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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광역시 남구 달동 민속지

주제 울산 달리 달동
조사 달리 달동 이야기, 사진, 영상, 녹취, PDF

달동의 역사와 공간적 특징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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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광역시 남구 달동은 11,652세대 인구 30,784명이 살고 있는 동네이다. 달동이 속한 남구는 울산의 강남으로 불리는 곳으로서 GRDP(지역내총생산)가 4만8천 달러로 국내소득 순위 1위이다. 달동은 울산이 시로 승격된 1962년 이후부터 시작된 토지구획정리 사업 이전에는 논과 농가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농촌마을이었다. 이후 1967년 달동의 1차 구획정리 사업을 시작하면서부터 과거 달리의 경관들이 하나둘씩 사라져갔고, 점차 현재 달동의 모습으로 변화하였다. 마을의 좁고 구불구불한 길은 반듯하게 정리되었고, 물을 길러먹던 샘이 있던 자리에는 아파트가 생겨났다. 장마철이면 여천천이 범람하여 허리까지 물이 차던 홍수는 이제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 치수사업이 완료되었기 때문이다. 광활한 농경지 위에는 고층 빌딩들이 들어섰고, 백화점·은행·병원과 함께 각종 문화시설들이 들어섰다. 금융기관과 보험회사·상가 등이 밀집되어 있고 집단 아파트촌을 형성하고 있으며 중앙로·삼산로·번영로·한전로 등 주요 도로가 지나가는 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명실상부한 울산의 강남이라 할 수 있는 금싸라기 땅 달동의 모습으로 재탄생하였다.



2009 달동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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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달동

달동이라는 지명은 지금으로부터 400여 년전부터 확인할 수 있다. 조선의 14대왕 선조 39년(1605)부터 울산출신 무관인 훈련원 부정 박계숙과 그의 아들 박취문이 집필한 『부북일기』에 달동이라는 지명이 나타난다. 이후 달동은 숙종 46년(1720)에 경상남도 울산군 내현면 지역으로 무둔리와 곶지리로 갈라져 있었고, 영조 41년(1765), 순조 1년 (1801)에도 역시 두 마을로 나뉘어져 있었다. 고종 13년(1876)에는 곶지동의 단일마을이 되었다가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 때 울산군 울산면에 편입되면서 은월봉의 산 아래 자리 잡은 평지마을이라는 뜻에서 달리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1931년에 울산면이 울산읍으로 승격되면서 울산군 울산읍 달리가 되었고, 1962년 울산이 시로 승격되면서 울산시에 편입되어 달동이라는 지금의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1972년에는 동제 실시에 따라 달동과 삼산동을 통합하여 달동이 되었다가 1992년에는 달동의 일부를 신정동에 편입시키기도 하였고 1995년 3월 2일에는 다시 달동과 삼산동으로 분리되었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997년, 울산시가 울산광역시로 승격하면서 달동은 오늘의 이름, 바로 울산광역시 남구 달동으로 불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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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동의 옛 지명

무둔실은 숙종 46년(1720), 영조 41년(1765), 순조 1년(1801)의 기록에는 모두 무둔리로 나타나는 곳이다. 옛 달리역에서 서쪽으로 울산공업고등학교가 자리잡은 일대를 무둔실이라 한다.서당산은 달동의 동남쪽에 있는 독산을 서당산이라 한다. 달동에 있던 서당에 딸린 산이므로 그렇게 부른다. 또한 산의 생긴 모양이 마치 큰 바위덩이로 보이므로 야음 쪽에서는 대암산이라 한다. 개와동네는 비행장이었던 달동2구에 딸린 마을이며 본 마을의 북쪽에 떨어져 있다. 비행장 일대는 귀환 동포들의 정착마을이었으므로 기와집이란 보기 드물 정도였다. 그러나 이 마을은 기와집이 많았으므로 이름을 개와동네라 불러온다. 왕생이들은 달동의 동쪽에 있는 넓은 들을 왕생이들이라 부르며 삼산들과의 총칭을 마단 또는 마당들이라 한다. 왕생이들이라 하는 것은 지리풍수상 임금이 날 만한 곳이므로 그렇게 불렀다. 딴섬배기는 야음동 도산의 북쪽들 가운데 있는 작은 산이다. 섬이 들가운데 따로 박혀 있는 것 같다 하여 딴섬배기라 한다. 물론 지금은 달동 주공아파트단지로 조성되어 있는 곳이다.



지형적·공간적 특징

사통팔달 - 교통의 요지, 울산 사람들의 집합소

2009년의 달동 삼산에는 시외버스터미널·고속버스터미널·울산역 등의 대중교통시설이 몰려 있다. 뿐만 아니라, 달동은 중앙로·삼산로·번영로·한전로 등 울산의 주요 도로가 지나가는 사통팔달한 교통의 요지이다. 이러한 지리적 장점으로 인해 달동 인근에는 각종 관공서들이 몰려있고, 백화점·대형마트·쇼핑타운 등의 소비시설이 집중해 있다. 또한 여러 병원들과 은행이 집중적으로 들어서 있는 2009년의 달동은 인근 주민들 뿐 아니라 울산 사람들이 자주 찾는 울산 사람들의 집합소이다. 이는 근래에 들어 만들어진 계획도시이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다. 달동은 지형적으로 태화강의 남쪽에 위치해 있다. 달동의 남쪽으로는 울산항이 있고, 석유화학단지가 있으며 온산과 덕하로 가는 길목과 연결되어 있다. 과거로부터 울산의 중구에 있는 ‘큰 시장’에 가기 위해서는 달동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갈 수가 없었다. 1936년 이후로 온산과 덕하 등지에 사는 사람들은 나무나 가축 그리고 기타 여러 물품들을 사고 팔기위하여 울산 중구에 있는 오일장을 이용하였다. 이때에 태화강을 건너 중구에 가기 위해서는 달동을 통과해야 했는데 그때마다 쉬어가던 곳이 있었다. 지금의 달동 롯데마트 인근이 바로 그곳이었는데 그곳에서 간이 나무시장이 열리곤 하였다. 중구의 ‘큰시장’에 가다가 지개를 받쳐놓고 잠시 쉬는 동안 달동과 인근 신정동, 월평 사람들이 와서 흥정을 통해 나무를 사갔다. 이렇듯 달동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그 지리적 위치의 특성으로 인해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라는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과거에는 특별히 어떤 모임의 장소로서의 장점은 없었지만 ‘지나가지 않고서는 안 되는’ 지리적 특징이 있었기에 사람들이 몰렸다. 그러나 2009년 현재의 달동은 교통체계의 발달로 인하여 ‘지나가지 않고서는 안 되는’ 정도의 교통 주도권을 쥐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1962년 이후로 과거 논이었던 달동 삼산지역이 개발되면서 신도심으로서의 모습을 갖추었다. 신도심의 쾌적한 환경과 넓은 도로, 거기에 지리적 유리함까지 갖춘 달동에 빠른 속도로 주거시설이 들어섰으며 이와 함께 여러 소비시설들이 생겨났다. 자연히 사람들이 많이 모이게 되었고, 이러한 효과로 인해 병원, 은행 등의 생활 편의 시설들까지 갖추어지게 되었다. 과거의 달동이 ‘지리적 장점’에 기인한 사람들의 집합소였다면, 2009년 현재의 달동은 구획정리 사업을 통해 ‘조성된 집합소’, 신도심이라 할 수 있다.



달리경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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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판식 구획

달동은 논을 메워 만든 신도심이다. 물론 과거부터 주거지가 있었지만, 논을 경작하는 농가가 대부분이었던 울산의 변두리 지역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던 달동이 토지구획정리 사업으로 인해 그 모습을 바꾸게 되었다. 달동은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지역이니만큼 계획적으로 지역의 경관이 조성되었다. 달동의 길은 뉴욕의 그것과 같이 반듯반듯한 바둑판식으로 구획되었다. 동서로 달리 가길 부터 카길 까지를 조성하였으며 남북으로 달리 1길부터 5길까지를 구획하였다. 뉴욕 맨하탄의 St.(스트리트), Ave.(에비뉴) 개념을 그대로 적용하여 이해할 수 있는 구조인 것이다. 달리길 뿐만 아니라 동평길·옹기길 역시 이와 같은 바둑판식 구획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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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적 특징 Hybrid Space, Hybrid Culture

달동은 1967년 1차 구획정리를 시작하여, 1992년 2차 구획정리가 완료된 시점 그리고 지금까지 계속해서 변화를 겪고 있다. 구획정리의 진행 정도에 따라 새로운 공간이 형성되고 인구가 유입되었다. 아파트, 관공서, 대형마트, 백화점, 점집, 주상복합시설, 식당, 학교, 교회, 성인노래방, 술집, 고물상, 과거부터 그대로 존재하는 허물어져가는 집 등이 별 연관성 없이 각각의 사연과 개개의 이유로 한데 버무려져 있다. Hybrid한 공간인 것이다. 이러한 공간에서 생활하는 사람들 역시 Hybrid하다. 1960년대에 화학단지가 조성되면서 ‘달동 드림’을 꿈꾸며 들어 온 사람들, 신도심의 깨끗한 아파트로 이사 온 사람 들, 신도심에 큰 마음먹고 음식점을 차린 사람들, 소득이 높고 교통이 좋은 곳에 점포를 낸 대기업들, 이곳에서 배출되는 고물을 이용해 부를 축적하는 사람들, 이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의 목표와 기대 그리고 꿈을 가지고 생활하고 있다. 생존을 위해 경쟁하는 역동적인 도시 공간, 구획정리 사업으로 인해 ‘조성된 신도심’, 그리고 기록되어 남아있는 ‘농촌 달리’의 역사, 이렇듯 2009년 울산 달동은 Hy-brid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