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식은 1936년 일본 ‘미오군 미에껜 고모노’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호적상 1938년에 태어난 것으로 되어있다. 부친 김몽룡(1901~1945년)은 조사지의 한탄강을 경계로 남쪽인 갈말읍 토성리가 고향이다. 시대적인 분위기랄까 당시 부친은 우리나라에서 건달 생활을 했다. 김두식의 모친과 결혼 후 3일 만에 일본 오사카로 자리를 옮겼다. 일본 오사카에서는 제사 그릇을 만드는 공장에 서기로 근무하다가 해방되던 해인 1945년에 일본에서 돌아가셨다. 모친인 이오덕(1913~2009년)은 이길리와 정연리의 경계인 기린동[현. 정연리]에서 태어났다. 이오덕의 부친은 ‘이 별감’으로 불렸으며, 당시 많은 땅을 보유한 지주 집안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자식들의 이름이다. 모친인 이 오덕은 이별감댁의 다섯째 딸이다. 이 별감 댁에는 다섯명의 딸이 있었 는데, 그 이름이 첫째는 ‘일득이’, 둘째는 ‘이득이’, 셋째는 ‘삼득이’, 넷째는 ‘사득이’, 다섯째는 ‘오득이’라고 한다. 그래서 모친의 이름은 다섯째인 ‘이오덕’이다. 17살 되던 해에 토성리에서 제보자의 부친인 김몽룡과 결혼하여 일본으로 이주해 생활을 했으며, 일본에서는 방직공장을 다녔다고 한다. 1945년 해방 후 김두식은 부친의 유골을 가지고 우리나라로 들어왔다. 김두식의 제보에 의하면, 당시 재뽕[유골]을 지고 모친과 동생을 데리고, 모친의 고향인 기린동에 들어왔다. 당시 외가집인 기린동에서는 부친의 유골을 집으로 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집밖의 디딜방 앗간에 유골을 매달아 놓고, 한식이 지난 후에야 현재 모신 곳으로 매장했다. 일본에서 태어난 김두식은 우리나라에 들어온 이후 우리나라 말을 잘 하지 못했다고 한다. 일본에서 소학교 3학년까지를 다녔기 때문에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정연초등학교[현. 강원학생통일수련원] 3학년 별과에 들어갔다고 한다. 하지만 생계와 따돌림으로 바로 학업을 포기했다고 한다. 따돌림은 우리나라 말을 잘 못해서이다. 김두식은 학업을 중도에 포기한 것에 대한 아쉬움은 없는 듯하다. 그 이후 한국전쟁 때 까지 정연리에서 농사를 지었으며, 이 때 농사에 관한 기억이 아직까지도 남는 것 같다. 김두식은 자신의 천직을 농사꾼으로 알고 있다. 1950년 6월 25일에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하지만 김두식의 기억은 한국전쟁 의 발발보다는 미군이 진주한 이후의 기억이 생생하다. 한국전쟁 이전에 이 지역은 북한의 정치체제에 속하다 보니, 한국전쟁 중 미군이 들어오는 시기 에 대해서 기억이 생생하다. 다만, 이 기억을 6·25 한국전쟁으로 기억하고 있다. 전쟁이 시작하기 전 민들레 벌판을 이용해 전차의 기동을 목격했다는 것으로 보아, 한국전쟁 초기 이 지역은 전쟁과 큰 관련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미군이 마을에 들어오기 전 마을에서는 피난을 가야한다는 혼란이 있었던 것으로 증언한다. 다만, 이 때 피난은 남한이 아니라 북한으로의 피난이다. 김두식 뿐만 아니라 마을 주민들의 증언을 토대로 보면, 당시 피난은 미군을 피해서 북한으로 피난 가는 것이었다. 김두식은 북으로 피난가지 않고 마을에 있었으며, 미군이 들어온 이후 남쪽으로 피난을 갔다. 김두식의 피난 경로는 토성리에 모여서 만세교[포천 송우리]를 통해 평택으로 내려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평택에서 다시 천안으로 이동했다. 이후에 수원으로 올라갔다가 수원에서 한해의 겨울을 나고 광나루를 거쳐, 서울, 포천, 가평 현리로 이동한 후 다시 갈말읍 토성리에 들어왔다. 토성리로 들어온 김두식은 1960년 1월에 11사단 문혜리[갈말읍] 공병대에 입대를 했다. 11사단에서 33개월 복무 후 27살에 전역하고 이후부터 계속해서 토성리에서 생활했다. 지금도 김두식은 군입대 동기생들과 연중 모임을 하고 있다. 전역 후 김두식은 27살의 노총각이었다. 제대 이듬해 사진을 통한 윤정숙과의 중매 후 28살 2월 3일에 결혼했다.
윤정숙(1944년생)은 파평 윤씨로 어린 시절에 관한 기억이 별로 없다. 부친 윤유득(?~83세)과 모친 김정렬(?~83세) 사이에서 1남 2녀 중 2녀로 태어났다. 부친과 모친 모두 정확한 출생연도는 기억하지 못하고 있으며, 다만 두 분 모두 83세가 되던 해에 돌아가셨다고 기억하고 있다. 인천에서 태를 버렸다고 모친을 통해 들었기 때문에 고향을 인천으로 기억하고 있으나 정확한 주소와 위치는 알 수 없다. 형제는 위로 7살 위인 언니 윤정순이 있었으며, 4살 아래의 동생인 윤태식이 있었다. 부친 윤유득은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일을 찾아 유랑했다고 한다. 윤정숙이 기억하는 어린 시절은 부친을 따라 다닌 어렴풋한 기억밖에 없다. 윤정숙이 본격적으로 기억하는 시기는 피난 내려오는 시절부터이다. 피난 나올 때는 6·25전쟁 직전 황해도 연백에 있을 때이다. 한국전쟁 직전에 내려왔기 때문에 피난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내려온 시기가 한국전쟁과 맞물려 있어 피난이라고 표현한다. 피난은 황해도 연백에서 전라도 전주까지 내려갔다. 전주 에서 1년간 생활한 후 부친은 보국대에서 100일간 노무자 생활을 했다. 현역으로 입대하지 않은 이유는 당시로서 나이가 많았기 때문이다. 군복무를 대체한 부친은 가족을 데리고 급하게 전주를 떠나 충남으로 이주한다. 당시 마을 이장이 부친인 윤유득을 군대에 다시 보내려 했기 때문이다. 무작정 전주를 떠나온 가족은 충남 당진 쪽으로 방향을 잡고, 합덕과 당진 사이에 위치한 흠실이라는 곳에 자리하게 된 다. 흠실에서 잠시 거주한 가족은 충남 합덕에 정착하게 된다. 이때부터 윤유득 가족은 윤정숙이 시집을 가고, 몇 해 후까지 그 곳에 정착하게 된다. 정착 이라고 해야 소유한 집이나 농토가 없었기 때문에 매우 어려웠다. 합덕에 정착한 이후 결혼 전까지 가족은 움박을 짓고 생활했다가 윤정숙이 시집간 이후 합덕을 떠나 동송읍에 정착하게 된다.
김두식·윤정숙 부부는 1963년 2월 3일에 부부의 연을 맺었다. 부부는 결혼 후 2남 2녀의 자녀를 두었다. 부부는 중매를 통하여 결혼했는데, 중매는 윤정숙의 7촌 김덕근의 주선으로 이루어졌다. 김두식의 군생활과 인연이 되어 중매된 결혼이었다. 윤정숙의 입장에서는 당시 중매자로부터 김두식에 대한 칭찬이 많았다고 한다. 윤정숙은 결혼 한달 전에 충남 합덕에서 결혼날짜를 받아 당시 김두식이 거주하던 토성리로 들어와 중매를 선 김덕근의 집에 머물렀다. 1962년 12월 섣달 마지막에 토성리에 들어온 윤정숙과 김두식은 결혼 전 만남을 갖지 못했다. 결혼을 해야 한다는 말에 들어 왔지만, 당시 윤정숙은 남자를 만난다는 것이 무척이나 두려웠다고 한다. 반면, 김두식은 매일 밤 김덕근의 집에 찾아와 늦도록 기웃거렸다고 한다. 토성리에 들어온 이후 윤정숙의 인기는 매우 높았다. 동내 주민들도 매일 윤정숙을 보기 위해 집에 들렀고, 윤정숙에 대한 칭찬이 매우 높았다고 한다. 결혼식 전 지경리에 가서 약혼식 사진을 찍고, 왕래도 없이 한달 후인 1963년 2 월3일에 전통 혼례로 식을 치렀다. 조사지에서의 전통혼례에는 ‘재뽕치기’라는 풍습이 있다. 재뽕치기[재끄러미]를 하는 이유는 혼례 전에 있었던 좋지 않은 기운을 제거하기 위함이다. 혼례 후 좋은 일이 가득하라는 의미의 재뽕치기는 실제 당사자에게는 좋게 받아들여지지 않기도 했다. 혼례에 사용한 혼례복은 모두 마을 공동으로 사용하던 것이다. 혼례 후 당시 군 부대인 특무대에서 군용차를 보내주어 신랑과 신부를 태우고, 토성리에서 지경리 방면으로 한 바퀴 돌고 혼례식이 끝났다. 결혼 후 토성리에서 남의 집에 세를 얻어 살았다. 요즘도 세를 얻어 사는 서러움이 있듯이, 갖은 서러움을 받았다. 특히, 윤정숙은 ‘토굴’이라는 표현을 한다. 서서 걸어 들어갈 수 없을 정도의 작은 크기에 모친과 새아버지 문씨 등이 어울려 한방에서 살았다. 그렇게 몇 년을 살다가 토성리에 터를 얻어서 흙집을 지어서 살았다. 당시 집은 지금도 터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수수깡을 이용하여 흙을 붙여 지은 집이었다. 세를 얻어 살다가 그래도 자신들만의 보금자리가 만들어진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라고 김두식·윤정숙 부부는 이야기 한다. 하지만 살림살이는 여전히 어려웠고, 하루하루 끼니 걱정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김두식·윤정숙 부부는 어려운 결혼 생활 후 차츰 살림살이가 나아져 1960년대 후반에 토성리에 세 칸짜리 집을 지었다. 세 칸짜리 집을 지은 후 한 칸을 군인가족에게 세를 놓았다. 이 군인가족의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고 있으나 군인가족의 부친이 서울에서 큰 벽돌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 때 군인가족의 소개로 김두식·윤정숙 부부는 토성리를 떠나 서울로 이주할 기회가 되었지만, 당시 김두식의 반대로 토성리에 남게 되었다. 김두식은 농사를 천직으로 알고, 농사를 지으면서 살고 싶다는 주장이 반영된 것이다. 김두식·윤정숙 부부는 1971년 11월 1일 정연리로 입주하게 된다. 정연리 입주시 부부는 한 섬지기의 땅을 소유하고 있었다. 한 섬지기는 논밭의 넓이를 나타내는 단위이다. 한 섬지기는 볍씨 한 섬의 모 또는 씨앗을 심을 만한 넓이로 통상 한 마지기의 열 배로 논은 약 6,600㎡ (2,000평)을 의미한다. 입주 당시 20마지기의 논을 가지고, 소도 여러 마리가 있어 이후부터는 살만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이 논으로 약 80가마의 쌀을 수확했다고 한다. 부부는 땅에 대한 애착이 유별나다. 신혼살림의 어려움으로 농사꾼에게는 땅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부부의 확신이다. 부부는 평생 땅을 사본 경험은 있으나, 땅을 팔아본 경험은 없다. 땅을 늘리는 방법은 가을에 수확을 한 후 그 쌀을 모두 땅을 사는데 투자했다. 그리고 먹을 것이 없기 때문에 장내쌀[고리쌀]을 내어다 먹으면서 버텼다고 한다. 당시 장내쌀의 한 가마니에 3말의 이자를 감당해야 했다고 한다. 그래도 땅 을 늘리는데 수확량을 모두 사용했다. 그리고 부업으로 낭구[나무] 장사를 하고, 소장사를 하면서 겨울을 보냈다. 부부는 땅에 대한 애착심 만큼 자부심도 크다. 처음에 송곳을 세 울만한 땅도 없었는데, 땅을 사고 빚을 갚고, 다시 땅을 사고 빚을 갚기를 반복해 지금의 살림을 일구었다. 정연리에 입주한 후 부부는 1979년에 다시 이길리로 분구를 했다. 당시에는 집을 사고 파는 개념이 부족해서인지, 정연리에 있던 집은 그대로 두고 나왔다.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길리 마을에서 가장 넓은 농지인 3만평의 농지를 보유하게 됐다. 이 때문인지 김두식·윤정숙 부부는 마을에서 나름대로 자수성가 집안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결혼 후 살림살이 외에는 특별한 어려움을 겪지 않았으나, 윤정숙은 두 번의 뇌출혈을 겪는다. 첫 번째는 1983년의 일이다. 이때가 장남 김준원의 초등학교 6학년 때이다. 당시 철원에서 조차 감당을 못하고, 운천으로 나갔는데, 운천병원에서도 윤정숙의 상태를 보고 포기했다. 모두들 마음에 준비를 하라는 말이 있었지만, 김두식의 정성으로 윤정숙은 회복되었다. 당시 김두식으로서는 간절함이 크게 작용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누구보다도 크게 의지하고 곁을 지켜준 사람에 대하여 본인 입장에서는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김두식이 윤정숙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당시로서는 잘해주지 못한 것이 못내 가슴 아팠다고 한다. 그저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곤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지금까지 못해 줬던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도록 간병을 했다. 뇌출혈에 효과가 있는지 알 수는 없으나 김두식의 정성스런 병간호 덕분에 윤정숙은 회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2년 후인 1985년에 또다시 뇌출혈이 왔고, 모든 동내 사람들이 이제는 죽는다고 했으나 몸에 좋다는 것은 모두 찾아내어 김두식은 다시 한번 윤정숙을 회복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