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도리는 제주도 동북쪽에 위치한 마을로서, 행정구역상으로는 북제주군 구좌읍에 속해 있다. 또한 거리로는 제주시의 중심부에서 동쪽으로 약 36㎞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자동차로는 50여 분 정도가 소요되는 거리에 있다. 하도리의 서쪽에는 같은 구좌읍 내의 세화리와 상도리가, 남쪽에는 종달리가 자리잡고 있으며 동북쪽은 바다에 면하고 있다. 하도리는 주변에 전술한 3개의 마을로 둘러싸여 있어서 마을공동목장 지구를 제외하면, 공간적인 범위가 완전히 해안지역에 치우쳐 있는 것이 큰 특징이다. 따라서 세화리나 상도리 및 종달리가 중산간 지역 쪽으로 길게 공간적인 범위를 확보하고 있는데 반하여 하도리는 12번 국도인 해안일주도로에서 해안방면으로 치우쳐 있는 관계로 인해, 마을의 전체적인 형태는 밤(栗) 모양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하도리의 공동목장지구는 중산간 지역이라 할 수 있는 송당리와 종달리 지경에 위치해 있다. 하도리를 연결하는 주요 도로는 마을의 북서쪽에서 남서쪽으로 가로지르는 12번 국도가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으며, 이를 축으로 하여 마을내부와 주변마을인 세화리, 상도리 및 종달리 방향으로 군도가 연결되어 있다. 1990년대 초에 건설된 해안도로(91번 군도)도 하도리를 사이에 두고 세화와 종달리 시흥리 및 성산리까지 연결되는 도로로서 관광도로로서의 기능뿐만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도 중요한 몫을 담당하고 있다. 서단은 하도리의 또다른 자연마을인 면수동과 이웃 마을인 세화리가 접하는 지점으로, 바닷가와 육지가 부분적으로 연결되는 곳이기도 하다. 따라서 육지 쪽에는 하도리의 면수동과 세화리의 자연마을인 통항동에 속하는 가옥들이 도로를 따라 양쪽으로 들어서 있다. 두 마을의 경계선 부근은 특별한 표석이 세워지거나 표식이 돼있는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마을과 마을을 연결하는 군도를 기준으로 식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남단은 종달리로 연결되는 지방도인 93번 군도의 한 지점으로 볼 수 있다. 특히 93번 지방도는 하도리 마을 쪽으로 연결되는 12번 국도와는 별도로 건설된 도로인데, 하도리의 남단은 이들 두 도로가 종달리 마을 지경에서 분기(分岐)되어 얼마 되지 않은 지점이라 할 수 있다. 남단 주변에는 주로 경작지(밭)와 갈대밭이 분포하는 상황을 보이는데, 지형도 상에서는 일부 지구가 풀밭과 논이 점유하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러나 여기서의 풀밭은 갈대밭이며, 또한 논의 경우는 그 기능이 끝난지 오래된 상태이다. 북단은 서동의 해안가에 해당된다. 이 지점은 빌레성 용암류가 넓게 깔려 있는 곳으로 바다 쪽으로 돌출해 있다. 그리고 이 지점의 해발고도는 1m 미만이다. 연안 가까이에는 하도리 소라양식장이 자리잡고 있고, 주변 해저에는 속칭 ‘벌러진여’, ‘소여’ 및 ‘빌렛개(돌살)’ 등이 위치하고 있다.
하도리가 자리잡고 있는 주변지역은 비교적 저평한 평지가 전개되는 해안지역의 특성을 보인다. 따라서 하도리의 공간적인 범위도 해발고도 40m 이하의 평지가 주로 펼쳐지고 있기 때문에, 주민들이 일상생활과 경제활동을 영위하는 데는 상당히 유리한 조건이 되고 있다. 특히 하도리의 가옥들이 밀집되어 있는 7개 자연마을의 공간적인 범위는 해발고도 20m 이하의 매우 낮고 평평한 지형적 특성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지형적 특징은 하도리 내에 분포하는 많은 ‘들’ 지명을 통해서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즉, 마을을 중심으로 하여 ‘들’ 지명의 분포를 보면 ‘중퉁 굴들’, ‘코지들’, ‘남문들’, ‘각시당들’, ‘가문진들’, ‘광수물들’ 등이 바로 그것이다. 제주도의 ‘들’ 지명은 비교적 넓고 평평한 지역에서 농경지가 펼쳐지는 지구에 흔히 사용되는 지명이다. 하도리에는 제주도 내에서 흔히 관찰할 수 있는 ‘오름(기생화산)’이나 ‘건천’은 단 한개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은 하도리가 지형적인 큰 변화 없이 매우 단조로운 형태를 보여주고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하도리 내에서도 고지라 할 수 있는 지점들은 속칭 ‘개왓동산’, ‘거욱대동산’, ‘망동산’, ‘ 남동산’, ‘큰동산’, ‘앞동산’, ‘생이동산’, ‘답단동산’, ‘넙은드리동산’ 등과 같이 주변 보다 상대적으로 다소 높은 언덕뿐이다. 이들 지점은 대부분 해발 20-40m 사이의 높이를 보이면서 용도면에서는 임야나 공한지 또는 도로가 관통하는 장소(지구)로 활용되고 있다. 하도리 내에서도 유난히 눈에 띄는 지형은 해안지형이라 할 수 있다. 하도리의 해안선은 크게 타원을 그리는듯한 형태로 길게 이어지는 것이 큰 특징이다. 하도리 해안에도 제주도 내의 여느 해안과 같이 엄청난 양의 용암이 흘러들어가 토끼섬과 반대섬을 비롯하여 수많은 암초와 여(礖) 등을 만들었다. 이러한 독특한 연안지형은 한편에서는 어로활동에 방해요소가 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패류와 해조류 등 많은 해산물의 번식을 가져올 수 있는 유익한 환경을 제공하고 있다. 하도리 해안지형에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사실은 동동–창흥동 해안에 펼쳐지는 하도 해수욕장과 그 배후의 사구층(sand dune)이다. 마을에서 속칭 ‘진모살(길게 형성된 모래를 의미)’로 불리며 해수욕장으로 활용되고 있는 백사장은 길이가 약 500여 m에 이르며, 그 배후로 소규모의 구릉 형태로 사구층이 형성되어 있다. 특히 사구층은 속칭 ‘웽이루동산’이라 불리며 바다 쪽으로 길게 빠져나온 구간에 가장 두껍게 형성돼 있는 특성을 보인다. 사구층 아래에는 사구가 형성되기 전에 흘러들어 온 용암류(현무암 암반층)가 깔려 있으며, 사구층 위로는 순비기나무, 가시나무, 인동초, 찔레, 엉겅퀴, 띠 등 초목성 식물들에 의해 뒤덮여 있는데, 이들은 사구층의 형태를 고정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제주도의 토양은 보통 토색(soil color)에 의해 암갈색토, 농암갈색토, 흑색토 및 갈색삼림토로 구분하고 있는데, 이 중에서도 암갈색토는 비화산회토 나머지 3개의 토양은 화산회토로 구분하고 있다. 흔히 제주도에서는 전자를 ‘관땅’, 후자를 ‘뜬땅’이라 하여 구분하고 있는데, 농업생산력에 있어서는 암갈색토가 훨씬 높게 나타난다. 하도리를 비롯한 중산간 지대와 남부지역의 해안지대 그리고 동부지역의 일부 해안지대에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농암갈색토는 일반적으로 용암류 대지 위를 덮는 형태로 분포하며, 배수는 양호한 편이고 표토는 자갈이나 바위가 있는 미사질식양토로서 기반암은 현무암 암반층이다. 하도리에 분포하는 농암갈색토는 특히 하위단위로 구분하는 경우 구좌통과 가파통의 토양이 많이 분포한다고 할 수 있다. 하도리의 토양특성을 좀더 구체적으로 검토해보기로 하자. 하도리 농경지는 주로 밭과 초지·임지로 이용되고 있는데, 그 면적은 밭이 493.5㏊(73.9%), 초지 및 임지가 174.0㏊(26.1%)로 확인된다. 아울러 밭의 토양등급을 살펴보면, 1급지가 13.6㏊(3.1%), 2급지가 88.2㏊(20.3%), 3급 지가 300.2㏊(69.2%), 4급지가 32.1㏊(7.4%)로 나타난다. 이렇게 볼 때, 하도리의 밭은 3급지가 압도적으로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따라서 밭에서의 농업 생산력은 비교적 낮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최근 밭에서 생산하는 농작물은 당근, 감자, 무가 많은 것으로 파악된다. 더불어 제주도 농경지의 경우는 대개 표토의 자갈 함유량이 문제시되는데, 하도리의 사례(밭과 초지·임지)를 보면 자갈이 없는 면적이 480.4㏊(72.0%), 자갈이 있는 면적이 40.4㏊(6.0%), 바위로 덮여 있는 면적이 146.7㏊(22%)로 나타난다. 또 배수등급에서는 매우 양호가 224.7㏊ (33.7%), 양호가 442.8㏊(66.3%)로 확인된다. 하도리의 식생은 주변 마을과 비교할 때, 큰 특징을 찾아볼 수 없는 상황이다. 그 이유는 하도리가 해안지역에 치우쳐서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지구가 농경지를 비롯한 생활공간으로 개발돼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해안지역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식생이 주가 된다고 말할 수 있다. 하도리의 식생실태는 마을 내 임야나 해안도로 변에서 살펴볼 수 있다. 하도리의 임야는 대략 150㏊ 정도인데, 임야가 위치하는 곳은 대개가 낮은 구릉지를 이루고 있으며 수종은 주로 소나무가 우세를 보인다. 그리고 마을내 주택가에서는 정자로 이용되는 팽나무가 주를 이루고 있으며, 마을내의 ‘싯커리(삼거리)’나 ‘넷커리(사거리)’에 1-2개 정도로 심어져 있는 경우가 많다. 해안도로변의 식생특징은 특히 꽝꽝나무 군락에서 찾을 수 있다. 이 꽝꽝나무는 제주도 내의 여러 곳에 자생하는 식물로서, 중산간 지역의 오름이나 해안가 가까이에서도 잘 자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제주도 내의 해안도로변에서 자생하는 꽝꽝나무 군락은 바람의 영향으로 인하여 가지와 줄기가 한 쪽 방향으로 쏠려 있는 것이 큰 특징이다. 하도리 내의 꽝꽝나무 군락은 수고가 대략 1.2-1.5m 정도로서, 거의 예외 없이 서쪽이나 남서쪽 방향으로 기울어져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하도리의 용천수 실태는 어떠할까. 과거 제주도에서는 한 마을내의 용천수(주로 해안마을)나 봉천수(주로 중산간 마을)의 존재여부가 매우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시점은 마을마다 공동수도가 설치되기 이전인 1970년대 이전을 말한다. 해안마을에서의 용천수는 인구수에 따른 마을의 크기를 결정지을 정도로 중요한 요인이었으며, 근본적으로 제주도의 마을들이 해안지역을 따라 환상으로 분포하는 배경도 생활용수인 물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제주도민들에게는 용천수가 생명수나 다름없었다. 따라서 하도리 용천수의 실태를 검토하는 것은 과거 하도리의 성립기반과 발전기틀을 이해하는데 크게 도움이 된다. 하도리 내의 용천수는 17개소에 이르고 있으며 이로 볼 때 하도리는 상당히 물이 풍부한 마을이라 평가할 수 있다. 용천수의 위치를 자연마을 단위로 보면 면수동이 6개소, 서문동이 3개소, 창흥동이 7개소 그리고 굴동이 1개소로 확인된다. 하도리에는 용천수가 많이 존재하지만 생활용수로 사용했던 용천수는 들렁물, 알찍물(말찍물), 펄개물(웃물), 펄개물(알물), 서느렁물 등 일부에 그치고 있다. 특히 하도리는 공동수도가 들어오기 직전까지는 해안가의 용천수보다도 마을 내에 인위적으로 만든 ‘두레박물(두레박으로 뜨는 물이라는 의미)’을 생활용수로 사용해왔다. 다시 말해 자연마을 별로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1930년대 초부터 1960년대 말까지는 속칭 ‘두레박물통’을 1개씩 만들어 지하수를 식수로 사용했던 것이다. 이처럼 자연마을마다 두레박물통을 설치한 이유는, 많은 용천수들이 해수와 섞이면서 용출하는 관계로 식수로 사용할 수가 없었으며, 또한 일부 사용이 가능한 용천수도 거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서 많은 여성들이 불편을 느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에서 지적한 5-6개의 용천수 외에는 여름철에 바다로 나갔을 때나 아니면, 바닷가 근처에서 여러 가지 작업을 할 때에 제한적으로 활용하였다. 그러나 하도리의 용천수도 시대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활용도는 더 높을 수밖에 없었다.
하도리에서 가까운 성산포에는 성산포관측소가 자리잡고 있다. 성산포는 행정구역상 서귀포시 (구, 남제주군)에 속하지만, 하도리와는 거리적으로 가깝기 때문에 제주나 다른 지역의 기후·기상자료보다도 성산포관측소의 것을 활용하는 것이 오히려 효율적이라 할 수 있다. 우선 주요 기후요소 별로 성산포의 기후특성을 검토해 보면 기온 15.2℃, 강수량 1,840.9㎜, 상대습도 75.2%, 일조시간 2,146.2(h), 풍속은 3.1㎧로 나타난다. 서부지역과의 비교를 위하여 고산기상대에서 관측한 자료를 살펴보면, 기온 15.5℃, 강수량 1,094.7㎜, 상대습도 76.5%, 일조시간 2,054.3(h), 풍속은 6.9㎧로 나타난다. 서로 비교해 보면, 강수량에서 성산포가 746㎜ 정도가 많고, 풍속에서는 고산이 3.8㎧ 높게 나타난다. 이로 볼 때, 제주도의 서부와 동부지역 사이에는 강수량과 풍속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하도리가 속해 있는 동부지역이 서부지역에 비하여 훨씬 비는 많이 내리고 바람은 아주 약하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은 최근 몇 년 간에 걸친 수해의 피해에서도 특징적으로 잘 나타난다. 동부지역에서는 최근 4-5년 간 여름철 많은 강수량으로 인하여 농경지와 가옥의 침수피해를 입은 농가가 상당히 많았으며, 서부지역에서는 오히려 가뭄에 의한 피해가 다발하는 현상이 나타나곤 하였다.
하도리가 정확히 언제 형성되었는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현재의 하도리를 가리키는 마을 이름이 여러 고문헌과 고지도에 나타나는 것으로 볼 때, 적어도 조선시대 중기에는 어느 정도 마을의 형태를 갖추어져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물론, 그 당시 마을규모(범위)나 인구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구전이나 일부 가계의 족보에 의존하면, 하도리에는 약 1,000여 년전 또는 700여 년전에 제주 부씨, 제주 고씨 및 양천 허씨가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이들 성씨가 자리를 잡은 중심 터는 각각 서동, 동동 및 굴동으로 알려지고 있다. 오늘날 하도리는 리사무소가 위치하는 굴동을 비롯하여 동동, 서동, 신동, 서문동, 면수동 및 창흥동 등 7개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으며, 마을 사람들은 7개의 자연마을 중에서도 굴동이 가장 근본을 이루는 본 마을로 인식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오늘날의 지형도(1:5,000)를 보면, 굴동과 동동을 이루는 공간적인 범위 안에 가장 많은 가옥이 밀집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배경을 근거로 생각하면, 하도리 안에서도 최초의 마을형성은 굴동과 동동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을 가능성을 신중히 고려해 볼 수 있다. 1702년에 작성된 『탐라순력도』에는 하도리(지도상에는 하도의, 하도의탄리로 표기) 내의 가옥들 이 포구(지도상에는 ‘별방포’로 표기) 주변보다는 별방진의 서문과 남문 주변, 용항포(현, 창흥동 철새도래지) 부근에 밀집되어 나타난다. 그러나 『탐라순력도』가 회화성 고지도이기 때문에, 여기서의 가옥분포를 바탕으로 오늘날의 자연마을별 가옥의 밀집도나 규모를 파악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뒤따른다. 한편 설촌 당시부터 도의여 또는 알도의여로 불려오던 하도리에는 1510년에 별방진이 들어서면서, 별방(고어로는 ‘벨방’)이란 표기가 하도리의 개[浦口]나 자연마을 명으로도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8세기 중반 경까지는 마을 이름 외에 하도리와 관련된 특별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이윽고 1780년대에 이르면, 『제주읍지(방리, 좌면)』에 “알도의여을은 제주 동쪽 80리의 거리에 있다. 민호는 88호, 남자는 396명, 여자는 424명이다.”라는 기록이 나타난다. 따라서 18세기 말경에는 하도리의 인구가 820명에 이를 정도로 인구집중 현상이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820명의 인구는 당시 제주목 좌면에 속해 있던 19개의 마을 중 김녕리(1,248명), 신촌리(1,082명), 조천리(1,027명), 평대리(843명) 및 세화리(825명)에 이어 6위에 랭크될 정도로 큰 규모라 할 수 있다. 결국, 18세기 말경에 하도리는 제주도 내에서도 규모가 큰 마을로 성장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아울러, 오늘날 하도리에는 약 34개의 성씨를 가진 동족들이 거주하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34개의 성씨들 중에서는 특히 고씨, 부씨, 오씨, 김씨, 송씨, 강씨, 박씨, 정씨, 이씨, 조씨, 홍씨, 한씨 등이 많은 세대를 점유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특정 성씨가 어느 특정 자연마을에 많이 거주한다는 배경은 어느 시점에서든 하도리가 하나의 마을로 형성·발전하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다시 말하면 특정 성씨의 선조가 한 자연마을에 뿌리를 내리고, 그 이후 그들 자손이 증가하는 과정에서 하도리는 보다 명료한 형태로 마을의 틀이 갖추어졌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구좌읍 동부 해안지역에 위치하고 있는 하도리는 인구수와 세대(가구)수의 변화에 있어서, 오늘날 한국 농어촌 지역의 실상을 반영하듯 점진적인 감소를 보이고 있다. 구좌읍 소속 12개 마을 중에서 2005년 12월 현재 가장 인구가 많은 마을은 김녕리이다. 이어서 하도리, 세화리, 평대리, 한동리, 종달리 순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구좌읍의 읍사무소 소재지이며, 읍내 유일하게 고등학교(세화고등학교)가 입지해 있는 세화리보다도 김녕리나 하도리의 인구가 많다는 점이다. 그 이유를 정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유사한 성격을 지닌 농어촌지역의 인구분포에서는 다소 의아심을 갖게 한다. 하도리의 세대수(가구수)는 2005년 12월 현재 850세대를 보인다. 이는 같은 해 북제주군 총 세 대수인 36,886세대의 2.3%, 또 구좌읍 총 세대수인 6,043세대의 14.1%를 차지한다. 세대수의 변화를 보면, 1992년 743세대(2,632명) → 1994년 775세대(2,598명) → 1996년 758세대(2,459명) → 1999년 759세대(2,328명) → 2005년 850세대(2,148명)로 나타나, 세대수의 변화에서는 증감이 교차되는 파도형 굴곡을 보이고 있다. 세대당 가족수도 1992년 3.5명에서 2005년 2.5명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감소했다. 이를 보더라도, 제주도의 농어촌지역 역시 이전에 비해 인구감소가 한층 진전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도리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뒷받침하는 도로는 크게 국도와 군도 그리고 기타 도로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일상생활 속에서 가장 중요한 국도는 12번 해안일주도로를 들 수 있으며, 또 다소 떨어져 있기는 하나 16번 국도인 중산간 도로도 많이 사용하는 편이다. 특히 중산간 지역에서 농·목축업 활동과 관련해서는 시·군도와 더불어 16번 국도의 활용도가 높아진다. 그러나 대개 주민들이 주변지역에서의 여러 활동이나 다른 지역으로의 이동에 있어서는 12번 국도를 주로 활용한다. 특히 12번 국도의 활용은 제주시 방면이나 성산포 및 표선 등 주변지역과의 생활교류, 통근·통학 등에서 많이 활용한다. 12번 국도를 중심으로 하도리를 연결하는 대중교통 편은 20-25분마다 1번씩 다니는 시외버스가 있다. 다시 말해, 제주시와 성산포(또는 서귀포)의 양방면에서 시간대마다 2-3회 오가는 상황이기 때문에, 마을주민들에게 그렇게 불편한 상황은 아니다. 하도리를 지나는 12번 국도는 1993년까지도 왕복 2차선으로 건설돼 있었으나, 자동차와 관광객의 증가로 인하여 이후 왕복 4차선으로 확장되었다. 하도리를 연결하는 군도는 세화리-종달리 구간의 해안을 연결하는 91번 해안도로를 비롯하여 93번, 44번, 95번 그리고 46번 도로가 있다. 군도 중에서도 44번, 46번, 91번, 95번 군도가 하도리 주민들이 실생활에서 가장 많이 활용하는 도로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이들 4개의 군도를 중심으로 다시 여러 자연마을을 연결하는 작은 도로와 마을 주변의 농경지로 연결되는 농로 등이 괴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도리 주민들의 교통편은 제주시–성산포(또는 서귀포) 구간을 정기적으로 연결하는 시외버스가 있으나, 시외버스 외에도 많은 주민들은 자신들이 소유하는 자가용에 의존하고 있다. 하도리 주민들의 자가용 소유율도 상당히 높다고 마을이장을 비롯한 몇몇 사람들의 인터뷰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으나, 실제로 전 세대의 자가용 소유실태를 파악할 수 없었다. 그러나 비교적 젊은층 부부세대의 경우에는 대부분 자가용을 소유하고 있고, 농가의 경우에도 작업용 트럭과 승용차를 가지고 있는 사례도 많은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대중교통이라 할 수 있는 시외버스는 노년층과 일부 청소년들이 주로 사용하는 상황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간혹 60-70대 중·후반까지의 노년층 농가 주인들은 농작업에 사용하는 경운기(동력)를 세화리의 오일시장이나 친인척 집 방문 등 비교적 근거리의 나들이에 활용하기도 한다.
하도리의 경제활동은 크게 소매업, 음식·숙박업, 농·어업 및 목축업으로 구분할 수 있다. 하도리의 소매업은 작은 개인 상점(잡화점)이나 가게를 갖고 경영하는 정도이며, 수적으로도 그리 많지 않다. 개인 상점은 자연마을 단위로 1개소 정도에도 못 미치는 상황이다. 하도리의 개인이 운영하는 잡화점이나 사업체의 분포를 살펴보면(2006년 9월 현재), 잡화점의 경우는 굴동에 1개소, 신동에 2개소, 동동에 1개소가 있으며, 개인 사업체의 경우는 굴동에 종묘사 1개소 및 카센터 1개소, 신동에 이발소 1개소, 그리고 동동에는 단란주점 1개소가 있다. 특히, 농어촌 지역주민들의 생활에 아주 긴요한 개인 잡화점은 198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자연 마을별로 2-3개씩 정도 있었다고 한다. 농업부문에서는 밭농사가 주를 이루는데, 그 중에서도 당근과 감자를 비롯하여 콩, 마늘, 무, 땅콩, 깨 재배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일부 농가에서는 맥주맥, 벼, 고구마, 쪽파, 유채, 더덕 및 감귤도 재배하고 있다. 전체적으로는 농가마다 당근과 감자재배에 크게 몰두하는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특히 당근은 하도리 뿐만 아니라 같은 구좌읍내의 평대리, 세화리, 종달리 및 상도리 등지에서도 많은 양을 재배하고 있어서 제주도내에서는 이미 집단화된 대규모 산지로 인식되고 있다. 하도리 주민들의 당근재배는 약 3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많은 농가가 참여하기 시작한 것은 그 후 약 5-6년이 지난 1980년경부터라고 한다. 현재 당근 생산농가들은 9개의 작목반을 조직하고 있으며 각 작목반에는 15-20호 농가가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당근 값의 시세가 별로 좋지 않아 작목반의 역할은 유명무실한 상태라고 지적하고 있다. 어업부문에서는 어선어업과 마을(연안)어업으로 구분할 수 있다. 하도리의 농어가에서 행하는 어업은 대부분이 농업을 겸하는 반농반어 형태이지만, 어업에의 의존도는 점차 낮아지는 비율을 보인다. 그리고 반농반어라고 하지만 대부분의 농어가는 갯가의 해조류(톳, 우뭇가사리, 감태 등)의 채취나 잠수 어업을 통한 패류와 해조류(미역, 청각 등)의 채취, 또는 계절에 따라 원담어업(돌살어업)을 통한 일부 어종을 획득하는 수준이다. 하도리의 해녀들은 보통 1년에 약 140여 일 동안 물질작업을 행하는데, 이 중에서도 소라와 전 복, 오분작, 해삼, 성게 등 어패류를 채취하는 물질 작업기간은 약 120여 일, 톳과 우뭇가사리, 도박류 등 해조류를 채취하는 물질 작업기간은 20여 일 정도 된다. 그러나 1년 중 대략 20여 일은 폭풍이나 태풍 등의 영향으로 인해 물질작업을 행하지 못하기 때문에, 대체로 평균적인 물질기간은 1년에 120여 일로 산정할 수 있다. 여기서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전복 채취량이다. 전복은 1990년대로 들어오면서부터 전도적으로 채취량이 급감하기 시작하였으며, 최근에는 해녀들조차도 자연산 전복을 구경하기 힘들다는 이야기가 나돌 정도로 희귀한 존재가 돼가고 있다. 물론 이러한 배경의 원인은 무차별적인 남획과 마을어장의 오염을 꼽을 수 있다. 이로 인해서 해녀들의 수입은 과거에 비해 훨씬 감소했음은 물론이고, 그 후유증은 곧바로 해녀수의 감소로 이어지게 되었다. 하도리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하도리의 목축업은 과거 1970년대까지의 상황과 비교하면 많이 위축되어 있다고 지적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소와 말, 돼지와 닭 등 사육가축이 과거에 비해 많은 수가 감소했으며, 참여하는 농가도 상당히 감소한 상태이다. 현시점에서 하도리의 목축 산업은 소, 말, 닭, 염소 그리고 오리 사육에 한정되고 있으며, 참여하는 농가도 극히 일부에 한정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한편, 하도리 주민들이 일상생활에서 필요한 생활용품은 주로 세화리의 대형 슈퍼(3개소)나 또는 세화 오일시장을 통해서 구입한다. 또, 때에 따라서는 제주시내로 나가서 구입하거나 고성(동남)과 성산 오일시장을 이용하는 가구도 일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