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만 해도 장흥에서도 뚝 떨어져서 더 고적한 촌으로 들어가. 어머니는 옛날 그냥 집에서 농사채(논밭)같은 거 많은 부잣집 딸이어 가지고……. 농사짓는 거 도와주고 그러나. 어머님은 곱게 자라신 것 같아. 친정이 부자라. 식구들이 많으니까 그냥 하고 일꾼도 있고 그랬겠지. 보니까 기와집에 위채, 아래채 있고 그렇더라고. 외갓집 가보니까 굉장히 넓은 시골집이더라고. 기와집에. 우리는 어려웠지. 그래가지고 큰오빠랑, 엄마랑 같이 세탁소하고 큰 오빠가 생계를 꾸려갔지. 장흥읍 학교 앞에서. 큰오빠, 작은 오빠, 언니, 나, 남동생, 그렇게 해서 5남매라 그러나. 우리 형제들이 다섯이거든. 어려운 거 알고 일이라도 해서 돈 벌어야 겠다는 생각을 했나봐. 책임을 갖더라고 큰오빠가. 세탁소 심부름하러 들어가가지고 거기서 기술을 배워가지고 나중에는 세탁소 엄마랑 차려가지고 같이 하고. 그렇게 해서 잘 이루고. 오빠가 거의 동생들을 키웠지. 난 초등학교때 뭐. 공부는 잘하도 못하도 않고 그냥 평범하게 해가지고 바로 집 앞이 학교라 내가 어릴 때 늦잠 잤나봐, 근게 아버지가 머리 짜매주고 그런 생각이 나. 아버지가 둘째 딸이라고 이뻐했지. 내가 좀 사근사근했나봐. 아버지를 그냥 잘 따르고. 언니는 그냥 생꿍한 편이고. 아버지가 만약에 술을 잡쉈다하면은 아버지 또 델러도(데릴러) 가보고 그런 생각도 나고 그래. 냇가에 가서 목욕도 하고. 초등학교 졸업하고 나서는 멀리는 못가고, 공장 같은데는 멀어서 못가고 나가면 죽는 줄 알았지. 그때는 오빠 미안해서 내가 중학교 들어간다고 해서 교복까지 맞추는 순간에 내가 그만뒀지. 내가 오빠 미안해가지고. 돈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옛날엔 이불만 해가지고 시집가는 것도 잘 간 거여. 언니(김은희)가 또 중학교 나와 가지고 의상실 다니더라고. 의상실 다니면서 언니가 나를 의상실로 끌어들였지. 처음에 시골에서 했지. 장흥에서. 장흥에서 하다가 언니는 서울로 가고 또 친구누나가 의상실 한다고 그래서 거기로 또 가고. 언니는 시골에 있던 분이 서울로 이사 가서 가게 되고, 나는 우리 친구 누나가 서울 사당동에서 의상실 한다고 그래서 갔던 거고. 사당동에서 2년 있다가 그 다음에는 목동에서 2년 있었죠. 생활은 의상실에서 먹고 자고 했어요. 주인 언니랑. 생활에 특별히 불편한 점은 없었고 그냥 어린 나이라고 생각했고, 그냥 밖에 나가면 무섭다는 생각에 함부로 밖에 나가지는 못했죠. 그냥 거기 주인 언니 말 잘 듣고……. 또 언니가 부탁으로 해서, 눈 밖에 나는 일은 하 면 안 되겠다 하는 조심스러운 마음에서 그냥 지내고 있었어요.
예전에는 서천에서 장흥(김연희 고향)에 가는게 만만치 않은 거리였어. 그때만 해도 군산에 하구둑을 놓기 전이어서 여기서 비인까지 택시타고 가서 비인에서 장항까지 버스타고 나가면 장항에서 군산 가는 배를 기다렸다가 타고, 거기서 전주로 가서 광주에 갔다가 다시 장흥으로 가는 하루 걸리는 거리였지. 당시 연애할 때 집사람이 서울에서 서천으로 내려올 때는 첫차타고 갔다가 막차타고 갔지. 이는 교통이 좋아서였고, 연희가 장흥으로 내려갔을 때는 내가 가야되는데 당일에는 절대 못 돌아올 거리였지. 아저씨를 알게 된 계기는 여기 시누가 의상실에 손님으로 오게 되어가지고 친구하자고 그래서 어느 날 한 번 여기(월하성) 온 것이 일년에 한두 번 정도 왔다 갔다 하다가, 아무 생각 없이 왔다가, 내 생각에는 어딜 가든지 나는 연애결혼은 하지 않겠다는 그런 내 결심이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여기를 몇 번 왔다 갔다 하면서 영두 오빠를 만나게 되었죠. 시누는 김영점(김영두 여동생). 그러고 인제 여기 영두 오빠를 그냥 친구 오빠로 알다가, 어느 날 얻어 걸린 거지. 여기는 그때 당시만 해도 옛날 바닷가잖아요. 그니깐 여자애들이 밖에 나고 배를 올라가고 함부로 돌아 다닌다든가 하면은 안 되니까 그런거 조심하라고 오빠가 그러더라고. 여기를 내가 놀러왔다니까. 시누가 친구 손님으로 와가지고 친구가 가자 그래서 여기 왔지.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여기 와가지고 일년에 한 번 두 번 바람 쐬러 왔던 거지. 일년에 두 번 정도 왔어. 한 스무 살 때쯤. 내가 사랑의 힘은 위대하다는 것을. 진짜 위대해. 무서운 거 없는 거야. 서겸이는 스물세 살에 낳았지 1982년에. 3년 후에 결혼을 했던 것 같애. 85년인가. 서겸이 한 3살 때 쯤. 결혼식 올 린 것 같애. 양가친척들도 다 오고 새마을 모임에서 추천받아가지고 거기서 결혼식 올렸으니까. 대전에서. 신혼여행은 대전 유성온천으로. 새마을에서 유성온천이라는 곳에 신 혼여행까지 호텔인가 호텔이라고 해야지 거기 방까지 다 되어있었어. 거기서 다 배려해준 거야. 돈은 안 들었어. 그때만 해도 해온 것도 없어. 살다가 (결혼)했기 때문에 이불하고 옷하고. 살다가 뭐 그냥 살던 살림살이 있고. 들여와도 들여놓을 때도 없고 뭐 그대로 살았어. 아버님은 가정에 충실하고 더 이상 잘할 수는 없잖아. 너무 충실할 정도로 잘해요. 다른 건 몰라도 아저씨가 나한테는 진짜 잘해줘. 흠이라면은 술 마시는 거, 그거만 좀 줄였으면 좋겠지.
시집 생활은 좀 어떠셨어요? 시어머니랑 같이 사는데 힘들지 않으셨나요? 아 내가 터득을 했지. 나는 모르고 내 하던 버릇으로 그냥 피곤하면 자고 했거든. 그랬는데 시어머니 말을 들어보니까 처음에는 안 좋아서 골도 내고 그러면 시누가 말하기를, 아저씨가 왜 또 골냈냐고 어머니가 뭐라고 했냐고 자기 동생한테 물어보는 거야. 그러면은 아니라고 그러지. 그래 싸서 시어머니나 시누가 나 골내서 아들한테 다시 물어보고 저기할까봐 뭐라고 하지도 않았어. 그래서 그냥 있고 했는데 무조건 시어머니가 말을 하면 어른 말이 그땐 서운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면 다 옳은 말이더라고. 나중에는 서겸이 엄마 착하다고 동네방네 서겸이 업고 다니면서 칭찬하고 다녔네. 애들은 시누하고 시어머니가 다 업고 키워가지고 난 애기를 키웠는지 어쨌는지 잘 모르겠어. 별로 내가 업어볼 새도 없이 애들이 커 버려 가지고. 시어머니가 그렇게 애들을 땅에 안 놔둬. 식전에 어머님이 서겸이를 업고 밖에 나가셨다가 들어오실 때 대문 앞에서 이렇게 양철대문인데 문 터걸이가 있는데 거기서 서겸이를 업고 넘어지셨어. 넘어지셔도 얼른 서겸이부터 챙기시더라고. 나는 부엌에 갔어. 그래가지고 어쨌든 밥상에서 시어머니가 입을 이렇게 비틀면서 ‘아아’, ‘어어’ 이러시 더라고. 그게 풍기 비슷하게 혈압이었나 봐. 그래서 갑자기 쓰러 지시더라고. 그 발로 택시 불러서 대천으로 큰 시숙님이 모시고 갔을 거야. 대천종합병원에서 사흘 되던 날, 자 식 된 도리로서 할 수 있는 치료는 다 해봤지. 우리 집 여기로 안 오시고 큰 집이 회관 자리에 있었거든 거기로 모시고 가더라고 큰 집에서. 그래 가지고 거기서 숨을 거두셨지. 모시긴 우리가 모셨어도 큰일이 있거나 이럴 때는 큰 집 형님이나 시숙님이 다 이렇게 알아서 처리해주시고…….
어쨌든 이런 생활(어촌)을 전혀 모르다가 생소하니까 어려웠지. 내가 이제 어쨌든 여기 아니면 갈데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한번 연애해서 사는 사람이 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결백을 하고 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여기 맞춰서 살자고 그랬고…….노력만 했지 뭐 아무 것도 없어. 처음에 몇 년은 배 안 나가고 집에서 그물 손질 뒷일만 해줬죠. 배 따로 장만해가지고 둘이 같이 하게 되었지. 어차피 해야 될 거, 해야 할 거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멀미도 않고 멋모르고 무서운지 모르고 탔지. 해야 된다, 이겨내야 된다, 그 당시 남들 아줌마들도 타기 시작하고 했으니까 나도 탈 수 있겠다 의지가 있어가지고 타게 되었어요. 다른 아줌마들도 한명 두 명 이렇게…….뱃동사 구하기가 힘드니까 부부간에 하게 되더라고. 마을에 경운기를 올려놓은 것은 얼마 안되었다. 원래는 갯벌에 메어 놨다. 배 나가야되는데 물이 저렇게 써 있으면 배가 안 뜨잖아. 물이 써서 배가 못나가잖아. 그래서 이따가 배나가야겠다고 생각하면 저기 물끝에다 매어놨다가 물이 쓸때까지 기다렸다가 갔다. 선창 쌓고 이런 것도 얼마 안되었다. 배에서 자고 새벽에 일어나서 그물 걷어서 오는 거지. 내가 월하성에 처음 왔을 때는 짐 자전차가 2대 있대. 자전거에다 짐 실을 수 있게 되었는거. 나 그거 많이 타고 다녔어 뒤에. 그렇게 몇 년 살다가 오토바이가 생겼고 그러다 경운기, 우리는 경운기를 자가용처럼 타고 댕겼어. 그런데 우리 어머니들. 진짜 우리 어머니들은 자젓 담는 동이있잖여. 항아리. 그걸 이고 판교장까지 댕겼대. 우리 시어머니가. 그런데 까지 갔다는 것은 더 놀랍데. 판교굴 다리를 타고...판교가 여기서 얼마나 멀어. 새벽2시 되면 걸어갔대. 그래서 옛날에는 해변가로 딸을 시집을 안 보낼려 했었어. 울 집에 서도 여기로 시집간다 그러니까 엄청 반대했었어. 그리고 포구 사람들이 더 못살았고. 겨울에는 그냥 집에서 봄에 쓸 어장 꾸미고 뒷바라지하고. 옛날에 갯벌일은 2~3년 했었지. 그때는 소금으로 안하고 맛싸개라고 쇠꼬챙이로 했어. 한 손으로 파고 꼽고 한 손으로 파고 꼽고. 그때는 일안하니까 돈 없으면 빌려쓰고. 난 차라리 배 타고 가는 게 더 낫지. 아저씨는 못해. 겨울에도 가끔 배 나가요. 숭어 잡으러. 비축을 좀 해놔야 겨울에 쓰고 그래요. 겨울에 큰 돈은 못 만져도 공과 금 내고 쓸 정도는 번다. 시장 좌판 같은 거는 시장바닥 생선전에서 하는 사람들이 따로 있어요. 거기서 앉아서 하는 거지. 빈 자리에 조금씩 깔아놓고 하는데 좌판이라고 할 수 있는 정도도 아니고 빈 공간에다가 하는 거지. 금어기는 원래 옛날부터 7~8월에 있었다. 옛날에는 단속이 심하지를 않고 다 해먹게. 시장에서도 걸리지도 않고. 가면 갈수록 아예 시장에서 팔지도 못하고, 팔면 큰일나지. 옛날엔 바다에서만 엄했는데 시장에서 팔고 이런 거까지 엄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시장에서 파는 것까지 엄하게 단속하니까. 바다에서도 해경이나 지도 선같은게 떠서 지나다니면서 불법어업하는 사람 잡으러 다니지.
나는 계모임, 혼인계 하나하고 여자계 하나하고, 뭐 여자들 4명이 6~7년 하는 거 있어요. 2개 하는데 많이 안하지. 여자계는 한 달이면 3만원씩 회비를 내가 지고 4명이서 12만원 적금 부어가지고 그거 3년 치 적금 하나 타서 돈 놔뒀고, 다시 3년짜리 시작해서 올해가 5년 치니까 내년 4월이면 6년이다. 6년째면 그 돈으로 외국을 가나 아니면 국내를 가나하고 꿈꾸고 있다. 그런데 그런게 이제 마을에서 점점 없어지더라구요. 서로 생활이 애들 커나가고 다 다양하게 변화가 되가지고 그대로 그냥 무너져버리더라고요. 혼인계는 3년돼서 적금 하나 타고 했으니까 4년째 되었나. 3년 적금을 한 번 타놓고 태워주기로 시작을 해서 나는 적금을 못 탔다. 오늘은 비바람이 거세다고 예보되어서 모두 바다에 나가지 않았다. 배 나가는 날의 일과가 새벽 3~4 시부터 시작된다면 배 나가지 않는 날의 일과는 따로 시작되는 면이 없다. 김연희는 아침 8시 50분에 미장원에 출발했다. 민정 어머니(김성자)가 모는 트럭에 김연희를 태우고 김성자 올케 분을 태우고 3명이서 출발했다. 이 곳의 미용사는 ‘을정’라고 불리는데 김연희와 15년 지기이다. 김연희는 아침 식사를 하고 오지 않아서 서도마트 앞에 있는 ‘케익하우스’라는 빵집에 가서 빵을 산다. 어머니가 팥빵을 고르고 기타 빵들을 골라서 가져와서 드신다. 여기 미용실은 3일 전인 8월 17일에 오픈했는데 잠시 웅천 쪽으로 미용실이 옮겼을 때는 어머님들이 웅천에 가서 머리를 하고 올 정도로 머리를 잘했다고 한다. 미용실을 나와서 아버님(김영두)친구가 운영하는 중국음식점 ‘전주원’에 간다. 이 음식점은 남촌에 있는데 모두가 간짜장으로 통일해서 식사를 했다.
죽는다 해서 그래가지고 양쪽 식구들이 다 모였더라고. 나는 왜이렇게 사람들이 많나했어……. 김연희는 1999년 배 끼리 충돌사고로 안면과 어깨, 허리 등 여러 군데 를 심하게 다치는 중상 을 입고 병원에서 장기간 입원 치료를 받았다. 치료기간 고등학생이었던 서희가 엄마와 아빠를 걱정하며 쓴 글이 담긴 일기장이다. 안방 장롱에는 김서희가 1999년에 엄마인 김연희가 사고 나서 입원했을 때 썼던 일기장이 있다. 일기장은 1999년 4월 12일부터 1999년 6월 8일에 김연희가 퇴원하는 날까지 적혀 있다. 처음 살림살이 조사 팀 이 집을 방문했을 때 김연희가 “집 조사 한다 길래 안방을 정리하다가 서희 일기장을 다시 보고 나도 모 르게 눈물이 났다”고 한 그 일기장이 이것이다. 이 일기장을 보면 서희의 어머니를 생각하는 마음 뿐만 아니라 기발한 아이디어나 예술적 감각까지도 엿볼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신문에 있는 ‘엄마’라는 글자를 잘라서 글에 삽입한다든지, 원광대학교 병원 약 봉지를 일기장에 붙여놓거나, 현충일에 쓴 일기에는 국 기에 대한 맹세를 ‘엄마’에 대한 맹세로 바꿔서 필요한 부분들에 ‘엄마’, ‘아빠’, ‘건강’ 등의 단어를 삽입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김연희도 서희가 사춘기 때 내(김연희)가 아픈 와중에도 엇나가지 않고 더 철이 든 것 같다고 기억하고 계셨다. 일기장 곳곳에 당시에 힘들었던 모습들이 그려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밝은 모습으로 김연희에게 최선을 다하려는 모습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