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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함부르크 한인들의 삶과 문화

주제 독일 함부르크 한인들의 삶과 문화
조사 살림살이 이야기, 사진, PDF

독일과 함부르크 한인사회의 역사

독일 한인사회의 역사와 구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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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 한인사회의 역사 **한인 이주사에서 재독한인의 위치** 독일의 한인 이주사는 세계 한인 이주사에 있어 특수한 위치를 점한다. 학계에서는 재외한인 이주사를 다음과 같이 네 가지 시기로 구분하고 있다. **구한말(1860년대 - 1910년),** 기근과 가난을 피해 농민과 노동자가 중국, 러시아, 하와이, 멕시코, 쿠바로 이주. **일제강점기(1910년 - 1945년),** 일제에 생산수단을 빼앗긴 농민과 노동자가 만주와 일본으로 이주. 정치적 난민과 독립운동가가 중국, 러시아, 미국으로 이주. **광복이후(1945년 - 1962년),** 전쟁고아, 미군과 결혼한 여성과 그 자녀, 학생이 입양, 가족재회, 유학을 목적으로 미국, 캐나다로 이주. **기획이민(1963년 - 현재),** 1962년 최초 이민정책 수립 이후 정착을 목적으로 한 이민. 중국과 일본, 소련 해체 후 러시아를 포함한 11개국의 독립국가연합 외의 대부분의 국가에서 한인들이 정착한 시기. 독일 한인 이주사는 마지막 ‘기획이민’으로, ‘파독’으로 대변되는 한인 이주 역사상 유일무이한 특징을 갖고 있다. 많이 알려진 것처럼 파독은 대한민국 정부의 주도 하에 이루어진 자발적인 노동 집단 이주로, 당시 한국에서는 광산과 간호 인력을 독일로 송출하였다. 그리고 이들 중 일부가 남아 정착하게 되면서 유럽 지역 내 최초 한인사회를 형성했다. # 독일 한인사회의 구성원 **1세대 그리고 한-한 가정과 한-독 가정** 독일 한인사회에서 이민 ‘1세대’라 하면 앞서 언급한대로 1950년대 이후 개인적으로, 또는 1960년대 이후 독일과 한국 양국 간의 협정에 의해 1970년대까지 독일에 소위 손님노동자(Gastabeiter)로 이주했던 기간제 기술연수생과 노동자 중 체류를 연장하면서 독일에 정착한 이들을 일컫는다. 이들은 광산 근로자와 간호 인력이 중심이 되었다. 한편 ‘한한 가정’과 ‘한독 가정’은 1세대 배우자의 국가·인종적 선택으로 구성된 가정을 지칭하며 재독 한인들에게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명칭이다. 보통 1세대 한국 남성은 한국 여성과 결혼했기 때문에 ‘한독 가정’이라고 하면 한국인 여성 특히 간호 인력과 독일인 남성과 결혼한 가정으로 인식된다. 독일에서 한인 이민 집단은 ‘모범적 소수집단’으로 묘사된다. 한인 1.5세대와 2세대는 독일인 가정의 자녀보다 높은 학력 수준을 보이며 인문계 고등학교에 해당하는 김나지움(Gymnasium) 진학률은 베트남 이주 자녀 다음으로 높은 것으로 집계된다. 그러나 이는 독일 사회에서 한인에 대한 관심에 기인한 객관적인 평가라기보다는 베트남과 인도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독일 내 다른 집단에게 의지를 갖고 노력하면 독일 사회에 통합될 수 있음을 선전하기 위한 본보기 사례로 제시되는 것이다. 제보자들에 의하면 현재까지도 독일에서 중국 또는 일본에서 왔냐는 질문을 받는데 이에 한국이라고 답하면 북한에서 왔냐는 또 다른 질문을 받게 된다고 말한다. 이를 통해 실제 독일 사회에서 다른 이민 집단에 비해 극히 소수에 지나지 않은 한인 이민 집단에 대한 인식은 높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2세대 그리고 교포와 혼혈** ‘2세대’는 이러한 1세대가 독일에서 형성한 한-한과 한독 가정에서 태어난 자녀를 지칭하는 표현으로 이들의 입장에서 말하면 적어도 한 명이 한국인인 부모 사이에서 독일 사회에 태어나 성장한 배경을 공유한 집단이다. 이들은 현재 30대 또는 40대로 일부는 가정을 이루어 그 다음 세대인 3세를 낳았다. 독일 내 다른 이주민 집단의 2세대에 비해 베트남 2세대와 함께 높은 고등교육 진학률이나 낮은 실업률 등을 근거로 ‘성공적으로 통합된’ 집단으로 소개된다. 실제로 2세대는 다양한 전문 분야에서 독일 사회의 경제 주체로 활동하고 있다. 또한 2세대는 한한 또는 한독 가정의 자녀인가에 따라 ‘교포’ 혹은 ‘혼혈’로 구분하여 부르기도 한다. 한한 가정의 교포 여성 제보자에 따르면 한독 가정의 자녀들은 한국말도 못하는 경우가 많고 대부분 독일 이름과 독일 국적을 갖고 있다. 또한 교포와 다르게 “보다 독일식”으로, 예컨대 식사비를 지불할 때 철저히 더치페이를 한다. 한한 가정의 2세들이 같이 식사를 하면 한국식으로 서로 내려고 한다. 반면 한독 가정의 2세들은 각자 계산한다. 만약 두 가정의 2세가 함께 식사를 하면 계산의 문제로 의견이 엇갈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은 독일 사회 내 한인 2세대라는 공통된 정체성을 공유하고 있다. 많은 2세 제보자들은 다른 이민 집단의 2세대와 같은 생애 이력(Biography)을 가지고 있기에 독일인보다도 쉽게 친해질 수 있다고 말한다. ‘2세대’라는 소개를 들으면 구체적인 국가에 관계없이 바로 이해할 수 있는 동질감을 가진다. 이는 한인 1세대와 같은 시기 손님노동자로 독일에 와 정착한 부모를 둠으로 인해 독일 사회에서 동시대에 경험하게 되는 특수한 사회화 과정과 그 속에서의 갈등과 차별 등의 공통된 경험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1.5세대와 다양한 이민 배경자** ‘1.5세대’는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가족을 따라 독일에 와 살고 있는 세대를 말한다. 이와 같은 표현은 1세대 일부가 정착하게 되면서 이 중 독일에 올 당시 기혼 상태로 한국의 가족을 초청하여 독일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하게 됐는데 이때 1세대의 자녀를 지칭하기 위해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1983년도에 추산된 1.5세대의 수는 2,250여 명으로 이는 당시 독일 한인의 14%에 해당하는 수치이다. 같은 해 한한 가정의 2세는 2,900여 명이었다. 한편 한-독 가정의 경우 1970년에서 81년까지 태어난 2세는 모두 1,427명으로 추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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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부르크 한인사회의 역사와 한인 단체

# 함부르크 역사와 지리적 특징 함부르크는 독일 16개주 중 2번째로 작은 주州로, 인구 역시 베를린 다음으로 많다. 함부르크는 베를린 다음으로 제2의 도시이자, 독일에서 가장 큰 항구도시로 유명하다. 또한 한자동맹의 중심 도시로 ‘자유도시’라는 인식이 있으며, 독일의 특정 주에 소속되지 않고 독립된 도시의 지위를 가지고 있다. 이와 함께 독일 북부지역의 중심도시로 최근에는 관광도시로 유럽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다. 함부르크의 역사는 825년경 하마부르크 성으로부터 시작되며, 834년 이 성의 세례장은 대주교좌 소재지가 되었고, 대주교 안스가르는 초기 함부르크 시를 북유럽 이교도에 대한 선교의 토대로 삼았다. 이후 11세기말 부터는 상업 도시로서의 명성을 쌓기 시작했다. 12세기 중반부터 무역업이 성행하면서 홀슈타인 백작 아돌프 2세가 발트해와 인집 지역에 뤼베크를 건설하면서 함부르크는 항구 역할을 하면서 경제적으로 많은 발전을 하였다. 이후 함부르크 지역의 엘베 강 이용을 위해 알스터 강에 항구 및 부대시설 그리고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면서 조금씩 함부르크는 상업 도시로 발전했다. 13세기 한자동맹을 통해 뤼베크와 함께 중심도시로 성장하였고, 러시아와 플랑드를 사이의 중개 무역에 있어서 전진 무역항으로 각광 받으면서 엘베 강 및 하류의 삼각주를 확보하면서 강의 이용권 및 강을 이용하는 선박의 관리 및 보호자로 인정 받게 되었다. 이후 한자 동맹이 해체되었지만, 함부르크는 기존의 경제적 발전으로 인해 증권거래소 및 함부르크 은행 등이 건립되었고, 1662년에는 선박호송체계가 이루어짐으로써 함부르크 상인들은 처음으로 공해상에서 도시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함부르크의 문화** 함부르크는 상업 도시이자, 문화 도시로 그 명성이 매우 높으며 그에 따라 다양한 주제의 미술관과 박물관들이 상당수 있다. 1868년에 리히트바르크가 세운 함부르크 미술관은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미술관으로 독일의 낭만파 작품을 포함하여 19~20세기의 작품들을 다수 소장하고 있다. 또한 1877년에 세운 함부르크 예술과 공예 박물관은 독일 고대 유물과 아시아의 미술품 등을 소장한 곳으로 알려진 함부르크의 대표적인 박물관이다. 이와 함께 1839년에 개관한 함부르크 역사박물관은 함부르크 역사를 시대별로 잘 정리해 놓았으며 세계 1차 및 2차 대전 당시 함부르크 시내 모습 뿐 아니라 당시 사람들의 생활 상을 살펴 볼 수 있다. 1878년에 세워진 선사인류박물관에는 이 분야의 중요한 유물이 소장되어 있다. 그리고 1879년 설립 된 함부르크 민족박물관은 유럽에서 가장 큰 민족학박물관 중의 하나로, 아프리카, 미국, 호주, 아시아 등 전세계 지역의 유물들을 다양하게 살펴볼 수 있다. 특히 기산 김준근의 “기산풍속도첩” 등 한국 관련 유물을 상당수 소장하고 있다. 미술관 및 박물관과 함께 1678년부터 시작된 함부르크 주립 오페라단 역시 세계적으로 유명하며, 고전뿐 아니라 현대 작품 등을 공연하고 있다. 함부르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음악이다. 함부르크 멘델스존과 브람스가 태어난 곳으로도 유명하며, 이곳에는 국립 필하모닉오케스트라, 북독일 라디오 방송국 심포니오케스트라, 함부르크 심포니 등 3개의 유명한 오케스트라가 있다. 특히 함부르크의 엘프 필하모니 콘서트홀은 2016년 11월에 준공되었는데, 이 건물은 1960년대 지어졌던 벽돌 창고 건물을 새롭게 리모델링하여 지었다. 이로 인해 함부르크 지역민들은 수준 높은 클래식 공연을 관람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 건물은 함부르크의 새로운 랜드마크로 부상하면서 함부르크의 이미지를 항구 도시에서 음악 도시로 탈바꿈하는 개기가 되었다. 또한 함부르크는 출판 중심지로 상당히 유명하다. 특히 독일의 유력 잡지인 슈피겔(Der Spiegel)의 본사가 있으며, 일간지로는 함부르거 아벤트블라트(Hamburger Abendblatt)·함부르거 모르겐포스트(Hamburger Morgenpost)· 빌트 차이퉁(Bild-Zeitung) 등이 있다. 함부르크 시내를 다니다 보면 심심찮게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물지게를 지고 있는 동상으로, 한스 험멜(Hans Hummel)이라고 한다. 이 동상의 주인공은 18세기에 가난한 물장수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함부르크 지역에서 물배달을 하였는데 당시 아이들이 그 모습을 보고 “Hummel,Hummel”이라고 놀려도 웃음만 짓는 착한 사람이었다. 함부르크 시에서는 2003년 함부르크를 상징하는 사람으로 선정하여 그 때부터 동상을 건립하기 시작했다. **함부르크의 자연환경** 함부르크는 엘베 강 하류의 북쪽 끝에 위치하고 있으며, 엘베 강은 구舊도시의 남동부에서 갈라졌다가 서부의 알토나 지역 맞은편에서 다시 합류해 엘베 강 하류를 형성하여 북해로 흘러들어간다. 그리고 북부 지역에서 알스터 강과 동부 지역에서 빌레 강이 함부르크에서 엘베 강과 합류한다. 함부르크 시는 면적의 14%가 숲으로 되어 있지만, 산은 없고 대부분 호수와 평야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호수와 강 그리고 수로가 면적에 8%를 차지하고 있고, 면적의 28%가 경관 및 자연보호 지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공원의 수가 120개를 넘고 20만 그루 이상의 가로수가 심어져 있어 독일에서도 최고의 녹색 도시로 평가 받고 있다. 함부르크 날씨는 온난한 겨울, 늦은 봄, 비교적 쌀쌀한 여름, 높은 습도, 잦은 안개 등으로 말 할 수 있다. 그래서 겨울인 1월의 평균 기온이 영상 1도, 더운 여름철인 7월에는 영상 18도 정도이다. 다만 날씨가 흐리고 비가 간헐적으로 내린다. 하지만 1년 강수량이 760㎜로 매우 적은 편에 속한다. ![](/media//archive/photo/S00000067/service/S00000067_I461489.png) # 함부르크 한인사회의 역사 함부르크의 한인사회가 몇 년도에 성립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그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도 현재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조사 당시 파독 1세대들의 구술 증언에 의존하여 재구성할 수 밖에 없다. 함부르크 한인사회를 처음 구성한 사람들은 바로 유학생들과 상사 주재원이었다. 그리고 함부르크 한인회가 결성된 시기는 1965년으로, 지난 2015년에 한인회 창립 50주년 기념 행사를 개최했다. 함부르크에 한인사회가 본격적으로 성립된 것은 함부르크 총영사관이 들어온 1964년 이후로 여겨진다. 함부르크 총영사관은 유럽 지역에서 최초로 설립되었으며, 그만큼 함부르크가 한국이 유럽과의 경제 및 정치적 활동에 중요한 지점이라고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함부르크 총영사관의 설립은 곧 함부르크 한인회의 결성으로 연결된다. 실제로 함부르크 총영사관이 1964년 8월에 설립되었고, 같은 해 12월에 함부르크에 거주하는 한인들이 함부르크 한인회를 설립하기 위해 모임을 가졌다고 한다. 함부르크 한인회 성립 초기에는 유학생, 상사 주재원 그리고 총영사관 직원들이 그 중심이었다. 이후 1970년대 파독 간호사들이 본격적으로 함부르크로 유입되면서 함부르크 한인사회는 그 규모가 커지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함부르크 한인사회에는 독일 여타 지역과는 다르게, 파독조선기술자들이 1971년부터 1972년까지 총 3차례에 걸쳐 300여 명이 유입되었다. 비록 파독조선기술자 중 일부 인원들만 현재까지 남아 있지만, 초기 이들의 유입은 함부르크 한인사회가 자리 잡는데 상당한 역할을 했다. 이와 함께 타 지역의 파독 광부들이 계약이 끝나자 독일에 정착하기 위해 독일 전역으로 이동하였다. 함부르크 역시 계약이 끝난 파독 광부들이 유입되면서 함부르크 한인 사회가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 함부르크 한인 단체의 역사와 활동 **함부르크 한인회** 함부르크 한인회는 함부르크 한인사회를 대표하는 공식 단체로 대내외적으로 가장 공신력 있는 단체이다. 함부르크 한인회가 처음 결성된 시기는 1964년으로, 당시 함부르크에는 함부르크 대학 유학생, 함부르크 주재 상사원과 밤백(wandsbeck)병원에 근무하던 파독 간호사가 거주하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함부르크의 한인 수가 적기도 하였지만, 주도적으로 한인회를 결성할 만한 인물이 없었다. 그러다가 1964년 함부르크에 유럽 지역 최초로 총영사관이 설립되면서 함부르크 한인사회에서도 한인들을 결집할 단체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여기에는 함부르크 총영사관의 영향도 일정 부분 있었다고 한다. 1964년 12월 24일 리퍼번(Reeperbahn)에 위치한 ‘북경’이라는 중식당에서 당시 총영사관 직원과 몇몇 한인들이 모여서 한인회의 필요성을 느끼고 한인회 결성 작업에 들어갔다. 이후 공식적으로 함부르크 한인회가 발족된 것은 1965년으로, 태용운씨를 초대 회장으로 선출했다. 당시 함부르크 한인회는 대개 유학생과 상사 주재원으로 총 한인수가 40여 명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2016년 현재 함부르크 지역에 거주하는 한인은 약 3천여 명으로 다양한 분야에 종사하고 있다. **함부르크 한인여성회(Koreanischer Frauen e.V. in Hamburg)** 함부르크 한인여성회는 올해로 창립 40년을 맞이한다. 한인여성회의 주축 멤버는 함부르크에 거주하는 파독 간호사들이다. 1970년대 당시 서독 병원에서는 한국인 간호사를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한국의 어려운 경제적 여건을 타계하기 위해 국가에서는 한국인 간호사를 서독으로 상당수 파견했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새내기 간호사로부터 간호대학을 졸업하고 병원에서 3~4년 간 일한 베테랑 간호사까지 다양했다. 1970년대 함부르크 소재 병원에 한국인 간호사들이 오면서 한국인의 수가 증가하기 시작했고, 그 이후 한국인 간호사 자신들을 위한 단체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다. 한인여성회의 월례 모임은 회원들에게 행사 관련 정보를 공유하고, 회원간의 친목을 도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월례 모임 이외에도 한인여성회에서는 사물놀이 및 합창 연습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한인여성들의 사회 활동을 적극적으로 장려하고 있다. 한인여성회는 초기 파독 간호사간의 친목 도모와 정보 공유를 위한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그 후 파독 간호사가 아닌 함부르크 한인 전체 여성을 위한 단체로 거듭나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문화, 예술 분야에서 독보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함부르크 한인 행사 뿐 아니라 함부르크시 나아가 독일 전역으로까지 그 활동 영역을 넓히고 있다. 이에 한인여성회에서는 파독 간호사 1세대들이 지금까지 잘 이끌어왔지만, 미래를 위해서는 2세, 3세들의 참여가 절실하다고 여기고 있다. 이에 한인 2세 및 젊은층의 적극적인 참여를 기대하고 있다. **재독한인조선기술자협회** 독일에서 한인사회가 본격적으로 형성된 것은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이 정착하면서 부터이다. 그래서 독일 한인사회를 이야기할 때 파독 광부와 간호사는 빠질 수 없는 존재가 되었지만, 함부르크 한인사회에서 만큼은 초기 한인사회를 구성했던 사람들은 파독 광부와 간호사만이 아니었다. 이들과 함께 파독 조선기술자들은 함부르크 한인사회를 구성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럼 파독 조선기술자들은 누구인가? 독일 호발트 조선소에서는 당시 제2차 세계대전 배상으로 영국에 5만 톤급 컨테이너선 5척을 보낸다. 이에 조선소에서는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의 성공적 노동 이민 사례를 보았기 때문에 한국 노동자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호발트 조선소 기술자 모집 공고가 나면서 한국에서는 상당수의 기술자들이 독일로 가기 위해서 지원했다. 당시 파독 간호사와 광부의 독일 진출로 인해 외국 노동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함께 한국에서의 경제 활동으로는 힘든 가정 형편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독일 호발트 조선소에서는 총 3차례에 걸쳐 한국 조선기술자들을 채용했다. 먼저 1진과 2진은 1971년 상반기와 하반기로 나누어 채용했다. 이들은 호발트 조선소 인사부장과 마에스터급의 기술자들이 입회한 상태에서 시험을 쳤다. 지원자 중에서는 막연하게 독일로 가고 싶은 생각에 지원했다가 필기와 실기 시험을 친다는 소식에 시험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간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함부르크 독한협회(Deutsch-Koreanische Gesellschaft Hamburg e.V.)** 독한협회는 함부르크 한인 단체 중에서 가장 독일인들과 교류가 많은 단체이다. 독한협회가 처음 결성된 계기는 한국과 독일의 경제인들이 교류를 하기 위해서였다. 초기 경제인 교류를 목적으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명실상부한 함부르크 최고의 문화 단체로 성장하고 있다. 특히 함부르크에서 한인여성회화 함께 가장 한국 문화를 독일인들에게 많이 소개하고 있으며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또한 한인 단체 중에서 가장 먼저 세대교체가 이루어진 단체이다. 함부르크 독한협회는 1984년 함부르크 총영사관, 함부르크 기민당 의장과 함부르크 주재 한국 기업가들이 중심이 되어 창립되었다. 당시 독한협회는 한국과 독일의 경제 협력 및 우호 증진을 그 목적으로 했다. 초기 설립할 당시에는 경제인들이 중심이 되어 운영되다 보니 협회 활동도 경제 및 정치 관련 행사들이 주를 이루었다. 그리고 당시 회원들도 한국과 독일에서 기업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주를 이루었다.



독일 함부르크 한인들의 생활문화

함부르크 한인 가족의 이야기

# 한-한 가족 **김대현 가족의 이야기** _국가 장학생으로 독일에 온 김대현_ 김대현은 1962년 국비 장학생으로 독일로 오게 되는데, 당시 과학기술처의 전신인 경제기획원 기술진흥과에서 유럽 선진국의 발달된 기술을 받아들이려는 목적으로 한국의 젊은이를 파견하기 위한 선발 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다. 이 시험은 저개발 국가에 대한 원조의 일환으로 4개국의 학생 20여명이 만 2년의 교육을 받는 과정이었다. 김대현은 독일에 처음 왔을 때는 독일어가 능통하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 고안한 김대현 만의 독특한 독일어 학습법이 있었다. 아침이 되면 빵을 하나씩 사서 공동묘지로 갔다. 독일은 세계 2차대전을 겪으면서 많은 사상자가 있었는데, 이때 미망인들이 남편의 무덤을 많이 찾았다. 그래서 이를 알고 있던 김대현은 공동묘지에 가서 남편의 묘지를 방문하는 미망인과 대화를 하면서 독일어를 익혔다고 한다. 김대현은 함부르크에서 정착 후 여행사를 설립해서 운영하였으며, 지금은 교포신문 북부 지사장을 역임하고 있다. 하지만 그도 어느덧 여든이라는 나이로 인해 과거에 비해 사회 활동이 줄어든 것은 틀림이 없다. 김대현은 함부르크에서 지금의 부인을 만나 결혼 후 슬하에 1남 1녀의 자녀를 두고 있다. 큰 아들은 1970년생이며, 딸은 아들보다 2살 어린 1972년생이다. 큰 아들은 한국 이름은 김기연이지만, 한인사회에서는 프랑크 김으로 불리고 있다. 딸 역시 김애리라는 한국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독일 이름인 엘리자베스를 줄여서 엘리자라고 불리고 있다. 현재 이 둘은 모두 결혼해서 함부르크에 거주하고 있다. 특히 큰 아들인 프랑크는 김대현의 집과 도보로 2분 정도의 거리에 집을 구해 거주하고 있다. **3대가 어울려 사는 김대현과 프랑크 김 가족** 김대현의 아들인 프랑크는 유학생이었던 허선예를 만나 2004년 결혼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곳은 한인성당으로, 프랑크가 허선예에게 호감을 먼저 나타냈다. 프랑크와 허선예는 한인성당에서 자주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친해졌고, 이후 결혼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당시 허선예는 이화여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음대생으로 함부르크 대학에 입학시험을 위해 2002년 독일 함부르크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_문화적 갈등의 중재자, 며느리 허선예_ 허선예가 결혼해서 하는 일 중 중요한 것이 바로 김대현 부부와 프랑크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하는 것이다. 한인 1세대들은 파독 후 아무 경제적 기반이 없는 독일에서 자신의 가족 뿐 아니라, 한국의 가족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이 상당히 컸다. 이들은 파독 당시 월급의 대부분을 한국의 가족들에게 송금하고 최소한의 생계비로 생활하였다. 그러다가 결혼 후 자신의 가정이 생기면서 부양 가족이 늘어났고 이들의 생계를 위해서 더 많은 일을 해야 되었다. 특히 한한가정의 경우에는?부부가 맞벌이를 해야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들은 자식 교육까지 함께 신경을 써야 했다. 특히 한국의 높은 교육열은 고스란히 자식들에게 돌아갔다. 하지만 1세대들이 자식들에게 직접적으로 교육을 할 정도의 능력은 되지 않았다. 다만 자식들에게 항상 성공적이고 모범적인 삶을 살도록 가르쳤다. 하지만 독일에서 나고 자란 2세들은 사춘기 시절 부모의 한국적 사고방식을 이해하지 못하고 때론 마찰을 보일 때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부모와의 문화적 차이는 쉽게 극복할 수 없는 근본적인 것이었다. 김대현 부부가 아무리 독일에서 40여년을 살았다고 하지만 일상생활에서 자신들도 모르게 유교적 사고의 말과 행동들을 할 때가 있다. 이들은 인지하지 못하지만 독일에서 자란 자식들은 그것에 대한 거부감이 있다. 이로 인해서 서로간에 오해나 갈등이 생길 수도 있고, 서로간의 대화로 그 오해를 풀기에는 한계가 분명히 존재한다. 김대현부부도 그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이들은 허선예를 통해 프랑크에게 자신의 의견을 전달하는 경우가 많다. 허선예 역시 이런 점을 알고 있기에 시부모의 이야기를 남편에게 전달할 때 적절하게 해석을 해서 서로가 만족할 수 있는 부분을 강조해서 이야기한다. 허선예 역시 전달 과정에서 곤란한 부분도 분명히 있다. 하지만 이 집에서 그 역할을 할 사람은 자신 밖에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 # 한-독 가족 **강혜지 가족의 이야기** 강혜지는 경남 창원 출신의 아버지와 남해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1951년 2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중학교까지 형제자매들은 모두 남해에서 살았지만 세관 공무원이셨던 아버지를 따라 고등학교는 서울과 부산에서 다녔다. 강혜지는 서울 창덕여고를 졸업한 뒤 외국에 나갈 생각으로 부산대학교 간호학과에 진학했다. 간호사가 되면 다른 직업에 비해서 외국으로 갈 수 있는 기회도 상대적으로 높았다. 강혜지는 아버지가 가져다주는 외국의 잡지와 책을 접하면서 외국에 대한 동경을 갖게 되었다. 특히 독일에 관해서는 고등학교에서 제2외국어로 독일어를 배우면서 접했고 대학교 1학년 때 교양수업을 통해 독일의 건축을 접하게 되면서 큰 관심을 갖게 됐다. 졸업 후 6개월 간 서울대학병원에서 근무하다가 1976년 독일에 왔다. 아버지는 오빠들에게는 엄하고 딸들에게는 다정하셨지만 처음에 독일에 간다고 말씀을 드리니 대단히 반대하셨다. 친척들에게 어떻게 딸을 독일로 보냈다고 말하겠냐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나 부모님은 강혜지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1976년 2월 5일에 베를린에 함께 도착한 한국의 간호 여성은 강혜지를 포함하여 서울에 거주했던 30명이었다. 3년의 계약이 끝나고 함께 온 30명 중 대부분은 베를린에 남아 거주하고 있고 소수는 미국과 캐나다로 이주했다. 강혜지는 그때 친구들을 따라 제3국으로 가고 싶었지만 현재의 남편을 만나면서 마음을 접었다. 남편은 1979년 같이 근무하던 한국인 친구의 소개로 만났다. 친구의 남편은 작은 공장을 운영했고 강혜지의 남편은 쉬는 날 부업으로 이 공장에서 근무했다. 당시 남편은 멋진 외모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성품이 착하고 여자를 위해 배려할 줄 알았다. 당시 남편은 전처 사이에서 낳은?형제를 두고 있었다. 강혜지는 친정 부모님을 설득하여 결혼 승낙을 받았다. 강혜지는 남편과 1972년생인 첫째와 1974년생 둘째가 각각 12살, 10살이 되던 해인 1983년 결혼했다. 강혜지는 부산에서 공부하던 시절에 높은 곳에서 떨어져 골반을 다쳐 아이를 낳기 어려울 것이라는 진단을 받았지만 아이에 대한 염원으로 노력한 결과 1987년 기다리던 딸 나리를 낳았다. 두 부부는 딸이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정말 행복하다고 말한다. 나리라는 이름은 한국이름으로 시아버지는 독일 이름을 원했지만 강혜지가 한국 이름을 붙여주겠다고 결심했다. 강혜지의 친정부모님은 부르기 좋은 이름이어야지 삶이 평탄하다고 했고 강혜지는 개나리 꽃에서 이름을 따와 지어주었다. ![](/media//archive/photo/S00000067/service/S00000067_I461490.png)

# 1.5세대 가족 **정순문 가족의 이야기** 정순문은 1960년 전남 목포에서 출생했으며, 조선기술자로 온 이모부와 간호사로 온 이모를 돕기 위해 함부르크로 온 1.5세대이다. 아시아 식품점을 운영했던 이숙에게서 일손이 필요하다는 소식을 듣고 3년 간 일할 계획으로 정순문은 1985년 독일 땅을 밟았다. 이후 이숙은 식료품점을 정리하고 Imbiss(임비스)3라고 하는 작은 간이식당을 운영했는데 당시 이숙을 도와 3년간 일을 한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정순문도 독립하여 임비스를 차렸다. 2000년대 중반에 간이식당과 함께 알토나(Altona)에 35명을 수용할 수 있는 한식당을 개업, 공동운영했다. 2011년에는 두 식당을 정리하고 현재의 한미식당을 개업했다. 한미식당은 한식만을 전문으로 하는 식당으로 언제나 많은 자리가 손님들로 가득 찬다. 함부르크에 온지 1년 만에 현재의 아내 이석희를 만났다. 이모의 딸의 소개로 참석한 아내의 생일 파티에서 만나 교제를 시작했다. 이석희는 서울에서 국민 학교를 졸업하고 독일의 친척집에서 거주하기 시작했다. 공부를 마친 뒤에는 한국에 돌아갈 예정이었으나 수료를 1년 앞둔 시점에 정순문을 만나 결혼하게 되면서 돌아가지 않았다. 결혼 후부터 오늘날까지 이석희는 남편과 운영하는 식당에서 조리를 맡고 있다. 정순문의 아내는 1987년 첫째 정혜경을 낳았지만 바로 식당일을 해야 했기에 목포에서 시댁 어머니가 와서 아이를 돌보아주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타지에 오랜 시간 있는 것이 여의치 않게 되면서 어머니는 생후 8개월 된 정혜경을 데리고 한국으로 돌아갔다. 이로 인해 정혜경은 2년 간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둘째는 첫째와 6살 터울이 지는데 첫째를 낳고 보니 부모가 바빠 아이만 고생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녀 혼자 살기에는 외로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셋 정도가 적당할 것 같아 1993년 정순화와 1995년 막내 정진아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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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부르크 한인들의 교육 활동

# 독일 교육제도의 목적과 특징 **독일 교육제도의 목적** 독일 교육정책의 기본 방침은 “젊은이들을 국가의 민주주의체제 속에 자기 역할을 다하는 성숙한 시민으로 이끄는 것”이다. 이는 여느 국가의 기본 방침과 유사할 것으로 사료된다. 그러나 이주배경을 가진 아이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러한 기본 방침은 독일 이주정책의 전통인 ‘통합’의 연장선 위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연방정부는 기회균등 차원에서 특별히 만 4세가 된 이민자가족 자녀에게 언어수준평가를 도입할 계획이라고 한다. 또한 필요한 경우 취학 시까지 부족한 독일어를 습득할 수 있는 언어능력향상대책도 마련 중에 있다고 밝혔다. 이처럼 독일의 교육정책은 이주배경을 가진 학생들을 독일어 구사 능력으로 대변되는 독일 이주정책의 전통인 ‘통합’의 대상으로 전제한다. **독일 교육제도의 특징** 독일 의무교육은 총 9년으로 구성된다. 만 6세가 되면 기초학교(Grundschule)에 입학하여 4년간의 교육을 받는다. 이후 5년 간 상급 교육과정에서 의무교육을 이수해야 한다. 해당 교육기관으로는 주요학교(Hauptschule), 실업학교(Realschule), 김나지움(Gymnasium) 그리고 종합학교(Geamtschule)가 있다. 보통 주요학교에서는 9학년 혹은 10학년, 실업학교에서는 10학년, 김나지움에서는 12학년 또는 13학년을, 종합학교는 10학년까지의 과정이다. 대부분 기초학교에서 처음 2년은 성적순으로 서열을 매기지 않는다. 특징적인 것이 기초학교 입학에서 4학년까지 같은 반과 담임선생님을 유지한다. 담임선생님이 4년간 담당 아이들을 지켜보고 이후 상급 교육기관을 추천한다. 최종 결정은 부모와 아이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런데 기초학교 졸업 후 2년 동안은 방향 모색 단계라 하여 다른 유형의 학교로 변경할 수 있다. 주요학교는 수공업체와 산업체에서의 숙련이 필요한 직종을 희망하는 학생들이 간다. 학생들은 9학년 또는 10학년 후?직업훈련과정에 들어가고 이와 병행해 2년간 직업학교를 다닌다. 독일 전통적인 인문학계 고등학교 김나지움에 다닌 학생들의 졸업 시험인 아비투어(Abitur)는 대학 학문연구 자격으로 인정받는다. 이 두 기관 사이에 위치하는 실업학교는 졸업 후 전문학교나 전문고등학교에서의 교육 자격을 제공한다. 또한 졸업자는 중급인력으로 인정받는다. 위의 세 형태를 혼합한 종합학교의 경우 학생의 능력에 따라 과정의 난이도를 선택하게 하고 직업교육이 교과과정에 포함된다. 이외에도 의무교육 전의 교육시설인 유치원(Kindergarten)과 함께 직업 및 일반 계속교육 과정으로 대학교가 있다. 이러한 모든 교육 기관은 각 연방주에서 관할한다. # 함부르크 한인학교 Koreanische Schule in Hamburg e.V. 한인학교는 1세대가 2세대에게 한국어를 가르칠 필요성과 가르쳐야 한다는 책임감을 인지하면서 설립됐다. 그리고 현재는 부모가 된 2세대가 자녀인 3세대를 한인학교에 보내고 1세대는 학생이 된 손자를 보기 위해 방문한다. 한국에 대한 관심으로 한국어를 배우고자 하는 독일 사회 내 다양한 성원들을 위해 설립된 성인반 역시 새로운 변화이다. 함부르크 한인학교는 1세대 7명이 1974년 10월 학교 창립의 뜻을 모은 것이 바탕이 되어 1975년 8월 8일 입학식과 함께 개교했는데 당시 34명의 학생들이 첫 회로 입학했다. 수업은 문교부와 총영사관을 통해 전달받은 국정교과서를 바탕으로 소피 바라트 학교(Sophie Barat Schule)에서 매주 금요일 오후 3시에 진행됐다. 초기 교사는 정경숙, 방영자, 이분옥이였고 교육부장은 앞서 가족공동체에서 소개된 김대현이 맡았다. 김대현에 따르면 한인학교를 위한 장소를 물색하던 당시 주교님의 도움으로 카톨릭 학교인 소피 바가트 학교를 찾을 수 있었다. 당시 이 학교는 수녀들이 주로 학교를 운영하고 있었고 그 위치도 미국 영사관 뒤편이라 경비가 삼엄해 학생들의 안전에도 도움을 줄 것이라고 판단했다. 당시에는 총 3개의 교실을 대여했다. 함부르크에서는 당시 금요일까지만 학교에서 수업을 했기 때문에 주말에 학교를 빌리면 정규 학교와 같이 오전에 수업할 수 있었지만 그러한 경우 난방비를 지불해야 하는 문제가 있었다. 수업이 있는 날 학생들이 돌아가고 빈 교실을 빌려 사용할 때는 난방비를 낼 필요가 없는 반면 수업이 없는 날에는 비용이 생겼다. 그래서 결정된 시간이 금요일 오후였다. # 함부르크 대학교 한국학과 독일 내 한국학과의 대한 연혁은 다음과 같다. 한국에 대해 본격적으로 진행된 학문적인 연구는19세기 말에서 1900년대 독일 베네딕트 수도회 신부들이 중심이 됐다. 이중 가장 두각을 보이던 이는 안드레 에카(Andre Eckardt)신부로, 그가 독일로 귀국하면서 뮌헨대학에 설치한 한국학과가 독일 한국학의 시초가 되었다. 이후 독일 대학에 한국학과가 개설되기 시작하면서 현재는 베를린 훔볼트대(Berlin Humboldt), 보훔대(Bochum), 본대(Bohn), 함부르크대(Hamburg), 튀빙엔대(Tubingen) 등에 설립돼있다. 이 중 함부르크 대학교 한국학과는 1962년 중국학과 내 설립된 강의로 온태용 선생이 한국어 어학강습을 시작한 것에서 그 역사가 시작된다. 한국어 어학강습은 1970년 오명호 강사가 이어받았다. 이후 1992년 정식으로 학과가 개설되고 정교수 자리가 신설됐다. 교수직에는 보훔 대학에서 한국학 교수를 맡았던 베르너 자세 교수(Prof. Dr. Werner Sasse)가 맡았다. 한국에도 잘 알려진 자세 교수는 중세 한국어를 전공한 한국학자로 함부르크에 와 한국학 학과장을 맡았다. 2002년에는 이강선 선생이 한국학과에서 수업을 시작했고 2006년에는 자세 교수가 은퇴했다. 이후 2008년 보훔 한국어학과의 외르그 프라센(Jorg Plassen) 교수가 공석을 메웠고 이듬해 하이케 리(Heike?Lee)가 대체했다. 2012년부터는 중국학 전공자인 슐츠 친다(Yvonne Schulz Zind) 교수가 한국학과 학과장을 역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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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부르크 한인들이 의례 활동

# 김다혜-플로리안 퓐너의 결혼식 **스탄데스암트(Stadesamt)가 의무인 독일 결혼식** 독일의 결혼식은 두 가지 종류의 결혼식으로 구성된다. 호적 사무소에서 이루어지는 법적인 서약과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의례이다. 먼저 두 사람은 스탄데스암(Standesamt) 즉, 호적 사무소 혹은 혼인청에서 법적으로 결혼을 신고해야 한다. 이는 “Stadesamtliche Trauung(혼인청식 결혼)”라고 부르는데 의무적이다. 호적 사무소는 출생과 결혼 그리고 사망 등을 신고하는 기관이다. 결혼신고는 약혼자와 함께 중심지 혹은 제2 거주지에 위치한 위치한 호적 사무소에서 해야 한다. 함부르크 내에는 총 8개의 호적사무소가 위치한다.(Altona, Eimsbuttel, Mitte, Nord, Barmbek Uhlenhorst, Wandsbek, Oststeinbek, Harburg) 예약은 최대 6개월 전부터 가능하며 수수료는 51유로이고 호적 사무소 외의 장소나, 토요일에 진행할 경우 추가 비용이 든다. 한편 함부르크로 거주지가 등록되어 있지 않은 경우 신분증 혹은 여권과 함께 발행 6개월 이내의 출생증명서 사본을 첨부해야 한다. 또한 독일에서 태어나지 않은 경우 6개월이 지나지 않은 가족관계증명서와 함께 체류증명서를 제시해야 한다. 혼인청식 결혼 당일 진행 과정은 다음과 같다. 호적 사무소의 직원인 주제자 즉, 호적계원이 상대방을 남편 혹은 아내로 맞이하겠냐고 묻고 대답을 듣는다. 그러면 신랑과 신부가 주제자 쪽으로?나아가 혼인계약서에 서명을 한다. 이후 결혼 증인들이 서명을 하게 되는데 오늘날에는 증인의 존재는 필수 사항이 아니다. 서명을 마치면 주제자와 악수를 한다. 마지막으로 신랑과 신부가 반지를 교환하는 것으로 혼인청에서의 결혼식은 끝이 난다. 이때 신랑과 신부의 친인척과 친구 등의 지인이 함께 참석하여 축하하는데 이 절차를 마치면 함께 식당에 가서 식사를 한다. 이후 선택에 따라 교회 결혼식인 “Kirchliche Trauung”이 이루어진다. 플로리안에 따르면 오늘날에는 혼인청식 결혼 후 40%에서 50%의 사람들이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린다고 한다. 한편 플로리안의 외삼촌 조지(Jorg Plath)에 따르면 독일에서 결혼에 대한 인식은 1968년 이후 변화했다고 한다. 1950~60년대는 서구에서 결혼과 가족의 황금기로 일컬어진다. 낭만적인 사랑으로 만난 같은 민족 집단에 속하는 두 남녀의 결합은 공식적으로 결혼식을 통해 부부로 공표되었다. 아내는 남편의 성을 따라야 했고 아이가 생기면 양육에 모든 것을 바쳤다. 많은 영역에서 종교와 관습 그리고 전통의 영향이 강해 이혼할 경우 평생 낙인이 찍혔다. 그러나 1960년 말 즉 ‘68혁명’으로 불리는 학생운동과 여성운동이 일어나면서 이에 대한 비판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법적 구속이 없는 파트너 관계가 부상했고 이혼도 정상적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24 그래도 조지에 따르면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정부의 서류나 주위 사람들의 축하가 없는 동거보다 결혼을 더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삶은 변화하였기에 파트너를 찾고 그 관계를 평생 유지하는 사람들은 더 이상 많지 않다고 한다. **김다혜-플로리안 퓐너의 결혼식과 피로연** _신랑 신부의 만남_ 결혼식 뒤풀이에서의 의사소통은 독일어와 한국어 이외에도 일본어와 영어 등 총 네 나라의 언어로 이루어졌다. 우선 일본에서 만난 독일인 신랑 플로리안과 한국인 신부 김다혜는 일본어로 대화하였다. 또한 신랑과 신랑 측 가족들은 독일어로 말하고, 신부는 친정 가족들과는 한국어로 이야기 했다. 두 가족 간의 의사 전달은 신랑과 신부를 통해 이루어지는데, 독일어 혹은 한국어에서 일본어로 그리고 다시 한국어 혹은 독일어로 이중 통역된다. 국적이 다른 참여자들이 직접 소통을 할 때는 공통언어인 영어를 사용했다. 신부 김다혜는 1987년 부산광역시에서 태어나 성장했다. 김다혜는 대학교 재학 당시 1년 간 일본에 교환학생으로 머물렀다. 이후 한국에 돌아와 대학을 졸업한 후 일본에 취업했다. 플로리안은 함부르크 태생으로 1986년 함부르크-에펜도르프 대학 병원(Universitatsklinikum Hamburg-Eppendorf)에서 태어났다. 그는 독일에서 화학 박사 학위를 마쳤다. 현재 일본문부과학성 산하 과학기술 연구소인 RIKEN의 합성유기화학 연구실에서 장학금을 받으면서 포스트닥터 과정을 밟고 있다. 두 사람은 2015년 여름에 우연히 도쿄의 어느 바(Bar)에서 만나 1년 반 정도 교제했다. _결혼식_ 결혼식은 신랑 부모님 댁과 가까운 쉐네펠트 결혼청(Standesamt Schenefeld)에서 2016년 9월 23일 진행됐다. 일본에 있는 신랑과 신부를 대신해 신랑 부모님이 결혼식 신고와 필요한 서류 제출을 하였다. 결혼식 당일 신랑과 신부는 먼저 여성 호적계원(Standesbeamtin)에게 결혼에 따른 법적 결과를 설명 받았다. 이어 호적계원은 결혼서약서에 각각 서명토록 했다. 신랑은 턱시도를 입었고 신부는 한복을 입었다. 신부는 작은 부케도 들었다. 이후 호적계원은 신랑과 신부를 하객이 모여 있는 다른 방으로 나아가도록 한다. 방에는 책상과 의자가 준비되어 있는데, 이 세 사람과 두 증인은 책상 주위에 앉고 남은 하객은 뒤에 마련된 의자에 앉는다. 증인은 각각 신랑의 지인과 신부의 친오빠 김대일로, 신랑과 신부 옆에 각각 앉았다. 호적계원은 하객 쪽을 바라보며 앉고 나머지 네 사람은 호적계원을 마주보게 앉는다. 신부 측 가족을 위한 통역자도 하객 쪽에 앉아 결혼 상황을 전했다. 최근 국제결혼이 증가함에 따라 결혼식 통역만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한다. ![](/media//archive/photo/S00000067/service/S00000067_I461491.png)
# 이정수-박순옥 부부의 제사 박순옥이 한국에서 시부모의 기제사를 모셔온 것은 큰 모험이었다. 하지만 박순옥은 시부모님의 기제사를 모셔오는 것은 맏며느리로서 당연히 해야되는 일로 생각했다. 그리고 박순옥이 기제사를 모셔온 또 다른 이유는 자식들의 교육 때문이다. 이정수와 박순옥 부부 슬하에는 아들 2명이 있다. 아들이 비록 독일에서 나고 자랐지만, 한국인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 자명한 사실이다. 그래서 박순옥은 자식들에게 한국 문화에 대해 알려주기 위해서 기제사를 가지고 왔다. 특히 독일 문화에는 없는 한국 특유의 유교적 가족문화를 가르쳐주고 싶었다. 그 결과 자식들은 지금도 할아버지와 할머니 기제사 날이 되면 항상 참석한다. 혹여 개인적 사정에 의해 참석을 하지 못하면 이정수와 박순옥에게 전화를 해서 참석하지 못하는 미안함을 전한다.



이정수 아버지 기제사 상차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