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지리가 문헌상으로 등장하는 시기는 1830년대로, 1830년대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는 『임원십육지』와 1832년에 편찬된 『경상도읍지』에서 ‘율지장’이라는이름으로나타난다. 율지리가 아닌 율지장이 문헌에 우선적으로 언급된 이유는 마을에 있었던 율지나루 때문이다. 율지나루는 율지리 남쪽 낙동강에 인접해 있던 나루터로, 그 형성 시기는 명확하지 않지만, 1930년대까지 지역 수상 물류운송의 중심지 기능을 수행했던 낙동강의 주요한 나루 중 하나였다. 율지나루를 운행했던 배들은 주로 부산에서 게젓과 소금 등을 싣고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오던 상선이었다. 선주들은 배에 싣고 온 소금과 게젓을 지역 상인들에게 판매하고, 그 돈으로 쌀과 보리 등의 곡식을 산 다음 부산을 내려갔다. 이러한 상행위의 결과로 율지리와 율지장은 지역상권을 대표하는 중심지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과거 율지장은 1일과 6일에 장이 서는 5일장의 형태였다. 마을 주민들의 제보에 따르면 과거 율지장날이 되면 한복을 입고 진등재를 넘어오는 사람들로 인해 산길이 희게 보였다고 한다. 이처 럼 선단에서 일을 하던 노동자들과 더불어, 장을 보기 위해 율지리에 몰려든 인파들로 인해 율지리는 항상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이처럼 유동인구의 증가는 율지리의 상권 발전을 야기했다. 당시 율지리의 상권을 구성하던 대표적인 직종은 요식업과 숙박업으로 마을에는 수많은 식당과 여관이 즐비했다. 당시 이러한 율지리의 모습은 『합천군지』에서도 잘 나타난다. 이 글에 의하면 당시 율지리의 가구 수는 800호에 다다랐으며, 나루에는 크고 작은 10여 척의 선박이 항시 정박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나루터의 주막집에서는 10여 개의 큰 가마솥에서 항상 국밥을 끓이고 있었으며, 도축을 전문적으로 하는 업소에서는 평일 소 2마리 장날 소 5마리를 잡았다고 한다. 2011년도 기준 덕곡면의 전체 인구가 1004명인 것을 감안하면, 당시 율지리와 율지장의 규모가 굉장히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율지장의 발전은 오광대패 형성에도 영향을 주었다. 수륙 물류운송의 중심지의 기능을 하던 율지리는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 점차 그 역할이 약화되기 시작한다. 일제강점기 효율적인 식민 지배를 위해 일제가 건설한 신작로와 철도의 등장으로 수륙물류 운송의 비중이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육로의 발전으로 인해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오던 상선들은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고, 1930년대가 되어서 율지리에서는 더 이상 상선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1930년대 이후 율지나루는 육로의 발전으로 인해 물류운송의 거점이라는기능은 상실했다. 하지만 나루라는 특성으로 인하여 지역 교통의 요지로서 다시금 부각되기 시작했다. 이는 덕곡면의 자연지리적인 특성에 기인한 결과이다. 앞선 개관에서 말했던 바와 같이 덕곡면의 면계는 험준한 산맥과 강으로 가로막혀 있다. 그래서 다른 지역으로 가기 위해서는 진등재를 넘거나 혹은 낙동강을 건너야 한다. 고개를 넘는것 보다는 강을 건너는 것이 힘과 이동시간을 절약하는 방법이었기 때문에 덕곡면민들은 율지나루에서 운행하던 나룻배를 타고 타지역으로 나갔다.이처럼 율지리가 교통의 중심지로 부각되어 항상 마을 내에 많은 유동인구가 있었으며, 동시에 면소재지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역상권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었다.
율지리는 1950년까지 작은 농촌 마을임과 동시에 상권의 중심지, 그리고 교통의 요지로서의 기능을 수행해나가고 있었다. 이러한 모습은 한국전쟁의 발발로 인해 한순간에 자취를 감추게 된다. 율지리는 낙동강 도하가 가능한 나루가 있는 마을로, 한국전쟁 당시 군사적 요충지였다. 한국전쟁 초기인 1950년 8월에서 9월 사이에 벌어진 낙동강전투에서, 밀려드는 중공군을 막아내기 위해 한미연합군은 낙동강 도하가 가능한 마을에 대해 폭격을 감행했다. 율지리도 이 폭격 대상에 포함되었다. 이와 관련한 고 하법종(남, 1933~2007)의 생전 증언은 한국전쟁 당시 율지리의 상황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마을에 비행기가 기름을 뿌리고 지나간 이후 폭격이 감행되었으며, 그 결과 마을의 95채의 가옥 중 93채가 전소되었다고 한다. 낙동강 전투가 끝나고 전선이 북상한 이후 마을 사람들은 다시 마을을 재건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의 걸림돌이 된 것은 북한군의 지속적인 공격이었다. 전쟁의 주요 전선이 북상했지만, 지형지세가 험준한 곳에 매복하고 있던 북한군의 기습적인 공격은 계속되었다. 그래서 낙동강 전투 이후에도 창녕군에 진지를 구축한 한미연합군은 북한군의 잔당을 소통하기 위하여 다남산 자락을 대상으로 하여 지속적인 포격을 감행했다. 이러한 전쟁의 흔적은 마을 주민들이 다남산의 한 골짜기를 ‘인민군 죽은 골짜기’라고 부르는 데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한국전쟁이 끝나자 마을 사람들은 마을의 재건에 힘을 쏟았다. 이때는 이미 많은 주민들이 고향을 등지고 떠난 상태였지만, 남은 사람들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마을의 재건은 마을의 경관을 바꾸어 놓았다. 이는 가옥의 형태 변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국전쟁 이전 마을 내 대부분의 집은 초가집의 형태를 띄고 있었지만, 전쟁 이후에는 기와집들이 지어졌다. 토착민과 이주민들의 노력으로 마을은 재건되었지만, 더 이상 율지리는 과거의 영광을 가진 마을이 아니었다. 1960년대에 들어 시작된 이촌향도 현상은 마을 주민들의 수를 급속하게 감속하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낙동강의 잦은 범람은 농사를 기반으로 살아가던 율지리 주민들의 생활고를 가중시켰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이 마을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나갔으며, 그들의 빈자리는 새로운 이주민들이 대신 했다. 이러한 마을의 불안정한 상황은 율지장의 사례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율지장은 한국전쟁 이후 마을을 재건하는 기간 동안은 활성화되었지만, 1960년대에 접어들며 그 규모가 대폭 축소되기 시작했다. 그 원인은 앞서 언급한 인구의 감소와 가장 직접적인 연관을 가진다. 덕곡면의 인구가 감소하자 율지장을 찾는 사람들이 줄어들었고, 율지장에서 고정적으로 물건을 판매하던 나이든 상인들만이 명맥을 유지하다 결국 1967년 폐쇄되었다. 율지나루가 물류운송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했고 율지장마저 폐쇄되자, 더 이상 율지리는 지역 상권의 중심지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했다. 상권이 붕괴되자 상업으로 생계를 이어가던 주민들이 모두 타지역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이렇게 인구의 이주가 가속화되자 율지리는 면소재지라는 특징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덕곡면의 타 마을에 비해 규모가 축소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율지리 주민들의 소득감소로 이어졌다.
가난한 농촌마을인 율지리가 부촌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계기가 된 것은 제방축조사업이었다. 율지리는 비옥한 농토를 가지고 있었지만 수해로 인해 경작물의 대부분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잦았다. 그래서 쌀과 보리와 같은 일반적인 곡식을 먹기보다는 피죽이나 무밥과 같은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는 것이 대다수였다. 율지리 주민들이 당시의 가난한 상황을 ‘결혼 전까지 쌀 3되를 먹기 힘들다.’ 라는 말로 비유하는 것을 통해서도, 제방이 축조되기 이전 이들이 얼마나 가난한 생활을 이어갔는지를 알 수 있다. 제방의 축조는 국가사업의 주요 정책사업으로 진되었다.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일환으로 1962년부터 1981년까지 계속된 수리개발 사업에는 낙동강 인근 마을에 농경을 보호하기 위한 제방 축조사업이 포함되어있었다. 율지리도 여기에 포함되어 1963년부터 제방을 축조하기 시작했다. 이 제방의 축조는 3차례에 걸쳐 다년간 진행되는데, 1963년에 처음 시작된 제방의 축조는 가장 기본적인 단계였다. 낙동강을 중심으로 형성된 제방은 주민들의 삶을 크게 변화시켰다. 더 이상 수해의 피해를 받을 일이 없었기 때문에 배불리 쌀밥을 먹을 수 있었다. 마을주민들은 제방이 주는 혜택에 감사해했지만, 이를 관리하는 데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던 중 홍수로 인해 제방이 터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 이후 제방을 보수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제방 높이를 높였으며, ‘제방관리위원회’라는 사회 조직을 결성하여, 이를 관리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제방의 형성과 관리로 인해 농경생활이 안정되자 마을 주민들의 부가 증대되기 시작했으며, 이를 통해 수익을 창출할 방법을 고민하게 되었다. 그 결과 주민들은 1980년대 중반부터 마늘과 양파를 전문적으로 경작하기 시작했다. 현재 이 두 작물은 고소득 작물로 자리 잡아 덕곡면민들의 부를 증대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1980년대 초반까지 삼시세끼를 먹는 것조차 힘들었던 마을이, 제방의 축조와 마늘·양파의 경작으로 인해 가구당 연간 수익 1억 이상을 올리는 부유한 마을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1930년대 중반 이미 율지나루가 가지는 수상 물류운송의 기능은 사라졌지만, 마을 주민들은 이 나루를 이용해 외부로 나갔다. 그래서 율지리는 덕곡면민들에게 주요한 교통의 중심지가 되었다. 율지나루에서 운행한 배는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 하나는 인도선이며 다른 하나는 차도선이다. 인도선은 사람을 실어나르는 배며, 차도선은 사람과 함께 차를 실어나르는 배다. 먼저 인도선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인도선은 모두 나무로 만든 나룻배로 운행방식에 따라 크게 세 종류로 분류된다. 첫번째는 배 뒤에 노를 부착하여 노를 저어 강을 건너는 방식이며, 두번째는 정주라고 부르는 대나무 장대를 사용하여 지렛대의 원리로 강의 바닥을 짚고 앞으로 나가는 방식이며, 세번째는 강의 양편을 밧줄로 연결하여 이 줄을 잡아당겨 앞으로 가는 방식이다. 배는 수심과 물살에 따라 각기 다른 방법을 선택하여 운행했다. 수심이 깊은 경우에는 정주를 사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노를 젓거나 밧줄을 잡아당겼으며, 물살이 셀 경우에는 밧줄을 잡아당기지도 정주를 사용하는 것도 불가능하였으므로 노를 저어 강을 건넜다. 일반적으로 낙동강을 건너는 시간은 10분 내외가 소요되었으며, 물살이 센 경우에는 배가 대각선으로 떠내려가므로 1시간 이상이 소요되기도 했다. 차도선은 커다란 철선으로 주로 버스나 사람을 싣는 용도로 사용했다. 운행방식은 강의 양편에 설치한 밧줄을 잡아 당겨 운행하는 방식이었다. 차도선은 그 규모로 인해 줄을 잡은 인원이 더 많았다. 이러한 방식으로 운행되다 이후에는 군의 지원을 받아 모터가 달린 철선을 운행했다. 배를 운행하는 사람은 마을에서 선출하였으며, 주로 지원자를 위주로 했다. 하지만 연임은 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들은 주로 운임을 곡식으로 받았다. 매번 곡식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주기를 두고 곡식을 거두었다. 배를 타는 횟수보다는 기간을 중요시 했다. 단 매일 배를 타고 강을 건너 학교를 가는 학생의 경우 배삯을 조금 더 받기도 했다. 이 배의 운행은 1980년대까지 활발히 이루어졌다. 하지만 1991년 1034번 지방도가 확장 증축되자, 덕곡면민들은 고령으로의 육로를 활용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육로의 발달은 수로의 쇠퇴를 가지고 왔다. 이렇게 쇠퇴해 가던 율지나루가 사라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율지교의 건설이다. 덕곡면은 낙동강과 험준한 산에 가로막혀 고립되어 있는 지역이었다. 그래서 면민들은 이를 개선하기 위해 행정기관에 수차례 민원을 제기했고, 그 결과 1995년 율지교를 착공하기에 이른다. 율지교 건설 공사는 4년간 진행되었으며, 1999년 6월 1일에 개통되었다. 율지교가 건설됨에 따라 율지나루는 그 기능을 상실하고 폐쇄되었다. 율지교가 건설되자 율지리는 대구, 창녕, 고령, 합천과 육로로 한 시간 이내에 이동할 수 있는 곳으로 바뀌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의 주생활권도 이 지역들로 변화했다. 율지리 주민들은 다리가 건설되면서 생활이 편리해졌기 때문에 마을을 떠난 사람들이 다시 마을을 찾을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율지리 주민들을 포함하여 덕곡면민들은 마을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대구 교외의 경우 대도시와 근접하고 있어 자녀들의 교육을 위한 여건도 좋으며, 율지리까지의 거리도 멀지않아 주생업인 농업을 계속해갈 수 있는 장점도 가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현재 덕곡면의 청장년층의 일부는 대구에 거주지를 둔 상태에서 율지리를 오가며 농사를 짓고 있다. 이로 인해 율지리에 형성된 상권도 큰 타격을 받았다. 교통이 편리해지자 율지리에 위치한 음식점이나 상가를 이용하기보다는 가까운 이방이나 창녕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율지교는 율지리를 세상과 이어주었지만, 실제로는 세상과 더욱 고립되는 결과를 낳았다.
율지리는 부유한 마을로 거듭났지만, 계속되는 인구유출과 고령화로 인해 마을의 유지를 위한 방법을 모색해야 했다. 그래서 시작된 일이 마을이 가지는 문화적인 특성을 발굴하는 일이었다. 이 과정에서 밤마리오광대가 창설되었고, 마을 어귀에는 시각적으로 마을을 알리기 위한 장승공원이 세워졌다. 이러한 활동은 나아가 율지리가 ‘문화·역사마을’에 선정되는데 기여를 하게 된다. 전국문화원연합회에서 추진한 이 사업은 지역의 마을을 선정하여 문화콘텐츠 개발을 통해 지역을 알리고 이를 관광과 연계하여 지역의 발전을 도모하는 사업이다. 합천문화원은 율지리가 오광대놀이의 발상지라는 점을 부각하여 조사를 시행하였고, 그 결과 2003년 문화·역사마을로 선정되었다. 문화·역사마을에 선정된 이후 그들은 마을을 정비하고 문화콘텐츠를 개발하기 위한 예산 중 일부를 활용하여 2004년 마을 내에 상징적인 조형물을 건설하게 되었다. 덕곡면의 행정기관을 비롯하여 율지리의 주민들은 과거 율지리의 영광을 되찾기 위하여 율지리를 문화적으로 널리 알리고자 했다. 그래서 부각된 요소가 오광대놀이와 장승이었다. 그래서 마을 어귀에 수십기에 달하는 장승을 깎아 세워두고 이를 공원으로 조성했다. 또한 오광대패를 형성하여 ‘제1회 탈·장승축제’를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장승에 대한 지속적인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아 장승이 썩는 일이 발생했고 결국에는 이 모두를 철거해야 했다. 지금 장승공원의 자리는 빈 공터로 남아있으며, 정원대보름에는 척사대회와 달집태우기를 하는 공간으로, 농번기에는 폐비닐을 모으는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율지리 주민들은 마늘과 양파의 경작으로 인해 매년 고수익을 올리게 되었고, 문화·역사마을의 선정으로 인해 대외적으로도 율지리를 널리 알릴 수 있게 되었다. 과거에 비교할 바는 아니었지만, 마을은 안정되었고 운영도 원활했다. 하지만 그들의 삶의 근간을 위협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것은 바로 합천·창녕보의 건설이다. 이명박 정부의 주요 추진과제 중 하나였던 4대강 사업의 일환으로 시행된 합천·창녕보의 건설은 지역주민들에게 큰 혼란을 가지고 왔다. 그 이유는 보를 건설하게 되면 수심이 깊어지게 되며, 그 결과 지하수위가 올라 농사에 큰 영향을 준다는 이유에서였다. 덕곡면민들은 합천·창녕보의 건설이 농가에 미치는 영향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들의 권익을 대변하기 위하여 ‘합천댐 건설 관련 덕곡면 주민대책위원회’를 결성했다. 대책위는 자신들의 삶의 터전이 훼손되는 것을 우려하여, 마늘과 양파를 파종하는 농번기임에도 불구하고 합천·창녕보의 건설을 반대하는 집회를 열어 그들의 의견을 피력했으며, 경상남도 ‘낙동강사업 특별위원회’와의 간담회를 통해 자신들의 보건설로 인한 면민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대안을 강구하기도 했다. 대책위의 이러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보의 건설은 진행되었다. 마을 주민들도 국가정책사업에 불안감을 표출했지만, 우선적으로 그들의 생업인 농업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대책위가 우려했던 내부수위 상승으로 인한 농경의 피해는 소수에 불과했다. 오히려 보의 형성이 야기한 가장 큰 문제는 자연생태계의 파괴였다. 보가 건설되면서 수위가 높아지고 물이 순환되지 않고 가둬지자 녹조현상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율지리 강변에 서식하던 귀이빨대칭이가 폐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연이어 민물고기 수가 급감하였다. 낙동강을 기반으로 어로활동을 하던 율지리의 일부 주민들은 생업에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합천·창녕보는 율지리 주민들의 생활뿐만 아니라 율지리의 경관도 크게 바꾸어 놓았다.
율지리는 앞서 언급한 다양한 변화를 겪으면서 지금과 같은 마을의 모습을 형성했다. 율지리의 남쪽으로는 낙동강이 유유히 흘러가며, 이 강을 가로질러 건설된 율지교는 이제 덕곡면민에게 없어서는 안 될 주요한 왕래의 수단으로 변모했다. 남쪽의 낙동강과 동쪽의 회천을 따라 건설된 높다란 제방은 율지리를 요새처럼 둘러싸고 있다. 제방 안쪽으로 형성된 넓다란 평야는 율지리의 북쪽과 서쪽으로 끝없이 펼쳐져 있다. 과거부터 강과 평야가 그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것처럼 현재도 그들은 강과 평야에 기대어 삶을 이어가고 있다.
율지리는 덕곡면 면소재지의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다양한 공공기관을 비롯하여 편의시설, 상업시설 등이 마을 내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을 구성하는 요소가 그 성격에 따라 행정, 상업, 주거영역으로 구분된다. 이러한 각각의 영역을 율지리 안을 지나는 4개의 길을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율지리에는 4개의 길이 존재한다. 첫번째는 외부 세상과 소통의 중심이 되는 4번 도로이다. 이는 마을 주민들이 1034번 지방도21를 편의상 줄여서 칭하는 말이다. 4번 도로는 율지교를 지나면서 낙동강을 남북으로 가로질러 율지리의 서쪽을 지나다가, 율지리 마을 어귀에서 북서쪽으로 꺾여 덕곡면을 동서로 가로 질러 합천읍으로 향한다. 이 도로를 통행하는 주요 버스는 고령행 버스와 창녕행 버스다. 과거 버스 이용량이 많았을 때는 매일 버스가 다녔지만, 이용객이 줄면서 장날에만 오전 오후 두번 운행한다. 율지리 주민들은 버스나 자가용을 타고 이 길을 통해 타지역으로 오가며 그들의 생활을 영위한다. 4번 도로는 외부와의 소통로이자 주요한 농로이다. 4번 도로 중 덕곡면을 관통하는 오광대로의 양옆에는 덕곡면민의 생활 터전인 논과 밭이 펼쳐져 있다. 그래서 많은 농민들이 이 도로를 따라 농기계를 가지고 논으로 향하며 마늘과 양파 농사에 소요되는 노동력, 즉 고용된 인부들도 이 길을 따라서 각자의 논으로 향한다. 또한 이곳에서 생산된 농산물도 이 도로를 통해 출하된다. 이러한 4번 도로의 특성으로 인하여 이 길 주변에는 마늘 가공 공장인 덕곡 농산물산지 유통센터와 덕곡농기계가 위치하고 있다. 율지리 마을 어귀에서 4번 도로는 율지리 마을 내부로 통하는 율지1길과 만난다. 율지1길은 마을 어귀에서 율지포두길과 율지2길로 분화된다. 율지포두길은 율지리와 율지리 북쪽에 위치한 포두리, 개독리, 학리, 북동을 이어주는 길이다. 4번 도로가 타 지역과 소통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길이라면, 율지포두길은 율지리 주민들과 덕곡면민들을 이어주는 길임과 동시에 농사일을 위한 길이다. 율지리 북쪽에 위치한 평야는 경지정리를 통해 구간별로 구획되어 있으며 각 구획 당 하나의 농로가 논을 꿰뚫는다. 율지포두길이 율지리에서 북동에 이르기까지 총 13개의 농로가 이 길과 맞닿아 있다. 그래서 율지리를 비롯하여 인근 지역에서 농사를 짓는 이들은 이 길을 통해 자신의 삶의 터전인 논과 밭으로 간다. 농번기가 되면 율지포두길에는 일용직 노동자를 싣고 온 10여 대의 관광버스들과 노동자들, 바삐 움직이는 경운기와 트렉터 그리고 출하를 위해 마늘과 양파를 실은 트럭들로 붐빈다. 이러한 특성을 반영하듯 이 길에는 농산물의 출하와 저장, 판매와 관련한 건물이 위치하고 있다. 한읍면한명품저온저장고, 덕곡동부농협농산물집하장이 바로 그것이다. 4번 도로와 율지포두길에는 주민들의 농업과 관련한 일부의 구성요소들이 위치하고 있는 반면 율지1길과 2길에는 율지리가 면소재지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한 행정기관을 비롯하여 여러 편의시설과 주민들의 주거 공간이 펼쳐져 있다. 율지1길은 4번 도로에서 분기하여 율지리 마을 내부를 남북으로 가로질러 남쪽에 위치한 제방과 맞닿아 길이 끝난다. 마을 어귀에서 마을로 진입하면 전면에 보이는 신작로가 바로 율지1길이며, 이 길에는 밤마리주막촌, 대중식당, 덕곡식당, 율지농기계, 율지상회, 덕곡가스가 있어 하나의 상업 영역이 형성되어있다. 그리고 2003년 전국문화원연합회가 율지리를 문화·역사마을로 선정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조성한 조형물도 이 길에 위치하고 있다. 또한 공공기관인 합천덕곡우체국도 이 길에 위치하고 있다. 율지2길은 크게 두 종류의 길로 나뉜다. 하나는 마을 어귀에서 율지1길과 분기되어 마을의 동편을 율지1길과 나란히 가로지르는 큰길이며, 다른 하나는 율지1길과 만나는 3개의 길을 비롯하여 마을 내부의 좁은 골목길들이다. 첫번째 길에는 면소재지의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덕곡면사무소, 덕곡면보건지소, 119출동센터, 덕곡면치안센터, 합천동부농협덕곡지점이 위치하고 있다. 율지2길의 두번째 길인 마을 내 골목길은 마을의 내부적인 공간이다. 앞서 언급한 3가지 종류의 길은 율지리가 면사무소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형성된 것으로 마을의 공적인 영역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하여 마을 내 골목길들은 마을 주민들의 사적인 영역으로 덕곡면민을 위한 공간이라기보다는 율지리 주민들을 위한 공간이다. 그래서 이 길에는 마을 주민들의 주거영역이 밀집되어 있으며, 마을 주민들의 휴식처인 마을회관과 율지리를 상징하는 활인대 그리고 당목도 위치하고 있다. 율지리의 중심은 바로 여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밖으로 율지를 지나는 길들은 면소재지라는 특성 때문에 이 내부와는 완전히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마을의 핵이 되는 이곳에서 율지마을 사람들만의 진솔한 삶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