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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속초시 청호동 살림살이

주제 최숙정 할머니의 살림살이
조사 살림살이 이야기, 공간과 살림살이, 통계, PDF

최숙정이 살아온 길

출생 후 첫 결혼에 이르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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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숙정은 1929년 강원도 회양군에서 태어났다. 친정은 농사일을 생업으로 하였는데, 쌀농사에 조와 콩 등을 경작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마을에서 손꼽히는 부자는 아니었지만 고생 안하고 살 만 하였다 한다. 최숙정은 장녀였고 밑으로 네 명의 남동생과 두 명의 여동생이 있었다. 그 중 셋째, 넷째 남동생은 이름도 없이 태어나자마자 세상을 떠났고, 쌍둥이 여동생 중 한명도 일찍 세상을 떴다. 회양군에서는 두 살 어간까지 살았는데, 그 이후 조부의 고향인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으로 온 가족이 옮겨갔고 결혼하기 전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그곳에서 생활하였다. 회양군에서 고성으로 이사할 때 최 숙정의 아버지가 보따리 위에 자신을 얹어 왔노라는 이야기를 본인의 할머니로부터 여러 번 들었다고 한다. 결혼 전에는 직장생활도 하였다. 15세경에 큰고모를 따라 사촌오빠들이 일하는 원산의 석유공장에서 2년간 일하였고, 그후 다시 고성으로 돌아와 가족들과 생활하였다. 최숙정의 첫 번째 남편인 어기순과는 중매를 통해 만나게 되었다. 최숙정의 5촌 당숙의 딸이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삼포리로 시집을 갔는데, 그를 통해 같은 마을의 총각을 소개받았고 최숙정의 아버지와 어기순의 형이 따로 만나 혼담을 주고받았다. 친정아버지의 환갑잔치 때는 일부러 초대하여 낯을 익히게까지 하였다. 당시 최숙정은 결혼할 생각이 없었다고 한다. 자신을 한번 보겠다고 찾아온 어기순을 만나지도 않았다 한다. 그러던 것이 어느 날 어기순이 갑작스레 집으로 무작정 찾아와 키질을 하고 있는 최숙정을 잠시 보고 돌아갔고, 그 이후 전후 사정은 모르겠으나 결국 혼례를 치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때가 1947년, 최숙정의 나이 18세였다.



앨범보는 최숙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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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의 발발

어기순은 4형제 중 막내였는데, 최숙정과 결혼하면서 분가하였다. 당시 어기순 집안의 살림은 그리 넉넉하지 못하여 남의 집 사랑채에 세를 들어 신접살림을 차렸다. 6・25전쟁이 발발한 후 어기순이 징집될 때까지 농사를 지으며 3년 어간을 이곳에서 살았고, 둘 사이에 한명의 딸도 태어났다. 1950년 6월 28일 한강 다리가 폭파되었을 당시 남편 어기순은 저녁식사를 하고 동사(현재 동사무소와 같은 기능을 하는 건물)에서 청년들 모임이 있다하여 다녀왔는데, 그때 징집 통지서 를 받아왔다고 한다. 그날 밤을 집에서 함께 보내고 다음날 새벽 함께 양양으로 향하였다. 양양역은 징집영장을 받은 사람들로 만원이었고 최숙정은 기차를 타고 떠나는 남편을 배웅 하였는데, 이것이 남편을 본 마지막 순간이었다. 당시 둘 사이에 태어난 딸이 막 두 살이 되던 시기였다. 전쟁 발발 후 고성군 거진읍에 살던 친정 식구들은 모두 피난길에 올랐다. 이동 하면서 최숙정의 집에 들러 안부를 확인하려 했지만, 그 때 최숙정은 장티푸스에 걸려 앓고 있던 터라 친정식구들이 들렀다 간 것도 알지 못했다 한다. 오랫동안 앓다가 정신이 들어 일어나 앉을 수 있게 되었을 때 이 소식을 동서로부터 전해 듣게 되었다. 친정 식구들은 모두 친척이 살고 있던 양양군 강현면 용호리로 옮겨가서 그 마을의 동사에 묵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자세히 알아보니 친정어머니와 남동생, 함께 피난길에 오른 친정의 작은 아버지는 피난통에 걸린 장티푸스가 심해져 이미 세상을 뜬 이후였다. 이때 살아남은 동생들은 그곳에 살고 있는 친척집에 맡겨졌다. 남편이 징집된 후 최숙정도 전쟁을 피해 살던 곳을 떠나야 했다. 당시 주변사람 들의 움직임을 쫒아 고성군 죽왕면 삼포리 인근의 황포마을이라는 산동네로 옮겨와 움막 을 짓고 기거하였다. 생활이 고단했지만 그에 더하여 겪은 어려움은 어린 딸이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당시 나이가 네 살 무렵이었다. 고열과 심한 설사로 인해 약 한번 제대로 써 보지 못하고 최숙정의 곁을 떠난 것이다. 딸을 잃은 후 최숙정은 도저히 혼자 지낼 용기가 없어 예전 친정 부모가 피난을 갔던 양양군 강현면 용호리로 옮겨 갈 결심을 하게 되었다. 비록 친정어머니는 세상을 떠났지만 친정아버지와 두 동생들도 그곳에 있고, 사촌들 세 명도 어머니를 잃은 상황이므로 그곳에서 살림을 도우며 살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최숙정은 이곳에서 두 번째 남편인 김남수를 만나 재혼하기 전까지 기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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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결혼

최숙정은 25살 되던 1952년에 김남수를 만나 두 번째 결혼을 하게 된다. 남편은 함경남도 북청군 의호리 출신인데, 전쟁을 피해 누나와 함께 속초시 청호동으로 내려와 고기를 잡으며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김남수는 2남 1녀 중 둘째였고, 최숙정과 마찬가지로 결혼한 전력이 있었다. 피난 때 헤어진 전 부인과의 사이에서 딸을 한 명 두었다. 최숙정이 김남수라는 사람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최숙정의 친정 동네에 살던 친구를 통해 서이다. 그 친구는 김남수의 친구 중 한명과 결혼을 했고, 남편의 종용으로 김남수와 최숙정 사이에 다리를 놓게 되었으며, 이것이 두사람이 만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당시 최숙정은 생계를 위해 장작이나 부식거리 장사를 시작했다. 주로 속초에 와서 팔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청호동에 사는 친구를 자주 만나게 되었는데, 기회가 될 때 마다 그 친구는 최숙정에게 김남수와의 혼인을 생각해보라는 이야기를 자주 하였다. 당시 최숙정은 결혼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었다. 징집으로 헤어진 남편에 대한 생각이 없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야기만이라도 한번 나누어 보라는 그 친구의 사정에 콩나물을 팔러 속초로 왔던 날 저녁, 김남수의 누나와 함께 그를 만나보게 되었다. 당시 김남수는 현재 최숙정이 살고 있는 집 터에 판잣집을 지어 혼자 기거하고 있었는데, 누나의 안내로 그의 집에서 처음 맞대면을 하게 된 것이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도록 하여 결국 통금 때문에 집으로 돌아가지도 못하는 상황을 만들고, 김남수의 누나는 갑자기 비가 내린다는 핑계를 대고 사라져버리는 등 두 사람을 억지로라도 이어주려 하였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최숙정은 김남수에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이 이후로도 줄곧 계속되는 친구와 김남수 누나의 제안에 결국 결혼을 승낙하였다. 최숙정은 그 결혼을 ‘희생’이라고 표현하였다. 어려운 살림에 여러 명이 함께 기거하던 친정식구와 친척집 식구들의 상황도 고려해야 했고, 자신을 좋다고 그렇게까지 찾아와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으니 자신의 결혼이 여러 사람에게 이득이 되리라 생각한 듯하다. 1952년 두 번째 결혼을 할 당시 최숙정은 25살, 김남수는 31살 이었다. 최숙정은 친정아버지에게 결혼사실을 알리지 않고 김남수의 집에 눌러 앉았다. 자신이 나옴으로서 입 하나가 줄어 부담이 덜 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살림을 맡았 던 자신이 나옴으로 겪게 될 집안의 불편함이 마음에 걸려 사뭇 쉽게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였다. 게다가 최숙정의 친정 고향에서는 어부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다. 어부를 ‘뱃놈’이라 하여 업신여기는 경우도 많았다. 그렇기에 뱃일을 하는 사람과 결혼을 하게 되었다는 말을 쉽게 꺼낼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최숙정은 1952년 단옷날 맨 몸으로 청호동에 들어와 김남수와 새로운 살림을 차리게 되었다. 훗날 친정아버지는 최숙정이 사는 집을 찾아온 적이 있었다. 그때 별 말없이 혼인신고를 하라며 새로 만든 도장을 건네주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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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호동에서의 생활

청호동에서 결혼생활을 시작한 최숙정은 고깃배를 타는 남편의 일을 도왔다. 당시 속초는 명태잡이가 한창이었다. 최숙정은 집에서 명태주낙 함지를 정리하는 일을 했 다. 함지에는 명태 주낙 바늘에 미끼로 양미리를 끼워 차곡차곡 정리하는데, 명태잡이 배의 선원 한 사람당 두 개의 함지를 준비해야 했다. 이 외에도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오징어 다듬는 일 등의 부업을 하였다. 최숙정은 강원도 회양군과 고성군에서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보냈다. 청호 동에는 함경도 출신이 많이 살았는데, 자신이 살던 곳도 전쟁 전 북한의 통치를 받았던 곳이었지만 함경도 등과는 분위기가 많이 다름을 알게 되었다 한다. 우선은 주변인들의 거친 행동에 겁을 많이 먹었다. 신작로에서 생선을 파는 아주머니들에게 다가가 가격을 물어보고 그냥 갈라치면 뒤에 대고 욕을 해대는 통에 무서웠던 기억도 있다. 남편과 대화를 할 때도 단어의 뜻을 몰라 의미가 통하지 않을 때도 있었다 한다. 최숙정과 김남수가 사는 집은 신작로에서 가깝고 불빛이 훤히 보여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알기 쉬웠기 때문에 지나던 지인들이 자주 들여다보곤 하였다. 이 통에 집에는 항상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등 마치 마을의 사랑방 같았다. 두 번째 결혼인지라 신혼이라는 느낌이 없었기 때문인지 최숙정도 이것이 그리 불편하지는 않았다고 회상한다. 결혼생활을 시작하고 1953년 최숙정의 나이 26세 때에 첫째 아들 김광용이 태어났다. 둘째 아들인 김일용은 29살에, 막내 김세용은 31세에 낳았으니 세 아들이 모두 세 살 터울이다.



청호동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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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새로 짓다

청호동에서의 생활을 시작하고 가장 잊을 수 없는 일은 없던 돈을 차곡차곡 모아 집을 새로 지은 일이었다. 그전의 판잣집은 방 한 칸에 솥단지만 걸어놓고 살았다. 살림이라 해도 쌀과 물건들을 넣어 두던 드럼통 몇 개와 석유풍로 한 대가 전부였다. 집은 나무로 기둥을 세우고 잘 젖지 않는 두꺼운 종이를 겹쳐 발라 벽을 세운 정도였다. 게다가 옆 골목에 수시로 다니는 생선 운반 리어카에 계속 부딪히다보니 집이 무너지지나 않을까 걱정이 들기도 하였다. 결국 최숙정의 나이가 39세, 김남수의 나이 45세 되던 1967년, 새로 집을 지어 오늘의 최숙정 가옥의 모습이 갖춰지게 되었다. 기왕 짓는 것 조금이라도 더 넓게 쓰자고 작은 방까지 하나 들였다. 장롱과 찬장, 테이블 형태의 책상도 목수에게 부탁하여 제작하였다. 그 동네에 서는 상당히 빨리 집을 새로 지은 축에 속한지라 많은 사람들로부터 부러움을 받았고, 최숙정의 알뜰함을 칭찬하는 이도 많았다. 건축비는 총 45만원이 소요되었다. 아들들이 학교에 다니게 된 후로는 나룻배 선착장 가까이에 집이 있는 탓에 아들 친구들이 수시로 드나들었다. 새로 마련한 작은 방에 아이들 열세명이 북적거린 적도 있다. 새로 지은 최숙정 가옥의 특이한 점은 전용 화장실이 없다는 것이다. 본디 화장실이 따로 갖추어지지 않은 판잣집의 공간을 그대로 개축한 것이라 화장실을 따로 둘 장소가 마땅치 않아서일 수도 있다. 대신 집을 지을 당시 최숙정의 집을 포함한 주변의 네 집에서 거출하여 공동화장실을 만들었다. 네 집 식구들이 같이 자갈을 이어 옮기고 땅을 파서 세운 것이다. 화장실 청소나 인분을 수거하는 일도 제 집에서 역할을 분담하여 해결 하였다. 이후 재래식 화장실이라 위생상 좋지 않다 하여 1999년경 속초에서 엑스포가 개최되었던 어간에 기존 화장실을 철거하고 이동식 화장실을 설치해 주었다.



설겆이하는 최숙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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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풍으로 쓰러진 김남수

뱃일을 하던 김남수는 중풍에 걸려 다리 한쪽에 불편함을 겪었다. 그러면서도 한 3년 간은 계속 뱃일을 하였는데, 심해지다가 호전되는 상황이 되풀이되다가 결국 쓰러져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나중에는 앉아서 음식을 넘기지 못하게 되고 말을 할 수 조차 없을 정도로 심해졌다. 최숙정은 그런 남편을 위해 밥을 먹이고, 용변을 받아내는 일부터 머리를 깎아주고, 씻기는 일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산 것이 8년의 세월이 지났고, 1981년에 결국 김남수는 먼저 세상을 뜨고 말았다. 최숙정은 김남수가 살아 생전 북쪽 고향에 대하여 많은 그리움을 안고 살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때문에 김남수 생전에 ‘혹시라도 죽게 되면 화장해서 바다에 뿌려 줄 터이니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말 한 적도 있었는데, 김남수가 극구 반대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니 화장은 할 수 없어 자리를 잡아 매장을 했다. 무덤을 쓸 자리는 남편의 고향 지인이 골라 주었다. 장례는 집에서 삼일장으로 치렀다. 무덤은 2011년에 파묘하여 남은 유골을 수습 후 화장하였다. 무덤을 쓴 곳의 흙이 안 좋아 습기가 차기 때문에 여러모로 좋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바로 진행한다 마음 먹었던 것이 윤달이 오기를 기다리고, 며느리가 손주를 낳느라 미루어진 탓에 봉분을 세운지 30년 만에 화장을 할 수 있었다. 김남수가 세상을 떠난 후 남겨진 최숙정과 세 아들에게 남겨진 것은 고생스러운 생활이었다. 최숙정은 생선장사와 오징어 건조장에서의 밤샘작업 등을 통해 조금씩 번 돈으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큰 아들의 고생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17세의 나이에 오징어잡이 배에 올라 돈을 벌었다. 3년 정도 뱃일을 했지만 기술이 늘지 않아 그 후로는 배 그물을 손질하거나 여러 자질구레한 일들을 봐주고 품삯을 받는다.



기제사 (최숙정의 남편 김남수 기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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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이 되었던 주변사람들

청호동에 정착하여 여러 사람들을 만나 친하게 되었다. 대부분 이북 출신의 할머니들이다. 청호동이라는 지역의 특성상 최숙정의 남편과도 다 잘 아는 사이였다. 청호동에 온 이후로 친정식구들을 자주 보지는 못했지만, 한 마을에 사는 사람들과의 유대를 통해 많은 도움을 주고받았다. 이곳 사람들은 대부분 고향을 떠나 온 사람들이라 타향에서의 처지를 서로 이해해서 더욱 끈끈한 유대감이 형성된다. 최숙정의 남편도 명절만 되면 술을 마시고 눈물을 흘리는 경우가 많았다. 최숙정에게 북한에 두고 온 가족들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그리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나 적어도 동네에 같은 처지의 사람들끼리는 자주 주고받는 이야기였을 것이다. 최숙정에게 한때 큰 힘을 주었던 것은 바로 교회였다. 일주일에 한번 교회에서 예배를 보고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좋았다. 누가 따로 전도를 한 것도 아닌데, 교회에 다니고 있는 집에 놀러가서 ‘같이 교회에 구경가자’고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고 한다. 사실 김남수와 결혼 후 알게 된 김남수의 작은 어머니는 무속에 심취한 사람이었다. 최숙정은 무당에게서 점을 보거나 굿을 연행하는 것에 관심이 없었고 싫어하기까지 했는데, 작은 시어머니가 최숙정의 교회 생활을 말리지는 않았지만 작은 시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에야 교회에 열심히 나가기 시작했다. 교회를 다니는데, 가족 중에 무속을 신봉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그리 마음 편한 일은 아니었다 한다. 속초 고등학교 주변에 위치한 중앙교회를 계속 다녔는데, 1995년에 화장실에서 다리를 삔 이후로는 통증으로 거동이 불편하여 갈 수 없게 되었다.



최숙정 기념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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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호동에서의 삶에 대한 회고

청호동 주민의 대부분은 피난민이다. 전쟁을 겪으면서 고향을 등지고 내려왔다가 고향 찾아 올라간다는 것이 이곳에서 멈추어 눌러 앉게 된 사람들이다. 이들 중 부부가 같이 내려와서 청호동에 거주하는 경우도 있지만 남자들만 나와 이곳에서 재혼을 하는 경우도 있고 그 반대로 여자 쪽만 빠져나와 이곳에서 다른 남자와 재혼을 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우스갯소리로 ‘바꿔산다’고 했다. 갈라진 남북의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부부가 헤어졌다가 각기 새로운 인연의 남편과 부인을 만나 살게 되었으니 하는 이야기이다. 최숙정 역시 이곳에서 새로운 결혼생활을 시작하였다. 남편 김남수는 최숙정에게 언젠가 통일이 되면 같이 자신의 고향으로 가자고 하였지만, 최숙정은 끝내 거부하였다. 혼자 남더라도 청호동에 있겠다는 것이다. 김남수의 옛 부인에 대한 생각도 있겠거니와 헤어져 기다리지 못한 첫 남편 어기순에 대한 생각 또한 최숙정의 기억 속에 뚜렷하게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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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숙정의 큰아들 김광용

큰아들 김광용은 1954년 생으로 최숙정이 결혼한지 11개월 만에 낳은 아들이다. 최숙정이 기억하기로 아침을 먹은 후 산통이 와서 얼마 있다가 출산을 했고, 탯줄은 작은 시어머니가 끊어주었다 한다. 현재 김광용은 최숙정의 단 한명 뿐인 동거인이다. 김광용은 신체적인 어려움이 있지만 생활하는데 큰 무리는 없었다. 최숙정의 남편이 몸져 누워있을 때는 뱃일을 하여 집안의 생계에 큰 보탬이 되었는데, 오징어 배를 타고 먼 바다로 조업을 나갔었을 때 김남수가 세상을 뜨는 바람에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