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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거제시 살림살이

주제 이수범·로살리 가정의 살림살이
조사 살림살이 이야기, 공간과 살림살이, 통계, PDF

이주여성 정착기

고향에서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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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살리는 1977년 1월 22일 필리핀 메트로마닐라 만달루용(Mandaluyong)에서 3남 6녀중 여섯째로 태어난 이후 2002년 8월 한국에 오기 전까지 26년간 필리핀에서 살았다. 가족들 중 유난히 머리가 좋았던 로살리는 유치원(Kindergarten), 만달루용 초등학교(Mandaluyong Elementary), 만달루용 고등학교(Mandaluyong Highschool)까지의 과정을 모두 마쳤으며,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필리핀의 대학은 6개월 과정의 직업 학교와 2년 과정의 전문대학교, 4년 과정의 대학교로 나뉜다. 4년 과정의 대학교는 다시 국립(Public)과 사립(Private)으로 나뉜다. 로살리는 사립 대학교로 진학하기를 원했다. 국립에 비하여 학비는 비싸지만 면학분위기가 좋았기 때문이다. 국립 대학교는 학비가 저렴한 대신 한 반에 50~60명이 수업을 듣기 때문에 깊이 있는 배움의 기회가 적었다. 성적이 좋았던 로살리는 필리핀 명문 대학인 호세리살 대학교(JOSE RIZAL University)2 컴퓨터 과학과(Computer Science)에 진학하였다. 컴퓨터 과학을 전공하면, 졸업 후 좋은 직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필리핀의 대학생들은 모두가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반적으로 낮은 경제적 여건 하에서 학비를 충당하기 위하여 집에 손을 벌리는 것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 아르바이트를 해서 학비를 버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다. 호세리살 대학교의 학비는 학기당 5,000페소로 비싼 편이었다. 이 외에도 시험을 치루기 위하여 별도의 비용을 지불해야 했기 때문에 많은 돈이 필요했다. 메트로마닐라에 거주하는 대학생들은 대부분 서비스업종의 아르바이트를 한다. 특히 로살리가 살았던 만달루용은 필리핀의 수도인 메트로마닐라에서도 중심지였기 때문에 내국인과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패스트푸드 점, 백화점, 잡화점 등이 성행하고 있었다. 로살리가 처음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곳은 SM MEGA MALL 내부에 위치한 패스트푸드점인 KFC였다. 로살리는 대학교에 입학하던 1995년부터 졸업하던 해까지 5년 동안 지각 한번 하지 않고 성실하게 일했으며, 3년째 되는 해에는 모범 사원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에는 National Book Store3 에서 1년 6개월간 점원으로 아르바이트를 했으며, 남는 시간에는 SM MEGAMALL, Shangri-La Plaza Mall 내부에 위치한 Crossings 백화점, 4 도미노 피자 등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했다. 필리핀 대학생들은 학교를 졸업하고 25세부터는 아르바이트를 할 수가 없다. 필리핀에서는 25세가 넘으면 아르바이트를 하더라도 다양한 서류를 구비해야 하는 등 계약이 복잡해진다. 고용주 입장에서 다양한 서류를 시청에서 일일이 확인받아야 하기 때문에 채용을 꺼린다. 이와 같은 이유로 필리핀 아르바이트생의 정년은 25세이다. 25세 이상이 된 청년들이 갈 수 있는 직장은 그 공급이 극히 제한적이다. 외국계 기업체 사무직이나 생산직이 대부분이지만 그마저 들어가는 문이 좁다. 이렇듯 자국에서 청년 일자리 수요를 감당하지 못하기에 필리핀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25살이 되면 국외로 일자리를 찾아 떠난다. 로살리의 이모와 언니들도 호주, 일본, 홍콩 등지로 일자리를 구해 나갔으며 오빠도 사우디아라비아에 취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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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과 이주

2002년 8월, 이수범이 필리핀으로 맞선을 보러 갈 때 어머니는 반대를 했다. “주위에 한국 여성들이 얼마나 많은데, 굳이 외국까지 나가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수범은 좋은 여성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필리핀 비행기를 탔다. 필리핀에서 가이드와 만난 뒤, 먼저 맞선 장소에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맞선을 보기로 했던 여성은 혼자 가면 험한 꼴을 당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여 친구와 함께 왔다. 그 친구가 바로 지금의 아내인 로살리이다. 맞선 상대는 경제적인 조건을 우선시 하였고, 이에 이수범은 ‘내가 돈을 벌지 못하는 상황이 닥치면 이 여성이 나를 떠날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 여성과의 만남을 거절하였다. 그렇게 맞선이 끝나고 난 뒤,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예약하러 다시 공항으로 향하는 길에 자꾸 로살리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이내 이수범은 로살리와 만남을 가질 수 있도록 주선해 줄 것을 가이드에게 부탁하였다. 반면 로살리는 한국 남성과 결혼하는 것에 대하여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하지만 이수범의 적극적으로 대쉬하는 모습과 외모에 반하여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하였다. 로살리 역시 데이트를 할 때 항상 친구를 대동하였는데, 처음 보는 남자를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수범은 로살리를 반드시 잡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으며, 한국으로 돌아가는 일정을 2주 뒤로 미뤘다. 만남을 거듭할 수록 이수범과 로살리는 서로에게 이끌렸다. 이내 이수범이 정식으로 로살리에게 프로포즈를 하였고, 결혼 승낙을 받아 내었다. 로살리가 국제 결혼을 결심한 결정적인 이유는 ‘부모님을 위한 마음’이었다. 한국에서 돈을 많이 벌어서, 9남매를 키우느라 항상 가난하게 살아온 부모님에게 효도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전에 로살리는 호주로 이주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필리핀에서는 일자리가 부족하여 취업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호주에는 로살리의 이모가 이미 정착해있었기 때문에 의식주를 걱정하지 않고, 일만 하면 되는 조건이었다. 그러던 중, 친구 따라 나간 자리에서 우연히 이수범을 만났고, 그의 성실성과 잘생긴 외모, 한국살이의 비전, 그리고 한국 남성의 적극성에 반하여 결혼을 승낙하였다. 결혼 승낙을 받기 위하여 처음 이수범을 집으로 데려갔을 때, 로살리의 식구들은 모두 반대했다. 한국남성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필리핀 사회에서는 당시 한국 남자와 결혼하면 클럽으로 끌려가거나 팔려간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돌고 있었다. 이와 같은 이유로 가족들은 반대를 하였지만 로살리는 필리핀을 떠나고 싶었으며 한국에 성공적으로 정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수범 역시 열심히 가족을 설득하였다. 결국 가족들의 승낙을 받아낸 두 사람은 본격적인 결혼 준비를 시작하였다. 로살리는 어릴적부터 반드시 운명적인 사람과 결혼해야한다고 생각해 왔다. 그녀는 이수범이 자신의 운명인지 아닌지를 비자 발급 여부를 두고 판단하기도 하였다. 한국으로 가기 위하여 비자 발급을 신청하였을 때, “비자가 발급되면 이 사람이 내 운명이고 비자가 취소되면 이 사람은 내 운명이 아니다.”라고 생각했다. 다행히도 비자는 바로 발급되었으며 2002년 9월 이수범과 함께 한국으로 이주하였다.



필리핀 상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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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과 화해

로살리가 마주친 한국의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서로 다른 문화, 동남아 여성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 입에 맞지 않는 음식, 언어 차이로 인한 소통부재 등 여러 문제에 부딪혔다. 이러한 상황에서 로살리는 한국 문화에 적응하기도 전에 고부갈등부터 겪게 되었다. 이수범은 고부갈등이 지속되자 임신 중인 로살리가 마음의 안정을 찾길 바라는 마음에서 한 달간 필리핀 친정으로 그녀를 보냈다. 결국 로살리는 필리핀에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3개월간 머물렀다. 한국으로 돌아온 로살리는 여전히 이수범 모자가 이야기하는 것을 자신 때문에 싸우는 것으로 오해하였고, 자신을 인격이 없는 로봇처럼 대한다고 생각하였다. 2003년 5월 1일, 두 사람은 이혼을 결심하였다. 이혼 후, 이수범과 모친은 로살리에게 아이를 지우고 필리핀으로 돌아갈 것을 권유하였지만 로살리는 필리핀에 있는 부모님에 대한 죄송함과 혼자서도 키울 수 있다는 생각에 아이를 지우지 않았다. 로살리는 처음 한국에 왔을 때 인연이 닿았던 대전에 거주하는 필리핀 친구 바네사에게 연락을 하였다. 이들 부부는 서로 떨어져 있는 상황에서도 지속적으로 연락 주고받았다. 이수범은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의 결정이 후회되고, 로살리에 대한 걱정이 커져만 갔다. 2003년 7월 27일, 로살리는 친구들의 끈질긴 설득과 뱃속의 아기를 생각하여 재결합을 결심하고 거제로 내려왔다. 부부는 어머니의 마음을 돌리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였지만, 이수범 모친의 마음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로살리는 시어머니와 더 많은 대화를 하기 위하여 다른 이주 여성보다 더 열심히 한글을 배웠으며, 한 달에 두 번은 주말을 이용하여 부산으로 찾아가서 대화를 시도하였다. 이러한 노력과 함께 이들 부부가 상진이를 잘 키우고, 부부 간에도 잘 지내는 모습을 지켜본 시어머니는 2년이 흐른 뒤 이들의 관계를 인정하였다. 현재는 여느 가족과 마찬가지로 좋은 고부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살림살이 관련 로살리 운전면허 시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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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응과 정착

로살리는 한국사회에 적응하고 성공적인 정착을 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남편을 위하여, 아이를 위하여, 그리고 자신을 위하여 한국사회에 성공적으로 정착하고 싶었다. 이를 위하여 로살리는 가장 먼저 한국어를 익히기로 하였다. 한국어 교육 관련 서적을 구입하여 밤낮으로 공부를 했다. 혼자서 하던 한국어 공부가 한계에 부딪힐 때쯤, 거제에 다문화가정지원센터가 생겼다. 로살리는 남편에게 부탁하여 한국어 교육 프로그램 수강을 등록하였고, 이에 꾸준히 참여하면서 점차 한국어 실력이 안정되어 갔다. 무엇이든 빨리 배우고, 성실했던 로살리는 다문화센터의 모범생이자 에이스가 되었다. 2006년 9월에는 경상남도 여성결혼이민자 직업능력개발 및 지원사업에 참여하여 교육을 수료하였으며, 2010년 12월에는 경상남도 진주 한국국제대학교에서 원어민강사양성과정을 수료하였다. 이 결과 2011년 3월부터 초등학교 영어 보조강사로 재직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로살리는 현재 신현읍에 위치한 제산초등학교에서 영어 보조강사로 재직하고 있다. 로살리는 취업 후, 출·퇴근과 딸 수진이의 등·하교를 위하여 운전면허 시험에 도전하였다. 2012년 6월, 운전면허시험에 응시하였고, 두 번의 도전 끝에 6월 29일 운전면허를 취득하였다. 로살리는 귀화조건이 만족되는 2005년 12월에 귀화 신청을 하였으며, 이후 서류 심사를 거쳐 2006년 1월 13일 한국인으로 귀화가 결정되었다. 로살리는 귀화를 하였고, 취업을 하였으며, 운전면허증도 취득하였고, 한국말도 잘하며 심지어 한약도 즐겨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성공적인 정착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한국에서 살아가기 위하여 끊임없는 적응을 시도하고 있다. 한국요리를 배우고, 필리핀어 사전과 교차점검하며 한국어 실력 증진에 힘쓰며, 정규직 교사가 되기 위하여 학습법 개발에도 열심이다. 여전히 필리핀 영화와 소설책을 즐겨보며 필리핀의 라디오 방송을 듣는다. 또한 자식교육을 신경 쓰고, SNS를 통해 쇼핑 할인 정보를 접하여 알뜰히 가계를 운영해 나가는 필리핀댁 거제 아줌마이다.



날도자 로살리 학교 수업(생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