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사이트는 Chrome, IE10 이상의 버전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10 미만 버전일 경우 원활하지 않을 수 있으니 업그레이드 하시기 바랍니다.

전라남도 장흥군 용산면 상금리 상금마을 살림살이

주제 백균·윤영님댁 살림살이
조사 살림살이 이야기, 공간과 살림살이, 통계, PDF

백균·윤영님의 살아온 이야기

백균의 살아온 이야기

PDF 보기


백균은 수원 백씨 정신재공파의 후손으로 전라남도 장흥군 용산면 상금마을에서 태어났다. 백균은 3남 1녀의 장남으로 누님은 병으로 돌아가셨으며, 남동생 2명은 현재 각각 광주와 서울에 거주하고 있으며 명절과 제사 때나 휴가철에 백균의 집으로 온다. 백균은 5~6세 때부터 서당에서 공부를 시작하였으며, 그런던 중 백균이 국민학교에 진학할 나이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용산면 소재지에 있는 용산국민학교에 진학하였다. 하지만 일곡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그 꿈을 실현하지 못 했다. 사춘기 시절을 거치면서 서당에서 보내는 시간보다는 밖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당시 백균과 친구들은 주로 동네 친구들 집에 모여서 화투도 치면서 놀았다고 한다. 이렇게 화투를 쳐서 생긴 돈으로 엿을 사먹기도 하였다. 백균의 어린 시절 추억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서리이다. 서리의 대상은 주로 감자, 고구마, 과일류 등이었으며 간혹 닭도 포함되었다. 그러던 중 1962년에 혼례를 올리게 되었다. 배우자는 강진 사람으로 해남 윤씨가의 윤영님이었다. 백균은 혼례를 올리고 다음해 6월에 군입대 하였다. 이렇게 부대에서 생활하던 중 백균에게 비보가 전해왔다. 바로 자신의 정신적 멘토였던 조부 일곡의 사망소식이었다. 백균은 겨우 마을에 도착해서 조부의 마지막 가시는 길을 함께 할 수 있었다. 제대를 하고 집으로 온 백균은 장손으로서 집을 지켜야한다는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도시로 가려는 꿈을 접고 본격적으로 농사일을 시작하였다. 백균은 먼저 농촌지도자회에 가입하였다. 자신이 농사에 대한 지식과 기술이 깊지 않다고 생각해 용산면 농촌지도자회에 가입하여 다른 사람들과 농사에 관한 기술 및 정보를 공유하기로 하였다. 백균은 1973년에 버거C 병에 걸렸다. 백균의 증세는 더욱 더 악화되어 다리쪽 동맥이 막혀서 혈액순환과 영양공급이 안 되어 다리가 서서히 썩어 가고 있었다. 인화의원에서 지어 온 약을 먹으면서 몸 상태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약을 복용한 후 15일이 지나자, 상처에 딱지가 생기고 새살이 돋아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약 복용한 지 두 달이 지나서 걸음을 걷게 되었다. 백균은 첫째 아들과 둘째아들을 법대로 진학시켰다. 셋째 아들은 법조계 보다는 경상계열이 적성에 맞다고 그쪽으로 진학하였다. 막내 아들의 경우 한문학과로 진학시켰다. 백균은 가정과 자식들 뒷바라지를 하다보니 이장을 늦게 역임하였다. 백균은 스스로 자부하는 것이 바로 이장직을 수행하면서 용산면의 6개 자치 단체를 하나로 통합한 것이다. 백균은 이장직 뿐만 아니라, 칠리안들 경지 정리 당시 총책임자를 맡았다. 백균의 이런 사회봉사 활동은 지금도 여전히 지역사회에서 회자가 되고 있다.



백균 어르신 아버지 기제사 준비


-
윤영님이 살아온 길

윤영님은 1939년생으로 전라남도 강진군 강진읍 임천리에서 2남 3녀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윤영님은 어린시절 가정 형편이 부유한 편이라 집안일을 거의 하지 않았다. 윤영님의 학창시절 기억은 소풍과 운동회 그리고 재학 당시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인민군들이 주둔했던 것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다른 지역에서 피난민들도 상당수 왔으며, 수업 중간에 비행기와 총소리가 나면 책상 밑으로 숨었다고 한다. 윤영님의 경우에는 오빠와 누나들이 모두 학업을 하고 있는 상태여서 마음만 먹으면 중학교에 충분히 진학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윤영님은 중학교 진학을 포기했다. 중학교 진학을 포기한 윤영님은 집에서 집안일을 도우면서 생활하였다. 당시 오빠와 언니들은 학업과 군입대 등으로 집을 떠나면서 자연스럽게 가사 노동은 윤영님의 몫이 되었다. 윤영님은 늦은 나이에 혼례를 치른 편이다. 당시 23살이었던 윤영님이 늦게 시집을 간 것은 바로 오빠와 누나들 먼저 출가한 다음 자신이 간다고 했기 때문이다. 윤영님의 사촌 올케가 백균의 친척 누님이었다. 백균에게는 누님이 장가 보내주겠다고 하면서 중매를 했다고 한다. 양복을 맞추고 15일 후에 혼례를 치렀는데, 장소는 윤영님의 집이었다. 백균의 상객으로 조부와 큰 집의 형님이 오셨다고 한다. 시댁에 도착한 윤영님은 마을앞에 도착해 택시에서 내린 다음, 가마로 바꿔 타고 시댁으로 들어갔다. 시댁에 들어가니 날이 어두웠다고 한다. 시댁에서의 첫날은 바로 큰방에서 시댁 식구들과 잠을 잤다고 한다. 처음부터 윤영님은 시조 부인 일곡의 눈 밖에 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윤영님의 헤어스타일 때문이었다. 조부인 일곡은 한학자로소 매우 고지식했다고 한다. 윤영님은 큰 아들을 남편이 없을 때 출산하였다. 큰 아들은 어린 시절 백균이 군을 제대하고 왔을 때 처음에 아버지인 줄 모르고 “아저씨”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 후로도 3명의 아들을 더 출산한 윤영님은 집안 일 뿐만 아니라, 농사일도 하였다. 윤영님은 자식들 뒷바라지에 일생을 다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윤영님은 항상 자식들이 객지 생활하면서 끼니는 제 때 챙겨 먹을까 노심초사하였다. 이런 부모들의 마음을 잘 알고 있던 자식들은 모두 훌륭히 학업을 마치고 직장에 취직하여 지금은 모두 한 가정의 가장이 되었다. 집안일과 농사일로 바쁜 나날을 보냈던 윤영님에게 지금은 가장 행복한 시기이다. 자식들도 모두 자리를 잡았고, 손주와 손녀들도 다 잘 자라고 있기에 무엇하나 바랄 것이 없다고 한다.



콩을 수확하는 윤영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