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성은 진성의 축조와 함께 발전한 지역이다. 법성포에 수군이 처음으로 주둔했던 시기는 문헌상의 기록으로는 태종 8년(1408년)에 이르러 전라우도 도만호 예하 만호부대로 그 실체가 드러난다. 이후, 세종과 세조시대의 수군정비 과정을 거쳐 법성진은 주진인 전라우도 우수영의 거진인 임치도 예하의 제진이 되었다가 중종 7년(1512년)에 영산포의 영산창이 문을 닫고 법성창으로 옮김에 따라, 중종 9년(1514년)에 지금의 진내리에 석성을 쌓아 군영과 조창시설을 확충한다. 그리고 숙종 34년(1708년) 12월 6일, 수군첨절제사가 지휘하는 군영으로 승격되고, 정조13년(1789년) 윤5월 22일에 영광군에서 진량면을 분계하여 독진으로 승격된다. 그러나 고종27년(1890년)에 조창이 혁파되고 고종 32년(1895년)에 폐진되고 만다
법성은 진성의 축조와 함께 발전한 지역이다. 신분에 따른 거주지 역시 성을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진성을 중심으로는 상위 신분이 거주하고 포구에는 평민들이, 현재 법성리 외곽 쪽으로는 공인들과 무당들이 살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하리 당산제를 지낼 때 인줄을 치면 여자들이 다니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거기서 남자들이 밥도 하고 음식도 하고 목욕도 한다. 옆에 덕기네, 아래 지금 신작로 나 있는 곳이 ‘철주’가 살았다. 텃것이 ‘방도’네 집이었다. 방도네 집 옆에 있는 독[돌]이 당산이다. 가운데가 텃것처럼 아이들이 뛰어노는 놀이터 같은 곳이 있는데 거기서 뜸[굴비 덕장을 덮는 것]으로 막을 치고 당산제를 지냈다. 부정을 타면 뱀이 밑에서 올라와서 사람에게 해코지는 하지 않고 음식을 둘러보고 내려간다. 그러면 사람들이 음식을 작파하고 이튿날 다시 모여서 목욕하고 인줄 꼬아 달고 새로 음식을 해서 당산제를 새로 모신다. 무묘는 시기와 신체가 정확하지는 않지만, 조운선이 서울 서강으로 떠난 때에 무사안녕을 빌던 곳이며 최영, 이순신, 관우 등 여러 장군상이 신체로 모셔져 있었다. 다른 당집과 달리 이곳에는 늦게까지 당지기가 기거했었다. 당집은 전형적으로 3간의 건물로 그 옆에는 큰 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단오제는 제의나 의례보다는 명창, 명인들이 기예를 겨루는 공연위주의 행사였다. 예술경연대회로서 단오제의 기원은 1850년경이며 백목전계가 재정적으로 지원한 세력이었다. 선유놀이를 할 때에 예전에는 큰 배를 여러 척 동원해서 깃을 달고 꽹과리도 치고 돈을 주고 소리꾼도 데려오고 굉장했다. 노리네 오채도 오고 명창들이 와서 돈배 밖까지 갔다. 큰 투망배에 그 사람들을 싣고 노인들은 아무 배나 싣고 나간다. 선유는 남자들도 했지만 단오제는 여자들이 많이 했다. 당시 법성포에서 가장 큰 행사는 줄다리기와 선유였다. 단오제때는 그네뛰기와 선유가 큰 행사인데, 그네뛰기는 있어도 소행사였고, 선유가 가장 큰 행사이다. 국악하는 재인들도 와서 행사를 했는데, 동네출신 재인들이 많이 참여했다.
당산제가 이루어지고 있는 옹성 당산은 서진내리 사람들의 마을 당산으로 모셔졌고, 현재 ‘좋은집’ 올라가는 길에 놓인 큰 바위는 동진내리 사람들의 마을 당산으로 모셔졌다. 그리고 법성리 노인정 앞의 당산과 상동문 옆의 상리 당산도 모셔졌지만, 마을 당산이라기보다는 주변에 사는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모셨던 당산인 것 같다. 법성포에서 다소 벗어난 조아머리의 당산은 마을 당산으로 일제강점기에도 활발히 모셔졌던 것으로 보인다. 마을 단위를 넘어 진내리와 법성리 모두 함께 참여하던 지역 행사는 줄다리기였다. 성내에는 생각도 못하고 성밖에는 썩 좋은 장소는 없었다. 하다못해 정한 곳이 홍살거리에서 작은 저잣거리를 통하는 길이었다. 도폭도 비교적 넓고, 직선으로 뚫린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현재 숲쟁이로 가는 홍농행대로, 이것이 옛날의 진골 길이었는데, 그 길을 중심으로 하여 양진영으로 대진하였다. 홍살거리 쪽은 성외 거주의 동부군이요, 반대쪽은 성내 거주의 서부군의 진지였다. 1920년 이후는 현재 농협청사 앞을 중심으로 하여 법성리쪽은 동부군, 진내리는 서부군의 진지가 되어 줄다리기가 행해졌다. 이 놀이에는 특히 완력이 좋은 장정들만이 참가하는 것이 아니었다. 흥에 겨운 남녀노소 누구나가 어디고 달려들어 하면 되었다. 30년대에 이르러는 남여대항전으로도 시연하였다. 당시에 남군장사로는 전성주가, 여군 장사로는 봉매집 할매가 하였다. 이 시기에는 이미 군마는 고사하고 사역마도 없어진 뒤라, 학생들의 기마전 때 모양으로 하여 장사를 태웠었다.
1960년 중반 『객주』(박원선, 1968년)에 따르면, 영광 지역에는 건어물 객주가 15가 있으며, 칠산[아마도 법성포]은 지구별 어협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으나 3집 정도의 수산물 객주가 있었다. 현재 본래 법적 권리를 의미했던 객주의 의미는 점점 더 모호해져 현재 법성포에서는 객주와 어상을 섞어 사용하는 경향마저 있다. 어쨌든 일제강점기 말부터 ‘객주’는 주로 외지에서 들어오는 어선 혹은 물고기를 실은 상고선을 상대하는 ‘대상인’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바다에 나가기 전에 ‘객주배’들은 나름대로 고사를 모신다. 나가기 전에도 술을 올리는데 배 안에도 절에서 부처님 모시고 교회에서 하나님 모시듯이 ‘선당’이라는 것이 있다. 뱃기가 배서낭의 옷이라서 기를 서낭모시는 곳에다가 걸어놓고 서낭이라는 것은 비단 같은 것을 여러 가지 해가지고 모셔놓는다. 고사를 모실 때는 돛대에 꽂고 음식을 차려놓고 지내고, 평상시에는 개서 서낭 옆에 모셔놓는다. 음식으로 돼지를 통으로 한 마리 놓고 모시는 경우도 있다. 법성포에서는 객주와 어선 간에 독특한 관행이 나타났다. 객주는 어선이 들어오면 간단한 먹을거리를 내오고 어선이 다시 나갈 때면 기를 만들어 풍어를 기원해 주었다. 포구로 들어온 조기는 질꾼, 셈꾼 등 항구 노동자들에 의해 운반되었다. 그래서 법성포에서는 일찍부터 항구 노동조합이 있었다.노동조합원들은 질(용)꾼이라고도 했다. 이들은 고깃배가 들어오면 고기를 퍼내고, 고기를 차에다 싣고, 걸대도 만들고 걸대에다 걸어서 말리는 일 등을 했다. 조기가 엄청나게 많이 나고 중선 등 큰 배가 나올 때 가능한 일이었다. 조합에 가입하는 사람들은 쌀 한 섬, 두 가마를 두고 가입을 했다. 그럼 조합에서 가입한 식구들에게 점심밥은 해서 먹였다. 법성포로 모여든 물고기 중에 대부분을 차지한 것은 조기였다. 다른 물고기들도 있었지만, 조기만큼의 물량이나 상품 가치를 가질 수 없었을 뿐더러 ‘굴비’처럼 가공되어 전국적으로 유통되지도 않았다. 어선이 잡은 조기를 상고선이 포구로 운반하고 포구로 운반된 조기는 질꾼, 셈꾼에 의해 내려져 건조되어 굴비가 된다. 굴비로 가공된 조기는 엮걸이꾼에 의해 묶여 서울로 올라갔다.
‘객주’가 전국유통을 목적으로 했던 상인이라면 어상은 그보다 작은 지역시장의 유통망에 기대어 장사하던 상인들이다. 주로 판매하던 물고기는 상어, 민어, 병어, 서대, 농어, 그리고 주로 조기 등 제사에 사용되는 물고기였다. 어상들이 시장을 돌며 판매하는 방식 외에도 1950년대 이후로는 여성들이 직접 농촌을 돌아다니며 판매하는 방식도 있었다. 농촌버스 등에 어물을 싣고 올라타고 농촌을 가가호호 방문하며 판매하는 부녀자를 ‘잉꼴이’ 장수라고 불렀다.
1960년대가 되면 객주들 간의 경쟁이 심해진다. 객주들은 적극적으로 어선에 돈을 빌려주고 어선으로부터 물고기와 이자를 받기도 하고 상고선을 구입하거나 빌려 적극적으로 물고기를 받아오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1950년대 들어 법성포에서는 상고선의 운영만을 전문적으로 운영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1960년대 후반 이후로 물굴비, 즉 건조하지 않고 조기를 묶고 씻고 소금을 뿌려 바로 서울로 올려보내는 방식의 제조방식이 유행하게 된다. 이와 같은 제조방식은 기존의 굴비제조 방식보다 훨씬 쉬웠다. 훨씬 더 많은 소규모 상인들과 어민들이 합자해서 상고선을 적극적으로 운영하기 시작했다. 어선에 얼음이 공급되면서 어선들이 선택할 수 있는 포구의 지리적 범위가 확장되었으며, 상고선의 동력화로 인해 조기가 잡히는 어장은 보다 남쪽으로 확장되었다. 이로 인해 칠산바다에서 잡힌 조기가 자연스럽게 법성포로 들어올 수밖에 없는 지리적 이점이 사라지게 된다. 법성포의 사람들은 상고선을 활용해 더 적극적으로 조기를 매입해 오거나 이후로는 어선을 직접 경영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어선의 운영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에 주변 섬이나 어촌 지역의 어민들에게 일을 맡기고 경영에만 참여하는 방식을 택한 경우가 많았다.
법성포에서는 1960년대 후반부터 어선을 직접 운영하는 사람들이 서서히 많아졌다. 이와 같은 현상은 일본 수출이 가능해지면서 일본인이 선호하는 물고기를 잡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조기를 받아오는 상고선의 운영이 점차 어려워졌고, 조기어선은 크기도 크고 자금도 많이 들어가서 소자본가에게는 운영이 어려웠다. 따라서 이보다 작은 어선들, 주로 일본 수출이 가능한 어종을 잡는 어선을 중심으로 어업이 시작되었다. 대표적인 어종이 바로 삼치와 민물장어였다.
민어를 잡는 방법은, 민어나 농어가 바위가 패인 곳에 위치하고 있을 때 여기에 낚시를 던져서 잡는다. 사람이 산에 가도 바람이 안 부는 곳에 자리 잡듯이 민어도 그렇게 있었다. 여름이 지나면 바위 뒤로 고기가 안 가는데 따뜻하니까 바위틈에 가서 잡는다. ‘나게도리’는 중하를 낚시에 끼어서 산 것처럼 움직여서 농어 근처까지 가지고 가서 던져주면 그것을 휙 채먹는 방식이다. 던질 때 잘 던져줘야 한다. 그 외에도 잡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사리는 모래밭에 말뚝을 박아놓고 그물이 아닌 대나무로 발을 엮어서 물이 들었다 나가면 그 안에 든 고기를 잡는 방식이다. 물이 쓰면 고기가 나가려고 하기 때문에 발을 쳐놓고 말뚝을 박아놓는 것이다. 거기서 줄을 닻줄로 세 개를 놓았다. 이 배는 혼자 타고도 고기를 잡을 수 있는 배로, 그물을 거는 곳이 밖으로 나와 있다. 그물재질은 면사였다.
법성포는 어민과 어상들이 활동하는 어항이고 조기가공장이면서 또한 시장이었다. 법성시장은 다른 많은 농촌시장과 같이 주변 농촌에서 필요한 물건을 사러 들어오는 곳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법성에 거주하거나 입항하는 수많은 어민, 어상, 노동자들에게 생필품을 공급하는 역할을 했다. 어민, 어상, 노동자들은 외촌의 농민과 달리 대부분의 생필품을 자가 생산하지 않고 시장을 통해서 구입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시장은 반드시 필요한 요소였다. 따라서 법성포에는 물고기 외에 다양한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현재도 열리고 있는 아침 번개시장은 법성포가 가진 이러한 성격을 잘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