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마을은 유서 깊은 경북의 성산인 팔공산 북쪽사면을 타고 내려오다 약간 돌출한 오도봉을 거친 후 다시 완만하게 펼쳐지고, 이 산자락은 서쪽으로 도독산, 응봉으로 이어지며, 동쪽으로는 통시골 만댕이로 뻗어있다. 이렇듯 ‘한밤 고간’은 북, 동, 서쪽이 산악으로 둘러싸인 분지형 입지에 농토와 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분지가 많은 경북의 타 지역과 다른 특징은, 남쪽이 높은 산악으로 막혀있고, 주민들의 생계터전인 농토가 상대적으로 고지대에 위치하여 냉해, 한해와 더불어 여름철 급격한 기상이변이 자주 발생한다는 데 있다. 분지가 형성된 지질시대부터 이어져 온 이런 자연환경은, 그 부산물로 ‘육지의 제주도’라 부를 정도의 많은 돌을 이 마을에 남겨주었다. 이를 증명하는 충격적인 기록과 기억이 바로 1930년 경오년 산사태와 이에 따른 물난리가 아닌가 싶다. 특히 대율리 마을은 남쪽의 완경사와 동·서쪽의 급경사가 지형적으로 집중되는 중앙에 위치한다. 1991년 한티재가 지금처럼 확·포장되어 대구와 1일생활권이 되기 이전에는 폐쇄성이 강한 경북의 오지 중의 하나였다. 이 고간사람들은, 작물 성장에 불리한 고지의 열악한 환경인데다, 특산품 등 산물도 부족하여 생계유지에 애써왔다.
한밤마을은 경북 내에서 ‘한밤 홍씨’라고 부르는 부림 홍씨의 본향으로 더 알려져있다. 고려 전기 이래, 1천여 년을 이어온 부림 홍씨 동성반촌 관향이 바로 한밤마을인 것이다. 따라서 자연의 흔적인 돌담과 유교문화적 흔적인 고택, 불교문화적 흔적인 석불 입상 등이 어우려져 마을의 특징이 연출된다. 법정 소재지명은 경상북도 군위군 부계면 대율리이다. ‘한밤’이라는 지명은 동성반촌 관향으로서 갖는 지역·정서적 공동체 의식을 담고 있다. 대율리는 1991년 행정리가 1,2리로 분리됐다. 당시 마을주민들은 ‘대청’과 연결된 동서 관통의 ‘대청길’이 그 경계가 될 정도로 행정편의적이며 무의미한 구분으로 받아들였다. 17년이 지난 이제는 공동체의식도 많이 소원해져서, 주민들은 소속 리 중심으로 결속하는 모습이다. 부림 홍씨 외에 한밤마을에 입동한 영천 최씨, 전주 이씨 등 동족집단도 다수 거주한다. 관내 홍씨의 비율은 60% 정도로 여전히 높은 편이다. 이는 부림 홍씨 본향임과 동시에 동성집성촌이 누대를 거쳐서 지금까지 이어져 왔기 때문이다. 비단 지금의 현상이 아닌 과거로부터 이어져온 사실임이, 일제강점기 동성취락조사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가능하다. 부림 홍씨는 남산동을 중심으로 하되, 고개너머 매곡동(현 효령면)까지 집성촌을 이루면서, 동산동, 대율동, 고곡동(현 효령면)으로 분파와 생활영역 개척을 통해 타성을 받아온 그간의 흔적을 잘 보여준다.
고대 초창기 불교문화가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으며, 경재공 이후 유교적 전통이 형성되어 현재 부림 홍씨 관향을 이룬다. 최근에 행제되지는 않지만 전통 민속신앙인 동제와 성주 등 가신신앙, 오무댕이와 신당골 등의 지명은 무속신앙의 흔적을 알려준다. 불교문화 유적으로는 대율리에 군위대율리석불입상, 남산리에 군위삼존석굴·군위삼존석굴석조비로자나불좌상·군위삼존석굴모전석탑·경질연화문수막새, 동산리에 3층석탑·불상대좌·군위대율리석불입상 등이 있다. 유교문화 유적·유물로는 대율리에 군위대율리대청·남천고택·백원첩이 있고 남산리에 휘찬려사 목판·경재실기 목판·포은-경재 간찰 유묵이 있다. 전통신앙과 관련해서는 대율리에 동제·가신·오무댕이·신당골(지명-무속신앙)이 있고 남산·동산리에 동제·가신 등이 남아있다.
한밤마을에는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확인되는 첫번째 흔적이 청동기시대 무덤인 고인돌이다. 새마을운동으로 지금은 없어지고 사과나무 과수원으로 바뀌었지만, 주민들은 동산1리 황청리 한가운데에 탁자식(북방식) 고인돌이 있었다고 증언한다. 조선 시대 의흥현의 속현인 부계현의 건치연혁은 “삼국시대의 이름은 자세히 알 수 없고, 고려 현종 무오년에 상주 임내에 붙였다가, 뒤에 선주로 이속시켰었으며, 별호는 부림이다.” 고 하였으며, 또다른 기록에는 “현의 남쪽 31리에 있는데, 본래 삼국 때 부림현이었으나, 고려 초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으며, 현종 9년에 상주에 붙였다가 뒤에 선주로 옮겨 소속시켰고, 공양왕 때에 이곳 의흥에 소속되었다.”고 하였다. 맨처음 마을을 개척한 부림 홍씨(홍란과 경재공 홍로)의 정착지는 현재의 갖골과 양산서원 부근이 된다. 대율리는 ‘황세실’이란 지명으로 불렀던 뺏밭들 소나무숲 부근을 거쳐 지금의 위치로 옮겨왔을 개연성이 높다. 주변마을은 지금의 동산1, 2리, 남산2리, 대율리 통시골 동서사면의 오무댕이 쪽으로 퍼져서 분동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대율리는 돌밭의 황무지였던 곳이었는데, 분동하는 과정에서 이곳을 개척한 것으로 보인다. 농지가 부족한 이 고간에서, 현 대율리 마을이 들어선 곳이 뺏밭들과 같은 들이었다면 마을을 이루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율리를 포함한 한밤 고간의 역사는 아래와 같이 간략히 정리된다. 1100년 이전(고려 전기) 부림 홍씨 정착하여 마을 형성(갖골마을 주변) 1300년대 초~중반 신천 강씨 이거(강인석이 부림 홍씨 처갓곳으로 들어옴) → 함양군사를 지낸 아들 강윤리 대에 김연의 사위가 되어 처갓곳인 선산으로 또다시 이거하여 정착) 1392년(려말선초) 경재공 홍로의 낙향(갖골과 가까운 곳으로 양산서원이 소재한 남산1리 서원마을 근처) 1500년대 중후반 여양 진씨 입동(갖골 부림 홍씨 처갓곳을 연비로 동산1리 황청리에 정착) 1500년대 중후반 부림 홍씨 중파 분동(남산1리 서원), 서면파 분동(고곡동 등 옛 부서면지역), 신리파(신리파) 분동(동산2리 신리) 1592년(임란) 영천 최씨 입동(대구에서 살다 피란 곳으로 처갓곳) 1592년(임란) 등 송강 홍천뢰 장군, 혼암 홍경승 활약 1630년 전후 전주 이씨 효령공파-삼계부정파 입동 1700년 이후 부림 홍씨 종택 갖골에서 대율리 영장공 홍수구의 살림집으로 이전 추정 1894년 동학도가 마을에 들어와 피해를 주자 이들을 물리쳐 죽이거나 일부를 사로잡아 경상감영에 인도한 홍규흠이란 인물이 있음 1927년 삼존석굴(석굴암) 발견·신고 1930년 7월 13일(음, 6. 18) 오후 3~7시 팔공산 집중폭우로 산사태발생 1931년 돌방천 축조, 수해기념비 건립 1949~53년 농지개혁, 한국전쟁 등을 거치며 좌우갈등 1960년대 돌담 폭 확대 (공식적인 새마을운동 이전) 1960년대(초) 미공군부대 팔공산에 들어옴 1960년(8월) 한밤장 개설(5·10일 5일장) 1971년(10월) 동산1리(황청리)에서 남산1리 서원까지 대로 개통으로 대율리 종점 버스 서원까지 연장운행 1973년 전기 들어옴 1984년 미군부대 팔공산에서 나감 1988년 동(洞) → 리(里) 1989년 6월(7~8일) 성안 숲의 고려시대 3층석탑 분실 1990~91년 한티재 확포장 1991년 대율리 1·2리(행정리) 분리
마을사적 관점에서 역사자료 등에 기록된 한 마을의 사실은 여타 마을자료처럼 단편적이다. 지금까지 찾아진, 공식적인 가장 이른 마을 명칭 자료는 홍주세의 준호구이다. 여기에 대율리가 기록되어 있다. 홍주세의 부는 영장공 홍수구로 거주지가 대율리였을 개연성이 높다. 지금의 부림 홍씨 종택(866번지)이 당시 홍수구의 살림집이었다고 전하는 내용과 부합되기 때문이다. 이보다 이른 자료로, 홍수구 처 숙부인 일선 김씨가 봉사조와 더불어 적자·얼자에게 분배한 허여문기가 있다. 1686년(숙종 12년)에 작성된 이 문기에 허여된 노비 이름과 전답의 위치가 기록돼 있다. 토지는 주변의 동면, 서면까지 분포되어 있으나 대부분은 이 고간(한밤)의 땅이다. 문건에 기록된 지명 중, 이 고간에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대율, 성충, 존당, 오목, 궁률, 황청, 불암 등이 있다. 또한, 돈녕부 도정(통정대부, 정3품 당상관)을 지낸 수헌 홍택하의 선후대 호구자료는 1771~1907년 동안의 대율리 지명을 알려준다. 1789년(정조 13년) 자료인 『호구총수』에 의하면, 대율리는 의흥 부남면에 속하며 황청리, 신리, 둔덕리, 원산리, 지동리와 더불어, 270호 1,730명(남770, 여 960)이 거주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1872년(고종 9년) 지방도(경상도 의흥현)에 대율리는 부남면 소속 마을의 하나로, 황청리, 신리, 둔덕리, 지동, 남대리와 함께 보인다. 화적떼와 관련되어 1894년 8월 21일 올린 「품고」에 참여마을 주민 인원과 더불어 마을 이름이 표기되어 있다. 여기에 황청리, 신리, 원저, 소근곡, 지동, 수산, 둔덕리와 함께 지금의 대율리인 하대리, 동대리, 상대리, 서대리가 적혀있다. 이 기간의 지명은 1899년(광무 3년)에 작성된 개별읍지인 『의흥군읍지』 첨부 지도를 통해 확인된다. 여기에 부남면 소속 마을로 대율리, 황청리, 신리, 둔덕, 수산, 지동, 원저가 표기되어 있다. 일제강점기인 1913~14년간 조선총독부와 각 도청의 구한국시대 부군면리동을 통폐합 정리한 일제강점기 자료인 『(신구대조)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에 옛 의흥군 부남면 소속 마을 중, 대장동, 동대동, 상대동, 서대동 일부가 대율동으로, 황청동, 신리동, 서대동 일부가 동산동으로, 지동, 수산동, 둔덕동, 원저동, 소근곡동, 칠곡 동북면 추동 일부가 남산동으로 각각 편제됐다. 광복 이후, 몇 차례 행정구역 개편과 1988년 동(洞)을 리(里)로 바뀐 조치를 제외하고, 현재와 같은 행정구역 편제는 일제강점기의 것이 그 근간을 이룬다.
율리라는 지명은 전국적으로 많다. 그러나 한밤고간의 마을 지명은 나름의 사연이 있다. 물론 대율리 동쪽 오무댕이 등에 밤나무가 많았다고 주민들은 증언한다. 그러나 이 고간에서 밤을 많이 수확한 시기는 고작해야 1백여 년 안팎의 일이다. 한밤마을이 현재와 같은 동성반촌으로 형성되는 결정적인 계기는, 정몽주의 문인으로 문하사인을 지내다, 여말선초 불사이군을 이유로 부친이 계신 이곳으로 낙향하여 27세에 몰한 경재공 홍로 이후이다. 경재공은 부림 홍씨 중시조격이다. 불사이군의 절개를 지키고자 했던 경재공은, 도연명의 다섯 그루 버드나무가 있고 누리에 국화향기 가득한 이상촌 율리를 대율리라는 마을을 통해 실현하고자 했던 모양이다. 지명 외에 오류 도연명과 관련해서 5그루 버드나무가 전한다. 경재공의 자취는 직접적으로 대율리라는 지명 외에도 주변 지명에 아직도 남아있다. 불사이군의 절개는 백이숙제의 고사와 관련된다. 수양산은 멀뫼, 양산, 양산서원, 척서정 등이 있다. ‘한밤’이라는 마을의 한글 명칭도, 경재공과 관련된다. 원래 한밤, 한밥 등으로 부르던 것을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여러 음가로 적던 것을 경재공이 평소 좋아하던 도연명의 시에 등장하는 율리를 표방하여 ‘대율’로 표기가 정착되지 않았나 생각된다.이런 절개가 강직한 경재의 영향은, 미리 출향한 허백당, 목재, 우암 등을 출사한 상주의 함창파를 제외하고, 부림 홍씨의 출사자가 적은 이유와 관계되는 듯하다. 현재까지 확인되는 대율리 지명은 호구 관련 자료로 1720년이 상한이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올라갈 개연성은 충분이 있다. 주로 한자표기 이전 대율이라는 표기야 한자화 됐다하더라도, 우리말 지명 ‘한밤’, ‘한밥’은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과거 오지이면서 폐쇄적 입지인 한밤분지상, 그나마 조금의 들(평지)를 이루는 마을 남서쪽의 들판(중보들, 빼밭들, 존당들, 성충들)에서 유래됐을 개연성도 있다. 대율리를 달리 ‘한-바미’, ‘대야’ 라고 부르고, 현재 마을 주민들도 이렇듯 인식하는 분들도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