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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영광군 법성포 살림살이

주제 오정환댁 살림살이
조사 살림살이 이야기, 공간과 살림살이, 통계, PDF

오정환의 생애담

오정환의 생애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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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환은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나 안양 청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머니는 외동딸을 아껴서 먹고 싶은 거, 입고 싶은 거, 가지고 싶은 것을 모두 구해줬기 때문에 가난했지만 어려운 기억없이 자랐다. 어머니는 불교신자이고 이러한 영향으로 오정환 역시 불교신자이다. 8살이 되어 덕장초등학교에 입학을 했다. 초등학교 동창들과는 여전히 연락을 하는데 경조사 때 외에도 두 달에 한 번씩 모임을 한다. 9살이 되던 해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졸업생 중의 반가량이 중학교로 진학을 했는데 오정환은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에 있는 만안중학교로 갔다. 고등학교는 진학을 하지 않고 20살이 될 때까지 집에서 지냈다. 20살이 되면서 동일방직에 취직을 했다. 제품을 포장하는 간단한 일이었기에 어렵지 않았으며 직장생활은 즐겁게 기억된다. 이 당시 같이 일하던 직장동료들과는 연락을 유지하고는 있지만 거리가 멀어 만나기는 쉽지 않다. 22살쯤 되었을 때 전라도 광주 송정리에 있는 외갓집으로 왔다가 친구들과 함께 영광 법성포로 놀러가 지금의 남편이 김석주를 만나게 된다. 2년 정도 연애를 하고 스무 네 살 때 부터 법성포로 내려와 동거를 시작했다. 시어머니께서는 같이 살기 1년 전에 돌아가셨다. 동거를 시작한 다음해에 큰 아들 연태, 2년 지나 작은 아들 윤태를 낳았고 윤태가 세 살 되던 해에 법성포에 있는 문화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연태, 윤태가 자랄 때 아버지가 무뚝뚝했기 때문에 오정환은 아이들과 같이 놀아주려고 했다. 연태를 낳고 두 달 후에 광주에서 오일팔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 연태가 3월생이라 이를 정확하게 기억한다. 법성포에는 피해가 없었지만 모두들 가게문을 닫았다. 시어머니는 안계시고 시아버지만을 모셨고 다른 집에서 거주하셔서 시집살이에 대한 어려움은 없었다. 다만 시어머니를 통해 배운 것이 없어서 생활에서 불편한 점도 있다 반도굴비란 상호를 걸고 굴비장사를 시작했다. 법성포의 많은 굴비가게들이 그러하듯이 오정환의 굴비가게 역시 추석, 설 대목때를 제외하고는 바쁘지 않았다. 한 호텔에서 대하를 마리당 2,400원에 가져가기로 해서 1,900원씩 구입해 손질하고 냉장고에 넣어두었는데 수입산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물건이 창고에 쌓여만 있었다. 게다가 IMF(금융외환위기)까지 터지면서 현금이 돌지 않아 결국은 부도를 맞았다. 은선암을 다니기 전에는 선운사, 불갑사 등 여러 곳을 다녔다. 하지만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시고 49재를 모시면서 본격적으로 다니기 시작했다. 영광에서 우도농악을 배우기 시작했다. 실제 배운 날짜 수로 따지면 세 달정도 된다. 어상을 시작하고는 연습에 참여하기가 힘들어졌다. 오정환은 사회활동에 적극적인데, 부녀회의 부녀회장과 어상들의 상인회장을 맡고 있다. 부녀회장은 젊은 사람이 해야한다고 생각하는데 오정환은 자신이 맡고 있는 것을 부담스러워하고 있다.



제일굴비 굴비만들기(엮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