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주군 적상면 북창리 내창마을은 덕유산의 지맥인 적상산의 산줄기가 북쪽을 향해 U자의 삼태기 모양으로 열린 북창천 골짜기를 따라 자리 잡고 있다. 적상산(1,034m)의 정상부를 기준으로 서쪽의 산줄기는 무주읍 당산리와 경계를 이루며 무주읍 당산리 유속마을 앞의 상곡천(裳谷川)까지 뻗어 있으며, 동쪽의 산줄기는 절산(481.6m)으로 이어져 북창리의 또다른 행정리인 초리마을과 경계를 이루며 내창마을의 자연마을인 외창(바깥북창)으로 이어진다. 내창마을은 내창(안북창), 외창(바깥북창), 자하동(잣골) 3개의 자연마을을 포함하고 있는데, 내창은 해발고도 300~350m 내외, 외창은 해발고도 200m 내외, 자하동은 해발고도 300m 내외에 입지하고 있으며, 외창의 경우 내창마을에서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 마을이다. 북창리 내창마을로 이어지는 골짜기는 북창천이 가장 큰 본류를 형성하고, 내창(안북창) 마을의 안골천과 마을 입구에서 합치며, 크고 작은 골짜기의 계류를 모아 외창(바깥북창) 마을을 통과한 후 상곡천과 합류한다. 내창마을은 적상산에서 흘러내리는 하천의 개석(開析, dissection)으로 곳에 따라서는 좁고 깊은 골짜기를 형성하고 있기도 하며, 마을 농경지 상당 부분이 분포하는 잿들과 같은 고위평탄면을 형성하고 있기도 하다. 이처럼 내창마을의 다양한 지형경관은 이곳에 기대어 사는 사람들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산촌의 독특한 문화경관을 낳기도 하였다. 좁은 골짜기를 따라서는 논농사를 위한 계단식 다랭이논이 분포하고, 산지의 완경사면을 따라 있는 고위평탄면에서는 밭농사를 일구는 산골 사람들의 풍경을 그대로 그려내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의 거주공간이자 생활공간인 마을 역시 산지의 경사면을 따라 오밀조밀하게 군집을 형성하고 있는 산촌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무주군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한반도의 가장 내륙에 속해 있는 곳으로 기후환경에 있어서도 기온의 일교차, 연교차의 변화량이 큰 대륙성기후의 특징을 나타낸다. 그러나 북창리 내창마을주민들의 제보에 의하면 무주읍이나 다른 곳에 비해, 내창마을은 자연재해에 큰 영향을 받지 않는 곳이다. 특히 마을 남자 노인들 중에는 이런 자연 재해가 이 마을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이 마을이 풍수적으로 좋은 터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라 말하고 있기도 하다. 내창마을 내창(안북창)에서는 안골천에서 나오는 샘물을 상수원으로 이용하고 있다. 지금과 같이 간이상수도 시설을 갖추기 전에는 안골에 있는 샘과 마을 곳곳에 있는 샘을 이용해 농업 및 생활용수로 이용하였지만, 수량이 모자라 샘이 말라버리거나 물이 깨끗하지 못해 이용하기 어렵게 된 곳도 있다. 지금의 간이상수도 시설은 1995년 무렵 설치하였는데, 가뭄에 따른 수량 부족의 문제가 노출되며, 시설이 노후하고 위생상태가 좋지 못하여 관리와 정비에 많은 시간, 비용, 인력이 소모되었다.
북창리 내창마을은 적상산에서 뻗은 산줄기 사이로 크고 작은 골짜기가 형성되어 있으며, 골짜기를 따라 곳곳에 농경지와 가옥들이 분포하고 있다. 이러한 지형적 분절에 따라 북창리 내창마을은 내창(안북창), 외창(바깥북창), 자하동(잣골) 3개의 자연마을로 나뉘어 있다. 북창리 내창마을은 북창리 중에서도 적상산 안쪽으로 자리한 마을이기 때문에 ‘안[內]’에 위치한 ‘북창’이라는 뜻에서 ‘내창’이라 부르게 되었다. 북창리가 법정리로 구획되면서 북창리의 행정리로서 내창마을의 이름이 붙었다. 내창(안북창)은 대부분이 집들이 한데 모여 있는 집촌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불과 20~30년 전만 해도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었다고 한다. 1980년대 이전에는 마을주민들의 농경지가 분포하고 있는 잿들, 가장골, 늠바, 장구골 등에도 가옥들이 분포하고 있었다고 한다. 화전정리 사업과 화전민 이주정착, 농촌 가옥구조 개선 사업 등이 이루어짐에 따라 해발고도가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던 가옥들이 마을 아래로 내려오는 결과를 낳았다. 외창(바깥북창)마을은 북창리 내창마을 중 지형적으로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 촌락으로 적상산 산줄기의 가장 끝자락을 따라 내창(안북창)에서 흘러내려오는 북창천 골짜기 좌우로 형성된 마을이다. 외창마을은 마을주민들 사이에서 ‘새터’로 불리는데, 곧 마을의 형성시기가 오래지 않았음을 일러주고 있다. 외창마을은 적상면 포내리에서 흘러내려오는 상곡천이 형성한 하안단구(河岸段丘)를 따라 농경지가 널리 분포하고 있으며, 내창(안북창)과 외창(바깥북창) 주민들이 경작하는 논이 대부분 이곳에 위치하고 있다. 자하동(잣골)마을은 내창(안북창)을 기준으로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자하동은 적상산의 산줄기의 능선부를 따라 무주읍 당산리의 유속마을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자하동은 내창(안북창)으로의 접근이 어려워 주민들 간의 교류와 정보교환이 적으며 주민들의 생활도 비교적 독립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자하동에는 현재 7가구가 거주하고 있으며, 밀양 박씨들이 다수를 이루고 있다. 자하동으로 가기 위해서는 무주읍 당산리 유속마을에서 상곡천을 건너는 상곡교 다리 바로 전에서 오른쪽으로 나 있는 가파른 포장도로를 따라 올라가야 한다. 자하동은 마을로 해가 넘어갈 때 붉은 노을이 비친다 하여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북창리의 마을 이름은 창고와 관련되는데, 적상산성에서 성을 지키는 군사들의 군량미와 각종 보급물품을 저장하였던 창고가 있던 터에서 유래한다. 적상산성과 관련하여 여러 고문헌은 서창(西倉), 북창(北倉), 성창(城倉) 등이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산성의 서쪽에는 서창을, 북쪽에는 북창을 두었으며, 성내에는 성창을 두었던 것이다. 내창은 북창마을로 마을입구에 생긴 마을을 바깥북창이라 부르면서 안북창으로 부르게 되어 내창이라는 지명이 붙게 되었다. 북창리는 행정구역상 전북 무주군 적상면에 속해 있다. 북창리는 법정리명이며, 북창리는 행정리로 내창(內倉)과 초리(初里)로 나뉜다. 이 글에서 살펴보는 마을은 북창리의 행정리 중 하나인 내창(內倉)이 중심이 된다. 북창리 내창마을은 적상산의 산록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로, 적상산과 북창마을은 지리적으로 가까이 있다는 점 외에도 역사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적상산은 무주군의 가장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지역을 구분하는 경계가 되기도 하였으며, 적상산 능선을 따라 축성된 적상산성 등이 있어 군사적 요충지로 여겨져왔다. 그뿐만 아니라 적상산성 안에는 조선시대 『왕조실록』과 『선원록』 등을 보관하는 사고가 있었던 장소이기 때문에 일찍부터 주목을 받아왔다.
북창리가 소재하는 적상면은 삼한시대부터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적천(赤川)’, ‘단천(丹川)’, ‘주계(朱溪)’ 등에 속했던 곳이다. 고려 말 최영 장군이 탐라를 토벌하고 돌아가는 길에 이곳을 지나다가 적상산을 보고 천혜의 요새가 될만한 곳이라고 여겨 왕에게 성을 쌓을 것을 건의하였다고 한다. 조선 태종 14년(14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할 당시 무풍현과 주계현을 합쳐 무주현이라 하였다. 이때 용담거리로 알려진 적상을 유가면이라 하였는데, 지금의 사천리, 삼가리, 방이리, 삼유리 그리고 안성의 진도리 등을 관할하게 되었다. 적상산의 ‘적상’이라는 지명은 고려 말 최영 장군이 이곳을 지날 무렵 이 마침 가을이라, 병풍처럼 깎아세운 듯한 절벽 산 위에 붉게 물든 가을단풍이 마치 여인의 치마폭처럼 아름답다 하여 붉을 적(赤)자 치마 상(裳)자를 써서 적상이라 이름 붙였다는 전설이 있다. 조선시대에 간행된 여러 지리지 자료 등을 살펴보면 북창이 자주 등장한다. 그만큼 북창은 일찍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북창리의 마을 이름은 창고와 관련있는데, 적상산성에서 성을 지키는 군사들의 군량미와 각종 보급물품을 저장하던 창고가 있던 터에서 유래한다. 적상산성과 관련하여 여러 고문헌은 서창, 북창, 성창 등이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산성의 서쪽에는 서창을, 북쪽에는 북창을 두었으며, 성내에는 성창을 두었다. 내창은 북창마을로 마을입구에 생긴 마을을 바깥북창이라 부르면서 안북창으로 부르게 되어 내창이라는 지명을 붙이게 되었다. 북창리는 조선시대에는 상곡면에 속했는데, 상곡면은 지금의 상곡천 골짜기를 포함하는 지역에 한정되어 있었다.
북창리 내창마을은 일제강점기인 1914년에 단행된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이전의 행정구역 편제와는 다른 새로운 행정체계에 속하게 되었다. 이전의 마을 지명에서 글자를 조합하여 만든 삼가리(상가+중가+하가), 사산리(내사리+마산리), 삼유리(상유+중유+하유), 방이리(고방+이동) 등 신생 지명이 나타나면서 지역의 정체성과 역사가 고려되지 않은 지명으로 혼란을 가져왔다. 그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지리적 특성과 생활권을 가졌던 유가면과 상곡면이 적상면으로 통합되고 유가면 지역에 면사무소가 위치하면서 상곡면 지역에서는 행정업무를 위해서는 유가면을 찾아야 하는 실생활의 불편을 가져왔다. 1961년 북창리의 행정적 구분을 위해 분구되면서 ‘북창리’가 포함된 북창리1구는 ‘안에 위치하고 있는 북창’, ‘밖에 위치하고 있는 북창’의 자연마을을 구분하기 위하여 ‘내창(안북창)’과 ‘외창(바깥북창)’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 그 후 북창리1구는 1972년 내창, 외창, 자하동 중 가장 큰 마을인 내창의 이름을 따서 ‘내창’으로 통칭하게 되었다.
북창리 내창마을은 1980년대 후반부터 급격한 변화를 경험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무주양수발전소’의 건설로 시작된 변화였다. 발전소의 건설은 적상산과 인근지역의 지형경관의 변화를 가져왔음은 물론 주민들의 생활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무주양수발전소는 적상산 정상부에 가까운 해발 800m 고지에 담수호를 만들고 그곳에서 수직으로 적상면 포내리의 해발 200m에 이르는 곳까지 물을 떨어뜨려 큰 낙차(落差)를 이용해 전기를 생산하는 시설이다. 무주양수발전소는 1989년에 착공하여 1995년에 준공되었다. 1980년대 적상산에 발전소가 생긴다는 이야기가 들리더니, 1989년에는 발전소를 짓기 위한 공사 차량이 드나들도록 공사용 도로가 착공되기 시작하였다. 무주 읍내에 나가야 비로소 자동차를 구경하였는데, 도로공사가 시작되고서는 마을 앞까지 자동차가 드나들었다. 공사현장에서는 많은 인부가 필요했고, 그 수요를 해결하기 위해 마을에도 손을 내밀었다. 당시까지 마을 사람들은 농사밖에 모르고 살았는데, 그때부터 벽돌도 나르고 공사장의 인부로 참여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마을의 청장년층은 농사보다 공사현장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이 당시 마을주민들 중 청장년층은 마을에서 가까운 공사현장에서 일을 하며 돈을 벌 수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이 공사현장에 참여하였다. 이처럼 마을 사람들은 발전소 건설과 함께 경제 수준이 비교적 향상되었으며, 농사 이외의 다른 생업활동이 시작되었고, 외부세계의 시대적 변화를 가깝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곧, 외부와의 소통이 잦아지면서, 마을 밖의 세계에 대한 정보의 양이 확대되었는가 하면 직업과 거주지 선택의 폭이 크게 늘어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북창리 내창마을은 무주읍내에서 마을까지 포장도로를 따라 불과 7km 남짓한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포장도로가 나기 전까지는 차도 들어오기 힘든 산속의 외딴마을에 지나지 않았다. 북창리 내창마을은 무주양수발전소의 건설에 따라 교통여건이 개선되고 지리적 접근성이 크게 향상되었다. 자동차 통행이 보편화되면서 마을 안길이 새롭게 정비되고, 농로의 포장 등이 이루어졌으며, 생활권이 확대되었다. 마을에서 자동차 교통이 등장하기 이전에는 도보로 마을과 마을, 마을과 시장 등을 왕래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적상산에서 뻗은 산줄기가 마을을 삼면으로 둘러싸고 있는데다가 높은 곳에 위치한 산골마을이었기 때문에 이웃하는 마을을 왕래하기 위해서는 산줄기 안부의 고개를 따라 이동하거나 골짜기를 따라 외창마을로 향한 후 우회하는 방법이 있었다. 외창마을에서 무주양수발전소로 향하는 도로는 발전소의 운영과 관리에 큰 몫을 함과 더불어 적상산과 안국사, 적상산성 등을 외부지역 사람들에게 알리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특히 적상산의 수려한 자연경관과 안국사, 적상산성 등의 역사문화적 배경은 아흔아홉 굽이가 될 만큼 구불구불한 도로를 올라 적상산 정상부에서 내려다보는 경치에 더해 그 효과를 배가하기 때문이다.
지역 주민의 시장이용권을 보면 농용자재나 간단한 생활용품의 구입은 무주읍내에 위치한 무주장이나 상설점포를 이용하고 있으나, 가전제품이나 무주읍내에서 구할 수 없는 생활용품과 의류 구입 등은 금산, 영동, 대전 등지에 위치한 유통시설을 이용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농사일이 바쁘고 읍내에 나갈 시간이 없을 때에는 마을을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이동 잡화 차량을 이용한다. 마을 사람들은 이것을 ‘대전차’라고 부르는데, 이동 잡화 차량을 운영하는 사람이 대전에서 오기 때문이다. ‘대전차’는 일주일 2번 화요일과 금요일에 마을을 방문한다. ‘대전차’를 운영하는 아저씨는 새벽 5시 무렵 대전 오정동 농수산물시장에서 장을 보고 도매로 물건을 떼서, 차량에 싣고 지역을 순회하면서 물건을 판다고 하였다. 이 차량이 마을을 방문한 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과도 친분이 두터운 터라, 마을에서 밥을 함께 먹기도 하고, 때에 따라서는 장부에 달고 외상 거래도 하며 주문한 물건을 일부러 구해주기도 한다. ‘대전차’는 주로 간단한 식료품, 생선류, 생활잡화 등을 취급한다.
의료시설의 이용을 살펴보면, 마을주민들은 무주읍내에 있는 의원(내과), 한방의원, 무주의료원 등을 이용하고 있다. 특히 마을에서 의료기관을 이용하는 연령층이 노인층이 중심이기 때문에 진료과목도 물리치료나 신경통, 관절염 등의 통증 치료가 주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지병이 있거나 무주에 진료과목이 없는 경우에는 금산이나 대전 등지의 병의원을 찾는 사례가 많다. 이처럼 무주의료원 등 지역민을 대상으로 하는 1차 진료기관이 있으며 의료시설 수준은 양호한 편이나 일정수준 이상의 진료를 하기에는 시설 및 전문 의료인력이 부족하여 2·3차 진료는 대전이나 전주에 있는 의료시설을 이용하고 있다.
마을 어린이들은 무주읍내에 있는 무주중앙초등학교에 다니고 있다. 중학교는 무주읍내 무주중학교에 다니며, 고등학교는 무주고등학교를 다니거나 대전이나 전주 등 인근의 대도시 학교를 이용하는 실정이다. 무주에서 전주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선발고사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오히려 고교 평준화 지역인 대전으로 유학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더욱이 대전은 고속도로를 경유하면 1시간 이내에 닿을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