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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삼척시 원덕읍 갈남1리 민속지

주제 큰섬이 지켜주는 갈남마을
조사 삼척의 역사와 환경, 사진, 영상, PDF

삼척의 민속와 유적

능(陵)과 묘(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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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척은 신라왕조와 고려왕조의 비운이 서린 땅이자, 조선왕조 건립의 기운을 감싸고 있는 땅이다. 신라 땅을 고려에 바친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손자인 김위옹의 능과 부인 밀양 박씨의 능이 있다. 또한 조선을 창업한 이성계가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을 공양군으로 봉하고 원주로 보냈다가 다시 아들들과 함께 간성으로 옮기게 하고, 태조 3년(1394년)에 삼척의 궁촌리에서 죽였다. 그래서 궁촌리에는 공양왕과 두 아들의 무덤이 남아 있다. 실직군왕릉·실직군왕비릉(도기념물 제15호)은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여덟 번째 아들인 일선군(一善君)의 아들인 김위옹의 능과 부인 밀양 박씨의 능이다. 김위옹은 삼척 김씨의 시조이다. 1838년(헌종 4년)에 김학조, 김흥일 등이 실직군왕의 지석과 유적을 찾으려고 삼척부사 이규헌에게 간청하여, 갈야능(실직군왕릉)과 사직릉(실직군왕비릉)을 발굴하여 확인하였다. 삼척시 성북동에 있는 실직군왕릉과 삼척시 사직동에 있는 실직군왕비릉은 1937년 삼척 김씨 종중에서 수축할 것을 건의하여 능으로 봉하였다. 공양왕릉(도기념물 제71호)은 궁촌왕릉(宮村王陵)으로도 불린다. 공양왕과 맏아들 왕석, 둘째 아들 왕 우의 능으로 전해지고 있다. 1392년 이성계가 조선을 창업한 후 8월에 고려의 왕을 폐하고 공양군으로 봉한 후 원주로 보내고 감시하다가, 다시 3부자를 간성으로 옮겼으며 삼척으로 보낸 후 한 달 뒤인 1394년 4월에 공양왕과 두 아들을 궁촌에서 살해했다. 그래서 궁촌리 뒷재를 ‘사릿재’라고 하는데 이는 공양왕과 그 아들들을 살해(殺害)한 재라는 ‘살햇재’에서 온 말이라고 하며, 궁촌이라는 지명도 공양왕과 관련된 것이라 추측되고 있다. 현재 경기도 고양시 식사리 대자산의 공양왕릉과 왕비릉(사적 제191호)은 삼척의 궁촌에 있던 무덤을 이 장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준경묘와 영경묘는 조선 태조의 5대 조부 양무장군의 묘와 부인 이씨의 묘이다. 이성계의 4대조인 목조 이안사가 삼척에 살았는데 두타산 지맥에 자리 잡은 현재의 위치에 묘를 쓰면 장차 왕이 탄생한다는 말을 듣고, 1231년 부친의 무덤을 만들게 되었다. 그 이후 이안사는 함경도 덕원군 용주리로 옮겨서 살았고, 그 후손인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는 백우금관(百牛金棺)의 전설이 전한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후 선대의 묘가 있는 삼척을 현(縣)에서 부(府)로 승격시키고, 수호군(守護軍)을 두어 관리했으며, 나라에서 제사를 지냈다. 현재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에 위치해 있는 준경묘와 영경묘는 고종 황제 때인 1899년 공식적인 선조의 묘로 추봉되어 이중하가 어명으로 수축하여 완성한 것이다.



영경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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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삼척의 유서 깊은 사찰로는 천은사, 신흥사, 영은사를 들 수가 있다. 그중에서도 천은사는 고려시대 대학자인 이승휴(李承休, 1224년~1300년)가 『『제왕운기』(帝王韻紀)』를 저술한 곳으로 유명하다. 이승휴는 고려 고종 때 문과 시험에 합격하였고, 원(元 )나라에 다녀온 후 관직을 버리 고 외가(外家)가 있는 두타산 구동(龜洞)으로 돌아와 용안당(容安堂)이라는 건물을 짓고 『제왕운기』를 저술하였다. 현재의 천은사 일원은 이승휴가 거처하던 곳이다. 천은사는 신라 흥덕왕(829년)때 창건한 사찰로 목조아미타삼존불좌상(도유형문화재 제147호) 등이 있다. 무엇보다도 천은사는 이승휴의 유허지로 잘 알려져 있는데 이승휴가 모든 전답을 불가(佛家)에 희사하면서 간장사(看藏寺)라 명명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청허대사(淸虛大師)가 중수하면서 흑악사(黑岳寺)라 불렀다. 숙종 24년에 화재로 소실되었고, 순조 31년 중수하였다. 1899년 이중하(李重夏)가 ‘천은사(天恩寺)’라 이름을 고쳤다. 당시 사찰은 1948년 화재로 소실되었고, 1972년 다시 중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신흥사는 도문화재자료 제108호로 지정되어 있는 설선당(說禪堂) 및 심검당(尋劍堂)으로 잘 알려져 있다. 범일국사가 삼척시 북평읍 지흥리에 창건한 지흥사(智興寺)를 시작으로 조선 현종 15년(1674년) 근덕면 동막리로 이전하여 광운사(廣雲寺)라 하였는데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후 영조 47년(1771년) 영담노사(影潭老師)가 중건하였고, 순조 21년(1821년) 신흥사로 명명되었고, 철종 14년(1863년) 중수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설선당은 현종 15년(1674년)에 건립되어 강당으로 사용하던 건물이고, 심검당은 영조 4년(1771년)에 건립되어 고승들의 진영(초상화)를 모시고 있어 진영각이라 불리기도 한다. 영은사(靈隱寺)는 신라 진성여왕 5년(891년) 범일국사가 창건하고 궁방사(宮房寺)라 하였고, 명종 22년(1567년)에 사명대사가 현재의 위치로 옮겨 짓고 운망사(雲望寺)라 하였다. 이 또한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인조 19년(1641년) 벽봉(碧峯) 스님이 중건하고 영은사라 명명하였다. 그 후 또다시 산불로 소실된 사찰을 순조 5년(1805년)에 다시 중건했다고 한다. 대웅보전이 도유형문화재 제76호, 팔상전이 도유형문화재 제77호로 지정되어 있다.



부처님 오신날_법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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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碑)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는 1661년(현종 2년)에 삼척부사 허목이 풍랑을 예방하기 위해 동해송을 지어 전서체로 글을 써서 세운 비문으로 ‘퇴조비(退潮碑)’라고도 한다. 현재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8호로 지정되어 있다. 척주동해비문은 동방 제일의 전서체 필치를 가졌다는 허목의 기묘한 서체로 유명하다. 예전에 파도가 높아 조수가 읍내까지 올라오는 일이 많았고, 오십천이 자주 범람하여 주민의 피해가 극심하였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허목(許穆)이 동해송(東海頌)을 지어 정라진 앞의 만리도에 동해비를 세웠더니 바다가 잠잠해졌다고 한다. 그 후 비가 파손되어 조수가 다시 일자 1709년에 삼척부사 박내정이 이를 모사하여 현재의 정상리 죽관도(육향산)의 아래쪽에 세웠다. 그러나 1969년 햇볕이 잘 드는 육향산 정상으로 옮겨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대한평수토찬비(大韓平水土贊碑)는 척추동해비와 같은 내력을 지닌 비석으로 규모와 양식이 동일하다. 조선 선조의 왕자인 인흥군의 장남 낭선군(朗善君)이 중국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형산(衡山)의 우제(禹帝)가 썼다는 전자비(篆子碑)인 형산신우비(衡山神禹碑) 77자의 비문 탁본을 허목에게 전했다. 허목은 그중 48자를 선택하여 글을 짓고 목판에 새겨서 삼척부에 보관하도록 했다. 그 후 1904년 왕명으로 칙사 강홍대(康洪大)와 삼척군수 정운석(鄭雲晳) 등이 석각하여 세운 것이다. 척추동해비와 함께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8호로 지정되어 있다. 소공대비(召公臺碑)는 조선 세종 5년(1423년) 황희(黃喜)가 강원도 관찰사로 파견되었는데 황희가 가끔 쉬곤하던 와현이라는 고개에 돌을 모아 단을 쌓고 그의 공적을 기리고자 하였다. 이후 중종 11년(1516년) 그의 증손인 황맹헌이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이곳을 둘러본 후 보수를 하고 비를 세워두었는데, 바람에 쓰러져서 부러진 것을 선조 11년(1578년)에 삼척부사로 부임해 온 황정식이 다시 비를 세웠는데 당시 영의정이었던 남곤이 비문을 짓고, 여원군 송인이 글씨를 썼다. 현재 삼척시 원덕읍 노곡리 산67번지에 위치해 있으며 도문화재자료 제107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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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각 및 가옥

현재 보물 제213호인 죽서루는 고려 충렬왕 때 창건되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 고려 명종 때의 문인 김극기(金克己)가 쓴 죽서루 시가 남아 있어 12세기 후반에는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는 있다. 이후 조선 태종 3년(1403년)에 삼척부사 김효손이 절벽 위 중창하였다. 건물의 형태는 정면 7칸, 측면 2칸의 단층 겹처마 팔작지붕의 주심포 양식이다. 천연의 지형을 그대로 초석으로 삼은 것이 특징적이다. 죽서루는 관동팔경의 하나로 오십천의 절벽 위에 지어져 있어 주변 자연경관과 잘 어우러져 수많은 유랑객들이 찾아서 쉬어가던 곳이다. 누각의 글씨 중 ‘제일계정(第一溪亭)’은 현종 3년(1662년) 삼척부사 허목이 쓴 것이고,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는 부사 이성조(李聖肇)가 썼으며, ‘해선유희지소(海仙遊戱之所)는 현종 3년(1837년) 부사 이규헌(李奎憲)이 쓴 것이다. 이밖에도 율곡 등 많은 명사들의 시가 걸려 있다. 삼척은 동해 바다와 접해 있으면서도 깊은 산이 많아서 너와집, 굴피집이 많던 곳이다. 너와집은 소나무, 전나무를 널빤지처럼 깎아서 기와를 얹듯이 지붕 위에 올리는 것으로 함경도, 평안도, 태백산 근처나 울릉도 등에서 주로 지어졌던 가옥이다. 네모형의 폐쇄적인 구조로 방과 부엌, 외양간 등이 모여 있는데 보온 기능이 탁월하여 추운 산간지역의 겨울을 나기 위함과 산짐승으로부터 가축을 보호하기 위한 형태라 할 수 있다. 굴피집은 소나무의 벌채를 금하게 되자 너와 대신 참나무나 떡갈나무의 껍질을 사용한 것이다. 나무껍질을 벗겨서 돌, 통나무 등으로 눌러 평평하게 건조시킨 후 적당한 크기로 자른 후 겹쳐서 지붕에 사용한다. 수명은 20년 정도이고 3~5년 주기로 교체 보수를 한다. 도계읍 신리마을의 너와집은 150여 년 전에 건축된 것으로 중요민속자료 제33호로 지정되어 있다. 신기면 대이리의 너와집은 이종옥의 11대 선조가 병자호란 때 경기도 포천에서 피난 와서 짓고 정착한 집으로 중요민속자료 제221호로 지정되어 있다. 신기면 대이리의 굴피집은 원래는 너와 지붕이었으나 1930년경 너와 채취가 어려워져서 굴피로 교체하였다. 현재 중요민속자료 제223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외에도 대이리에는 통방아가 중요민속자료 제222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물방아 또는 벼락방아라고도 한다. 통방아의 공이 위에는 원추형의 굴피를 덮은 덧집을 만들어 놓아서 산간의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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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신앙

봉황산 미륵삼불은 삼척시 남양동 백조아파트와 삼척중앙교회 뒷편에 위치해 있다. 돌미륵불 3기가 놓인 봉황산 뒷편은 조선 시대 동해안의 해상방위를 총괄했던 “삼척포진”이 있었고, 삼척포진의 뒷편 언덕에 사형장이 있었다. 이런 연유로 사형당한 죄수들의 원혼이 봉황산 자락을 타고 내려와 읍내에 온갖 재앙을 일으키는 사건이 자주 발생했다. 이러한 사정으로 민심이 흉흉해지자 1835년 삼척부사 이규헌(李奎憲)은 읍내로 내려오는 제액을 막기 위해 읍내와 가장 가까운 지점에 미륵불을 세워서 봉황산 정상을 바라보게 했다. 그 후부터 읍내의 재앙은 사라졌다고 한다. 현재 미륵삼불은 부분적으로 파손되어 있다. 봉황산 방향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첫번째 미륵은 정수리 부분과 얼굴 좌측에서 우측 대각선으로 파손되어 있고, 이마의 수평으로 부분 파손되어 있으며, 배꼽 부위가 一자로 파손된 상태이다. 두번째 미륵은 좌측 엉덩이 바깥 모서리 부분이 파손되어 있다. 미륵삼불 중 1기를 본뜬 모본이 국립민속박물관 야외전시실에 전시되고 있다. 해신당은 삼척시 원덕읍 갈남2리(신남마을)에 위치한 당이다. 매년 정월 정월보름과 10월 축일(丑日)에 나무를 깎아서 만든 남근을 홀수로 매달고 동제를 지낸다. 이 해신당으로 인해서 해신당공원이 만들어져서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는 명소가 되었다. 이 외에도 초곡리 성황당, 미로면 삼거리 영당, 갈남마을 성황당과 해당 등 수많은 제당이 분포해 있다. 초곡리 성황당은 음력 정월 보름과 단오에 ‘도신제’라고 하여 제를 올리는 데 당 내부에는 ‘성황지신위(城 隍之神位)’라 적혀 있는 위패와 수부장군 화상과 말을 탄 장군 화상이 그려져 있다. 미로면 삼거리에 있는 영당은 음력 정초에 택일을 하여, 단오에 제를 지내며 ‘성황지신위(城隍之神位)’라 적혀 있는 위패와 철마가 봉안되어 있다.



해신당


갈남마을

개관

갈남마을은 삼척시 원덕읍에 속한 어촌마을이다(속지명으로 ‘갈뫼’ 혹은 ‘갈산(葛山)’이라 부른다). 갈남마을의 입향시조인 여양(驪陽) 진씨가 갈남마을에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전후이다. 여양 진씨 가문에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낙향하여 갈남 바닷가에서 하룻밤을 묵었는데, 잠을 자고 일어나보니 전날 없던 바위가 바다 위로 올라와서 이상히 여기고 살펴보니 바위 전체에 전복이 빼곡히 붙어 있었다. 해산물이 풍부하여 살기 좋은 곳임을 알고 갈남마을에 살게 되었다”고 한다. 갈남마을 해변은 갯바위가 유난히 많아서 미역, 우뭇가사리 등 해초류가 많이 자랐고, 이를 먹이로 삼는 전복, 성게, 해삼 등도 많이 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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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혁

일제강점기에는 갈남마을에 전복가공공장이 세워졌을 정도였으니 여양 진씨 가문에 전승되는 이야기가 허황되지 않음을 알 수가 있다. 1960년~70년대에는 제주도에서 출가 물질을 온 해녀 50~60명과 머구리 잠수부 10여 명이 물질을 했는데 인근에 서는 가장 많은 해녀와 잠수부가 물질을 할 정도로 해산물이 풍부했던 것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갈남마을이 장호리에서 분리되었는데 1916년에 106호였던 것이 1962년에는 무려 206호로 두 배 가까이 증가했다. 이때는 갈남마을이 미역채취로 호황을 누리던 시기이다. 1974년 행정구역 조정으로 갈산마을을 갈남1리, 신남마을을 갈남2리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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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환경

갈남마을은 원덕읍 최북단에 위치하며, 동쪽은 바다에, 서쪽은 용화리, 남쪽은 신남마을에, 북쪽은 장호리에 인접해 있다. 중앙으로는 화방산(花芳山), 남쪽으로는 화순산(花旬山), 북쪽으로는 후현산(後峴山), 서쪽으로는 풍취산(風吹山)이 있다. 화방산은 갈남마을 해변으로 뻗어 있으며 방파제와 연결되는데 생긴 모양이 누에와 유사하여 누에산이라 불린다.



덕봉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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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생활상

갈남마을은 1966년에 전화가 개통되었고, 1968년에 전기, 1981년 10월에 시내버스가 개통되었다. 갈남마을의 인구는 60년대 후반을 정점으로 하다가 70년대 중반부터 눈에 띄게 줄어든다. 2013년 현재 갈남마을은 94가구이고, 인구는 164명이다. 남녀 비율은 각각 82명씩으로 동일하다. 미역채취로 호황을 누렸던 1970년대 초반과 비교하면 갈남마을의 인구는 1/5 수준으로 줄었다. 주요 연령층은 50대~80대이다. 노동력이 왕성할 시기인 20대~40대는 소수이기 때문에 청년회조차 조직되어 있지 않다. 생활권은 삼척시와 임원, 장호항이다. 장보기, 농작물 판매 등은 주로 삼척시에서 하고, 잡은 물고기는 장호항 어판장을 이용해서 판매를 하며, 노인들은 임원으로 많이 나가는데 목욕탕과 보건소를 주로 이용한다. 갈남항의 개발은 마을의 모습을 가장 획기적으로 변화시킨 사건이다. 항구는 제1종, 제2종, 제3종, 군소어항으로 구분하는데 갈남항은 군소어항에 속한다. 1989년에 소규모 어항개발 지원항으로 지정되어 1차로 1993년 방파제 109m와 물양장 52m가 설치되었고, 2012년에 방파제와 물양장을 완공하였다. 방파제와 물양장이 완공됨으로써 마을의 외형이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마을 앞의 해변은 아름다운 모래사장이 펼쳐졌으나, 백사장 전체를 메워서 물양장으로 만들었다. 방파제가 완공되기 전까지는 샛바람에 파도가 높거나 태풍이 불면 장호항으로 피항을 했으나, 현재는 샛바람으로 파도가 높아도 갈남항에 정박시키거나 소형선박의 경우 크레인을 이용해서 물양장으로 끌어 올리는 등 피항을 가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물양장이 완공됨에 따라 승용차 100대 이상을 주차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을 확보하게 되었다. 이 공간은 배의 정박뿐만 아니라 미역건조장, 주차장, 그물 손질하는 공간 등 마을주민들의 다목적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으나, 천혜의 경관은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주거-마을 물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