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의 역사는 제물포에서 시작되었다. 개항 이전에는 소박한 어촌이었다. 1876년 일본과 강화도에서 맺은 불평등조약 ‘조일수호조규’에 의해 인천은 1883년 개항되고 근대도시로 성장하게 되었다. 인천은 수도 서울로 가는 길목으로서 인천 개항은 조선에 파급력이 있었다. 개항 이후 인천을 통해서 여러 근대 문물들이 유입되었고 외국의 영사관과 무역회사, 병원과 교회, 근대 학교, 식당과 호텔이 건설되었다. 근대 항만이 제물포 항구를 중심으로 현재 중구 일대에 신도시가 형성되었다. 1899년 9월 경인철도가 개통되면서 인천역부터 노량진역까지 1시간대로 단축되었다. 개항과 함께 조계지가 형성되어 일본, 청, 기타 외국인들이 거주하며 경제활동을 보호받게 되었다. 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에 강제 병합된 이후 인천 인구가 31,011명이었는데 외국인 인구가 52%를 넘게 되었다. 항만 축조와 철도 공사를 위해 인천으로 노동자들이 모이고 무역 및 상업의 발달로 공장이 건설되었다. 인천에 등장한 공장은 정미소였다. 전국 최대의 미곡집산지로서 기계식 정미기를 이용한 정미공장이었다. 1889년 일본인이 세운 정미소를 시작으로 1932년에는 그 수가 2배로 늘어났다. 인천은 근대문물이 국내에 처음으로 유입되는 곳으로 성냥, 바늘, 비누 등 소비재들이 들어왔는데 1910년대부터는 일본인이 인천에 공장을 세워서 직접 생산 방식으로 바뀌게 되었다. 1912년 송월동에 애경사가 생기면서 비누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인천에서 유명한 성냥공장은 1917년 조선인촌주식회사가 현재 금곡동에 설립되었다. 1931년 만주사변 이전까지 정미소, 양조장, 성냥공장 등 소비재 산업이 주가 되었다. 그러나 1937년 중일전쟁 등을 전후로 조선을 대륙침략의 병참기지화 하였다. 바다를 매립하여 공장부지를 마련하고, 도로를 넓히고, 공업용 수도 건설을 하는 등 군수기지의 인프라를 구축했다. 송현동, 만석동, 화수동 일대에 매립을 통해 군수 공장을 설립했다. 아울러 용현동, 학익동 일대와 부평에도 군수공장을 세웠다. 일본의 기업들을 동원해서 조선이연금속, 도쿄 시바우라전기, 일본제분, 동양방적, 조선기계제작소 등을 세웠다. 철강, 전기, 제분, 방직, 기계 공장이 조성되면서 동구 일대는 일제강점기 경인공업지대의 중심지가 되었다. 1934년 현 동일방직의 전신인 동양 방적이 설립되었고, 1937년 현 두산인프라코어의 전신인 조선기계제작소가 설립되었다. 1940년에는 현 현대 제철의 전신인 조선이연금속이 설립되었다. 따라서 인천 중구와 동구 일대에는 공장과 항구에 취직하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조선인 노동자들은 일본인들에 비해 장시간 저임금 노동에 혹사되었다. 이들 회사는 현재도 현대제철, 일진전기, 대한제분, 동일방직, 두산인프라코어로 화수동, 만석동 일대에 남아있다. 한편 1939년에 부평에 일본육군조병창이 세워지면서 무기 생산의 기지가 되었다. 미쓰비시중공업에는 징용과 징병을 피해서 일하러온 조선인 노동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거주하던 곳을 삼릉(三菱)이라고 하였다. 1945년 해방되면서 이런 공장들은 적산기업으로 불하되었다. 1950년 한국 전쟁과 분단으로 인천에는 여러 혼란과 변화가 있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도시가 파괴되고 월남한 피난민들이 이주하고 정착하게 되었다. 1955년 인천에 전입한 인구 중 북한에서 이주한 인구가 전체 전입자의 94.7%에 이른다. 이들은 만석동, 송림동, 송현동 일대에서 무허가 판자집을 짓고 거주하였다. 이 일대는 피난민들의 생존에 적합한 의식주와 생업이 해결되는 곳이었다. 인근에 미군부대가 있어서 그 덕을 보았다. 원조물자 중 의복과 밀가루·분유 등으로 입을 거리와 먹을거리에 마련하고 버리는 목재로 판자집을 짓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바다와 가까워서 생선을 싸게 구입할 수 있었고, 공장·부두 등 일거리 찾기가 쉬웠다. 대성목재 등 목재회사가 많아서 땔감 마련하여 겨울나기에 용이했다. 휴전 이후 인천에 미국의 원조물자를 실은 배들이 들어오면서 부두노동자, 동양방적, 대한제분, 정미공장 등은 호황을 맞게 되었다. 면화, 원맥 등 곡물이 주된 원조물자였다. 1960년대 전쟁 후 재건을 위해 건축이 활성화 되면서 목재, 철근, 유리, 화약 관련 산업들이 성장하게 되었다. 대성목재, 대한중공업(현재 현대제철), 인천판유리, 한국화약 등은 전쟁으로 인한 호황을 맞이하였다. 특히 대성 목재의 합판 생산 기술은 세계적이었다. 1960년대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수립으로 중화학공업 육성과 수출정책으로 앞서 언급한 중구·동구 일대, 인천항에 인접한 만석동·화수동을 중심으로 임해공업지역이 개발되었다. 1968년 경인고속도로 개통, 1974년 경인전철 개통, 1970년 인천화력발전소 준공, 1972년 경인 에너지 설립 등 산업인프라가 갖춰지면서 인천은 한국의 대표적인 공업도시가 되었다. 당시 인천은 경인고속도로, 인천항, 김포공항과 인접해 있어서 교통이 편리하여 원자재 공급과 생산제품 수출에 최적 조건을 갖추게 되었다. 한국수출산업단지는 제1단지 구로를 시작으로 인천에 제4단지 부평, 제5단지·제6단지 주안에 조성되었다. 이 수출산업단지는 우리나라 최초의 공업단지이다. 제4단지는 1969년 인천광역시 부평구에 설립되어 부평국가산업단지라고도 한다. 쌍용자동차 부평공장, 대우전자, 아남산업, 삼익악기, 이화 금속, 동서식품, LG화학연구소, 한독상사, 반도상사 등이 입주하였다. 바로 옆에 30만 평에 이르는 새나라자동차가 있었다. 부평 일대는 당시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의 중심지중 하나였다. 1937년 일제가 만든 군용자동차가 생산되었고 1962년 새나라자동차가 닛산자동차와 기술제휴로 설립되었는데, 이후 신진자동차, 대우자동차를 거쳐 현재 GM자동차로 남아있다. 제5단지는 1973년 북항에 인접해 있는 주안대한염업의 폐염전 매립 지역에 설립되었고 제6단지는 1973년 오일쇼크 이후 1974년에 주안 비철금속단지와 서구 가좌동에 완공되었다. 제5단지와 제6단지는 위치의 특성 때문에 주안국가산업단지라고도 한다. 제6단지는 롯데전자금속을 시작으로 우양산업(낚시대) 등이 입주하였다. 1992년에 남동구의 폐염전 지역에 수인선과 해안 사이에 남동공업단지를 조성하였다. 한국산업공단이 2010년 말 발표한 인천의 특화산업은 목재·나무제품, 금속가공제품, 전자부품·컴퓨터·통신장비, 기타기계장비, 1차금속, 가구 및 기타제조, 전기장비, 고무 및 플라스틱 제품으로 보여진다. 이를 고려하여 단순 제조업에서 미래형 융복합산업인 첨단산업, 지식서비스산업으로 고부가가치를 창출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기계산업, 소재산업, 전기전자산업, 녹색 및 첨단융합산업 등 미래형 산업단지로 나가고자 한다. 앞으로는 인천의 산업단지가 서울의 배후도시로서 서울에서 밀려난 영세기업이나 공해 배출기업들이 몰리는 단순한 중대형 산업단지가 아니라 디지털시대의 융복합 첨단산업단지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한류를 바탕으로 핸드폰, 전자부품, 화장품 산업 등에 기대를 걸고 있다. 이밖에도 1971년에 준공된 인천기계공단, 인천목재단지, 1995년에 완공된 주물공단 등 인천은 크고 작은 공단들이 산재해 있는 우리나라의 주요 산업도시이자 생산도시이다. 인천에서 공단이 미치는 영향은 대단하다. 최근에는 인천 도심의 공단 지역을 중심으로 산업유산을 문화자원화 하는 골목 해설프로그램을 운영하거나 주거환경 개선 사업이 추진되고 있어 유형의 생산뿐만이 아닌 무형의 자산도 풍부해지고 있다.
인천을 대표하는 공업지역, 공단에 대한 항공사진을 통해 2017년 현재의 공단 모습을 소개한다. 공단의 명칭은 공식적인 명칭이 아닌, 인천 시민들이 부르는 이름, 제보자들이 말하는 대로 표기하였다. 항공사진은 2017년 10월부터 11월 사이에 촬영되었다.
방직공장 여공의 꿈 찾기 가난해도 열심이 일을 하면 부자가 되는 줄 알았어요 동일방직 동일방직은 1934년 10월 인천 만석동 37번지에서 동양방적 주식회사로 출발했다. 일본보다는 인건비가 저렴하고, 지리상으로 유리한 식민지 조선에 공장을 설립하게 되었다. 동일방직은 솜에서 실을 뽑아 화학섬유를 만들던 곳이었다. 1943년 10월 총 인원은 1,080명 이었는데 90% 이상 한국인이었다. 남자 130명, 여자 950명으로 대부분 여직원이었다. 1945년 해방 후, 미군정청 산하의 동양방적 공사에 흡수되었다. 한국전쟁 이후, 면방업은 호황을 맞이했고, 1955년 8월 5일 서정익이 동양방직 주식회사를 세워 동양방적공사를 인수하였다. 인천에 위치한 동일방직은 솜에서 실을 뽑아 화학 섬유를 만들던 곳이었다. 공장에서는 총 23개의 부서가 있었으며 총 1,400여명의 여성노동자들이 길을 감는 정방부서와 실을 짜는 직포과에서 근무했다. 다른 공장들보다 보수가 좋았고 식사와 기숙사를 제공했기에 여성 노동자들이 선망하던 곳이었다. 동일방직은 대표적인 수출주도형 산업으로 발돋음 하였고 1966년 1월에는 동일방직 주식회사로 회사명을 변경했다. 1969년에는 안양에 공장을 설립하여 규모를 확장하였고, 1972부터 1973년까지는 우리나라 방직공장 중 최대 수익을 냈다. 하지만 석유파동과 경영상의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으나 다시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 1982년 동일방직은 동영주식회사, 동일트레이딩 주식회사, 동일니트 주식회사, 동일레나운 주식회사, 동염주식회사, 중앙염색가공 주식회사, 동양섬유 주식회사, 재단법인 정헌산업장학재단 등으로 구성되었다. 1985년 5월 제 3공장을 청주, 1991년 9월에는 인도네시아에 설립하였다. 1995년 5월 인천공장의 정방기 2,304추를 폐기하였고, 그해 8월에는 충남 장항에 공장을 세워 정방기를 증설했다. 현재 면사와 면직물, 화섬혼방사, 혼방포, 재봉사, 가공사를 제조·판매하고 있으며 수출입업·조림업·부동산임대업과 같은 사업에 관한 투자를 하고 있다. 이처럼, 동일방직은 수출주도형 산업을 대표할만한 면직물을 생산했다는 점에서 중요하지만 우리나라 최초로 여성노동운동이 일어난 장소라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 똥물사건, 나체시위, 부당해고를 겪으며 인간다운 삶을 보장받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치열하게 고민하던 곳이었다. 1,500여명의 여성 노동자들의 대표자 이 총각의 삶을 통해 어렵고, 힘들었지만 가난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밀가루로 끼니를 떼우던 시절 먹고살기 어려운 시절, 한 달에 한 포대씩 밀가루 주는 회사 인천의 제분업과 대한제분[大韓製粉], 면 음식의 발달 인천은 개항과 함께 항구를 배경으로 하는 산업도시로 일제강점기에 삼백산업(三白産業)의 하나로서 제분업이 발달하게 되었다. 1919년 만주제분의 진남포공장이 설립되면서 우리나라의 제분업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진남포는 일제의 중국 진출을 위한 교두보이자 한반도에서 밀이 가장 많이 생산되는 황해도에 인접한 항구였다. 1921년에 일본제분주식회사가 만주제분 진남포공장을 인수하여 인천, 진남포, 사리원에 제분공장을 설립하였다. 이때 인천 만석동 매립지 위에 근대식 제분공장이 세워졌다. 당시 풍국제분이 인천(만석동)과 경성(용산)에 공장을 설립하면서 인천에는 두 개의 제분공장이 설립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제분업은 성장가도를 달리게 되었다. 개항지이자 근대항구였던 인천은 밀의 원료 수송과 가공에 적합한 곳이었다. 게다가 일제는 조선의 쌀을 대량 일본으로 유출하면서 조선은 식량난에 직면하게 되어 저렴한 밀 음식을 찾게 되었다. 특히 1937년 중일전쟁 이후 만주산 밀마저 장악한 일제가 전쟁에 대비용 군납 빵으로서 건빵을 만드는 등 밀은 군수물자가 되었다. 이처럼 쌀이 부족한 시점에 근대 도시가 생성되면서 유입된 도시노동자들이 저렴하게 먹을 수 있는 면 음식이 발달하게 된 것이다. 인천의 대표적인 음식 중 항구노동자들이 즐겨먹던 짜장면이 유명해진 이유도 제분업의 발달과 밀접하게 연결될 수 있다. 대한제분은 풍국제분과 함께 인천의 대표적인 제분업체이다. 대한제분의 전신은 앞서 언급한 일본제분이다. 적산기업이었던 일본제분은 관리인이었던 이한원이 인수하게 되었다. 그는 한국전쟁으로 시설이 파괴된 이후 1952년 11월 일본제분 인천공장을 정부로부터 불하 받아 대한제분을 설립하였다. 1년 만에 1일 생산능력이 5,000포대를 넘어서면서 전쟁 이후 식량난 해소에 기여를 하였다. 이처럼 대한제분은 제분 업계 단일규모로는 동양 최대 시설이다. 1954년 이후 미국의 구호물자로 밀가루 무상원조가 시작되고 1961년과 1962년 흉작으로 1962년 정부가 식량난 해결을 위한 미곡소비절약운동을 벌이면서 분식을 장려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제분업은 더욱 활성화되었고 1970년대 인천에도 짜장면과 인스턴트라면, 칼국수, 쫄면, 소면 등 밀가루국수가 저렴한 가격에 대중화 되었다. 대한제분은 1971년 자동포장기 및 하역시설을 증설했고, 1974년 저장능력이 4,000톤을 넘어섰다. 1986년 10월 국내 최초로 밀가루 산물수송을 시작했다. 현재 대한제분의 주력 사업은 제분업 및 소맥분 판매업으로 공장 내부는 대부분 무인자동화시스템으로 운영중이다. 주요 제품으로 대표 브랜드인 ‘곰표’ 밀가루와 튀김·부침가루 등 80여 종의 밀가루 제품, 60여 종의 프리믹스 제품, 국수와 파스타 등의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인천과 부산에 생산공장이 있다. 관련 자회사로는 대한사료(주), 대한싸이로(주) 등이 있다.
내가 만든 엔진이 세상을 움직이다 대우 중공업에서 두산 인프라코어까지 두산인프라코어 두산인프라코어(주)는 1937년 조선기계제작소로 최초 출범하였다. 인천에 설립된 조선기계제작소는 최초의 대단위 기계공장으로서 1963년에 국영기업체인 한국기계공업(주)로 새롭게 발족하여 한국의 산업 근대화에 이바지해 왔으며 1966년 증권거래소에 주식을 상장하였다. 1975년 인천공장 부지 주변의 해안매립지대에 4,100만 마르크의 독일 재정차관과 3,000만 마르크의 상업차관 등 총 288억원의 내외자를 투입하여 연간 생산능력 6만대, 당시 단일공장으로서는 동양 최대 규모의 디젤엔진 공장을 준공했다. 1976년 대우기계(주)와 합병하면서 대우중공업(주)으로 상호를 변경하였다. 1986년 건설기계 부문에서는 1983년 경부터 자체기술로 굴삭기 개발을 시작하여 1985년 말에 고유 모델인 ‘SOLAR’굴삭기를 탄생시켰다. SOLAR 굴삭기는 1987년 국산 장비로는 최초로 네덜란드에 수출하는 새 역사를 쓰기도 했다. 1994년에는 대우조선공업(주)을 흡수합병하고 중국 현지법인 대우중공업 연대유한공사를 설립하였다. 1999년 8월 대우사태로 인하여 워크아웃 약정을 맺었고, 10월에 항공사업 부문을 한국항공우주산업(주)으로 이관하였다. 2000년 10월 대우중공업(주)을 분할하여 대우종합기계(주)로 설립되었다. 2004년 ‘10억 달러 수출의 탑’을 수상하였다. 두산에서 인수하여 2005년 4월 지금의 두산인프라코어를 설립하였다. 2007년에는 두산메카텍의 공작기계 사업부문과 미국 CTI, 중국 연대유화기계를 인수하였고, 중국 두산공정기계(소주)유한공사와 두산공정기계(산동)유한공사, 인도 법인(DIID) 등을 설립하였으며, ‘20억 달러 수출의 탑’을 수상하였다. 2008년에는 독일의 지게차업체 ATL사와 노르웨이의 굴절식 덤프트럭업체 Moxy Engineering AS사를 인수하였고, 방위산업 비즈니스그룹을 분할하여 두산디에스티(주)를 설립하였다. 2011년에는 산업차량 부문을 분할하여 두산산업차량(주)을 설립하고 중국 쑤저우 건설기계 공장을 준공하였으며, 2012년 소형 디젤엔진 공장을 준공하였다. 2014년 물적분할로 두산인프라코어밥캣홀딩스(주)를 설립하였으며, 2015년 사명을 ‘두산밥캣’으로 변경, 2016년 상장하였다. 당해3월 MBK 파트너스에 공작기계 사업부를 매각하였다.
세계 목재가 내 손 안에 대성목재는 내 인생의 전성기야 대성목재(大成木材) 대성목재의 전신은 조선목재공업(주)로 1936년 6월 7일 만석동 38번지 인천 임해지구에 설립된 목재회사이다. 항공자재(나왕합판) 를 제조하던 일제 군수공장이었다. 1945년 10월 손병도54 가 적산공장 조선목재공업(주)을 불하받고 1948년 대성목재(주)로 회사 명칭을 변경하고 합판과 가구 등을 제작하기 시작하였다. 1954년 천우사(대표 전택보)55 에 매각되었다. 1966년 합판수출로 제3회 수출의 날에 금탑산업훈장을 타면서 월미도 매립지에 일산 55,000매 규모의 합판공장을 확장하였다. 1969년 부실기업이 되어 1969년 6월 25일 조흥은행 관리로 넘어갔다. 1973년 신동아그룹(대표 최성모), 원풍산업(대표 이상순), 국제약품(대표 남상옥) 3사가 공동 인수해 운영되다가 1978년 7월 4일 효성그룹(회장 조홍제)이 인수했다. 1986년 1월 1일 유원건설(대표 최효석)이 인수했으며, 1995년 6월17일 한보그룹(회장 정태 수)에 넘어가는 등 59년 동안 9번이나 회사가 바뀌었다. 1986년부터 1996년까지 건실하게 운영되었으나 1997년 한보철강의 부도로 한보그룹 전체가 타격을 받게 되어 2000년 11월 동화기업(대표승상배)에 인수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대성목재는 우리나라 합판 제조업의 효시이자 인천 목재 업계의 대명사로 기억되고 있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만석동 골목에는 나무껍질이 쌓여있곤 했는데 대성목재 앞바다에서 원목의 나무껍질을 벗겨 땔깜으로 쓰기 위함이었다. 1954년부터 전후복구사업이 활발히 전개되면서 건설용 자재의 수요가 급격히 늘어나 합판의 대량생산이 본격화되고 1957년에는 주한 UN군에 합판을 군납하게 되었다. 1960년대 중반에 천우사에서 운영할 당시에는 대성목재 수출로 인한 호황을 누렸다. 당시 필리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에 직원들을 주재원을 파견하여 나왕(羅王) 원목을 수입하였으며 다시 합판으로 가공하여 수출하였다. 당시 노동자는 3500여 명이었는데 대성목재 월급날이면 인천 시내가 술렁이고, 술집, 음식점들도 호황을 누렸다고 한다. 대성목재의 호황은 합판을 원료로 하는 건설, 가구 산업도 함께 발전시켰다. 그러나 합판산업은 남양재 원목 보유국의 원목 수출제한 및 원목가 인상, 동남아 원목생산국의 합판산업 진출, 선진국의 경기침체, 국내의 임금 상승 등의 영향으로 가격 경쟁력이 급속히 약화되어 수출산업으로서 경쟁력을 잃게 되었다. 최근에는 저가인 침엽수(소나무류)를 원료로 사용할 수 있는 시설을 구비하기 시작했으며 이와 함께 전 공정의 자동화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어 합판 산업의 새로운 활로를 찾고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참고)
네 바퀴로 세상을 움직이다 사람 사는 정이 있던, 그 때 그런 시절이 그리워요 한국GM 자동차 한국GM 자동차는 1965년 신진공업사에서 출발하여 1957년에는 새나라 자동차의 부평공장을 인수하면서 신진자동차공업으로 변경하였다. GM은 1972년 6월에는 신진자동차와 합작하여 국내로 진출했으며(사명:GM KOREA), 1976년 신진자동차 지분을 산업은행에서 인수하면서 영어로 ‘뉴코리아’라는 뜻을 가진 새한자동차로 회사명이 바뀌었다. 1983년 1월 대우가 미국 GM과 함께 운영하던 새한자동차의 경영권을 완전히 인수받으면서 상호를 대우자동차로 바꾸었다. 자동차 수출 뿐만 철도차량 등을 수출하는 등 해외전략품목개발 및 전자부분에도 집중투자를 했다. 1992년에는 GM회사의 지분을 대우에 매각하여 독자적인 경영권을 갖고 아시아, 중남미, 중동, 아프리카 등 해외 시장개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1997년에는 라노스, 누비라, 레간자를 출시하여 자동차 산업 발달에 박차를 가하였다. 1998년 1월에는 쌍용자동차를 인수하여 라인을 확장했지만 지속적인 경영난으로 2000년 11월 3일 부도가 난후, 2001년 GM으로 매각되었다. GM은 승용차사업부문만 양도받았고 2005년 10월에는 부평에 있는 대우인천자동차를 합병하였다. 2011년 3월 한국지엠주식회사로 변경했다. 현재 부평, 군산, 창원, 보령에 사업장을 가지고 있으며 연간 92만대의 차량, 140만대의 엔진과 변속기를 생산하고 있다.
핸드폰의 숨은 주역 대기업 3사의 핸드폰 부품을 모두 제조하다 부평의 핸드폰 부품 공장 인천의 제4공단인 부평공단의 경우 전기전자업종이 전체 업종 중 약 40%를 차지하고 있다. 삼성전자, LG전자에 액정필름·유리·케이스 등을 납품하는 핸드폰 부품 하청업체를 비롯한 전기전자 제조 업종의 다수 업체가 파견 노동자로 운영되고 있다.108 하민서는 핸드폰 부품업체 A사와 B사 핸드폰 악세사리 공장인 C사에서 일한 바 있다.
인천은 우리나라 근대 문물이 유입되는 공간이었다. 각국의 조계지와 산업이 이식되었고, 그 산업유산이 아직도 남아있다. 특히 인천에 형성된 산업은 제국주의 질서에 편입하기 위한 일본 군수물자의 보급 창고였다. 그 중 정미업과 양조업이 대표적이다. 첫 출발은 1907년 조선인들의 자력으로 근업소를 설립하였고, 1908년 일본에 의해 조선곡물협회가 형성되면서 1910년에는 정미소가 6개, 1932년에는 32개로 그 수가 늘었다. 정미업과 함께 확장된 산업은 양조업이었다. 물을 쉽게 얻을 수 있는 지리적 이점이 있었고, 인천에 산업기반 시설이 형성되면서 조선인 노동자들이 모였고 그들을 위한 술 생산 공간이 필요했다. 특히, 양조업은 조선인 자본가들의 참여가 두드러진 산업이었으며 일제의 식민지배 아래 형성된 ‘민족자본’이었다. 1930년대 인천을 대표하는 3대 산업은 정미업, 양조업, 제염업이었다. 이 세 가지 산업의 공통점은 1930년대 들어서면서 군수물자로 귀결된다는 점이다. 정미업은 조선의 산업 중 가장 큰 규모였고 생산량과 수출량이 많았다. 인천에서 만들어진 쌀은 만주로 수출되어 군량미로 사용되었다. 1930년대 미두취인소가 서울로 이전하면서 인천의 정미업은 시들해진다. 처음에 일본 술을 조선에 들여왔을 때 따로 세금을 지불 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일본의 술을 계속 수입해 올 경우 조선에서 양조업이 발달할 수 없다는 여론이 형성되면서, 인천 섭도구 끝자락에서 양조장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또한 인천에서는 제염업도 두드러지게 발달했는데, 간장양조 뿐만 아니라 무기를 생산하기 위한 것이었다. 소금의 질소성분이 공업용 화약을 만드는 원료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소금이 있던 자리에서 동양화학과 한국화약이 설립되었고 다이너마이트가 생산되었다. 이처럼 인천의 정미업과 양조업은 일본·만주와 가까운 지리적 이점을 활용하여 군수 창고 역할을 하였다. ◇ 인천에서 양조장과 정미소의 의미 일본인에게 인천은 경제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공간이었다. 일본의 입장에서 조선 쌀은 식량난을 해결할 수 있었고, 자본가 입장에서는 조선쌀을 싼 값에 구입하여 일본에 비싸게 팔아 수익을 창출 할 수 있는 품목이었다. 또한, 정미업과 함께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은 양조업이었다. 특히, 인천에서는 황해도 콩이 많이 들어와서 간장 양조업과 쌀의 부산물로 만드는 청주 양조업이 등장했다. 간장을 양조할 때 소금이 사용되기 때문에 주안염전에 천일염을 제조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인천은 경공업, 정미업, 양조업, 제염업으로 시작하여 군수산업으로 수렴되었다. 무엇보다 인천의 중동부 지역은 경공업과 중공업이 모두 발달했던 지역이었다. 이는 일본 자본의 흐름이라 볼 수 있다.
개항 후 인천은 새로운 문물의 집산지였지만, 제국주의 침략의 발판으로도 활용되었다. 특히, 일본은 1893년 청일전쟁,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조선을 식민지배하기 위한 계획을 실행했다. 그 중에서도 인천은 지정학적으로 만주로 가기 위한 교두보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1920년대까지 철도와 공장을 건설을 하여 일본의 자본을 이식하여 산업을 발전시킨 후 1930년대 부터는 만주로 진출을 한다. 1937년 중일전쟁 후 일본은 전시체제로 접어들었고, 인천은 군수산업을 공급하는 장소로 활용된다. 이러한 전략으로 인천에는 일본의 군수관련 산업이 이식되었으며 아직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다른 지역에 비해 인천은 많은 산업유산이 남아있기에 이를 제대로 보존·활용하기 위한 방안이 강구되어야 한다. 따라서, 그 흔적을 조사하여 기록하는 것은 중요하다.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인천골목문화지킴이이자 인천 영화정보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재직하고 있는 이성진과 인천의 중구 ·동구의 군수산업벨트를 중심으로 조사했다. 이성진과 조사자는 인천 중구 올림포스 호텔 앞에서 다음과 같이 동선을 계획 하였다. 만석동 외국인 묘지자리 - hid 특공대 막사 - 텍사스 석유(대한석유) - 동일방직 - 도쿄시바우라 전기(일진전기)사택 - 조일장유공장(조일양조장) - 삼화제분 주식회사 - 대동제강 사택 - 괭이부리마을 - 동일방직 공동화장실 - 선진수퍼 - 조선기계제작소(조선인 노동자) 숙소 - 북성포구(만석포구)와 조선기계제작소(두산인프라코어) - 일진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