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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매산리 살림살이

주제 홍성철 안영례 부부의 살림살이
조사 살림살이 이야기, 공간과 살림살이, 통계, PDF

홍성철과 안영례 부부의 귀농이야기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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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철과 안영례는 1982년 11월 14일에 혼인했다. 양가 어른들의 주선으로 만난 지 6개월만의 일이었다. 부부의 인연은 안영례가 친한 친구의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홍성철 고모의 눈에 띄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결혼을 하던 안영례의 친구가 홍성철 큰 고모의 딸이었다. 처음 본 안영례가 마음에 쏙 든 홍성철의 작은 고모가 안영례의 집인 감리마을까지 찾아와 만남을 주선했다. 그리고 그 해 5월 양가 어른들과 함께 홍성철과 안영례의 첫 선자리가 마련되었다. 이후 서로의 마음을 확인할 새도 없이 일주일 만에 약혼식이 치러졌다. 당시 홍성철의 나이 스물일곱, 안영례의 나이 스물 하나였다. 안영례의 부친인 안종순은 듬직한 홍성철을 매우 마음에 들어 했다. 트레일러 운전사였던 직업도 안종순의 신임을 얻는 데 일조했다. 당시 트레일러 운전사들의 대우와 봉급이 일반 회사원에 비해 좋았기 때문이다. 홍성철은 수수하고 소박한 모습의 안영례가 마음에 들었다. 홍성철은 당시 안영례의 첫 인상을 ‘그저 수더분했다’고 표현한다. 화려하지 않고 꾸밈 없는 모습이 홍성철의 마음에 든 것이다. 반면 나이가 어렸던 안영례는 무엇이 좋은 것인지도 모르고 그저 친정아버지의 ‘괜찮은 사람이니까 혼인해라’라는 말에 고개만 끄덕였다고 한다. 부부는 약혼식 후 서로의 집에 왕래하며 정을 쌓았고, 그 해 11월 14일 안성시 죽산면 소재의 원앙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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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에서의 생활

신혼살림은 홍성철이 머물던 인천을 기반으로 꾸려졌다. 인천광역시 남구 용현동에서 300만 원 짜리 전세방을 빌려 첫 살림을 시작했다. 결혼 후 바로 분가생활을 했기에 별다른 시집살이는 없었다. 인천에서 사회생활을 하던 홍성철은 도시생활에 거부감이 없었지만 , 평생을 안성의 작은 마을에서 살던 안영례는 적응에 어려움을 느꼈다. 처녀 시절 사회생활 한번 해보지 않고 스스로 물건 한번 사본 적 없는 안영례에게 인천에서의 생활은 막막하기 그지없었다. 낯선 도시에 아는 사람 하나 없이 사는 일이 매우 서먹했고, 버스를 타는 것도 어색했다. 친정인 감리마을에서는 버스를 잘 타지 않았다. 그러나 인천에서는 동네를 이동하려면 버스를 타야 했다. 이러한 문제들로 처음에는 생활 자체가 힘들었지만, 아이를 낳고 동 네 친구들을 만들며 안영례도 점차 인천에서의 삶에 익숙해져 갔다. 홍성철과 안영례는 결혼 즈음에도 서로에 대해 모르는 사실들이 더 많았다. 양가 어른들의 의견에 따라 급하게 혼례를 올린 탓이었다. 안영례는 결혼 후 홍성철에게 첫 생일상을 차려주던 때를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다.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호사스럽게 차린 생일상 앞에서 홍성철은 눈물을 보였다. 태어나서 처음 받아보는 풍족한 생일상에 감동을 받은 것이다. 이후로 안영례는 홍성철의 생일을 늘 호사스럽고 넉넉하게 챙겨주었다. 또한 안영례는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일찍이 학교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던 홍성철의 마음을 이해하고 존중해주었다. 배움에 한이 맺힌 홍성철은 결혼 후에도 혼자 책을 쌓아놓고 공부를 하곤 했는데, 그럴 때면 조용히 아이들을 돌보며 홍성철이 공부에 집중할 수 있도록 내조를 했다. 홍성철은 궂은일을 하지 않고 자란 안영례의 성장배경을 이해하고 배려하며 듬직한 가장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하고자 했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성장해 부부의 연을 맺은 홍성철과 안영례는 그렇게 서로를 보듬으며 부부로서 한걸음을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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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생활의 청산

부부는 결혼 후 첫 딸인 홍경순을 1983년에 얻는다. 홍성철의 나이 스물여덟, 안영례의 나이 스물둘 때의 일이다. 또래보다 늦은 나이에 첫 아이를 본 홍성철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밥을 먹이는 일, 기저귀를 가는 일 등을 손수 챙기며 홍경순을 매우 아꼈다. 이후 1985년에는 맏아들인 홍명기를 얻었다. 아이를 낳고도 출장과 야간근무가 잦았던 홍성철은 안영례의 곁을 많이 지켜주지 못했다. 대신 안영례의 친정할머니가 인천으로 올라와 함께 지내며 아이들을 돌봐 주었다. 출산 이후에도 홍성철은 트레일러 운전을 하며 돈을 벌었고, 안영례는 집에서 살림을 하며 홍성철을 내조했다. 손재주가 좋았던 안영례는 집에서 요리나 지점토공예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회사에 소속되어 운전을 하던 홍성철이 트레일러를 구입해 사업을 할 때는 관련 사람들을 자주 집으로 초대해 음식을 대접했다. 용현동에서 만석동으로, 다시 연안동으로 이사를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집으로 사람 초대하기 좋아하는 홍성철과 음식을 만들어 대접하는 일을 좋아하는 안영례의 집에는 늘 사람들이 북적였다. 빈한한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 때문인지, 홍성철은 부엌에서 나는 고소한 기름 냄새와 담장 너머까지 울리는 사람들의 시끌벅적함을 좋아했다. 어렸을 때부터 집안일을 돌보는 일꾼과 부친을 찾아온 손님들로 북적이는 집에서 성장했던 안영례 또한 그러한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좋았다. 더 이상 고향을 떠난 외로움은 느껴지지 않았고 생활도 안정적인 기반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탁한 공기와 답답했던 도시생활로 인한 스트레스로 안영례가 병을 얻어 몸져눕는 일이 생기고 말았다. 큰 병원에 가보아도 별다른 원인을 찾아내지 못했다. 몸이 아파 늘 약봉지를 달고 살았지만 병세는 호전되지 않았다. 홍성철은 이러한 안영례를 매우 안타깝게 생각했다. 때마침 홍성철도 좋은 배차를 받기 위해 억지로 술을 마시고 담당자의 비위를 맞추는 일에 회의감을 느끼고 있었다. 야간수당도 없이 한밤중까지 일하며 몸과 마음이 지쳐있던 시기였다. 눈을 뜨고도 조는 생활이 반복되었고 종래에는 과로로 치아가 들떠 견딜 수가 없었다. 도저히 ‘이건 사는 게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들었고, 차라리 내 손으로 농사를 짓는 게 더 편할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도시를 벗어나 공기 좋은 곳에서 생활하면 안영례의 건강도 좋아질 것만 같았다. 그리하여 홍성철이 먼저 안영례에게 귀농생활을 제의했고 안영례가 이에 동의함으로서 부부는 1997년 12월, 16년간의 도시생활을 청산하고 안성에서의 귀농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안성으로의 귀농과 정착

집안 어른들의 반대

부부는 사실 안성으로의 귀농을 세 번이나 망설였다고 한다. 집안 어른들이 부부의 귀농을 완강히 반대했기 때문이다. 도시에서 잘 사는 줄 알았던 자식의 귀농소식에 집안의 어른들은 난색을 표했다. 특히 안영례의 부친이 부부의 의견을 만류하며 도시에 머물면서 생활하기를 권했다. 집안 어른들에 의해 첫 번째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후 홍성철은 귀농자금을 털어 트레일러 세 대를 구입했다. 구입한 트레일러로 운수업을 하다가 두 번째로 귀농 의사를 밝혔을 때도 집안 어른들은 부부의 뜻을 반대했다. ‘배운 게 도둑질인데 내려 와 농사를 지어서 무엇하겠느냐’는 뜻에서였다. 그러나 부부는 집안 어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귀농을 위한 준비를 착실히 해 나가고 있었다. 돈을 모으고 농사지을 땅의 평수를 늘려가며 조금씩 구입하고 있었다. 그러던 1997년 겨울, 집안 어른들께 뜻을 밝힌 지 세 번째 만에 승낙이 이루어졌다. 더는 인천에서 살기 싫다며 뜻을 굽히지 않는 부부의 의견을 존중해 ‘정 그러하다면 내려오라’며 부부의 귀농을 허락한 것이다. 오랜 기간 준비해왔기 때문에 안성으로 내려가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어른들의 승낙을 받은 그 해 12월, 부부는 안성시 일죽면 가리 감리마을에 짐을 풀었다. 집값이 들지 않는 안영례 친정 소유의 빈 집에 살며, 차근차근 귀농생활을 준비하고자 하는 마음에서였다. 아이들은 인천에 살던 외가식구들에게 잠시 부탁해놓고, 부부가 먼저 내려와 살림을 정돈했다. 부부가 안성으로 내려 온 지 3개월만인 다음해 3월, 아이들마저 안성으로 내려오면서 본격적인 가족의 귀농생활이 시작되었다. 당시 홍성철의 나이 41세, 안영례의 나이 36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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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생활의 시작

부부는 안영례의 친정집인 감리마을 과수원 부근에 살며 농촌생활에 익숙해지려 노력했다. 홍성철은 처남의 트랙터를 빌려 남의 논에 모를 심거나 작물을 심기 좋게 땅을 곱게 갈아주는 일(로타리 치는 일)을 했다. 기계를 다루는 일이 익숙하고 운전에 능하다는 장점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되든 안 되든 기계를 끌고 다니며 품을 팔았다. 다시 농사를 짓는 일에 두려움이나 부담감은 없었지만, 십여 년 만에 돌아온 농촌은 많은 것이 변해있었다. 홍성철이 인천으로 올라가기 전만 하더라도 대부분의 농사일은 사람의 손을 거쳐야만 했다. 하지만 다시 돌아온 시골에는 기계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농사에 대한 감이 없어 실패하기도 여러 번이었다. 남들이 물을 댈 때 물을 대지 않고, 남들이 물을 대지 않을 때 물을 대 흉작이 된 일이 부지기수였다. 이삭은 짧아지고 벼의 포기만 불어나 전혀 생산을 내지 못했다. 맨 처음 못자리를 심을 때는 홍성철이 트랙터를 몰고 안영례가 앞에서 방향을 봐주었다. 서툰 일에 엉뚱한 방향으로 모를 심고 있던 적도 있다. 그럴 때면 지나가는 마을 어른들이 ‘해 지기 전에 제대로 심을 수 가 있겠느냐’며 부부를 걱정하는 눈빛으로 바라보곤 했다. 한 움큼씩 빠진 못자리가 아까워 꾸역꾸역 모를 깁다가 숨구멍 부족으로 도열병을 낸 적도 있다. 부부는 감리마을에서 1년 정도 머물며 농번기에는 농사일을, 농한기에는 과수원 일을 도왔다. 이후 홍성철의 가족이 머무는 죽산면 매산리 상구산마을로 이사를 하는데, 이때부터 안영례도 본격적으로 농사일을 거들기 시작한다. 안성으로 내려온 후 안영례의 건강이 많이 회복된 데다 지난 1년간 지켜 본 결과 농촌에서의 생활은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노력만으로는 꾸려나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홍성철이 논농사에 주력하는 동안 안영례는 콩, 고추 등의 밭작물을 기르기 시작했다. 태어나서 처음 해 보는 밭일에 초반에는 실수도 많았다. 눈치를 보며 남들이 일할 때 함께 일하고, 모르는 건 친정어머니에게 물어가며 작물을 키웠다. 농사일이 어느 정도 몸에 익자 부부는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 과수농사에 도전했다. 5000평가량의 토지를 빌려 호기롭게 자두나무를 심었지만 결과는 암담했다. 자두를 포장하는 값으로만 1200원이 들었는데 실 경매가로 1000원을 받은 것이다. 운송비는 가외로 치더라도 포장에 들어간 박스 값마저 회수할 수 없는 마이너스 농사였다. 부부는 결국 손해를 감수한 채 토지를 반납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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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착

귀농을 결심하고 고향으로 내려온 이상 부부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성실히 땀 흘려 일하는 것밖에 없었다. 시골에서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일들을 시도해보다가 종래에는 집에서 개를 키워 먹이는 일에 도전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30마리 정도로 시작해 마지막에는 80마리까지 그 숫자가 늘어났다. 부부는 그렇게 모은 돈으로 총 6000평정도의 논을 구입했다. 여러 시행착오를 겪은 만큼 농사일에 대한 여유와 관록도 쌓였다. 그리하여 2001년, 상구산마을에서의 전셋집 생활을 마치고 현재 거주하고 있는 하구산마을의 가옥을 구입해 정착하기에 이른다. 하구산마을에 정착한 이후 부부는 점점 농사일의 범위를 넓혀갔다. 현재 홍성철・안영례 부부는 벼농사와 함께 친환경감자를 가장 많이 수확하는 마을의 대표적인 대농가(大農家)로 통한다. 초창기 씨감자 150박스로 시작한 감자농사는 현재 3000평 정도의 도지(賭地)에서 활발히 재배되고 있다. 그러나 감자농사가 순조롭게 진행된 것만은 아니다. 처음부터 워낙 많은 양의 씨감자를 심은 터라 수확에도 많은 인력이 필요했다. 열 댓 명씩의 일꾼이 달려들어 열흘을 꼬박 주저앉아 호미로 감자를 캤다. 안영례는 당시 작업에 투입된 일꾼들의 밥을 챙기는 일이 매우 고됐다고 회상한다. 날카로운 호미를 사용한 탓에 감자에 상처가 나 상품성이 하락하는 일도 많았다. 이후 감자를 수확하는 기계의 투입으로 작업이 한결 수월해지고 감자의 상품성도 높아졌지만 초창기 함께 고생했던 시간은 부부가 힘을 합쳐 성공을 이루어 낸 또 다른 추억의 한 부분으로 남았다. 현재는 부부 모두 숙련된 농사꾼으로서 주변에서 잘 풀리지 않는 농사일에 대해 함께 의견을 나눌 만큼 경험과 지혜가 쌓였다. 부부는 ‘시골일은 늙어서 죽을 때까지 배우는 일’이라고 입을 모아 말한다. 올해 농사를 잘 지었다고 하여 내년에도 풍작이 되는 것은 아니다. 똑같이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해마다 환경과 운이 다르기 때문에 농사는 늘 예측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이다. 이에 홍성철은 보다 전문적으로 농사를 짓기 위해 국립한경대학교 최고농업경영자과정에 진학해 수도작, 관광경영, 관광농원, 인삼재배 등 총 4개 과정을 수료했다. 학교를 다닌다는 것, 게다가 일반 대학생들과 같은 신분으로 학교의 모든 시설을 이용할 수 있다는 사실은 홍성철에게 단순한 교육과정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최고농업경영자과정은 가정형편으로 인해 일찍이 학교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던 홍성철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학교에서 열린 체육대회나 해외연수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즐거운 학교생활을 이어나갔다. 곁에서 지켜보는 안영례까지 마음이 흐뭇하고 뿌듯해질 정도로 홍성철은 특별교육과정을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더불어 수업을 통해 배운 농업지식들은 실제 홍성철이 효율적이고 전략적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었다. 홍성철은 현재 매산리 하구산마을의 이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특유의 성실함과 농사에 대한 열정으로 마을 사람들에게 두루 인정받은 결과다. 수십 년 간 떠나있던 고향에 다시 돌아와 마을을 대표하는 직함을 맡기까지 부부는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하구산마을에 정착한 후 부부는 마을의 일이라면 일의 성격을 가리지 않고 매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홍성철은 마을사람들의 운전기사가 되기를 자처해 갖은 경조사에 참석하고 장지에서 상여꾼 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농기계가 없는 노인들을 위해 대신 밭을 갈아주고 트랙터를 이용해 일을 도와주었다. 안영례 역시 마을의 일이라면 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동네 잔치 때는 누구보다 먼저 음식 장만하는 일을 돕고, 집안농사로 조금씩 거둔 농작물을 욕심내지 않고 이웃들과 나눠가졌다. 이동수단이 마땅치 않은 어르신들과 함께 온천욕을 가거나 외부로 외식을 가기도 했다. 홍성철이 작목반회장과 새마을지도자회장을 거쳐 마을의 이장직까지 수행하게 된 배경에는 부부의 이러한 노력이 숨어 있었다. 보수적인 마을 분위기와 귀농인력이라는 여건에도 불구하고 홍성철이 마을을 대표하는 직함을 맡게 된 밑바탕에는 마을을 사랑하는 부부의 마음과 희생, 봉사정신이 수반되어 있다. 2014년에는 농사를 짓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욕심낼 법한 새농민상을 수상하게 된다. 새농민상은 오롯이 부부의 노력과 헌신으로 이뤄낸 결과다. 부부의 새농민상 수상은 가족은 물론 마을 차원에서도 자랑스러운 일이다. 특히 홍성철은 본인의 뚝심과 노력이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뿌듯함을 느낀다. 부부는 이에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새로운 작물에 도전해 보다 좋은 품질의 농산물을 생산하고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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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변화

현재 부부는 집으로 돌아온 자녀들과 함께 하구산마을에 머물며 농사를 짓고 있다. 홍성철은 논농사를, 안영례는 밭농사를 주로 맡는다. 부부는 안성으로 내려온 일을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 귀농 후 가장 눈에 띄게 좋아진 것은 바로 안영례의 건강이다. 대학병원을 오가며 몸의 불편함을 호소했던 안영례는 안성으로 내려온 후 건강을 되찾았다. 공기 좋은 곳에서 몸을 움직이는 노동을 통해 체력을 회복한 것이다. 현재는 넓은 텃밭의 농사도 혼자 거뜬히 해 낼 정도가 되었다. 트레일러 운전을 하며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홍성철도 느긋한 마음으로 농사에 임하고 있다. 늦은 밤 졸음을 쫓으며 운전하지 않아도 되고, 좋은 배차를 받기 위해 억지로 술을 마셔야 할 필요도 없어졌기 때문이다. 가까운 곳에 양가의 형제들이 거주하고 있어 심적으로도 많은 위안을 얻는다. 함께 농사를 지으며 어울리는 시간이 많아진 부부의 사이도 돈독해졌다. 홍성철이 대학 특별교육과정을 이수하고 마을 일을 보는 것, 마을 사람들과 어울려 여행을 다니는 일 등은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일들이다. 부부는 계속 인천에 살았더라면 이러한 여유와 풍족함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라 말한다. 실제 인천에서의 삶은 융통성없는 팍팍한 삶이었기 때문이다. 시골로 내려온 후 생활의 변화에 만족을 느끼는 것은 비단 부부 뿐만이 아니다. 부부를 따라 안성으로 이주한 자녀들도 시골에 내려온 후 삶의 많은 부분이 바뀌었다. 인천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내려온 홍경순은 처음에는 안성에서의 생활에 적응이 힘들었지만 점차 본인만의 생활반경을 만들어가며 안정을 찾았다. 오랜 외지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후에는 시골에서 부모님의 일을 도우며 관계가 더욱 끈끈해졌다. 야간근무와 새벽운전 등으로 얼굴보기가 힘들었던 홍성철이 집에 상주하고, 안영례의 건강이 회복되면서 가족의 분위기도 더욱 화목해졌다. 특히 홍경순은 안영례와 둘도 없는 친구로 지내는 생활에 매우 만족감을 느낀다. 부부의 귀농에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은 홍명기다. 홍명기는 안성으로 내려온 일이 본인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되었다고 말한다. 어린 시절, 인천에서 홍명기의 기억 속 부모님은 운전하는 아버지의 모습과 가사일을 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전부였다. 그러나 안성으로 내려온 후, 함께 농사를 지으며 자연과 더불어 생활하는 부모님을 보며 마음이 넓어지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이러한 모습을 보고 성장한 홍명기는 작물을 재배하는 농사에 관심이 많고, 이와 관련된 직업을 갖기를 희망하고 있다. 홍성철과 안영례 부부는 현재의 생활에 매우 흡족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과 어울리며 여유롭게 지내는 일이 좋고, 땀 흘려 일한 만큼 정당한 대가를 보상받는 일이 좋다. 손으로 흙을 만지고 직접 땅을 일궈 작물을 재배하는 일에 보람도 느낀다. 작은 것을 나누고 소소한 행복을 찾으며 마을 사람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는 현재가 매우 만족스럽다. 귀농 생활이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든 지금, 부부의 바람은 집으로 돌아온 자녀들의 취업과 가족의 건강이다. 부부는 지금처럼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며 지내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