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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남해군 삼동면 물건리 민속지

주제 남해의 보석 물건마을
조사 물건마을 이야기, 사진, 영상, PDF

자연과 생활환경

자연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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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건마을은 행정리로 경상남도 남해군 삼동면 물건리에 위치한 자연촌락이다. 남해군은 한반도 남단의 섬지역으로 경상도의 섬 중 가장 서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전라도와 인접하고 있다. 크게 남해도와 창선도로 이루어져 있으며 총 79개의 섬이 포함되어 있다. 삼동면은 남해도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쪽으로 창선도와 인접하고 있다. 그 중 물건리는 삼동면의 동남쪽 끝에 위치한 행정리이다. 물건리에 소속된 독립적인 자연촌락으로는 물건·은점·대지포 마을이 있다. 이 3개 마을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해안으로 따라 위치하고 있으며 모두 어촌의 취락 형태를 가지고 있다. 그 중 물건마을이 가장 규모가 크며 삼동면 전체에서도 읍소재지인 지족리 다음으로 취락 규모가 크다. 물건마을은 지형적으로 해안과 산자락으로 둘러싸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서쪽 산자락의 높이가 해발 340~110m로 가장 높으며, 북쪽과 남쪽도 각각 170~80m와 100~40m 높이의 산자락이 하나로 이어져 있다. 마치 바다를 향해 펼쳐진 병풍과 같은 형상의 산자락이 물건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다. 그리고 주로 서쪽의 골짜기와 산자락에서 발원된 여러 물줄기들은 하천의 길이가 짧고 경사가 급한 편이지만 물건마을의 주거지들을 관통하여 해안으로 흘러들어 가고 있다. 이와 같은 지형적 특징으로 인해 마을 이름도 물건(勿巾)이라고 칭하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마을 뒷산 모양이 “勿”자 형이며 하천이 “巾”자와 같이 흐르고 있어 물건이라고 칭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외에 선비가 바둑을 두는 모양의 마을 형태이기 때문에 여자가 수건을 쓸 수 없다고 해서 마을 이름을 ‘물건’이라고 지었다는 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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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락

전체적으로 산자락과 바다로 둘러싸인 물건마을은 하나의 독립된 지역적 특징을 가진다. 따라서 4개의 마을이 서로 떨어져 있는 형태로 형성이 되었지만 4개 마을 주민들은 생업을 함께 하면서 같은 마을에 산다는 소속감을 형성하여 왔다. 각 성씨별로 특정 마을에 많이 거주하는 경향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친인척 관계에 있는 여러 주민들이 4개 마을에 함께 섞여 살고 있어 성씨별 혹은 거주하는 마을별로 독립된 정체성을 보여주고 있지는 않다. 현재 물건마을에는 4개의 자연취락이 형성되어 있다. 최근 가옥이 증가하면서 큰마을·윗마을·고랑마을이 연결되어 있는 모습을 보이지만 과거에는 각기 구분된 취락이었다. 이 중 큰마을은 4개의 취락 중에서 가장 발달하였고 중심이 되는 곳이다. 가장 먼저 형성되었다고 하며 12개의 반 중 4개 반이 이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 큰마을을 중심으로 북쪽에는 윗마을과, 남쪽으로는 고랑마을과 연결이 된다. 큰마을은 물건중학교에서 동부대로로 올라가는 길을 따라 형성된 취락으로 4개 마을 중 3번째로 조성이 되었으며 2개 반이 위치하고 있다. 고랑마을은 현 한양수산에서 물이 흐르는 골을 따라 형성된 취락으로 1개 반이 위치하고 있다. 가장 늦게 취락이 발달하였으며 과거에는 4개의 마을 중 가장 낙후된 곳이었다고 한다. 반면 양지마을의 경우 다른 3마을과는 떨어져 있는 취락이다. 큰마을에 이어 두번째로 취락이 형성된 곳이고 2개 반이 위치하고 있다.



물건마을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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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

이러한 물건마을에서 외부 지역으로 가기 위해서는 육로와 수로를 이용하는 방법으로 크게 양분된다. 육로의 경우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험준한 산자락으로 인해 동쪽을 제외한 북·서·남 방향으로 연결된 고개를 이용해야지만 이동을 할 수 있다. 북쪽 방향으로 해발 70m의 동천고개가 있는데 내륙마을인 동천리와 연결이 되며, 서쪽 방향으로는 해발 110m의 듬세고개가 있으며 마찬가지로 내륙마을인 봉화리와 연결이 된다. 면소재지 혹은 삼천포로 가기 위해서는 북쪽의 동천고개를 넘어가야 되고 군청 소재지로 가기 위해서는 서쪽의 듬세고개를 넘어 가야 한다. 반면 남쪽으로 넘어가는 길의 경우 동천고개와 듬세고개에 비해 해발고도가 낮아서 도보로도 쉽게 넘어 갈 수 있다. 이 남쪽의 고개는 은점마을과 연결이 되는데, 이 마을은 물건마을과 인접한 마을 중 지형적으로 가장 쉽게 오갈 수 있으며 거리도 상당히 가깝다. 이와 같은 은점마을을 지나서 계속 가다보면 대지포마을이 나오고 미조면으로 넘어가게 된다. 수로를 이용하는 경우 마을의 선박을 이용해서 남해군의 전 지역으로 이동을 할 수 있으며 멀리는 삼천포까지도 오갈 수 있다. 과거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에는 가까운 내륙을 제외하고는 주로 선박을 이용해서 이동을 하였으며, 특히 삼천포와 같이 남해군 밖의 지역으로 이동을 할 경우에는 여객선이나 어선을 주로 이용하였다. 주민들에 따르면 여객선이 물건마을 앞바다에 도착을 하면 작은 배를 이용해서 승선과 하선을 하였다고 하고, 삼천포에 갈 때에는 생선을 팔러 가는 어선을 얻어 타고 갔다고 한다. 하지만 최근 자가용과 버스 등의 교통이 발달하고 2003년에 삼천포대교가 개통을 한 이후에는 주로 육로를 이용하여 이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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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업

물건마을은 산자락으로 둘러싸인 지형적 특징을 가지고 있지만 바다와 가까워질수록 거주지 혹은 경작지로 적합한 구릉지가 형성이 되어 있다. 특히 동부대로 아래는 경사가 완만해지고 해안과 인접하여서는 평지가 펼쳐져 있어 사람이 거주하기에 적합한 공간이다. 또한 논작물이나 밭작물을 재배하기에도 훌륭한 자연 환경을 가지고 있다. 한편으로 물건마을은 어업을 하기에도 적합한 자연환경을 보유하고 있다. 물건마을에는 해안선을 따라 방조어부림이 조성이 되어 있어서 많은 연안어종들이 숲의 그늘로 몰려든다. 따라서 간단한 어구를 가지고도 쉽게 생선들을 포획할 수 있다. 또한 동쪽의 바다를 향해 U자 형태로 형성된 해안선의 안쪽 바닥에는 굴·조개·멍게·해삼 등의 다양한 해산물을 채집할 수도 있다. 비록 방파제로 인해 더 이상 연안어종이 해안선 안쪽으로 들어오거나 다양한 해산물이 해안에서 채집되지는 않지만 여전히 물건마을의 해안은 손쉽게 어획을 하고 채집을 할 수 있는 자연환경을 보유하고 있다. 이와 같이 사람이 살기 좋은 자연적 환경을 보유하고 있는 물건마을은 사람이 살기에도 적합한 자연적 환경을 가지고 있다. 비교적 마을과 인접하여 형성되어 있는 산자락과 골짜기로 인해 빗물이 바다로 빠르게 빠져나가 인근 지역보다 가뭄현상이 일찍 온다는 것만 제외 한다면 완만한 구릉과 바다와 인접한 자연환경은 사람이 살기에 훌륭한 조건들을 조성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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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형성

물건마을이 위치한 남해도에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후기 구석기시대부터로 추정된다. 남면의 평산리에서 석영 재질의 구석기가 발견되었기 때문에 남해도에는 이미 후기 구석기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하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어 진다. 또한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인 지석묘(고인돌)가 남해군 전 지역에서 총 6개 소, 60기가 확인된 것을 볼 때 청동기시대에도 상당히 많은 마을이 남해도와 창선도에 형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하지만 지석묘가 발견된 지역이 육지와 인접하거나 내륙에 넓은 평지가 이루어져 있는 남해 읍·이동면·남면·서면·창선면이기 때문에 남해도의 동쪽 해안선에 위치한 물건마을에는 이때까지는 사람이 살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물건마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 삼국시대 혹은 고려시대부터로 추정된다. 독일마을 아래쪽과 물건중학교 인근 구릉지에서 회흑색·회황색·회청색의 도기편이 채집되고 호(壺) 동체부편과 같은 고려시대의 유물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물건마을의 현 거주지 위쪽으로 취락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첼로펜션 아래쪽의 동부대로 주변으로 회청색·회흑색을 띠는 도기편이 발견되었고, 그 중에는 평행타날문이 시문된 것까지 포함되어 있어 삼국시대에 이미 사람이 살고 있었던 것으로도 볼 수 있다. 하지만 현재의 물건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조선 시대 중기 이후부터이다. 고려말의 원간섭기가 되면서 남해안의 도서지역에 대해서 주민을 강제로 육지로 이주시켜 섬을 비우는 공도화 정책이 시행되었다. 이에 따라 남해도는 법으로 사람이 들어가서는 안되는 곳이 되었고 물건마을 역시 사람이 살아서는 안되는 곳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고려말이 되면 왜구의 노략질이 빈번히 일어나게 되고 공민왕 7년(1358)에는 주민들을 육지로 임시 이주시키고 남해현과 그 속현인 평산현과 난포현을 폐현시키기에 이른다. 즉, 이 당시 물건마을은 법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취락이 형성될 수 없는 곳이었다. 이는 조선조가 들어선 이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남해도의 내륙은 토지를 개간하면서 사람이 거주하도록 하였지만 해안지역의 경우 왜구의 노략질을 염려하여 사람이 살지 못하도록 법으로 금했다. 문종 2년(1452)에 편찬된 『경상도지리지』 「곤남군조(昆南郡條)」에 의하면 남해현의 호구가 61호에 171명(남: 71명, 여 100명)인 것을 감안했을 때 조선 초기까지 남해도에는 내륙에는 주민이 거주를 하였지만 해안지역은 사람이 살지 않았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와 같이 남해도의 해안지역은 조선 초기까지 사람이 살지 못하는 곳이었지만 비옥한 토질과 풍부한 해산물이 산출되는 남해도를 계속해서 방치할 수 없었던 조정에서는 성종 17년(1486년)에 미조진성을 설치하고 성종 21년(1490년)에 평산포성을 쌓는 등 왜구에 대한 방비를 강화하였고, 이에 따라 남해도의 인구가 증가하고 취락도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임진왜란 시기 갈 곳 없는 유민들을 남해도에 이주시켜 둔전하게 함으로서 남해도의 취락 발달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이는 정조 10년(1786년)에 완성된 『진주진관 남해현지』에 남해현의 호구가 4,904호 25,971명(남: 12,326명, 여: 13,465명)으로 기록된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이러한 내용들을 살펴 볼 때 남해도의 해안지역도 임진왜란이 끝난 뒤부터 취락이 발달하기 시작한 것으로 생각된다. 물건마을에서 가장 많은 성씨이자 물건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하는 전주 이씨는 1680년경에 물건마을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물건마을의 형성도 17세기 중반 이후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주민들에 의하면 전주 이씨들이 이주를 해오기 전에 이미 은점마을과 인접한 곳에 문씨 성을 가진 주민 몇 명이 살고 있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이미 그전부터 소수의 주민들이 물건마을에서 거주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태풍이 지나간 후의 물건마을 해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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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발달

물건마을이 본격적으로 주민들의 수가 증가하고 취락이 발달하게 된 것은 전주 이씨들의 이주가 이루어진 다음이다. 전주 이씨가 1680년경에 지족에서 이주를 하여 정착을 하고 자손들이 번성하면서 취락이 발달하기 시작하여 1740년경에 경주 김씨가, 1800년대 초반과 중반에는 함안 조씨·경주 이씨·밀양 박씨가 이주를 해오면서 총 5개의 성씨를 중심으로 물건마을이 현재와 같은 마을 모습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후 물건마을은 일제시대에 이르러 지역중심지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정도로 발전을 하게 된다. 1913년 2월부터 1918년 12월까지 면사무소가 물건마을에 위치하기도 하였으며 야학회가 조직되어 70여 명의 아동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하기도 하였다. 일제시대에 물건마을에 어느 정도의 인구가 거주하고 있었는지 알 수는 없으나 1936년의 신문에 마을내 빈민 37호에 쌀을 나누어 주었다는 기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당시에도 물건마을의 가구 수는 100호가 넘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해방 이후에도 물건마을은 넓은 농토와 고수익을 올리는 어업을 배경으로 발전을 거듭하여 많은 인구가 살고 있는 마을로 자리매김한다. 특히 대형어업인 권현망을 하는 집이 3곳이나 될 정도로 어업이 발달하였고 다른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와 돈을 벌기 위해 물건마을로 이주를 하였다. 주민들에 의하면 1950~1970년대 무렵에는 물건마을이 돈곶이라고 불릴 정도로 돈벌이 좋은 곳이었다고 하고, 처녀들은 용꿈을 3번 꿔야지 물건마을로 시집을 올 수 있었다는 우스개소리까지 있었다고 한다. 즉, 이 무렵의 물건마을은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곳이자 부자마을이었던 것이다. 이는 1962년 신문기사를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이 기사내용에 따르면 물건마을은 총 가구 수가 430호나 되는 큰 마을로써 농토도 비옥할 뿐만 아니라 앞바다에서 멸치·참치·삼치 등을 어획하면서 연평균 3억환 이상을 벌어들인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마을의 30~40퍼센트가 기와집이고 대학 졸업생 혹은 재학생의 수가 30명이나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1970년대까지 번성하였던 물건마을이지만 1980년대를 접어들면서부터는 여느 어촌마을과 같이 인구가 감소하기 시작한다. 1981년에 1,110명이나 되었던 인구수는 이후 꾸준히 감소하기 시작하여 1996년에는 619명으로 절반 가까이 감소하였고 2008년에는 536명까지 감소하였다. 이와 같이 물건마을의 인구가 감소하게 된 이유는 어업이 정체기에 접어들면서 파산을 하는 어선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고 고향을 떠나 외지에서 공부를 한 자녀들이 도시에 정착을 하였기 때문이다. 꾸준히 감소하던 물건마을의 인구는 2008년 이후 조금씩 증가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는 도시로 이주해서 살고 있던 주민들이 은퇴 후 귀향을 하면서 나타난 변화이기도 하지만 물건마을이 관광지로 유명해짐에 따라 나타나는 변화이기도 하다. 물건마을을 중심으로 인근에 독일마을 등의 관광지가 조성되고 이들이 각종 드라마와 영화의 촬영지로 언론매체에 소개가 되면서 물건마을이 남해군의 유명 관광지가 되었다. 이로 인해 펜션업 혹은 관광업을 위해 외지에서 이주를 해오는 사례가 급증하기 시작한 것이다. 최근 10년 전부터 나타나고 있는 관광지로서의 정체성 변화는 물건마을을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 시키고 있다.



태풍이 지나간 후의 물건마을 해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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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환경

물건마을은 다른 마을과 달리 생활환경에 있어서 여러 특징을 가지고 있다. 먼저 종교적으로 한국사회의 종교를 구성하는 3대 종교인 불교·개신교·천주교의 종교시설이 모두 위치하고 있으며, 주민들 역시 불교신자·개신교신자·천주교신자가 함께 공존하고 있다. 도서 지역의 어촌인 물건마을에 3대 종교의 종교시설이 모두 존재하고 있는 것은 상당히 특이한 점이다. 어촌, 특히 섬 지역은 전통적으로 무속신앙이 강한 곳으로 개신교와 천주교가 정착하기가 쉽지 않은 지역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부터 서울이나 부산 등 외부 도시 지역과의 인적이동이 활발하다 보니 개신교와 천주교의 전도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져 현재와 같은 다양한 종교가 마을 안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또한 여가생활에 있어서도 최근 농업 및 어업의 기술이 발달하고 주민들의 고령화로 인해 이전보다 늘어난 여가시간을 가지게 되었고 다양한 여가활동이 나타나게 되었다. 물건주민들의 주민들은 연령별·성별로 다양한 여가활동을 하고 있는데, 주민들의 생업 특성상 4월부터 10월까지 가장 바쁜 시기이기 때문에 여가생활도 이와 맞물려서 이루어지는 특징이 있다. 이밖에도 물건마을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교육시설이 위치함으로써 주민들의 생활에 일정부분 이상 영향을 주고 있으며, 물건마을을 중심으로 한 관광지의 형성과 발달은 주민들의 생활 전반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물건마을의 종교

기독교 대한감리회 물건리교회

기독교 대한감리회 물건리교회(물건리 453번지)는 물건마을에서 가장 많은 신도수와 가장 큰 종교적 영향력을 보유하고 있는 종교단체이다. 물건마을의 종교시설 중 유일하게 주거지 사이에 세워져 있는 감리교회는 주민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큰마을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부대로에서 물건마을을 관통하여 어부림 숲으로 연결되는 도로와 인접하고 있어 접근성이 가장 좋다. 또한 2층으로 이루어진 교회 건물은 2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본당을 비롯하여 사무실·식당·사택 등을 보유하고 있어 시설적인 면에서도 물건마을의 종교시설 중 가장 규모가 크다. 선교회는 선교와 관련된 활동업의 일환으로 지역아동센터를 부설 운영하고 있다. 2004년에 부임한 최진화 목사에 의해 2005년에 설립되었으며 현재 총 29명의 아동을 보육하고 있다. 교회에서 운영을 하고는 있지만 선교적인 도구보다는 지역주민들과 사회에 기여하는 차원으로 운영되고 있다. 선교적인 효과는 훗날 아이들이 교회에 대한 긍정적 인식을 가질 수 있는 간접적인 수준만을 기대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현재는 여러 가지 요인들로 인해 교인의 수가 정체된 상황이고 교세 확장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물건마을은 기본적으로 바닷가에 위치한 어촌이고 어업에 종사하는 주민들이 많기 때문에 민간신앙이 오래전부터 강했고, 주변에 보리암 등 많은 사찰이 위치하고 있어 불교가 이전부터 폭 넓게 자리 잡아 왔다. 따라서 주민들에게 개신교를 선교한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실제로 현재 교인들 중 배를 소유하고 있으면서 어업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은 4~5명 뿐이며, 이 교인들도 교회를 다니게 되는 과정 속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여기에 젊은 연령층이 대부분 도시로 떠나고 기존의 오래된 교인들은 노령으로 하나둘씩 사망을 하게 되면서 전체 교인의 수도 감소하기에 이른다.



감리교회 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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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예수교 장로회 재건물건교회

대한 예수교 장로회 재건물건교회(물건리 306-2번지)는 물건마을에서 가장 먼저 눈에 보이는 종교시설이다. 교회가 위치한 곳은 마을회관에서 동부대로로 올라가는 길 옆으로, 물건마을 내의 4개 마을과 해안이 모두 내려다보이는 곳이다. 주민들의 거주지와는 30m 정도 떨어져 있고 주변으로는 계단식 밭이 조성되어 있다. 교회의 시설로는 5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본당과 목사 혹은 강도사가 거주를 할 수 있고 예배 이후에 교인들이 함께 식사를 할 수 있는 사택이 위치하고 있다. 교회는 총 2동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는데 전체적인 규모는 그리 크지 않다. 현 교회 건물은 1992년에 지어졌는데 처음 교회가 지어진 것은 1946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물건마을에 재건교회가 세워진 것은 1946년이지만 그 이전부터 주민들 중 일부가 장로교인으로 신앙생활을 하였다. 1930년대에 남해읍에는 이미 장로회 교회가 세워져 있었으며 최상임 목사가 순회예배 등을 통해 선교를 하고 있었다. 예수교 장로회 총회는 1938년 일제의 강요에 굴복해 신사참배를 수용하였다. 이에 여러 종교인들이 반발하면서 신사참배를 거부하였고 1940년에는 재건교회 설립의 시발점이 되는 재건운동이 마산에서 결의된다. 이 재건운동은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신사참배를 하는 목회자와 교인들은 인정하지 않는 것을 주 내용으로 하는데 당시 남해지역에서 선교를 하던 최상임 목사는 이 재건운동의 주동인물 중 하나였다. 따라서 최상임 목사는 일제에 의해 수감이 되고 순교를 하게 되는데 물건마을의 교인들 역시 이러한 상황들 속에서 신사 참배를 거부하고 일제의 감시를 피해 가정예배를 드리면서 신앙생활을 계속하였다. 그렇게 일제의 감시를 피해서 장로회의 신앙생활을 이어가던 중 1945년 해방이 되자 교회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1년 뒤인 1946년 6월 29일 현 부지에 교회를 세우게 된다. 처음 교회를 세웠을 때는 목회자가 따로 없었고 교인들이 모여 예배를 보는 예배당의 성격이었다고 한다. 현재와 같은 교회 건물이 세워지게 된 것은 1972년이다.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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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은점공소

천주교 은점공소(물건리 565-17번지)는 물건마을과 은점마을 경계에 세워져 있는 천주교 종교시설이다. 물건마을에서 은점마을로 넘어가는 대로변의 오른쪽 산자락 아래에 위치하고 있는데 물건마을의 다른 종교 시설들과는 달리 물건마을과 다소 떨어져 있다. 하지만 물건마을과 은점마을 두 마을 모두 공소까지 도보로 이동이 가능한 거리이다. 천주교 마산교구 남해본당 소속의 은점공소가 세워지게 되는 계기는 1950년대로 거슬러 올라 간다. 물건마을에 천주교가 전도가 된 것은 은점마을 주민이었던 이영규 씨에 의해서였다. 은점마을에 살고 있던 이영규는 군복무를 하면서 천주교 교인이 되었고 전역 후 고향으로 돌아 온 뒤에 가족과 인근 주민들에게 천주교를 전도하기 시작하였다. 이로 인해 은점마을 주민 몇 명이 가정집에 모여서 천주교 신앙생활을 하기 시작하였고 인근에 있었던 물건마을에도 전도가 되어 10여 명의 주민이 천주교 교인이 되었다. 이 당시 교인들은 주로 농사를 짓는 나이가 많은 노인들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현재 생존하고 있는 초창기 교인들은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현재 교인들의 경우도 초창기 교인들과 유사하게 어업이 아닌 농업이나 펜션업, 멸치액젖과 같은 식가공업에 종사하는 주민들이 주를 이루고 연령대도 50~70대로 높다. 집에서 가정예배를 통해 신앙생활을 하던 물건마을과 은점마을의 교인들이 공소를 설립한 것은 1962년이다. 이때에 현 공소부지를 마련하고 예배공간인 경당을 세웠다. 1958년에 남해읍의 공소가 설립되고 1960년에 남해 본당으로 승격된 것을 고려하면 상당히 이른 시기에 세워진 것이다. 이후 30여 년의 시간이 지나자 지붕에서 비가 새는 등 공소 시설의 노후화로 인해 재건축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2007년에 현 건물이 재건축되었다. 2007년의 재건축은 공소의 교인들이 함께 멸치액젖을 담궈서 판매하는 등의 여러 노력을 통해 1억원의 자금을 마련하여 건축한 것으로 2007년 4월 16일에 주교님을 모시고 봉헌성량식을 열기도 하였다.



은점공소 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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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암

거주지들과 떨어져서 어부림숲과 인접한 논들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는 미륵암(물건리 63번지)은 물건마을의 종교시설 중에 가장 짧은 역사를 가지면서 동시에 가장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현재의 미륵암이 만들어진 것은 근래의 일이지만 미륵암 터에는 사람 형상을 한 돌을 대상으로 하는 민간신앙이 오래전부터 존재하였다. 미륵암 터에는 본래 돌이 어지럽게 쌓여져 있는 돌무더기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약 300년 전에 선몽을 받은 스님이 이곳을 우연히 지나가다가 사람 형상을 한 돌 3개를 발견하였고 이때부터 물건마을 주민들은 이 사람 형상을 한 돌 3개를 돌할머니 혹은 미륵돌이라 부르면서 미륵신앙과 결합된 민속신앙으로 모시게 되었다. 현재와 같이 미륵돌 주위로 건물이 들어선 것은 1970년대에 이르러서이다. 어느 보살이 미륵돌을 관리하고 있었는데 유금순씨가 그것을 이어 받으면서 숙식을 위한 건물 1동을 지었다. 이 당시에는 이곳을 미륵당이라고 불렀고 많은 주민들이 찾아와 소원을 빌고 신앙활동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던 중 1990년대에 이르러 유금순 씨가 불교에 귀의하여 출가를 하면서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유금순 씨가 출가를 하면서 비어 있게 된 미륵당은 ‘송파’라는 스님이 매입을 하고 입주를 하게 된다. 하지만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으면서 정착에 실패하고 떠나게 된다. 그 이후에도 여러 스님들이 찾아 왔지만 얼마 있지 못하고 다 떠나가는 것이 반복되던 중에 현재 미륵암 주지인 청운 스님이 10년 전에 정착을 하면서 현재에 이르게 된 것이다. 청운 스님이 정착하게 되면서 부터는 미륵당은 미륵암으로 그 이름이 바꾸고 전통 불교 사찰로 완전히 변화하게 된다. 기존에 숙식만 가능했던 가옥 이외에 부처님을 모시는 불당과 삼성각 등을 짓고 지붕에 해수관세음상을 세우는 등의 불교 사찰로서의 형태를 갖추었다. 불당은 극락보전으로 아미타여래를 모셨으며 해수관세음보살과 사가라용왕도 함께 모셨다. 또한 한 달에 2번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는 법회를 열고 불교에서 중요시하는 날인 석가탄신일·정초·대보름·백중·동지에 기도를 드리고 영가제·천도제·산신제 등의 제례의식을 진행하면서 미륵암을 찾아오는 물건마을 주민들이 이전의 무속적 신앙과는 달리 불교적 신앙생활을 하도록 미륵암을 운영하고 있다.



미륵암


물건마을의 교육

물건중학교

물건마을에 물건중학교가 들어선 것은 1970년이다. 6. 25전쟁이 휴전이 되는 1953년 이후 출산율은 급격히 증가하면서 아동의 수는 급증하였다. 이때 태어난 아동들이 취학연령이 되는 1960년대로 접어들자 밀려드는 학생들로 인해 도시와 시골을 가릴 것 없이 전국의 각 학교들은 학생 수용의 한계점에 이르게 되고 점차 지역 곳곳에 분교와 개교가 증가하게 된다. 당시로서는 도서 벽지라고 할 수 있는 물건마을과 주변지역 역시 마찬가지여서 급격히 증가하는 아동들을 모두 수용하기에는 동천리에 소재하고 있는 삼동초등학교의 시설로는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1964년 내산분교가, 1965년에는 물건분교가 개교하게 되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지 않아 1965년에는 내산분교가, 1967년에는 물건분교가 각각 본교로 승격되어 내산초등학교와 물건초등학교가 개교하였다. 이러한 취학연령이 증가하고 학교시설이 확대되는 과정 속에서 물건중학교 역시 이와 깊은 관련을 맺으면서 개교하게 된다. 주민들의 입장에서 자신들이 거주하는 마을에 학교가 들어서는 것은 중요한 일이었다. 따라서 1963년 물건리에 초등학교 분교가 설립되는 과정 속에서 물건마을과 은점마을은 각자 자신의 마을에 학교를 유치하기 위해 경쟁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현재 물건중학교의 부지를 기부체납식으로 사용허가를 받고 주민들이 직접 돌을 나르는 등의 노력을 통해 3교실 규모의 석조전을 건설하였다. 하지만 물건 분교는 현재 해오름예술촌이 있는 부지에 들어서게 되고 석조전은 비어 있게 된다. 이후 몇 년 동안 비어 있던 석조전에 삼육재단에서 파견된 교사 1명이 야간중학교를 열고 3개월간 가르쳤다. 곧이어 1969년 11월 17일에 남수중학교 물건분교로 설립인가를 받아서 1970년 3월 7일에 개교를 하게 된다. 그리고 이듬해인 1971년 3월 7일에는 6학급의 설립인가를 받아 분교가 아닌 물건중학교로 정식 개교하게 된다. 이로써 물건마을의 1957년생부터는 남수중학교가 아닌 물건중학교에 입학하게 된 것이다. 이후 물건중학교의 학생 수는 꾸준히 증가하여 1974년에는 학년 당 3학급씩 편성되어 학생 수가 530명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현재 물건중학교의 재학생 수와 규모는 과거에 비해 현저히 줄어든 상태이다. 한국사회가 1970년대와 1980년대에 강력한 산아제한이 이루어지고 산업화에 따른 이촌향도가 본격화되면서 출산률이 저하되고 농촌과 어촌의 인구수는 급감하면서 도서벽지라고 할 수 있는 물건마을과 그 주변 지역 역시 전체 인구수와 취학 아동수가 급격히 감소하였다. 이에 따라 내산초등학교는 1994년, 물건초등학교는 1999년에 폐교되고 삼동초등학교에 통폐합되었다. 물건중학교 역시 학생 수가 꾸준히 감소하였다. 다른 도서지역의 학교와 같이 물건중학교도 학생 수가 크게 감소하다 보니 재학생의 수가 60명 이하로 떨어진 10여 년 전부터 면사무소 소재지인 지족에 위치한 남수중학교와의 통폐합 논의가 제기되었다. 하지만 주민들 간의 논란이 계속되어 최근까지도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2012년 4월에 남해교육지원청에서는 전체 학생수가 60명 이하의 학교간의 통폐합이 불가능한 경우 폐교를 추진하는 적정규모학교 육성계획을 수립하면서 통폐합 논의는 급작스럽게 진행되기 시작하였다. 10년 가까이 계속 되어 왔던 중학교 통폐합이 이루어진 것은 이러한 적정규모학교 육성계획에 따른 기숙형 거점중학교 설립이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기숙형 거점중학교는 2013년에 바로 착공하여 2015년에 개교를 할 예정이다. 따라서 2015년이 되면 현 물건중학교의 시설은 비어 있게 되는데 물건마을 주민들은 이 시설의 활용에 대해서 큰 기대를 가지고 있다.



물건중학교 복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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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아동센터

물건리지역아동센터는 물건마을에 위치한 지역의 아동을 위한 복지시설로 2005년 5월 23일에 설립되었다. 운영법인은 (재)기독교대한감리회유지재단이며 (사)전국지역아동센터협의회 회원 단체이다. 물건감리교회 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현재 물건마을을 중심으로 은점, 대지포, 동천, 둔촌마을에 거주하는 총 29명(미취학 아동 2명, 초등학생 21명, 중학생 6명)의 아동이 다니고 있다. 총 29명의 아동이 다니고 있는 것은 남해군청 에 10명 이상 30명 미만의 아동복지시설로 등록되어 있어 정원이 29명으로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재 행정업무와 전반적인 지도를 담당하는 사회복지사 1명과 급식과 시설관리를 담당하는 자원봉사자 1명이 물건리지역아동센터를 실질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센터장인 최진화 목사는 지역아동센터의 전반적인 운영을 관리한다. 지역아동센터는 기본적으로 기초수급자 및 차상위 계층 가정의 아동, 조손가정의 아동, 다문화가정의 아동을 1순위로 하고 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부촌인 물건마을과 주변 마을에는 앞서 열거한 조건을 만족하는 경우가 많지 않고, 지역아동센터는 기본적으로 가정의 아동양육 부담을 덜어주고 부모를 지원하는 아동복지시설이기 때문에 일반가정의 아동도 받고 있다. 대신 일반가정의 경우 맞벌이 가정의 아동을 우선적으로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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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트학교

물건마을에 위치한 또 하나의 교육시설인 남해군 요트학교는 3곳의 교육시설 중 가장 최근인 2009년 3월 28일에 개교하였다. 물건항의 어촌계 건물(건축면적: 555.65m2 연면적: 970.8m2) 2층을 요트학교의 사무실과 강의실로 사용하고 있으며 3층은 강사 숙소로 사용하고 있다. 이외에 계류장과 요트보관 창고도 보유하고 있다. 교육장비로 딩기요트 30척(유소년용 10척, 교육용)과 크루져 요트 1척을 보유 하고 있으며 안전장비로는 안전보트 3척과 슈트 및 구명조끼 등을 보유 하고 있다. 그리고 기타장비로 오리발·수경·스노클 40세트도 보유하고 있다. 직원으로는 현재 3명이 근무하고 있다. 학교 업무를 총괄하고 전지훈련과 선수육성을 담당하는 교장 1명과 요트관련 교육과 시설을 관리하는 팀장 1명, 그리고 전반적인 행정업무를 수행하는 행정 총무 1명이 상근하고 있다. 요트 교육은 교육 희망자에 한해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경남해양과학고 학생들과 남해군 내의 초등학교 3학년 이상 초중고 학생들을 대상으로도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다. 수강료는 군민과 군내 재학생은 무료이며 다른 지역의 주민인 경우 소정의 수강료를 납부하여야 한다.



요트학교 전경


물건마을과 관광지

물건방조어부림

물건마을을 들어서면 해안선을 따라 아름답게 펼쳐진 방조어부림이 가장 눈에 띈다. 물건방조어부림은 해안 몽돌밭을 따라 반월형으로 펼쳐져 있는데 평균 너비 30m, 길이 700m 내외이고 면적은 23,438m2이다. 기존의 군지, 면지, 관광안내서 등 거의 모든 기록물에서 길이를 1.5km로 설명하고 있는데 수정되어야 할 부분이다. 물건방조어부림은 천연기념물 제150호(1962년 12월 3일)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남해군의 방풍림이 대부분 소나무인데 반해, 물건방조어부림은 팽나무, 참느릅나무, 상수리나무, 이팝나무, 보리수, 동백나무, 느티나무, 포구나무, 벚나무 등 활엽수로 이루어진 것이 특징이다. 현재 상층목 2,000여 그루와 하층목 8,000여 그루로 이루어져 있다. 이 숲은 근해에 그늘을 드리워 물고기를 모으기도 하고, 방풍림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또한 숲이 아름답게 잘 가꾸어져 있고 몽돌해안과 인접하고 있어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다. 이 물건방조어부림은 전주 이씨 무림군의 후손들이 이곳에 정착하면서 17세기 후반 조성된 것으로 군지, 면지, 관광안내서 등에 설명되고 있다. 그러나 몇몇 마을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예전에는 해안선 주변이 모두 숲이었는데 농경지로 개간되면서 해안선과 가까운 숲만 남게 되어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약 100여 년 전 마을 사람들이 숲을 벌채를 한 적이 있다고 하는데, 그 후 폭풍우가 이 마을을 들이쳐 큰 피해를 입게 되었고 이후로는 숲을 파괴하면 마을이 망한다고 믿어 숲의 나무를 베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또다른 전설에 의하면 200여 년 전 공요전을 납부할 능력이 없어 숲의 나무를 벌채하여 납부를 하자 마을에 큰 화재가 발생하여 막대한 인명피해를 입었다고 하며, 그 이후로는 숲을 파괴하면 마을에 큰 변고가 난다고 믿어 숲을 잘 보호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밖에 약 100여 년 전에는 병술년 대흉년이 있었는데 이 숲의 나무로 초근목피하여 주민들이 기아에서 벗어났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다. 물건방조어부림을 잘 보존한 결과 최근 환경부에서 지정한 “자연생태우수마을”에 4회 연속 지정되었고, 해양수산부에서 선정한 “아름다운 어촌마을”, “잘 가꾼 자연문화유산”에 선정되었다. 또한 행정자치부의 “살기 좋은 지역 만들기” 마을로도 지정된 바있으며, 산림청 주관 아름다운 마을숲 경진대회 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물건방조어부림 청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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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마을

남해군 삼동면 물건리 1074-2번지에는 붉은색 지붕과 하얀색 벽으로 이루어진 34채의 독일식 건물로 이루어진 남해독일마을이 있다. 이 마을은 1960~1970년대에 파독되었던 광부들과 간호사들이 노후를 보내기 위해 조성된 마을이다. 독일마을은 남해군과 독일교포 간의 긴밀한 협의 하에 주택 등의 건축물을 100% 독일식으로 시공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마을의 주택 등 모든 건축물들이 이국적이라는 특징이 있다. 또한 총 34가구 중 27가구가 민박을 운영하고 있어 이국적인 독일식 주택에서 숙식을 할 수도 있다. 이러한 독일마을은 2000년대 중반이후 관광지로 유명해지기 시작한다. 이국적인 독일식 주택으로 이루어진 마을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 독일마을은 유명 영화와 드라마의 배경으로 세상에 알려지면서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오게 되었고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과 관광지와 더불어 남해군의 관광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코스가 되었다. 현재 독일마을은 파독 광부들과 간호사들이 노후를 보내기 위한 마을의 성격보다는 관광지로서의 성격이 더 강화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물건마을 아래편으로 독일마을과는 관련이 없지만 독일마을을 흉내낸 많은 펜션과 카페 등이 들어서 있으며 주말 혹은 성수기에는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관광명소로 되어 있다. 독일마을의 주민들도 독일의 문화를 대표할 수 있는 맥주축제를 매년 10월에 개최하는 등 관광객 유치를 통한 수익창출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독일마을이 관광 명소로 유명해질수록 물건마을은 상대적으로 박탈감은 커지고 있다.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다 보니 주말이나 성수기에는 차량이 물건마을 주변으로 집중되어 교통정체와 주차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또한 숙박업에도 영향을 끼쳐 관광객들이 독일마을과 그 아래의 펜션들을 먼저 찾으면서 물건마을 내의 민박은 성수기를 제외하고는 관광객이 찾지 않고 있다. 이와 같은 이유로 물건마을 주민들은 독일마을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반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주민들은 독일마을로 인해 물건마을도 동반 이익을 얻을 수 있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물건마을 이장은 독일마을 회장과 계속적인 협의를 진행하고 있다.



독일마을 주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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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예예술촌

원예예술촌은 독일마을과 인접하여 산정상부의 산자락에 위치한 관광지이다. 총 면적은 183,490m2로 남해군 삼동면 물건리, 동천리, 봉화리에 걸쳐 있다. 이 원예예술촌이 조성되는 데에는 국비 68억원, 지방비 88억원, 민자 100억원 등 총 256억의 사업비가 소요되었다. 입주한 주택들의 대지 면적은 300m2에서 1,320m2이고, 집의 크기는 49m2에서 171m2까지 다양하다. 남해군에서 원래 계획한 것은 현재 원예예술촌과는 상이하다. 남해군에서는 2000년 7월 확정된 남해안 관광벨트 개발 계획하에 2003년 국토이용계획 변경을 마치고 2006년 보물섬문화관과 기반시설공사를 마무리했다. 하지만 입주 신청자가 분양건의 1/3 수준에 머물자 사업변경을 고려하게 된다. 이에 예원영농조합법인이 원예예술촌 조성계획을 제출하고 2006년 12월 11일 투자양해각서 조인식을 갖고 사업변경과 원예예술촌 조성에 들어가 2009년 5월 15일 문을 열었다. 원예예술촌은 현재 20여 개 국가의 정원이 조성되어 있으며, 잘 꾸며진 산책로를 따라 분수, 연못, 꽃터널, 조각공원, 공연장, 온실정원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뿐만 아니라 다양한 체험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대부분 소유자가 실제 거주하고 있으며 카페, 식당 등을 겸해서 운영하기도 한다. 이밖에 원예예술촌은 2012년 6월에 제1회 원예예술촌 FLOWER & MUSIC FESTIVAL을 개최하였다. 꽃이 만발한 원예예술촌에서 오페라, 요들송, 교향곡, 가곡, 통기타, 국악, Oboe연주, Violin연주, Jazz 공연, 챔버 오케스트 등 다양한 음악공연을 하여 꽃과 음악이 어우러진 축제를 열어 많은 관광객들을 유치하기도 하였다.



원예예술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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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오름예술촌

해오름예술촌은 물건초등학교의 건물과 부지를 개조하여 운영 중인 문화예술 전시공간 및 각종 문화 체험공간이다. 물건초등학교는 1967년 3월 1일 개교하여 1999년 9월 1일부로 삼동초등학교와 통폐합되었었는데 남겨진 학교 건물을 민자투자를 통해 새롭게 개조하여 2003년 5월에 문을 열었다. 이후 줄곧 문화예술 전시 및 공연, 작가들의 작업공간, 전통문화체험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건물 1층에는 민속품 전시장과 도예체험 등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며 2층에는 호정갤러리를 만들어 다양한 문화 전시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해오름예술촌에 전시되어 있는 민속전시품 등은 정금호 촌장이 시골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직접 모은 수집품이다. 해오름예술촌 건물 밖으로는 한쪽 편에 커피 체험장·커피용품 전시장·커피 묘목장·커피로스팅 하우스·커피 강좌 교실 등을 완비해서 관광객들이 커피를 마시고 관련 용품을 구입할 수도 있는 해오름커피마을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해오름예술촌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