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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1947 ~ 2017년) 만에 다시 기록한 강화 선두포 마을지

주제 70년(1947 ~ 2017년) 만에 다시 기록한 강화 선두포 마을지
조사 살림살이 이야기, 사진, 영상, PDF

자연환경

지리적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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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강화도** 강화도江華島는 인천광역시 강화군江華郡의 주도主島로 2017년 강화군 기본 통계에 따르면, 그 면적은 411.43km2이고, 해안선 길이는 106.5km이다. <세종실록世宗實錄>에 따르면, 강화부는 바다 가운데 있으니, 곧 통진현通津縣의 서쪽이요, 해풍군海豊郡의 남쪽이다. 동서가 32리[약 12.5km]이며, 남북이 64리이다[약 25km]. 통진현은 지금의 김포를, 해풍군은 개성의 개풍군을 의미한다. 다만, <세종실록>의 강화부는 현재 강화군의 교동도喬桐島와 석모도席毛島 등을 제외한 강화 본섬으로 지금의 강화 본섬과 동서 및 남북 길이가 대략 일치한다. 강화도는 지리적으로 경기만京畿灣 북쪽의 한강 하구河口에 위치하며, 한반도의 중부 지역에 해당한다. 이 섬은 한강과 임진강을 통하여 서울과 경기북부지역과 접근이 가능하고, 예성강과 강화만을 통하여 북한 지역인 황해도로 연결할 수 있다. 현재 강화도는 강화대교[강화군 강화읍 갑곶리와 김포시 월곶면 성내리를 연결]와 강화초지대교[강화군 길상면 초지리와 김포시 대곶면 약암리를 연결]를 통하여 육상 교통으로 접근이 가능하다. 그러나 대교가 완성되기 전까지 정치적으로는 수도의 기능을 보완하는 항쟁지로 이용되었으며, 조운선漕運船이 통과하는 뱃길의 중심지였다. 강화대교가 1969년에 처음 개통되었기 때문에 1947년 7월 7일 오후 1시에 강화도에 처음 들어선 커넬리우스 오스굿[Cornelius Osgood, 이하 ‘오스굿’으로 표기한다.]은 당시 경성京城 즉, 지금의 서울과 강화를 연결하는 정기선인 증기선汽船[발동선]을 이용하여 이 섬에 들어왔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는 강화도의 지리적 위치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강화도는 한반도가 황해로 뻗어나가는 시작점의 바로 남쪽 아래 위치한 한국 중부, 경기지방의 서쪽 해안가에 나란히 위치해 있다. 강화도는 한강의 하구에 의해 동쪽으로는 대륙과 분리되어 있는데, 이 한강 하구의 물길은 약 350야드[약 320m] 정도 되는 지점에서 점차 좁아지기 시작한다. 강 하구의 구불구불하게 굴곡이 많이 진 수면은 2~30피트[6~9m] 높이의 낙차가 큰 조수의 힘에 쉽게 영향을 받아, 물결이 일어난 지점에 강한 여울과 소용돌이를 남기며, 북쪽으로 강화도에 접해 있는 많은 섬들의 대부분을 감싸 돌아, 한강의 주류를 통과해 바다로 유입된다. ![](/media//archive/photo/S00000057/service/S00000057_I446668.PNG)
# 2)선두2리와 선두포 조사지인 선두2리는 강화군 길상면 선두리에 속한 자연마을로 동경 126° 30′, 북위 37°45′ 일대로, 강화 본섬의 남부이다. 현재 선두2리 내에는 4개의 자연마을인 ‘선두포船頭浦’, ‘초장골’, ‘무초내’, ‘동들머리’가 있다. 1947년 오스굿은 정족산鼎足山 남서쪽에 자리한 선두포를 중심으로 조사했다. 2017년 국립민속박물관 조사팀의 마을민속지 조사 대상은 행정리 단위인 선두포를 포함한 선두2리이다. 이는 1947년 오스굿의 민속지 조사 범위보다는 공간적으로 확대되었다. 선두2리는 장흥 교차로와 길화교 삼거리를 잇는 보리고개로를 중심으로 북쪽에 위치한 오스굿의 조사마을인 선두포와 최근 택지를 조성하여 새롭게 형성된 초장골이 있으며, 보리고개로 남쪽으로 선두2리의 지리적인 중간 지역인 무초내와 1707년 축조된 선두포언船頭浦堰과 그 남동쪽 해안도로를 따라 동들머리가 있다. 선두2리는 섬에 있지만, 어촌이 아니라 경지정리로 농토가 구획된 전형적인 농촌이다. 강화도가 축언築堰과 간척干拓으로 농경지를 넓혔듯이, 선두2리도 이를 통해 바닷물을 막아 간척된 곳이다. 선두리의 이름이 선두포에서 시작하였듯이 조사지는 ‘뱃머리 항구’ 즉, 배가 드나드는 포구에서 시작해 1707년과 1975년 두 번의 간척으로 현재의 외형을 갖추었으며, 마을 앞들은 1993년과 1994년에 2,100여 평 단위로 경지정리 이후 기본적인 형태를 갖추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자연마을 선두2리의 법정리는 선두리이며, 강화군 길상면에 속해있다. 선두리는 선두1리에서 5리까지 구분되며, 조사지인 선두2리는 동쪽으로 선두 3리, 서쪽으로 화도면 사기리와 경계한다. 그리고 북으로는 선두1리, 남으로는 선두 4리와 경계한다.



선두 2리의 지역적 경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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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석과 토양

# 1)암석 한국지질자원연구원의 지질도를 참조하여 선두2리와 관련된 정족산, 전등사, 자연마을의 뒷산, 주거지, 선두포평과 동들머리평의 주요 지점 13곳을 선정해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볼 때, 선두2리는 세 시기에 걸쳐 형성되었다. 먼저 장흥 교차로와 길화교 삼거리[과거 선두포언 동측지역] 연결하는 보리고개로 남동쪽이 가장 먼저 형성되었다. 이 지역의 대표 암상은 석영편암이다. 조사자가 2017년 10월 27일 장흥교차로에서 길마재를 넘어 길상산 정상을 거처 선두4리로 내려오면서 육안으로 암석을 확인했을 때, 길마재 입구에서부터 길상산 근처까지 백운모편암이 다수 확인 되었다. 이후, 선두포와 초장골의 주거지를 포함한 정족산 일대와 동들머리 주거지를 포함한 길상산 일대가 형성되었으며, 대표 암상은 백운모편암, 흑운모편암, 석영 편암이다. 길상산에서는 석영편암이 다수 확인되었다. 그리고 선두포평과 동들머리평 일대 간척된 지역의 지질이 형성되었으며, 이 지역의 대표 암상은 퇴적암이다. 다만, 이 일대는 흙을 객토해서 조사자가 육안으로 암석을 확인할 수 없었다. ![](/media//archive/photo/S00000057/service/S00000057_I446670.PNG) # 2)토양 토양은 암석이 풍화작용과 토양생성작용으로 형성된다. 즉, 같은 지역의 토양이라도 암석의 종류, 풍화작용의 종류나 강도, 그리고 기온, 강수량, 지형, 시간, 생물 등 토양생성작용에 따라 만들어지므로 일정하지 않다. 선두리의 토양지형은 <토양환경정보시스템>을 토대로 살펴보면, 총 1,073ha의 면적으로 산악지가 429ha, 저구릉지와 구릉지가 226ha, 선상지와 곡간지가 217ha, 평탄지가 173ha 이며, 기타 산록경사지와 홍적대지가 각각 24ha, 4ha이다. 토지 이용은 논 209ha, 밭 229ha로 이용되며, 과수 상전이 83ha이다. 한편 초지와 임지는 각각 305ha와 249ha이다. 선두포의 주요 경작지인 선두포평 토양 등급은 1등급에서 3등급 사이로 계속된 경작에도 불구하고 토양의 등급은 좋은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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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목

강화도는 한반도 중부에 위치하지만 기후가 온화하여 동백나무, 초피나무, 비목나무 등의 난대림이 자생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선두2리는 일반적으로 강화도에서 자생하는 수목과는 다르게 확인되었다. 마을 거주지를 중심으로 야산에는 소나무, 산벗나무, 소사나무, 참나무류의 비율이 높다. 참나무류에는 굴참나무를 비롯하여, 신갈나무, 상수리나무, 떡갈나무, 졸참나무, 갈참나무 등 다수가 분포한다. 그 밖에 산의 초입에 밤나무, 참나무, 아카시아, 산벗나무, 보리수나무, 싸리나무 등이 분포한다. 다만, 가옥 주거지를 중심으로 볼 때, 자생하는 나무는 거의 없으며, 다양한 수목을 심어 조경수로 활용한다. 조사자가 2017년 10월 27일 길마재를 넘어 길상산을 오르면서 육안으로 확인한 나무는 소나무와 참나무를 비롯하여, 낙엽송, 물박달나무, 소사나무, 개옻나무, 산벗나무, 생강나무, 노간주나무, 물푸레나무, 산초나무, 초피나무 등이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소사나무와 노간주나무이다. 먼저, 소사나무는 지름이 80Cm 이상인 것도 다수 분포했다. 마을에서는 이 나무가 단단하기 때문에 ‘쇠사슬나무’라고 부르고, 농기구의 ‘자루’를 만들어 사용하곤 했다. 그리고 노간주나무는 물고기를 잡는 가리를 만들던 나무로 소사나무와 마찬가지로 각종 농기구의 자루로 활용했다. 현재도 두 나무를 이용해 이전에 제작한 농기구가 마을에 남아있지만, 더는 두 나무를 이용해서 농기구의 부속을 만들지 않는다.



인문환경

인구구성과 사회조직

1) 인구구성 2017년 현재 선두2리의 인구는 주민등록을 기준으로 139세대로 남성 150명, 여성 150명 등으로 총 300명이다. 주민들의 연령대별 인구는 30세 미만이 51명이고, 30세 이상 50세 미만이 58명, 50대가 61명, 60세 이상이 130명이다. 세부적으로 가장 많은 연령은 50대이며, 남자가 34명, 여자가 27명으로 총 61명이다. 반면, 10세 미만은 남자 6명, 여자 9명으로 15명이다. 비록, 10세 미만이 가장 적은 숫자이나, 한국 농촌의 인구를 고려할 때 많은 편에 속한다. 최근 택지가 조성되어 입주한 초장골의 영향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최근 농촌에 귀촌·귀농의 인구가 증가하듯이, 선두2리도 외지인의 비율이 점차 증가하고 있다. 선두2리 출신으로 타지에서 은퇴 후 전입하는 사람은 주로 귀농자가 많고, 선두2리와 특별한 인연이 없이 전입하는 사람은 귀촌자가 많다. 비록 선두포에만 국한된 조사이긴 하나 오스굿의 민족지 조사에 나타난 선두포는 총 27가구 169명으로 선두리 전체 인구인 332가옥 2,147명에 비교했을 때, 평균적인 마을보다는 약간 작은 규모였다. 당시에는 인구절반이 20세 미만이였다. 2016년 선두리 인구는 543세대 1,203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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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업환경과 생활권

1) 생업환경 <세종실록>에 따르면, 강화는 기본적으로 섬이여서 주로 바닷가 생업이 위주였지만, 농사에도 적합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선두2리는 ‘선두포’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기본적으로 어촌에서 출발하였다. 1707년 선두포에 제방이 완공되면서 인근 주민들은 농업과 어업을 병행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후 선두포 마을 앞의 선두 포평이 만들어지면서 농업의 비중이 점차 높아졌을 것이다. 그러나 각종 기록에서도 나타나듯이 바닷물이 빠지지 않아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이 만들어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후 1975년 선두4리 일대와 화도면 분오리를 이어 간척함에 따라 현재 선두2리 내 어업 종사자는 1명이며, 농업중심의 생업을 갖추게 되었다. 한편, <조선지지자료>에 따르면 길상면의 토산土産품은 소금鹽과 부들蒲草이다. 현재 선두2리의 주요 생업은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농업이 주요 생업이지만, 벼농사 중심에서 고구마와 같은 특산품 재배가 점차 증가하고 있다. 그밖에 마을별로 들 가까이의 나지막한 산에서 구할 수 있는 고사리, 취나물, 곱새고사리, 도토리, 밤 등을 채집해 전등사 입구에서 노점을 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현재는 더 이상 하지 않는다. 조사팀은 선두2리의 가구별 전수조사표를 통하여 생활비용과 평균소득을 살펴보았으나, 이러한 통계자료는 선두2리에서 무의미했다. 선두2리는 일반적인 농촌보다는 연령층이 다양하며 특히, 중장년층의 비율이 높다. 외부에서 들어온 이주민을 제외하고 대부분 자작지를 보유하고 있다. 2) 생활권 생활권은 행정구역과 관계없이 통학이나 통근, 시장, 통혼 등 생활의 활동 범위를 말한다. 마을 1세대를 기준으로 살펴보면, 온수리와 강화읍이 주요 생활권이다. 온수리는 길상면의 소재지로 4일과 9일에 장이 선다. 좀 더 큰 장은 강화읍의 오일장(강화풍물시장)인 2일과 7일 장을 이용한다. 마을 1세대가 장에 가는 이유는 세 가지 정도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의식주와 관련하여 생업으로 구할 수 없는 것을 구입하기 위해이다. 대부분 식재료는 자급자족이 가능하지만 자급자족이 어려운 곡물이나 조미료에서부터 생선이나 고기류 등은 시장에서 구입해야만 한다. 그리고 의복과 같은 공산품과 주생활에 필요한 기본 도구 등도 시장을 이용해야만 한다. 두 번째, 직접 생산한 곡물이라 할지라도 재가공이 필요한 경우 시장을 이용한다. 예를 들어 고추농사나 깨농사를 짓더라도, 고춧가루를 만들거나 기름을 짜기 위해서는 온수리 시장을 이용해야 한다. 끝으로 의식주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으나 시장에 있는 시설을 이용하기 위해서 이다. 이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데, 예를 들면 시장에 있는 목욕탕이나 은행 업무를 보기 위해서 시장을 이용하기도 하고, 머리를 하거나 병원을 이용하는 등 그 형태가 다양하다. 물론 연령층이 다양하게 분포하기 때문에 개인 차량을 이용하여 시장을 이용하기도 하지만, 고령층이나 여성인 경우 대중 교통을 이용하는 경우가 있다.



주요경관과 지명유래

주요경관

1) 전등사(傳燈寺)와 정족산성(鼎足山城) 전등사는 선두2리가 아니라 길상면 소재지인 온수리에 주소지를 있으며 정족산성鼎足山城 내에 위치한 사찰이다. 그러나 조사지인 선두2리와 연계된 사찰이며, 1947년 오스굿이 선두포를 조사할 때 거주했던 곳으로 마을 민속조사에 영향을 미쳤다. 또한 선두포 마을 뒷편으로 정족산을 등지고 있다는 점에서 행정구역 상 선두2리는 아니지만 마을의 주요경관으로 볼 수 있다. 전등사는 381년(소수림왕 11년) 아도 화상我道和尙이 창건하여 진종사眞宗寺라 했다고 하지만 1차 사료가 확인되지 않았다. 이 사찰은 고려의 개경 천도 이후부터 확인된다. 사찰의 이름은 고려 충렬왕의 비妃 정화궁주貞和宮主가 이 절에 옥등玉燈을 시주한데서 비롯된다고 전한다. 특이한 점은 전등사 대웅전의 네 귀퉁이 기둥 위의 형상이다. 이 형상은 나녀상裸女像으로 지붕에서 내려오는 하중을 받치고 있는데 이와 관련하여 다양한 설화가 있다. 광해군 때 대웅전 공사를 맡았던 도편수가 절 아랫마을에 사는 주모에게 돈을 맡겨 두었는데, 대웅전 공사가 끝날 무렵 주모가 그 돈을 가지고 도망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도편수가 주모의 형상으로 지붕의 하중을 받게 해 고통을 주었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 주모가 불경 소리를 듣고 바르게 살기를 바라는 도편수의 배려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2) 사기리 선두포 비석군 1707년 완공된 선두포언은 현재의 길화교 삼거리와 화도면 사기리를 연결한 둑으로 바닷물을 막기 위해 설치했다. 선두포언은 화도면 사기리와 길상면 선두2리에 걸쳐있다. 1707년 이 둑을 만들 때 동쪽과 서쪽으로 각각 수문을 만들었고, 1863년에 가운데에 수문을 하나 더 만들었다. 이와 관련하여 몇 개의 비석군이 옛 선두포언 서쪽 수문 자리에 있다. 이는 화도면고적보존위원회가 선두포언 일대에 흩어져 있는 비를 모은 것이라고 한다. 선두포 비석군에는 ‘선두포축언시말船頭浦築堰始末’비가 있었으나, 관리상의 이유로 다시 강화역사박물관으로 옮겨졌다. 현재는 ‘유수민진원적덕휼민영세불망비留守閔鎭遠積德恤民永世不忘碑’, ‘중수문민공구제홍공신갑中水門閔公舊堤洪公新閘’ 등의 비와 석재들이 남아있다. 다만, <조선지지자료>에서도 선두포석비를 기록하고 있다. 선두2리 일원에는 아직도 ‘선두별장김상휘비船頭別將金尙輝碑’ 등 선두보船頭堡와 관련한 다양한 석비가 흩어져 방치되어있다. 3) 선두보(船頭堡) 선두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선두보船頭堡와 선두포언船頭浦堰을 구별해야 한다. 선두보에서 보堡는 둑을 쌓아 물을 막은 제방이 아니라 군사시설의 하나인 흙과 돌로 쌓은 작은 성城이다. 강화도는 병자호란 이후 규모에 따라 군사시설로 5진鎭20), 7보堡21), 53돈대墩臺22)를 설치하고, 군사를 주둔시켜 관리했다. 보는 몇 개의 돈대를 관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자칫 선두보를 제방인 선두포언으로 오인할 수도 있는데, 둘은 서로 다른 개념이다. 선두보는 현재 마을에서 ‘진터’로 알려진 선두포 마을의 뒷산인 정족산 아래로 짐작된다. 실제 마을 사람은 현재도 마을 뒷산을 진이 있던 뒷산이라는 의미로 ‘진두산’, 혹은 ‘진뒤산’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선두1리와의 경계에 해당하는 능선 자락을 ‘진머리’라고 한다. 4) 양암돈대(陽巖墩臺) ‘돈대’는 최전방 군사시설로서 ‘보’의 하위 개념이다. 조선 숙종5년(1679년) 강화유수 윤이제尹以濟(1628~1701)가 축조한 것이다. 당시 강화도에는 총 49개의 돈대를 설치했는데, 그 중 하나가 양암돈대이다. 사방 폭이 각 37m의 사각형 돈대로 벽체의 폭은 6.6m이다. 하단에 두 세단의 면석이 남아있으며, 서쪽에 출입구가 있으나 활석으로 채워져 있다. 포문이 있던 남, 서, 북쪽은 훼손된 상태이며, 남아있는 문주석의 높이는 좌우 각 125cm, 166cm이다. 민속 조사 당시 이 양암돈대는 복원공사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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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유래

1) 마을 이름 가) 선두포 선두2리의 가장 북쪽에 위치한 자연마을 선두포는 현재 길상면 선두리의 기원이 되었다. 이 마을은 1707년 선두포언이 완공되기 전까지 강화본섬의 남쪽에 있는 큰 포구였다. 그래서 마을 주민들은 이 마을이 고려시대 대몽항쟁기 삼별초의 해상관 문으로 믿고 있으나, 현재까지 그 근거는 확인되지 않았다. 자연마을 선두포는 북서쪽 ‘넘말’, 북쪽 ‘윗말’, 남서쪽 ‘아랫말’로 구분된다. 그리고 넘말과 윗말, 아랫말 사이에는 흐르는 ‘넘말개울’이 있었다. 넘말개울은 동들머리 일원의 ‘새방죽’으로 흘렀는데, 마을 앞에서부터 이 개울을 ‘서편계[서풍께]’라 불렀다. 다만, 경지 정리 이후 넘말개울은 사라졌다. 현재 선두포에는 진머리, 서문턱, 성너머, 진터, 진머리, 활터, 돌부리[돌뿌리] 등으로 불리는 지명이 남아 있다. ‘선두리’ 마을 이름은 1789년인 정조 7년 김노진金魯鎭이 편찬한 <강화부지江華府志>에 선두동船頭洞이라는 지명이 확인되며, 문서로서는 1768년 황인천의 집 남노 오봉黃仁川宅奴五奉이 올린 소지所志에서 처음 확인된다. 이후 1914년 일제강점기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선두동은 ‘선두리’로 바뀌어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한편, 오스굿은 선두리에 속한 자연마을 선두포를 문자 그대로 ‘뱃머리 항구’란 의미로 배들이 해안을 따라 정박한 데서 붙여진 것으로 이해한다. 나) 초장골 정족산 남쪽의 마성과 돌부리[돌뿌리] 사이에 위치하며, 돌부리로 선두포와 경계하는 자연마을이다. 마을 뒷산을 ‘고리장안’이라고 하는데, 유래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마을 구술 채록에 의하면, 매장형태의 하나인 고려장高麗葬의 의미가 확인된다. 그래서 1980년대 이전까지 이 지역은 사람이 거주하지 않았으며, 마을이 형성된 것은 불과 10여 년 전이다. 그런데 고리장안을 조선시대 운영되었던 마장馬場과 연결해 본다면, 이곳은 ‘말 목장 안’이라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으로 짐작된다. 초장골 뒷산에서 확인되는 마성 즉, 목장의 경계와 관련하여 그 형태에서 원형, 즉 ‘고리’라는 이름으로 추정된다. 고리장안은 고리 모양의 말 목장 안을 의미한다고 짐작된다. 다) 무초내[무치내] 선두2리의 지리적 중앙으로 초장골과 동들머리 사이에 위치한다. 산림이 우거지고 풀이 많았다고 전해지며, 바닷물이 동네까지 치밀어 들었다고 한다. 선두2리에서 가장 응달진 곳이라, 응달이라고도 불린다. 무초내는 ‘남자물계’를 중심으로 ‘허까무골’과 ‘남대미골’로 구분되며, 선두포와 마찬가지로 무초내에서 ‘새방죽’으로 이어지는 ‘동편계[동풍께]’라는 개울이 있었으나, 현재는 경지정리 이후 개울이 정리되었다. 마을 뒷산에 ‘행목안’이라 불리는 지명과 동쪽에 ‘갈미봉’, 서쪽에 ‘안산’이 있다. 한편, 현재는 사용되고 있지 않은 산길로 동들머리로 이어지는 ‘낭떠러지 고개’와 ‘벗배고개’가 있다. 라) 동들머리, 선동 동들머리는 선두2리 동남쪽에 위치한다. 마을은 선두포둑에서부터 ‘밝게’까지이며 선두4리와 경계한다. 선두포는 선두언이 완공된 후 배가 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배가 닿을 수 있는 곳에 ‘배터[뱃마당]’가 생기면서 동들머리 마을이 형성되었다. 이후 1974년 선두4리와 화도면 분오리를 잇는 제방이 들어서면서 더 이상 배는 마을로 들 수 없었다. 동들머리는 그 유래가 다양하나, ‘동두언東頭堰’과 ‘동제리東提里’에서 유래한 것으로 짐작된다. 동들머리는 동쪽을 의미하는 동(東)과 들어가는 맨 첫머리를 의미하는 들머리頭를 의미한다. 즉, 선두포둑이 설치되고 그 동편에 있는 마을을 일컫는 마을로, 동쪽 수문으로 물이 들어가는 맨 첫머리에서 유래한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동제리는 1917년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조선오만분의일지형도> 온수리에서 확인된다. 당시 동들머리는 뱃마당 주면으로 거주지가 확인된다. 2) 산 가) 정족산鼎足山 정족산은 강화군 길상면에 두루 걸쳐 있는 산으로 높이는 220m이다. ‘정족鼎足’이란 발이 세 개 달린 솥이라는 의미이듯이 산의 모양을 따라 지은 이름이다. 정족산에는 정족산성 또는 삼랑성, 전등사, 사고史庫 등이 있다. 주요 조사지의 하나인 선두포는 정족산 서남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정족산에서 선두포 방향으로 정족산성서문이 있는 데, 이 부근을 주민들은 ‘옹수깨비’로 부른다. 한편, 정족산 자락 중에서 선두포 주거지 뒷산을 마을사람들은 ‘진두산’이라고 한다. 이는 선두진이 있던 뒷산이라는 의미이다. 나) 길상산吉祥山 길상산은 강화군 길상면 장흥리와 선두리에 두루 걸쳐 있는 산으로 높이는 374m이다. 선두리의 상위 행정구역인 길상면은 이 산에서 따 온 것이다. 이 산은 말을 방목시켜 기르던 곳이다. 조사지인 무초내, 동들머리가 이 산의 북쪽과 서북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으며, 치마바위와 여고개가 있다. <태종실록>에 따르면, 번식시킬 말 1백여 필을 강화도 길상산에 방목하였다. 10필마다 1둔屯을 만들어 목자 2명을 정하고 주위에 담장을 둘러서 말이 흩어져 달아나는 것을 막았으니, 사복시의 청을 따른 것이다. 다) 마리산摩利山 마리산은 강화도에서 가장 높으로 산으로 강화군 화도면에 두루 거쳐 있으며 높이는 472m이다. 마리산은 조사지인 선두2리의 선두포언으로 길상산과 연결된 산이며, 단군왕검이 하늘에 제사를 위해 마련했던 곳으로 신성시되어 왔다. 1947년 오스굿도 선두포 주민들은 선두포와 마리산 사이의 갯벌을 간척한 논을 돌보게 되면서 선두포가 내륙 거주지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3) 고개, 골짜기 길마재 ┃ 무초내 동쪽에 있는 고개로 짐을 싣거나 수레를 끌기 위해 소나 말 따위의 등에 얹는 안장인 길마와 닮아 ‘길마재’라 했다. 선두2리는 길마재로 선두3리와 경계한다. 낭떠러지고개 ┃ 무초내에서 동들머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낭떠러지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돌부리[돌뿌리] ┃ 선두포에서 초장골 또는 무초내로 가는 길로, 돌이 많아서 생긴 고개 이름이다. 돌부리는 선두포와 초장골을 구분해준다. 벗배고개 ┃ 무초내에서 동들머리로 가는 지름길의 고갯길로 낭떠러지고개 근처이며, 벗배나무가 많았다고 전해진다. 벌고개[보리고개] ┃ 선두2리의 동쪽 초입에 위치한 고개이다. 고개 부근에 봉릉이라는 무덤이 있어서 그 뜻을 풀어서 벌고개로 불리었다. 최근에 보리고개가 되었다. 성너머[성너매] ┃ 선두포에서 온수리로 이동하는 산길이자 고개이다. 이 산길은 산능선이 바람을 막아주었다. 그래서 겨울에 마을 주민이 보리고개로보다는 이 길을 더 많이 사용했다. 현재는 사용하지 않으며, 마성과 연결된다. 된부루기 ┃ <조선지지자료>에 의하면, 된부루기라고 불리는 순현淳峴 고개가 확인되나, 마을에서 그 위치가 확인되지 않았다.



마을 역사

조선시대 선두포

<고려사>에 따르면 강화현江華縣은 다음과 같다. 강화현은 본래 고구려의 혈구군[갑비고차甲比古次라고도 한다]으로 바다 가운데 있으며, 정주[개풍지역의 옛 지명]의 바로 서남쪽에, 통진현通津縣의 서쪽에 있다. 신라 경덕왕 때 해구군海口郡)으로 고쳤으며 고려 초에 지금 이름으로 바꾸었으며, 현종 9년에 현령을 두었다. 고종 19년에 몽고 군대를 피해 들어가 도읍으로 삼으면서 승격하여 군이 되었고, 강도로 불렀다. 고종 37년에 중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2,960여 칸이다. 원종 원년에 다시 송도로 환도하였다[부의 동쪽 10리에 위치한 송악리에 옛 궁궐 터가 있다]. 충렬왕 때 인주에 병합시켰다가, 얼마 후 예전대로 복구시켰다. 우왕 3년에 승격하여 부가 되었다. 마리산[부의 남쪽에 있으며, 산꼭대기에 참성단이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단군이 하늘에 제사하던 제단이라 한다] 전등산[일명 삼랑성으로 세상에 전하기를 단군이 세 아들로 하여금 그것을 쌓은 것이다]이 있다. 구음도仇音島·파음도巴音島·금음북도今音北島·매잉도買仍島가 있다. 속현이 3개이다. 한편, <세종실록>에 따르면 강화도호부는 다음과 같다. **강화도호부** 본래 고구려의 혈구군穴口郡인데 신라가 해구군海口郡으로 고쳤고 고려가 강화현으로 고쳐 현종 무오년에 현령을 두었다. 고종 19년 임진[송나라 이종소정 5년]에 몽고병을 피하여 들어와서 도읍을 정하고 강화군으로 승격시켜 강도라 하였다. 원종 원년[원나라 세조 중통 원년]에 다시 송도로 돌아왔다. 지금의 부 동쪽 10리 되는 송악리에 옛날의 궁터가 있다. 홍무 정사년에 부로 승격시키고, 본조 태종 계사년에 예에 의하여 도호부로 고쳤다. 속현이 2이니, 진강현鎭江縣은 본래 고구려의 수지현首知縣인데, 신라가 수진守鎭으로 고쳤다. 하음현河陰縣은 본래 고구려의 동음내현冬音柰縣인데, 신라가 호음으로 고쳐서 모두 해구군海口郡의 영현으로 삼았다. 고려가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서 이내 강화 임내任內에 붙였다. 강화도는 일찍부터 바다의 일부를 둑으로 막고, 그 안 바닷물을 빼내어 육지로 만드는 간척干拓이 활발했다. 선두포도 배가 드나드는 포구가 아니라 바닷물을 막기 위하여 설치한 둑堰, 堤의 기록에서 출발 할 수 있다. 선두포에 제방을 쌓는 일은 효종(1649~1659년)대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했으며, 선두포의 첫 기록은 1678년 11월 17일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와 11월 18일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이다. 또 아뢰기를 강도에 돈대를 축조하는 일은 이미 결정된 바로서 이제 장차 돌을 떠야 하니 토신에게 먼저 고하는 일이 없을 수 없습니다. 대흥성을 쌓을 때의 예에 의하여 봉상시로 하여금 장관이 내려갈 때에 제물을 갖추어 보내게 하는 것이 어떠합니까? 상이 아뢴 말대로 하라고 하였다. 또 아뢰길 강도의 모든 축적은 오히려 오직 적은 것이 걱정이며 군량에 이르러도 또한 심히 부족하니, 곡물이 나는 책략을 조금이라도 늦추는 것은 불가합니다. 선두포의 축언은 유수 윤이제尹以濟가 이미 재가를 받았으나, 신이 이번에 돌아오는 길에 김포·매향포를 지나왔는데 제언을 쌓으면 수백 석 경작할 전지가 있으니, 버려 비어두고 쌓지 않았으니 진실로 아깝습니다. 어영청에서 백성을 모집하여 제언을 쌓으려고 하며 장차 곡물이 생산된 그 후에는 경청에서 가져다 쓰는 것이 불필요하니, 모두 강도 본영의 미리 정해 놓은 창고에 비축하면 후에 반드시 좋은 결과가 있을 것입니다. 고로 감히 전합니다. 상이 아뢴 말대로 하라고 하였다. 이 기사는 행 병조판서 김석주金錫胄(1634~1684년)가 궐에 들어가 임금을 알현하여 강도에 돈대를 축조하기 위해 토신에게 고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이미 강화 유수인 윤이제尹以濟(1628~1701년)가 선두포에 제방을 축조하기로 결정했다. 간석지(干潟地)를 조성하기 위해서는 제방의 거리가 짧아야 하며, 제방 안쪽으로 많은 경작지를 얻을 수 있어야 한다. 선두포는 마니산과 길상산 사이의 포구이다. 당시는 강도 서남쪽 가릉포嘉陵浦[현 화도면과 양도면 사이]까지 밀물에 따라 접근할 수 있기 때문에 선두포에 제방을 쌓기로 결정했다. 이처럼 선두포는 포구가 형성되면서 마을이 형성에서 되었겠지만, 기록으로는 선두포에 제방을 쌓는 일을 논의한 것에서부터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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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선두리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서는 1910년부터 한국의 식민지적 토지소유관계를 명확히 한다는 명목으로 임시토지조사국을 설치하여 우리나라 전체 토지를 대상으로 토지조사사업을 단행했다. 이 사업은 1912년 토지를 대상으로 실시하고, 1918년,임야까지 확대했다. 국가기록원에서 공개된 자료에 의하면 일제강점기인 1912년 임시토지조사국에서 선두리 토지 전체를 번지별로 조사했으며, 이후 1918년 선두리의 임야 즉, 산 1번지로부터 516번지까지 조사했다. 당시 선두리는 1번지로부터 1086번지까지 구획되어 조사되었다. 현재 선두2리는 1912년 조사 당시 390번지에서 839번지까지로 짐작된다. 당시 임시토지조사국에서는 토지를 조사하고 토지조사부土地調査簿에 각 번지별로 토지를 기록하였다. 토지조사부는 각 지번地番별로 지목地目, 가지번假地番, 지적地積, 연월일年月日, 소유자所有者, 주소住所, 씨명氏名, 적요摘要 순으로 서식이 갖춰 조사사항을 기록하였다. 단편적인 조사 기록임에도 불구하고, 이 자료는 당시 선두2리에 거주했던 주민을 추정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토지조사부에 의해서 선두2리의 토지 지목을 구분하면, 일반적으로 답沓[논]과 전田[밭]이 대부분이다. 그 밖에 대垈[대지], 잡종지雜種地, 지소池沼, 분묘지墳墓地 등으로 구분했다. 그러나 토지조사부에 가장 특이한 점은 ‘적요’란이다. 국유를 제외하고, 소유자가 있는 토지는 ‘분쟁지○○호’로 표기하여 소유자 다툼을 벌인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아래 지도는 조선총독부 육지측량부에서 대정 5년 측도해서, 대정 6년에 제판된 강화군 온수리 지도에서 선두리에 해당되는 부분을 발췌한 것이다. 대정 5년은 1916년이다. 즉, 이 지도는 1916년에 측량된 것으로 근·현대 실측이 반영된 조사지 최초 지도이다. 이 지도상으로 현재 선두2리는 선두포, 동제리東堤里 두 자연촌으로 이루어졌다. 1872년 작성된 <강화부전도>에 동두언東頭堰으로 표기되었던 동제리는 그 의미상 선두포둑이 만들어지고 그 동쪽 들머리의 둑이라는 의미이다. 동제리는 현재 동들머리 자연마을로, 그 중심지는 현재 동들머리 북서쪽인 길화교삼거리 일대이다. 이 지도를 통해서 선두포에서는 1706년 9월 6일 공사를 시작하여 1707년 5월 25일에 완공한 선두포둑과 둑을 만들면서 농지가 확보되어 논농사가 행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선두포는 정족산 남서쪽으로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정족산성 서문과 마을을 연결하는 도로가 확인된다. 한편, 현재의 무초내 마을과 선두4리와 경계지점에 해당하는 양암돈대의 터와 선두1리에 해당하는 월오지月嗚池가 확인된다.



경성 11호 강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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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선두2리

인쇄일인 단기 4289년은 1956년이다. 따라서 이 지도는 1947년 오스굿이 선두포를 조사한 시점으로부터 가장 근접한 선두포 지도이다. 측량한 연도가 확인되지 않지만, 이 지도는 적어도 1956년 이전의 선두포로서 1950년대 초반의 선두포 지도라고 보는 것이 적절할 듯하다. 또한 이 지도는 기본적으로 일제강점기인 1916년의 선두포 지도와 큰 차이를 발견할 수 없다. 그래서 오스굿이 조사한 시점인 1947년 선두포도 이와 큰 차이는 없을 것으로 짐작된다. 세부적으로 이 지도를 통해 살펴보면, 현재 동들머리로 추정되는 동제리의 한글지명으로 ‘동울오리’로 확인된다. 그리고 지금의 보리고개로가 길상면소재지인 온수리로 연결되듯이 하도면과 길상면을 연결하는 도로가 선두포와 무초내를 사이를 가로 지르고 있다. 또한 선두포, 무초내, 동들머리로 연결되는 소로가 확인되어, 오스굿이 언급한 마을내의 도로 형편이 잘 나타난다. 1966년 발행을 근거로 이 지형도를 통하여 1960년대 마을의 변화상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1950년대의 선두리와 비교할 때 외형이 크게 변화했다. 먼저 1950년대 선두포둑으로부터 선두1리까지 이어지는 수로가 개울로 확인된다. 1950년대 초반까지도 둑 안쪽으로 큰 바닷물이 드나들었으나 이 지형도에서는 둑 안쪽이 모두 논농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선두포는 현재 선두1리와 경계 지역인 ‘넘말’은 잘 구분되지 않으나, 윗말과 아랫말은 구분된다. 그리고 선두포 앞과 무초내 앞에서 각각 흐르는 ‘서편계’와 ‘동편계’가 ‘안산모퉁이’이 앞에서 만나 방죽을 이루고 있다. 다만, 안산모퉁이 앞에 ‘새방죽’은 확인되지 않는다. 오스굿이 언급한 물고기 잡이는 ‘서편계’와 ‘동편계’에서 이루어졌다. 또한 무초내에서 동들머리로 이어지는 고갯길인 ‘낭떠러지 고개’와 ‘벗배 고개’가 확인된다. 한편, ‘동제리’라는 지명은 확인되지 않고, ‘동들머리’가 처음으로 확인되며, 그 위치는 선두포둑 부근에서 남쪽으로 옮겨졌다. 가옥 밀집도를 고려했을 때, 선두포와 동들머리가 큰 차이를 보이지 않고, 무초내는 조금 작은 마을로 확인된다. 선두포는 24가구, 무초내는 11가구, 동들머리는 22가구가 확인된다. 도로는 현재 사기리와 동들머리가 만나 남쪽 해안도로로 이어지는 해안남로가 대로로 확인된다. 1960년대 선두포와 무초내 일대의 들에서는 모두 벼농사가 행해졌다. 한편, 국토지리정보원에서 공개된 1966년 항공지도에 의하면, ‘서편계’와 ‘동편계’가 ‘안산모퉁이’이 앞에서 만나는 ‘새방죽’은 확인된다.



경제생활

농업

농업은 토지를 이용하여 인간에게 유용한 동·식물을 길러 생산물을 얻어내는 산업이다. 오스굿이 조사했던 1947년에서부터 현재까지 선두2리의 경제활동에 있어,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농업이다. 당시 선두포 마을에 거주하고 있던 가구 가운데 농사를 짓지 않던 가구는 3가구에 불과했다. 오스굿의 민족지 내용에 따르면 선두포 마을 주민 일부가 당시의 삼구리(온수리)에서 5일장이 열릴 때 장사를 했거나, 마을 뒤의 숲에서 나무를 해서 사용하거나 팔기도 기술되어 있다. 농업활동을 하지 않았다고 기록된 3가구도 농업활동은 하지 않았지만, 시장에 물건을 파는 상업 활동 등의 경제생활을 했을 것으로 추정 된다. 그만큼 농사는 선두포 마을주민에게 있어 가장 큰 경제활동이자 소득원이었다. 논농사는 주로 마을 앞쪽에 위치한 논에서 이루어 졌고, 밭농사는 이보다 작은 규모의 마을 주변 밭과 마을 뒤편 임야에서 이루어졌다. 이처럼 당시 선두포 마을에서 농사는 가장 중요한 경제활동이었는데,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현재 까지도 선두2리에 있던 가구들의 대부분은 농업활동을 통해 가계의 소득을 만들고 있다. 70년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선두2리 마을 일부 가구의 주요 소득이 상업 활동이나, 어업활동 등을 통해 이루어지는 등의 작은 변화는 있었지만, 농업이 마을 가구의 가장 큰 수입원인 것에 큰 변화가 없었다. 따라서 선두2리의 경제생활 조사에서도 가장 많은 부분을 농업이 차지할 수밖에 없었다. 농업활동 가운데,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벼농사를 중심으로 한 논농사와 고구마, 고추, 무, 배추, 콩, 들깨, 참깨 등 밭농사는 재배 비율에 있어 오스굿의 조사 당시와 많은 변화를 보이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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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업

과거에도 강화도 해안가 마을은 어업이 발달했기 때문에, 오스굿이 1947년 선두포 마을을 조사했던 당시 책 도판에도 ‘그물을 말리는 어선’이 등장한다. 그 어선이 정박한 지역은 선두2리 동들머리로 그곳에는 배를 정박하는 포구가 있었고 6가구가 어업에 종사하였다. 또한 강화도 내 목선 제작으로 이름을 날린 배목수 故 조대준(1919년생)이 동들머리에 거주하며 목선을 만들었고, 어업을 생업으로 삼지 않은 일반 선두2리 주민들은 선두포 앞 갯벌에서 갯지렁이, 가무락, 반장게, 숭어, 망둥어, 게, 낚지 등의 어종을 잡았다. 그 가운데 갯벌에서는 갯지렁이와 가무락을 많이 잡아 농가에서도 많은 수익을 올렸다. 갯지렁이는 낚시 먹잇감으로 가무락은 조개용으로 상인들에게 판매하였다. 그리고 갯고랑에서는 망둥어, 숭어 등을 잡았으며, 숭어는 사리(음력 보름과 그믐 무렵에 밀물이 가장 높은 때를 뜻함)시기 뛰어다닐 정도로 많았다. 또한 반장게는 칡게보다 크다. 다만 다른 어촌과 달리 선두포 갯벌에는 바지락, 굴 등의 조개는 없었는데, 그것은 동들머리 갯벌에 모래가 없는 뻘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갯벌 갯고랑 앞, 뒤로 그물을 발로 밟아 설치한 후 썰물 때 갯고랑에 머문 장어, 망둥어 등을 잡았다. 그물 길이는 300m에 이를 정도로 길었으며, 이 그물을 ‘개무지(게막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개무지 그물을 구입하는데 많은 비용이 들기 때문에 이것은 여력이 있는 개인이 설치하여 잡았는데, 선두2리 보다 선두4리 인근 갯벌에서 잡았다. 동들머리의 포구는 1975년 동주농장이 들어서기 전까지 포구로서 기능을 수행하였으나, 조선시대 때 축조 된 선두포제방에서 선두4리 포구 앞까지의 갯벌이 간척사업 후에는 농토로 바뀌었다. 따라서 자연스레 갯벌 어업이 사라지고 어업종사자도 2017년 현재 1명에 불과하다. 동들머리 갯벌은 용인민속촌 사장인 정영삼이 간척하였으며, 간척사업으로 사라진 갯벌에 대한 보상에 대해 20년간 법적투쟁을 벌였으나 결국 시효가 지나 보상 받지 못하였다. 간척지 작업에는 선두2리 주민들 상당수가 참여하였으며, 경운기 등을 소유한 사람들은 간척사업에 필요한 돌을 나르는 작업에 동참하였다. 선두4리 선착장에는 개량 안강망 어선은 7톤 규모로 4척이 있는데, 5톤 미만의 작은 어선과 한 조를 이루어 작업을 한다. 즉 안강망 어선은 24시간 내내 고기를 잡고, 작은 어선은 어부나 안강망에서 잡은 물고기를 운반하는 운반선으로 이용된다. 또한 포구에서 안강망 어선을 정박하거나 출항할 때 끌어내는 역할도 한다. 그것은 썰물 때 갯고랑에 바닷물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개량 안강망은 일반 안강망과 달리 그물 아가리를 고정하는 재질이 쇠 대신 PVC(폴리염화비닐)이기에 수심이 깊고 바람이 강하고 물살에 센 곳에서는 사용할 수 없다. 따라서 강화도와 장봉도 사이의 인근 해역에서 병어, 꽃게, 밴댕이 등을 잡는다. 개량 안강망의 아가리 길이는 20m, 그물 길이는 110m이고, 하루에 4번 조업한다. 썰물 때 2번, 들물 때 2번 한다. 조업 장소의 수심은 20m 정도가 된다. 사리 때 1번 나가면 아침 7시부터 저녁 4시까지 작업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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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산업

축산업은 그 내용이 매우 방대하고 다양하여 육우생산업, 낙농업, 양돈업, 가금생산업업 등과 같은 생산 위주의 산업과 육가공업, 유가공업, 부산물가공업 등과 같이 축산물의 가공과 이용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산업 등으로 구별된다. 그 중에서 이번 조사에서 다룰 내용은 가축이나 가금家禽28) 중에서 농업과 관련이 있는 이른바 농용가축農用家畜을 사육하여 이것을 증식하고,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생산, 이용하는 축산업이다. 오스굿이 조사한 민족지에서도 마을의 축산업과 관련된 내용이 나온다. 선두포 마을의 일부 주민들은 당시 대부분 집에서 적은양의 가축을 길렀다. 하지만 그 수가 생업에 포함될 만큼 많은 수는 아니었다. 주로 닭이나 돼지를 많이 길렀고, 가정 경제상황이 보다 나은 집은 소를 기르기도 했다. 다소 여유가 있는 가정에서는 소를 1~2마리 길렀고, 돼지를 기르거나, 닭을 기르는 집은 17가구였다. 소는 농사에 필요한 노동력과 거름 등을 제공해 주어 가정의 필요성이 높은 가축이었지만, 가격이 비싸 8가구만이 한 마리 이상을 기르고 있었고, 농사를 위해 7가구에서 같이 사용하고 있었다. 새끼돼지나 닭을 기르는 가구는 많았다. 이들을 농경활동에 이용되지는 않았지만, 주민들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지 않아, 대부분 식용으로 이용하지 않고, 판매하였다. 특히 이들의 주된 가치는 농사에 필요한 거름을 제공해 주는 것이였다.29) 돼지는 우리를 화장실 가까이에 지어서 사람의 배설물을 직접 먹여 돼지를 사육했다. 그 돼지의 배설물은 다시 모아 농사에 필요한 거름으로 사용했다. 2000년대 초반까지 선두2리에서 돼지를 사육하거나, 소를 기르는 가구는 약 10여 가구였다. 하지만 전염병과 가격의 하락 등으로 현재 선두2리에서 돼지사육농가는 사라지고 일부 가구에서 적은 양의 소를 기르고 있다. 당시 돼지를 기르던 농가는 농사와 더불어 주요 생업활동으로 돼지사육을 하였다. 하지만 현재는 돼지를 기르던 가구도 농사를 주요 생업으로 하며 살아가고 있다. 소의 경우도 돼지처럼 농사와 더불어 생업으로 기르는 가구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소 값의 하락과 사료 값의 상승 등으로 일부 농가는 소 사육을 포기하고 농사에 전념하고 있다. 현재 일부 농가에서는 아주 적은 양의 닭을 기르는 가구도 있다. 10여 년 전까지 선두2리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진 축산업은 양돈업이다. 양돈업은 돼지를 기르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축산업을 말한다. 2000년대 초반까지 선두2리에는 약 4가구 이상의 양돈업을 하는 가구가 있었다. 대표적으로 동들머리에 거주하는 심상점과 김영선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약200마리 이상의 돼지를 전문적으로 길렀다. 현재 선두2리의 이장인 심상점은 인천에 살다 1980년대 중반에 돼지 사육을 위해 선두2리로 귀농했다. 1990년대 중반까지 양돈업은 괜찮은 수익을 주는 사업이었다. 하지만 IMF 외환위기가 닥친 1998년 이후 국민들의 육류 소비량이 눈에 띄게 줄어들면서 첫 번째 위기를 맞게 된다. 하지만 심상점은 위기를 잘 이겨내고 2000년대 초반까지 양돈업을 유지하였다. 하지만 2002년 이웃 마을인 화도에 돼지콜레라가 창궐하면서 다시 한 번 위기를 맞게 된다. 2002년 당시 선두2리에서 가장 많은 돼지를 사육했던 심상점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식생활

식생활의 구성과 변화

**쌀 요리(Rice dishes)** 먼저 쌀 요리부터 살펴보면 당시 선두포 사람들은 일반 쌀에 보리, 콩, 감자, 수수, 기장을 섞어 먹었다. 밥을 짓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쌀은 3번 정도 씻어서 무쇠솥에 담고 120% 정도의 물을 붓고 밥을 안친다. 밥이 끓으면 뚜껑을 열고 거품 위에 부채질을 하면서 아궁이의 불을 줄인 뒤 10분 정도 뜸을 들인다. 여기에 보리, 콩 등 다른 곡물을 섞을 경우 별도로 끓여서 익힌 후 솥에 조리되고 있는 쌀과 섞는다. 솥에 밥을 할 경우 숭늉이 만들어지는데, 식사의 마지막에 먹는 음식이었다. 밥은 가정의 경제형편이 잘 드러나는 음식이었다. 오스굿의 선두포 민족지에도 경제형편이 좋은 가정은 보리를 3분의 1 이상 섞지 않고, 더 부유한 가정은 이보다 더 적게 섞거나 아예 섞지 않았다. 이로써 보리는 영양이나 맛에 상관없이 경제 형편을 보여주는 사회적 상징이 되었다. 1947년뿐만 아니라 쌀을 풍족하게 먹을 수 있는 시기가 오기 전까지 이런 일은 일상적으로 볼 수 있는 일이었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농사를 많이 짓는 집도 삼시세끼 다 흰 쌀밥을 먹기는 어려웠고, 남의 논을 빌려 경작하는 가정은 삼시세끼를 모두 보리밥만 먹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흰 쌀밥은 집안 어른의 생신이나 제사를 지낼 때만 먹던 것이었고, 이마저도 먹지 못하는 집은 흰 쌀을 조금 섞어 밥을 지었다. 쌀이 없었기 때문에 쌀과 섞을 수 있는 것은 다 넣어 먹었다. 감자, 콩, 잡곡 등 현재는 건강을 위해서 섞어먹지만 과거에는 양을 늘리기 위해서 먹던 것이었다. 보리밥은 보리의 양이 많으면 식감이 거칠어서 먹기 힘들었다. 그래서 감자를 같이 쪄서 밥에 으깨서 식감을 부드럽게 만들고 양도 늘려서 먹었다. **김치(Kimch'i)** 김치를 만드는 것은 대단히 많은 시간에 걸쳐 축적된 경험을 요하는 작업이다. 또한 오스굿이 김치를 ‘한국민족(국가)음식’이라고 표현하고, 종류별로 조리방법까지 상세히 설명하는 이유는 당시에 가장 중요한 반찬이 김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사실은 주민들의 이야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주민들은 식재료가 다양하지 않던 시절에 반찬은 짠지와 김치가 전부였다고 말한다. **국(Soups)** 국은 2번째 쌀을 씻은 쌀뜨물을 기본 육수로 하여 국의 명칭을 결정하는 간장, 된장, 고추장, 김치 등의 재료들이 더해진다. 여기에 기본 장류인 간장, 된장, 고추장에 부수적인 재료들이 더해져 다양한 국이 만들어진다. 오스굿은 간장, 된장, 고추장, 김치를 기본으로 하여 거기에 다양한 재료를 넣고 끓인 15가지의 국을 소개했다. 간장으로 간을 하는 국은 닭고기, 생선, 두부, 감자, 콩나물을 재료로 하여 만든다. 그러나 주민들은 간장으로만 간을 하는 국은 무국, 콩나물국이 아니면 잘 먹지 않았다고 한다. 된장으로 간을 하는 국은 늙은 호박 또는 애호박과 야채 겉 부분(Squash or pumpkin with vegetable tops)4)을 넣고 끓인 것, 아주 짜게 담근 무김치(무짠지)를 넣고 끓인 것, 짜게 담근 오이김치(오이지)를 넣고 끓인 것, 작은 무를 넣고 끓인 것이 있었다. 오스굿이 말하는 ‘vegetable tops’는 채소의 겉 부분, 다시 말해 우거지를 지칭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주민들은 채소나 시래기, 우거지 등을 넣고 끓인 된장국을 가장 흔하게 먹었지만, 무짠지나 오이지를 재료로 하는 된장국은 경험한 적이 없다고 이야기한다. 고추장으로 간을 하는 국은 두부, 생선, 아주 짜게 담근 무김치, 짜게 담근 오이김치를 재료로 하는데, 오스굿의 말처럼 아주 짜게 담근 무김치와 짜게 담근 오이김치는 일반적이지 않았다. 두부를 넣고 하는 것은 두부찌개이고 생선을 재료로 하는 것은 매운탕으로 볼 수 있으나 일상적으로 먹을 수 있는 음식은 아니었다. 두부는 보관이 어려워 여름에는 만들기 어렵고 정월 무렵에만 만들어 먹었다. 김치를 넣고 끓인 국은 ‘크게 썬’ 무김치와 배추김치를 재료로 하는데, 두 가지 전부 지금의 김칫국 또는 김치찌개라고 할 수 있다.



주생활

가옥유형과 주생활의 변화

강화도 가옥은 평면구성에 따라 一·ㄱ·ㄴ·ㄷ·ㅁ·튼ㅁ자 등 6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으나, 일반 민가에서 불리는 명칭은 일자형, 기역자형, 튼입구자형, 똬리집(미음자형) 등 네 가지 정도이다. 니은자형은 보는 각도를 달리하면 기역자형이 되는 셈이고, 기역자형과 니은자형의 조합은 전체 모습은 튼 미음자형3)이지만 민가에서는 그리 부르지 않고 그저 기역자형 집이라고 한다. 김광언은 튼입구자형(미음자형)이 ㄷ자로 오인할 수 있어 이런 유형의 집을 ‘튼ㅁ자형’으로 명명하였으며,4) 이희봉과 권오경은 그것이 타당하다고 여겼다. 1947년 오스굿은 선두포의 가옥 유형을 일자형(RECTANGULAR HOUSE)·L자형·L자 2개가 마주한 형·U자형 등 4개의 유형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것을 우리식으로 나타내면 일자형, 기역자형, 튼ㅁ자형, 튼입구자형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오스굿은 가옥의 유형별 수량과 특징을 세밀하게 정리하고 있는데, 일자형 가옥은 1채 정도인 것을 보면 당시에 보편적인 가옥 유형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통상 일자형 가옥은 생활형편이 가난한 사람들이 최초에 짓는 가옥 유형인데 오스굿은 ‘건축비용이 가장 저렴하고 원시적인 형태이며 6명의 가족이 거주하기에는 적절한 규모가 아니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현재 선두포에 일자형 가옥은 존재하지 않는다. **가옥 공간의 특징** 오스굿은 민가 유형별 공간을 연상되는 영어단어 알파벳으로 표기하여 정리하였다. 즉, 침실은 B, 앞마당은 C, 마루는 D, 출입문은 G, 부엌은 K, 마당은 M, 사랑채는 R, 곳간은 S, 흙바닥은 E, 종이 장판을 깐 바닥은 P, 나무 바닥은 W, 벽은 〓 :, 뒷간은 £ : 등으로 표기하였다. 그리고 유형별 가옥 4채의 평면도를 선보이고 있는데, 일자집의 경우는 부엌과 방으로 이루어진 구조이고, 기역자형은 건넌방(거름방), 곳간, 안방, 부엌으로 이루어져 있다. 기역자형의 경우 건넌방과 안방 사이에 마루(봉당)가 있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집의 경우는 아직 마루가 설치되지 않은 상황이다. 이런 유형의 가옥은 강화도 지역 내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 땅바닥으로 이루어진 곳간이 후에 마루로 발전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튼입구자형의 경우는 부엌-안방-마루-건넌방-곳간(2)-사랑채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곳간의 경우 1개는 벽과 문이 달려 있고 바닥은 나무로 되어 있으며, 다른 하나는 땅바닥으로 문이 없다. 이것으로 보면 전자의 것은 곳간 또는 광으로 사용한 것이고 후자의 것은 나뭇간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주거생활 변화** 상량식은 요즘에도 중요한 건축의례의 하나로 진행되고 있다. 비록 과거 보다 참여인력이나 절차가 다소 간소화되었지만 돼지머리, 삼색과일 등을 진설하고 집주인이 절을 하면서 축언을 올리고, 주위의 필체가 좋은 사람이 상량문을 적어준다. 그리고 상량식이 끝나면 의식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차린 제물을 가지고서 음복을 한다. 다만 바뀐 것이 있다면 의례의 주최가 남성이며, 상량을 올릴 때 사용한 광목을 목수에게 선물하는 풍속에서 돼지머리 입에 꽂아둔 돈을 목수들이 차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