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사이트는 Chrome, IE10 이상의 버전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10 미만 버전일 경우 원활하지 않을 수 있으니 업그레이드 하시기 바랍니다.

강화 선두포 살림살이 70년간(1947 ~ 2017년) 흔적과 변화

주제 강화 선두포 살림살이 70년간(1947 ~ 2017년) 흔적과 변화
조사 살림살이 이야기, 사진, 영상, PDF

1947년 강화도 살림살이

오스굿 살림살이 수집자료

PDF 보기


가. 오스굿 수집품 342건 분석 1947년 오스굿이 우리나라에 있는 동안 수집해서 예일피바디자연사박물관에 소장한 자료는 총 342건이다. 그가 우리나라에 머물면서 주요 조사지가 강화도였던 만큼 강화도에서 수집한 자료가 대부분이다. 강화도 자료만 세부적으로 볼 때, 강화읍 24건, 강화군 길상면 193건, 강화군 양도면 5건, 강화군 화도면 5건, 전등사 1건을 수집했다. 그가 수집한 자료 중에서 강화도를 제외한 자료는 대부분 도자기류와 도자기 파편이다. 그러나 조사팀이 그가 수집한 자료를 수집처로 분류했을 때, 의문점이 들었다. 왜냐하면, 그가 우리나라에서 방문하지 않은 지역에서 수집한 자료가 확인되기 때문이다. 만약, 조사팀이 그의 한국 여정에 관한 자료를 얻지 못했다면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는 한국에 있는 동안 고령이나 공주, 성주를 방문하지 않았다. 그가 강진, 고령, 공주, 성주에서 수집한 자료 54점은 굽다리접시와 도자기 파편이다. 조사가 이루어진 강화도 수집품을 제외하면, 그가 우리나라에서 수집한 주요 관심사를 대략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인류학자인 그는 조사지에서는 살림살이 자료를 수집했지만, 그 외의 지역에서는 도자기류에 관심을 두었다. 나. 강화도 수집 살림살이 분석 오스굿이 강화도에서 수집해 간 자료들은 총 228건으로 도자기 파편 7건을 제외하고 221건이다. 조사팀은 이 자료를 재분류해서 178건의 221점으로 정리했다. 재분류의 기준은 같은 명칭이라도 계절 또는 성별에 차이를 보이는 살림살이는 단독 살림살이 건으로 분류했다. 그리고 용도에 따라 의·식·주, 생업, 사회생활, 종교·의례, 군사, 기타 등으로 분류했으며,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오스굿이 1947년 강화도에서 수집한 자료는 의·식·주와 생업 자료의 비율이 88.6%이다. 물론, 88.6%라는 비율이 숫자이기는 하지만, 그만큼 살림살이 중에서 의식주와 생업이 차지하는 비율은 절대적인 점도 있다. 따라서 그가 수집한 자료는 그가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적절하게 수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병희·유화선 부부의 살림살이

살아온 이야기

2017년 기준으로 이병희는 1943년생으로 75세이며, 유화선은 1945년생으로 73세이다. 이병희와 유화선은 젊은 시절에 직장생활로 타지 생활을 했었다. 부부는 경기도 부천에서 고향사람의 중매로 만나서 혼인했으며 2년 동안 서울에서 신혼생활을 했다. 부부가 선두포에 정착한 것은 1972년이었다. 마을에 정착하면서 유화선은 종교생활을 시작하였으며 부부의 생업은 농사가 되었다. 잠시 이병희가 선두포에 거주하면서 직장생활을 한 적이 있지만, 농사를 그만 둔 적은 없었다. 이병희˙유화선 부부는 2008년 무렵에 논농사를 중단하였지만 밭농사는 계속 하고 있다. 부부는 지금도 농사 일정에 맞춰서 관광을 다니고 김장시기를 조절하는 등, 생업으로 바쁜 생활을 보낸다. # 가. 이병희의 젊은 시절 이병희1943년생는 선두포 출신이다. 그의 부친은 이일성?~1960년이며 선두포 토박이고 모친은 인천광역시 강화군江華郡 선원면仙源面 냉정리冷井里 출신의 정영희 ?~1947년로 동래 정씨이다. 그의 친어머니는 어린 시절에 돌아가셨고 새어머니가 있었다. 그의 부친도 일찍 작고하여 이병희가 군대에 입대할 무렵에는 새어머니와 어린 남동생만 있었다. 이병희가 현재 거주하는 가옥은 태어난 곳이 아니다. 지금 거주하는 가옥은 마을 내內에서 이사를 한 곳이다. 그가 태어난 가옥은 현재 가옥에서 도보 약 3분 거리에 위치했으나, 가옥을 허물어서 그 형태를 확인할 수 없다. 그의 가족이 현재 거주하는 가옥으로 이사를 온 것은 그가 군대에 있을 때이다. 이병희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21살 무렵에 군대에 입대했다. 가옥에는 새어머니와 어린 남동생만 남았다. 그의 새어머니는 남편이 죽은 가옥에서 사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새어머니는 이른 나이에 남편을 여의면서 심적으로 힘들어 했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고자 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던, 그의 작은아버지는 장남이었던 이병희에게 등기우편을 보냈다. 편지에는 그의 새어머니가 이사를 원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현시점이 이사를 가기에 좋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이병희의 가옥을 구입하고자 하는 사람이 나타나서 작은아버지가 급하게 편지를 보낸 것이었다. 그의 집을 구매하고자 하는 사람은 곰보할아버지라고 불렀던 마을 주민이었다. 작은아버지는 이병희에게 집을 구매한다는 사람이 있으니 가옥을 팔고 마을의 다른 집을 구매할 것을 권유했다. 그런데 마을의 다른 집이란 곰보할아버지가 거주하던 집이었고 서로 집을 바꾸는 것이 어떤지 물어보는 것이었다. 이병희는 고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곰보할아버지라고 불린 노인이 남의 산에서 몰래 나무를 구해서 집을 건축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집 근처의 산에서 나무를 가지고 와서 집을 지었다는 이야기였던 터라 좋은 목재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는 군대에 있던 상황이었고 집안 어른의 뜻을 따라 이사를 결심했다. 그가 군대에 있을 무렵에 이루어진 상황이라 가옥의 차이에 따른 잔금 처리 등의 상황이 있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군대에서 돌아온 이병희에게 작은아버지는 직장생활로 돈을 모아서 장가갈 것을 제안하여 그는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했다. 이사를 갔던 가옥은 이병희의 새어머니가 다른 지역으로 거주지를 옮기면서 그의 작은아버지가 거주했다. 부부는 작은아버지가 다른 곳으로 세간을 나가면서 현재 가옥에 정착했다. 선두포 출신의 이병희가 현재 거주하는 가옥은 1943년에 건축한 가옥이다. 그는 가옥 수리 중에 천장에 가려진 상량문을 볼 기회가 있었다. 그는 상량문에 소화 18년1943년이라고 적혀있는 것을 보고 가옥 연대를 알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태어난 시기와 동일한 연도라 상량문의 내용을 기억했다. 이병희˙유화선 부부는 살면서 ㄱ자형의 가옥을 튼입구자형으로 늘렸다. 이 가옥 유형은 오스굿의 4가지 가옥 유형에 적합하며 변화상도 살펴볼 수 있었다. 부부의 가옥과 관련된 내용은 선두포 민속지의 주생활 장에서 살펴본다. 이병희는 4살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모친이 돌아가시고 그의 부친은 재혼을 했고 남동생이 한 명 태어났다. 그의 나이 17살에 아버지가 작고하였으며 땅을 팔아 부친의 약을 구매하다보니 살림이 기울었다. 그래서 그는 어렵게 살다가 21살 무렵에 군대를 갔다. 이병희의 군인시절 사진은 그가 전라도 광주에서 군대생활을 할 때 촬영한 것이다. 이병희는 전라도 광주의 보병학교에서 군 생활을 했으며 제대를 하고 서울에 정착했다. 그가 많은 지역 중에서 서울로 가게 된 것은 친척이 운영하는 공장에서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친척이 운영하던 스티로폼을 만드는 회사에 다녔는데 행인이 던진 담뱃불에 스티로폼 공장에 화재가 발생했다. 공장은 그 화재사건으로 만들어둔 스티로폼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사람도 다쳐서 부도가 났다. 그래서 그는 경기도 부천에 있는 친척에게 잠시 신세를 지면서 일자리를 찾았다. 그는 이 시기에 2살 차이의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吉祥面 길직리吉稷里 출신의 유화선1945년생과 중매로 만난다. 그리고 이병희가 28살, 유화선이 26살이던 1970년에 혼인했다. 이병희는 유화선을 만나고 경기도 부천에 있는 ‘동양강철’이라는 회사에 취직을 했다. 그는 혼인을 하면서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고물장사를 했다. 그러다 1972년 선두포에 들어오면서 주요 생업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 나. 유화선의 젊은 시절 유화선의 부친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길직리 출신의 류재순1923~2008년 이며 모친은 강정희1925~1968년이다. 유화선은 1945년생으로 문화 류씨이다. 그녀도 부친과 같은 길직리 출신으로 4남매딸, 딸, 딸, 아들의 맏이로 태어났다. 그녀는 강화도에서 방직관련 일을 배워서 회사를 다녔다. 그녀가 하던 일은 양단을 짜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작은 회사에서 방직기술을 배웠고, 이후 강화읍에 있던 ‘심도 직물공장’에 시험을 쳐서 들어갔다. 유화선이 23살일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그녀의 부친은 재혼을 했다. 그녀의 친정에 새어머니가 들어왔지만, 큰딸로서 집안을 챙길 일이 많았다. 그래서 직장생활을 잠시 쉬면서 틈틈이 집안 살림을 돕기도 하며 직장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다 그녀가 일하던 곳이 부도가 났고 돈을 모으고자 경기도 부천에 일을 하러갔다. 그녀가 양산을 들고 촬영한 사진은 부천에서 일을 하던 시기의 것이다. 유화선이 친구와 복숭아가 많이 있는 곳으로 놀러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촬영한 것이다. 유화선은 경기도 부천에서의 직장생활을 끝으로, 주부가 되었다. 그곳에서 이병희를 만나서 혼인을 했기 때문이다. 경기도 부천에는 강화도 출신의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같은 고향사람들은 혼인적령기의 처녀,총각이 주위에 있으면 중매를 해주는 경우가 있었다. 이병희와 유화선도 같은 고향 출신이라는 이유로 고향 출신 지인이 중매를 해줬다. # 다. 혼인과 선두포 정착 이병희˙유화선 부부는 경기도 부천에서 중매로 만났다. 이병희는 서울에서 다니던 회사가 부도가 나면서 경기도 부천의 친척집에 쌀 한 가마니를 가지고 왔었다. 그는 서울에서 경기도 부천으로 일자리를 찾고자 잠시 왔었는데, 그때 인생의 반려자 유화선을 만났다. 이병희와 유화선은 서울에서 2년 동안 신혼살림을 한다. 부부가 혼인할 무렵에는 서울에서 생활을 하기로 했었다. 그런데 이병희가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여러 일을 하면서 부부는 고향에 돌아갈 생각을 했다. 이병희의 고향으로 돌아가자고 생각한 것은 유화선이 먼저였다. 그녀는 무거운 리어카를 끌면서 돌아다니는 이병희가 걱정되었다. 또한, 집안에 계속 좋지 못한 일이 있어서 새로운 곳에서 잠시 생활해 보고자 했다. 이병희와 유화선 부부가 고향에 돌아오고자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은 유산으로 물려받은 논 900평, 밭 470평, 가옥이 있었기 때문이다. 부부가 맨몸으로 고향에 가더라도, 정착할 수 있는 여건이 있었다. 그리고 부부는 선두포에서 몇 년을 살다가 서울로 돌아올 생각이었기에, 그들이 잘 아는 장소로 이사를 가고자 했다. # 라. 자녀이야기 유화선이 결혼했을 무렵의 기준으로 보면 그녀의 첫 자녀 출생 시기는 늦은 편이다. 그녀의 나이가 31살 이었을 때 첫째 딸을 낳았고, 둘째는 아들로 33살에 낳았다. 막내아들은 그녀의 나이가 37살이었을 때 낳아서 늦둥이라고 생각한다. 이병희와 유화선이 자녀를 늦게 낳고자 계획한 것은 아니다. 부부는 혼인하고 아이가 생기지 않았고 자녀를 가지고자 민간요법도 써 보고 한의원을 다니는 등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선두포에서 세 명의 자녀를 낳았다. 자녀는 모두 안방에서 낳았는데, 친정어머니와 시어머니가 없는 유화선을 위해서 최씨 할머니가 첫아이의 출산을 도왔다. 할머니는 작은 아들과 함께 오늘날 이재삼·한경임댁(부녀 회장댁, 길상면 해안남로916-9) 위치에 거주하면서 이병희·유화선의 육아에도 도움을 주었다. 세 명의 자녀는 모두 길상초등학교를 다녔다. 딸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경기도 부천에 있는 고등학교를 다녔다. 그래서 집을 떠나서 하숙을 할 수 밖에 없었고, 그 뒤로 계속 타지생활을 했다. 아들 두 명은 고등학교까지 부부와 함께 살다가 막내 아들이 대학을 가면서 가옥에는 부부만 거주하게 되었다. 현재 자녀들은 모두 마을을 떠나서 거주하지만, 강화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다. 부부의 딸은 경기도 안산에 거주하며 큰아들은 인천 청라국제도시, 막내아들은 인천 부평구에 거주한다. # 마. 이병희·유화선 부부의 생업 이병희·유화선 부부는 세 명의 자녀를 키우고자 다양한 생업활동을 했었다. 부부는 생업의 중심이 농업이었으나, 집 근처에 축사를 짓고 소와 돼지를 키우기도 했다. 소 축사는 이병희가 태어난 가옥 근처에 있었으며, 돈사는 현재 개를 키우는 공간과 그 옆의 밭에 있었다.



이병의 유화선 부부


-
일상생활

이병희·유화선 부부의 일주일 생활을 보면 교회와 관련된 생활이 빠지지 않는 일과 중 하나이다. 길상교회의 일요일 예배는 11시부터 이다. 부부의 주말은 특별한 일이 없으면 예배시간에 맞춰 이루어진다. 부부는 일요일에 주일예배를 위해서 10시 30분에 교회로 간다. 이병희는 교회에서 점심을 먹고 집으로 돌아가고 유화선은 주일 오후예배를 드리고 집으로 돌아간다. 평일은 유화선의 새벽기도에 맞춰서 하루일과가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이병희는 술과 담배를 하지 않는다. 그래서 술을 마시고 늦게 들어오는 일이 없다보니 비교적 같은 시간에 자고 일어난다. 유화선도 매일 새벽 기도를 다니다 보니 일어나는 시간이 거의 일정하다. 이병희·유화선 부부는 주로 오전 5시에 일어난다. 유화선이 이병희보다 빨리 일어나는데 오전 4시 30분에 새벽기도를 드리러 교회에 가기 때문이다. 그녀가 새벽 기도를 갔다 오면 오전 6시 무렵이며 식사 준비를 한다. 이병희는 TV시청을 하면서 아침 식사를 하기 전까지 시간을 보낸다. 아침 식사는 유화선이 교회를 다녀와서 준비를 해서 오전 7시가 넘어서 먹는다. 일이 바쁜 농번기에는 이병희는 일을 하고 유화선도 교회 예배만 갔다가 곧바로 일을 한다. 그래서 8~9시 무렵에 아침밥을 먹기도 한다. 주로 여름에 그러한데, 날씨가 더워지기 전에 일을 하고자 아침을 늦게 먹는다. 이병희는 식사를 하고 곧바로 밭에 작업을 하러 가고, 유화선은 집안일을 정리하고 밭으로 간다. 부부는 낮 12시 무렵에 점심을 먹는데, 일에 집중하여 시간 확인을 하지 못하면 점심시간을 훌쩍 넘겨서 먹기도 한다. 점심은 일을 하는 중간에 먹다보니, 그 날의 상황에 따라 유동적으로 식사시간이 바뀐다. 옆의 하루 일과표는 부부의 농번기와 농한기의 하루 일과를 이야기 듣고 평균적인 시간을 표로 나타낸 것이다.



하루일과


최병열·신춘분 부부의 살림살이

살아온 이야기

최병열은 1948년생으로 2017년을 기준으로 70세이며, 신춘분은 1953년생으로 65세이다. 둘은 26살, 21살에 중매로 만나 1년 후인 1975년에 혼인을 했고, 슬하에 1남 3녀의 자녀를 두고 있다. 최병열은 선두포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라면서 마을을 떠나서 산 적이 없다. 또한 새마을지도자와 이장을 12년 동안 지내면서 마을 뿐만 아니라 강화도 내의 사정도 잘 알고 있다. 신춘분은 최병열과 결혼하여 남편을 도와 부지런히 일을 하고 알뜰하게 돈을 모아 자녀들을 키웠다. 최병열은 어려운 집안 형편으로 어렸을 때부터 농사일을 해왔으며, 형편이 좋아진 후에도 하루하루를 농사일에 매진하며 부지런하게 살아왔다. 현재도 부부는 농사를 생업으로 삼고 있어 농사 일정에 맞춰 매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여기에서는 최병열과 신춘분의 어린 시절과 결혼 이후에 부부가 살아온 삶을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 가. 부부의 어린 시절 1. 최병열의 어린 시절 최병열은 아버지 최후봉과 어머니 고흥인?~1988 사이에서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최병열은 선두리 433번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현재 최병열이 태어난 집은 옛집을 헐고 새 집을 지어서 다른 사람이 거주하고 있다. 최병열의 아버지는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草芝里출신이며, 어머니 고흥인은 선두포 마을의 토박이이다. 최병열의 아버지는 최병열이 2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지만 선두포에 살고 있는 셋째 누나인 최복실여, 1943년생, 선두포 거주에게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오스굿의 이야기처럼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없던 처가에 데릴사위로 들어왔다. 여기서 나오는 5명의 손자는 최병열의 형과 누나이다. 오스굿이 ‘고씨 노인이 자신의 성을 따르는 아이가 없어서 슬퍼 보인다’ 고 표현한 것은 자신의 아들이 없어 대를 이을 손자가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한국의 전통사회에서는, 다시 말해 유교사회에서는 제사를 모실 수 있는 아들을 낳아 대를 계승하는 일을 중요하게 여겼다. 오스굿은 이런 한국의 문화적 배경을 이해하고 그 입장에서 고씨 노인이 슬퍼보인다고 표현한 것이라 생각된다. 최후봉은 고흥인과 결혼 후에 인천에서 강화군 길상면 동검리東檢里와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沙器里 분오리, 옹진군 북도면北島面에 위치한 장봉도長峰島, 시도살섬, 矢島 등에 배로 사람과 물자를 실어 나르는 운수업을 했다. 운수업이 한창 잘 될 때에는 땅이 많아서 ‘이 집 땅을 안 밟고 지나가는 사람이 없다’고 말 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사업이 잘못 되어서 집안의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최병열이 태어나기 전의 일이라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가세가 기울면서 최병열의 형제들은 돈을 벌기 위해 서울이나 인근의 도시로 일을 하러 가거나 남의집살이를 갔다. 최병열은 당시에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일을 하러 나갈 수 없었고, 혼자 남은 어머니를 도와 농사일을 했다. 최병열은 위로 형 둘과 누나 셋이 있는데, 첫째 형과 20살 터울이 진다. 그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첫째 형은 군복무를 하러 철원으로 갔다. 당시 군복무기간은 육군은 만 2년, 해군은 만 3년이었지만 지원자에 한하여 계속 현역으로 복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첫째 형은 7년 정도 군복무를 했는데, 아버지를 대신할 장남의 부재가 길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자 둘째누나인 최복순은 다른 사람의 집에 아이를 봐주는 일을 하러 갔고, 둘째 형은 다른 집 머슴 생활을 갔다가 군복무를 하러 갔다. 다른 누나들도 돈을 벌기 위해 인천에 있는 방직공장에 나갔다. 나이가 어렸던 최병열은 마을에 남아 다른 집의 농사를 대신 지어주면서 돈을 벌어 어머니를 모셨다. 최병열은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중학교를 다닐 형편이 되지 못해 국민학교만 졸업하고 학업을 중단해야 했다. 그래서 그는 남들이 학교를 다닐 때 소를 몰고 ‘소마답’으로 풀을 먹이러 다니거나 먹을 쌀을 얻기 위해 남의 논에서 농사일을 했다. 그는 농사일을 하면서도 주일이면 성실히 교회에 나갔다. 외할아버지인 고씨 노인은 선두1리에 위치한 선두교회7) 설립자 중 한 명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최병열의 외갓집은 독실한 기독교 가정이었다. 현재는 선두2리는 마을주민 80% 정도가 기독교 신자이지만 마을에 교회가 생기기 전에는 10가구도 되지 않았고, 선두포 마을에는 세 가구 정도였다. 최병열은 모태신앙이었으므로 교회에 다니면서 성인이 되어서는 주일학교와 여름 성경학교 선생님을 하기도 했다. **신춘분의 어린 시절** 신춘분은 아버지 신찬휴?~1964와 어머니 김종순 사이에서 5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신춘분의 고향은 김포시 하성면 전류리로 한강 근처에 위치한 마을이다. 신춘분이 유년시절을 보낸 전류리는 임진강을 따라 내려오는 한강이 흐르고 포구가 있는 마을로 내수면 어업을 하는 곳이었다. 신춘분의 집은 아버지의 연세가 많아 어업은 하지 않고 대신 어머니가 농사를 지었다. 평범한 농촌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형제는 많고 당시에 농사가 잘 되지 않아서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았다. 신춘분은 위로 언니 한 명과 아래로 여동생 두 명, 남동생 한 명이 있다. 신춘분의 어머니는 일제강점기 때 ‘처녀공출’을 피해서 소금가마니에 숨어서 김포로 왔다고 한다. 김포에 도착해서 만난 사람이 신춘분의 아버지이다. 김포는 논이 넓어서 신춘분의 집도 1,500평 정도의 논농사를 지었으나 물 부족과 농사를 지어도 수확량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어린 시절에 항상 배가 고팠다고 한다. 그래서 부모님은 끼니 해결을 위해서 신춘분과 다른 형제들을 남의집살이를 보냈다. 남의집살이를 하면 품삯을 받으면서 숙식이 제공되기 때문에 굶는 일은 없었다. 신춘분은 국민학교도 마치지 못하고 12살에 서울에 있는 친척집으로 아이들을 돌보고 집안일 해주는 일을 하러 갔다. 신춘분은 교사인 친척을 따라 서울에서 경기도로 다시 서울로 지역을 옮겨 다니면서 친척집에서 아이들을 봐주고 일을 했다. 신춘분이 경기도 오산으로 일을 하러 갔던 해에 신춘분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때 신춘분의 나이는 12살이었다. 그러나 오산에서 김포까지는 12살의 어린 나이에 혼자 오기에 먼 거리였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듣고 눈물만 흘렸다고 한다. 신춘분은 남의집살이로 12살부터 고향을 떠나서 유년시절 고향에 대한 기억이 크게 나지 않는다고 한다. 신춘분은 22살까지 친척집에서 일을 하고 명절때나 집안에 큰일이 있을 때만 전류리로 와서 가족들을 만났다. 22살이 되던 해에 선두2리로 시집을 가 있는 고향 언니인 조월분여, 1948년생, 선두포 거주의 중매로 최병열을 만났다. 중매를 하고 1년 정도 전류리 집에서 어머니 옆에서 농사 일을 배우다가 23살에 혼례를 치르고 선두2리로 시집왔다. # 나. 부부의 결혼과 그 이후 1. 부부의 혼인 최병열과 신춘분은 신춘분과 한 동네에 살면서 친하게 지냈던 언니인 조월분의 중매로 만났다. 조월분은 신춘분보다 5살이 많은데 결혼을 일찍 해서 1967년에 선두2리로 시집 왔다. 조월분의 남편인 유재용남, 1941년생, 선두포 거주과 최병열은 한 동네에 살면서 가까운 사이였다. 그래서 조월분은 성격이 착하고 성실하게 일하는 최병열을 친정 동네에 친한 동생이었던 신춘분의 짝으로 좋을 것이라 여겼다. 조월분은 신춘분에게 자연스럽게 최병열을 소개시켜주기 위해서 신춘분이 자신의 집에 놀러왔을 때 자리를 만들었다고 한다. 1974년 여름에 최병열과 신춘분은 처음 만났다. 신춘분은 최병열의 형편이 어려웠지만 사람이 착실하고 착해서 사람 하나 보고 시집을 오게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최병열은 신춘분을 처음 보고 결혼을 해야겠다고 생각하여 다음날 신춘분이 집으로 떠나기 전에 온수리에 있는 반도사진관으로 가서 함께 사진을 찍었다. 신춘분은 신부가 도망 갈까봐 사진을 찍어둔 것이라고 우스갯소리로 이야기한다. 당시에는 약혼을 하고 약혼사진을 찍는 것이 유행이었으나 최병열은 급한 마음에 사진을 먼저 찍었다고 한다. 선두2리에서 처음 만난 후 최병열은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기 위해 김포에 있는 신춘분의 집으로 왔다. 약혼을 하고 1년 정도 후에 결혼을 했는데, 신춘분은 어린나이에 도시로 남의집살이를 하러 가서 농사일에 대한 경험이 없었다. 그래서 친정에서 어머니께 밭을 매고 모를 심는 것부터 차근차근 배우면서 결혼 준비를 했다. 약혼식은 신춘분의 집에서 양가 식구들끼리 식사를 하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당시에는 약혼을 할 때 지금처럼 따로 식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신부의 집에서 가족끼리 식사를 하고 사주단자를 보내고 혼사婚事를 의논하는 것이 약혼식이었다. 약혼을 할 때는 남자집에서 폐물을 보내는데 신춘분은 금반지 세 돈과 저고리 옷감을 받았다. 최병열과 신춘분은 1975년 11월 5일에 최병열이 다니던 선두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기독교인이 많은 강화에서는 교회나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경우가 많았다. 신춘분은 기독교인이 아니었지만 기독교를 믿는 시댁의 법도를 따라서 시어머니와 최병열이 다니는 선두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전통혼례에서는 혼례를 치르기 하루 전이나 당일에 신랑이 신부집으로 함을 보내는 ‘납폐納幣’의 예를 행한다. 그러나 기독교식 결혼식은 교회에서 치르므로 신춘분은 결혼식 당일 아침에 교회 앞에서 함을 받았다. 신춘분은 결혼식 당일 온수리에 있는 제일 예식장에서 드레스를 빌리고 머리와 화장을 했다. 신춘분보다 앞서 기독교식으로 결혼식을 한 사람은 드레스를 입지 않고, 흰색 저고리와 치마를 입고 면사포를 썼다. 혼례를 치를 때 신랑집에서 폐물을 보내면 그에 대한 답례인 예단과 신부가 결혼하여 사용할 물건 등을 보낸다. 신춘분은 친척집에서 일해서 모은 100만원으로 신랑 양복과 코트, 시계와 시어머니, 시누이들 예단, 자신이 결혼해서 쓸 살림 등을 마련했다. 부부는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최병열의 집에서 잔치를 했다. 최병열은 형편이 어려웠기 때문에 잔치는 크게 하지 못했지만 없는 형편에 최대한 노력했다고 한다. 집에서 잔치를 하던 시절에는 돈으로 부조현금부조를 하기보다 현물現物부조가 중심이었다. 현물부조는 돈이 아닌 물건으로 하는 부조를 말하는데, 대개 마을에서는 잔치에 필요한 술, 감주, 국수 등 음식 위주로 했다. 최병열은 잔치 때 찰떡, 골무떡, 송편을 차려서 사람들에게 대접했다고 한다. 쌀이 귀한 시절에 떡 3가지를 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민가에서는 결혼하는 집에서 모든 음식을 준비하기보다 현물부조를 받거나 가까운 이웃과 품앗이로 나눠서 하기도 했다. 최병열도 가까운 이웃집과 품앗이로 음식을 준비해서 잔치를 했다. 결혼 후 최병열은 일찍 분가를 한 큰 형과 둘째 형을 대신하여 어머니를 모셨다. 신춘분은 결혼 이후부터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17년 정도 모셨는데, 시집살이에 대한 기억은 크게 없다고 한다. 결혼을 해서 부모를 봉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어머니에게서 살림에 대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어 좋은 시간이었다고 기억한다



가족사진


-
일상생활

가. 부부의 하루 일과 부부는 현재 논 2,000평과 밭 1,000평 정도를 소유하고 직접 농사짓고 있다. 마을에서 논농사를 짓고 있는 주민들은 대부분 위탁 영농에 맡겨서 하지만 최병열은 아직 일하는 것이 힘들지 않고 스스로 할 수 있기 때문에 모든 농사를 직접 짓는다. 최병열은 트랙터를 가지고 있어서 농사를 짓기에 수월하다. 현재 쓰는 트랙터는 5번째 바꾼 것이다. 트랙터는 구입비용이 비쌌지만 과거에는 트랙터로 남의 논농사를 지어주면서 돈을 벌었다고 한다. 트랙터는 쟁기, 로터리 등을 부착하여 흙 파기, 논·밭 갈기, 비료주기 등 다양한 것을 할 수 있어 인력이 훨씬 작게 들어서 편리하다. 밭에는 계절별로 안 심는 작물이 없을 정도로 다양한 작물을 심고 있다. 부부는 감자, 고구마, 배추, 고추, 가지, 오이, 당근, 파, 양파, 고사리 등 다른 농가에 비해 훨씬 많은 작물을 농사짓고 있다. 그래서 부부는 2월 말부터 12월 초순까지 농사일로 바쁜 날을 보내며, 농사꾼은 항상 바쁘며 바빠야 먹고 살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하루일과2


이애순의 살림살이

살아온 이야기

# 가. 이애순의 젊은 시절 결혼 전 이야기 이애순은 1942년 선두포 마을에서 태어났다. 2017년 기준으로 나이는 76세이다. 형제관계는 언니 순예88세, 애래80세와 여동생 애자74세, 남동생 원건70세으로 총 1남 4녀이다. 언니 순예와 애래는 서울에서 살고 있고, 여동생 애자는 인천에, 남동생 원건은 선두포마을에 살고 있다. 언니와 여동생은 결혼 후 강화도를 떠나 살게 되었고, 남동생 원건은 젊은 시절 직장생활을 위해 서울로 떠나 살다가, 다시 선두포로 집을 지어 들어왔다. 원건이 살고 있는 집은 이애순의 가족이 어린시절부터 살던 집터에 있던 집을 허물고 새로 지은 것이다. 이애순의 친정가족은 할어버지 이전부터 선두포에 살았다. 이애순은 정확한 시기를 기억하지 못했지만 태어날 당시부터 현재의 집터에 거주한 것으로 기억했다. 당시 다른 대부분의 선두포 주민들의 삶이 그러했듯이 이애순의 집 또한 집 주변 밭에서 농사를 지었고, 집에는 닭도 몇 마리를 길렀다. 어린 시절 살던 집은 전통적인 강화도의 열린 ‘ㄱ’자형으로 먼저 본채를 짓고 후에 별채를 추가한 형태였던 것으로 기억했다. 벽은 흙으로 만들고 초가지붕의 형태를 하고 있다. 별채는 추후에 추가로 지어진 것 같다고 구술했다. 오스굿이 촬영하여 민족지에 게재된 ‘ㄱ’자형의 집의 사진이 있는데, 그 모양과 형태가 매우 흡사했다고 한다. 이원건과 이병희(남,1943년생 선두포거주)는 이사진을 보고 이애순의 친정집이었을 것으로 추측했다. 이애순은 온수리에 있는 길상국민학교를 졸업했다. 당시 선두포에 살던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주로 전등사가 있는 산정족산성 서문을 넘어 등하교를 했다고 한다. 동생과 함께 학교를 가는 날이 많았다고 한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면 어린 동생 원건을 돌보기도 하고 집안일을 하기도 했다. 이애순의 아버지는 이애순이 어린나이에 돌아가셨는데, 정확히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는 기억하지 못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 할아버지, 할머니와 살았다. 그녀는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상급 학교로 진학하지 않고, 밭일 등을 하며 집안일을 거들었다. 당시 강화도에는 동일방직, 심도직물과 같은 규모가 큰 방직 공장이 많아, 강화도의 젊은 여자들은 방직공장에 많이 취업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애순은 따로 나가서 일을 하지 않고, 동생들을 돌보면서 집안일과 밭일을 하며 젊은 시절을 보냈다. 결혼 전의 이애순의 삶의 이야기에서 특별한 것은 없었다. 주로 집안일과 밭일을 하며 동생들을 돌봤다. 그런 가운데 결혼할 나이가 되어, 선두포에 살던 이웃 주민의 중매로 당시 선두포에 살던 지금의 남편김은섭을 만나 결혼을 하고 동들머리의 시댁에서 시부모와 시할머니를 모시고 함께 살게 된다. # 나. 결혼 이후 살아온 이야기와 가족관계 이애순의 나이 21세에 동네 이웃 아저씨의 중매로 한 동네에 살던 김은섭과 만나 결혼식을 올린다. 결혼 당시 김은섭의 나이는 25세였다. 결혼식은 친정 마당에서 초례(醮禮)로 올렸다. 당시 결혼식이 끝나면 대부분 가마를 타고 시댁으로 왔는데, 당시 이애순이 친정에서 시댁이 가깝다는 이유로 걸어서 동들머리마을에 있는 시댁으로 왔다고 한다. 추운날로 기억하는데, 지금도 가마를 못타고 시집온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고 했다. 결혼식을 올리고 시댁에 들어온 이후 지금까지 현재의 위치에서 살고있다. 결혼을 하고 시댁으로 올 때는 이불과 농, 옷시댁어른 옷, 세숫대야, 요강, 놋대야 등 간단히 사용할 것만 챙겨왔다. 처음 시집왔을 때 시부모님뿐 아니라 시할머니와 함께 살았는데, 시부모님은 인천에서 부동산업을 하셔서 부부는 주로 시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시할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이애순은 시할머니를 모셨다. 57년전 결혼할 당시 시댁의 가옥은 현재 집의 위치에서 창고가 있는 서편 쪽에 흙집으로 지어져 있었다. 당시 흙집으로 지붕에는 초가를 올렸다. 후에 1970년대에 벽을 새로 하고 함석을 올려 새로운 집을 현재의 가옥 위치에 새로 지었다. 그리고 20년여년 지난 1994년, 부엌을 입식으로 바꾸고 안방과 부엌의 위치를 바꾸는 공사를 했다. 또한 대문을 새로 하고 옆쪽에 창고도 만들었다. 2000년에 아들 김재성이 결혼하면서 마지막으로 집을 수리했는데 뒤에 방을 늘리고, 창고 옆에 아들내외가 사용할 화장실과 방을 새로 만들었다.



이애순 부부의 결혼식 사진


-
일상생활

가. 이애순의 일상생활 이애순의 일상생활은 평범한 하루 일과와 특별한 하루로 나누어서 기술했다. 조사자가 하루일과를 인터뷰로 조사내용을 보완했다. 하루 일과는 농번기와 농한기를 나누어 구분했다. 특별한 하루는 조사 기간 중에 교회 야외 주일예배를 기술했다. 나. 특별한 하루 교회 주일 야외예배 | 독실한 기독교 신도인 이애순에게 주일 예배를 보는 것은 일상적인 주일의 풍경이다. 하지만 이런한 일상적인 주일예배 가운데 1년에 한번 체육대회를 겸해 야외예배활동을 한다. 올해는 5월21일은 야외예배를 진행했는데, 이날이 1년에 한번 있는 길상교회 체육대회 겸 야외예배 날이다. 장소는 그레이스힐 운동장인데1) 평소와 같이 5시 반쯤 일어나 식사를 하고 예배를 갈 준비를 했다. 10시부터 시작이지만 9시까지 도착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많은 교인들이 행사장인 그레이스힐 운동장에 도착해 있었다. 앞서 말한바와 같이 야외예배는 1년에 한번인 행사로 체육대회를 겸해서 진행됐다.



이애순의 하루일과


살림살이 제작과정

수수빗자루

커넬리우스 오스굿Cornelius Osgood, 1905~1985은 강화도의 수수빗자루가 신기하였는지 그의 책자 삽화에 크게 그려 넣었고, 그 수수빗자루는 현재 예일피바디자연사 박물관Yale Peabody Museum of Natural History에 소장되어 있다. 조사팀이 강화도를 처음 찾았을 때 민가 곳곳에서 수수빗자루가 걸려 있는 것을 쉽게 목격할 수 있었으며, 몇몇 민가에서는 수수빗자루감을 횡대에 걸어 둔 모습을 보고 1947년이나 현재에도 수수빗자루는 선두2리의 중요한 청소도구임을 알 수 있었다. 다만 수수빗자루의 자루는 과거 짧은 것에서 긴 것으로 진화하였는데, 그것은 허리가 불편한 노인들이 안마당을 쓸 때 편안함을 고려한 것이다. 이번 조사팀은 추후 전시 활용을 목적으로 수수빗자루 만들기 전 과정을 사진과 영상으로 남겼으며, 주민들로부터 별도 기증을 받기도 하였다. 수수빗자루 제작 재연은 선두포 유재용남, 1941년생, 선두포 거주 이 맡아주었으며, 그 제작 과정은 다음과 같다. 수수빗자루 제작 ① 수숫대 건조하기 낟알을 탈곡한 수숫대를 몇 단씩 묶어 건조한 곳에 걸어둔다. 빗자루용 수수는 알이 긴 것이 좋은데, 그래야만 빗자루 날개가 길어져 늦게 닳아 오랫동안 사용할 수 있다. ② 부드럽게 만들기 빗자루를 만들기 위해서는 작년에 수확해서 걸어둔 수숫대를 부드럽게 만들어줘야 빗자루를 만들기에 용이하다. 우선, 수숫대 5~6개를 손에 쥐고 방망이로 두들겨서 부드럽게 한 후 잠시 물에 담가 꺼내 건조를 시킨다. 이것은 빗자루가 부러지지 않고 손으로 구부리기 편하게 하기 위해서다. ③ 수숫대 선별하기 한 개의 빗자루를 만들기 위해서는 대략 30개의 수숫대가 필요하다. 우선 길이가 유사한 수숫대 5개를 하나의 묶음으로 6개를 만들어 바닥에 정리해 둔다. 빗자루를 만들때는 5개를 한 뭉치로 해서 엮어나간다. ④ 빗자루 만들기 수수로 빗자루를 만들기 위해서 ‘조리대’라는 틀이 필요하다. 조리대는 가로목에 끈이 달린 것으로 가로목은 발바닥으로 고정하고 끈의 가장자리는 허리멜대에 고정시킨다. 조리대는 수수대로 단단하게 고정하는 역할을 하며, 수수뭉치 5~6개를 넣을 때마다 그것을 돌려서 단단하게 고정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런 다음 끈으로 각각의 수수 등과 허리를 끈으로 돌리면서 고정시킨다. 그런 다음 빗자루 수수뭉치와 뭉치 사이에 새로운 수수뭉치를 넣어 6~7차례 반복하면 빗자루 날개의 모습이 갖추어진다. ⑤ 자루 만들기 빗자루의 형태가 만들어지면 끈으로 빗자루 자루와 날개 부분을 고정시킨다. 손잡이 부분은 손에 쥐기 편하게 적당한 굵기로 만드는데, 이때 손잡이 안쪽의 수숫대를 잘라서 적당한 손잡이를 만든다. 만약 자루 부분이 약하면 10cm정도의 나무를 박아 손잡이를 단단하게 고정시킨다. 자루로 올라간 일부 수숫대는 칼로 잘라 적당한 굵기의 손잡이가 되도록 한다. 한 개의 빗자루를 만드는데 대략 30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된다. ⑥ 건조하기 완성된 빗자루는 물을 뿌린 후 2일 이상 건조과정을 거친다. 건조가 된 수수빗자루는 맷돌로 눌러 그 형태로 잘 잡히도록 한다.



수수빗자루


-
지게

선두2리 노인회장 고동순남, 1941년생, 선두포 거주은 예전에 어디를 가더라도 지게를 지고 나갔기 때문에 “지게는 의관衣冠”이라고 표현한다. 지게는 농가당 가족 수만큼 소유하였으며, 여성들도 바쁜 농사철에는 지게를 졌다. 지게는 벼나 나무 등을 운반하거나 바소거리발채의 방언를 걸어 거름을 운반할 때 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현재 지게를 가지고서 농작물이나 비료를 운반하는 농가는 전무하여 이제 지게의 과거 영광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몇몇 농가에서 사용하지 않고 있는 지게가 방치된 채 집의 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이번 지게제작은 강화도에 이주한 지 30년 된 채선엽남, 1929년생, 초장골 거주을 통해서 제작하였다. 채씨는 지금도 나무를 가지고서 여러 인형, 동물상 등을 제작하고 있고, 십자가상을 만들어 마을 전체 교인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채씨는 고향이 평안도라서 강화도 지게보다 평안도 지게 제작이 익숙하고, 분단 된 상태에서 평안도 지게의 특성을 살핀다는 측면에서 그가 과거 제작했던 지게를 만들도록 하였다. 평안도 지게는 강화도 지게와 달리 ‘제가지 지게’가 아닌 지게다리에 지게가지를 끼우는 ‘쪽 지게’ 형태인 것이 특징이다. 또한 평안도지게는 강화도 지게보다 크며, 지게 가지가 아래쪽에 위치하여 짐을 최대한 많이 실을 수 있다. 그것은 평안도지역이 평지이기 때문에 이동에 어려움이 적어서 가능하다. 한편, 지게의 어깨끈은 새끼줄을 잘 꼬는 고동순 노인회장이 만들어 줬다. 새끼는 왼새끼이며, 그것이 오래간다고 한다. 지게 제작 ① 재료 준비 지게는 1년 이상 건조시킨 재료를 이용해서 만든다. 만약 수분을 먹은 나무로 만들면 사용 도중에 비틀어지거나 갈라질 수 있다. 지게제작은 통상 겨울철 농한기農閑期 때 제작한다. 지게재료는 부위에 따라 각각 다른 재질을 사용하는데, 지게다리는 가문비나무나 노간주나무를, 지게 가지는 물푸레나무나 아카시아 나무, 빗장은 가문비나무를 주로 사용한다. 나무 가운데 노간주나무는 강하고 썩지 않아 최고의 나무로 여기고, 물푸레나무도 강한 편이라서 짐을 싣는 지게가지로 안성맞춤이다. 그러나 이들 재목이 없을 때는 소나무를 사용하기도 하는데 주로 지게다리감으로 많이 이용한다. 그리고 지게감은 강약이 조화를 이루어야 오래 사용한다고 여겨 양지와 음지에서 자란 나무를 선별한다. ② 재료 다듬기 및 결합 지게다리 한 짝을 적당한 크기로 잘라 대패로 다듬고 빗장 4개를 걸 구멍을 끌로 동그랗게 파낸다. 그리고 지게다리에 걸 빗장을 각각의 크기에 맞게 자른 후 가장자리는 지게 다리에 잘 삽입할 수 있도록 원형으로 다듬는다. 그런 다음 지게빗장을 지게다리 아래쪽에서 위로 올라가면서 건다. 이때 망치로 두들기면서 구멍에 잘 삽입하도록 한다. 지게 빗장이 지게다리에 모두 걸어졌으면 바깥쪽으로 나온 빗장 부분을 톱으로 잘라내고 전기톱으로 가지런하게 정리해준다. 지게다리에 빗장이 모두 건 다음 지게가지를 지게다리 몸체에 결합한다. 지게가지도 지게다리에 삽입되는 부분은 원형으로 다듬어 망치로 두들겨서 결합시킨다. 지게가지는 껍질을 벗기지 않은 채 그대로 둔다. 지게틀이 완성되면 3번째와 4번째 빗장 사이 중간의 지게다리에 구멍을 내고 그곳에 철사를 연결하여 지게가 벌어지지 않도록 한다. 일명 ‘탱게’를 틀어주는 것이다. 지게감이 완성되면 등태를 설치한다. 등태는 짚을 엮은 것으로 짚의 밑 부분이 지게 아래다리 아래쪽으로 향하도록 하고 짚의 윗부분을 3번째 빗장에 머리를 엮듯이 감싸 고정시킨다. 그런 다음 등태를 엮은 새끼줄 3개를 각각 지게다리 3곳에 묶어 등태를 밀착시킨다. 어깨끈은 등태의 윗부분과 3번째 빗장에 새끼줄을 이용해 고정시키고, 아랫부분은 마지막 빗장에 고리 형태로 엮는다. 그러면 지게가 완성된다. 지게가 완성되면 작대기를 만드는데, 평안도의 작대기는 ‘촉작대기 형식’으로 강화의 작대기와 달리 마지막 세장에 걸 수 있게짧게 만든다. ③ 등태 설치 ④ 작대기 강도 측정 ⑤ 강화도 지게



지게


-
가리

선두포 마을 민가 중 일부 가옥에는 과거 사용했던 가리를 보관하고 있다. 가리의 크기는 사람 키에 따라 그 크기가 달라지고 재료도 싸리나무, 대나무 등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오스굿의 책자에서도 가리 삽화를 볼 수 있으며, 현재 그 가리는 예일대피바디자연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번 가리 제작은 선두포 마을 입구인 보리고개에 거주하는 배석중남, 1943년생, 보리고개 거주가 제작하였다. 배씨는 과거에도 가리를 제작한 적이 있지만, 그 시간이 40년은 넘었다. 그만큼 선두포에서 가리는 옛 어구가 되어버렸다. ① 재료 준비 가리 재료는 싸리나무, 노간주나무, 대나무 등으로 만들지만, 노간주나무를 최고로 여긴다. 노간주나무는 유연성이 좋고, 썩지 않으며, 몸체가 고르고 단단하다. 또한 사람의 피부와 접촉을 하여도 나무 겉 표면의 부드러움으로 인해 상처를 입지 않는다. 그런데 노간주나무는 나이테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더디게 자란다. 가리로 만들 재목材木은 10년이 넘어야 하는데 그 지름이 2~4cm에 불과하다. 노간주나무는 조선낫으로 껍질을 벗기고 말리면 휘어지지 않아서 물이 있을 때 가리를 제작한다. 그러나 선두포에는 과거 노간주나무가 많았으나 큰 나무들이 자라면서 노간주나무는 모두 죽어 찾기 힘들다. 만약 노간주나무가 없다면 대나무나 싸리나무를 이용해서 만든다. 대나무의 경우 조리대를 많이 사용하고 만약 조리대가 없으면 굵은 대나무를 쪼개서 가리를 만들기도 한다. 싸리나무의 경우 참싸리를 사용하나 선두포에 최근 참싸리를 찾기 힘들다. 따라서 이번 가리 제작에는 인삼밭에서 많이 사용하고 있는 조리대를 가지고서 가리를 제작하였다. 조리대는 대나무 종류로 전라도 산간지역에 서식하며, 1년 이상 묵은 것을 사용한다. ② 코방테 만들기 가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재료 등을 칼로 다듬거나 휘어진 부분을 펴는 작업을 해야 한다. 과거 노간주나무로 가리를 만들 때는 먼저 나무불에 휘어진 노간주나무를 곧게 펴는 작업을 하였다. 이때 버팀목을 이용해서 가지로 곧게 폈다. 그러나 조리대의 경우는 그 가지 자체가 곧게 되어있어 불로 펴는 작업은 필요가 없고 다만 마디 부분을 칼로 다듬어 준다. 가리는 코방, 중간테, 아래테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코방은 가리 위쪽의 원형 부분으로 그 테는 노간주나무를 불에 구워 원형으로 구부려 만든다. 지름 25cm. 그 다음 노간주나무의 표면을 매끄럽게 칼로 긁어내고 나무의 가장자리를 원형이 유지되도록 끈으로 엮어 일정기간 보관한다. ③ 새끼줄 만들기 우선 가리를 만들 조리대는 위는 가늘고 아래는 굵은부분이 가도록 배열을 하고, 가리 대를 고정하는 새끼줄은 통상 오른새끼를 하는데, 배씨는 왼새끼와 오른새끼는 강도에 차이는 없고 습관의 차이로 본다. 가리대를 고정하는 새끼줄은 가리의 세 부분을 엮기 때문에 3줄은 길게 꼬아야 한다. 새끼줄을 꼬기 앞서 볏짚을 털어 깨끗이 정리하고, 물에 적힌 후 건조하여 새끼를 꼬아나간다. ④ 가리대 만들기 이번 가리제작용으로 사용한 조리대는 지름이 0.8cm로 인삼지붕받침용 삼포로 사용한다. 가리 제작에 필요한 코방테노간주나무, 짚, 새끼줄, 조리대, 칼 등을 정렬하고 본격적으로 가리를 만들기 시작한다. 코방을 엮은 다음에는 조리대 길이87cm를 일정하게 맞춘 후 코방에 조리대를 끈으로 고정해 나간다. 코방에 조리대가 모두 엮어지면 코방 주위를 이엉처럼 엮은 짚으로 감싸 손으로 잡게 편하게 만든다. 짚을 엮는 방법은 코방 안쪽으로 엮으면서 위로 올리고, 새 짚을 안쪽에 넣어서 이어간다. 그리고 마지막은 새끼를 꼬아서 묶어준다. 그런 다음 마지막으로 대마껍질로 엮어 코방에 테를 고정하는데, 이번 제작과정에서는 철사를 이용하여 테를 고정하였다. ⑤ 새끼줄로 가리대 엮기 코방 작업이 완성되면 가리 중간테 부분은 새끼줄지름 0.5cm로 조리대 하나하나를 엮어가면서 고정시키는데, 중간테의 새끼줄은 가리를 고정시키거나 벌려주는 역할을 한다. 새끼줄의 굵기는 가리 폭의 크기를 결정한다. 즉, 굵은 새끼줄을 사용하는 경우에는 가리 폭이 넓어지고 가는 새끼줄은 가리 폭이 좁아진다. 그것은 새끼줄로 가리의 대를 일일이 엮어가면서 결합시키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이다. 보통 가리 대를 고정하는 새끼의 굵기는 0.5cm 정도이다. 그런데 가리 제작에 가장 중요한 것은 가리 아래쪽 끝이 안쪽으로 모아지게 만들어야 물고기들이 도망가지 못한다. 코방과 중간테가 완성되면 아래테 부분을 새끼줄로 고정하는 작업을 한다. 이 과정이 끝나면 가리의 형태가 완성되는데 그 골격이 변하지 않도록 원형 테를 가리 안쪽에 고정을 시킨다. ⑥ 가리 사용법 시연 가리는 사람 키에 따라 길이가 달라진다. 즉, 키가 크면 가리도 길게 만든다. 이번 만든 가리의 크기는 윗지름은 24.5cm, 아래지름은 86cm, 높이는 95cm이다. 재료를 구비한 상태에서 한 개의 가리를 만드는데, 소요된 시간은 1시간 30분 정도로 긴 시간을 요구한다.



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