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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합천군 덕곡면 율지리 살림살이

주제 성윤용·김숙자 부부의 살림살이
조사 살림살이 이야기, 공간과 살림살이, 통계, PDF

걸어온 길

성윤용이 걸어온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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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윤용(남, 1949년생)은 성춘백과 이외술 사이에서 난 5남 2 녀 중 셋째로 율지리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다음해 인 1950년 한국 전쟁의 발발로 인해 율지리도 전쟁의 화마에 휩싸였다. 전쟁 통에서 성장한 그가 처음 가진 기억도 전쟁 에 관한 것이다. 전쟁 이후 마을은 재건되었지만 살림살이는 여간해서 나아지지 않았다. 허술하게 쌓은 제방은 매년 홍수가 나면 터지기 일쑤였고 이로 인해 농경지는 항상 침수가 되었다. 수마가 휩쓸고 간 자리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밭벼를 심었고 나물로 죽을 끓여 먹었다. 성윤용은 죽을 먹으려 고개를 숙이면 그릇 안 죽 표면에 자신의 얼굴이 비치던 묽은 나물죽을 먹으며 자랐다. 그는 일찍이 학업을 포기하고 농사일을 돕기 시작했다. 그러다 15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학남국민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학업성취도가 높아 2학년을 마친 후, 3학년 과정은 3개월 만에 마쳤다. 그리고 바로 5학년에 진학하게 되었다. 하지만 5학년을 채 마치기 전에 학교를 그만 둘 수밖에 없었다. 집안 형편상 학업을 계속하는 것이 부담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성윤용은 학교를 그만 둔 이후에도 아버지를 도와 농사일에 전념했다. 1963년부터 시작된 제방 건설은 그들 가족에게 다른 먹거리를 제공해 주는 계기가 되었다. 1963년 낙동강 제방사업을 시행했다. 율지리도 이 사업 대상에 포함되어 다수의 덕곡면민들이 이 사업에 동원되었다. 여기에 동원되면 48양곡이라 불리는 밀가루와 옥수수가루는 매일 최대 각 3kg 씩 배당 받을 수 있었다. 이 양곡은 가족 구성원 수에 따라 배급되었기 때문에 제방 사업에 동원 되는 가족수가 많을수록 해택이 컸다. 그래서 성윤용은 그의 형들과 함께 제방 쌓는 일을 했다. 그러던 중 그가 18세 되던 해 마을 내에 있던 율지 양조장에 취업을 하게 되었다. 그는 술 배달 뿐만 아니라 어깨너머로 술을 빚는 방법도 배웠다. 1973년 그가 23살이 되던 해 희석식 소주가 사회에서 각광받기 시작했다. 소주의 등장으로 인해 막걸리 소비량이 급감하자, 여러 술도가들이 문을 닫기 시작했다. 양조장 운영이 어려워지자 많던 직원들이 떠나갔고 성윤용을 비롯한 일부만이 남아 양조장을 지켰다. 술을 빚는 기술자마저 양조장을 떠나자, 결국 양조장은 문을 닫게 되었다. 성윤용은 이때부터 농사일만 하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 사이에 그를 부르는 별명이 ‘곰’인 것처럼 그는 우직 하게 일만 해왔고, 그러면서 돈을 모아왔다. 양조장 일을 하면서 받은 월급을 아끼고 저금해서 지금의 땅을 본인의 것으로 만들었고, 다양한 농기계도 구매했다. 그의 선조들이 가졌던 땅에 대한 꿈을 그가 결국 이루어낸 것이다.



소를 돌보는 성윤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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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숙자가 걸어온 길

김숙자의 아버지인 김시대가 성인이 된 후 가진 직업은 경찰 공무원이다. 그는 직업의 특성상 전근이 잦아 여러 지역으로 이사를 다니며 살았다. 이때부터 김숙자 가족의 잦은 이주 가 시작되었다. 그녀는 약사동에 살면서 중앙국민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가방은 고가의 물건이었기 때문에 보자기에 책과 도시락을 싸서 허리에 메고 학교를 다녔다. 그녀는 무사히 춘천에서 국민학교를 마쳤다. 하지만 졸업식을 몇일 앞두고 그녀는 대구로 이사를 와야 했다. 14세가 되던 해 대구로 내려온 그녀는 중학교로 진학하지 않고 집안에서 살림을 하게 되었다. 그녀 아버지의 사업이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대구에서 집안일만 해 오다가 16세가 되던 해 방직공장에 취업하게 되었다. 그녀는 18세가 되던 1972년 ‘동성직물’에서 퇴사해 ‘태왕섬유’로 이직을 하였다. 기숙사에 들어갈 당시 그녀의 나이는 19살이었다. 기숙사에서는 한방에 3~4명이 함께 생활을 했다. 하지만 2교대 근무로 공장이 운영되다보니 때로는 6~8명이 한방에 지내게 되는 경우도 생겼다. 그녀는 최소한의 생활비를 제외한 나머지 돈을 모두 어머니에게 보냈다. 그녀의 아버지는 방직공장 경비원 일을 퇴사한 이후 별다른 직업을 가지지 않고 집에 있었기 때문에 가족 부양은 전적으로 그녀의 몫이 되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딸이 보내준 돈을 아끼고 절약해서 목돈을 만들었다. 그 돈으로 안동 대실리에 땅을 샀다. 안동에 땅을 사고 난 이후 그녀의 부모님은 안동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그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생계를 꾸려갔고 김숙자는 대구에 남아 방직공 생활을 계속해갔다. 그녀의 임금은 일급으로 계산되었기 때문에 하루라도 쉬게 되면 월급이 자불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악착같이 일을 해서 동생들의 학비를 벌었다. 집안에서 아무 일도 할 줄 모르던 소녀는 그렇게 집안의 맏딸 노릇을 톡톡히 해내며 성인이 되었다.



기제사-성윤용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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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윤용·김숙자 부부가 걸어온 길

성윤용은 양조장을 다니기 시작 한 이후 외지로 나가지 않고 율지리에서 매일 술을 빚고 배달하는 일만 하고 있었다. 김숙자도 방직공장에서 10대의 방직기를 혼자서 관리할 수 있을 만큼 숙련공이 되어 있었다. 세상물정 모르던 순박한 청년과 세련된 도시미를 꿈꾸던 방직공 아가씨가 서로 만나게 된 것은 성윤용의 숙모 덕분이었다. 그녀는 성윤용이 처음 만나는 남자였기 대구에서 꽃치장을 하고 직장 동료집에서 기다렸다. 성윤용도 한창 아름다울 나이의 도시처녀가 마음속에 들어왔다. 깊은 대화를 나누기에 서로가 초면이었고, 서로에 대한 것을 묻기에는 부끄러움이 더 커서 간단한 인사만 나누고 첫 만남이 끝나버렸다. 서로가 알아가는 시간이 잦아지고 호감이 깊어 갈수록 김숙자에게는 말 못할 고민이 커져만 갔다. 그것은 농촌생활의 두려움이었다. 그녀는 서울로 취업한 남동생의 뒷바라지를 할 겸 서울로 올라가서 도시 생활을 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성윤용과 결혼을 하면 농촌에 들어와서 살아야 했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성윤용은 김숙자의 부모님이 계시는 안동으로 인사를 드리러 갔다. 그들은 결혼식을 마치고 부곡하와이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그들은 여행을 마치고 합천으로 왔다. 성윤용은 신혼살림을 위해서 돼지우리 옆에 한 칸짜리 아랫채를 들였다. 러면서 1979년도에 아들 성무식을 낳았다. 김숙자는 무식이를 키우면서 농촌생활에 적응해갔다. 하지만 성장 후 대부분의 시간을 도시에서 살았던 그녀는 농촌에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그녀는 대구로 갔고 이때부터 15년간의 별거 생활이 시작되었다. 김숙자는 성무식을 데리고 대구로 나와 살면서 다시 방직공장에 취직했다. 결국 그녀는 대구에서, 성윤용은 합천에서 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부부다 다시 결합하게 된 계기가 된 것은 성윤용의 모친인 이외술의 죽음이다. 그녀가 율지리에 정착 할 당시 성윤용은 양조장 일을 그만두고 농사에 전념하고 있었다. 그는 양조장일을 하며 모아둔 돈으로 땅도 사 늘렸고 농기계도 보유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 마늘과 양파 농사를 했다. 그러다 본격적으로 이 두 작 물을 재배하면서 연매출 1억 가량을 올리는 부유한 농가로 변모했다. 이렇게 성실하게 농사를 지으면서 주민들로부터 덕망을 얻은 두 사람이었기에 성윤용은 10년간 이장을 역임 할 수 있었고, 김숙자도 이장의 부인으로서 부녀회장, 새마을 지도자를 다년간 역임했다. 성윤용은 2001년부터 2011년 까지 10년간 이장직을 역임하면서 마을의 노인회관 준공과 수도시설 기반을 마련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성윤용부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