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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군위군 부계면 대율리 한밤마을 살림살이

주제 윤이실댁 살림살이
조사 살림살이 이야기, 공간과 살림살이, 통계, PDF

살아온 이야기

할아버지의 살아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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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가 아무런 경제적 기반이 없는 이곳 대율리로 들어온 이유는 부림홍씨 집성촌이고 주민들이 친인척들이기 때문에 초기에 정착하는 것이 매우 용이해서였다. 할아버지는 까치래기에서 3남 3녀 중 4째로, 남자 중에서는 차남으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9살 때 부계초등학교에 입학해서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총 9년 동안 등교할 때 산을 넘어서 다녔다. 학교생활에서도 형님과 누님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할아버지도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농사를 지어야 된다고 생각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할아버지 가족은 피난을 가게 되었다. 할아버지 가족은 약 2개월가량의 피난생활을 마치고, 까치래기로 돌아갈 수가 있었다. 힘든 피난 생활을 마치고 마을로 돌아온 할아버지는 마을로 돌아왔을 때 그 해 가을에 편입학으로 부계중학교에 입학하였다. 할아버지는 비록 나이는 다른 학생들 보다 많았지만, 더 열심히 공부하였다. 할아버지는 1956년 8월 10일 군에 입대했다. 이 날짜를 할아버지는 단기로 기억하고 계신다. 당시 어른들에게 날짜는 서기 보다는 단기가 더 익숙했기 때문일 것이다. 논산에서 기초 군사훈련을 마친 할아버지는 통신병으로 차출되어서 후반기 교육을 받기 위해서 전남 광주에 있는 통신학교로 갔다. 군대에서 농번기에 휴가를 주면 항상 그것을 신청해서 나갔다고 한다. 동네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군대 간 사람이 휴가 받아서 집안 농사일을 도와준다고 칭찬을 하였다. 군대에 있으면서 할아버지는 혼례를 치르게 되었는데 당시에는 지금처럼 연애결혼은 상상도 못했다. 휴가 대신 외박을 나오는 것으로 처리를 한 다음, 혼례를 치르고 복귀했다가 10일간의 휴가를 받아서 다시 나왔다. 혼례를 치른 후 약 1년 간 군복무를 더 한 후 제대한 할아버지는 본격적인 신혼생활을 시작하였다. 할아버지가 대율리로 들어올 때 재산이라고는 현재 살고 있는 집 한 채 뿐이었고, 자신 소유의 논은 한 평도 없었다. 할아버지는 남들보다 먼저 일어나고 늦게 자고 먹을 것 마음대로 먹지 않고 피나는 노력으로 조금씩 재산을 모아서 논과 밭을 구입했다. 할아버지는 매일 힘든 농사일에도 공부에 대한 열정만은 식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한학에 관심을 가지고 독학으로 공부를 많이 하였다. 비록 남들보다 많이 배우지는 못했지만, 항상 알려고 노력하였다. 이런 성실함은 농사일과 함께 마을일에서도 나타났다. 할아버지는 비록 마을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뭐든지 맡은 일이 있으면 그 일을 성실히 수행했다. 할아버지는 문중이나 종중 유사를 맡으면서 대외적인 활동을 많이 하였다. 이런 대외활동은 할아버지가 새로운 삶을 사는 데 계기가 된다. 할아버지가 선거판에 들어가게 된 것은 당시 민주정의당 소속의 김윤환의 선거캠프에서 운동원으로 활동하면서 시작하였다. 1999년은 할아버지에게 잊혀지지 않는 해이다. 1월 7일자 일기장에도 적혀있듯이, 위암 수술은 할아버지의 생명을 건 수술이었다. 할아버지는 예전처럼, 적극적인 대외활동을 하지는 않는다. 이제는 완전히 완쾌되어서 할아버지도 조금씩 건강을 회복하고 있다.



농약줄 당기는 윤이실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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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살아온 이야기

할머니의 본관은 함안으로, 의성군 점곡면 윤암 2리로 속칭 윤이실이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할머니는 4남 2녀로 그 중 3째로 태어났으며, 당시 집안 식구를 모두 합치면 13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할머니는 어릴 적에 길쌈도 했지만, 들에 가서 꼴도 베어오고 했다. 할머니는 집에 머슴이 있어서 보통 때는 들일을 하지 않았지만, 집안에 일손이 부족한 경우 간단한 농사일 정도는 하였다.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피난 가려고 집을 출발했지만, 10리도 못 가서 인민군에게 붙잡혀 마을로 돌아온 할머니 가족들은 집에서 인민군과 함께 생활하였다. 할머니는 한국전쟁이 끝나고 당시 점곡 초등학교를 다녔는데, 학교가 마을에서 약 10리 정도 떨어져 있었다. 거리가 너무 멀고 힘들어서 3학년 때까지만 다니고 학교를 그만두었다. 대신 할머니는 집에서 집안 어른들에게 한문과 한글을 배웠다. 할머니는 혼례를 치른 후 7개월간 친정에서 생활하다가 할아버지가 군제대하기 몇 달 전에 시댁이 있는 까치래기로 신행을 왔다. 할머니는 친정을 떠나 낯선 시댁으로 온다는 것이 큰 부담이었다. 왜냐하면 할아버지가 그 때까지 군인이었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시댁에서 처음부터 시어머니와 같은 방에서 생활하였다. 할머니에게도 힘든 일이 있었다. 바로 손님 접대였다.할머니는 시댁에서 약 3년 정도 시부모님과 함께 살다가 분가를 대율리로 하였으며, 당시 분가하면서 시댁에서 받은 물건들을 아직도 보관하고 있다. 할머니가 시댁에서 분가할 때 시어머니가 큰 손주 먹이라고 쌀 한 말을 주었다. 할머니는 농사일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이 바로 누에 먹이는 것이었다. 할머니는 까치래기에 와서도 시집의 살림살이를 많이 거들었다. 비록 한 집에서 사는 것은 아니었지만, 한 마을에 살고 있기에 수시로 시댁에 가서 가사와 농사일을 도왔다. 요즘은 할머니가 농사일을 거의 다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할아버지가 아직까지 농사일을 할 기력이 안 되어서 할머니가 도맡아 할 수 밖에 없다. 냉장고가 없을 때는 끼니 때 마다 반찬, 국 등을 조리해야 했다. 특히 갑자기 손님이 오거나 하면 음식 대접하는 것이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냉장고의 등장이 할머니의 이런 고충을 해결하였다. 할머니는 이제 음식을 하면 냉장고에 보관하며, 특히 국, 반찬류 등 쉽게 상하는 음식을 주로 보관한다. 할머니 집에는 유독 외손녀 물건들이 몇 가지 있다. 왜 그런가 싶었더니 외손녀들이 잠시 동안 외가집에 있었던 적이 있었다. 할머니는 최근 10여년간 외국 여행을 많이 다녔다. 중국, 캄보디아, 태국, 일본 등 계를 모아서 동네분들과 일년에 한 차례 정도 외국여행을 다녔다. 젊을 시절에는 부녀회나 계원들과 국내 여행을 많이 다녔지만, 요즘은 외국여행을 많이 다녔다.



고추밭에서 고추 따는 윤이실 할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