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사이트는 Chrome, IE10 이상의 버전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10 미만 버전일 경우 원활하지 않을 수 있으니 업그레이드 하시기 바랍니다.

울산광역시 북구 구유리 제전마을

주제 한종문·박숙자 가족의 살림살이
조사 울산 제전마을 한종문·박숙자 가족의 살림살이, 공간과 살림살이, 사진,

한종문·박숙자 부부가 걸어온 길

부부의 혼인이전의 삶



# 1) 한종문 이야기 한종문(1939년생)은 한재득과 김과외 사이에서 6남매 중 다섯째로 제전마을에서 태어나 마을을 떠난적 없이 지금까지 거주하고 있다. 한종문의 아버지 한재득(1902-1986)은 청주 한씨로 울산 출신이며, 어머니 김과외(1904-1962)는 김해 김씨로 제전마을이 고향이다. 한총문은 아버지 한재득이 유복자로 태어나 어린 시절을 힘겹게 보냈다고 말한다. 한재득은 울산 시내에서 일을 하다가 중매로 김과외와 혼인을 하고, 김과외가 살고 있던 제전마을에 자리 잡게 되었다. 한종문의 어머니인 김과외는 당시 제전마을에 친척이 많이 살았으며 집안 형편이 부유한 편이었다고 한다. 현재 한종문이 거주하는 집(재전2길16-8)은 부모님이 결혼 후에 아버지 한재득이 땅을 구매하여 집을 지은곳으로 한종문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한종문의 형제는 3남 3녀로 형 한명과 누나 세 명이 있고 남동생 한명이 있었다. 큰형님은 부산에 오래 살다가 2014년도에 돌아가시고, 현재는 경주 양남면 진리에 사는 첫째 누나와 부산 영도에 사는 둘째 누나만 남았다. 한종문이 기억하는 유년 시절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으로 인한 힘듦과 가난함이다. 한종문은 1939년생으로 일제강점기를 겪은 세대이다. 제전마을도 일제강점기 때 일본군의 수탈이 심해 그것을 피해 마을 사람들이 자주 도망을 갔다고 한다. 특히 그는 일본군을 피해 온 가족이 산으로 도망간 일과 일본의 수탈에 맞서 아버지가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노력했던 일에 대해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한종문의 기억에 따르면 마을 사람들이 마을 뒤에 있는 산으로 전부 피난을 갔는데, 한종문도 아버지의 등에 업혀서 도망간 기억이 있다. 이때 피난을 가서 숨었던 곳이 제전마을과 옆 마을인 우가포의 경계인 몰랑등이다. 날이 어두워 질 때까지 몰랑등에 숨어있었는데, 당시 군대에 있던 큰 아들 걱정에 한재득은 "내가 자식을 군대에 보내놓고 이러고 있을 수 없다. 나는 집 지키러 내려가야겠다." 라고 하시면서 마을로 내려갔다. 아버지 등에 업혀서 피난을 갈 정도로 어린 나이였지만 한종문은 그날이 또렷하게 기억난다고 전했다. ![](/media//archive/photo/RD36S/service/RD36S_I465135.PNG) 이렇게 힘든시기를 보낸 한종문은 강동국민학교에 입학하였고 졸업까지 할 수 있었다. 강동국민학교를 졸업한 후 집안 형편이 어려워 중학교 진학에 대한 생각을 접었으나 어머니의 권유로 중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마을 주민의 이야기에 따르면 70년 전만 해도 제전마을은 교육열이 높지 않았다. 또한 마을에 멸치잡이를 비롯한 어업이 잘 됐기 때문에 남자들은 학교를 보내기보다 배를 타서 고기를 잡아오도록 하는 분위기였다. 이러한 마을 분위기에 비해 당시 국민 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한 한종문과 교육을 시키고자 했던 한종문의 어머니는 교육에 대한 열정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한종문의 큰형인 한종태는 부산시 영도구 청학동에 살고 있었다. 어머니 김과외가 큰형이 살던 곳을 다녀 온 후 부산에 있는 중학교에 다니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영도구 남항동에 위치한 대양중학교에 입학했다. 그때는 작은 마을에서 가까운 도시에 있는 학교로 유학을 많이 가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한종문은 중학교를 다니면서 숙식은 부산에 살고 있던 큰형의 집에서 해결했지만 어려운 집안 형편으로 인해 학비는 스스로 마련해야 했다. 한종문은 중학교 시절 교우 관계도 좋았으며 2학년 때는 반장을 할 정도로 똑똑했다. 그런데 학비가 문제였다. 한종문은 초등학교를 다닐 때부터 선주(船主)인 아버지를 따라 고기를 잡으러 다녔다. 그래서 아버지를 따라 배를 탔던 경험을 살려 방학마다 마을에 와서 고기를 잡아 판매한 돈으로 직접 학비를 마련했다. 그러나 방학 한 달 동안 배를 타도 몇 달치 학비 밖에 벌 수 없었다. 방학이 끝나고 학교로 돌아가면 친구들이 굳은살이 생긴 손을 보고 깜짝 놀랄 정도였다는 말을 통해 힘들었던 시간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방학마다 힘들게 학비를 벌었지만 2학년 2학기가 되자 몇 달치의 학비가 밀려 담임선생님의 눈치가 보여서 더는 버티기 힘들었고, 결국 3학년에 진학하기 전에 학교를 그만 두었다. 중학교를 그만둘 무렵 함께 살던 큰형은 군 입대를 하고 형수님 혼자서 남의 집 빨랫감을 받아 빨래를 해주면서 돈을 벌었다. 그래서 한종문은 큰형의 집에 더 머무를 수 없던 상황이었고, 중학교를 그만 두고 돈을 벌면서 기숙사가 있는 야간학교에 다니려고 했다. 하지만 겨울이 되자 난방도 제대로 되지 않는 방이라 너무 추워서 견디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잠을 잘 때도 누워서 잘 수 없을 정도여서 앉아서 잠을 청하는 날도 있었다. 한종문은 추위를 견디기가 힘들어 한 달도 되지 않았을 때 짐을 싸서 제전마을로 돌아왔다. 그는 돈이 없어서 이로 갈아먹을 정도가 돼서야 고향에 돌아왔다고 말할 정도로 힘든 생활을 했다고 회상한다. 마을로 돌아온 한종문은 배 사업을 하는 아버지를 도와 바로 배를 타기 시작했다. 6남매 중 유일하게 한종문만 배를 탔고, 그래서 아버지의 배를 물려받을 수 있었다. 한종문은 현재 미역 채취와 기세 작업을 할 때 타는 2톤 규모의 목선인 뎃마(전마선)한 척만 소유하고 있지만 과거에는 4-5톤 정도 크기의 배를 운영했다. 한종문이 처음 배를 타기 시작한 나이는 중학생이 되기 이전인데, 어림잡아도 60년이 넘는 세월동안 배를 탄 셈이다. 아버지 한재득이 선주였으므로 한종문은 어릴 적부터 아버지를 따라 자주 배를 탔다. 그래서 사람들은 배 타는 일이 어렵지 않냐고 묻지만 자신에게 제일 쉬운 일은 배 타는 일이라고 말한다. 본격적으로 타기 시작한 때는 중학교를 그만두고 마을로 돌아온 시기인 17-18살 즈음부터다. 이때부터 아버지와 공동으로 배를 운영하면서 조업 활동을 했는데, 이때 탔던 배 이름은 ‘무룡호'이다. 무룡호는 한종문이 아버지에게 배를 넘겨 받아 운영할 때도 계속 사용하던 이름이다. 당시 제전 앞바다에서는 갈치, 치상어 등의 어종이 많이 잡혔는데, 한종문은 아버지와 함께 바다에 나가서 갈치를 잡아와서 입찰을 보러 조합장에 갈때면 생산량이 가장 많았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아버지와 함께 배를 타고 고기를 잡으러 다녔던 시절이 좋았다고 말한다. 그가 처음부터 배 타는 것을 좋아했던 것은 아니다. 어린 나이에는 아버지가 바다에 나가자고 하면 나이도 어리고 그때는 노는것이 더 좋았기 때문에 무척 싫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금 자라서는 바다에 나가면 속이 시원하고 마음이 더 편해져서 집에 있는 것보다 오히려 바다에 나가 있는 것이 좋았다. 그는 20살이 되기 전부터 아버지와 함께 무룡호를 타면서 배를 점차 키워 나갔고, 결혼 이후 군대를 전역하고부터는 한종문이 주가 되어서 배를 탔다. 아버지 한재득은 거의 70세까지 배를 탔는데, 연로하여 배를 타기 힘들어 지면서 한종문이 30대 중반부터는 자기 소유의 배를 가지고 어업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한종문은 배를 타다가 23살에 박숙자를 만나 결혼하게 된다. # 2) 박숙자 이야기 박숙자(1939년생)는 박승학과 김순애 사이에서 6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박숙자의 고향은 경북 경주시 양남면 읍천리이다. 박숙자의 아버지 박승학은 밀양 박씨로 경주 양남면 읍천에서 나고 자랐으며, 어머니 김순애는 김해 김씨로 고향은 기억나지 않는다고 한다. 박숙자가 유년 시절을 보낸곳 읍천에는 친척들이 많이 살았다. 박숙자는 위로는 언니가 한 명 있고, 아래로는 남동생 4명이 있다. 언니는 양남에 살았고 남동생들은 서울에 살았는데, 현재 형제들은 다 세상을 떠났다. 박숙자는 딸이었지만 집안 형편이 좋아서 중학교까지 다닐 수 있었고 남동생들은 고등학교까지 마쳤다. 그래서 집 근처에 있던 양남국민학교와 양남중학교를 졸업했다. 당시 강동면에는 중학교가 없었으나 양남에는 중학교가 있어 박숙자는 집 근처에 위치한 양남중학교에 다녔다. 읍천은 제전마을과 같은 바다가 인접해 있는 어촌이지만 신작로를 경계로 신작로 위쪽은 양반이 사는 곳, 아래쪽은 민촌으로 여겨졌다고 한다. 그래서 읍천에도 제전마을과 같은 해녀들이 있었지만 신작로 위쪽에 살았던 박숙자는 어릴 때 물질을 하는것만 보았지 자신이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였고, 부모님도 못 하게 하여서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어릴 적 박숙자의 집에서는 논농사와 밭농사를 주로 하였는데, 따로 일하는 사람을 두지는 않았고 아버지와 함께 집안 식구들이 직접 농사를 지었다. 남성들이 주로 농사일을 했기 때문에 박숙자는 논농사에는 크게 참여하지 않았다. 박숙자는 중학교를 졸업한 이후 고등학교는 진학하지 못했고, 부모님을 모시면서 밭 농사를 조금씩 돕고 바느질 등의 집안일을 배우며 지냈다. 사실 박숙자는 유년 시절에 대한 기억을 크게 갖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보관 중인 사진을 통해 조금이나마 박숙자의 유년 시절을 살펴볼 수 있다. 박숙자는 유년시절에 찍은 흑백사진을 많이 가지고 있는데, 사진관에 가서 친구들, 친척들과 기념으로 찍은 사진, 사진사를 직접 집으로 불러서 찍은 마루 위의 사진, 그네 타는 사진 등이 있다. 사진 속에 박숙자가 입은 한복은 당시 값이 비쌌던 비로드 치마, 저고리인데, 이런 사진을 통해서 그가 풍족하게 자랐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유년 시절을 보낸 박숙자는 23살에 한종문을 만나 결혼하여 제전마을로 오게 된다. ![](/media//archive/photo/RD36S/service/RD36S_I465136.PNG)



-
부부의 혼인이후의 삶

# 1) 한종문·박숙자 부부의 혼인 동갑내기인 한종문과 박숙자는 중매로 만나 23살에 혼인을 했다. 한종문이 살던 제전마을과 인접한 마을인 판지마을에 박숙자의 이모가 살고 있었고, 박숙 자의 이모는 제전마을에 친척이 있었다. 그래서 박숙자가 또래보다 혼기가 늦은 것을 알고 한종문에게 소개시켜 줬다고 한다. 제전마을에는 같은 마을 사람끼리 연애결혼을 하거나 중매결혼을 한 경우가 많다. 제전마을의 통혼권을 보면 혼인이 제전마을 내에서 이루어지거나 제전마을과 인접해 있는 당사, 주전과 조금 멀게는 경주시 양남면까지 이루어졌다. 특히 마을에는 박숙자처럼 경주 양남에서 시집을 온 여성들이 많다. 통혼권을 이룬 지역의 공통점은 어촌이라는 점인데, 이러한 것을 통해서 과거 제전마을은 해안선을 따라서 통혼권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종문은 또래에 비해 결혼을 일찍 한 셈이었지만 박숙자는 당시 여성들이 10대 후반, 20대 초반에 결혼하는 것에 비하면 늦은 편이었다. 한종문은 당시 군대를 기피하고 있는 상태였고, 어머니가 몸이 편찮으셔서 결혼을 빨리하고자 했다. 그래서 또래 친구들 가운데 가장 먼저 장가를 갔다고 한다. 반면 박숙자는 위로 4살 터울의 언니가 있었는데, 집에서 언니를 먼저 시집보내느라 자신은 늦게 가게 되었다. 중매를 받고 난 후 한종문은 박숙자의 사진을 보고 마음에 들어서 결혼을 결정했다고 한다. 그런데 박숙자는 얼굴을 보지도 않았고 그저 부모님이 시키니까 아무 것도 모르고 결혼했다고 말한다. 당시에만 해도 결혼을 할 때 혼인 당사자의 의사보다 신랑, 신부의 부모님 혹은 집안의 뜻이 더 중요한 시절이었다. ![](/media//archive/photo/RD36S/service/RD36S_I465137.PNG) 박숙자가 결혼할 당시에는 제전마을이어촌에서잘 사는 동네로 소문이나 있었다. 또한 제전마을이 바닷가마을이고, 한종문 집에서 농사를 많이 짓고 잘 산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박숙자의 집에서도 혼인을 흔쾌히 수락했다. 박숙자가 시집을 와서 봤을 때도 한종문 집의 형편은 크게 어렵진 않았고 먹고 살만큼의 농사를 짓고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중매를 받은 후 한종문과 박숙자는 해를 넘기지 않고 1961년 12월 4일(음력1961년 11월8일)에 결혼식을 치렀다. 결혼식은 경주 양남에 있는 박숙자의 집 앞마당에 병풍을 펴고 대례상을 차려 전통혼례로 치러졌다. 박숙자는 결혼을 하기 전에 동네 젊은 사람들이 시집을 가게 될 집에 시어머니가 엄청 무서운 분이라는이야기를 해서 걱정을 많이 했다고 한다.제전마을과 박숙자가 살던 마을은 통혼관계뿐 아니라 거리가 멀지 않아서 사람들의 교류가 많았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한종문의 어머니를 알고 이야기해줬다고 한다. 막상 걱정을 하고 시집을 왔지만 시어머니는 몸이 아파서 병석에 누워계시긴 했지만 사람들의 이야기처럼 무서운 분은 아니었다. 박숙자가 시집을 왔을때 한종문 집에는 한종문의 아버지,어머니, 장가를 안 간 남동생이 살고 있었다. 시어머니가 이미 건강이 좋지 않아 병석에 오래 계셨으므로 집안일이나 시어머니의 손길이 필요한 일을 박숙자가 도맡아해야 했다. 그래서 시집 온 초기에는 고생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결혼 후 박숙자가 시댁에 적응할 틈도 없이 남편 한종문이 군대에 입대하게 된다. 한종문은 당시 집안 사정과 몸이 편찮으신 어머니로 인해 제때 군대를 가지 않고 1년 정도 미뤄두고 있었다. 그래서 결혼식도 결혼하기엔 이른 나이었지만 어머니를 생각해서 서둘러서 했다. # 2) 한종문의 군입대 한종문은 강동면 병사계에 아는 사람이 있어서 편법으로 군대를 기피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해에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면서 한종문은 군대를 가야겠다고 생각하여 지원을 했다. 당시에는 영장도 나오지 않았지만 지원을 하자마자 신체 검사를 받게 됐다. 그 시기가 결혼을 한지 딱 한 달 20일만이라고 한다. 한종문은 결혼이야기를 하면서 군대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고 말하면서 결혼하고 얼마 되지 않아 군대에 입대했기 때문에 박숙자에게 미안한 마음이 컸다. 박숙자 역시 시댁에 와서 적응도 채 하지 못했던 때였는데, 갑자기 입대를 한다고 해서 경황도 없었고 슬플 틈도 없었다. 훈련병 생활이 끝나고 한종문은 강원도 인제군 관대리에 위치한 제1야전군 사령부로 자대 배치를 받게 된다. 사령부 소속으로 근무를 하다가 강원도 양구군 에 21사단을 창설할 때 지원을 나가 지원중대 소속으로 옮겨 1964년 9월에 전역 하게 된다. 한종문은 군 생활을 2년 8개월정도 했는데, 군대에 었는 동안 몸이 편찮으셨던 어머니가 돌아가시게 된다. 한종문은 어머니의 임종도 지키지 못하고 장례도 가지 못했다. 한종문이 어머니 임종을 지키지 못한 이유는 한종문과 같은 부대에 있던 선임의 실수에서 비롯되었다. 그래서 한종문은 그 선임 이름을 아직도 기억 할 정도로 어머니가 가시는 마지막 길을 지키지 못한것에 대해 무척 속상해 했다. ![](/media//archive/photo/RD36S/service/RD36S_I465138.PNG) 한종문은 1962년 2월에 입대하여 1964년 9월에 전역했다. 이 사진은 제대기념으로 찍은 사진으로 앞줄에 왼쪽에서 2번째가 한종문이다. 한종문은 군대에 있을 때 어머니가 돌아가신 일도 있었지만 군대 생활이 힘들기보다 근무환경이 좋아 군생활을 잘했다고 이야기한다. # 3) 박숙자의 효심 한종문의 어머니는 박숙자가 시집 온지 3년째 되던 해에 돌아가셨다.어머니는 환갑을 일 년 앞두고 있었는데, 환갑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그래서 박숙자는 옛말에 환갑을 넘기면 장수한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렇지 못해 일찍 돌아가신 것 같은 생각이 든다고 한다. 시어머니는 박숙자가 시집을 오기 전부터 몸이 좋지 않았다. 박숙자는 시어머니의 병명은 정확하게 알 수 없었지만 시어머니는 다리가 자주 아프다고 하셨기 때문에 요즘으로 보면 신경통인 것 같다고 했다. 당시에는 의학기술이 부족하고 약이 개발되지 않아서 고칠 수 있었던 병도 고치지 못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박숙자는 시어머니와 보낸 시간이 짧기 때문에 남들이 말하는 시어머니 시집살이에 대한 기억은 없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박숙자는 시아버지 한재득이 세상을 뜨기 전까지 혼자남으신 시아버지를 30년 가까이 정성껏 모셨다. 박숙자는 시아버지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맏며느리는 아니지만 이 집으로 시집을 왔으면 남편의 부모를 모시는 것은 당연한 일로 생각했다. 박숙자는 시아버지에 대해 인물도 좋고 손재주도 좋고 부지런한 분이라고 이야기했다. 시아버지를 오래 모셨지만 당시에는 그게 힘든 일인지 몰랐고, 시아버지가 잘 챙겨주셔서 오히려 모셨던 것을 좋은 일이라고 말한다. 시아버지는 큰병치레를 하지 않고, 85세에 노환으로 별세했다. 박숙자는 시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도 정성으로 모셨으며, 1986년에 시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에도 20년 가까이 정성을 드려서 제사를 지냈다. 그래서 한종문은 자신이 둘째아들이지만 부모님도 모시고 제사도 오래 모셨기 때문에 자신의 집이 큰집이나 다름없다고 이야기한다. # 4)한종문·박숙자 부부의 분가 한종문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1964년 한종문이 전역을 한 후 부부는 1965년에 첫째 아들인 한진하를 현재 살고 있는 집에서 낳았다. 첫째 아들이 태어나고 1넌 후에 딸을 낳고 2년 후에 아들을 낳았다. 자녀들은 모두 현재 살고 있는집에서 태어났다. 당시 집에는 한종문의 아버지, 한종문·박숙자 부부와 한종문의 동생이 함께 살고 있었다. 그런데 집안 문제로 인해 첫째 아이를 낳고 부부는 분가를 하게 된다. 박숙자는 시동생이 속을 썩여 분가를 했다고 한다. 분가를 해도 한종문이 제전마을에서 태어났고, 아버지가 계셨기 때문에 마을을 떠나 멀리 갈 수는 없어서 마을 안에 있는 다른 집으로 나가게 됐다. 처음 분가를 나간 집은 마을에 있는 당나무 근처에 있는곳인데, 현재 도로명 주소로는 재전 1길 20-5 집이다. 처음 분가를 나갔을 때는 집을 구매할 형편이 되지 않아 다른 사람집 아래채에 셋방살이를 했다. 셋방살이를 할 때는 자녀들이 어릴 때라 다른 사람에게 아이들이 시끄럽다든지 별나다는 싫은 소리를 듣기 싫어서 아이들 교육에 더욱 신경을 썼다고 한다. 셋방살이를 한지 오래되지 않아 누가 집을 팔려고한다는 소식을 듣고 아이들을 생각해 집을 사서 나갔다. 아이들이 크면서 세를 들어서 사는 집에 피해를 줄까 박숙자는 걱정을 많이 하였다. 그때 마침 마을 안에 다른 곳에서 집을 판다는 소식을 듣고, 현재 김봉호(1942년생)·유영자(1952년생) 부부가 살고 있는 구유길 40번지 집을 구입하여 이사했다. 이사한 집은 바로 앞으로 바다가 있어 앞이 트여있고, 방도 넓고 뒤쪽 공간도 넓어 공간 활용도가 높은 집이었다. 현재 김봉호·유영자 부부의 집은 방 2칸, 거실, 부엌, 식당방, 욕실, 화장실, 옥상으로 공간이 나눠진다. 아랫방은 없던 공간이었으나 한종문·박숙자 부부가 이사를 하면서 만들었고, 현재 옥상으로 쓰고 있는 공간은 한종문·박숙자 부부가 살 때 슬레이트지붕이었던 것을 수리한 것이다. 그래서 박숙자는 그 집이 쓸모없는 부분이 없고 살기에 편리했다고 기억한다. 박숙자는 조사자에게 분가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지금 생각하면 현재 집보다 전에 살던 집이 살기는 더 편했을 거라고 말했다. 이사한지 5년이 채 되지 않았을 때 집안 문제로 급하게 돈을 마련해야 할 일이 생겼다. 그래서 한재득이 살고 있던 집을 팔고 돈을 마련하고자 했다. 그런데 집의 위치가 골목 안쪽이라 빨리 팔리지 않아서 이사해서 살던 구유길 40번 집도 함께 내놓았다. 구유길 40번 집은 길가에 있고 목이 좋아 금방 팔렸다. 이때 집을 구매한 사람이 김봉호·유영자 부부이다. 그래서 한종문·박숙자 부부는 1974년에 분가해 있던 집을 팔고, 다시 아버지가 살고 있던 본가로 돌아와서 현재까지 거주 중이다. # 5) 바다와 함께한 부부의 삶 한종문은 결혼 전부터 배를 탔으며, 제대한 후에도 어업에 종사했다. 아버지 한재독과 함께 배를 탔는데, 전역한 후에는 한종문이 중심이 되어 어획 활동을했다. 젊은 시절부터 배를 탄 한종문은 20살부터 계산해도 50년 가까이 어업에 종사했다. 긴 세월동안 배를 탄 만큼 배도 여러 번 바꿨는데, 아들 한진하에 따르면 3-4번 정도 배를 교체했다고 한다. 처음 한재득과 탔던 배는 3.5톤 규모의 목선이 었다. 현재는 대부분의 배가 FRP선박으로 영구적인 것에 비해 과거 한종문이 배를 탈 때는 전부 목선이었다. 목선은 반영구적이라서 20년 정도 타면 선박이 부식되고 노후화되어 더 타기가 힘들어진다. 한종문이 아버지와 같이 탔던 배의 이름은 무룡호인데, 무룡호를 타다가 5톤 규모의 목선인‘토성호'로 교체해서 장어 장사를 할 때까지 오래도록 탔다. 한종문은 선주로서 직접 배를 운영했는데, 장어를 주로 잡기 전에는 멸치, 고등어, 삼치, 정어리, 참상어 등 다양한 어종을 잡았다. 이때는 한 배에 한종문을 포함하여 선원 5명 정도가 필요했고, 적을 때는 3명, 선원이 많을 때는 6명이나간 적도 있다고 한다. 조업을 한 번 나가서 그물을 바다에 던져놓고 오면 그 다음 날 아침에 가서 전날 놓았던 그물을 걷어 생선만 실어오고, 다시 그 자리에 그물을 놓고 나오는 방식으로 고기를 잡았다. 제전마을은 과거 제전 장어로 유명했는데, 장어잡이 선박이 11척이나 있을 정도로 성행했다. 그래서 한종문은 여러 어종을 잡다가 장어는 연중 어획이 가능하고 어획량이 많아서 장어 한 종류만 잡아 고정적으로 물차에 넘겨서 팔았다. 그러다가 한종문은 이렇게 물차에 넘기는 것보다 장어구이 장사를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인근마을인 정자에는 활어 직판장이 있어서 외지 사람들도 많이 오고 홍보도 되어 마을이 살아나는 것을 보고, 한종문도 제전마을에 장어가 많이 잡히니 장어구이 단지 건립을 마을 사람들에게 제안했지만 크게 호응이 없어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먼저 한종문이 시범으로 장어구이 장사를 제전마을에서 시작하게 된다. 이것은 제전마을에서 살림살이 집을 한종문·박숙자 가족의 집으로 선정한 이유 중 하나이다. 마을 사람들은 한종문이 머리가 비상하고 손재주가 좋다고 이야기 하는데, 장어구이 장사에 있어서도 이런 모습이 잘 나타난다. 과거 제전마을에는 출가한 제주해녀들이 30-50명씩 집단으로 와서 물질을 했다. 그래서 마을의 여성들도 제주해녀들이 물질하는 것을 보고 따라서 하면서 차츰 자신들만의 방법을 터득해나갔다. 해녀들은 제전마을로 시집을 와서 물질을 배운 사람도 있고, 제전마을 출신으로 어릴 적부터 하기도 했다. 마을 여성들은 대부분 과거에 물질을 했으나 현재는 몸이 연로하여 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일부는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media//archive/photo/RD36S/service/RD36S_I465139.PNG) 박숙자는 울산 북구 나잠회에 등록되어 있는 해녀로 몇 해 전까지 기세작업에 참여했다. 그는 시집을 와서 바로 물질을 배우진 않고 농사일과 집안일을 하면서 자녀들을 키우다가 어느 정도 자녀들이 크고 난 다음에 물질을 시작했다. 박숙자의 시어머니도 제전마을 출신이지만 물질은 하지 않았고, 그래서 박숙자도 처음에 시집왔을 때 물질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박숙자도 제전마을에 살게 되면서 주변에 비슷한 나이 또래의 젊은 사람들이 물질하는 것을 보고 호기심 반 욕심 반으로 시작했다. 박숙자는 바다에 자원이 풍부할때는 물질을 하면 채취량이 많아서 해녀들이 잡아와서 판매하면 돈이 되는 것을 보고 욕심이 생겼다고 한다. 그래서 별도로 누구에게 배운 것 없이 주변 해녀들이 하는 것을 보고 따라서 시작했는데, 원래 수영을 배우지 않아서 수심이 깊은 곳에서 작업은 어려워 발이 닿는 곳에서만 했다. 그래서 박숙자는 깊은 곳에 있는 전복을 잡거나 잠수를 해서 물질을 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고, 수심이 얕은 곳에서 ‘앙장구’를 잡거나 미역돌을 매는 기세 작업을 할 수 있는 정도라고 이야기한다. 현재는 나이도 많고 몸이 연로하여 해산물 채취를 하거나 기세 작업에서 돌은 메지 않고, 겨울철에 앙장구만 가끔 잡거나 구제 작업에 참여한다. 앙장구를 잡는 시기에는 자주 나가는 것이 아니라 처음 시작하는 날 하루 이틀 정도만 나가서 잡아오면 큰 아들 내외가 손질하여 판매한다. 2016년에는 12월에 두 번 정도 물질을 나가서 앙장구를 잡았다.구제 작업은 마을 어촌계에서 미역과 전복이 잘 자랄 수 있도록 불가사리, 군소, 성게 등을 잡는 작업을 말한다. 마을에서는 2016년 5월 25-26일에 구제 작업을했는데, 박숙자도 이때 이틀 모두 나와서 불가사리와 군소, 성게 등을 잡았다. # 6) 자녀이야기 한총문과 박숙자는 슬하에 아들 두 명과 딸 한 명을 두고 있다. 한종문이 전역하고 그 다음해인 1965년에 첫째 아들 한진하가 태어났고 바로 다음해인 1966년에 딸 한본순이 태어나고, 3년 뒤인 1969년에 막내 아들 한진걸이 태어났다. 자녀 셋 모두 현재 살고 있는 집에서 태어났고 유년시절 뿐만 아니라 결혼하기 전 까지 제전마을에 살았다. 첫째인 한진하는 할아버지인 한재득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는데, 그래서 한재득이 있던 큰채의 작은방을 한진하가 쓰기도 했다. 박숙자는 자식들이 어릴 때 착하고 순하게 자라주어서 크게 걱정할 일이 없었다고 한다. 남의 집 셋방살이를 할때도 자녀들이 어렸지만 큰소리 한번 나지 않아서 이웃집에서 자식 교육을 잘시 켰다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한진하는 울산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군대에서 전역한 후에 현대자동차 인사과에 근무하다가 자영업을 하기 위해 퇴사했다. 1996-1997년 무렵에 울산 시내로 나가서 살다가 김갑연을 만나서 부모님을 모시고 살기 위해 10년 전에 다시 마을로 들어와서 한종문·박숙자 부부와 함께 거주하고 있다. 한종문과 박숙자가 아직 건강하기 때문에 부모님이 하시는 일에 크게 관여하지 않고 농사일로 일손이 바쁠 때나 미역 작업을 할 때 일을 돕는다. 한진하는 슬하에 아들 1명과 딸 3명을 두고 있다. 첫째 아들은 울산 화봉동에 거주하고 있으며, 첫째 딸은 2014년도에 결혼하여 서울에서 살고, 둘째딸도 일을 하면서 서울에 함께 살고 있고, 막내 딸은 대학을 졸업하고 대구에서 일을 하고 있다. 둘째 한본순은 1990년도에 결혼하여 울산 시내에 거주하고 있고 슬하에 딸 세 명을 두고 있다. 막내 아들인 한진걸은 현대자동차에 다니다가 퇴직을 하고 한종문이 하던 배 사업을 물려받았다. 한종문은 첫째에게 배를 물려주려고 했으나 한진하가 자신과 맞지 않다고 생각해서 동생에게 넘겨주었다. 그래서 1년 동안 한종문은 한진걸과 함께 배를 타고 다니면서 일을 가르쳤다. 한종문에게 일을 배우면서 2002년 무렵에 결혼을했다. 한진걸은 첫 아이를 낳을 무렵 한총문에게 배를 완전히 물려받았다.배를 물려받을 당시에 배는 4.5톤 정도 규모로 이름은 토성호였는데, 가자미 어선을 하면서 10톤 규모로 배를 키웠다. 그 이후에 토성호를 팔고 21톤 규모의 배를 샀는데, 이름은‘동성호'이다. 결혼 후에 제전마을 옆 마을인 판지마을에 거주하고 있으며, 정자에서 가자미와 대게 어획을 하고, 회 센터도 운영 중이다. 그래서 한종문은 자신과 같은 일을 하는 막내아들에게 조언을 해주기도 하고, 가끔식 한진걸이 조업을 다녀오면 정자에 가서 생선이나 해산물을 가지고 오기도 한다. 한진걸은 슬하에 딸 3명과 아들 2명이있다. ![](/media//archive/photo/RD36S/service/RD36S_I465140.PNG)



한종문·박숙자 가족의 주요 생업 변천사

과거 생업의 중심 : 장어구이 장사

한종문의 고향인 제전마을은 1980년대까지 강동면에서 부자동네로 소문났었다. 이 시기 제전향에는 10여 척의 정도의 배가 어업을 했는데, 비슷한 시기에 인근마을인 강동면 정자에는 배가 3-4척에 불과했다. 제전마을과옆마을을 비교해보면 많은배가 어업을하던 곳임을 알수 있다.제전마을 주민들은 멸치, 복어, 상어, 장어와 같은 어종을 주로 잡았다. 특히, 멸치잡이를 많이 하였는데 멸치배가 항에 들어오기 무섭게 멸치가 팔렸다. 물차들이 멸치를 우선적으로 확보하기 위해서 줄을 서서 기다리는 진풍경도 펼쳐졌다. 멸치를 물차에 판매를 하고도 남을 만큼 잡을때는 마을의 부녀자들이 울산시내에 가지고 가서 팔았다. 박숙자도 울산 역전시장에 가거나, 멀리 언양장까지 가서 멸치를 팔았다. 부녀자들은 자신의 가족이 속한 멸치배에서 잡아온 멸치를 구매하여 시장에서 재판매하였다. 멸치를 차떼기로 구매하여 판매하였기에 수입이나쁘지않았다. 이렇게 멸치는 잡아오기만 하면 짧은 시간에 현금을 만질 수 있는 어종이었다. 그래서 노동력과 시간, 터가 필요한 멸치젓갈을 만들어서 판매하는 제전마을 주민은 없었다. 이것은 울산에서 멸치젓갈로 유명한 판지마을과 비교된다. 한종문은 멸치잡이 배를 운영하기 힘들어지자 다른 방법을 찾아본다. 이때 한종문에게 장어 통발을 알려준 사람이 있었다. 과거 마을회관 근처에는 경찰이 근무를 했었는데, 이곳에서 마을의 상황을 지켜본 한 경찰관이 장어를 잡아보라고 조언을 해줬다. 그 경찰은 다른 마을에서 통발로 작업하는 것을 보았는데 사람이 2명만 있으면 된다고 알려줬다. 그러면서 멸치보다 장어가 돈도 더 많이 벌 수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한종문은 무작정 장어 통발을 구입한다. 한종문은 처음에는 통발을 100개 구매하여 배에 싣고 작업을 했다. 100개로 시작한 통발은 900개, 1,000개까지 꾸준히 구매하여 배에 싣고 다녔다. 통발 작업을 하면서 한종문은 박숙자와 배를 타고 작업을 했다. 그는 다른 사람과 통발 작업을 하면 속도가 느려서 박숙자와 함께 배를 탈 수 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부부 라서 손발이 잘 맞아서 일을 수월하게 할 수 었었던 것이다. 하지만 박숙자는 배를 탄 적이 없어서 어업을 나가면 심하게 멀미를 하여 항상 멀미약을 먹어야 했다. 또한, 남편을 따라서 이른 새벽부터 작업을 한다고 몸도 마음도 매우 힘들었던 시기였다. 한종문과 박숙자는 여름에 장어를 잡으면 한번에 500kg 정도 잡은 적도 있었다. 부부가 새벽부터 잡아온 장어는 청계 아저씨라는 사람에게 팔았다. 그 당시 장어 가격은 1kg에 얼마씩, 무게를 달아서 가격을 책정했다. 부부가 통발로 장어를 잡으면서 마을주민들도 장어를 잡는 사람이 늘어났다. 장어 통발은 멸치잡이 배 선원의 1/3만 있으면 작업이 가능하여, 장어를 새로운 제전마을의 주 수입원으로 만들었다. 한종문·박숙자 부부가 처음부터 장어구이 장사를 했던 것은 아니다. 장어를 잡아서 판매만 하다가, 우연한 계기로 장어구이 장사를 시작하였다. 한종문·박숙자 부부는 장어를 잡으면 청계 아저씨에게 판매를 하고 소량의 장어만 직접 손질 하여 팔았다. 장어를 직접 판매를 할 적에는 손질한 장어를 3kg씩 얼려두었다가 팔았다.좋은 장어를 싼 가격에 구매할 수 있어서 찾아오는 손님들이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울산 호계에서 왔다는 손님이 장어를 구워 먹고 갈 수 있도록 마당과 숯불을 빌려 줄 수 있는지 물어봤다. 한종문은 대수롭지 않게 집 마당에 숯 불과 장어양념을 준비하여 주었다.이렇게 손님에게 해 준 것이 호계 지역에 소문이 났다. 소문을 듣고 호계 이장단, 호계 경로당에서 장어를 구워먹고 가고자하는 손님이 계속왔다. 시간이 갈수록 장어를 구워 먹고자 하는 손님이 늘어만 갔다. 한종문과 박숙자 부부가 직접 통발로 잡은 자연산 장어는 입소문을 타고 손님을 끌어 모았다. 이런 상황이 계속 이어지자 장어를 물차에 판매하는 것보다, 손님에게 직접 판매하는 수익이 더 커졌다. 장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도 아닌데, 손님이 줄어들지 않자 주변에서 차라리 장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라는 이야기를 한다. 그래서 허가도 없이 장사를 시작했다. 장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집 마당에 검은 천막을 치고 손님을 받았다. 한종문·박숙자 부부는 새벽에는 장어를 잡으러 나갔는데, 장어를 잡고 집에 돌아 오면 손님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부부는 손님이 많아서 가족과 이웃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큰아들, 큰며느리는 물론이고 이웃집 사람들에게도 부탁을 했다.이렇게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도 한총문과 박숙자는 아침밥을 먹을 시간이 없을정도로 바쁜 삶을 살았다. 새벽부터 장어를 잡기 위해서 배를 타고 나갔다 돌아오면 잠시 쉬어야 했지만, 손님들이 기다리니 하루 종일 쉬지 못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손님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니 밥을 못먹는 것은물론이고, 물 한잔 편하게 마시지 못했다. 그러므로 장어구이 양념을 만들어 둘 시간도 없어서, 주문이 들어오면 즉석에서 양념을 만들어서 손님들에게 주었다. 장어구이 장사는 봄에 시작하여 집 마당에 철근을 세우고 검은 막을 쳐서 손님을 받았다. 그리고 비가 와도 장사를 하고자 검은 막에 비닐을 덮어두었다. 그 런데 여름에는 집에서 더워서 장어를 구워먹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제전향에서 장사를 하기로 한다. ## 무허가 장어구이 장사의위기 제전마을이 장어구이 장사로 호황을 누릴 시기에 장사를 중단할 위기가 찾아 왔다. 포장마차에서 장사를 하던 시기에는 허가를 받아서 장사를 하지 않았기에 문제가 되었다. 무허가 장사가 문제가 되어 강동면에 행정고발이 들어갔다. 장어구이 장사가 잘되다 보니, 불법 장사를 한다고 누군가가 신고를 한 것이다. 강동면장은 신고가 접수되자, 제전마을에 와서 주민들에게 포장마차를 철거 하라고 이야기했다. 한종문은 포장마차를 철거 하는 날을 잊지 못한다. 강동면장 이 포장마차를 19일까지 철거하라고 지시를 했는데, 공교롭게도 19일은 토요일 이었다. 주말 장사는 하고 포장마차를 철거 하고자 했는데, 그 사이에 또 신고가 접수되었다.그래서 제전향에서 장어구이 장사를 하는 열 두 집이 모두 벌금을 냈다. 장어 구이 장사를 한 주민들은 50만원의 벌금을 내고 포장마차도 철거하게 된다. 포장 마차를 철거하면서 장사를 중단한 주민들이 있는 반면에, 자택에서 장사를 이어나가는 주민들도 있었다. 이종술(故),김용달(1933 년생),한종문, 박만복(1949넌생) 등 은 무허가 영업을 계속하면서 또다시 벌금으로 30-50 만원으로냈다. ## 장어구이장사허가 이종술, 한종문, 김용달, 박만복 등은 몇 번의 벌금을 내면서, 차라리 허가를 받아서 장사를 이어가고자 했다. 그런데 허가를 받고자 하니 갖추어야 하는 조건이 많았다. 영업을 하기 위한 중요한 조건은 정화조와 화장실을 설치하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종문과 박숙자 부부는 자택에 15인승 정화조를 묻고, 화장실을 급하게 설치했다. 정화조를 아래채 옆 골목길에 묻었는데, 정화조가 커서 공사 중에 아래채가 넘어갈까봐 겁이 날 정도였다. 부부는 정식으로 허가를 받은 후 상호명을 고민하였다. 상호명을 정하지 못 하고있을때 여러 손님들이 같은 의견을 주었다. 손님들은 한씨가 운영하는 장어 집이니 한씨 장어구이집이라고 하면 어떻겠냐고 했다. 손님들의 의견을 들은 한종문도 한씨가 흔한 성씨가 아니라서 상호명으로 사용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손님들이 말한 상호명에 원조를 추가하여 "원조한씨장어구이"라는상호명을 정식으로 사용하게 된다. 허가를 받아서 장어구이 장사를 하던 시기에 큰아들인 한진하가 부부의 일손을 도왔다. 한진하는 1-2년 정도 도와주다가 울산 시내로 나갔다. 그래서 바쁜 시간에만 사람을 구해서 영업을 했다. 2006년에 울산 시내에 거주하던 큰 아들이 제전마을로 돌아왔다. 큰아들 내외는 한종문과 박숙자 부부와 함께 거주하면서 장어구이 장사를 도왔다. 손님이 많으면 일하는 아주머니를 쓰기도 했지만 가족끼리 운영하고자 했다. 가족들은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역할을 맡아서 일을 했다. 한종문과 박숙자가 장어를 잡아오면 한종문은 장어 손질을 했다. 박숙자는 주방일을 책임지고 장어 구이 양념도 만들고 장어탕을 꿇였다. 박숙자가 직접 만든 양념은 돈을 받고 양념 비법을 팔라고 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인정을 받았다. 큰며느리인 김갑연은 박 숙자를 도와서 주방 일을 하였고 큰아들 한진하는 손질한 장어를 구워서 손님상에 올렸다. 그리고 한진하는 박숙자가 배를 탈 수 없을 경우에는 대신 장어를 잡으러 가기도했다. 부부는 장사를 하면서 KBS·UBC 등에 방송출연을 했다. 그 당시 제전마을에서 장어로 방송에 탄 집은‘원조 한씨 장어구이'밖에 없었다. 한 번은 전국적으로 방송이 되어 손님이 여러 지역에서 몰려왔다. 장어를 2-300kg씩 준비해도 2-3일이면 장어가 다 팔렸다. 하루에 많이 나갈 적에는 장어가 100kg가 넘게 판매가 되었다. 한종문과 박숙자는 현찰이 들어오는 재미에 장사를 계속 할 수 있었다. 영업 시간에는 손님들이 몰려와서 하루에 얼마를 벌었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박숙자 는 꼼꼼한 성격이라서 장사가 끝나면 장부에 적힌 내용과 실제 금액이 맞는지 확인작업을 했다. 한종문은 박숙자가 장사를 마무리하고 방에 들어와서 돈을 세다가 돈을 거머쥐고 그대로 쓰러져서 자는 경우를 종종 보았다고 말한다. 박숙자는 돈을 세면서 쪽잠을 자고, 놀라서 깨는 일을 반복하면서 계산을 마무리 했다.잠이 많이 오는날에는 지폐를 둘둘 말아서 보관을 하였다가 계산을 했다. 이렇게 한종문 가족은 돈을 계산하지 못할 정도로 바쁘게 생활하면서 벌었다. 그 당시에는 부부가 며칠 장사만하면 100만원을 모아서 은행에 입금할 정도로 장사가 잘 되었다. 손님이 꾸준히 있던“한씨 장어구이"는 처음 시작할 때처럼 우연한 계기로 장사를 중단한다. 한종문은 2010년 무렵에 장사를 중단한다.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한종문은 첫째 아들에게는 장어구이집을 맡기고, 둘째 아들에게는 배 운영을 맡기고자 했었다. 그래서 한종문과 박숙자는 큰아들 내외에게 장사를 물러줄려고 준비를 했다. 한종문의 뜻에 따라 큰아들 내외가 마을에 들어와서 약 5년 정도 일도 배우고 있었다. 그런데 집 근처 골목에서 공사를 하면서 장사를 잠시 쉬게 되었다. 한종문 집으로 들어오는 골목길에서 공사를 하니 손님들이 집으로 들어오는 길이 막혔다. 할 수 없이, 공사가 끝날 때 까지만 장사를 쉬기로 했으나 공사기간이 한 달에서 6개월로 늘어나면서 영업을 중단하였다. 한종문과 박숙자 부부는 장사를 갑작스럽게 접다보니 아쉬움이 컸다. 꾸준히 찾아오는 단골 손님들이 많은 상황에서 장사를 접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도 집 전화기로 전화를 하면 자동응답으로 장어 구이 안내 음성이 나온다. 오랜만에 연락하는 손님들은 아직 영업을 하는 줄 알고, 예약전화를 하곤 한다. 그럴 때마다 박숙자는 장사를 접었다고 이야기를 한다. 자동응답을 중단하면 되지만, 부부는 중단할 생각이 없다. 중단하는 법을 모르고, 바꾸는 방법도 귀찮다보니 자동응답 기능을 계속 사용할거라고 말한다. 부부는 장사를 그만 둘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장사에 필요한 물건들도 정리 하지 않았다.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집 안 내부에는 장사를 했던 흔적과 사용하던 그릇과 수족관 등이 남아있다. ![](/media//archive/photo/RD36S/service/RD36S_I465141.PNG)



-
현재 생업의 중심 : 밭농사

한종문은 약 1,600평의밭과 약 1,000평의 논을 가지고 있다. 논농사는 일손이 많이 필요하여 2016년부터 중단하고, 논 일부는 밭으로 변경했다. 마을 입구에 위치한 논은 흙을 채워서 밭으로 만들었다. 이 밭은 토질이 좋아서 작물이 잘 자란다. 밭 한켠에는 장어구이 장사를 할 때 사용하던 비닐하우스를 세웠다. 20 평 규모의 비닐하우스에는 배추, 옥수수, 고추 모종을 키우거나 농기구를 보관하는 용도로 사용한다. ## 1) 옥수수농사 제전마을에서는 옥수수를 많이 심는다. 옥수수는 씨앗을 그대로 심어도 되지만, 짐승에 의한 밭작물의 피해가 커지면서 모총을 키워서 심는 경우가 많다. 옥수수 씨앗은 각 개인이 구매하여 사용한다. 한종문은 약 200평 규모의 밭에 옥수수를 심는데, 옥수수 모종을 직접 키워서 사용하고 일부는 판매도 한다. 옥수수 씨앗은 50,000원을 주고 구매하면 모종 1,000개를 키울 수 있다. 한종문은 옥수수 모종을 한 모에 200-250원를 받고 판매했다. 한종문은 옥수수 모총을 심으면서 고들빼기 농사까지 생각을 했다. 그래서 다른 가정보다 옥수수 사이사이의 간격을 넓혀서 고들빼기가 자랄 수 있는 공간을 준비했다. 옥수수를 촘촘하게 심으면 고들빼기가 햇빛을 보지 못하고 생육에도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한종문과 박숙자는 7월 초부터 옥수수를 수확하여 7월 9일부터판매를 했다. 옥수수 판매기간은 2016년 7월 9-11일, 16-17일이었다. ## 2) 고들빼기농사 고들빼기 판매는 한종문 가정의 생업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 고들빼기는 판매량도 많고 판매 기간도 길기 때문에 전체 수입원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고들빼기는 4월말이 되면 꽃이 피고, 씨는 5월 중순에 모은다. 고들빼기 씨는 가벼워서 날아가기 쉽다. 그래서 일부러 고들빼기를 모두 수확하지 않기도 한다. 한종문·박숙자 부부는 말린 고들빼기 꽃을 천에 넣고 발로 밟아서 씨가 바람에 흩어지지 못하도록 모은다. 또는 박숙자가 고들빼기 꽃에서 씨앗만 채취하여 모은다. 이렇게 모은 고들빼기 씨앗은 옥수수 밭 사이사이에 아무렇게나 던지듯 뿌린다. 불완전한 간격으로 자란 고들빼기는 일정한 간격으로 다시 심어서 잘 자랄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 한종문은 고들빼기를 8월 21일에 첫 판매를 했다. 한종문은 2년째 거래 중인 울산 시내에 있는 고들빼기 판매상과 연락하여 수확할 날짜를 정했다. 고들빼기의 가격은 상인이 오면 알 수 있다. 판매 가격은 시기에 따라 다르지만 첫 판매에서는 한 단에 4,000원을 받고 팔았다. 날씨가 추워지고 김장철이 다가올수록 단가가 높아지며 최고 8,000 - 10,000원까지 오른다. ## 3)고추농사 한종문은 약 100평 규모에 고추를 심었다. 고추는 김장을 할 때 사용하기 위해서 반드시 심는다. 한종문 가족 모두가 먹을 만큼 김장을 하려면 고춧가루가 100근 정도 필요하다. 고추 씨앗은 한 봉지에 1,000피가 나오며 모종을 키워서 판매하면 한 피에 200 - 250원을받는다. 고추 모종을 키울 경우는 달팽이가 생기지 않도록 달팽이 관련 살충제를 뿌려 주는 등 관리가 필요하다. 고추는 설날 이전에 씨앗을 뿌려서 모종을 키워서 4월 말경에 밭에 옮겨 심는다. 제전마을은 고추를 심는시기와 미역 채취기간이 겹친다. 마을에서는 미역이 1 순위 생업활동이라서 고추모종을 심는날을 미리 정할 수 없다. 미역 채취와 건조 작업을 하지 못하는 날씨가 되어야 고추를 심을 수 있다. 그래서 제전마을에서 고추를 심기 좋은 날은 날씨는 맑은데, 파도가 치는 날이다. 이런 날은 해녀들이 미역을 채취하러 바다에 나갈 수 없기에 미역 작업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간혹 날이 계속 좋아서 고추 모종을 심는 시기가늦어지는 경우가 있지만 흔한 일은 아니다. 제전마을은 7월 중순부터 고추를 수확했으며, 한종문은 2016년 7월 24일 날 고추를 첫 수확을 하였다. 이후, 7월 27일 2차 수확을 하면서 동시에 농약을 쳤다. 3차 수확은 2차 수확이 끝나고 6-7일 이후에 이루어졌다. 고추 수확은 5-7일에 한 번씩 수확을 하는데, 고들빼기를 수확하기 이전에 고추 수확을 마무리 한다. 한종문과 박숙자는 일손이 부족하기에, 한번에 두가지 작물을 수확하지 않는다. 수확한 고추는 가족이 먹기 때문에 씻어서 말린다. 부분적으로 열병이 걸린 고추는 가위로 그 부분만 제거 후 갈아서 냉동고에 보관한다. ## 4) 배추농사 한종문은 배추 모종을 키우고 판매도 한다. 2016년 배추씨앗 값은 25,000원이었다. 배추모종은 8월 14일에 상토흙과 배추씨앗을 준비하여 가족들이 함께 작업을했다. 작업은 상토흙을 채운 모종판에 배추씨앗을 한알씩 넣고 흙으로 덮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배추모종판은 비닐하우스에 둔다. 배추모종이 잘 자라려면 모종판에 물을 충분히 줘야하는데 이것은 한종문이 맡아서 했다. 배추모종에는 하루 2번 물을 주는데 낮시간에는 물을 주지 않는다. 이렇게 3일 정도가 지나면 싹이나고, 17-20일 가량 키우면 모종을 판매할 수 있다. 배추는 일부만 판매를 하고 자가 소비한다. 올해는 배추모종 15판을 미리 예약을 받아, 한 판에 만원을 받고 판매를 했다. ![](/media//archive/photo/RD36S/service/RD36S_I465142.PNG)



한종문·박숙자 부부의 일상생활

부부의 하루일과

**부부의 일상적인 하루와 바쁜 하루** 한종문과 박숙자는 아침6시 즈음에 일어난다. 여름철에는 해가 일찍 떠서 아침부터 덥기 때문에 해가 뜨기 전에 밭일을 하기 위해서 조금 더 일찍 일어난다. 겨울철에는 날씨가 춥고 해가 늦게 뜨기 때문에 여름보다는 늦은시간에 일어난다. 6시에 일어나서 간단하게 세면을 한 후 밭으로 간다. 한종문은 아침에 일어나서 일기예보를 듣기 위해 핸드폰으로 '131'에 전화하여 그 날의 날씨를 확인한다. 131은 한국기상산업진흥원에서 제공하는 기상서비스로정식 명칭은 '131기상콜센터'로 전국 읍·면 단위의 상세한 기상정보를 실시간으로 제공한다. 지역번호를 누르고 131번을 누르면 해당지역의 기상예보를 들을 수 있다. 한종문은 기상예보가 아침 6시와 저넉 6시, 하루 두 번 바뀌기 때문에 그 시간에 맞춰 전화를 하여 일기예보를 듣는다. 울산의 지역번호인 052번을 누르고 131에 연결되면 5번을 눌러 주간날씨를 듣는다. 기상콜센터를 알기 전에는 기상청에 직접 전화하여 그 날의 날씨를 알아보곤 했다. 요즘도 기계에 녹음된 일기예 보도 듣지만 궁금한 것이 었으면 'O' 번을눌러 상담사 연결을 통해서 묻곤 한다. 이런 습관은 한종문이 배를 탈 때부터 있던 것으로 출항을 위해서는 바다의 날씨가 중요하기 때문에 일기예보를 항상 꿰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기상청에서 이야기하는 일기예보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은 아니며, 오랜 시간 터득해 온 자신만의 기상예측지식을 통해 큰 비가 올지, 바람이 어떻게 불고 파도가 어떻게 칠 지에 대해서 예상하기도 한다. 특히 바람이 부는방향으로 파도가 세게 칠지 잠잠할지에 대해 파악하고 강수량도 예상한다. 이런 습관은 배를 타지 않는 현재에도 남아있는데, 이는 농사일을 할 때도 요긴하게 쓰인다. 부부는 아침식사를 보통 7시 정도에 하지만 밭일이 많은 경우에는 일정하지 않으며, 9시에서 10시까지 일을 하고 돌아와 아침 식사를 하는 날도 있다. 또한 여름처럼 날씨가 더운 날에는 새벽부터 밭에 가서 일을 하고 햇볕이 강해지면 돌아와서 아침을 먹기 때문에 일정한 시간이 없다. 아침식사는 대부분 큰 며느리인 김갑연씨가 준비한다. 김갑연은 손이 빨라 동시에 몇 가지 반찬을 준비한다. 밥은 장어구이 장사를 할 때 쓰던 보온밥솥에 하는데, 한 번에 많은 양의 밥을 하여 스데인리스 밥그릇에 한 공기씩 담아두고 대용량 보온 밥솥에 보관해둔다. 대용량 보온 밥솥은 장어구이 장사를 위해서 구매한 것으로 장사를 하지 않는 지금도 요긴하게 쓰고 있다. 이렇게 해두면 먹을 때마다 밥을 떠서 데우지 않아도 되고 금방 지은 것처럼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김갑연은 10년 정도 한종문·박숙자와 함께 살면서 어느정도 시부모님의 식성을 파악하고 있다. # (1) 부부의 일상적인 하루 하루 일상을날짜별로 좀 더 세밀하게 살펴보도록 하자. **7월 27일** \| 고추밭에 농약을 치는 날이었다\. 여름이라 해가 뜨면 일하기 힘들어져서 해가 뜨기 전에 일을 시작한다\. 고추밭에 약을 치기 전에 미리 고추를 한 번 수확하고 약을 치는데\, 밭이 넓진 않지만 연세가 있는 노부부 둘이서 하려면 시간이 꽤 오래 걸린다\. 이 날은 4시 반쯤 일어나 해가 뜨기도 전인 5시 무렵에 밭으로 나갔다\. 고추를 1차적으로 수확하고 한종문이 약을 뿌리는 동안 박숙자는 수확한 고추를 물로 한 번 헹군다\. 헹군 고추는 밭 옆에 설치되어 있는 비닐하우스 안에 널어서 건조시킨다\. 해가 뜨고 날이 밝아오면 곧바로 더워지기 때문에 서둘러서 일을 마무리하고\, 7시 반 무렵 부부는 아침을 먹기 위해 집으로 향했다\. 김갑연은 아침식사로 팥밥과 성게알을 넣은 미역국\, 동태국\, 오이소박이\, 적양파\, 김치\, 깻잎지\, 대게를 준비했다\. 성게알 미역국과 동태국은 한종문이 즐겨 먹는 음식이다\. 자색양파는 생으로 먹는데\,노화방지\,면역력 향상등의 효과가 있어 자주먹는다\. 이런 음식에 관한 지식은 주로 며느리 김갑연이 알고식단에 반영한다\. 대게는 정자에서 어업 활동을 하는 작은 아들이 보내준 것을 얼려뒀다가 한종문이 먹고 싶다고 말하면 쩌서 먹는다\. **8월 4일** \| 박숙자는 정자에 있는 병원에 약을 처방받고 한종문은 강동 농협 종묘상에 고추밭에 칠 약을 사러 외출했다\. 박숙자는 당뇨가 있어서 정기적으로 정자에 있는 강동의원에 들려 진료를 받고 약을 처방받는다\. 이날 한종문은 박숙자가 진료를 받을 동안 기다렸다가 함께 종묘상에 들려 고추 약을 구입한 후 돌아왔다\. ![](/media//archive/photo/RD36S/service/RD36S_I465143.PNG) # (2) 바쁜 하루 한종문·박숙자 부부에게 바쁜 날은 밭일이 많은 날이다. 그래서 밭일이 많은 날은 전날부터 일에 대한 준비를 하고 계획을 세운다. 부부에게는 생업이 곧 일상이므로 조사자는 생업의 흐름에 따라 그들의 일상을 참여 관찰하였다. 부부는 옥수수를 재배하고 난 자리에 고들빼기를 심는다. 고들빼기는 재배하기는 쉬우나 수확할 때 까다로운 작물이기 때문에 손이 많이 가고 부지런해야 잘 키울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박숙자는 사람 손덕(德)을 본 채소가 잘 자라고 맛이 좋다고 이야기한다. 8월 중순 무렵부터 고들빼기를 판매하기 시작하는데, 판매가 시작되면 한종문·박숙자 부부는 매우 바빠진다. 2016년에는 8월 21일에 처음 고들빼기를 수확했다. 특히 고들빼기는 하루 전이나 당일에 수확하여 바로 판매를 해야 하므로 수확하는 날은 평소보다 일찍 밭으로 나간다. 8월과 9월까지는 날씨가 덥고 해가 일찍 뜨기 때문에 기상 시간이 평소보다 빨라진다. 조금이라도 더워지기 전에 일을 하는 것이 좋으므로 해가 뜨기 전에 어둑어둑할때 밭으로 간다. **8월 30일**\| 부부는 고들빼기를 캐기 위해 평소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일어나 새벽 5시 즈음에 밭으로 갔다\.이 날은 상인이 30\-35단을 주문했다\. 보통 한 단에 1\.2kg 정도인데\, 30단 이상을 캐려면 하루 종일 일을 해도 모자라다고 이야기 한다\. 해가 뜨기 전부터 고들빼기를 캐다가 해가 올라오고 더워지면 아침식사를 하러 집으로 가는데\, 대개 8\-9시 사이이다\. 어떤 날은 아침을 거르고 빵이랑 우유로 때우는 날도 있다\. 이 날은 아침 8시 반에 집으로 돌아가서 김갑연이 차려준 아침을 먹었다\. 처음에는 박숙자와 한종문이 밭에서 함께 고들빼기를 캐고 어느 정도 단을 묶을양이 되면\, 박숙자는 고들빼기를 손질하여 한 단씩 묶는 작업을 하고 한종문은 계속 캔다\. 고들빼기 손질하는 것을‘고들빼기깔린다’고 말하는데\, 이 작업이 중요하고 시간이 많이 걸린다\. 고들빼기를 깔려야 깔끔해 보이고 사람들이 잘 사가기 때문이다\. 손질은 부부가 함께 할 수 있지만 단으로 묶는 것은 박숙자가 풀리지 않게 단단하게 잘 묶기 때문에 주로 박숙자가 담당한다\. 점심시간은 따로 정해두지 않고 한종문이 배가 고프다고 느껴서 박숙자에게 점심을 먹자고 이야기하면 그때 먹는다\. 일이 많은 날에는 밭에서 라면을 끓여 먹거나 간단하게 먹기도 하고 근처 식당에서 배달을 시켜서 먹기도 한다\. 이 날은 정자에 있은 은하반점에서 콩국수 두 그릇을 시켜 밭에서 식사를 했다\. 식사를 한 후 그늘에서 잠깐 숨을 돌린뒤 다시 일을 시작했다\. 상인이 고들빼기를 가지러 오는 시간에 맞추기 위해서는 마음 편히 쉬지 못한다\. 고들빼기를 캔 후에 손으로 손질을 해서 단으로 묶은 다음 물을 받은 대야에 뿌리를 담가 둔다\. 고들빼기 뿌리를 물에 담가 두는 이유도 뿌리에 묻은 흙이 잘 빠져서 깔끔한 상태로 판매하기 위해서이다\. 또한 고들빼기는 캐서 햇볕에 두거나 뿌리가 마르면 금방 시들기 때문에 상 인이 오기 전까지 신선한 상태로 보관하기 위한 이유도 있다\. 이런것을 통해서 박숙자의 꼼꼼하고 깔끔한 성격을 엿볼 수 있다\. 고들빼기 상인은 울산 시내에서 오는데 제전마을뿐만 아니라 인근 마을에서도 고들빼기나 농작물을 사간다\. 그래서 도착하기 한 두 시간 전에 전화로 몇 시에 물건을 가지러 온다고 알려준다\. 이 날은 4시 즈음에 인근의 복성마을에서 오고 있다는 연락을 받은 후 미리 손질해둔 고들빼기와 밭에서 당일에 수확한 것을 합쳐 두었다. 4시 30분에 상인이 트럭을 타고 와서 28단 정도를 한 단에 4,500원에 판매했다. 고들빼기 하루 판매량은 매일 다르지만 대개 20-30단 사이를 수확하여 판매한다. 고들빼기 판매는 하루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연속으로 판매하는 날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주문량에 맞춰 판매를 하고 난 후에도 내일 주문량을 맞추기 위해 고들빼기를 캔다. 이 날도 부부는 다음날 판매할 고들빼기를 캐기 위해 해가 질 때까지 계속 일을하다가 7시가 넘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media//archive/photo/RD36S/service/RD36S_I465144.PNG)



한종문·박숙자 가족의 가옥 이야기

사진과 구술로 본 초기 가옥형태

큰채와 아래채의 현재 주소는 울산광역시 북구 재전2길 16-8이며, 과거 주소는 북구 구유동 95번지이다. 집터는 한종문의 아버지 한재득이 결혼을 하면서 구매하여 밭이었던 공간을 다져서 집을 지었는데, 면적이 900평 정도였다고 한다. 큰채는 한종문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고, 아래채는 한종문이 7살 되던 해인 1945년에 지었다. 한종문의 집은 초기 초가집 시기와 새마을운동 이후 신축과 개축을 하고, 1990년대에 큰채를 한 번 더 수리한 후 2016년에 큰채, 아래채 지붕을 공사했다. 초기 초가집의 형태는 남아있는 사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media//archive/photo/RD36S/service/RD36S_I465145.PNG)



-
가옥의 변화

한종문·박숙자부부의 가옥은 크게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한종문의 아버지가 터를 사고 집을 지은 시기를 제1기로 보고, 이때를 정착기라고 할 수 있다. 그 이후 한종문과 박숙자가 결혼하여 부모님을 모시고 살면서 새마을운동 이후부터 집을 신축하고 개축한 시기를 변화기로 볼 수 있다. 한종문 부부의 가옥은 여러 차례 개·보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렀다. 제2기는 가옥이 계속 변화하는 시기인데, 농어촌의 가옥이 대부분 변화를 겪은 새마을운동 시기부터이다. 새마을운동은 한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1970년대부터 시작되어서 농어촌을 중심으로 정부 주도 아래 여러 개발 사업이 진행되었다. 새마을운동으로 농·어촌에서 가장 눈에 띄게 나타난 변화는 마을가 꾸기 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된‘농촌주택개량사업’이었다. 제전마을도 다른 농·어 촌과 마찬가지로 이 시기에 많은 가옥이 정부의 보조를 받아 개·보수 공사를 진행하였다. 주택개량을 시행하면서 초가집이 슬레이트 지붕이나 기와지붕으로 바 뀌었는데, 제전마을은 새마을운동 때 강동면에서 초가집이 가장 먼저 없어진 마을이댜 한종문·박숙자 부부의 가옥도 이 시기에 초가집이었던 큰채와 아래채를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꿨다. 새마을운동 초기에는 주택의 일부만 개량하는 방향이었지만 후반으로 가면서 주택 구조 자체를 바꾸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한종문 가옥도 슬레이트 지붕을 얹고, 10년 정도 후인 1980년대 즈음에 정부에서 새마을주택 융자를 받아서 큰채와 아래채를 수리했다. 큰채는 당시 지은 시기가 70년 가까이 되었고, 기둥도 가공목재가 아닌 자연목을 사용하여 다시 지으면 안될 정도로 집이 많이 기울었었다. 그래서 큰채는 허물고 새로 짓게 되었다. 큰채는 시멘트모르 타르를 안쪽에 사용하고 가옥 겉면을 적벽돌로 쌓아 올린 조적조 형태이다. 아래 채는 지은 지 30년 정도 밖에 되지 않아 새로 지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기둥도 처음에 지을 때 가공목재를 사용해 올곧고 튼튼해서 그대로 남겨둔 채 외벽만 흙에서 시멘트로 바꿨다. 새로 짓지는 않았지만 내부 공간의 변화가 있었는데, 외양간을 없애고 방으로 만들면서 원래 있던 방의 벽을 허물어서 하나의 방으로 만들었다. 방을 하나로 만든 흔적은 아래채의 큰방에서 찾을 수 있는데, 방을 나눴던 기둥이 남아있다. 이처럼 제전마을에서는 초가집이었던 곳에 지붕만 슬레이트로 얹는 경우도 었었고, 한종문 가옥처럼 주택융자를 받아 집을 신축한 경우도 많았다. 한종문은 이때 빌린 새마을주택 융자금을 갚는데 10년이 걸렸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돈을 빌릴 때 융자금 상환 방식이 10년 분할 상환이었으므로 돈이 있어도 한 번에 갚을 수 없었고, 10년에 걸쳐 갚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돈이 있어도 갚을 수 없었기 때문에 한종문은 10년이라는 기간이 부담스러웠다고 말한다.



-
장어구이 장사와 그 이후의 공간변화

한종문은 오랜 세월 다양한 어업에 종사했는데, 장어구이 장사를 하기에 앞서 장어잡이를 먼저 시작했다. 과거 제전마을은 장어가 잘 잡혀서 장어를 잡아서 수협에 입찰을 보거나 활어차에 직접 판매할 때도 수입이 좋았다고 한다. 한종문도 여러 종류의 생선을 잡았지만 장어잡이를 오래도록 했다. 장어를 잡기 시작하 면서 재전2길 16-5 에 위치해 있던 헛간은 창고로 변하게 되었다. 창고는 손재주가 좋은 한종문이 직접 만들었는데, 흙벽을 허물고 콘크리트 블럭을 쌓아 외벽을 만들었다. 장어잡이가 잘 되자 장어를 잡을 때 사용할 많은 양의 미끼를 보관할 장소가 필요했다. 그래서 헛간을 허물고 창고를 만들어 미끼와 생선 등을 보관할 수 있는 업소용 냉동고를 구매해 넣었다. 이 시기가1990년도 무렵이다. 집에서 본격적으로 장어구이 장사를 시작하면서 원래 헛간과 재래식 화장실이었던 공간이 많은 변화를 겪게 된다. 헛간은 창고로 용도가 변경되면서 콘크리트 건물로 변화하였다. 그리고 창고에 냉동고와 잡아 온 장어를 신선하게 보관할 수 있는 수족관과 장어 손질을 하기 위한 선반, 대형 도마를 설치하게 되면서, 창 고는 장어구이 장사에서 반드시 필요한 공간으로 변하였다. 그래서 장사를 하는 동안 장어손질은 이곳에서 하게 되었고, 현재도 이 공간은 생선이나 고기 등을 손질하거나 부엌에서 할 수 없는 일들을 할때 이용하고 있다. 주거공간으로 사용했던 아래채와 마당이 장사를 시작하면서 생업공간으로 바뀌었고, 장사를 그만 둔지 오래되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도 집안 곳곳에 흔적이 남아있다. 특히 마당에 깔았던 평상과 세워뒀던 기둥은 아직도 남아있고 현재도 쓰이고 있다. 평상은 한종문의 밭의 비닐하우스 안에 깔아두고 고추, 깨, 벼 등의 작물을 널어놓고 말릴 때 쓰인다. 또한 마당에도 비닐하우스가 있는데, 평상 6개 정도를 비닐하우스를 받치는 용도로 쓰고 있다. 기둥은 현재도 천막을 묶어서 다른 기둥과 연결할 때 사용한다. 뿐만 아니라 장사를 위해 만들었던 수족관 공간은 아직도 수도가 연결되어 있어서 밭에서 수확한 옥수수, 고들빼기 등을 손질하거나 배를 타는 작은 아들이 보내준 생선, 해산물 등을 손질할 때 이용되고 있다. 공간을 많이 차지하는 일이나 큰채에 있는 부엌에서 하기 힘든 일을 대부분 여기서 처리한다. 또한 한종문·박숙자 집은 김장을 할 때 배추를 바닷물에 절인다. 바닷물을 직접 떠와서 하는 것이 아니라 수족관으로 바닷물이 바로 올라오게 연결되어 있으므로 이 공간에서 배추를 손질하고 질이는 작업을 한다. 손님방으로 사용되었던 아래채는 가운데 커튼을 쳐서 방 2칸으로 사용중이다. 방 2칸중 큰방은 큰아들 부부가 침실로 사용하고 있으며, 건넌방은 쓰지 않는 물건을 보관하거나 보일러를 틀어 고추를 말리거나 말린 고추나 미역을 보관하는 창고와 같은 공간으로 사용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