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장흥군은 동쪽으로는 보성군, 서쪽으로는 강진군, 남쪽으로는 남해바다, 북쪽으로는 영암군, 화순군과 경계를 하고 있는데, 동서축이 짧고 남북축이 긴 형세를 띠고 있다. 장흥은 서울을 기준으로 한반도 최남단에 위치한다고 하여 ‘정남진’으로 칭한다. 정남진은 서울 광화문에서 정동쪽으로 내달으면 도착하는 나루라는 정동진의 유래에 착안하여, 서울 광화문에서 정남쪽으로 내려오면 도착하는 해변가(장흥군 관산읍 신동리)라는 뜻에서 2001년부터 장흥군에서 발굴한 지역 이미지 브랜드이다. 그래서 오늘날, ‘정남진’ 하면 ‘장흥’으로 인식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1894년 갑오농민전쟁에 깊숙이 개입되어 ‘석대전 전투’는 전라도 남부지역의 최대격전지이었고, 1930년대에는 남부 논농사지대에서 전개된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의 전형이라 할 ‘전남운동협의회’ 사건이 있었다. 해방 직후에는 국가건설을 둘러싼 갈등에서 장흥지역은 인민위원회가 통치기능을 행사한 지역의 하나였으며, 한국전쟁을 전후해서는 이른바 ‘유치지구 빨치산’으로 유명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근현대사의 격변 속에서 장흥은 이른바 근대화 과정에서 소외되어 경제적으로 낙후되었지만, 그로 인해 전통적인 유교문화가 상대적으로 강하게 존속되었다.
칠리안속이 위치하고 있는 용산면은 장흥의 동남부에 위치하고 있는데, 북서남쪽으로는 산 능선으로 경계하고, 동쪽으로는 바다에 접한다. 용산면은 다른 면에 비해 인구가 적지만, 경지면적과 호당 경지 면적, 그리고 전답 구성비에서 대체적으로 답작 지역인 장흥군의 평균치에 해당한다. 이른바 장흥에서 양반행세를 하려면 향교 장의를 맡아야 한다거나, 선조의 문집이나 원사를 갖고 있어야 자랑거리가 된다고 할 정도로, 유교적 전통이 강한 곳이다. 이러한 양반 고을이라는 면에서 “용산면 사람들은 가난하지만 반촌으로 인물이 많이 난다”고들 말한다. 그 이유로 풍수적인 요인들을 들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교육적인 환경을 들기도 한다. 즉 양반고을답게 마을마다 서당이 있고, 또 예로부터 과거, 현재는 고시 등이 출세의 방도라 생각하여 교육열이 높다. 앞에서 거론한 것처럼 양반집안으로서 유지하려면 최소한 집안에 진사, 또는 고시 출신자가 나와야 하며, 선조의 문집이나 원사가 있어야 하는데, 이러한 기반을 바로 문중 서당의 존재로 꼽는다.
칠리안속은 현재 행정구역명으로는 상금리, 하금리, 관지리에 해당한다. 그 안에 금곡천과 금곡들, 월정 마을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금곡(하금), 상금, 송전, 초당, 정장, 유동, 관지 등의 자연 마을이 위치하고 있어, 현지 사람들은 이들 지역을 보통 ‘칠리안속’이라고 한다. 즉 7개 마을이 한데 어울려 있는 곳이라는 ‘칠리안속’, 또는 ‘칠리안속들’이라 하는데, 이 명칭은 자연환경과 역사적인 자연촌락의 편제 과정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용산면은 장흥군에서 부산면, 장동면과 함께 반면으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용산면 안에서도 남상, 남하로 반촌과 민촌을 구분하기도 한다. 1886년에 남면이 남상면과 남하면으로 분할되는데, 이것을 단지 행정적인 구분이 아니라, 반상의 기준으로 여기고 있다. 그래서 아직도 뭍 위, 뭍 아래라는 인식이 존속하고 있다. 칠리안속은 남상면에 속하여 반촌으로 인식되고 있다. 송전과 초당에는 수원 백씨가 사는 데, 일가 외에는 모두 하대하였다. 이와 같이 칠리안속에서 송전, 초당, 월정은 예전에 민촌이었는데, 19세기 말부터 상금의 수원 백씨 중에서 일부가 분가하면서 그들이 주도하는 마을이 되었고, 그 중에는 서손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처럼 수원 백씨들이 월정, 송전, 초당으로 이거하면서 점차 향교 임원을 배출하면서 양반마을로 인식되었다.
칠리안속 마을 이름이 처음으로 보이는 문헌자료는 1734년 「남면방약안」이다. 고지도에 그 명칭이 나오는 것은 1872년 「군현지도」(규장각 소장 고지도)이다. 여기에 남면으로 상금, 하금, 정장 등의 마을 명칭이 나온다. 하지만 현재의 위치와 다르게 표시되어 있다. 1899년 일본 육군참모본부 육지측량부에서 파견한 간첩대원들이 작성한 1:50,000 대축척 지도(구한말 한반도 지형도)에는 하금(下金), 송정(松亭), 중정(中亭), 관지의 명칭만 나온다. 이 지도를 기본으로 1918년 측도가 나오는데, 여기부터 현재의 지역 명칭과 지도 영역이 정확히 표시되어 있다.
칠리안속에 마을이 언제부터 형성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상금, 하금, 관지 등에 지석묘가 많이 산재해 있어 이른 시기부터 여기에 사람들이 살았을 것으로 보인다. 구전에 따르면 상금과 하금 사이에 신라시대부터 나씨와 마씨가 살았다고 하는 나마곡의 지명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현재처럼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던 것은 조선 중기 이후로 추정된다. 칠리안속의 마을 위치는 칠리안속을 둘러싼 야산의 중산간에 위치하는 전형적인 배산임수로, 뒤쪽으로는 야산이, 앞으로 밭, 논과 금곡천이 있다. 다만 양반마을로 지칭되는 상금과 하금은 일찍이 마을을 형성하여 전통적인 배산임수의 남향인데 반해, 나머지 마을은 서향, 북향, 동향을 하고 있다. 이것은 풍수적인 요인 때문에 마을의 방향이 정해지기도 하겠지만, 일찍이 이들이 좋은 자리를 선점하면서 마을이 일찍 형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상금과 금곡 마을의 경우, 북쪽에는 야산이 있어서 겨울에 추운 북서풍을 막아주고, 남쪽에는 넓은 평야와 물이 있어서 여름에 시원한 남동풍이 불어오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칠리안속에는 바람이 세고, 안개가 잦다. 여름에 계절풍이 득량만의 해안을 따라 북상하다가 노승봉과 승주봉을 만나면 주춤하는데, 이때부터 서서히 산을 타고 오르기 때문에 산을 넘으면 가속도가 붙어서 칠리안속에서는 바람이 유난히 세다고 한다. 그래서 상금마을의 경우 정각에 있으면 바람이 세다. 또한 금곡마을의 경우도 모든 바람이 마을 안으로 들어와 머물기 때문에 시원하기도 하지만, 바람이 빠져 나가지 못하기 때문에 한번 전염병이 돌면 오래간다고 한다. 요즘에는 마을 앞으로 양계장과 축사가 있어서 바람이 불면 냄새가 마을로 날아온다고 한다. 그리고 칠리안속은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로서, 그 가운데로 금곡천이 흐르고, 서쪽으로 남상천이 흘러서 다른 지역에 비해 안개가 잦다고 한다. 그래서 안양 지역에서는 쪽파 재배를 많이 하지만, 칠리안속에서는 안개가 잦아 쪽파 재배가 안되기 때문에 양파 재배를 한다고 한다.
칠리안속 마을은 산과 강으로 둘러싸인 금곡들을 공유하고 있다. 이 금곡들 동, 남, 북쪽에는 해발 200-300m의 높이의 야산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고, 야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모여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금곡천을 이루고 있다. 이 금곡천의 물은 금곡들 한 가운데를 가로질러 남상천과 합류하여 득량만으로 빠져 나간다. 그래서 예전에 이곳으로 배가 드나들었다는 흔적으로 상금의 ‘배산이(들)’ 내지 하금의 ‘선창(들)’ 지명이 남아 있다. 이러한 환경 때문에 칠리안속 마을 사람들은 장흥 등 외부세계와 접촉하기 위해서는 산을 넘거나 물을 건너야 했다. 먼저 하금 마을에서는 장흥읍으로 가기 위해서 마을 서쪽의 보개재와 남상천을 건너 장전-척산-석동으로 해서 자올재를 넘어야 하고, 또는 북쪽의 느지재와 아래된기재, 남상천을 건너 모산-포곡으로 해서 자푸재를 넘거나, 원등을 거쳐 미륵재로 가야 했다. 상금마을 역시 이와 같은 고개와 물을 건너거나, 마을 뒤 윗된기재를 이용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과거에는 달구부리 및 느지재, 된기재 주변에 주막이 있었고, 하금의 느지재와 상금의 윗된기재에는 서낭당으로 추정되는 돌무더기가 아직도 남아 있다.
용산면는 장흥의 동남부 해면에 위치하는데, 북서남쪽은 산 능선으로 경계하고, 동쪽은 바다에 접한다. 용산면의 칠리안속에서도 주변 경관을 읊은 시들이 많다. 특히 금곡마을 이복연의 금곡팔경은 초당마을의 뒷산 귀봉, 상금과 하금의 참샘, 관산의 천관산, 필봉, 부용산의 부용사, 용강, 상금 뒤 연친바위, 느지재 등 칠리안속을 둘러싼 자연 경관을 노래한 것이다. 용두천은 용산면을 가로질러 흐르는 물로, 『장흥지』(정묘지)에 “용산면의 골짜기 물을 모두 받아서 용두를 둘러 금곡천과 합하고, 귀정탄을 지나 지천포로 들어간다. 귀정 위에 층암이 있는데, 이것은 박수귀가 쌓아놓은 것이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