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성북구에 위치한 정릉3동은 태조의 둘째 부인 신덕왕후 강씨의 능인 ‘정릉(貞陸)’에서 이름 붙여졌다. 남쪽으로는 돈암동과 도성 안으로 통하는 혜화문이 있고, 북동쪽에는 강북구 미아동과 접하며, 서쪽으로 북악터널(1971년 개통)을 넘으면 종로구 평창동에 이른다. 정릉 일대는 본래 살한이, 사을한이, 사아리 등으로 불렸다. 조선 시대 들어와서는 한자명으로 사한리(沙閑里), 사하리(沙河里), 사을한(沙乙閑), 사아리(沙阿里) 등 다양하게 표기되었다. 정릉이 생기면서 이 일대는 능말, 정릉 등으로 불려지기 시작하였다. 정릉 일대는 조선 초부터 한성부에 속했다. 서울의 경계를 표시하기 위하여 1396년(태조 5년) 태조는 한성부에 명하여 방명표(坊名標)를 세우도록 하였다. 한성부는 성저십리(城底十里)까지를 경계로 하였는데, 동쪽은 양주(楊州) 송계원(松溪院) 및 대현(大峴)에 이르고, 서쪽은 양화도(楊花渡) 및 고양(高陽) 덕수원 (德水院)에 이르고, 남쪽은 한강 및 노도(露渡, 노량진)에 이른다고 하였다. 정릉동 일대는 도성의 경계로부터 약 5리 즉 2㎞ 이내에 위치하므로 성저오리정계석표(城底五里定界石標)를 세워 경계를 표시하였다. 현재 정계비의 위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며 그 흔적도 찾아 볼 수 없다. 하지만 정릉사회복지관 뒤쪽의 길 이름을 ‘성저오리길’이라 붙여 길 이름으로나마 한성부에 속해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894년 갑오개혁 때는 한성부 동서(東署) 숭신방 동소문외계에 속하여 소정릉동(小貞陸洞), 청수동(淸水洞), 손가정(孫哥亭)이라고 하였다. 1911년 경기도 경성부 숭신면 대정릉동, 소정릉동, 청수동, 손가정이라고 부르다가 1914년 4월 1일 부제(府制)의 실시에 따라 이전 동부 숭신방의 소정릉동, 손가정, 청수동을 병합하고 정릉리라 하여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에 편입되었다. 1936년 4월 1일에는 경성부 구역확장에 따라서 다시 경성부에 편입되었고, 1950년 서울특별 시조례 제10호에 의하여 정릉리가 정릉동으로 개칭되었다. 1970년에는 정릉3동으로 분동되었 으며, 1988년 서울특별시조례 제12,13호에 의하여 성북구 정릉제3동으로 동명과 구역이 확정 되었다.
정릉3동 일대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고, 마을이 형성된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정릉3동 정릉시장 부근에는 ‘정도600년 원토백이’라고 스스로를 자칭하는 밀양 손씨들이 살고 있다. 이들을 통해 정릉 지역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을 재구성할 수 있었다. 정도(定都)란 조선이 건국되고 한양을 서울로 정한 것을 말하며, 조선건국 후 600년 동안 이곳에서 살아왔다는 말이다. 이곳을 ‘손가정(孫哥亭)’이라고 부르는데 손씨들이 모여 살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손가정에는 고려 말 손씨와 왕씨가 귀양을 와서 마을이 생겼고, 손씨들이 많아 지면서 ‘손가장(孫家庄), 손가정(孫哥亭)’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문헌에서 ‘손가장, 손가정’은 조선 후기 기록에서 처음 등장하는데 이미 규모 있는 마을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19세기 초반의 지도에서도 ‘손가장(孫家庄)’이라는 마을을 찾아 볼 수 있으며, 조선 시대 문인인 이옥(1760~1813)은 북한산 아래 중흥사(重興寺)라는 절에 왔다가 손가정의 아름다운 경치를 기록하며 동쪽에서 제일가는 동네라고까지 평가하였다. 손가정은 일찍이 마을로서 터를 잡은 동네였다. 일제 시대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정릉 지역의 인구증가와 함께 손가정을 중심으로 한 현재 정릉3동 지역에도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사회경제적인 발전을 도모할 수 있었다. 손가정(현 정릉시장 주변) 지역의 주민들의 제보에 의하면 본래 손가정 주변과 정릉 주변 두 곳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일제시대, 한국전쟁 이후에 사람들이 하나둘 들어와 살기 시작하더니 1960년대 이후에는 엄청나게 동네가 커졌다고 한다. 배밭골은 이름도 없던 동네였고, 배나무가 몇 그루 있는 동네였는데 사람들이 토막집(土幕)이나 판자집을 짓고 살기 시작하면서 배밭골이라는 동네가 생겼다고 하였다. 이중 토막집을 짓고 살던 토막민은 일제 시대의 대표적인 빈민층으로 토막집은 일정한 깊이로 땅을 파고 그 위에 삼각형으로 짚을 덮은 움집형과 거적으로 된 벽과 온돌을 갖춘 가옥형으로 나눌 수 있으며, 여기에 사는 빈민들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일제 시대에 서울 곳곳에 증가하기 시작한 토막민은 1935년 2월 빈민신도시계획에 따라 홍제외리와 정릉리에 집단 수용되기 시작하였다. 토막민은 ‘날로 늘어가는 경성부 번영의 그늘 밑에 일간두옥(一間斗屋)도 내 것이 못 되어 척신을 땅에 붙은 토막에 의지한’ 사람들로 묘사되고 있다. 심지어는 ‘도시 미관상 일종의 암(癌)의 작용을 일으키고 있는’ 존재로 표현되기도 하였다. 토막민 문제는 ‘도시의 미관상으로 보나 또는 세민들의 구제로 보아 도저히 득과할 수 없는’ 사안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이를 위해 은평면 홍제외리와 숭인면 정릉리 국유지와 임야에 무상으로 토지를 대여해주고, 건축자재는 이왕직(李王職)과 총독부임업시험장 등에서 기부를 받아 사용하는 것으로 토막민 수용 계획을 발표하였다. 이처럼 토막민들이 정릉으로 이주해온 과정은 일제 시대 이후 서울의 인구증가 및 변화의 추이를 반영한다. 1930년의 통계와 같이 정릉에는 일찍이 마을을 이루고 살던 천여 명의 사람들이 있었으며, 이들은 서울의 변화와 함께 새롭게 이주해오는 토막민과 같은 집단과 반목하면서 정릉에 존재하였다. 현재 정릉3동을 비롯한 정릉 일대를 둘러보면 천여 명이 살았던 동네라는 말이 실감이 나지 않을 만큼 주택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고, 산 아래 산등성이할 것 없이 하늘 높이 치솟은 아파트가 즐비하다. 정릉은 예로부터 공기 좋고 물 맑은 동네로 일컬어져왔다. 북한산으로 둘러싸인 산세에 맑은 물이 골짜기마다 흘러내려왔다. 때문에 맑은 물이 흐르는 골짜기마다 더위를 피해 물놀이를 오는 사람들도 많았고, 정릉 청수장유원지와 같은 여가공간이 생기기도 하였다. 현재 주민들에게 정릉에 사는 이유를 물어보면 하나같이 공기가 좋아서라고 말한다. 이처럼 정릉 일대는 조선 시대에는 성저십리 이내에 위치하여 조선의 수도인 한성부에 속해 있다가, 일제 시대를 지나면서 경기도와 서울에 편입되기를 반복하였다. 북한산이 서울의 진산(鎭山)으로 큰 산이었기 때문에 지리적으로 경계를 이루었고, 자연스럽게 서울과 경기의 경계를 왔다 갔다 하였다. 하지만 조선 시대부터 정착해 사는 손가정의 밀양 손씨들은 되너미고개[아리랑고개]를 넘어 혜화문을 통해 서울을 오가며 생활권을 형성하였다. 또한 현재 정릉의 주민들은 모두 어딘가에서 ‘서울-Dream’을 안고 서울이라는 도시에 정착한 사람들이다. 이제 정릉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영락없는 서울사람, 서울시민이 되었다.
정릉3동은 정릉천을 경계로 하여 서쪽 지역에 위치하며 북한산이 서쪽 경계를 에워싸고 있다. 국민대학교와 고려대학교 보건과학대학 앞으로 정릉길이 가로지르고, 그 위로는 내부순환로가 지나간다. 정릉3동 안에서도 특성에 따라 몇 개의 권역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정릉길을 중심으로 남쪽은 ‘배밭골’이라 부른다. 북동쪽으로는 밀양 손씨들이 많이 살아 이름 붙여진 손가정과 정릉시장 등이 있고, 북서쪽에는 재개발을 앞둔 757번지 일대와 복숭아골이 있다. 북악터널 바로 앞에는 국민대학교가 위치하여 주변지역은 대학생들의 영향을 받는 생활권을 형성하고 있다. 주민들은 하나 같이 인심 좋고, 살기 좋은 동네라고들 말한다. 그래서인지 주민들 중에는 다양한 지방에서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상경하여 처음 정릉에 정착한 사람들이 많다. 이들은 쉽게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지 않고 현재까지 살아왔다. 이들에게 정릉은 제2의 고향이 되었고, 정릉 토박이로 거듭났다. 사실 정릉 지역은 서울의 다른 곳에 비해 도시개발이나 문화시설 면에서 조금은 뒤쳐지는 편이다. 아직도 고지대에는 소위 ‘하꼬방’, ‘판자집’이라고 하는 주택들이 밀집되어 있고, 좁은 골목길이 구불구불하다. 그래도 일상생활을 하는데 갖추어야 할 제반 시설들은 넉넉하지는 않지만, 부족하지도 않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다양한 교육시설이 위치하고 있고, 정릉시장과 같은 재래시장과 각종 병원 등이 많이 있다.
정릉3동에 있는 학교는 모두 6개 학교로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골고루 위치하고 있다. 청덕 초등학교는 정릉3동에서 유일한 초등학교로 국민대학교 뒷편, 솔샘길 옆에 위치한다. 1967년에 개교하여 1970년에 첫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정릉에 오래 산 주민 중에는 부모가 졸업생이고, 현재 자식이 재학생인 경우도 종종 있었다. 정릉3동에서도 북서쪽 고지대에 위치하고 있어 접근성은 좀 떨어지는 편이지만, 아침마다 걸어서 부지런히 학교로 향하는 아이들을 볼 수 있었다. 2003년 학교 건물을 증·개축하여 최신 시설을 갖추었고, 2008년 2월 14일 제39회 졸업식에서 174명이 졸업을 하였다. 중학교는 2개로 고려대학교부속중학교와 북악중학교가 있는데 모두 남녀공학이다. 고등학교는 고려대학교부속고등학교가 있으며, 옆으로 고려대학교 보건대학과 국민대학교가 있다. 특히 국민대학교 주변은 정릉3동에서 대학생들의 영향을 많이 받는 곳이다. 만 명이 넘는 국민대학교 학생들은 매일 학교를 오가면서 주변지역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국민대학교 근처는 다른 대학가처럼 대학생들을 상대로 한 상권이 형성될 만한 지리적 여건을 갖추지 못하였다. 따라서 조금 거리가 있는 학교 맞은 편 배밭골과 후문 지역에 대학생들을 위한 상권이 형성되어 있고, 주거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배밭골은 학교가 개강하는 3월과 9월에는 개강파티를 즐기는 대학생들로 붐비며, 대학생들을 상대로 하는 술집 여사장님 소위 ‘이모님’들은 이때만 되면 다른 때 보다 더욱 정신이 없다. 국민대학교는 2003년까지는 기숙사가 없었다. 따라서 배밭골이나 후문 인근에는 하숙을 치는 주민들도 있었고, 자취방을 세를 놓기도 했다. 최근 몇 년 사이에는 원룸과 같이 대학생들이 선호하는 주거형태를 갖춘 건물들이 많이 들어섰다.
정릉3동에는 정릉시장이 위치한다. 정릉시장은 정릉 손가정 주변에 인구가 증가하면서 자연스럽게 시장이 형성된 시장이다. 본래 정릉시장은 현재 정릉시장 입구 제과점 부근에 위치했었다. 정릉천이 복개되면서 상가주택의 태(???)로 정릉상가가 생겼는데 난전으로 운영되던 시장은 정릉상가로 들어와 입점하게 되었고, 기존에 있던 시장은 없어졌다고 한다. 정릉상가가 생기면서 정릉시장이 더욱 성황을 이루었다. 현재 정릉시장은 정릉천 복원공사로 정릉상가가 철거되면서 예전 같이 번화하지는 않지만 아직도 채소, 육류, 의류 등 생활에 필요한 다양한 종류의 물건을 갖춘 상설점포들이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다. 따라서 가까운 거리에 사는 주민들은 여전히 정릉시장을 이용하고 있다. 정릉과 가까운 지역의 재래시장으로 길음시장이나 돈암시장도 있다. 청량리의 경동시장도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다. 경동시장은 서울에서 손꼽히는 재래시장으로 다양한 물건을 싸게 구입할 수 있다. 따라서 큰 명절이나 많은 양의 물건을 구입할 때에는 경동시장에 나가기도 한다.
정릉은 조선 시대부터 성저십리 내에 위치하여 서울에 속해있었다. 아리랑고개를 거쳐 혜화문을 나서면 바로 도성에 닿을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다.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서울과 거리가 먼 변두리라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는 시내와 멀지 않은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서쪽으로는 북악터널이 있어 북악산을 돌아 시내로 접근할 수 있고, 동쪽으로는 아리랑고개, 미아리고개를 넘어 시내로 향할 수 있다. 종로, 남대문 등 서울 도심과 강남, 여의도, 마포 등 다양한 지역에 닿을 수 있도록 노선버스와 마을버스가 골목골목을 누빈다. 정릉에서 버스가 더욱 중요한 이유는 정릉과 연결되는 지하철이 없기 때문이다. 가장 가까운 지하철역은 4호선 길음역이다. 서울과 같이 복잡하고 거대한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바쁘게, 빠르게 살아간다. 때문에 신속한 교통수단은 필수적이다. 지하철은 교통 혼잡시에 버스보다 빠르게 이용할 수 있다. 정릉 지역 대부분의 버스들은 지하철과의 연계를 위해서 가까운 길음역이나 돈암역(성신여대 입구) 등을 거쳐 간다. 하지만 정릉3동은 지하철이 직접 연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지하철역까지 20~30분 정도의 시간을 소비해야만 한다. 방학동에서 미아리, 수유리에 이르는 강북구 지역과 길음, 돈암동을 거치는 대로는 강북·성북 지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거의 유일한 대로로 아침저녁 할 것 없이 항상 수많은 차들로 교통체증을 일으키는 유명한 도로이다. 또한 강북·성북 지역이 대규모로 개발이 되면서 지하철 4호선은 혼잡도가 높다. 정릉3동을 비롯한 정릉 일대는 조선 시대 손가정이라는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고, 1950~60년대 서울의 팽창과 더불어 사람이 모여들기 시작하여 현재에 이른다. 조선 시대부터 한성부에 속하여 서울의 일부로 여겨졌고, 북한산을 경계로 하여 서울과 경기의 범위를 넘나들기도 하여 서울 변두리의 느낌을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더 이상 정릉은 변두리가 아니며 엄연히 서울 시내로 여 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