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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목포시 유달동·만호동 민속지

주제 항구도시 목포 유달동 만호동
조사 유달동·만호동, 사진, 영상, PDF

전라남도 목포시

목포의 자연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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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는 호남의 남쪽 지역과 영남 일부의 조운선이 통과했으며, 호남내륙의 조운선이 나주 인근의 영산창에서 출항하여 지나가는 길목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한말 일본은 목포에 개항장을 만들고자 하였다. 일제강점기 목포는 면화, 쌀, 소금, 마늘, 양파, 땅콩 등 인근지역에서 생산되는 모든 산물의 집산지였다. 무안반도의 남단에 위치한 목포시는 동쪽에 입암산, 서쪽에 유달산, 북쪽에 양을산·대박산·지적봉 등으로 둘러싸여 있고 남쪽은 영산강 하구에 면해 있다. 또한 그 주위에 고하도, 달리도, 율도, 외달도, 장좌도 등 5개의 유인도와 7개의 무인도가 넓게 펼쳐져 있어 경치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이 섬들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어 태풍의 피해를 막아주는 자연적인 방파제 구실을 하고 있어 천연적인 양항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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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학적 위치

목포가 위치한 서남해안은 일찍이 삼국시대부터 해상활동이 활발한 지역이었다. 동진의 승려 마라난타가 백제 침류왕 원년 384년에 해로를 통해 법성포로 들어와 모악산에 불갑사를 세웠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신라 35대 경덕왕 8년인 749년에는 달마산 아래 사자포를 통해 인도불교가 전해져 미황사를 세운 기록이 있다. 신라 하대 장보고는 이 지역 일대의 해상권을 장악하여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독자적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후삼국시대에는 광주를 주 근거지로 한 견훤과 나주를 주 근거지로 한 왕건이 각축을 벌렸던 곳이기도 하다. 목포의 육로는 개항과 더불어 발달하였다. 호남선의 종착점이고 국도 1, 2호선의 시작점이다. 국도 1호선은 목포에서 광주를 시작으로 서울을 거쳐 신의주까지 개설된 것이고 국도 2호선은 목포를 시작으로 강진, 장흥, 보성, 순천, 부산을 연결한다. 일본은 목포항과 육로를 통해 식량과 자원을 수탈해 가며 공산품을 수출하였다. 해방 이후 목포는 개항장으로써의 역할은 사라지지만 인근의 신안군, 진도군, 영암군, 해남군을 아우르는 중심 도시로 발전하였다. 이들 인근 지역에서 나는 각종 농산물과 해산물은 목포에서 일단 집결하였다가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또한 목포는 경제와 유통의 창구인 동시에 교육, 문화의 중심지로 인근 지역의 사람들을 끌어당겼다. 80년대 이후 목포는 새로운 변화를 맞이한다. 80년대 이후 자동차 문화와 도로 교통의 발달로 생활권이 목포에서 광주로 옮겨가면서 전남의 중심도시로써의 역할을 서서히 상실하게 된다. 그러면서 목포 내부에서는 새로운 시가지가 형성되면서 개항장을 중심으로 한 원도심 지역은 급격히 쇠퇴해 갔다. 오늘날은 서해안고속도로와 철도교통의 확충으로 서남해안 도서지역을 대상으로 한 관광산업이 활성화되고 있으며 신항만부두의 건설을 통해 새로운 물류기지로써의 도약을 꿈꾸고 있다.



유달산주위풍경


유달동·만호동 지역개관

유달동·만호동의 현재

목포시 전체적으로는 인구변동이 크게 없지만 유달동과 만호동은 매년 인구가 줄어들고 있다. 조사지에서 만난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신도심이 생기면서 빠져나갈 사람들은 이미 빠져나간 상태이고 남은 사람들은 자력으로는 다른 곳으로 옮겨갈 여력이 없는 상태라고 한다. 그러면서도 계속 전출하는 인구가 있는 것은 도시 재개발과 관련이 있다. 현재 목포진이 개발되고 주택보상을 통해 상당수가 이전을 하거나 이전을 앞둔 상태이고 온금동도 재개발이 예정되어 있다. 이런 상태이다 보니 곳곳에는 노후화된 건물이 방치된 상태로 있어 안전상의 위험과 범죄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그러면서도 계속 전출하는 인구가 있는 것은 도시 재개발과 관련이 있다. 현재 목포진이 개발되고 주택보상을 통해 상당수가 이전을 하거나 이전을 앞둔 상태이고 온금동도 재개발이 예정되어 있다. 이런 상태이다 보니 곳곳에는 노후화된 건물이 방치된 상태로 있어 안전상의 위험과 범죄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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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달동

유달동은 개항 후 일본인들은 유달산의 동남쪽 아래 기슭과 목포항의 서남쪽 갯벌을 간척하여 일인거류지로 만들었다. 구 영사관 앞 지역은 개항 후에 매립이 시작되어 1900년에 매립이 완료되었다. 금화동과 온금동은 1912년에 매립이 이루어졌다. 구 영사관 앞 지역은 1914년 일본인들에 의한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산수통 2정목, 4정목, 1정목 일부를 병합하여 야마테마치로 불렸다. 해방 후 일본 명칭을 개정하면서 유달산 밑에 있다고 하여 유달동이라 하였다. 이후 1949년 동제 실시에 의해 인근의 대의동과 중앙동을 병합하여 유달동이라 하였다. 1997년 1월 1일에는 목포시 행정동 분합에 따라 유달동과 서산동, 금화동 지역을 통합하여 유달동에 포함시켰다. 2006년 8월 7일에는 행정동 통합으로 인근 도서지역을 관장한 충무동과 합하여 지금의 유달동으로 확대·개편되었다.



유달동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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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동

중앙동은 일제시대 혼마치라 불린 곳으로 동양척식주식회사, 제십팔은행 등의 건물이 있었던 가장 번화한 지역 중의 한 곳이다. 현재 동양척식주식회사 건물은 목포근대역사관 건물로 이용중이고 제십팔은행 자리는 횟집 주차장으로 변하였다. 큰 길을 따라 여관, 식당, 한약방 등의 업소가 영업 중이지만 간판만 걸린 업소들도 많다. 중앙동의 일부지역은 행정동이 만호동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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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중동은 나카마치로 일제의 상업회의소, 동양척식주식회사, 조면공장 등의 건물이 많았던 지역이다. 해방 후에는 정미소, 목재제재소 등이 성업을 이루다가 지금은 농산물 유통과 관련하여 창고 겸 사무실로 이용하는 건물들이 많다. 현재 중동의 일부지역은 행정동으로 만호동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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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지역

유달동에 속한 도서지역으로는 눌도, 달리도, 장좌도, 고하도, 외달도 등의 유인도가 있고 우도, 맥도, 소두량도, 별도, 노속도, 허사도, 장구도 등의 무인도가 있다. 고하도는 목포에서 2Km 정도 떨어진 섬으로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군량미를 저장하고 수군을 정비했던 곳이다. 1904년 일제강점기에는 미국산 육지면 종자를 들여와 최초로 재배에 성공한 지역이기도 하다. 영산강 하구둑이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김양식을 하기도 하였으나 주 산업은 보리, 콩 등 농산물이다. 현재 목포와 고하도를 연결하는 목포대교가 건설 중으로 목포대교가 완공이 되면 발전이 기대되는 곳이다. 외달도는 목포에서 서쪽으로 6km 떨어진 달리도의 바깥쪽에 위치한 섬으로 최근 ‘사랑의 섬 외달도’로 각광 받고 있다. 달리도에 거주하던 주민들이 이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였으며, 외롭게 떠 있는 섬이라 하여 외달도라고 하였다. 해수풀장, 한옥민박 등 휴양시설과 조개채취, 바다낚시 등의 다양한 프로그램이 있어 해마다 많은 관광객들이 외달도를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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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호동

만호동은 수군 목포진(만호진)이 있었던 지역으로 군사적으로 요충지였다. 목포진을 중심으로 한 지금의 만호동은 1909년에 매립을 통해 조성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목포진이 속해 있는 동해안통 7정목을 목포대라 불렀으며 1948년 4월 1일 일본 명칭을 고치면서 동명변경에 따라 만호동이라 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