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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삼척시 원덕읍 갈남1리 살림살이

주제 최병록·진숙희 부부의 살림살이
조사 살림살이 이야기, 공간과 살림살이, 통계, PDF

가문의 대들보와 숨은 조력자

부부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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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록은 고향에 자리 잡았지만 남매들은 모두 갈남을 벗어나 삼척시내, 포항, 서울 등에서 거주한다. 그리고 남매들 중 선조를 이은 어업 종사자는 최병록뿐이다. 어업을 지속하며 고향에 남아 부모님을 모셔왔고 2014년 4월 어머니 황을순이 타계하기 전까지 함께 거주했다. 최병록의 부인인 진숙희는 1976년, 가족의 소개로 만나 1년 뒤인 1977년에 결혼했다. 당시 진숙희는 23살, 최병록은 29살이었다. 최병록의 양식업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고 진숙희는 주변 또래에 비해 결혼이 조금 늦은 나이였다. 진숙희는 바다로 나가서 하는 일이 없지만 육지에서의 일을 대부분 맡고 있다. 표면적으로 볼 때 진숙희가 양식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부분이 적지만 일이 진행되는데 필수적인 과정들을 담당 하고 있다. 최병록의 양식어업이 성장하고 경제적으로 안정되면서 생활환경이 점차 나아졌다. 생활공간이 확장되고 추가되었으며 살림살이는 공간 변화에 맞게 재배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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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업을 이어받은 최병록

최병록은 1948년생으로 고향인 갈남에서 현재까지 거주하고 있다. 2014년 현재 만 65세 이며 마을주민의 평균연령대에 속한다. 갈남리에서 유일하게 양식업을 하고 멍게양식 및 멍게종묘 생산을 주로 한다. 최병록은 고향에 자리 잡았지만 남매들은 모두 갈남을 벗어나 삼척시내, 포항, 서울 등에서 거주한다. 그리고 남매들 중 선조를 이은 어업 종사자는 최병록 뿐이다. 어업을 지속하며 고향에 남아 부모님을 모셔왔고 2014년 4월 어머니 황을순이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함께 거주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만 3세였 던 최병록은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지 못한다. 최병록이 가족에게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당시 울진군 평해읍까지 피난을 다녀왔다고 한다. 집에는 큰 피해가 없었지만 가족 중 최병록의 친삼촌이 참전 이후 목숨을 잃어 당시 실종통지서가 남아있다. 전쟁 이후 집안을 일으키던 시기에는 어업으로 얻는 소득이 낮아 경제 사정이 넉넉지 못했다. 오늘날에 비해 하루 수확량이 바다의 기후에 따라 크게 달라지던 때여서 일일 수입의 기복이 컸다. 그래서 남매들은 어려서부터 각자의 미래를 스스로 책임지고자 마음을 먹었고, 힘든 일이 있을 때 서로 도와야 했다. 최병록은 장호초등학교를 졸업했고 재학 당시 4, 5km정도의 거리를 걸어 다녔다. 현재 갈남항에 방파제가 생기기 전 해변을 따라 걸으며 학교를 오갔다. 어렸을 때 친구들과 백사장에서 뛰어다니며 장난을 친 추억이 있다. 모래가 하얗고 바다가 예뻐서 예전 갈남리의 모습이 아주 아름다웠다고 추억한다. 중학교 진학 후에 평범하게 지내다가 졸업 후 고등학교는 진학하지 않았다. 중학생 이후로는 남매들이 각자의 성향에 따라 본인의 미래를 결정했고 최병록은 어업을 길을 걷기로 결정했다. 최병록은 고향에 자리 잡았지만 남매들은 모두 갈남을 벗어나 삼척시내, 포항, 서울 등에서 거주한다. 남매들 중 선조를 이은 어업 종사자는 최병록 뿐이다. 고향에 남아 부모님을 모셔왔고 2014년 4월 어머니 황을순이 타계하기 전까지 함께 거주했다. 집안일을 도와주면서 자연스럽게 어업을 시작했고 일이 최병록의 성격과도 잘 맞았다. 가장 먼저 시작한 어업은 아버지를 따라 잠수기어업을 배운 것으로 이후 본격 적으로 가족의 어업을 이끌었다. 최병록은 20대 초반까지 잠수기선박을 운영했다. 머구리라고 불리는 잠수부나 다이버들이 물질을 하고 바다에서 채취한 해산물을 육지까지 잘 보관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었다. 잠수기어업은 짧은 기간 동안 잠시 했던 것으로 이때는 바다 일을 배우는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어린 나이에 잠수기어업을 한 최병록은 20대 초반, 양식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새롭게 양식어업을 공부했다. 어업을 계속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 중에서도 지속적으로 본인이 업으로 삼을만한 어업분야를 개척하려는 생각이 있었다. 자망과 정치망어업은 이미 마을주민 대부분이 자리 잡고 있었고 잠수부는 많은 위험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에 좀 더 안정적인 어업이 필요했다. 최병록은 어려서부터 다양한 어업분야를 경험해보았고 그러던 중 1970년대 초반 양식을 접하게 되었다.



정치망 어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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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식을 시작하다

최병록은 스물다섯 살(만 24세)이 되던 1972년에 양식을 시작했다. 당시에는 갈남을 비롯한 강원도 동해안에서 양식이 일반화되지 않았다. 한국수산지에 따르면 우리나라 양식은 1700년대부터 시작되었다1고 하나 본격적으로 성장한 것은 1910년대에서 1940년대고 전쟁이 있었던 1940년에서 1960년대 초반 까지는 정체기였다. 이후 1970년대부터 현재까지를 증가기2 로 보는데, 이 증가기에 최병록이 양식을 접했다. 그 전의 동해에서는 정치망 어업을 통한 자연적인 어획이 대부분이었고 양식은 남해에서 먼저 성장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최병록의 동생 최병기(다섯째, 남, 62)가 수산진흥원에 근무하면서 양식에 대한 정보를 접하고 최병록에게 소개 해줘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갈남 부근에서 양식을 처음 시작한 최병록은 사전지식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갈남 앞바다의 지형과 환경에 대해서 잘 알아 양식에 필수적인 부분을 중심으로 공부 하면서 빠르게 기술을 배웠다. 그리고 동생의 도움을 받아 비교적 쉽게 양식어업에 도전할 수 있었고 최병록은 이전의 잠수기어업보다 양식에 더 흥미를 가졌다. 양식은 바 다에 직접 입수를 하는 경우가 거의 없고 바다의 성격을 이해해서 작물을 잘 관리하면 일 정한 수확량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에 이전에 비해 안정적인 어업방식 이었다. 양식을 시 작하면서 최병록은 갈남리에 정착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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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들의출가

최병록은 5남 2녀 중 넷째이다. 일곱 남매는 어려서부터 크게 다툰 적 없고 현재까지 사이좋게 잘 지낸다. 어머니가 갈남리에 거주하고 있기 때문에 명절이나 기념일에는 모든 형제들이 관련 의식은 최소화하고 마을로 모인다. 최병록이 넷째이지만 갈남리에서 양식을 안정적으로 이끌면서 자연스럽게 부모님을 모셔왔다. 형제들은 덕분에 안심하고 타지생활을 할 수 있었고 이에 대해 최병록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남매들은 외지에 있지만 가족 행사가 있을 때 외에도 갈남리에 자주 방문해 여름이면 피서 겸 휴식을 보내고 양식이 바쁠 때 일을 돕는다. 남매들만큼 최병록도 남매들에 대한 우애와 신뢰가 크다. 최병록은 본인의 이야기보다 형제들의 이야기를 할 때 더 자랑스러워하고 즐거워했다. 남매들은 대부분 초등학교 혹은 중학교로 진학하면서 갈남리를 떠났다. 갈남리 근처에는 중학교까지는 교육과정이 마련되어 있지만 고등학교부터는 삼척 시내나 다른 지역으로 진학을 해야 한다. 최병록 위의 형과 누나는 성적이 좋아 장학금을 받으며 고등학교와 대학교에 진학했다. 그리고 동생들은 최병록과 먼저 외지로 진출한 남매들의 도움을 받아 갈남리 밖에서 공부를 했다. 최병록의 남매들은 모두 어린나이에 갈남리를 벗어나 공부해서 자연스럽게 외지에 정착했다. 학력이 높고 좋은 직장에 취직해 각자의 생활을 안정적으로 살았다. 당시에 보기 드물게 7남매 중 3형제가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에 입사했다. 이들이 공부하는 동안 집안이 경제적으로 넉넉했던 것은 아니다. 그래서 서로의 도움이 필요했고 이 과정에서 더욱더 우애 깊은 남매 사이가 되었다. 경제적인 도움이 가장 컸는데 때에 따라 여유 있는 형제가 집을 제공하거나 학비를 거들어줘 서로 원하는 공부를 마칠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최병록의 첫째 형인 최병환은 가족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는 존재였다. 학업성적이 우수했고 군 제대 후 남매 중 가장 먼저 마을을 떠났다. 인하공과대학(현 인하대)에 진학하여 전기공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포스코의 초창기에 입사해 포항에 자리 잡았다. 그 덕에 여동생 최병희와 막내 남동생 최병국은 포항에서 고등학교, 대학교를 진학했고 최병환의 지원을 받았다. 이렇게 일찍이 경제활동을 한 최병환 덕에 최병록을 비롯한 남매가 본인의 흥미에 집중할 수 있었다. 현재 남매들은 포항, 용인, 강릉, 삼척시내 등 여러 지역에 기반을 마련해 거주하고 있다. 대부분 현업에서 은퇴하거나 은퇴 후 개인 사업을 시작해 일을 하는 중이다. 자녀들 모두 문제없이 잘 자라 집안이 화목하다. 최병록은 이러한 집안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큰 역할 을 했다. 고향에 남아 선조들의 어업과 토박이로서의 역할을 물려받고 잘 이행해 집안의 뿌리를 이었다. 그리고 일찍 사회생활을 하면서 남매들의 걱정을 덜어주어 화목하고 안정 적인 집안분위기를 조성했다. 다른 형제들이 사회적으로 모범을 보였다면 최병록은 집안을 지키는 대들보로서 고향을 지키며 든든하게 남매들을 받쳐주었다.



추석 차례 후 가족, 친지 단체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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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식업에 대한 자부심

최병록은 본인이 양식업을 하는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다. 현재 갈남리에서 유일하 게 양식을 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높은 수익을 올리고 있다. 갈남리에서 최초로 양식을 시작해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으며 사업시작 시기가 일러 강원도에서도 최초로 여겨지고 있다. 그동안 여러 어종을 거쳐 현재 멍게 양식에 정착했다. 대부분의 기술이 최병록의 시행 착오와 고민 끝에 개발되고 변형된 것으로 동해바다의 성격에 맞게 발전시켰다. 동해안의 깊은 수심과 단조로운 해안선, 잦은 태풍, 너울성 파도와 같은 요소 들은 양식을 하기에 적합한 조건이 아니다. 그래서 남해와 서해에 비해 동해에는 양식장이 적은 편이다. 그러나 점차 기술이 발전하면서 동해의 양식이 성장해왔다. 최근 한 신문 기사에서는 동해를 양식 불모지로 묘사하며 이를 최근 개발하도록 노력하고 있다는 오늘날의 변화를 보도했다. 한·난류 교차와 조류교환이 활발해 해양생물 다양성을 잘 유지해서 양식 산업 개발의 잠재력이 충분한 청정해역으로서 동해의 성장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다. 이러한 흐름에 따라 동해안에서는 관련 심포지엄개최 및 연구를 지속하며 양식 발전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최병록은 1972년 미역양식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다양한 어종의 양식을 거치면서 본인만의 기술을 보유하게 되었다. 어종별 양식 방법을 이해하고 실현했으며 이를 통해 양식에서 가장 중요한 폐사율을 낮추는 요령을 터득하게 되었다. 그리고 경험을 통 해 얻은 지식과 함께 관련 교육과정에 참여해 얻은 지식을 통해 양식 분야의 전문가가 되려고 노력했다. 양식어업 관련 교육과정 및 학술행사에 참여함으로써 전문성을 높이고 각 분야 전문가와 관련 지식을 공유했다. 이러한 노력에 의해 질 좋은 수확물을 얻어낼 수 있었고 소득이 점차 높아졌다. 동해안 양식의 발전에 도움을 주고 본인 어업에 좋은 결과물을 이끌어내 최병록은 수산분야에서 경력과 업적을 인정받고 각종 수상기록을 남겼다. 최병록은 본인을 ‘수산경영인’, ‘관리자’로 칭하며 기존의 어업인과 차별화했다. 궂은일을 하며 하루 종일 바다생활을 하는 ‘어부’ 혹은 ‘생산자’와는 다른 차원의 일을 한다고 언급 했다. 실제로 최병록의 생활은 일상적인 어업인과는 다르다. 연중 일의 시기가 집중적으로 정해져 있어 비교적 자유롭게 본인 생활을 가질 수 있고 다양한 사회생활을 할 수 있다. 또한 동해안 양식의 ‘초기개척자’로서 양식업 분야에 대한 자신감이 있다. 최병록의 양식 어업은 모범적인 양식사례로 신문기사에 보도되고 대학의 협력연구에 참여하는 등 동해안 양식의 표본으로 여겨진다. 최병록은 본인의 일과 경력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옛 양식장 및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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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숙희의 처녀시절

진숙희는 1954년생으로 고향은 삼척시 원덕읍 노곡리 작진항이다. 작진은 갈남리에서 차 로 30분 정도 걸리는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 있다. 작진과 갈남 모두 동해 해안가 마을로 유사한 풍경을 가지고 있다. 작진의 생업은 반농반어의 형태로 바다일과 함께 마을 밖 평지 에서 농사를 짓는다. 하지만 최근 작진은 한국남부발전의 종합발전단지 3, 4호가 들어올 부지로 선정돼 조만간 사라질 예정이다. 진숙희는 7남매 중 다섯째이고 자매들 중에서 셋째이다. 이들 남매는 집안일을 도우며 자랐는데 농사는 남녀 구분 없이 같이 하고 바다일은 남자 형제들만 했다. 바닷가에 위치한 마을인 작진에는 농사를 지을 땅이 넉넉하지 않다. 그래서 마을 뒷산에 계단식으로 땅을 일궈 논농사를 지었다. 농사와 바다일의 비율이 비슷해 어촌마을이지만 농사를 중요하게 여겼다. 예전에는 꽤 큰 규모의 농사를 지었고 지금은 땅을 묵혀두어 거의 농사를 짓지 않는다. 농사를 지을 사람이 대부분 외지로 나가 노동력이 부족하고 인구가 줄어들어 농사의 필요성이 낮아졌다. 밭농사로는 마을 안에 적은 규모의 밭을 가꾸어서 가족들이 소비하는 식재료를 재배했다. 주로 농사일을 맡아서 한 진숙희는 어려서부터 일손을 도왔다. 예전의 농사는 지금과 달리 사람의 힘으로 해결해야 하는 일이 많았다. 산 중턱에 위치한 논까지 일을 하러 가려면 장비와 비료, 식사 등 필요한 것들을 모두 챙겨들고 가야했다. 논에 도착하기 전에 지친 상태에서 일을 시작하고 마친 뒤에는 다시 물건들을 머리에 이고 집으로 돌아왔다. 진숙희는 농사를 짓던 어린 시절을 가장 힘들었던 때로 기억한다. 가족의 생업인 농사는 당연히 지어야 하는 일이었지만 육체적으로 피로에 시달렸던 것이 무척 고단했다. 진숙희는 농사일에 노동력을 제공하기 위해 중학교 이후의 학업을 중단하고 집안일을 도왔다. 당시에는 학업보다 집안의 생계가 더 중요했기 때문에 형제 중 몇 명이 학교를 그만두는 것은 자연스러운 성장과정이었다. 그 당시에 아쉬움이 더 컸지만 최근에 와서도 꾸준히 공부하지 못한 것에 대해 스스로에게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 자녀들이 공부를 권유하기도 하지만 뒤늦은 공부를 할 생각은 없다. 결혼 전까지 진숙희는 집안일을 도우며 작진항에 살았다. 다른 남매들은 성인이 되고 작진을 떠나 삼척 시내나 다른 지역에 자리를 잡았지만 진숙희는 작진에 남았다. 결혼이야기가 나오기 전까지 외지 생활에 대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생각을 해본 적도 없다. 부모님의 일을 도와가며 고향에 사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이런 점에서 최병록과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다. 현실의 삶에 충실하고 만족하는 것에서 부부의 모습이 닮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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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1976년, 가족의 소개로 만난 최병록과 진숙희는 1년 뒤인 1977년에 결혼했다. 당시 진숙 희는 23살, 최병록은 29살이었다. 최병록의 양식업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고 진숙희는 주변 또래에 비해 결혼이 조금 늦은 나이였다. 이들은 1976년 이전에 한 번 더 결혼 이야기가 오간 적이 있지만 그때는 진숙희가 결혼에 대한 생각이 없어서 무산되었다. 이후 몇 년 뒤 다시 집안 간에 이야기가 나와 만난 이후 결혼을 결정하게 되었다. 처음 결혼 이야기가 오갔을 때, 나이가 어리고 친구들도 시집을 안가서 진숙희는 결혼을 하고 싶지 않았다. 몇 년 이후 고향 친구들이 모두 시집을 가고 나서야 결혼을 생각하게 되었다. 가족들은 진숙희의 결혼 결정을 돕기 위해 노력했다. 작은 어머니의 소개와 주변 가족들의 인증으로 최병록과 결혼을 결심하게 되었다. 양 집안이 어업에 종사하기 때문에 진숙희보다 가족이 먼저 최병록과 이야기를 나눠볼 기회가 있었다. 그래서 몇 차례 가족들이 만나보면서 결혼 전에 가족들이 최병록을 검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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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력자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1978년에 최병록이 멍게양식을 시작했다. 진숙희는 바다 일을 처음 하게 되었는데 바다에는 나가지 않고 육지에서의 일만 도왔다. 결혼 기에 양식 일을 돕기 위해 한 번 배에 탔었지만 생각보다 뱃멀미가 심해 그 후로는 배를 타지 않았다. 뱃멀미는 처음 어업에 임하는 사람들의 고민 중 하나인데 대부분 멀미약을 먹으며 버티거나 익숙해지도록 기다린다. 어촌에서 결혼 이후 바다 일을 처음 하는 여성들은 초기 적응 기간에 육체적으로 많은 고생을 한다. 과거 여성들은 바다에 대한 풍속으로 인해 배를 탈 수 없었다. 하지만 점차 금기가 약해지자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결혼 이후 여성이 뱃일에 참여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진숙희는 바다로 나가지 않지만 육지에서의 일을 대부분 맡고 있다. 은행 계좌를 관리하며 노동력과 인건비, 식사 등을 제공하고 항구에서의 일을 돕는다. 항구에서의 일은 양식에 사용될 줄을 정리하거나 판매용 멍게를 선별하는 작업 등이다. 일에서 뿐만 아니라 가정의 소득 관리를 진숙희가 하고 있으며 사용 내역은 부부가 서로 공유한다. 표면적으로 볼 때 진숙희가 양식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부분이 적지만 일이 진행되는데 필수적인 과정들을 담당하고 있다.최병록은 진숙희를 농담 삼아 ‘상무’라고 부르며 육지에서의 일을 믿고 맡긴다. 수입과 지출관리가 명확하고 철저해서 걱정이 없고 어업에만 집중할 수 있게 도와주기 때문에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 필요할 때에만 외부 노동력을 추가해서 사용하고 대부분의 일은 두 부부의 힘으로 해결하기 때문에 서로의 협력이 중요하다. 이런 부분에서 최병록과 진숙희는 오랜 어업으로 일의 분배가 명확하고 호흡이 잘 맞다.



단오_갈남 한마음 잔치 음식준비_성게 손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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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이자 며느리 진숙희

최병록과 진숙희의 자녀는 1남 2녀로 현재 모두 외지에 있다. 첫째 딸 최선화와 둘째아들 최승렬은 서울에 함께 있고 셋째 최선영은 2010년 결혼해 수원에 거주 중이다. 자녀들은 대학 진학 혹은 졸업 이후 각자의 자리를 찾아 나갔다. 자녀들이 외지에 자리 잡을 때까지 진숙희가 이들 교육환경에 따라 장소를 옮기며 10여 년간 뒷바라지를 했다. 갈남리 근방에는 고등학교가 없기 때문에 자녀들이 진학을 위해선 갈남리를 벗어나 삼척시내로 나가야 했다. 그래서 시내에 집을 새로 얻어 자녀와 진숙희는 한동안 따로나와 살았다. 자녀 교육 때문에 1995년부터 삼척 시내와 갈남리에 가족이 나뉘어서 살게 되었고 진숙희는 양쪽 집을 오가며 생활해야 했다. 양쪽의 살림을 관리하고 자녀들의 식사와 생활을 돕기 위해 삼척시내로, 양식을 위해 갈남리로 다녔다. 진숙희의 주생활공간은 자녀가 있는 삼척시내였고 양식장으로 매일 출근해 일을 도운 것이다. 이 시기는 가리비 양식을 하던 때였는데 일이 많아 바쁠 때에는 진숙희가 매일 다녀야 했다. 시내버스 새벽 첫차로 갈남리에 들어가 일을 하고 오후 다섯 시에 시내 집으로 나와 자녀들의 도시락을 쌌다. 이는 이동시간이 편도 40분, 왕복 1시간 20분이 걸리는 적지 않은 거리다. 2003년 셋째 딸까지 대학에 진학하면서 진숙희의 생활이 점점 편해졌다. 첫째와 둘째는 강 원도 소재의 대학에 다녔고 셋째는 서울 소재 대학에 입학했다. 두 자녀가 삼척시내의 집에 서 대학교를 다녔고 둘째 아들이 학부과정 중 군 복무를 해 진숙희는 2000년대 후반까지 두 집을 다녔다. 졸업 이후 남매가 모두 서울로 취직하면서 최근 시내의 집이 비게 되었다. 현재 시내 아파트는 자녀들이 고향에 올 때 들러 쉬는 곳이다. 그리고 계절에 맞지 않는 옷과 필요 없는 물건들을 모아 두는 창고역할을 하기도 한다. 현재 아파트에 상주하는 사람은 없지만 진숙희가 종종 들러서 관리를 해 집 상태가 깨끗하게 유지되고 있다. 자녀 뒷바라지와 함께 시부모를 모시는 며느리의 역할도 충실히 했다. 최병록이 갈남리에 남아 부모를 모시면서 진숙희도 결혼 후 자연스럽게 시부모와 함께 살았다. 진숙희는 시부모를 모시는 것은 물론이고 이후 노환으로 아픈 시아버지의 병간호를 맡아서 했다. 시아버지 최인수는 1980년대 후반 위암 판정을 받아 수술을 하고 거의 완치 상태에 이르렀다. 하지만 1990년대 초반 다시 암이 재발하면서 추가적 치료는 진행하지 않고 집에서 요양했다. 최병록은 진숙희가 시부모를 모시면서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고 고생한 것에 대해 고마움과 미안함을 느낀다. 그런데 진숙희는 오히려 고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불평이 없다. 며느리로서 도리라고 생각하며 힘든 일이라기보다는 당연한 일로 여겼다. 여러 가지 집안일을 동시에 할 때 체력적으로 힘든 것은 있었지만 이는 지나면 잊히는 일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1993년 최인수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시어머니 황을순을 모시고 살아왔다. 황을순도 1985년 위암 수술을 했지만 완치가 돼 최근까지 모시고 살았다. 진숙희는 최병록의 조력자이자 자녀들의 어머니, 시부모의 며느리로서 주어진 역할을 덤덤히 수행해왔다. 결혼한 여성들의 당연한 역할일지도 모르지만 힘든 일이 오랜 시간 쉬지 않고 이어지면 지치거나 불만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진숙희가 덤덤하게 지내올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삶은 잠시 접어두고 각 역할을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진숙희는 주변 사람에 휘둘리지 않고 가족의 일에만 집중해 충실하게 살아왔다.



음식_고리매 손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