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속초시 청호동은 속초시의 도심 팽창에 따라 빠르게 도시화가 진행되는 곳이다. 또한 바다와 호수를 끼고 있어 수려한 자연 경관을 가지고 있는데다 ‘아바이마을’이라는 유명세로 인해 속초시의 관광 자원으로 개발이 진행되고 있다. 더욱이 과거 6·25전쟁으로 인해 남하한 피난민들의 집단 거주 지역이었고, 현재 주민들의 상당수가 피난민의 자손이라는 점들이 청호동을 복합적인 특징을 지닌 곳으로 만들었다. 초기 정착민들을 통해 산정한 마을의 경계는 북쪽으로는 바다와 청초호가 만나는 부분이고 남쪽으로는 동해대로와 청호동이 만나는 지점까지이다. 신수로를 중심으로 북쪽을 아랫마을, 남쪽을 윗마을이라고 한다.
청호동은 강원도 속초시의 최동단에 위치한 마을이다. 동쪽으로는 청초호를, 서쪽으로는 동해 바다를 두고 남에서 북으로 길게 뻗은 형국을 하고 있다. 청초호는 육지로 굽이쳐 들어온 바닷물이 퇴적층에 막혀 호수가 형성된 것으로 전형적인 석호(潟湖)이다. 석호로서 청초호가 형성된 것은 이미 오래전이며, 조선 시대에도 천혜의 항구로 활용이 되었던 기록이 있다. 석호와 바다와의 경계는 그 사이에 퇴적된 모래사장에 의한 경우가 많다. 물론 청초호도 동해 바다와 모래사장을 사이에 두고 막혀 있었다. 이를 사구(砂丘)라고 하는데, 청호동은 바로 이 사구, 즉 모래밭에 생성된 마을이다. 마을의 형성은 6·25전쟁 발발 이후 국군과 인민군이 남북으로 진퇴를 거듭하던 상황 하에서 남하 피난민들이 잠시 머무른 것이 계기가 된 것이므로 연원이 오래 되지 않았다. 피난민 1세대의 설명 중 가장 많이 들을 수 있었던 내용은 1·4후퇴 때 내려왔다가 국군의 북진과 시기를 같이하여 귀향하다가 잠시 짐을 푼 곳이 바로 이곳이라는 것이다. 6·25전쟁 당시 북진하던 국군이 중공군의 개입에 막혀 잠시 주춤했다가 다시 38선을 넘은 것이 51년 3월이므로, 마을의 형성은 그 이후가 될 것이다. 실제로 마을 형성 초기에 정착한 여석창(1927년 생)의 설명에 의하면 본인이 24살이 되던 1951년에 전쟁이 끝나면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속초에 들어왔다고 한다. 청호동의 옛 터는 여러모로 거주지역이 되기는 힘들다. 모래사장인 탓에 지반이 단단하지도 않고, 바닷물을 머금고 있는 탓에 식수 확보도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이런 곳에 사람들이 모여 들게 되었을까? 초기 정착민들은 대부분 피난민들로, 이곳을 종전 후 귀향을 위한 거점으로 생각하고 임시로 정착한 상황이었다. 북에서 남하할 때 더러는 육로로 이동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청호동에 정착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선박을 이용하여 이동한 경우가 많았다. 종전 후 귀향할 때도 선박을 이용하려면 가장 먼저는 배를 정박하기 쉬운 지역이 임시 거주 공간으로 적당하였을 것이다. 더욱이 청초호의 사구는 모래사장인 탓에 빈 터여서 다른 지역에 비해 큰 갈등 없이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이동의 용이성을 위해 북한의 같은 지역 사람들끼리 모여 있던 것이 나중에는 청호동 내의 마을 이름으로 굳어지기도 하였다. 정전협정이 체결되고 휴전선으로 남북이 나뉘게 되자 모래사장의 임시 정착민들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그대로 이곳에 정착하게 된다. 어느 정도 마을이 형성되면서 부터는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던 피난민들은 이곳에 친척이 있어 이주하거나, 동향 사람들이 모여 거주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주하는 등, 여러 계기로 모여들어 현재의 청호동이라는 마을을 이루게 되었다. 현재 청호동은 남쪽으로는 동해대로를 경계로 조양동과 닿아 있고 북쪽으로는 중앙동과 동명동을 청초호 수로를 두고 마주보고 있다. 예전에 조양동에 속했던 새마을 지역이 이제는 청호동에 속해 있어 과거에 비해 행정구역상으로 마을의 넓이가 넓어졌다.
청호동은 유명한 마을이다. 사람들은 TV 예능프로그램 ‘1박2일’과 ‘가을동화’라는 드라마에 등장한 청호동을 연상하지만, 그보다 이른 시기에도 신문과 TV에 여러 번 소개되었다. 물론 대부분 전쟁과 관련되어 ‘실향민 마을’로 소개되었고 주된 내용은 ‘실향’· ‘이산’· ‘통일’ 등 분단국가의 실상을 부각하는 것들이다. 또한 근간까지도 북한의 핵 실험이나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계획되면 마을 주민 중 한두 사람은 꼭 인터뷰에 등장하기도 한다. 청호동은 ‘아바이마을’이라는 별칭으로도 유명하다. ‘아바이마을’이란 용어는 언제부터 사용되기 시작했을까? 사전적으로 ‘아바이’라는 말은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를 의미하는 방언으로 경상북도와 평안도, 함경남도 일대에서 사용되며 지역마다 어감은 조금씩 다르다. 과거 청호동 주민들 사이에서는 함경남도 북청군 사람들이 주로 ‘아바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지만 현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보다 나이 많은 남성들을 통칭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여러 자료를 뒤져보아도 정확하게 ‘아바이마을’이라는 단어의 연원을 밝히기는 힘들다. 지금은 주민들이 스스로를 아바이마을 사람이라고 칭하기도 하지만 연세 있는 분들의 말에 따르면 그 시작이 어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되 근간의 일임은 분명하다 한다. 출판물들을 검색하여 보니 가장 오래전 기록으로 파악된 것은 소설가 이호철(李浩哲)이 1986년에 출간한 『속초 아바이마을』이라는 수필집이다. 그러나 단어의 연원보다 관심을 끄는 것은 ‘아바이마을’이라는 용어가 갖게 하는 자기정체성의 자각이다. ‘아바이’라는 것은 전쟁 피난민을 상징하는 근원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고 ‘마을’이란 현실적 기반을 의미한다. 용어의 단순한 사용을 넘어 대명사화된 데에는 단어의 심상이 주민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바이마을’이라는 명칭이 비교적 훗날에 소화된 이미지라 한다면, 그 이전부터 청호동을 대변하는 이미지는 ‘망향’이다. 자신의 의지와 관련 없이, 전쟁의 결과로 인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상황 하에서 ‘전쟁과 반공’, ‘실향과 망향’ 이 두 가지는 청호동에 대한 소속감과 정체성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며 이는 세대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짙게 드러난다. 예상컨대, 이주 첫 세대 혹은 그에 준한 세대에 속한 사람들이 이러한 도식을 벗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마을에 대한 소속감은 지연적 유대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은데, 청호동의 경우에는 내면화된 경험에 근거하며, 경우에 따라 이것은 반복적인 학습과정을 거쳐 마을 공동체의 동일한 표현양식으로 표출되는 것처럼 보인다.
1900년대 초만 하더라도 속초시는 양양군에 속한 리(里)에 불과한 규모였다. 현재 청호동이 위치한 곳은 사구(砂丘)로 사람이 살지 않던 지역이었고 그나마 인구가 밀집해 있던 지역은 설악산 자락과 맞닿은 구릉지로 속초 내에서 상대적으로 넓은 경작지가 있어 농사가 가능한 곳이었다. 완만한 인구의 증가와 함께 속초는 1942년에 읍(邑)으로 승격되었는데 이를 기점으로 기존의 행정구역을 속초리 1구에서 4구까지로 나누게 되었다. 청호동이 들어선 지역은 이중 속초리3구에 속해 있었다. 6·25전쟁 발발과 정전협정 체결 후 속초리3구는 전쟁을 피해 남하한 피난민들의 정착으로 인구가 급격하게 늘어나게 된다. 이에 해당 지역을 일부 분리하여 속초리5구라고 이름 붙였다. 청호동 터는 속초리5구에 속하게 되었다. 1963년 속초는 시(市)로 승격하게 된다. 이후 1966년 1월 1일 ‘속초시 명칭과 구역에 관한 조례’(조례 제95호)가 공식 공포됨에 따라 법정구역에 대한 일제 정리가 시작되었다. 이때 속초리5구와 부월리2구가 합쳐져 현재의 청호동이 탄생하게 되었다. 6·25전쟁 정전협정 체결 이후 청호동을 포함한 속초의 인구는 195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급격하게 늘어난다. 물론 피난민들의 유입으로 인한 인구증가율이 가장 컸을 것이며 이로 인해 속초는 피난민의 도시라 표현할 만 하였다. 당시 속초의 총 인구 대비 피난민의 비중은 78%에 육박하였다. 또한 속초 유입 피난민들은 전쟁을 피해서 내려온 사람도 많았지만 정전협정 이후 동향인들이 속초에 거주한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와 정착한 사람들도 상당수 있었다. 지속적으로 사람이 몰리는 것에는 상응하는 원인이 있게 마련이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 작용하는 것이 바로 생업, 즉 일자리라 할 수 있다. 피난으로 유입된 인구를 제외한 속초의 인구 증가는 정전 이후 상승곡선을 그렸던 경제적 호황과도 관련지을 수 있다. 1955년에 발간된 『군세일람』에 의하면 과거 속초보다 규모가 컸던 양양에 비해 속초의 숙박업과 요식업 업소가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경제적인 호황과 함께 많은 유동인구가 있었음을 예상하게 하는 것이다. 1959년 현재를 기준으로 속초읍 전체 인구는 31,435명이었는데 같은 해 청호동 인구를 4,400여 명으로 가늠해 본다면 청호동 거주인은 전체 속초 인구의 10%가 넘는 비율을 보여준다. 당시 속초읍에는 23개의 리(理)가 소속되어 있었으므로 청호동 지역의 인구 비율은 상당히 높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후로도 청호동으로 생업과 생활 터전을 찾아 모여드는 사람들은 얼마간 끊이지 않았기 때문에 인구는 지속적으로 증가되었다. 1963년 1월 1일 속초가 시로 승격된 당시 청호동 인구는 1,246가구, 6,329명이었고 이 숫자는 1970년대까지 꾸준히 유지되었다. 청호동 명태 어업의 최대 호황기와 겹쳐지는 시기이다. 청호동 거주 인구가 정점을 찍은 후 하향곡선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에 이르러서이다. 여기에는 실향민 2세들의 도시 진출 등 여러 가지 실제적인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영향으로는 점진적인 어획량의 감소를 들 수 있다. 당시 농·어촌 지역의 인구 이탈은 전국적인 현상이었지만 청호동과 같이 지역적 특성상 생업이 어느 한 분야에 집중되어 있는 경우, 생산량의 감소는 많은 사람들의 생활고와 직결되고 급격한 인구 이탈의 직접적 원인으로 작용될 수 있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인구 감소를 막기 위한 정책적 노력들이 있어서 어느 정도 감소율이 줄어들고 있지만 실향민 1세들이 세상을 떠나고 2세와 3세의 도시 진출이 지속되는 한 완만한 하향세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 2000년의 인구가 1995년 대비 1,591명이 증가하게 된 것은 1968년 해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수용한 조양동의 새마을이 청호동으로 편입되었기 때문이다.
강원도 속초는 해방 이후 38선 이북지역에 속한 곳이었지만 6·25전쟁 발발 후 수복되어 1951년 8월 18일 정전협정이 발휘될 때에도 군정 치하에 예속되어 있었다. 중앙동과 청호동 부근에는 북측과 가까운 해안이라는 지리적 상황 때문에 군사시설이 설치되기도 하고 청호동을 포함한 중앙동 일부 지역은 민간인들의 자유롭게 출입하지 못하는 지역이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청호동과 인근 해안가 지역의 거주 인구가 지속적으로 증가하게 된 원인은 토지의 소유주, 혹은 원주민과 갈등이 없는 빈 지역이었음과 함께 거주 실향민들 상당수가 생활을 위해 어업에 종사하는 것을 택했기 때문이다. 현재의 중앙동과 동명동 부근에는 군수물자 납품 기업과 물류창고 등이 가설되어 있어서 그곳의 일용 노동자로 일하는 사람들도 청호동에 더러 섞여 있었지만 가장 주된 생업이 어업이었음은 굳이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44권 「양양도호부(襄陽都護府)」에는 속초 앞바다에서 나는 해산물로 명태·김·미역·전복·홍합·문어·대구·송어·연어·은어·황어·방어·고등어·광어·농어·숭어·쌍족어(雙足魚)·해삼 등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중에서도 청호동의 생업과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는 어종은 명태이다. 1959년 발간된 속초읍의 『읍세일람』에도 속초읍 주민의 78%가 실향민인데 주 생업은 어업으로 그 중 명태어업이 80~90%를 차지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더불어 명태어업 시기가 아닌 여름에는 주민들이 생활고에 시달리기도 하고, 명태 흉년이 드는 해에는 그 상황이 심각하여 중앙 정부의 재정적 지원이 필요하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속초시에서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6·25전쟁 이후 속초 및 주변으로 이동한 피난민의 규모는 48,722명에 이르는데, 이들 중 배를 이용하여 이동한 사람들은 주로 속초항 주변에 거처를 마련하였고, 육로를 통해 이동한 사람들의 대다수는 현재 종합 공설 운동장 뒷편인 학사평에 촌락을 이루고 생활하였다 한다. 당시 청호동에 거주하던 사람들의 출신지를 보면 함경남도가 92.9%로 절대적인 다수를 차지하였고, 이들 중 반 이상이 어업을 생계로 하여 생활을 유지하였다. 이들이 속초 정착 후에 어업을 생계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고향에서 어업에 종사했었기 때문에 어업 관련 기술에 숙련된 이들이 많았고 전쟁시 피난 수단으로 선박을 이용한 이들이 많았기에 보유된 선박과 인력을 빠르게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속초 앞 바다는 청호동의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 바다는 초기 청호동 정착 실향민들이 전쟁을 피해 이동하는 통로였고, 귀향의 통로로 마음먹은 곳이기도 하다. 정전협정 후 정착하면서는 생계를 유지하는 기반이었다. 근대에 와서는 북한 잠수정이 출몰하거나 좌초되어 예인되는 등, 한반도의 정세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어 예전에는 바닷가에 철조망과 군부대의 경계병이 배치되기도 하였다. 지금은 철조망이 철거되고 이른바 ‘관광펜스’라 불리는 울타리만이 마을과 바다의 일부를 경계짓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44권 「양양도호부(襄陽都護府)」에 등장하는 쌍성호(雙成湖)라는 호수가 있다. 간성군(杆城郡)과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으며 둘레가 수십 리이고 호수 경치가 영랑호(永郞湖)보다 훌륭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쌍성호는 청초호의 옛 이름인데 조선 선조때 선비인 홍인우(洪仁祐, 1515~1554)의 저서 『관동록(關東錄)』에서도 쌍성호(雙城湖)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청초호를 만나볼 수 있다. 면적 1.38㎢, 둘레 약 4.8㎞의 크기인 청초호는 항만 시설의 개발 및 일부 매립으로 인해 과거보다 그 크기가 줄어들었는데 해수면의 상승과 연안하곡의 침수 및 파도에 의해 사주(砂洲)가 형성되면서 만들어진 석호(潟湖)이다. 북쪽에 형성되어 있는 수로로 동해 바다와 연결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이후로 청초호는 속초항의 내항으로 활용되어 왔으며 현재 500톤 급의 대형 선박의 통행과 정박도 가능하다. 호수의 발원은 미시령(彌矢嶺) 인근이다. 이곳에서 시작된 물길이 학사평과 조양동을 거쳐 청초호로 흘러 들어온다. 산에서 흘러온 담수와 바다와 연결되어 들어오는 해수가 섞이는 특성 때문에 호수 내에는 독특한 생태계가 형성되기도 하는데, 전쟁 후 사람들이 부근에 마을을 형성하기 시작했을 무렵, 이곳은 고기떼가 활보하고 바닥까지 훤히 보이는 깨끗한 호수였음을 몇몇 사람들은 기억하고 있다. 청호동 초창기 청초호는 현재와 같이 구조물로 구성된 접안시설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바다와 연결되는 수로 또한 넓어 영금정 쪽에서 치는 파도가 호수 안까지 밀려 들어왔다고 한다. 때문에 청어와 고등어가 호수 안까지 자유롭게 드나들었다. 청호동이 어업의 호황기를 누리던 1950년대 중후반기, 속초 앞바다는 동해안의 황금어장으로 불리며 봄에는 꽁치, 여름에는 오징어, 가을에는 도루묵, 겨울에는 명태잡이가 이어졌고 출항하는 어선마다 만선기를 나부끼며 귀항했다. 조용했던 청초호 주변은 전국에서 몰려온 고깃배와 선원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잡아온 고기를 다듬고 남은 부산물들은 모조리 청초호에 버려졌고, 난립한 덕장과 작업장들에서 흘러나온 폐수 또한 청초호로 흘러들면서 수질은 낮아지고 주변이 썩어 악취까지 나는 지경에 이르렀었다 한다. 지금은 관민이 협동하여 노력한 끝에 상황이 많이 호전되었지만, 나이 많은 청호동 주민들은 여전히 마을 형성 초기의 맑았던 청초호를 마음에 담고 있다. 현재 청초호 주변은 해운항만청의 개발 사업으로 당초 호수 크기의 1/3정도가 매립되었고, 호수 주변의 습지도 많이 줄어든 상태이다.
어선들이 조업을 마치고 마을로 돌아올 때 이제 곧 마을에 도착하게 됨을 알려주는 섬이 하나 있다. 바로 조도라고 부르는 무인도이다. 청호동으로부터 직선거리로 1.3Km 떨어져 있는 작은 섬인 조도는 속초 앞바다에 유일하게 솟아있는 무인도이다. 해발 20m 내외의 두 개의 연이어진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는 이 섬에는 하얀 무인 등대가 하나 서 있다. 1960년대에 이 섬에 정자를 지었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으나 현재는 볼 수 없다. 조도라는 명칭은 새, 특히 갈매기들이 많이 서식하여 그러한 이름이 붙여졌다 하며 예전에는 빽빽한 나무 군락들이 있었다 하나 지금은 새들의 배설물의 영향으로 많이 줄어 든 상태이다. 조도는 바닷일이 많은 청호동 사람들이 물 위에서의 위치를 설명할 때 기준점이 되곤 한다. 위치를 표현할 때도 조도 안이냐, 조도 바깥이냐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또한 그 주변은 바위가 많아 물고기와 섭(홍합)과 전복 등 어패류가 풍부하다. 때문에 문어 연승과 해녀들의 물질도 조도 주변에서 많이 행해진다. 과거에는 섬 주변에서 미역과 다시마 채취 작업이 제법 큰 규모로 이루어 졌다고는 하나 지금은 해녀들에 의해 간간히 채취될 뿐 대단위 작업은 진행하지 않는다. 현재 조도는 출입이 금지되어 있는 구역이지만 예전에는 이따금 조도로 건너가 음식을 해 먹으며 여흥을 즐겼던 기억들이 마을 사람들 사이에 여전히 회자된다. 또 한 학교에 들어갈 나이 정도가 되면 수영으로 조도를 왕복하는 것을 자기들만의 통과의례처럼 여기기도 하였다.
청호동 동쪽에 푸른 바다가 있다면 서쪽으로는 희미하게 이어지는 산맥 위로 여섯 개의 암석 봉우리가 눈길을 끈다. 울산바위라 부르는 해발 780m의 이 거대한 암석은 신비로운 느낌까지 자아내는데 비록 청호동 주변에 위치한 것은 아니지만 청호동 사람들이라면 눈앞에 보이는 그 경관에 매우 익숙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45권 「양양도호부(襄陽都護府)」에는 ‘봉우리의 모습이 기이하고 구불구불한 것이 마치 울타리를 친 것과 같다 하여 울산(蔚山)이라 한다’ 고 명칭의 연원을 밝혀주고 있다. 더불어 울산바위라는 명칭 외에 이칭도 존재하는데 홍인우(洪仁祐)의 『관동록(關東錄)』에는 ‘쌍성호(청초호) 서쪽으로 10여 리되는 곳에 석봉이 하나 보이는데, 마치 울타리처럼 꼿꼿하게 비껴 있는 모습이다. 이를 이산(籬山), 속언으로는 읍산 (泣山)이라 부른다’라고 기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