손수 그림을 그리거나 심지어 직접 사진촬영을 해서 붙여주신 각급학교 선생님들의 노고에 감사를 드립니다. 이 분들의 노력이 아니었다면 마을제당 자료는 존재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만 설문에 꼭 응해야 시말서를 쓰지 않는다는 식의 반강제(?) 조의 문교부 공문을 맨 앞에 넣어서 설문지 작성 및 회수를 강제한 점은 널리 양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민속조사 중인 장주근 교수

『한국의 마을제당』의 학술적 가치

표창장을 받는 장주근 교수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설문 회수가 지역별로 편차가 있어서 아쉬운 점은 있었으나 이 사업은 행정력을 활용한 전국 단위 민속조사로서 민속현상을 일반화하고 통계화할 수 있는 최초의 대규모 사업이었습니다. 마을제당 조사가 가지는 학술적인 가치들을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새마을 잡지 표지


첫 번째, “한국의 마을제당” 조사는 새마을운동이 본격적으로 실시되기 전인 1967년에 실시된 민속조사입니다. 새마을운동의 시행 과정에서 미신타파라는 명목으로 농어촌의 공동 마을제사가 미신으로 지정되어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이것이 마을제사가 소멸되고 변화되는 원인 중의 하나라는 의견이 있습니다. 물론 도시화·산업화로 인한 인구감소와 생업변화도 마을제사가 점차 사라지는 원인이기도 합니다. 1967년의 민속현장은 지금과는 달랐으며 많은 민속현상들이 농어촌 사회에 많이 남아있었습니다. 이것을 생생하게 담은 자료가 “한국의 마을제당”입니다.


두 번째, “한국의 마을제당”에는 마을제사의 실제에 대한 6천여 개의 구체적인 조사 기록이 담겨있습니다. 비록 그것이 전문 민속학자들에 의한 것은 아니지만 1967년 당시 성실한 지식층인 각급학교 교사들에 의해서 작성된 자료들이기에 비교적 신뢰도가 높은 자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동일한 기준을 제시한 설문지로 전국단위 조사가 동시에 이루어져서 각종 통계를 내기가 편리하고, 종합된 통계 수치의 학술적인 가치가 매우 높습니다. 한가지 예로 마을제당의 신격이 남신보다는 여신이 많다는 것을 현장에서 느끼곤 했었는데 이번 조사의 통계를 통해서 사실로 확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통계수치들은 정확한 숫자로 한국민속의 존재 양상을 명확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큽니다.

1970년대 마을제사 모습


네 번째, 설문조사지를 넘겨서 보는 것만으로도 마을제사의 기본정신, 한국 농어촌 사람들의 생활자세들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한 예로 당시 설문지에는 동회 기금 이자는 1회 3천원 정도였다는 기록들을 볼 수 있는데 그 비용은 전국 통계를 내도 평균 1만원을 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설문조사지를 통해 당시 농어촌 사회의 경제·사회·문화 부분도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마을신격인 남녀장승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설문 회수가 지역별로 편차가 있어서 아쉬운 점은 있었으나 이 사업은 행정력을 활용한 전국 단위 민속조사로서 민속현상을 일반화하고 통계화할 수 있는 최초의 대규모 사업이었습니다. 마을제당 조사가 가지는 학술적인 가치들을 말씀드려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