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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착민·피난민·군인의 섬

주제 토착민·피난민·군인의 섬
조사 살림살이 이야기, 사진, 영상, PDF

연혁과 환경

연평도의 위치와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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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평도는 인천광역시 옹진군 연평면에 속하는 섬이다. 연평도는 북위 37.66°, 동경 125.68°로 서해바다의 북쪽에 위치해 있다. 연평면은 두 개의 유인도와 네 개의 무인도로 이루어져 있다. 본도인 대연평도에서 남동쪽으로 약 5㎞ 정도 떨어진 곳에 유인도인 소연평도가 있다. 무인도는 모이도[모은이]와 책도[책섬], 당도[당섬], 구지도[꾸지]이다. 조사지역인 대연평도는 면적 약 7.3㎢의 유인도로, 뱃길은 인천에서 북서쪽으로 약 122㎞ 거리이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걸쳐 연평도는 옹진군이 아니었다. 옹진군은 조선시대 마합도, 소청도, 대청도, 기린도, 창린도, 어화도, 비근압도, 거차도를 포함한 옹진반도를 통칭하며, 옹진현이었다. 옹진현은 고구려 옹천(甕遷)으로 고려시대에 옹진(甕津)으로 바뀌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광복 이후에는 분단선으로 인해 옹진군의 행정구역이 남북으로 나뉘었다. 기존의 옹진군 중 38선 이북의 교정면, 가천면은 북한의 영토가 되었다. 한국에는 두 개의 면을 제외한 옹진군과 38선 이남의 동강면·해남면·송림면·백령면의 육지와 섬들이 경기도 옹진군으로 통합되었다. 연평도는 이 때 옹진군으로 통합되어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한국전쟁으로 옹진군의 영역은 다시 바뀌었다. 1953년 체결된 정전협정으로 인해 대한민국의 옹진군에는 백령면(당시 백령도, 대청도, 소청도)과 송림면(대연평도, 소연평도)만 남았다. 군의 관할구역이 대폭 축소되었던 옹진군은 1973년 7월 시행된 법률에 따라 부천군이 폐지되고 부천에 포함되어 있던 영종면·북도면·용유면·덕적면·영흥면·대부면이 옹진군에 편입됨으로서 규모가 늘어났다. 이후 여러 번의 행정개편이 있었으며, 1994년 대부도가 경기도 안산시에 편입되면서 옹진군은 7개 면(북도면, 연평면, 백령면, 대청면, 덕적면, 자월면, 영흥면)의 도서를 관할하는 군으로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media//archive/photo/S00000055/service/S00000055_I446644.PNG) 연평도의 기록들을 살펴보면 연평도의 표기는 연평(延平)과 연평(延坪)으로 혼재되어 나타난다. 일제강점기 때 한국은 여러 번에 걸쳐 행정 구역을 통폐합하고 개칭하였는데, 연평도는 일제강점기 초기 황해도 해주군 송림면 3리(가평리)에 속해 있었다. 그러다 1912년 「조선총독부황해도고시 제1호」에 의해 3리에서 분리되었다. 당시 3리에서 육도 일원, 소수압도 일원, 대수압도 일원과 연평도 일원이 각각 4리, 5리, 6리, 7리가 되어 연평도는 황해도 해주군 송림면 7리가 되었다. 1916년 「조선총독부황해도고시 제49호」에 의해 번호로 불리던 리의 명칭이 바뀌어 7리는 연평리가 되었고, 이 명칭이 현재까지 연평도의 법정리로 남았다.



연평도 소재지의 변천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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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평도의 기록들을 살펴보면 연평도의 표기는 연평(延平)과 연평(延坪)으로 혼재되어 나타난다. 일제강점기 때 한국은 여러 번에 걸쳐 행정 구역을 통폐합하고 개칭하였는데, 연평도는 일제강점기 초기 황해도 해주군 송림면 3리(가평리)에 속해 있었다. 그러다 1912년 「조선총독부황해도고시 제1호」에 의해 3리에서 분리되었다. 당시 3리에서 육도 일원, 소수압도 일원, 대수압도 일원과 연평도 일원이 각각 4리, 5리, 6리, 7리가 되어 연평도는 황해도 해주군 송림면 7리가 되었다. 1916년 「조선총독부황해도고시 제49호」에 의해 번호로 불리던 리의 명칭이 바뀌어 7리는 연평리가 되었고, 이 명칭이 현재까지 연평도의 법정리로 남았다.



연평도 소재지의 변천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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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평도의 환경

연평도는 두 가지 환경의 제약이 있다. 그 중 하나는 연평도 지역의 상황에 기인한다. 연평도는 겨울과 여름에 수시로 안개가 끼며 풍랑이 거세다. 그리고 연평도에서 도착할 수 있는 육지가 근방에 없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연평도에서 배가 통제될 경우 연평도에 있는 사람들은 다른 곳으로 나갈 수 없다. 게다가 연평도의 기상상황은 예측범위 보다 복잡해서 내일의 기황을 제대로 확인하기가 어렵다. 마을 주민들은 연평도에서 많은 경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연평도의 날씨와 여객선의 입항 여부를 쉽게 장담할 수 없다. 조사기간 동안 연평도 주민들도 방송이나 다른 주민들, 여객선사를 통해 여객선의 연평도 입항 여부를 매일 확인했다. 또 한 가지의 제약은 북한과 관련이 있다. 연평도는 북한과의 경계선이 가깝다. 북 2장 방한계선(NLL)은 연평도 북쪽으로 약 3km 정도에 위치해 있으며, 북한의 섬이나 육지가 연평도에서 가장 근접한 한국의 섬과 육지보다 가깝다. 따라서 다른 해역이나 도서지방에 비해 어업권이 제한을 받는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1957년에는 연평도 근해의 어업을 위해 목숨을 건 대치상황이 지속되기도 했으며, 태풍으로 인해 북한에 표류했던 배들이 고초 끝에 한국으로 송환되기도 했다. 또한 북한과 한국의 대치상황 으로 인해 연평도 부근에서 군부대 훈련을 하거나 북한이 도발 할 때 여객선이나 화물선, 어선을 지연운항하거나 통제하는 경우도 있다. 위의 제약으로 연평도 주민들은 자유롭게 연평도와 육지를 오갈 수 없다. 하루 1회 연평도에서 인천으로 오가는 여객선을 이용하지 않으면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연평도를 나갈 수 없다. 이 여객선은 풍랑주의보가 떨어지거나 안개가 낄 때는 운항 일정이 지연되거나 통제된다. 비상상황이나 기타 긴급한 상황일 경우 행정선이나 연평부대의 배를 이용하지만 이 또한 기상상황이 좋지 않으면 운영이 어렵다.



인구 및 시설

연평도 인구의 변화

우선 연평도 인구수의 변화 추이를 살펴보면 최초의 연평도 인구 기록은 1908년 일제강점기에 발간한 『한국수산지』에 나타난다. 당시의 인구는 550명 정도로 많지 않으며 연평도 북면에 촌락이 있다고 설명하고 있어 현재의 마을 모습과 차이를 보인다. 1916년 『지지조서』의 통계를 확인하면 약 2배에 달하는 1,056명이 연평도에 살았다. 1925년부터 1949년까지는 통계자료를 확인할 수는 있지만 연평도의 정확한 인구수를 확인하기는 어렵다. 당시의 통계자료는 송림면의 전체 인구수만 표기되어 있으며, 신문기사로 확인할 수 있는 인구수는 다소 정확성이 떨어진다. 이후 1955년 인구수 통계를 확인하면 3672명이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이렇게 인구가 늘어난 이유로는 첫 번째로 각지에서 연평도로 피난 온 피난민이 LST를 타고 이주했지만 다수의 피난민은 연평도에 남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는 연평도에 군부대가 주둔하기 시작하면서 인구수에 변화를 주었던 것이다. 세 번째로 연평도가 유명한 조기어장이기 때문에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에도 꾸준히 인구가 늘어났다고 볼 수 있다. 이후 연평도의 인구는 지속적으로 줄어들어 1980년도까지 1724명으로 절반 가까이 감소되었다. 이 시기는 조기어장에서 어획고가 줄어들고 불황이 되었던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마을 내에서 생업을 해결할 수 없었던 연평도 주민들이 연평도 밖으로 이주했다고 볼 수 있다. 1981년부터 1985년까지는 인구가 늘어났지만 이후로는 계속 줄어 2005년 1216명까지 줄어들었다. 연평도 포격 이후로는 오히려 인구수가 늘어나 현재의 인구에 도달했다. 현재 면사무소에서 확인된 연평도의 거주민은 현재 1348가구 2002명이다. 이 중 약 40가구 60명은 소연평도의 주민이다. 거주민 중에는 연평부대의 부사관 이상 급의 간부들도 포함되어 있으며, 인구에 포함되지 않은 연평부대의 사병은 약 1500명 정도이다. 가구 수는 남부리, 중부리, 서부리, 동부리, 새마을리의 순서로 많으나, 새마을리는 간부숙소가 대단위로 있어 이를 합한 숫자는 동부리와 새마을리가 많이 차이 나지 않는다.



연평도 인구변화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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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평도의 주요시설

연평도 주민들이 실질적으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 중에 하나는 식수이다. 예전 연평도 주민들은 우물물을 길어 식수와 생활수로 사용했다. 육지에서 떨어진 섬이지만 식수가 풍부해서 마을 주민들 모두가 사용해도 물이 남을 정도였다. 그러나 연평도에서 조기파시가 열리면 사정이 달라졌다. 마을 사람들이 연평도에 모인 배에 사용하는 물로 우물물을 길어서 날랐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우물물을 돈을 주고 팔았기 때문에 어느정도 수입이 되었고, 그것을 주민들이 너도나도 했기 때문에 정작 마을 사람들이 사용할 식수가 모자랄 정도였다. 1970년대에는 수도시설이 들어서면서 우물을 사용하는 사람이 줄어들었다. 현재는 해수담수화 시설을 통해 연평도에 물을 공급한다. 해수를 사용하기 때문에 물에서 염기가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는다. 현재 연평도에 남아 있는 우물은 공동 6개, 개인 1개가 있다. 새마을리 끝에 있는 우물은 약수터로 현재까지 활용되며 오효재(1928년생)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이 아직도 그곳의 물을 식수로 사용한다. 동부리 중반에 위치한 연도타운 옆자리에도 우물이 하나 있으며 현재는 사용하지 않지만 예전에 된진낭에 정박한 선박들에게 물을 팔았던 우물 중 하나이다. 동부리 안보교육장 부근에 있는 우물은 식수가 아닌 생활수로 사용하고 있으며 마을 주민들의 식재료나 어로도구 등을 세척한다. 연평성당 앞에 있는 우물은 주로 농수로 사용하지만 근처에서 논밭농사를 하는 주민이 거의 없다. 중부리의 우물은 가장 큰 우물로 마을사람들 모두 식수로 사용해도 모자라지 않았다고 한다. 현재는 사용하지 않으며 2013년 조기파시 탐방로를 만들 때 간판과 지붕을 씌웠다. 남부리 연평우체국 부근에 있는 우물은 이전에 사용했던 우물이지만 현재는 고철더미를 주변에 쌓아놔 접근하기가 어렵다. 조기파시 탐방로를 설치하면서 이 우물에도 지붕과 간판을 설치했다. 개인용 우물은 동부리 북쪽 끝집이 하나 남아있으며 생활수로 사용하고 있다. 연평도에서 물과 함께 중요한 전기시설을 살펴보면, 1981년 이전까지는 동력발전기를 이용해 한시적으로만 전기를 사용했다. 발전기는 연평면사무소 뒤 농촌교육소 자리에 있었으며, 초기에는 오후 8시에서 10시까지만 발전기를 돌렸다. 연평도 주민들은 집집마다 가지고 있는 자체발전기에 2시간 가량 나오는 전기를 충전해서 사용했다. 1981년 145kw의 발전기가 현재 통신 중계소 뒤편에 자리 잡았다. 초기의 발전기는 200리터 드럼통에 기름을 채워 사용했고 기름수급이 어려우면 배의 기름을 이용하기도 했다. 발전기 사용시간도 늘어나 오후 6시에서 10시까지 돌렸으며 김 건조기를 돌리기 위해 오전 4시부터 6시까지도 운영했다. 집에 마련된 충전기가 사용연한이 다 되면 오토바이로 충전기를 배달했다. 상을 당한 집은 발전소에 전화를 해서 24시간 조문객을 맞을 수도 있었다. 1990년 본격적인 발전시설이 연평도에 마련되었고, 그 때부터 연평도에 전기가 24시간 돌아갔다. 지금은 연평발전소에서 총 1136개의 주택용, 일반용, 교육용, 산업용, 농업용 가구에 전력을 공급하고 있으며, 발전소가 약 2달 반을 운영할 수 있는 기름을 연평도 내 저장탱크에 저장해놓고 있다. 전력은 여름보다 겨울에 더 많이 사용한다. 반면 통신의 경우는 상황이 다소 달랐다. 연평도는 일제강점기부터 중요 어장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섬임에도 우편출장소를 설치하는 등 우편연락이 유동적이었다. 1976년 이전까지는 현재 연평우체국 자리에 통신탑이 있어 전화도 가능했다. 통신탑에 설치된 전화기는 1대로, 이 전화기로 연평도의 주민들이 다 같이 사용했다. 사용하는 시간도 정해져 있었는데 오전 30분, 오후 30분간만 전화연결이 가능했다. 그래서 이 당시에는 면사무소에서 연평도 주민에게 방송을 통해 전화안내를 하기도 했다. 1976년 다이얼식 전화기 100대가 연평도에 설치되었고 전화 교환기 3대가 설치되면서 전화시설이 확충되었다. 1986년에는 연평중계소가 백령도와 대청도의 통신을 육지로 중계하기도 했다. 자동 전화 교환기도 통신을 중계하는 1986년에 들어와 이때부터는 교환원이 없이 전화가 가능했다. 현재 연평도에는 이동통신사 3사의 중계기가 설치되어 있으며, 대피호에도 이 중계기를 설치해 비상시에도 연락이 가능하도록 했다.



연평도에 남아있는 우물의 위치도


주민의 생활권

연평도의 진료시설과 환자수송

연평도 중부리의 당산 밑에는 연평면사무소와 함께 보건진료소가 위치해 있다. 1968년까지 병원과 한의원이 연평도 내에 있었으나 문을 닫았고, 1971년 연평보건지소가 설치된 뒤 현재까지 연평도 내의 의료시설은 연평보건진료소 뿐이다. 진료소의 전 위치는 당산의 좌측 밑 부분이었으나 현재의 위치로 이동했고 연평도 포격으로 인해 새로 지었다. 연평도 주민들은 보건진료소에서 간단한 진료를 받고 약을 복용한다. 특히 혈압약이나 심장약 등 주기적으로 약을 복용해야 하는 고령의 주민들이 보건진료소를 많이 들르는 편이다. 건강이 좋지 않을 경우 인천의 길병원이나 인천 중앙병원 등을 이용한다. 간혹 응급환자 중 보건소에서 진료가 어려울 경우에는 인천에서 닥터헬기와 소방헬기를 띄워 연평도 종합운동장에서 인천 중앙 병원까지 이송한다. 헬기의 이송시간은 편도로 40여 분이 소요된다. 보건소 진료 외에도 연평도에 진료장비를 가져와 건강검진을 실시하기도 한다. 한편 연평도도 고령화가 지속되고 있으며, 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하는 경우가 많다. 조사기간 동안 별세하는 경우는 보통 육지의 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하는 경우였으며, 연평도에서 사망하는 경우에도 육지에서 상을 치렀다. 이것은 연평도 내에 화장시설이 없어 수습한 시신에 대한 처리가 어렵기도 하고, 연평도 주민들의 가족친척이 육지에서 생활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연평도의 보건진료소는 진단과 처방은 할 수 있지만 수술치료 등의 의료를 할 수 있는 시설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육지에서 수술을 하거나, 별세한 연평도 주민들이 육지로 나간다. 다만 연평도 내에서도 고인의 영정을 살던 집에 놓고 집 앞에 천막을 쳐서 추모객을 맞는다. 이때는 고인의 가족들 지인이 음식이나 접객 등을 도와준다. 이전에는 연평도 내에서도 상례를 치렀다. 현재 매드라까리에는 상여집과 예전에 사용하던 상여가 남아있다. 이전에는 아리까리의 어촌계 사무소 앞에 ‘극락당’이라는 상여집이 있었으며, 산소를 놓을 땅이 있는 사람들은 상여를 이용해 상례를 치렀다. 그러나 마을에 상여를 들 사람들도 이제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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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평도의 교육

연평도는 한 건물 내에 유치원과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가 모두 모여 있다. 연평초중고등학교는 이전 연평초등학교 건물에 연평중고등학교와 연평유치원이 합쳐진 것이다. 연평유치원은 연평성당에서 설립한 해성유치원이 그 전신이다. 1935년 연평공립보통학교로 시작한 연평초등학교는 학교가 있기 이전에도 연평도에서 교편을 잡고 학생들을 가르쳤던 전덕규가 설립했다. 연평중고등학교는 처음 연평초등학교 앞에 강녕중학교로 있었으나 연평성당 부근으로 자리를 옮겨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통합했다. 중고등학교를 지을 때는 포크레인이 연평도로 들어오지 못해 마을 사람들이 삽과 곡괭이로 땅을 골라내기도 했다. 연평도 포격이 발생한 뒤, 연평도 주민들은 방공호 시설이 포함된 학교가 필요함을 옹진군에 피력했다. 결국 방공호 시설이 포함되도록 연평초등학교를 증축해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모두 모아 현재에 이르렀다. 통합된 학교에는 2017년 현재 유치원생 13명과 초중고등학생 143명이 등교하고 있다. 입학생과 졸업생의 숫자는 해마다 조금씩 줄어들었다. 이전에는 한 반에 30명 이상이 등교하기도 했으며 초등학생만 600명 정도 다닐 때가 있었다. 지금은 학년별로 수명씩이 재학 중이다. 군대 간부의 자녀들과 결혼 후 이주해온 주민들의 자녀, 연평도에서 지내던 가족의 자녀들이 입학해서 입학생은 끊이지 않는 편이다. 2017년에는 유치원생 14명, 초등학교 11명,중학교 10명, 고등학교 13명이 입학했다. 학교의 교사는 총 50여명으로, 방학 때는 학교를 관리하는 4~5명의 교사를 제외하고 외지로 나간다. 현재 연평교회 앞의 연평어린이집은 미취학아동 40명이 등원한다. 연평어린이집은 연평교회에서 고아들을 위해 설립한 연평성육원이 최초였다. 이후 성육원은 유아원으로 바뀌어 운영되었고, 2010년 5월 연평어린이집이 유아원의 자리에 신축되었다.



출도행렬의 설과 추석

섬이 비는 명절과 그 이유

연평도 주민들이 명절이 되어 연평도를 나오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주민들이 명절에 연평도에서 여객선을 타고 나가는 첫 번째 원인은 여객선 이용요금 때문이다. 연평도에서 인천 연안여객터미널까지 운영하는 여객선은 쾌속선으로 이용료는 쾌속선의 모델에 따라, 그리고 성수기와 주말 요금 변경에 따라 약간씩 변동되지만 5만~6만 원 정도이다. 그리고 화물선을 통해 자동차를 들여오는 비용은 10만 원에서 20만 원이다. 연평도 주민의 자녀 가족 4인이 자동차와 함께 연평도에 들어오면 왕복으로 60만 원 정도가 필요한 것이다. 인천거주민의 경우 50%가 할인되지만 할인율을 감안해도 비용이 적지 않다. 반면 연평도 주민들이 여객선을 이용하면 1인당 7천 원 미만이다. 4인 가족이 모두 연평도에서 나가도 1인이 연평도를 들어오는 비용보다 싸다. 따라서 연평도에서 출도하는 것이 비용 면에서 합리적이다. 이전에 여객선의 비용이 비싸지 않았을 때는 자녀들이 더 활발하게 다닐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요금의 차이가 2010년대에 들어 커지면서 부담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연평도 주민들이 명절마다 연평도를 떠나는 두번째 요인은 날씨와 관련 있다. 연평도는 풍랑이나 안개가 심하면 결항된다. 조사팀이 설과 추석 명절을 조사하는 도중에도 풍랑으로 인해 연평도에서 인천을 오가는 쾌속선이 결항되었다. 연평도를 들어오는 연평도 주민의 가족들 중에는 육지에서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다. 따라서 연평도에서 명절을 지내고 연휴가 끝나면 생업에 복귀해야 하는데 여객선이 결항되면 육지로 나갈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다. 결국 명절에 연평도를 방문하는 것이 가족들에게는 서로 부담이 되는 것이다. 반면 연평도 주민들은 고령층이 많고 생업에서 비교적 자유롭다. 연평면에서 제공하는 공공근로를 제외하면 농어업에 종사하기 때문에 하루나 이틀 정도 결항해도 문제가 없다. 때문에 날씨로 인한 결항에도 부담이 없는 연평도 주민들이 명절을 쇠러 나가는 것이다. 연평도에서 명절마다 주민들이 배를 타는 세 번째 이유는 자녀세대가 비교적 가까운 지역에 거주하기 때문이다. 연평도 주민들의 자녀들은 보통 인천에 거주한다. 남부리의 가구전수 조사결과 주민의 57%정도가 자녀의 일부 혹은 전부 인천에 거주한다. 인천의 연안여객터미널은 주변에 지하철이나 전철은 없고 택시와 버스를 통해 이동이 가능하다. 버스의 경우 인천 내로 이동하는 것은 용이하지만 다른 지역으로 가기 위해서는 지하철역이나 버스터미널 등을 경유해야 한다. 종합하면 연평도에서 인천의 연안여객터미널로 배를 타고 나가면 인천 내에서 활동하기는 좋지만 인천 밖으로 나가는 것은 비교적 힘들다. 그래서 인천에 자녀들이 거주하는 연평도 주민들은 명절에 여객선을 타고 자녀들의 집으로 향한다. 인천 외의 지역에 자녀들이 거주하는 연평도 주민들은 홀로 명절을 지내기도 한다. 연평도 내에 모든 가족이 살고 있는 경우도 있지만 많지 않다. 이전에는 연평도에 다 같이 살았지만 자녀세대가 자람에 따라 연평도에서 생업을 구하기 어려워 인천이나 타 지역으로 이주했다. 연평도 내에 대학이 없어 고등학교 졸업 후 진학을 위해서 연평도를 떠나는 세대도 있었다. 결국 자녀세대가 타 지역으로 이주하면서 명절의 출도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연평도의 여러 모임

주민자치위원회

주민자치위원회는 총 25인으로 이루어진 연평도의 주민대표단체이다. 연평도 내 5개 마을의 이장, 노인회장, 부녀회장, 어촌계장 등 대표자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자치위원장은 박성원, 부위원장 이성봉, 윤덕임, 간사는 김명자이다. 주민자치위원회는 지방자치법 제 8조 중 ‘지방자치단체는 그 사무를 처리할 때 주민의 편의와 복리증진을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는 법령에 의거한다. 따라서 연평도 내에서 일어나는 사항에 대해 논의하고 연평면사무소와 긴밀하게 협력한다. 주민자치위원회는 연평도의 각 단체 대표가 모여서 운영하기 때문에, 자치위원장과 부위원장, 간사를 제외한 주민자치위원들은 대표의 이취임과 연관되어 진행된다. 노인회장이나 부녀회장의 임기가 다 되거나 도중에 중단하여 바뀌면, 주민자치위원회의 구성도 바뀌게 되는 것이다. 이전에는 고문의 형태로 주민자치위원회의 임기를 보장하기도 했다. 주민자치위원회의 임기는 2년을 주기로 하며, 이것은 자치위원장과 부위원장, 간사도 포함된다. 2년이 지나면 이장이나 노인회장, 부녀회장 등 임기가 남거나 재임을 해서 임기가 늘어난 주민자치위원은 연임을 한다. 주민자치위원장과 부위원장, 간사의 경우는 회의를 통해 연임 또는 해촉을 결정한다. 이성봉 부위원장은 2017년 5월에 열린 주민자치위원회의를 통해 자진해촉의사를 밝혔고, 해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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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촌계

인천광역시에 속한 어촌계는 총113개이다. 그 중에서 대연평도의 어촌계는 규모가 상당히 큰 어촌계이다. 과거에는 대연평도 어촌계와 소연평도 어촌계가 합쳐서 운영되었으나 현재는 서로 별도로 운영되고 있다. 대연평도 어촌계는 5개 마을 통합어촌계이다. 남부리, 중부리, 서부리, 동부리, 새마을리가 하나의 어촌계를 공동으로 운영하고 있기에 어촌계원이 300여 명에 달한다. 규모가 크기 때문에 어촌계장 외에 실무를 볼 수 있는 상근 직원이 근무를 한다. 어촌계 사무실에 상근 직원이 있는 경우는 드문 일이다. 어촌계 사무실 주소지는 인천광역시 옹진군 연평면 연평로 805이며, 남부리의 아리까리 해변에 위치해 있다. 대연평도 어촌계는 어촌계장, 간사, 감사, 총대로 구성된다. 어촌계장은 박태원(1960년생)이고, 상근 직원인 간사는 변종숙(1980년생)이며 감사는 정호원(1952년생)이다. 간사는 수산직불금 지급과 관련된 각종 증빙서류 정리, 각종 수익금과 지출금 정리, 회의자료 준비 등 각종 업무를 처리하느라 항상 분주하다. 연평어촌계의 특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연평어촌계는 대연평도의 5개 마을 통합 어촌계로 운영된다. ② 여타 어촌계가 선주나 해녀 등 적극적 어로 활동을 하는 계원 중심으로 운영되는 반면 연평어촌계는 맨손어업을 하는 주민중심이다. 닻자망, 안강망, 통발 등의 선주는 별도의 어민회를 두고 있다. ③ 어촌계원이 많고, 조건불리지역 수산직불금 지급 업무, 관계 관청과의 업무 협조 등 여타 어촌계에 비해 처리할 업무량이 많기 때문에 급여를 지급하는 상주 직원(간사)를 두고 있다. ④ 군사적으로 특수한 지역인 연평도의 특성에 따른 군·경·민의 정보 교환의 장소이다. 해병대의 예민관의 정보 수집처, 해경 및 항만청, 수협과의 긴밀한 업무 협조, 각 언론사, 방송사의 취재 및 촬영 안내 등을 어촌계장이 주로 맡는다. 따라서 어촌계 사무실은 해병대 예민관, 해양 안전센터 해양경찰, 항만청 직원, 어촌계 주민 등으로 항상 북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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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녀회

연평도의 부녀회는 새마을운동과 함께 만들어졌지만, 연평도 내에는 부녀회의 전신인 부인회가 있었다. 부인회는 연평도에서 1969년 자발적으로 만들어진 단체이다. 부인회, 부녀회 등으로 불렸으며 결혼한 여성들이 모인 모임이었다. 이들이 모인 목적은 연평도 내에서 벌어지는, 주로 남성들이 일으키는 안 좋은 일들을 계도하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조기파시의 규모가 해를 거듭할수록 줄어드는 추세였다. 하지만 연평도를 다니는 배와 선원들이 있었고, 이들을 상대하는 기생들도 연평도에 남아 있었다. 이 기생들은 연평도에 들어와 눌러앉거나, 파시를 따라 이동하다가 연평도로 정착하려는 사람들이었다. 부인회는 이런 사람들을 연평도 밖으로 몰아내고, 도박이나 투기 등으로 돈을 흥청망청 쓰는 현장을 단속했다. 그러다 1971년 새마을운동과 함께 새마을부녀회가 설립되었고, 부인회 대부분이 새마을부녀회의 소속이 되었다. 새마을부녀회의 설립 당시에는 마을의 행사에 동원되어 식사를 만들어 제공하거나, 반찬을 만들어 독거노인들에게 제공했다. 하지만 회비를 걷거나 새마을지원금을 이용하지 않았고 뜻있는 부녀회 회원들끼리 조금씩 각출해서 회비를 만들었다. 당시에는 부인회에서 온 회원들을 더불어 약 200명 정도의 부녀회원이 활동했다. 그러다 1990년대에 당시 노인회에서 진행하던 공병줍기 사업을 부녀회가 맡아서 하고, 새마을위원회에 연락을 통해 지원금을 받으면서 부녀회의 반찬만들기 사업 등을 할 수 있는 회비가 마련되었다. 공병줍기 사업은 마을 내의 공병을 수집해 주에 한 번씩 화물선으로 내보내는 일을 한다. 이것이 정기적으로 수입을 만들어 노인회에서 주도했으나, 그 권한을 부녀회에 넘긴 것이다. 이후 부녀회는 회비로 아리까리 앞에 큰 공병창고를 만들어 본격적으로 공병줍기 사업을 진행했으나, 2000년대 초에 공병수거를 주류업체에서 담당하면서 사업이 중단되었다. 그리고 연평도 주민들의 고령화와 자녀 세대의 인천거주, 자원봉사활동센터의 업무분산 등으로 부녀회원이 점차 줄어 현재에 이르렀다. 현재 새마을부녀회는 연평도 전체 총 15인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리별로 부녀회장과 총무가 있으며 연평면 부녀회장은 윤덕임이다. 부녀회원은 해마다 지속적으로 감소했다. 우선 마을 내 고령화가 해가 갈수록 더해져 부녀회의 정년을 넘겨 탈퇴한 부녀회원이 늘어났다. 부녀회 가입 조건은 연평도 주민 중 결혼한 만 60세 이하 여성이다. 회비는 연마다 20만원씩을 걷어서 만들며, 그 외에 밑반찬 만들기 행사나 한마음기원제 등의 사업에는 옹진군이나 연평면에서 나오는 지원금으로 해결한다. 연말결산은 12월에 하지만 부녀회 회의는 주마다 부정기적으로 진행된다. 부녀회의 주 사업인 밑반찬 만들기 행사가 매주 화요일에 열리는데, 이 때 부녀회의 절반 이상이 참여하며 따라서 안건이 있을 때에 그때그때 의논하여 처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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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회

연평도 노인회는 1960년대에 설립되었다. 설립 당시에는 경로당을 만들지 않았으며 연평면 노인회였다. 이후 행정리가 하나씩 분리되는 과정에서도 노인회는 그대로 유지하였다. 그러다 2000년대가 되어 남부리 경로당이 생기면서 노인회가 하나씩 독립하기 시작했다. 2016년 11월 동부리 경로당이 생기면서 중부리 내에 있던 동부리 노인회원들이 분화하여 현재 5개리 5개의 노인회가 만들어졌다. 따라서 노인회가 분리되는 과정은 최근까지 이루어졌다. 연평도 노인회의 구성원은 회비를 납부하는 노인을 중심으로 남부리, 서부리, 중부리가 각각 80, 70, 90명씩 등록되어 있으며, 동부리는 전체회원이 25명이다. 경로당은 각 리마다 한 개씩 있으며, 기존 노인회 회원뿐만 아니라 연평도 각 리의 고령자들이 활용하고 있다. 남부리는 2017년 1월에 새 경로당을 만들면서 두 개의 경로당을 보유하였으나 그 중 2000년대에 지었던 옛 경로당을 ‘섬 사랑방’으로 만들어 독거고령자 5인이 생활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노인회장은 각 리에 한 명씩이며 남부리 노인회장 박태환은 연평면 노인회장을 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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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원봉사활동

연평도의 자원봉사센터는 2003년 옹진군 자원봉사센터 조례를 토대로 2010년 연평면 지소가 설치되면서 본격적으로 운영되었다. 연평도는 2010년 161명으로 시작해 2016년 334명으로 2배 가까이 인원이 늘었으며, 그 중 자원봉사에 최대한으로 참여하는 인원은 약 50명이다. 지원 자격이 별도로 있는 것은 아니며, 참가비도 따로 없다. 연평도 내에 이렇게 자원봉사활동을 하는 인원이 많은 이유는 자원봉사활동이 주는 여러 가지 혜택이 있어서이다. 우선 자원봉사센터에 소속되어 있는 자원봉사자들은 직전 1년 동안 12회 혹은 48시간의 자원봉사 수를 채우면 2년간 사용할 수 있는 자원봉사자증을 발급받을 수 있다. 자원봉사자증을 소지하면 자원봉사 할인가맹점을 통해 할인을 받을 수 있다. 연평도 내에는 가입한 할인가맹점이 없지만 인천광역시 내에 1,000개가 넘는 가맹점이 있어 혜택이 적지 않다. 식당이나 마트뿐만 아니라 의원, 법률사무소, 부동산 중개업 등 종목도 다양한 편이다. 자원봉사센터에 속한 자원봉사자는 봉사하는 시간에 비례해서 복지 포인트를 쌓는다. 총 자원봉사시간이 500시간이 넘으면 이 포인트를 이용해서 간병인을 부를 수 있다. 간병인은 자원봉사자 본인뿐만 아니라 배우자와 직계가족까지 부를 수 있으며, 봉사자의 자원봉사시간에 비례해서 연간 120시간부터 500시간까지 이용할 수 있다. 연평도의 자원봉사센터에서 활동하는 자원봉사자들은 보통 간병인 서비스를 사용하기 위해 자원봉사자 등록을 한다. 가맹점 할인의 경우 할인하는 지점은 많지만 일일이 찾아다녀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그러나 간병인 제도는 옹진군 자원봉사센터에 신청하면 간병협회를 통해 바로 간병인을 이용할 수 있다. 이러한 혜택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각 사업별로 봉사활동을 하는 연평도 주민의 이름과 봉사활동을 한 시간을 기록하는 일이 중요하다. 자원봉사센터장 임유미는 이 장부들을 관리하며, 각 봉사조별로 한 명씩 기록할 수 있도록 서기를 두었다. 이전까지 기록은 컴퓨터로 하고, 봉사활동을 하는 사진을 찍어서 보고용으로 활용하면 되었다. 그러나 봉사활동을 하지 않았는데 이름이 올라가 있거나, 정작 한 사람들이 기록되지 않는 일이 있었다. 옹진군에서는 2016년부터 봉사활동 관리기록을 모두 수기로 작성하도록 요구했고, 현재까지 수기로 인원을 기록하고 있다. 연평도의 봉사활동은 크게 무료급식, 밑반찬 만들기, 집 청소, 이불빨래, 김장이 있다. 그 중 조사 기간에 했던 봉사활동은 무료급식과 밑반찬, 집청소, 이불빨래였다. 김장은 겨울에 먹을 김치를 담가 각 경로당과 독거가정에 전달하는 행사이다. 밑반찬 만들기는 이전부터 부녀회에서 꾸준히 해왔던 행사여서 자원봉사센터가 설립된 이후에도 부녀회에서 도맡아 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무료급식과 집청소, 이불빨래를 확인했다.



연평도의 먹거리

연평도의 식생활

연평도 주민들이 섬을 나가서 장을 보는 이유는 식재료가 다른 지역에 비해 비싸기 때문이기도 하다. 특히 연평도는 운송요금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이로 인한 가격 부담이 높아진다. 연평도 주민들은 연평도와 인천의 물가를 대략적으로 알고 있으며, 인천보다 연평도의 물가가 비교적 높다는 것을 체감하고 있다. 따라서 연평도에서 구할 수 있는 식재료 임에도 인천이 더 저렴하면 인천으로 나가는 것이다. 이것은 연평도 주민들의 여객선 이용료도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다. 다른 물품보다 식재료의 경우 신선하게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데, 택배 등을 통해 주문하는 것은 식재료의 신선도를 보장할 수 없다. 농협을 통해 주문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가격을 비교해 봤을 때 왕복 요금보다 비싸면 연평도 주민들은 손수레 등을 끌고 인천으로 나가 장을 봐서 들어오는 것이다. 1. 분단 이전과 이후 연평도의 식생활 연평도는 실질적으로 육지와 가까운 섬이다. 연평도에서 배로 12km를 가면 바로 육지에 다다를 수 있다. 일제강점기까지 연평도는 해주와의 교류가 활발했으며, 따라서 주식재료인 쌀은 가까운 해주에서 구입할 수 있었다. 그리고 큰소구지, 작은소구지, 아리까리, 매드라까리, 대나루, 구룬나루에는 논밭이 많았다. 연평도에는 우물도 많아 농수를 이용하기에 무리가 없었고, 따라서 연평도 내에서의 농업 또한 그 비중이 적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연평도에서 나는 쌀을 주식으로 하고, 해산물을 팔고 남은 것을 먹는 등 식재료가 부족하지는 않았다. 분단 이후 연평도에서는 식생활에 영향을 주는 세 가지의 큰 변화가 있었다. 첫번째는 분단으로 인한 고립이다. 1945년 광복 때에는 연평도가 가까운 육지와 함께 한국에 속해 있었다. 따라서 이전처럼 배를 타고 육지에 나가기 수월했다.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 반도지역이 북한으로 넘어가게 되면서 연평도에 가까운 육지가 없어졌다. 연평도에서 가까운 육지로 가기 위해서는 배를 타고 한나절이 걸려 인천으로 향해야 했다. 물론 이전에도 서울의 마포나 인천으로 식재료나 물건을 팔러 다니는 배와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연평도의 모든 사람들이 육지를 이용하려면 인천을 가야 하는 변화가 생긴 것이다. 두 번째는 생업환경의 변화가 있었다. 이전까지 조기를 잡아서 생업활동을 했던 때에는 연평도의 주변환경도 조기의 생업활동에 맞춰져 있었다. 조기가 식재료 중의 하나이기도 했고, 그것으로 인해 파생되는 부수입(우물 판 돈이나 조기 절이고 말리는 노동력에 따른 수입)이 있어 식생활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60년대 말에서 70년대 빠르게 사라진 조기와 조기파시는 연평도 내의 식생활을 제한하게 되었다. 물론 당시에는 조기 말고도 갯벌과 어살을 통해 충분히 식재료를 확보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 김양식이 도입되고, 꽃게가 상품화되면서 연평도의 식생활 양식에 조금씩 변화가 있었다. 2. 계절별 식재료와 식생활 연평도에서는 타지역에서 볼 수 있는 감자, 고구마나 깨, 마늘 등의 식재료도 재배하여 먹는다. 하지만 연평도 사람들도 마트에서 위의 식재료를 구입해 사용하는데, 밭에서 나는 작물의 규모가 적어 마을 사람들이 모두 나누기가 어렵고, 밭을 경작하는 사람들이 소수이기 때문이다. 다만 에누리나물의 경우, 연평도 내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 식재료로 사용하고, 소연평도에서만 자라는 것을 대연평도로 가져와 재배하기도 한다. 연평도의 바다와 갯벌에서 구할 수 있는 식재료는 주민들이 전반적으로 취식하는 식재료이다. 연평도의 굴과 바지락, 쉬모는 시기가 되면 마을 주민들이 나가 채취하는 식재료이며, 김은 이전부터 주민들이 자주 활용해왔다. 이외에 게와 해파리, 장대의 식재료에 대해 시기와 조리방법을 토대로 하여 확인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

설화

1. 임경업 장군 연평도 마을에 지태웅이 살았다. 이 사람은 연평도 파시골목에 장사를 하며 살고 있었다. 조기파시로 인해 장사가 잘된 지태웅은 가게를 늘리고 배를 구입해 이익을 보았다. 한때는 연평도 내에서 제일 가는 부자였으며, 마을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임경업 장군을 믿지 않았고, 신위를 없애버렸다. 이후 한국전쟁이 일어나 지태웅은 가족들과 함께 피난길에 나섰다. 배에 그동안 모아놓았던 패물이나 식량을 가득 싣고 북쪽으로 도망한 것이다. 이후 빨갱이들에게 잡혀 모든 짐을 빼앗기고, 산채로 매장당해 죽었다. 2. 마을 설화 ㉮ 연평도의 지명이 연결되어 전해지는 설화 연평도 남쪽에는 여러 섬과 바위가 있다. 그 중 몇개의 섬을 묶어 연평도 주민들이 전하는 이야기가 있다. ㉯ 도깨비불과 영감불 연평도에는 도깨비불과 관련된 내용도 전한다. 연평도 주민들은 이 불을 ‘영감불’이라고도 불렀다. 영감불은 푸르스름하거나 노랗게 타며, 마을 인근에서 본 사람은 없다. 주로 나타나는 곳은 아리까리나 매드라까리, 당섬 부근의 바다 쪽이다. ㉰ 용오름 연평도에는 용오름에 대한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 이야기는 예전에 전해지는 이야기도 있지만 비교적 최근의 이야기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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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요

연평도에는 다양한 민요가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다. 연평도 내에는 구전되는 ‘배치기 소리’와 ‘니나나나 타령’을 비석으로 새겨 연평종합회관 앞에 세워놓았다. 연평도 대동굿을 할 때 노창식은 즉석에서 북을 잡고 배치기 소리를 연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민요를 채록함에 있어서는 몇 가지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었다. 마을 주민들 중 민요를 전부 불러 채록할 수 있는 기회를 얻기는 쉽지 않았다. 주민들은 처음 한 두 소절 정도는 간단하게 불러주었으나, 그 뒤를 이어서 부르는 것을 그만두었다. 이는 민요를 연행할 수 있는 충분한 환경을 제공하지 못한 조사자의 책임도 있다. 또한, 이전까지 전승해오던 연행자들이 노환으로 별세하였고, 연평도 토박이 이면서 민요를 전승하는 연행자를 찾는 일이 쉽지 않았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1996년에 연평도에서 민요를 부르는 과정을 녹취한 녹취본을 확인하는 것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코앞에는 북한이 보이고

연평부대와 연평주민의 공존

1. 연평부대의 시작과 주민과의 관계 일제강점기 시기까지 연평도는 군인의 주둔지가 아니었다. 조선시대에는 봉화가 있었고 마구간을 지어 말 목장을 운영하기도 했으나 기본적으로는 주민들이 사는 일반적인 섬이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연평도에 미군과 한국군이 주둔하기 시작하면서 점점 환경이 변하기 시작했다. 한국전쟁 발발 이후 주둔한 군대로부터 주민들을 위한 보급물자가 들어왔고, 주민들은 보급물자로 끼니를 때우기도 했다. 한국전쟁이 휴전으로 마무리된 이후에도 한국군은 연평도에 주둔했고 처음 해군해병 도서경비부대에서 1974년 3월 11일 연평부대로 증·창설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연평도에 군인이 주둔하기 시작하면서 연평도 주민들의 삶에도 일정의 변화가 있었다. 우선 연평도의 일부분이 군대의 주둔지가 되면서 일정 영역의 민간인 통제구역이 생겨났다. 통제구역 중에는 연평도 주민들의 생업공간이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북한과 연평도가 마주하고 있는 상황에서 연평도 주민들에 대한 보호는 필수적이었다. 연평부대의 초기에는 주민간의 공존과 갈등이 어느 정도 혼재했다. 우선 연평도는 부대가 주둔하기 이전에 이미 청년방위대나 대한청년단 소속의 사람들이 연평도를 지키고 있었다. 연평도에 세워진 무명 육용사 충혼탑은 이 대한청년단의 업적이기도 했다. 연평도에 민방위가 설립되고부터는 연평부대의 병사 한 명과 민방위 대원 한 명이 같이 보초를 섰던 일도 있었다고 한다. 연평부대가 자리를 잡음으로 인해 이러한 현상은 현재 사라졌지만, 연평도 주민은 자체적인 방어 또한 중시하고 있다. 그리고 연평부대의 주둔지와 통제구역이 연평도 주민들의 터전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연평도에는 담배고개라는 고개가 있는데, 이 이름은 연평부대가 들어온 이후 새로 지명이 생겼다. 이외에 연평주민들이 이전에는 생업공간으로 드나들던 곳이 통제구역으로 바뀌었다. 연평도의 마을도 작전구역에 포함되는 것은 물론, 부대 장병들이 연평도의 시설을 이용하는 일도 잦아졌다. 2. 부대와 주민간의 지속적인 노력 연평도의 주민들은 군대의 통제에 대해 비교적 잘 따르는 편이다. 연평도 곳곳에 설치된 통제구역은 연평도 주민들의 생업공간이 일부 포함되어 있다. 군사적인 목적의 통제구역을 제외하고 연평도 내에 안전에 대한 문제로 통제하는 구역도 있다. 연평도에 안개가 심하게 끼면 특히 갯벌의 경우 길을 찾기가 어려우며, 밀물이 들어올 때까지 갯벌을 벗어나지 못하면 위험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어서 한시적으로 통제하는 것이다. 연평도 주민들은 가급적 통제구역에 들어가지 않는다. 물론 통제구역에 대한 주민들의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다. 연평부대는 통제구역을 한시적으로 개방함으로써 대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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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평도 포격의 구술기록

1. 연평도 포격사건의 발생경위 한국전쟁 발발 이후 북한에서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한국을 도발해왔다. 포격훈련을 통해 지속적으로 한국 영해 근처에 미사일이나 포탄을 발사했고, 무장공비를 침투 시켰으며, 간첩을 보내 한국의 상황을 살폈다. 한국은 이러한 북한의 도발에 대해 항상 경고했으며, 미군과의 연합훈련과 북한도발대응훈련으로 응수하기도 했다. 약 60년간 북한과 한국의 대치상황은 지속적으로 유지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국민, 특히 남북의 경계지점 근방에 살고 있는 주민들에게 부담이 되었다. 연평도의 경우는 북한과 한국 간의 직접적인 대치가 일어난 지역이다. 1999년 6월 15일에는 제 1차 연평해전이 발발했다. 지속적으로 북방한계선을 침범했던 북한이 경비정과 어선을 보내 한국 해군과 교전했고, 그 과정에서 한국군 7명이 부상을 당했다. 2002년 6월 29일에는 제 2차 연평해전이 발발했다. 한국군의 고속정 1척이 침몰했고, 6명이 사망하고 19명이 부상을 당했다. 당시 두 번의 해전에서 연평도 주민의 피해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북한군과 한국군이 대치하고 소요가 조금씩 나타나는 타 경계지역과는 다르게, 1990년대에도 연평도를 비롯한 서해 5도는 직접적인 교전이 일어났다. 이러한 교전이 일어나는 원인은 한국의 서해 북방한계선에 대한 남북한의 입장차이 때문이다. 한국전쟁이 끝난 이후 북한은 지속적으로 한국이 설정한 서해의 북방한 계선에 대해 부정했다. 이는 정전협정에 해상의 북방한계선에 관한 입장차이가 해소되지 않아 단서규정으로 “연해의 섬 및 해면에 관한 통제권은 1950년 6월 24일 이전을 기준으로 하되, 서해5도(백령도·대청도·소청도·연평도·우도)는 UN군 사령관 관할 아래 둔다.”로만 표기했던 이유도 있었다. 북한이나 한국이 점유하는 영토와 도서만 정하고 위도와 경도로 표시된 실질적인 분계선을 정하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북한에서는 한국의 군대와 국민들이 서해 5도를 출입할 때 북한의 사전승인을 받도록 요구하기도 했다. 1차 연평해전 이후로는 여기서 더 나아가 서해의 북방한계선을 북한의 임의로 작성하고, 서해5도서를 통행할 때 북한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입장을 일방적으로 발표했다. 여러 번의 대치와 논의가 있었으나 서해의 북방한계선에 대한 북한과 한국 간의 입장 차이는 해결되지 않았고, 긴장상황은 2017년에도 계속되었다. 2. 연평도 포격과 피난 2010년 11월 23일 북한은 당시 군사훈련 중이었던 연평도에 사격을 실시했다. 2차에 걸친 사격은 연평도의 군사시설뿐만 아니라 민간인 거주 지역에도 피해를 입혔으며, 연평부대는 자주포로 응전했다. 그 결과 완파된 52개 건물을 포함해 326동이 피해를 입었고 4명의 사망자와 40명의 부상자가 나왔다. 연평도 주민들은 연평도의 각 곳에 마련된 대피소에 대피했으며, 소요가 끝나자 집으로 복귀했다. 그리고 23일 저녁부터 25일까지 연평도 주민들은 일부를 제외하고 연평도에서 피난했다. 주민들 중 인천에 친척이나 지인이 있는 경우는 그곳에서 지냈지만, 연고자가 멀리 있거나 없는 주민들은 임시대피소로 차린 찜질방에서 지냈다. 두 달에 걸친 피난생활 끝에 연평도 주민들은 다시 연평도로 들어왔다.



연평도의 주거환경

주생활의 변화

1. 광복 이후 연평도의 주거환경과 피난민 신석기 패총이 연평도 내에서 많이 출토되는 것과는 별개로, 옛 거주구역은 잘 확인되지 않는다. 고려시대에는 연평도에 말 목장이 있고 조선시대에는 목장과 봉화가 설치되었지만 거주구역이 있었는지 군부대만 주둔했는지는 파악하기 어렵다. 다만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석수어(石首魚)가 연평평(延平坪)에서 나서 공물로 올렸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확인할 때 조선시대 때 조기를 잡기 위해 정주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추론해볼 수 있다. 또한, 조선시대 지도 중 연평도에 ‘인거(人居)’표시된 지도가 확인되므로 연평도에 거주인구가 있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2. 조기파시의 풍경과 주택의 변화 연평도는 조기 어장으로 명성이 높았다. 조기가 서해안을 따라 올라오면 각 지역의 어선들이 그 길을 따라가며 조기를 잡았다. 연평도는 조기의 산란어장이 있어 규모도 컸고, 따라서 파시(波市)의 규모도 컸다. 조기파시가 있던 때에 현재 남부리 구역의 주택은 특히 그 영향이 컸다. 주거지역은 거의 없었고 주점이나 상점으로 가득차 있었다. 작은 골목에 사람들이 발 디딜 틈도 없는 시장이 형성되었으며, 밤까지도 불이 꺼지지 않았다. 당시 조명구로 소라[피뿔고둥]껍질에 어선의 기름을 넣어 심지를 꼬아 등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파시를 일 년 내내 여는 것은 아니었다. 조기잡이 철이 끝나고 여름이 되면 어선들은 다른 물고기를 잡기 위해 떠나고, 그 배를 따라 상인이나 기생들도 같이 자리를 옮겼다. 따라서 파시철이 지나가면 거리가 한산해지고, 주민들은 그곳을 거주지로 이용했다. 1960년대 말이 되어 조기파시가 점점 그 영향력을 잃어가면서 조시파시 골목 주변의 상권도 영향을 받았다. 선원들을 상대하던 술집은 그 수가 줄어들었고, 기생들이 다니던 곳은 기생이 사라졌다. 기생이 사라진 데에는 조기파시가 더 이상 잘 이루어지지 않은 영향도 있지만, 마을의 부녀자들이 부녀회를 결성해서 기생들을 내쫓은 것도 그 이유중의 하나였다. 주점이 사라진 자리는 주민들의 집이 하나둘씩 자리 잡았다. 기생들의 머리를 해주던 미용실도 문을 닫고 주택이 되었다. 한편 주민이 떠난 빈집 중 몇몇은 선원들의 숙소가 되었다. 이전에도 연평도 주민들은 자신이 살던 집에 방이 남으면 선원들의 숙소로 제공하였다. 연평도 조기어업이 불황을 겪으며 마을 주민들이 나가기 시작하자, 그 집들을 구입해 선원들에게 제공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1970년대 이후로는 마을에서 건축업 등을 하는 사람들도 늘어나 그들이 숙박하는 용도로도 사용하는 등 ‘달방’은 그 세가 많이 불어났다. 황해장이나 제일여관 등 여관업도 꾸준히 지속되었다. 3. 1970년대 이후 가옥의 지속적인 변화 연평도의 새마을 운동은 1972년부터 시작되었다. 당시에는 가옥보다 길이나 하천의 정비, 관공소와 기념비 등을 만드는 작업을 우선적으로 하였다. 우선 동부리에서 소구지로 가는 길이 정비되었다. 이전에는 문뱃낭 사이로 지나다닐 수 있는 시기가 썰물 때로 한정적이었고, 소구지로 가기 위해서는 언덕을 넘어야 했다. 그러나 도로 정비과정을 통해 문뱃낭 사이에 도로를 놓아 다니기 편하게 되었다. 이외에 면사무소 뒤의 길이나 조기파시길 등 많은 길이 이 시기에 정비되었다. 4. 연평도 포격 이후 주거환경의 변화 연평도 포격은 연평도의 주택을 변화시키는 과정으로서도 기능했다. 포격으로 인해 반파 혹은 완파된 주택은 지원금을 받아 수리되었으며, 이후 제정된 ‘서해5도 노후주택 개량사업 지원 지침’에 따라 주택 개량에 1인당 4,000만원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이 지원은 연평도 주택을 개보수할 수 있는 충분한 지원은 아니었다. 법령으로는 총 공사비의 20%를 연평도 주민이 부담해야 하므로 전체적인 공사비는 5,000만원인데, 여기에 자비 혹은 가족의 지원금을 보태 집을 새로 짓거나 본인의 사용여부에 맞게 개량한 것이다. 우선적으로 건축에 사용하는 원자재의 운송비용이 서해 5도는 다른 지역에 비해 많이 추가되었다. 또한 건설사업체마다 비용이 달라 지원비용의 일괄적용이 어려웠다. 어떤 사업체는 사업비용을 맞추지만 주택수리의 규모가 작거나 연평도 주민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또 다른 사업체는 연평도에서 작업을 진행하는 도중에 추가비용을 청구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연평도에서 노후주택 개량사업을 진행한 주택들은 그 크기나 모양에 있어서 건설사업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