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현동의 역사는 짧지 않다. 이미 조선 시대에도 어엿한 행정구역으로서 존재를 했었다. 서대문 사거리에서 종근당 빌딩을 지나 마포대로로 넘어가는 고개를 애오개라고 한다. 새로난 길들 때문에 원래 모습은 사라졌다고 한다. 애오개를 한자로 풀면 ‘아현(阿峴)’이 되고, 현재 행정구역명인 아현동이 되는 것이다. 애오개라는 명칭에는 몇 가지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중 가장 흔하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는, 옛날 한성부에서 서소문을 통하여 시체를 나가게 하였는데 아이 시체는 이 고개를 지나서 묻게 하였기 때문에 아이 시체를 매장한 언덕이라 하여 애오개라고 부르기 시작 했다는 것이다. 아이들 무덤이 많아서 이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만들어 진 것이 애오개 탈춤놀이라고 한다. 애고개 탈춤놀이는 아이들이 주요 등장인물이며, 지금은 경기도 고양시에서 전승되고 있다. 실제 아현동에는 공동묘지가 있었다고 한다. 인근에 형무소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나온 시체도 아현동에 묻었다고 전해진다. 현재 산7번지로 불리는 곳이 바로 묘지자리였다. 이 산7번지는 지금도 상수도 등 공사를 위해 땅을 파면 인골(人骨)이 심심치 않게 나온다고 한다. 남쪽에 만리현과 서북쪽의 대현(大峴)이라는 두 큰 고개 중간에 있는 이 고개가 작기 때문에 ‘애고개’ 즉 아현(兒峴)으로 부르던 것이 ‘兒’ 가 ‘阿’로 변하여 아현(阿峴)이 되고 그 고개 이름 아현이 그대로 동명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풍수설과도 연관이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한성(서울)의 주산(主山)을 부아악(負兒岳, 북한산)이라 불렀는데 이 아이[負兒]가 달아나는 것을 막기 위해 서쪽에 있는 산을 모악(母岳), 남쪽 산을 벌아봉, 모악에서 서남쪽 산을 병시현(餠市峴)이라 칭하게 되었다. 벌아봉은 아이를 못떠나게 하는 의미이고, 병시현은 떡으로 달랜다는 뜻인데 병시현이 바로 아이를 달래는 고개인 ‘아현(兒峴)’이었다는 것이다. 학자들의 고증이나 백과사전에는 충정로에서 마포로 넘어가는 고개의 모습이 아기를 업은 엄마의 모습이라 하여 ‘애오개’ 또는 ‘애우개’라고 불렀다고 한다.
아현시장에서 4번 마을버스를 타고 종점으로 올라가면 산7번지가 나온다. 산7번지는 조사지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며 아현동의 꼭지점 같은 곳이다. 현재는 다세대 주택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지만, 아현동에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할 때는 초가집, 판자집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사람들이 들어오기 전에는 공동묘지가 넓게 있었기 때문에 집을 지으려고 땅을 파면 해골들이 즐비하게 나왔다. 그때 판잣집과 함께 돈이 좀 있는 사람들은 빨간 양기와 집을 짓기 시작했다. 그렇게 80년대 말까지 현재의 부동산 앞길은 리어카 하나가 겨우 지나가는 좁은 길이었다. 그리고 80년대 말에 마을 재개발이 시작되었고 그러면서 현재의 건물들과 다세 대 집들이 들어서게 된다. 현재도 고개 밑에는 예전의 빨간 양기와 집들이 몇 채 남아 있다. 70년대 이전 아현동에 들어온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산7번지에는 호박밭이 있었다고 하며, 물이 귀해 물 긷는 것도 큰일이었다고 한다. 동네에 불량배들이 많아 인근 지역에 악명을 떨쳤다고 한다. 심지어 경찰서에 끌려가더라도 산7번지 출신이라고 하면 ‘뺨을 한 번 더 맞았다’라고 할 정도였다. 또한 산7번지, 산8번지 등에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살다보니 동네지명만 대도 못사는 사람이라고 사람들이 생각할 정도였다.
아주부동산 권정범에 의하면 현재는 이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많이 없지만, 부동산이 있는 656번지에서 이대 방향으로 넘어가는 고개에 여우가 살았다 해서 여우고개라 했다. 예전에는 이곳에 사람이 살지 않았고, 공동묘지가 있었다고 한다.
산7번지 꼭대기에서 염리동과 경계를 이루는 곳에 예전에는 큰 바위가 있었다고 한다. 이 바위에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전해 내려져 온다. ‘귀향 가는 주인을 기다리다 바위가 된 충성스러운 개’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옛날 조선 시대 때 마을의 어느 대감이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때 그 대감이 기르던 개가 대감이 마포나루에서 배를 타고 귀양가는 모습을 언덕 위에 올라가 바라보았다. 마포나루에서 대감을 태운 배가 떠난 후에도 개는 돌아가지 않았다. 충성스러운 개는 언제까지고 그 자리에서 귀양간 대감을 기다렸다. 결국 개는 그 언덕 위에서 죽었고, 죽은 개는 그 자리에서 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개바우 밑 신령스러운 구렁이를 건드려 죽은 인부’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개바위가 있던 곳은 원래 대원군이 소유하고 있던 땅이라 한다. 70년대 당시 동양극장 이사장이던, 김갑수라는 사람이 그 땅을 샀다. 땅의 새 주인은 그곳에 집을 짓기 위해 축대를 쌓고 개바우도 모두 없애는 공사를 시작하였다. 당시 부르도자(불도저:bulldozer) 운전수가 개바우를 없애는 공사를 하려는데 그 전날 밤에 꿈을 꾸었다. 꿈속에 신령스러운 목소리는 ‘3일만 기다려 주시오. 3일만 기다려 주시오’라며 간곡히 운전수에게 부탁하였다. 개바위 공사를 맡은 운전수는 개바위의 공사를 3일 기다려 달라는 꿈인 것을 짐작하였으나, 지시를 받은 공사이기 때문에 본인의 마음대로 할 수 없어, 하는 수 없이 그날 공사를 감행했다. 그런데 바위를 들추는 순간 그 아래 커다란 구렁이 한 마리가 몸을 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별다른 수가 없었기에, 공사는 계속 진행되었다. 개바우를 없애는 작업도 모두 마치게 되었다. 그런데 그 공사가 있고는 며칠 후, 운전수는 이렇다할 원인도 모르게 갑자기 세상을 떠나버렸다. 운전수가 죽고 나서 그 운전수의 부인이 울며, 개바위가 있던 곳으로 찾아왔다. 부인은 운전수와 그의 꿈, 그리고 구렁이에 대한 모든 얘기를 들려주었다 한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개바위를 철거할 때 큰 소동이 났었다고 한다. 학교를 짓기 위해 이 바위를 부수게 되었는데, 포크레인으로 바위를 들어내자 그 밑에서 큰 구렁이가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이 차량에 의해 구렁이가 그만 반 토막이 나 죽어버렸다. 그러자 차량 운전수도 죽었다고 한다. 놀란 주민들이 돈을 걷어 굿을 했는데, 때마침 이 개바위 근처에 이북에서 월남한 만신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들이 5일 동안 굿을 하여 이 난리를 진정시켰다고 한다. 위의 전설들과 달리 이곳에서 마을 사람들이 개를 자주 잡아먹어서 개바우라 불리었다는 이야기도 들을 수 있다.
아현동 서부교회 일대로 옛날 키가 작은 붓장수 할아버지가 부모묘를 써놓고 매일 다니던 산이다. 마포나루로 향하는 길목인 이곳에 무덤을 쓸 수 없게 되어있음에도 불구하고 장례비도 없거니와 달리 묘를 쓸만큼 기운도 없던 붓장수 할아버지는 밤중에 몰래 묘를 만들어 놓고 묘에 이상이 없는지 매일 다녔다. 그러나 키가 워낙 작아 멀리서 보면 어린 아이처럼 보이기 때문에 들키지 않았다고 한다. 이 후 사람들은 이 일대를 땅딸보산으로 불렀다.
옛날 마포항에 많은 물건이 들어오면 애오개쪽에서 마포 포구로 흐르는 개천을 먼저 거슬러 올라온 다음 장안으로 반입되었다. 즉 물건이 먼저 통과하는 개천[先通物川]이라는 뜻인데 이후에 먼저 선(先)자가 착할 선(善)자로 바뀌어 있으며, 일제 시대에는 지금의 봉원천 쪽으로 터널을 뚫어 물길을 돌렸다. 개천은 북아현동에서 아현시장을 통해 선통물천을 지나 마포쪽으로 흘러 한강으로 통해있다. 현재는 그 터와 돌에 새긴 글자만이 남아있다. 그 앞 공터는 환경미화원들의 집결소가 되었고, 각종 생활 쓰레기를 모으는 곳이 되어있다.
『승정원일기』에 보면 숙종 37년인 1711년에는 아현동에 호랑이가 출몰하여 피해를 끼친 모양이었다. 무려 포수 80여 명을 동원하여 호랑이를 쫓아내려 했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호랑이에 대한 이야기는 비변사 자료에서도 볼 수 있다. 호랑이의 출몰이 빈번했던 모양으로 비변사 자료에 보면 영조 42년(1747년 12월) 영의정이 아현동에 포수를 보내어 호랑이를 포획하는 문제에 대해 논의하는 내용도 있다. 아현(阿峴)계 동명(洞名)은 육전조례(六典條例) 등 고종조(高宗朝)때 많이 보이는데, 그 중 고종 31년(1894년) 갑오경장 때 종래 한성5부의 부(部)로 고칠 때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한성의 동·남·중·서·북의 5서 중 서서 반송방(西署 盤松坊)과 북서 연희방(北署 延禧坊)으로 아현의 여러 동명(洞名), 계명이 나타남을 볼 수 있다. 동중(洞中)에는 흔히 ‘애우개’로 불리어지는 아현의 고개마루는 물론 굴레방다리, 오부수마을, 큰 행화동, 작은 행화동, 행화교(杏花橋), 너럭바위, 너럭바위샘 등의 지명(地名)이 남아 전해져 오는 것을 볼 수 있다. 『견한잡록(遣閑雜錄 : 선조 때)』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우리 지방 기로(耆老)의 모임이 둘이 있다. 하나는 아이현(兒耳峴)의 여러 늙은이(고개 아래 거주하는 이들)들이 경진년(선조 13년, 1580년) 가을부터 모임을 가지다가 임진년 여름에 와서 난리를 만나 흩어졌는데 매달 각 집으로 돌아가면서 모임을 가지며 활쏘기를 하고 혹은 바둑을 두고 시를 지으며 즐겼다. 처음에는 20인이었는데 나중에는 9인이 되었다. … 하나는 만리현의 여러 늙은이(고개 아래 거주하는 이들)들이 임진년(선조 15년) 봄부터 모임을 갖다가 임진년 여름에 난리를 만나 흩어졌는데 매달 돌아가며 모여 활 쏘고 바둑 두며 시 짓는 것이 아현과 같았다.’ 또한 옛날에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서활인서(西活人署)가 있었는데, 현재 아현중학교 자리가 그곳이라고 한다.
신문이라는 것이 아무래도 좋은 기사보다는 사건과 사고를 주로 싣게 마련이다. 아현동에 관한 검색 결과 1945년까지 신문자료에 나타난 아현동에는 그리 좋은 일이 많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예전에 술집 여자들이 이곳에 많이 살았다고 한다. 그들이 실수로 아이를 가졌을 때, 아기를 낳고서는 현 산7번지 쪽 언덕에 많이 유기했다고 한다. 신문기사에서도 버려진 아이들에 대한 기사를 많이 볼 수 있다. 아현동은 최근에도 크게 방송을 탔다. 1990년대와 2005년 아현시장 방화사건, 1994년 도시가스 폭발로 많은 사상자가 난 것이 신문지상을 장식했다. 조사 기간에는 한 지상파 방송국에서 ‘아현동 마님’이라는 드라마를 방영하기도 했다.
아현동 주민들에게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곳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만약 다른 사람들에게 이곳을 소개한다면 어떤 곳이라고 소개할지 물어보았다. 대부분의 제보자들은 이곳은 매우 가난했고, 지금도 가난하며, 서민들이 많이 사는 곳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서울 같지 않게 인심도 좋고 서로 없이 살지만 항상 나누어 먹는 시골 인심이 살아 있는 곳이라고 소개했다. 또한 교통이 매우 편리한데, 주변에 시내와 곧바로 연결되는 지하철, 버스 등이 있다는 것이 나름대로 자랑거리 중 하나라고 이야기들을 했다. 남성들에 비해 여성들, 특히 나이가 많은 여성들은 별로 추억하고 싶지 않은 곳이라는 대답을 많이 했다. 예전에 빨래터도 멀었고, 언덕이 높아 살기가 무척 불편했었다고 한다. 다시 태어난다면 이곳에는 절대 다시 오고 싶지 않겠다는 여성들이 꽤 있었다. 반면 남성들은 그래도 인심 좋은 이곳에 정이 많이 들었으며, 이곳이 재개발되는 것이 매우 안타깝다고 말한다.
이번에 조사한 아현동 일대는 서울시의 뉴타운 건설계획에 따라 기존의 건물들이 다 철거되고 새로운 주거공간으로 재개발이 된다. 특히 이 지역은 인간, 자연, 문화가 공존하는 도시 미래를 담는 복합생활 문화타운을 지향한다.
재개발에 대한 주민들의 반응은 대체로 뜨거운 편이다. 재개발을 뜨겁게 환영한다는 말이 아니라 재개발을 하는 것에 대한 분노로 머리와 가슴속이 뜨겁다는 말이다. 산7번지에서 만난 주민들은 서울시의 정책이니 어쩔 수 없이 따르지만, 도대체 이러한 재개발 사업들은 가진 자들을 위한 것이지 어디 힘 없고 돈 없는 서민들을 위한 것이냐며 맹비난을 가했다. 또한 최춘원 같은 이북 출신의 실향민들은 남한에서의 고향이 속절없이 개발된다는 사실에 착잡함을 감추지 않았다. 혼자 사는 노인들은 훨씬 더 걱정이 많다. 92세 이○○ 할머니와 그녀의 친구들은 혼자 사는 노인은 아무리 돈이 있어도 새로운 곳에서 방을 구하기 어렵다고 한다. 집주인 입장에서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 노인들에게 방을 내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조사를 하면서 재개발이라는 단어만 나와도 주민들은 한숨을 쉬고 장래에 대한 불안감을 서슴없이 내비쳤다. 특히 수 십 년 동안 고생 고생하다가 이제서 겨우 자리 잡아 가고 있는 서울생활에서 아현동을 벗어난다면, 현재 가진 재산으로는 도저히 서울 시내에 있는 집을 구할 수 없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점점 서울 외곽으로 밀려나며, 교통·교육 등의 불편함으로 가난이 대물림할 것이라고 주민들은 한탄했다. 많은 수의 제보자들이 자신들 소유의 집이 아닌 세입자 신세이며, 온통 투기꾼들이 아현동을 점령한 것에 분노하고 있고, 결국 원주민들이 서울에서 벗어나 또다른 도시빈민으로 거듭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상황이다. 또한 지방에서 올라와 아현동에서 젊은 시절을 다 보낸 노년층들은 아현동을 고향이라고 살고 있었는데, 정든 이곳과 인심 좋았던 이웃들과 헤어지게 되는 아쉬움을 토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