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내리에서 처음 사람이 살기 시작한 시점은 천년고찰(千年古刹) 법주사의 역사만큼 오래되었다. 553년에 창건된 법주사나 속리산을 방문하기 위해 말티고개(馬峙岺)를 닦은 고려 태조의 이야기 등을 통해서 삼국시대 이래로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사내리에 사람이 살았던 시점과 현재 자리 잡고 있는 자연마을 형성 시점을 동일하게 볼 수는 없다. 마을의 형성과 쇠퇴는 역사의 흔적에서 수없이 반복되어 왔기 때문이다. 사내리의 인구 구성 등 마을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지리지는 18세기 중·후반에 편찬된 『여지도서』(1759)이다. 그 이전의 지리지는 대개 군현단위로 통합해서 기록되어 있으며, 방리(方里) 현황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또한 대동여지도를 포함하여 조선 후기에 양산된 고지도(古地圖)에도 속리면(俗離面)이라는 지명과 법주사, 속리산 등의 지명은 적혀 있지만 마을 단위의 기록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여지도서』의 기록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여기에서 사내리는 ‘舍乃洞里’로 표기되어 있으며, “관아에서 동쪽으로 30리이다. 호적에 편성된 민호는 28호이다. 남자는 45명이며, 여자는 49명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후에 발간된 지리지에도 대동소이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충청도읍지』에는 사내동리는 “관문으로부터 동쪽으로 30리 호수는 31호, 남자는 69명 여자는 52명이다.”라고 적고 있으며, 『충청북도각군읍지』에는 사내동(舍乃洞)으로 지명이 호수나 인구 구성 등에서는 『여지도서』와 큰 차이가 없다. 『호구총수』(1789)에도 사내동리(舍乃洞里)의 지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들을 통해 최소한 18세 중반부터 사내동(사내골)이라는 자연마을이 형성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마을주민의 증언을 통해 조사된 자연마을의 형성 시점도 위의 기록과 비슷하다. 현재 사내리에서 가장 오래된 자연마을인 사내골(현 사내1리)은 18세기 중반 정도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 하고 있다. 촌로(村老)들에 의하면, 사내골 토착민 중 가장 오래 된 성씨인 동래 정(鄭)씨가 현재까지 7~8대 정도 내려오고 있는데, 이를 연수로 계산하면 200~250년 정도로 지리지에서 기록된 시점과 유사하다. 즉, 문헌기록과 마을주민의 증언을 종합해볼 때, 사내골 자연마을이 형성되어 정착한 시점은 18세기 중반 정도로 보는 것이 타당한 것으로 사료된다. 사내골은 지금까지 사내리에서 마을의 터가 변하지 않은 유일한 자연마을로 남아 있으며,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여러 자연마을을 대표하는 마을로 자리 잡았다.
청주나들이(현 사내2리 일부지역)라는 지명은 청주로 나가는 길목으로 갈림길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것으로 청주를 왕래하던 이들을 상대로 근대까지도 상당수의 주막들이 밀집하였던 곳이었다. 이런 지명과 주막의 존재는 마을의 형성 시기를 유추해볼 수 있는 근거이기도 하다. 주막은 조선사회가 점차 상업과 도시가 발달하면서 사람들의 왕래가 잦아지기 시작한 시점부터 늘어나기 시작했다. 주막이 밀집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는 것은 곧 그 시점이 빨라야 조선 후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사내리라는 지명이 법주사와 마을이 이어졌다는데서 연유한다는 의미라고 볼 때 법주사 아래 자리 잡은 청주나들이는 사내골의 형성 시점과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
새텃말은 말 그대로 새로운 터에 생긴 마을로 『한국지명총람』에는 1907년에 신설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새텃말은 한자로 신기(新基)로 표기하는 경우가 있으나 『조선지지자료』(1910년)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이후 편찬된 『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 일람』의 기록에는 동구리(洞口里)로 표기되어 있다. 특히, 『조선지지자료』에는 새텃말에 주막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새텃말은 청주나들이나 사내골로 들어가기 위한 길목에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할 수 있다.
민판동(民判洞)은 사내골과 더불어 가장 오래된 자연마을로 꼽히는 곳으로 조선시대 초기 황참찬이라는 인물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살던 곳으로 백성을 잘 다스린 판서가 머물고 묻힌 곳이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 민판동은 사내3리에 해당되는 곳이지만 과거에는 사내골과 별도로 구분된 독립된 자연마을이었다. 민판동은 여적암 아래 자리 잡은 20호 남짓의 작은 규모의 마을이었고, 사내골에서 약 3km정도 떨어져 있었다. 게다가 여적암골 가장 안쪽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어서 외부로 나오기 위해서는 사내골을 지나치거나 수정봉을 넘어 법주사 방향으로 내려와야만 했다. 이러한 고립된 지리적 여건은 마을주민이 더 단합을 할 수 있는 배경이었고, 실제로 복조리 제작을 합동으로 하는 등 민판동 주민의 생업활동에도 영향을 주었다.
청주나들이나 민판동 등과 같은 자연마을의 지명유래에 대해서 마을주민이 대개 한 곳으로 의견이 모아지는 반면, 사내리에 대해서는 마을 내 주민들이나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하다. 우선 마을이 법주사와 같이 있어 사내리의 ‘사’를 ‘寺’로 해석하여 ‘절 안의 마을(寺內)’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다. 현재 『네이버 백과사전』에 표기된 사내리의 한자도 이와 같으며, 이영택(1986)은 ‘舍乃’는 원래 ‘寺內’였던 것이 바뀐 것으로 판단하였다. 『한국지명총람』(1970)에서는 한자는 올바르게 표기하고 있지만 해석은 “법주사가 있으므로 사내골 또는 사내동이라 하였다”고 봄으로써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다. 다음으로는 본래 사내골 뒤쪽으로 사내사(舍乃寺)라는 절이 있어 지명에 영향을 받았다는 입장이다. 이러한 내용은 현 속리산관광안내소 옆에 위치한 사내리 마을 유래비에 적혀 있으며, 마을 토착민 중 한 명인 박용주(남, 1927년생)도 이와 같은 의견을 개진하였다. 이 의견은 역시 해당하는 절은 다르지만 사내리가 사하촌(寺下寸)이라는 배경에서 유래를 찾고 있다. 마지막으로 사내리는 “집이 이어져 내려온 마을”로 해석하는 경우다. 한문 그대로 집들이 법주사로부터 이어져 내려와 형성된 마을이라는 뜻이다. 이에 대한 근거로 문찬조(남, 1938년생)에 따르면, 도시계획 이전인 1960년대까지만 해도 사내리 전답이나 개천 바닥에도 절터나 집터에서 발견할 수 있는 사기조각이나 기와조각 등이 자주 발견되었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까지만 해도 사내골, 청주나들이, 새텃말, 민판동 등 4개의 자연마을로 구성되던 사내리는 해방 이후부터 6·25전쟁 전후시기에 새로운 마을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속리산 일대의 다른 마을처럼 사내리에도 피난민들이 정착한 것이다. 당시, 속리산 일대의 피난민들이 많이 몰린 것은 『정감록(鄭鑑錄)』의 영향이 컸다. 『정감록』은 조선시대 이래 민간에 널리 유포되어온 대표적인 예언서였고, 특히 일제강점기부터는 서북지방을 중심으로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조선 후기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쳐 6·25전쟁까지 사회적으로 큰 혼란이 야기되면서 현실을 도피할 수 있고 안전한 곳으로 대피함으로서 불안한 민심을 해결할 수 있는 십승지(十勝地)로 이주하는 이들이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속리산의 증항(甑項)은 십승지 중 하나였기 때문에 많은 피난민들이 속리산의 입구인 사내리에도 몰려들었다. 사내리에서는 ‘소리목’과 ‘아우너미’(아우동)에 많은 피난민들이 정착하였다. 두 지역은 산속 골짜기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특히 소리목은 화전을 일구기에 적합하여 생활터전이 없는 피난민들이 정착하기에 좋았다. 어떤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농사를 짓는 사람보다 화전 경작이 수확량이 좋아 더 잘 사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유근식(남, 1948년생)에 따르면, 소리목은 소로목 또는 시루목이라고도 부르는데, 시루목이 한자로 증항(甑項)이라는 점에서 『정감록』에서 말하는 증항이 바로 이 지역이라고 주장하였다. 물론 소리목은 근대 시기에 발행한 지도에 송현(松峴)이라고 표기되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이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많은 피난민들이 소리목에 거주했다는 것은 피난민들이 소리목을 십승지로 생각했을 수도 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소리목에 살았던 사람들은 화전정리가 실시되었던 1970년대 중반부터 홍수 피해를 입은 1980년대에 고개 아래 수정동으로 내려왔다. 지금도 소수이지만 수정동을 중심으로 당시 정착했던 피난민들이 거주하고 있다.
1970년 도시계획은 사내리의 자연마을이 완전히 재편되는 결정적인 계기였다. 도시계획을 실시하게 되면서 청주나들이 오리 숲에 위치했던 기존 구상가를 완전히 철거하고 청주나들이와 아우너미 일대에 있는 가옥들도 전부 이전하게 되었다. 새텃말 일대에 신상가가 들어서면서 당연히 새텃말에 있던 가옥들도 이전하게 되었다. 이러한 도시계획을 통해 골짜기를 중심으로 흩어져 있던 주거지역이 사내천을 경계로 하여 사내골 일대에 광범위하게 넓어지게 되었다. 청주나들이와 아우너미, 소리목 주민이 모인 수정동은 기존의 자연마을인 민판동이나 사내골보다 더 큰 규모의 마을을 형성하게 되었다. 사내5리도 아우너미 주민 일부와 새텃말 주민이 이주하면서 새로운 마을이 형성되었다. 따라서 도시계획 당시만 해도 사내1·2·3리로 구분되어 있었던 사내리는 이후 사내1리에서 사내5리가, 사내2리에서 사내6리가 사내3리에서 사내4리가 각각 분리되었다.
1980년 이전부터 사내리에 거주하고 있었던 주민이라면 7.22라는 숫자를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1980년 7월 22일, 보은 지역을 강타한 폭우로 인해 사내리 전체가 물에 잠긴 날이기 때문이다. 사내리는 천왕봉에서 내려오는 사내천이 마을을 관통하고 있기 때문에 항상 수해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진 이날은 사내리가 또다시 새롭게 재편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사내3리에서 가장 큰 건물이었던 마을회관이 부서질 정도로 산사태의 위력은 대단하였다. 운 좋게 살아남은 몇몇 건물을 제외하고 사내3리의 모든 가옥들은 흔적조차 남지 않고 떠 내려가게 되었다. 무엇보다 가장 심각한 것은 홍수로 인하여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것이었다. 현재 사내리 주거지역의 가옥들 중 1980년대 이전 건물은 거의 남아 있지 않은데, 모두 홍수 피해로 인해 새로 건물을 지었기 때문이다. 특히, 사내3리는 마을 전체가 터를 옮길 정도로 상황이 심각하였다. 본 터에 새롭게 집을 짓기에는 당장 복구 작업도 어려웠고, 홍수 피해의 위험이 여전히 있었기 때문에 약 5리 정도 마을 밑으로 내려와 마을을 다시 형성하기로 하였다.
사내리를 비롯한 속리산면은 우리나라의 정중앙에 위치해 있다. 이런 지정학적 위치는 사내리가 예전부터 교통의 중심지로 자리 잡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사내리에서는 이런 지정학적 위치를 빗대어 마을을 ‘구구십리’라고 불렀다. 인근에 있는 상주, 대전, 신탄, 청주, 문경, 영동, 옥천, 괴산 등 큰 고을들과의 거리가 구십리로 비슷하고 모두 통할 수 있는 중심에 위치해 있다는 것이다. 실질적으로 이러한 고을과의 거리가 구십리(약 35km)이지는 않으나 대전 68km, 청주 69km 등 인근의 큰 도시와 거리가 비슷하다는 점에서 상징적으로 어느 정도 설득력 있는 표현이라 볼 수 있다.
사내리의 길을 설명하는데 있어 말티고개(馬峙岺)는 가장 먼저 언급해야 하는 길이다. 비록 사내리에 위치한 고개는 아니지만 예전부터 속리산과 법주사를 방문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관문이었고, 2006년 속리터널이 개통되기 전까지 보은에서 속리산으로 들어오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사내리로 관광을 온 대부분의 사람들은 말티고개로의 진입을 속리산 여행의 시작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고려 태조 왕건이 닦았다는 말티고개는 속리산면과 장안면 경계에 있으며, 해발 800m의 높은 고개이다. 태조 행차 후 얇고 넓은 박석을 깔았다고 하여 박석재라고 부르기도 하였으나, 현재의 명칭은 조선 세조가 복천암을 가기 위해 고개를 넘다가 고개가 너무 가팔라 연(輦)에서 내려 말로 갈아탔다는데서 붙여졌다. 말티고개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으로 "마현박석(馬峴薄石)은 고을 동쪽 15리에 있다. 고개 위에 얇은 돌이 3~4리 정도 깔려 있는데 세상에 전하는 말로는 '고려 태조가 일찍이 속리산에 거둥했을 적에 닦은 어로(御路)다.'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대동여지도에는 마현(馬峴), 해동지도와 1872년 지방지도에는 마치(馬峙)로 표기되어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조선지지자료』에는 마치(馬峙), 한글로는 ‘말틔’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봤을 때, 지명은 큰 변화 없이 유지되어 온 것을 알 수 있다. 말티고개는 구절양장(九折羊腸)이라는 표현으로 자주 인용 되곤 하는데, 말 그대로 하면 아홉 번 굽어진 양의 창자, 비유적으로는 꼬불꼬불한 험한 산길을 뜻한다. 말티고개는 실제로 열두 굽이 길이며, 상당히 경사가 높고 길이 험하기로 유명하였다. 이렇게 말티고개는 속리산과 법주사로 들어가는 주요 길목이지만 넘어가기 수월치 않은 험한 길이라는 점에서 다양한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사내리는 사내천이 마을을 관통하고 있어 마을과 마을을 잇는 다리를 건설하는 일이 중요하였다. 사내골이나 민판동 주민들은 마을 외부로 나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리를 건너야만 했고, 생업 터전인 논밭도 다리를 건너야만 갈 수 있었다. 하지만 다리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많은 인력과 장비 등이 필요했기 때문에 지금처럼 다리가 많이 있지는 않았다. 1970년 속리산도시 계획 이전까지만 해도 마을의 큰 다리는 법주사 앞에 있는 수정교, 현재 소방서 앞에 있는 속리교 등이 전부였으며, 마을을 잇는 다리들은 대개 소규모였다. 큰 다리는 돌로 건설하였지만 작은 다리는 나무를 이용하여 ‘출렁다리(다리 없이 줄로만 연결된 다리)’로 만들었다. 수정교는 남다리 또는 남교(南橋)라 불렀으며, 돌다리에서 나무다리를 거쳐 1968년에 세워진 현재의 다리는 다시 돌다리로 만들어졌다. 속리교 아래는 판잣집을 지어놓고 사람이 살 정도로 규모가 컸다. 현재도 사내리 마을에서 가장 큰 다리이다. 마을에 있는 다리는 주민의 필요에 의해 스스로 만들어진 경우가 많았다. 현재 사내1리에는 3개의 다리가 상가지역과 연결되어 있는데, 그 중 중앙교와 안민교는 주민이 이전부터 직접 만든 다리였다. 우마차가 지나다닐 수 있는 규모로 제작된 나무다리로 산에서 큰 소나무를 직접 베어다가 제작하였다. 나무다리였기 때문에 쉽게 썩어 끊어지는 일이 빈번하였다. 마을주민에 따르면 소가 거름을 실고 다리를 건너다 다리가 끊어져 죽은 일도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마을에서는 2년에 한 번씩 새롭게 다리를 만들었다.
속리산은 충청북도 보은군과 경상북도 상주시의 경계에 위치한 산으로, 원래 아흔아홉 개 또는 아홉 개의 연봉으로 이루어 졌다고 해서 구봉산(九峯山)으로 불렀고, 신라 때는 속리악(俗離岳)이라고도 하였다. 그밖에도 광명산(光明山), 지명산(智明山), 미지산(彌智山), 형제산(兄弟山), 소금강산(小金剛山), 자하산(紫霞山) 등으로도 불렸다. 속리산에는 팔봉(八峯)·팔대(八臺)·팔석문(八石門)이 있다. 사내리 주민이 속리산을 자랑할 때마다 늘 가장 먼저 언급하는 부분도 바로 팔봉·팔대·팔석문이다. 팔봉은 말 그대로 여덟 개의 봉우리로 천왕봉(天王峰, 1,058m), 비로봉(毘盧峰, 1,032m), 길상봉(吉祥峰), 문수봉(文殊峰, 1,031m), 보현봉(普賢 峰), 관음봉(觀音峰, 982m), 묘봉(妙峰, 874m), 수정봉(水晶峰, 566m)에 해당된다. 팔대는 여덟 개의 큰 돌로 문장대(文藏臺, 1,054m), 입석대(立石臺), 경업대(慶業臺), 배석대(拜石臺), 학소대(鶴巢臺), 은선대(隱仙臺), 봉황대(鳳凰臺), 산호대(珊瑚臺)이다. 마지막으로 팔석문은 여덟 개의 돌문으로 내석문(內石門), 외석문(外石門), 상환석문(上歡石門), 상고석문(上庫石門), 상고외석문(上庫外石門), 비로석문(毘盧石門), 금강석문(金剛石門), 추래석문(墜來石門)이 꼽히고 있다. 팔봉·팔대·팔석문은 속리산을 대표하는 명승지로 많은 관광객이 찾는 명소로 각광받았다. 현재 설계되어 있는 속리산의 등산코스들은 대개 팔봉·팔대·팔석문을 기점으로 구성되어 있다. 속리산은 예부터 작은 금강산이라는 뜻의 소금강(小金剛)이라 불릴 만큼 아름다운 산세로 사랑받았다. 소금강이라는 표현은 『유기(遊記)』에도 대부분 등장하며, 일제강점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속리산을 소개하는 각종 기사나 문헌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고 있다. 소금강과 더불어 등장하는 또다른 표현 중 하나로 팔경(八景)이 있다. 예부터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팔경 중 하나로 속리산은 빠짐없이 등장하고 있는데, 사실 팔경으로 공인(公認)된 것은 1930년대 이후이다. 조선팔경은 일제가 식민 통치의 치적을 널리 홍보하고자 조선에서 경치가 가장 아름다운 명승지를 선정한 것으로 사실 쓰라린 역사의 흔적이었다. 속리산은 이 당시 2위로 당선되어 전국적으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고, 이 시기부터 보다 많은 탐승객들이 방문하기 시작하였다. 속리산 보승회(保勝會)가 조직된 계기도 조선팔경 당선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결국, 조선팔경의 당선은 속리산이 광복 이후,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는데 영향을 주었고, 전국적인 관광지로 자리 잡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법주사는 신라 진흥왕 553년에 의신조사에 의해 창건되고 776년 진표율사가 중창한 것으로 알려진 천년고찰(千年古刹)이다. 이러한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각종 지리지에 동일하게 서술되어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에는 “법을 얻은 제자 중 영수는 영심(永深), 보종(寶宗), 신방(信芳), 체진(體珍), 진해( 珍海), 진선(眞善), 석충(釋忠) 등이고 모두 산문(山門)의 개조(開祖)가 되었다. 한편 각종 지리지에는 법주사와 함께 속리사가 표시되어 있거나 법주사에 대해 설명하면서 속리사로 표시하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속리사라는 명칭도 길상사처럼 법주사의 이전 명칭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그러나 『신증동국여지승람』과 같은 경우는 속리사와 법주사를 별도의 사찰로 표기한다는 점에서 이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는 없다. 법주사는 수차례 중창을 거치며 현재에 이르렀는데, 1630년에 쓰인 법주사 사적에 따르면, 가장 규모가 컸을 때는 건물 60여 동, 석조물 10여 점, 암자 70여 개소가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암자가 모두 소실되어 1626년 각성선사가 중창하였다고 전해진다. 1851년 영의정 권동인이 힘을 기울여 국가적 규모의 중수가 이루어져 현재의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법주사는 단일 사찰 규모로 봤을 때 전국적으로 가장 많은 문화재를 보유한 사찰 중 하나이다. 법주사는 현재 팔상전(국보 제 55호)·쌍사자 석등(국보 제5호)·석연지(국보 제64호) 등 국보3점이 있으며, 보물은 대웅보전(보물 제915호)·원통보전(보물 제916호)·마애여래의상(보물 제216호)·사천왕 석등(보물 제15호)·희견보살상(보물 제1417호)·법주사목조관음보살좌상(보물 제1361호)·철확(보물 제1413호)·신법천문도병풍( 보물 제848호)·법주사쾌불탱(보물 1259호)·법주사소조삼불 좌상(보물 제1360호)이 있다. 그밖에도 시도유형문재는 능인전(시도유형문화재 제232호)·속리산사실기비(시도유형문화재 제167호)·법주사세존사리탑(시도유형문화재 제16호)·벽암 대사비(시도유형문화재 제71호)·선희궁원당(시도유형문화재 제233호)·사천왕문(시도유형문화재 제46호)이 있다.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법주사는 1966년에 사적지로 지정되었다.
사내리에서는 유독 왕이나 대통령과의 일화나 전설이 많이 전해져 오고 있다. 말티고개와 관련하여 고려 태조의 이야기부터 법주사에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 매년 신정 때마다 사내리에서 휴가를 보냈던 박정희 대통령까지 다양한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그러나 그 중에서 가장 많은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는 인물이 바로 세조(世祖)이다. 세조와 관련된 이야기가 많은 이유는 그가 자신의 피부병을 고치기 위해 직접 사내리를 방문했기 때문이다. 야사(野史)에 의하면 세조는 단종을 몰아내고 즉위한 후 알 수 없는 피부병에 시달렸는데, 세조의 꿈속에 나타난 현덕왕후(단종의 어머니)가 세조를 향해 침을 뱉었기 때문이라 전한다. 세조는 전의감을 통하여 좋다는 약과 의원을 총동원하여 치료를 하였으나 허사였는데, 마침 속리산 복천암 물에 씻으면 낫는다는 말을 듣고 불심을 통해 치료코자 속리산에 행차하게 된 것이다. 세조는 청주를 거쳐 회인 → 수한 → 보은 → 대궐터 → 말티고개를 거쳐 상판에 이르렀을 때, 지금의 정이품송(正二品松)에 다다르게 된다. 이 소나무가 정이품송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유래도 세조와 관련이 깊다. 세조가 복천암으로 지나가던 도중 소나무 옆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세조가 축 늘어진 소나무 가지를 보고 “연걸린다”고 염려하자 소나무가 스스로 연(輦)이 걸리지 않게 가지를 들어주었고, 돌아오는 길에는 이 소나무 아래에서 비를 피하게 되자 거듭 기특하게 생각하여 소나무에게 정이품(正二品)의 품계를 하사하게 되었다는 얘기가 정설로 통하고 있다. 그러나 마을 내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는 이와는 사뭇 다른 내용이 전해진다. 상판리에 있는 자연마을 명칭인 진터와 가마골이라는 지명에서 유래되는 이 전설은 『금계필담』에서 전해 오는 내용과 유사하다. 금계필담에서는 세조에게 쫓겨난 공주가 속리산에 와서 정적 김종서의 손자와 함께 생활하는 모습을 세조가 보게 된다는 이야기의 배경으로 정이품송이 나타난다.
한편, 세조는 복천암에서 신미 등 고승들을 모아 법회를 열고 목욕소에서 목욕을 하면서 피부병 치료를 위해 노력하였다. 이어 병세가 호전되자 그는 이를 불은(佛恩)으로 여기고 복천암의 모든 스님을 모아 이에 대해 보상을 내리겠다고 선언하였다. 복천암에 있던 당간지주를 끌고 갈수 있는 곳까지의 모든 산과 전답, 집터를 절에게 하사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승려들이 크게 기뻐하고 사내리 방향으로 돌을 끌고 내려와 약 6km 아래까지 끌고 내려왔으나 여기서부터 더 이상 돌이 움직이지 않았다. 이에 세조는 이만하면 공양미와 식량이 되리라 하고 그 지점에 돌을 세우고 여기서부터 속리산 쪽의 모든 토지를 절땅으로 내려 주었다. 이에 대한 내용은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다. 은구석에 대한 유래나 실록의 기록 등에서 알 수 있듯이 법주사는 왕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찰이었다. 비록 조선시대는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을 통해 불교를 억압하기도 하였지만 세종 6년(1424년) 선교양종(禪敎兩宗)의 36사(寺)로 정비할 때 교종 18사에 속하여 원촉전 60결 가급전 140결로서 총지급전 200결을 지급받고 항거승 100인을 인정받는 등 왕실의 지속적인 지원을 받았다. 조선 후기에도 인조 2년(1624년) 법주사 중창이나 순조 때 작성된 양안(1810년)에 나타난 토지의 규모 등을 봤을 때도 여전히 조선 전기와 유사하게 지원을 받았다. 또한 순조의 태실이 속리산에 봉안되어 있고, 철종 2년(1851년)에 공명첩 700장을 발급하여 사찰을 수리하고, 고종 26년(1889)에 선혜정 상납 가운데 2,500량을 받아 법주사를 수리하는 등 사찰의 유지와 수리에도 왕실의 후원을 계속 받았다. 즉, 법주사는 왕실의 기복을 빌어주고 위패와 태실을 보호해주는 왕실의 원당사찰(願堂寺刹)로서 법주사의 토지 소유는 왕실의 보호 아래 특권적이면서 지주적인 성격이 강하였다. 이런 특수한 상황은 사내리가 조선시대부터 지속적으로 법주사 소유로 편입·유지되는 기반으로 작용하였으며, 사하촌(寺下村)으로 자리 잡는데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은구석의 전설만큼이나 사내리와 법주사의 특수한 관계는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왔다. 특히, 사내리의 모든 토지가 법주사에 예속되어 있었던 만큼 농업을 기반으로 살아가던 사내리 주민들은 이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법주사는 토지를 주민에게 임대하고 이에 대한 임대료를 받음으로서 사찰 재정을 충당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임대료를 어떤 기준과 방식으로 산정하는가에 있는데, 사내리 주민들은 이를 ‘닷품’ 또는 ‘답품’이라 칭하고 있다. 당시 사내리의 농토는 척박한 편이어서 농민의 입장에서는 좋은 논을 배당 받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였다. 척박한 땅에는 거름을 써야했지만 비료가 귀해 산에 있는 참나무 순을 말려 그것을 비료로 쓸 만큼 상황이 좋지 않았다. 따라서 임대료를 조금 더 내더라도 좋은 논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대처승에게 잘 보일 수밖에 없었다. 답품뿐만 아니라 전답의 배분도 대처승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대처승들은 이를 이용하여 좋은 전답을 지정해주거나 답품의 수확량을 다르게 기록하는 수법 등을 통해 부가적인 이득을 챙겼다. 사내리 주민들은 이에 대해 불만이 많았지만 경제적으로 종속관계라 당시에는 불만을 토로하기가 사실 힘들었다. 답품은 해방한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대처승이 법주사에서 물러난 1960년대 이후이나 1970년 도시계획 이후, 전답의 수가 많이 줄어들었지만 민판동을 중심으로 여전히 남아 있는 논을 대상으로 답품을 하였다. 당시까지도 여전히 임대료를 현물로 내야했기 때문에 제도적으로 답품은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비구승이 들어온 시점부터는 법주사 종무소 담당 직원과 법주사의 재무 담당 승려가 답품을 하였다. 그러나 현물을 기준으로 임대료를 매기는 것은 마을주민에게 불만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이에 법주사 측에서는 1990년대 들어 전답의 임대료를 균일화하면서 더 이상 답품을 시행하지 않고 있다.
답품으로 작황을 측정하면 그에 맞는 임대료를 산정하게 된다. 여기서 임대료를 ‘도지’라 부른다. 도지는 지주가 농민에게 땅을 부치고 대가로 받는 현물이나 현금을 뜻하지만 전답뿐만 아니라 택지의 임대료는 별도로 ‘텃도지’라 부르고 있다. 택지의 경우, 건물의 소유는 대개 주민에게 있지만 땅의 소유가 법주사에 있기 때문에 집을 짓기 전에도 법주사에 허가를 맡고 임대계약을 맺어야만 한다. 따라서 도지는 사내리에 사는 주민(단, 건물 세입자는 제외)이라면 누구나 내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사내리에서 도지는 일제강점기 때만 해도 삼칠제를 적용하였다. 이는 지주인 법주사가 전체의 70%를 갖고, 농민이 30%를 갖는 것이었다. 흉년일 경우, 사육제를 적용하기도 했지만 일 년 농사를 지으면 수확량의 반도 농민이 차지할 수 없었던 것이 당시 농민의 현실이었다. 따라서 당시 사찰재산 수입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도 도지였다. 1930년대에는 도지가 법주사 재산 수입 중 73.4%~90.4%를 차지할 정도였다. 그러다가 1949년 농지개혁을 계기로 이팔제로 바뀌게 된다. 이팔제는 삼칠제와는 반대로 80%를 농민이 갖고, 20%를 법주사가 갖는 것이다. 이팔제는 도지를 현금으로 내기 이전까지 지속되었다. 전답 모두 동일하게 적용되지만 현물 낼 때는 답은 쌀로, 전은 보리나 콩으로 가져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텃도지는 대개 쌀로 받지만 전처럼 콩으로 가져가기도 했다. 이팔제는 전적으로 농민에게 유리한 것이었지만 여전히 농민들이 경제적으로 힘든 것은 사실이었다. 특히, 사내리가 관광지가 되기 시작한 1960년 이전에는 더욱 사정이 어려웠다. 따라서 간혹 몇몇 농민들은 법주사에 도지를 낼 때 조금이나마 도지를 적게 주려고 벼 나락을 묶을 때 느슨하게 묶거나 방앗간에서 쌀 한말에 모래를 넣어주기도 하였다고 한다.
조리는 쌀을 이는 도구이다. 정미기계가 발달하기 이전까지 조리는 부엌에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도구였다. 또한 농경사회의 주된 곡식인 쌀을 다루는 도구라는 점에서 조리는 한 해의 복을 담는 상징적인 도구로도 받아들여졌다. 따라서 예전부터 섣달 그믐날 새벽 조리장수로부터 조리를 사서 성냥이나 돈, 실, 엿 등을 담아 문이나 벽에 걸어두고 한해의 장수와 재복을 바랬다. 이런 의미에서 조리를 복(福)조리라고 불렀다. 사내리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복조리 생산지였다. 특히 현 사내3리인 민판동은 예전부터 ‘복조리 마을’이라 불릴 정도였다. 복조리는 비교적 만드는 과정이 쉽고, 많은 노동력이 필요로 하는 일이라 가족 구성원 모두가 참여하여 만들었다. 특히, 민판동은 가족 단위를 넘어서 마을 단위로 협력하여 만들기도 하여 ‘복조리 마을’로 유명해졌다.
도리깨도 복조리와 더불어 사내리에서 많이 만들었던 도구였다. 특히 곡식을 직접 치는 부분인 도리깨의 ‘노리’(아들)를 만들어 장에 내다 팔았다. 1970년대까지 도리깨 제작은 복조리 생산이 끝난 시점부터 농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인 봄까지 부업으로 하였다. 도리깨 노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사흘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우선 첫 날은 재료로 사용할 ‘물푸리’(물푸레)나무를 속리산에서 구해왔다. 물푸레나무는 가장 단단하면서 구하기 쉬운 재료였다. 다음 날은 구해 온 나무를 찌는데 소요되었다. 마지막 날은 찐 나무를 꼿꼿하게 피고 잔가지를 친다. 이를 ‘노리를 잡는다’고 표현한다.
송이버섯(이하 송이) 채취는 사내리 주민의 생업의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주요 수입원이다. 사내리의 많은 주민들은 9월 초부터 10월 초까지 약 한 달간 속리산 일대를 돌아다니며 송이를 비롯한 각종 버섯을 채취한다. 과거부터 사내리에서는 송이를 잘 따는 사람들을 일컬어 ‘버섯꾼’이라 불렀다. 버섯꾼은 대개 혼자 송이를 따러 다니며, 배낭과 지팡이, 긴팔 옷, 수건 등을 지참하여 간다. 송이를 따기 위해서는 길이 없는 나무 사이나 능선을 헤집고 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만반의 준비를 해야만 한다. 새벽 일찍 출발하는 경우는 랜턴도 필히 지참한다. 버섯꾼은 저마다 자신만이 알고 있는 ‘밭’이 있다. 밭은 송이가 나는 자리를 일컫는 말이다. 좁은 의미에서 특정한 위치를 뜻하기도 하지만 ‘달마지재’, ‘태봉’ 등 큰 공간으로 설정하여 지칭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밭은 개인의 경험을 통해 채득하는 것이 보통이나 아버지나 지인에게 물려받기도 한다. 그러나 동시대에 버섯꾼이 가족 중 여러 명이 있다면 각자의 밭을 공유하지는 않는다. 밭을 공유하는 것은 혼자 다니는 버섯꾼의 특성상 비효율적이기도 하며, 밭이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꺼려하는 측면도 있다. 다시 말하면, 두 명이 같이 다니거나 밭을 공유하면 다른 사람들의 눈에 잘 띠고, 만약 한 사람이 먼저 가면 헛걸음하기가 쉽다는 뜻이다. 산과 관련된 생업의 경우, 여성의 활동을 금기(禁忌)시 하는 경우가 많지만 사내리의 송이 채취는 그런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강인한 체력을 요구하는 송이 채취는 여성에게 불리한 면이 없지 않지만 관념상의 제약은 없었다. 송이는 사내리 주민 대부분이 채취 활동에 임했지만 특히, 민판동 주민이 많이 참여하였다. 민판동 지역에서 송이가 많이 날 뿐만 아니라 민판동 사람들이 산을 잘 타며, 채취 기술이 뛰어나 속리산 전체 수확량의 반 이상을 민판동에서 생산하기도 하였다. 1980년대 한창 송이가 많이 날 때는 하루에 민판동에서만 30명이 송이 600㎏이 채취하기도 하였다. 이럴 때는 송이를 지게에 지고 내려올 정도였다. 그러나 198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송이는 상품가치가 지금 같지 않았다. 아무리 송이를 많이 채취하였다 해도 팔리지가 않았다. 주민들은 송이를 채취하여 인근에 있는 여관이나 음식점에 팔기도 하였다. 소주가 20원일 때 송이 10개를 200원 정도에 판매하였다. 당시 송이 10개를 짚으로 묶어 1갓 또는 1두름으로 판매하였는데, 장사가 잘 안되어 직접 송이를 싸가지고 보은장이나 경찰서, 군청 등에 찾아가 판매를 하기도 하였다. 사내리에서 송이가 상품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980년 대 이후부터이다. 송이는 1967년부터 일본으로 수출을 개시하면서 그 가치를 인정받기 시작하였고, 대한산림조합연합회에서 송이를 비롯한 산림부산물 수출을 담당하면서 매년 수백 톤의 송이를 전량 수출하였다. 1988년에는 송이를 통한 농가 소득이 전국적으로 311억원일 정도였다. 사내리도 1984년 속리산산림부산물조합을 조직하여 일본 수출에 참여하였다. 사내리에서 조합을 조직했을 때는 부자간에도 공유하지 않던 밭을 조를 나누어 공동으로 채취를 하였다. 이를 사내리에서는 ‘모작’이라 하였다. 모작을 하던 당시에는 송이 채취 시기도 공동으로 정하였다. 마을의 한두 사람이 산에 미리 가서 송이를 채취해 본 후, 수확량이 기준 이상이 나오면 조합에서 채취 가능한 기간을 정하였다. 결정이 되면 다음 날 조별 단위로 산신제를 지냈다. 사고 예방과 송이 풍년을 기원하고자 각 마을에 있는 산제당에서 약식으로 산신제를 지냈다. 정월 초에 산신제가 마을의 안녕을 비는 것이라면, 이 산신제는 개인적인 안녕을 비는 것이었다.
사내리의 부녀자들은 양력 4월에서 5월이면 늘 산에 나간다. 가을에 송이를 비롯한 각종 버섯을 채취한다면, 봄에는 산나물을 채취하기 때문이다. 주로 민판동과 사내4리 부녀자들이 채취 활동에 참여하고 있으며, 일부 부녀자들은 직접 관광객을 대상으로 판매를 하기도 한다. 산나물은 1960년대까지만 해도 직접 판매하지 않고 여관에 납품하는 경우가 많았다. 수정여관이나 양지여관 등에 산나물을 주면 보리쌀 한 말씩을 받을 수 있었다. 당시 민판동에서 오리숲으로 갈 때는 지금처럼 상가지역을 거치지 않고, 속리고개를 이용하여 동암을 거쳐 내려왔다. 1980년 홍수 이후, 마을이 상가지역 근처로 내려오면서 관광지와 가까워지고 왕래를 하기 시작하면서 직접 산나물을 판매하기 시작하였다. 주로 채취하는 산나물은 고사리, 취, 두릅, 개두릅, 뽕잎, 다래순, 홑잎나물, 꽈죽나물, 가시오가피 등이며, 5월 말까지 한다. 5월이 넘어가면 나물이 쓰고 따가워져서 먹을 수 없다고 한다. 산나물은 깊은 산에 잘 나지 않기 때문에 인근 산에 주로 간다. 주로 남산이나 소리목을 넘어 북암리 부싯골 근처에서 딴다. 법주사와 속리산은 조선시대 많은 『유기(遊記)』에 등장할 만큼 일찍부터 명승고적(名勝古跡)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이러한 명승고적 아래 자리 잡은 사내리는 196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완전한 ‘관광지’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원시적 형태의 ‘관광’이라 할 수 있는 것들이 존재하였지만 관광을 하는 향유 주체들은 특권적 지배계급이 대부분이었다. 즉 소수만이 누리는 관광은 존재하였으나 그들을 위해 마을의 성격이 ‘관광지’로 변화할 수는 없었다.
해방 이후부터 1950년대는 험난했던 한국사처럼 사내리도 다사다난 하였다. 특히 6·25전쟁 기간과 직후에는 속리산이 공비의 소굴이 되면서 치안에 큰 문제가 생겨 주민 스스로가 유격대를 조직해 마을 수호에 나서기도 하였다. 이런 환경에 외부에서 속리산을 찾아와 ‘관광’을 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공비가 토벌된 후, 사회가 점차 안정화되면서 1950년대 중반부터 서서히 오리숲 일대에 관광객을 상대하는 업종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1959년 5월 21일자에는 120명의 외국인 관광객이 법주사와 유성온천을 탐방하기 위해 서울역에서 특별관광열차를 탄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120명의 단체 관광객, 그것도 외국인이 법주사를 방문했다는 것은 이 시기에 비로소 대규모 관광객을 맞이할 수 있는 시설이 갖춰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 한다. 또한, ‘국내관광’으로 불리는 국내여행알선업이 산과 사찰, 해수욕장 단체모집을 시작하고 전세버스를 이용하여 1박 이상의 관광코스를 개발하기 시작한 것도 1950년대 말경부터였다. 법주사도 버스로 1박 2일 코스가 운행되었다. 이렇게 사회가 점차 안정화되고 관광업이 서서히 태동하기 시작하여 관광객이 늘어나면서 사내리의 오리숲 일대에도 관광객을 상대하는 다양한 업종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오리숲은 거리가 오리(五里)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747년에 쓰인, 조경(趙璥)의 『속리행기(俗離行記)』의 “마을의 좌우에 숲과 나무가 우거진 것이 베를 짜 놓은 듯한데, 겨우 한 길을 통하 게 하니 사람이 마치 골짜기 속을 가는 듯했다. 우러러 보니 하늘은 한 필의 비단 같고 햇빛이 때때로 숲의 틈새를 따라 뚫고 비치니 마치 사람의 틈을 엿보는 듯 했다. 대략 4, 5리를 가서 수정교를 지나 금강문으로 들어가고[……]”라는 대목에서 오리숲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동아일보』 1927년 7월 25일자에 오리림(五里林)이란 표현과 함께 고로(古路)라는 표현이 있는 것으로 봤을 때, 예로부터 법주사로 진입하기 위해 있던 길인 것으로 추측된다. 실제로 오리숲 인근에 ‘청주나들이’와 같은 자연부락이 형성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오리숲은 예전부터 있던 길이라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