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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목포시 유달동·만호동 살림살이

주제 목포 만호동 아리네 살림살이
조사 살림살이 이야기, 공간과 살림살이, 통계, PDF

가족 이야기

이동하(아버지) 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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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하는 1955년 신안군 안좌에서 3남 3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아버지 이종연의 고향은 원래 함평이었으나, 어머니와 결혼하면서 안좌로 이주하였다. 안좌로 이주한 연유에 대해서 이동하는 아는 바가 없다. 아버지 이종연은 한옥을 짓는 목수였다. 한옥 목수는 보통 3년의 수련을 마치면 독립할 수 있다. 아버지 이종연은 목포 만호동으로 이주하여 목수 일을 시작하였다. 이곳에 정착한 이유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당시 만호동은 인근 섬에서 나오는 배가 닿는 선창이었기 때문에 다른 동네에 비해 일거리가 더 많아서 일 것으로 추정된다. 아버지 이종연이 가족들은 안좌에 남겨두고 만호동으로 먼저 이주하여 자리잡았다. 이후 이동하가 2살 되던 해에 안좌에 남아있던 가족들이 만호동으로 이주하였다. 아버지 이종연은 신안 · 여수 · 안산 · 서울까지 지역을 가리지 않고 한옥 건축의뢰를 받으면 출장을 떠났다. 한옥 건축은 한 달, 큰 공사는 두 달에서 석 달까지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한옥을 짓는 목수였기 때문에 수익은 괜찮았다. 그러나 이동하가 국민학교 2학년이 되던 해에 전남연탄을 운영하는 이모부의 보증을 선 것이 잘못되어 가세가 기울게 되었다. 가세가 기울면서 생활도 어려워졌다. 추석 · 설 · 생일에는 쌀과 보리를 섞은 밥을 먹을 수 있었지만, 그 외의 날에는 늘 보리로 지은 밥을 먹어야 했다. 아버지 보증 때문에 가세가 기울다 보니 학교 등록금을 내는 것도 어려웠다. 등록금을 제때 납부하지 못 해 학교에 갔다가 선생님에게 쫒겨나거나 벌을 서는 일이 많아졌다. 이동하의 쌍둥이 동생 이동식은 이러한 상황에 적응하지 못 해 사춘기 시절에 가출을 3번이나 했었다. 동생이 가출하면 쌍둥이인 이동하가 대리출석을 하기도 하였다. 이동하는 중학교 때부터 아버지 이종연의 목수 일을 도왔다. 주말이 되면 학교를 파하고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를 따라 신안이나 인근 지역으로 들어가 목공 일을 도왔다. 나중에는 아버지를 대신해 혼자서 인근 지역에 가서 한옥집 문을 수리하게 되었다. 아버지 밑에서 일을 배운 직원들은 한 명의 전문 목수로 인정되면 아버지에게 연장 한 벌을 선물로 받았다. 그러나 이동하는 아들이다 보니 이것을 받지 못 했다. 그것이 아쉽다고 한다. 이 연장 한 벌에 뭐가 들어있는지는 자세히 살펴보지 않아 기억할 수는 없다고 한다. 아버지는 공사 의뢰를 많이 받았지만, 여러 건의 빚보증으로 인해 수익이 생기면 빚 갚기 바빴다고 한다. 아버지의 빚보증으로 생활은 늘 어려웠고, 학교를 다니는 것도 등록금 문제 때문에 고달팠다고 한다. 이동하는 운동을 좋아하여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역도를 배웠다. 그러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선배 권유로 보디빌딩을 배우게 되었다. 이때부터 아버지 일 돕는 것이 끝나면 체육관에 가서 열심히 운동을 하였다. 고등학교 3학년 때는 미스타대회에도 출전하였다.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는 체육관 총무를 하게 되어 이동하 스스로 돈도 벌게 되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아버지 일을 돕게 되었다. 아버지 이종연은 군대 가기 전까지 목수 일을 도와주면 군 제대 후에 체육관을 차려 주기로 약속하였다. 이때 목포보디빌딩협회에서 보디빌딩 선수 제안이 들어오기도 하였다. 이동하는 22살이 되던 해에 군에 입대했다. 그의 업무는 대학교 교련 교관이었다. 3년간 교련 교관으로 군 복무 후 제대하였다. 이때 대학생활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되었고, 이 경험을 자녀들에게도 느끼게 하고 싶어서 대학 가는 것을 추천한 것이라 한다. 군 제대 후에도 이동하는 아버지를 따라 목수일을 하였다. 일이 끝나면 체육관으로 달려가 운동에 전념하였다. 또래 친구들은 연애도 하고 유흥문화를 즐겼지만, 이동하는 운동하는 것이 좋아 퇴근만 하면 체육관으로 달려가 운동을 하였다. 그래서 연애는 해 본 적이 없다고 한다. 1980년 정월에 지인이 무안 아가씨를 소개해 준다고 선을 보라고 했다. 그러나 이동하는 결혼이나 연애에 관심이 없어 계속 거절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두루마기를 입고 정장 모자를 쓴 노인이 하루종일 목공소 앞에 서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고 한다. 기분은 별로 안 좋았지만, 아버지 또래라 그냥 두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분이 후에 보니 장인이었다고 한다. 장인이 사위가 될 이동하가 어떤 사람인지 살펴보기 위해 하루 종일 지켜본 것이라고 한다. 나남희와 선을 보고 3번의 데이트 후에 1980년에 목포예식장에서 결혼을 하였다. 신혼여행은 제주로 2박 3일 다녀왔다. 신혼여행을 갈 때 돈이 없어 비행기표를 예매하지 못해 배를 타고 다녀왔다. 신혼살림은 현재 집 2층에서 시작하였다. 나남희가 시집올 때 이미 형님과 누나는 출가한 후라 이동하 · 나남희가 조모와 부모님을 모셔야 했다. 대가족을 모셔야 하는 나남희에게 미안하여 부모에게 외부에서 약속이 있다고 말하고 아내 나남희를 데리고 나와 유달산 인근과 목포시내 극장을 구경다녔다. 그가 결혼하고 얼마 안 돼 광주사태가 발생했다. 광주사태 여파는 목포까지 내려왔다. 목포역 앞에서 시위가 일어났고, 그때 지나가던 이동하는 최류탄을 맞았는데, 그 당시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때 눈에 상처가 생겨 현재 한쪽 눈이 잘 안 보인다고 한다. 결혼하고도 그는 아버지와 함께 목수일을 계속 하였다. 이동하는 인테리어 공사를 의뢰받아 수입이 괜찮았다. 아버지의 빚도 다 갚고, 빚보증으로 잃었던 현 주거지도 되찾았다. 1999년에는 집 근처에 ‘코리아체육관’을 개업하여 운영하기도 하였고, 2003년도엔 무안 독천에서 호프집도 운영하였다. 그러나 목공 일보다는 못 하여 다른 사람에게 양도하였다. 이동하는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받아 지금까지 목공일을 생업으로 삼고 있으며, 지역 일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만호동 14통장을 비롯하여, 자율방법대 활동, 청소년 선도위원 등을 하고 있다.



유달동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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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하(아버지) 일상

이동하의 일상은 목공 의뢰가 들어올 때는 일을 하지만, 일 의뢰가 없을 때는 개인적 취미생활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화요일과 목요일 오후에는 만호동사무소에서 풍물패 연습을 하고, 매월 25일에는 만호동 통장회의에 참석한다. 이외에도 만호동 행사가 있을 때면 빠짐없이 참석을 한다. 2010년 6월 25일 오후 4시에 만호동사무소에서 만호동 통장들이 모여 여객선터미널 맞은편 공터를 청소하였다. 다른 달에는 회의를 하였지만, 6월에는 회의안건이 없어 통장들이 모여 자원봉사로 마을 청소를 한 것이다. 이날 청소에는 15명이 참가하여 만호동사무소에서 제작한 ‘만호동 친절 · 질서 · 청결 · 자율정비단’이라 인쇄된 연두색 조끼를 입고 연두색 모자를 쓰고 청소도구를 챙겨 이동하였다. 2010년 8월 26일에 만호동사무소 4층에 위치한 풍물연습실에서 3시부터 풍물연습을 하였다. 이동하는 2008년부터 만호동풍물패에서 풍물을 배우고 있다.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3시에 만호동주민센터에 모여 연습을 한다. 이렇게 풍물을 연습하여 지역풍물대회에 참가하기도 하였고, 지역 행사가 있을 때 길놀이를 하기도 한다. 이동하는 길놀이를 할 때는 징을 담당하지만, 풍물 연습 때는 장구를 배우고 있다. 풍물 연습은 그의 여가생활의 일부이기도 하다. 2010년 7월 31일 목포 하당 평화광장에서 개최된 ‘목포시민 드래곤보트 대회’에 참가하였다. 보트젓기대회는 목포시 동별 대회로 참가인원은 11명이다. 만호동 참가인원이 부족하여 광주에서 공부하고 있는 아들 이일헌과 이일헌의 친구들도 함께 참가하였다. 배젓기는 힘보다는 팀원간 협동이 우승 여부를 결정한다. 이날은 예선전을 치르고 다음날 결승전을 치르게 된다. 만호동은 예선전은 통과했으나, 다음날 치러진 결승전에서 졌다. 2010년 7월 22일 목포시내에서 개최된 목포시 마당놀이 축제에서 만호동 풍물패가 길놀이를 하였다. 이날 이동하는 징을 담당하였다. 2010년 9월 12일 추석을 앞두고 가족들과 선산 벌초를 하였다. 이날 벌초에는 이동하의 형수 · 이동하 · 나남희 · 이동식(쌍둥이 동생) · 조카 3명이 함께 하였다. 선산은 무안 중등포에 있다. 오전 9시에 이동하의 집에 모여 벌초에 필요한 준비물을 조카의 차에 싣고 출발하였다. 선산에는 조부모와 부모님이 안장되어 있는데, 조부모와 어머니는 선산 윗쪽에 매장되어 있지만, 아버지 이종연은 선산 아래쪽에 매장되어 있다. 이는 아버지가 사망한 지 1년이 되지 않아 선산으로 들어올 수 없기 때문이다. 목포에서는 ‘날송장’이라 하여 사망한 지 10년이 되지 않으면 탈육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선산에 매장하지 않고, 선산 인근에 매장했다가 완전히 탈육이 되면 선산으로 이장한다고 한다. 2010년 9월 23일 추석에 치러지는 집고사가 있었다. 추석날 아침 차례 지내러 형님댁으로 가기 전에 안방과 작업실에 음식을 차려 고사를 지내는 것이다. 이동하는 선영을 위해 지내는 제사라고 이야기 한다. 이 집고사는 추석 외에도 정월 초하루와 대보름에도 지내고 있다.



정월대보름 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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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남희(어머니) 생애사

나남희는 무안군 삼양면 유교리 중등포에서 2남 3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나남희의 형제는 원래 10남매였지만, 당시 의료가 발달하지 못 해 살아남은 형제가 다섯이었다. 그녀의 집은 유교리에서 그의 집 땅을 밟지 않고는 다닐 수 없을 정도로 부유했다고 한다. 집에 새끼머슴이라고 하여 어린 아이를 머슴으로 둘 정도였다. 아버지가 만주에서 번 돈으로 고향으로 돌아와 검은 소를 구입하여 소을 이용한 배송업을 하고, 소달구지 배송업으로 돈을 많이 벌어 땅을 구입하여 소작도 주었다. 그녀가 사는 중등포에는 중학교가 없어 목포에 있는 해인여중에 진학하였다. 집에서 중학교를 통학할 수가 없어 남산고 근처에 방을 얻어 언니와 함께 자취하였다. 언니가 졸업한 후에는 여동생과 살았다. 매주 토요일이면 학교를 파하고 중등포에 있는 집에 다녀왔다. 집에 가서 1주일 동안 먹을 식량과 반찬을 가져와야 했기 때문이다. 집에 다녀오면 용돈도 받아왔다. 그녀는 학교를 파하면 친구들과 영화관람을 하거나, 자취집에 모여 춤추기를 하며 즐거운 학창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그녀가 중학교 3학년이 될 무렵에 아버지가 화투에 심취하여 재산을 탕진하게 되어 생활이 어려워졌다. 그녀는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서울에서 공부하는 오빠를 지원하기 위해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해야 했다. 고등학교 못 가는 것이 아쉬워 중학교 졸업식도 가지 않았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언니가 있는 서울로 상경하였다. 서울에 있는 봉제공장에서 일을 하다 1년 만에 고향으로 내려왔다. 그러다 다시 서울로 가서 오류동에서 양품점을 운영하다 봉제공장에 취직하였다. 봉제공장에서 2∼3년 동안 일을 하였다. 봉제공장에서 근무할 때 그녀는 기숙사 생활을 하였다. 함께 기숙사 생활을 하는 친구들은 인근 지역 공장 노동자들과 연애 하였지만, 나남희는 연애엔 관심이 없어 편지교환만 하였다. 그러다 집에서 선을 보라고 하여 고향으로 내려왔다. 목포시내 다방에서 이동하와 둘이 만나 선을 보고, 설 지난 후에 약혼을 하였다. 약혼한 후 3번의 데이트 후 1980년 3월에 결혼식을 올렸다. 혼수로 세탁기를 가져오고 싶었지만, 이동하네 집 수압이 약해 세탁기를 사용할 수 없다고 하여 가져오지 못 했다. 현 주거지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한 나남희는 생활적응이 힘들었다. 친정집은 마당이 있고, 집이 넓었는데, 시댁은 집이 좁은 데다 1층과 2층을 계단으로 오르락 내리락 해야 했다. 계단 오르내리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 매우 힘들어 했다. 이로 인해 첫 아이는 유산하였다. 첫 아이를 유산하고 다행히 얼마되지 않아 이화진을 임신하였다. 이화진이 탄생했을 때 가족들이 다들 기뻐해 주었다고 한다. 첫 아이를 잃고난 후라 그 기쁨은 더 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후 이문경을 임신했는데, 시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시할머니가 치매에 걸렸는데, 시어머니는 비위가 약해 뒷바라지를 할 수 없어 나남희가 다 하였다. 시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1년도 채 안 되어 시어머니가 자궁경부암으로 돌아가셨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나남희가 집에서 수발하였고 이동하의 쌍둥이 동생 이동식을 결혼도 시켰다. 시어머니 대신으로 시동생들의 어머니 역할을 하였다. 딸 둘만 낳고 자녀를 갖지 않으려 했는데, 서울에 있는 오빠가 아들 하나 더 낳으라고 하여 이일헌을 낳게 되었다. 남편 이동하가 벌어오는 돈으로 시아버지를 모시고, 3명의 자녀를 키웠다. 나남희는 목수 일로 바쁜 남편을 대신해 아이들 교육에 많은 신경을 썼다. 아이들이 배우고 싶다는 것이 있으면 배우게 하였고, 하기 싫다고 하면 그만 두게 하였다. 이외에도 아이들 교육에 좋은 것이라면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나남희는 지역활동에 열심인 남편을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있다. 남편이 무슨 일을 한다고 하면 적극적으로 돕는 것이다. 남편이 나남희에게 거짓말을 하거나 숨기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나남희는 자녀들이 모두 출가하고 나면 경치 좋은 곳에 카페나 펜션을 운영하는 것이 꿈이다.



약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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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남희(어머니) 일상

나남희는 따로 직업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이동하에게는 비서 · 조수와 같은 역할을 한다. 이동하가 일 때문에 외부로 바쁘게 다니느라 집을 비우기 때문에 집에서 대신 전화를 받거나 이동하가 일을 할 때 작업을 돕기도 한다. 이동하는 웬만한 일꾼보다 나남희와 일을 하면 손발이 척척 맞아 좋다고 한다. 일이 없을 때면 동네 아주머니들과 삼봉이라는 화투놀이를 하거나 동네 사우나에 가서 목욕을 즐긴다. 저녁시간이 되면 시장에서 식재료를 사다 저녁을 준비한다. 저녁을 먹고나면 남편과 함께 삼학도까지 산책을 다녀온 후 잠자기 전까지 TV 시청을 한다. 나남희는 시집 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30여년이 넘도록 가계부를 작성하고 있다. 가계부를 살펴보면 아리네 가족의 경제생활을 알 수 있다. 처음에는 시아버지에게 받은 생활비에 대한 지출내역만 적었으나, 나중에는 시아버지 이종연에게 경제권을 물려받은 후에는 입출금 내역을 모두 적었다고 한다. 나남희는 매년 여름이 되면 매실을 구매하여 매실장아찌를 담그고 있다. 매실을 구입하여 매실과 같은 양의 설탕을 섞어 항아리에 담아 뒤란에 보관한다. 한 달이 지나면 매실의 씨는 빼고 매실 과육만 따로 보관한다. 매실을 가지고 매실청을 담그기도 하고, 매실장아찌도 담근다.아리네는 복날이 되면 오리탕으로 복달임을 한다. 예전에는 닭으로 복달임용 삼계탕을 하였으나, 오리가 몸에 더 좋다고 하여 지금은 오리를 가지고 탕을 해 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