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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식물민속 약초상과 심마니

주제 강원도 식물민속 약초상과 심마니
조사 살림살이 이야기, 사진, PDF

진부면 약초거리의 변화와 흐름

진부장의 역사와 약초거리의 부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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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산이 많고, 평야가 적어서 육로보다 수로를 이용해 물자를 이동하는 것이 훨씬 유리했다. 택리지에서도 “물자를 옮기는 데 있어서 말이 수레보다 못하고, 수레는 배보다 못하다. 우리 나라는 산이 많고 들이 적어서 수레가 다니기에는 불편하므로 온 나라의 장사치는 모두 말에다 화물(貨物)을 싣는다. 그러나 목적한 곳으로 길이 멀면 노자(路資)는 많이 허비되면서 소득은 적다. 이러므로 배에 물자를 실어 옮겨서 교역하는 이익보다 못하다”고 하였다. 이처럼 우리나라는 강을 중심으로 물자가 이동하였는데, 진부에는 오대천이 흐르지만, 물자를 실은 배가 이동할 수 있을 만큼의 큰 강은 아니었다. 즉, 진부장은 수로교통 중심의 거래방식에서 육로교통 중심의 거래방식으로 바뀌면서 부흥하기 시작한 장시인 것이다. 따라서 진부장의 발전 과정과 약초거리가 성행했던 당시를 살펴보고자 한다. **진부장의 역사** 과거 진부는 서울-강릉 간 도로 중간에 있는 지역이었다. 조선시대의 평해로(관동대로)로 불리는 도로망을 살펴보면 서울-망우리-평구역-양근-지평-원주-안흥역-방림역-진부역-횡계역-대관령-강릉-삼척-울진-평해이다. 진부는 관동대로가 지나가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장시가 꽤 번성할 수 있었다. 다만 진부장이 성행하게 된 과정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인근에서 열리는 장들과의 관계를 살펴봐야 한다. 현재 평창군에는 미탄장(1, 6), 봉평장(2, 7), 계촌장(2, 7), 진부장(3, 8), 대화장(4, 9), 평창장(5, 10)으로 총 7개의 5일장이 있다.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교통이 편리한 곳에 물산이 집결되고, 장이 형성되었다. 이렇게 형성된 장을 중심으로 각 지역에 물산이 퍼졌다. 평창군에서는 과거부터 대화장이 그 역할을 해왔었다. 대화장은 조선시대까지 전국 15대 시장에 속할 만큼 크고 성행했던 장으로, 강릉과 남한강 유역을 연결했던 대표적인 장시였다. 한국전쟁 이전까지, 즉 수로교통이 활발하던 때까지 대화장은 수도권 지역의 물산이 남한강을 타고 원주에서 육로를 따라 최종적으로 도달되는 곳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대화장은 관동대로 상에 입지하면서, 산간지역, 평야지역, 그리고 해안지역이 교차하는 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크고 유명세를 날렸다. 이처럼 대화장은 전국에서 손꼽을 만큼 큰 장이어서 과거 “서울 동대문 밖에서 대화장을 보라”라는 말이 있었다. 이는 대화장이 그만큼 크고 운영이 잘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점차 수로교통이 약해지면서 대화장 물산의 집결지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자, 장을 찾는 사람들도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특히 1974년 무렵 새말-강릉간 영동고속도로가 개통되었는데, 대화면을 통과하던 차량들이 이곳을 지나가지 않자 쇠퇴하기 시작했고, 고속도로와 인접해 있는 진부면은 더 번성했다. 이로 인해 진부장의 규모는 이전보다 더욱 커지기 시작했다. 이에 ‘동대문 밖 대화장’이었던 것이 후대에 와서 “동대문 밖 진부장, 횡성장이 제일 잘 된다”로 바뀌어 전승되고 있기도 했다. 수로교역이 약해지면서 고속도로와 가까운, 즉 물건을 실어 나르기 편리한 진부장이 번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평창군지에서 2002년 도시경제과의 자료를 인용해 제시한 표인 평창군 읍·면 지역별 업소 현황을 보면 진부장 번성했음을 알 수 있다. ![](/media//archive/photo/S00000066/service/S00000066_I461485.PNG) 위의 표를 보면 진부면은 다른 지역과 비교해 업소의 비율이 월등히 높다. 가장 번성했다던 대화면은 148개의 업소만이 있을 뿐이고, 평창읍은 274개의 업소가 있다. 반면 진부면의 경우 366개로 대화면의 2배 이상의 업소 비율을 보이고 있다. 당시 진부가 얼마나 번성한 지역이었는지 알 수 있다. 또 진부장에는 많은 상인들이 오갔기 때문에 200여개의 음식점과 60여개의 숙박시설의 운영이가능 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행했던 진부장 약초거리** 영동고속도로 개통이 진부장의 활력을 불어넣긴 했지만, 그 이전에도 약초장과 우시장은 활발하게 거래가 이루어졌었다. 진부 약시장은 옛날부터 유명했는데, 1950년의 한국전쟁 이후 별로 활발하지 못 했다가, 50년대 말부터 그 수요가 많아져서 그 지역 일대의 약초 재배가 활기를 띠었다. 특히 원주 약령시의 약재는 대부분이 진부장과 그 인근 지역에서 공급되었다고 한다. 진부 약초시장이 유명할 수 있었던 것에는 지형적 조건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진부면은 약 해발 450m정도에 위치해 있으며, 동쪽으로 황병산, 서쪽으로 가리왕산, 남쪽으로 박지산, 북쪽으로 개방산과 오대산이 둘러쌓고 있어 분지의 형상을 취하고 있다. 이 산에서 채취한 약초들은 진부로 모여들었다. 또 약초의 질이 좋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약초시장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진부 약초거리가 특히 성행했던 시기는 1980년대에서 1990년대로, 1988년 올림픽 이후 국가의 경기가 좋아지고, TV가 보편화 되면서 방송에서는 건강과 관련하여 약초에 대한 것을 많이 알리기 시작하면서이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건강식품에 대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는데, 약초가 건강보조식품으로 인식되기 시작하면서 전국의 약초시장이 크게 성행하기 시작했다. 약초시장의 활성화는 진부장에도영향을 미쳤다. _"약초는 진부로 다 모였어요. 대화서 사는 거나, 봉평서 사는 거나 일로 다 진부 쪽으로 가지고 왔어요. 약초꾼들이 가져오는 게 아니라, 약초 중간상인들이 가져오는거야. 지금 말하자면 목장꾼들이. 그 사람들이 저울을 가지고 와가지고 사서 짊어지고 또 그걸 모아가지고 실고 오는 차가 또 있어. 그때는 트럭에다가 밑에다가 약 실고, 위에다간 사람 가득 실어. 여기 장이 제일 크고. 서울 경동시장에서도 사러 내려오고, 제천에서도 오고, 대구에서도 오고, 오는 사람들이 전부 일로 많이 모이니까."_ 진부장의 약초거리는 전국에서 몰려들었는데, 개인 구매자가 아닌 대량으로, 즉 도매로 구입하는 상인들이었다. 특히, 목장꾼이라 불리는 이들이 와서 약초를 구입했다. 목장꾼은 길목을 지키는 장꾼들을 일컫는 말로, 이들은 진부에서 약초를 구매한 뒤 다시 가까운 봉평, 대화 외에도 전국 각지로 가져가 판매하였다. 구매한 약초는 트럭에 실고, 그 위에 사람을 태워 버스의 역할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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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부 약초가게를 통해 본 약초시장의 변화

진부장의 약초거리는 1970년대 후반에서 2000년도에 가장 전성기였는데, 그 당시 진부장의 약초거리에는 약 30여개가 되는 점포가 있었고, 시장이 성황을 이루었다. 약초가게가 늘어나고 번성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점차 하나 둘씩 사라지기 시작해 지금은 영흥상회와 강원약초영농조합 두 곳만이 당시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진부장의 약초거리 변화는 단순히 전통시장의 쇠퇴 때문만은 아니다. 이는 한국 사회의 변화, 그리고 이로 인한 약초시장의 변화와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장에서는 진부장의 약초거리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두 가게인 영흥상회와, 강원약초상회의 이야기를 통해 한국 약초시장의 변화까지 들여다보고자 한다. #3대째 이어 온 영흥상회 영흥상회는 1976년 무렵 함영완에 의해 설립되었다. 1대 운영자인 함영완은 진부면 척천리에서 태어나 약초농사를 지으며 생활해 왔었다. 당시 약초를 재배해서 파는 것이 농사를 짓거나, 품을 파는 것 보다 수입이 좋았다. 그 뿐만 아니라 한학에 능하셨던 아버지 덕분에 약초에 대해서도 많이 배울 수 있었는데, 이는 가게를 운영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현재는 아들인 함승주가 운영하고, 손주가 이를 물려받기 위해 가게 일을 돕고 있다. ![](/media//archive/photo/S00000066/service/S00000066_I461486.png) _영흥상회_ **영흥상회의 탄생** 강원도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약초농사를 지었는데, 그 중 특히 당귀농사를 많이 지었다. 강원도와 같은 산간고냉지에서 재배되는 당귀는 몸통부분이 크고 가는 뿌리가 적어 품질이 좋다.22 지금도 진부에서는 당귀농사를 많이 짓고 있어, ‘진부당귀’특허를 받아 활발히 판매되고 있다. 이처럼 강원도에서 재배되는 당귀는 다른 지역보다 질이 좋아 특산물로 여겨진다. 이 같은 환경에서 함영완 역시 일찍부터 당귀를 재배해 팔았다. 그런데 각 가게마다 생산자의 약초를 구매하는 가격이 달랐을 뿐만 아니라 한 가게에서도 비싸게 구매했던 약초를 다음번에는 값싸게 구매해 생산자였던 함영완은 손해를 입었다. 그러다 보니 약초를 생산하는 농민들은 손해를 보고 약초를 팔았다. _“똑같은 물품을 갖다가 이 집에 갖다 주고, 저 집에 갖다가 주고 이렇게 몇 군대 나눠서 줘 보면 가격차이가 적게 나야 하는데, 가격차이가 너무 많이 나는거라, 이 사람들한테 가게 주인들한테 맡겨서 위탁수수료를 주고 팔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집은 한관에 7천 원 주는 집 있는가하면, 어떤 집은 한 관에 5천 원 밖에 안되고, 차이가 너무 많이 나니까. 그래서 다음번에 바꿔가지고 많이 주는 집에 많이 갖다 주면 그 집이 적게 나고, 이렇게 그때그때마다 상황이 달라지니까는 내가 갖다놓고 배짱 튕겨가면서 이것만이라도 재 값을 받아야 되겠다. 생산품을. 아버지 말씀에 의하면 내가 직접 생산한 걸 갖다가, 가게를 할 목적으로 한 게 아니고, 생산한 물건을 제대로 받고자 해서.”_ ![](/media//archive/photo/S00000066/service/S00000066_I461487.png) _영흥상회 1대 함영완_ 같은 약초, 같은 양을 가지고도 가게마다 약 2천 원의 차이가 나는 걸 여러번 겪으면서 함영완은 상인들이 폭리를 취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에 함영완은 약초를 재 값에 팔겠다는 생각에 장사를 결심하게 된다. 즉 생산자에서 판매자가 되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결심은 쉽사리 실행으로 옮기기 어려웠다. 함영완의 부친은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즉 오랫동안 한학을 공부해왔던 부친은 상업을 멀리해야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시장에서 장사를 하는 것을 크게 반대했다. 그런 탓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야 작은 가게를 얻어 장사를 시작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어렵사리 열게 된 가게는 영원히 흥하길 바라는 의미에서 ‘영흥상회(永興商會)라고 이름 지었다.
**영흥상회의 시작** 지금과 달리 1980년대까지만 해도 가게에서 약초가 판매되는 곳들은 대부분 한의원, 한약방이었다. 한의사, 한약사들은 대부분 한학을 배워 평범한 서민들에 비해 지식이 많은 사람들이는데, 함영완 역시 부친을 통해 한학을 배웠기 때문에 이들과 소통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고, 이를 통해 친분을 쌓을 수 있었다. 이렇게 쌓은 친분은 장사를 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되었다. _“장사 시작할 무렵에는 한의원 한약방에 한 그 분들은 모두 한약을 공부한 분들이니, 그래서 거기는 장사를 전국에서 모여서 장사하러 오는 분들이 한약을 많이 배웠으니까 서로 언어가 통해야 그것도 약장사도 하잖아요. … 그러니까 그 분들 언어가 통하니까 서로 잘 통하고 그랬죠. 약명을 잘 알고 이러니까 상인들이 전국에 오는 상인들하고 저녁으로 만나면 또 막걸리도 한잔 하면서 저녁으로 대포집에 가서 그 얘기하면 수수하게 뭐 한 12시까지 얘기할 수 있죠. 그럼 다른 사람 꺼 놔두고 우리 꺼 사가_ _져 가죠.”_ 아버지에게서 배운 한학은 장사를 하는데도 유용했다. 장사를 시작했을 무렵 한의사, 한약사들과 친분을 쌓아 고객으로 끌어들였고, 그 덕분에 판매 수입을 올릴 수 있었다. 그럼에도 장사의 매출을 많이 올리지는 못했다. 약초를 구입하는 방식 역시 품이 많이 드는 작업이었다. # **강원약초 영농조합** 진부면 전통시장의 끝 부분 한 귀퉁이에 오래된 약초가게가 있다. ‘강원약초 영농조합’38이라는 낡은 간판에, 약초가 가득한 공간인 이곳은 진부장 약초거리의 역사나 다름없는 곳이다. 현재 이곳은 박정동이 운영하는데, 아버지 박증숙의 가게를 물려받았다. 강원약초는 93년도에 설립된 것으로, 그 이전에는 박증숙 개인이 운영하던 약초상회가 있었다. 이 장에서는 강원약초 영농조합 뿐만 아니라 박증숙이 약초장사를 하면서 일어났던 사건들을 통해 진부장 약초시장의 단면을 살펴보고자 한다. 박증숙은 1937년 평창군 상진부리에서 집안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박증숙은 아버지대부터 아들까지 3대째 약초장사를 해오고 있으며, 진부장에서 영흥상회와 함께 가장 오랫동안 약초장사를 해 온 집안이다. **약초장사의 시작** 진부에서 50년 가까이 약초장사를 해온 박증숙의 일은 이제 아들이 물려받아 가업이 되었다. 진부 노인회관에서 진부장의 오래된 약초가게를 물으면 ‘강원약초’보다 ‘박증숙씨네’를 먼저 말한다. 이는 박증숙씨가 오랫동안 약초거리에서 약초를 팔아왔지만 가게이름이 바뀌고, 강원약초라는 상호명이 후대에 새로 생긴 것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또 그의 이름이 통용되는 것은 박중숙 자체가 간판과 같은 존재라고 이해할 수 있다. 박증숙의 아버지는 약초를 사다가 장에서 판매하는 일을 하셨다. 군대에 가기 전부터 박증숙은 아버지를 도와 약초장사를 하였다. **강원약초의 현재** 나이가 연로해진 박증숙의 뒤를 이어 현재는 막내아들인 박정동이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박정동은 27살이 되던 2002년부터 가게 일을 도왔다. 그는 강원약초 영농조합 상호를 이어가며 ‘소규모 거래’를 시작했다. 도매시장은 줄어드는 반면 소매시장은 점차 커지는 것에 주목했던 것이다. TV의 보급으로 많은 사람들이 방송을 쉽게 접할 수 있었는데, 건강을 주제로 한 프로그램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건강은 곧 약초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예컨대 ‘무릎이 아플 때 먹으면 좋은 약초’ 같은 내용의 방송들이 종종 나왔던 것이다. 이러한 방송은 약초시장에 바로 영향을 미쳤다. 그만큼 개인이 약초를 구매하려는 사람이 많아졌던 것이다. 수많은 정보가 쏟아지는 인터넷으로 이제는 누구나 검색 한 번으로 약초에 대한 각종 효능에 대해 알 수 있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약초를 찾기 시작했다. 미디어매체의 영향으로 약초는 ‘약’에서 ‘건강보조식품’으로 인식되어간 것이다. 이후 약초시장에도 큰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도매가 주로 이루어지던 시장에서 소매의 규모가 커진 것이다. 소규모 시장에 주목했던 박정동은 강원약초의 상호를 내건 홈페이지를 만들어 약초판매에 주력했다. 또 블로그를 운영하며 약초에 대한 자료, 약초 농장의 현황 등을 기록해 자신이 판매하는 약초에 대한 자신감과 신뢰도를 높였다. 그렇게 지금 강원약초 시장은 소매거래가 활성화되어 있다. 그 밖에도 미국의 한의원으로 수출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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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초시장의 변화 요인과 영향

# 중국산 약초의 도입으로 인한 약초시장의 혼란 약초시장의 약초는 그동안 국내에서 나는 것을 중심으로 유통되었기 때문에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았다. 약초의 출하시기에 따라 약초 값이 달랐을 뿐이었다. 하지만 1992년 8월 24일 체결된 한중수교는 역사적으로도 양국의 사회, 문화, 경제 전반에 걸쳐 큰 반향을 일으킨 큰 사건이었다. 당시 한국으로서는 새로운 도약과 발전을 위하여 새로운 출로를 찾고 있었고, 중국과의 관계개선이 한국경제의 발전 동력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에 한국은 중국에서 많은 부분들을 수입하기 시작했는데, 그 중 약초도 포함되어 있었다. 중국산 수입품은 그 가격이 국산품보다 현저히 낮았기 때문에 약초시장의 엄청난 영향을 가져온 것이다. 당시 신문에도 이에 대한 기사가 실릴 만큼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일이었다. **_농산물 藥材등 中國産 몰려온다_** _“국간 수교를 계기로 중국의 값싼 농·수산물의 수입이 더욱 활발해질 것으로 보여 가격경쟁력에서 크게 뒤지고 있는 농·어촌에 일대 비상이 걸렸다. … 중국 농·수산물의 경우 대부분가격이 국산의 절반이하수준인데다 일부품목은 10분의 1밖에 안돼 앞으로 농·어민들이 입을 타격은 엄청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2~3년 전부터 국내시장에 물밀 듯이 들어오고 있는 중국산은 … 일반 농산물은 물론, 당귀, 복령, 인삼 등 약초에다 넙치, 가자미를 비롯한 수산물 등 50여 종에 이르고 있다. … 지난해의 경우 강원도에선 7256농가에서4357톤의 황기를 비롯, 당귀, 질경이 등 약용작물을 재배했으나 중국산의 무차별수입이 예상되는 올해부터 절반 수준으로 떨어질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_ _**밥상에 오른 수입먹거리 만큼 우리네 농토에 잡초가 돋는다**_ _“… 주부 박미자(46·서울 성동구 화양동)씨는 지난 설날 차례상에 올리기 위해 시장에 나가 고구마 줄기와 고사리 등 마른나물 몇가지를 샀다. … 가게주인에게 국산임을 몇 번이나 확인한 뒤 구입했다. 그런데 집에 가져와 물에 불려본 후에야 속고 산 것임을 알게 됐다. … 검은 빛이 돌고 가는 것을 보니 소문에 듣던 중국제품이었던 것이다. … 한약재는 4천9백78t이 수입됐는데, 이 가운데 25% 가까이가 중국산이며, 나머지는 홍콩에서 들어온 것으로 되어 있으나 홍콩을 거친 중국제품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 한약재 26.3%나 늘었다. 이밖에도 밀수품과 중국 동포등이 불법반입하는 한약재 등을 감안하면 그 물량은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_ 위의 두 기사 내용을 보면, 중국산 농·수산물의 가격은 적게는 국내산의 반값에서 1/10 정도로 값이 저렴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 1992년 기사에서 2~3년 전부터 중국산 농·수산물의 수입이 물밀 듯 들어오고 있다고 해 이미 1990년대부터 중국산이 수입되고 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특히 약초도 수입되어 강원도에서 약초를 재배하는 농가가 절반가량 줄어들 것이라고 내다봤다. 또 국산 나물을 사려고 한 사람은 국산으로 둔갑한 중국산 나물을 구입하는 문제들이 생겨나는 것을 알 수 있다. 기사의 내용을 보면 1993년경 약초의 25%가 중국산으로 들어오지만 홍콩을 경유해서, 밀수품으로, 불법으로 반입되는 양이 적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처럼 중국산 수입은 약초시장에 엄청난 파동을 불러일으켰다. 값싼 중국산을 사다가 국산으로 둔갑시켜 비싼 가격으로 판매해 많은 마진을 남기는 상인들의 수도 늘어난 것이다. 또 이는 그만큼 국산 약초들이 그만큼 공급이 되지 않는 것이니 국산약초 시장이 작아지는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중국의 값싼 약초와 경쟁하기 위해 약초 값이 떨어져 생산자와 상인들에게는 큰 손해였다. 이처럼 중국산 농·수산물의 수입은 약초시장의 판도가 바뀌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또한 생산자와 상인들의 손해도 막심 할 수 없었다. # 산림녹화 사업으로 인한 산약초의 감소 꾸준히 활성화되던 약초시장이 점차 쇠퇴되기 시작한 요인 중 하나는 산림녹화사업이었다. 과거 한국은 연료가 나무였기 때문에 산에서 많은 나무를 베어다 사용했다. 그런 탓에 민둥산, 즉 나무가 없는 산이 많았다. 하지만 1973년부터 시작된 산림녹화사업으로 산에서 나무를 지속적으로 심었을 뿐만 아니라 나무를 베는 것이 금지되었다. 그러면서 점차 나무가 울창해지기 시작했는데, 이 때문에 약초도 찾기 어려워졌다. # 약초시장의 변화와 흐름 약초시장은 약 30년 사이에 엄청난 변화를 겪은 것으로 보인다. 이 변화들은 단순히 시간의 흐름 때문이 아니었다. 그 가장 기본적인 배경에는 첫 번째 산림녹화로 인한 산약초의 채취가 어려워진 것이다. 두 번째는 삶의 질이 향상됨에 따라 산에 약초를 캐러 다니는 약초꾼들의 감소이다. 세 번째는 미디어의 발전으로 많은 사람들이 약초에 대한 정보와 지식을 손쉽게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네 번째는 중국산 약초의 수입이다. 이로 인해 국산 약초가 가격경쟁에서 밀리면서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마지막으로 한약재에 판매와 관련한 우수한약재관리규정이 생겨난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은 약초시장의 변화를 가져온 가장 큰 배경이었다. 이로 인한 약초시장의 변화는 첫 번째 약초 판매의 비율이 한약재보다 식품이 높아 진 것이다. 두 번째는 소매시장의 활성화다. 도매가 중심이었던 약초시장은 약초에 대한 정보, 구매가 손쉽게 이루어지고, 개개인들이 관심이 높아지면서 소매시장이 커진 것이다. 아직도 약초시장은 변화의 흐름 속에 놓여 중국산 약초의 수입으로 약초시장은 현재 중국산과 씨름을 여전히 하고 있는 중이다. 상인들은 수입약초와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약초상인들은 ‘원산지 표시’가 운영되기를 바라고 있다.



약초꾼의 삶

현대 약초꾼의 약초채취

# 어깨 넘어 배운 약초 고봉진은 1955년 평창군 대화면 하함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와 함께 살았는데, 당시 외할아버지는 약초를 채취해 생계에 보탰다. 과거에는 마을 뒷산에는 약초나 나물이 많아 흔히 찾아볼 수 있었는데, 이를 채취해 팔면 수입이 나쁘지 않았다. 고봉진은 약초를 채취하는 할아버지를 따라 자연스럽게 약초를 익힐 수 있었다. _“어릴 때부터 원래 외할아버지가, 외할아버님이 저희 집 와서 오래계셨어요. 그때 산삼 이런건 안하시고, 약초만 캐셨어요. 96에 돌아가셨나. 그랬는데, 이제 할아버지가 하실 때 조금 보고, 그때 약초를 조금씩 시작하면서 그때 이제 거의 다 배웠죠. 어차피 산에 그때는 그 옛날에는 사실 놀 것도 없고, 뭐 시간나면 산에도 가고 그러니까. 그때 이제 등 넘어서 배우기 시작한게 그때 거의 다 배웠죠. 그러다가 산에 가서 약초도 캤고.”_ 고봉진은 할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어깨너머로 약초를 익힐 수 있었는데, 눈에 익은 약초는 산에서 놀며 자연스럽게 찾을 수 있었다. 고봉진에게 산은 놀이터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산의 지형, 식물을 보고 익히는 감각이 체화될 수 있었다. 하지만, 성인이 되면서 직장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 약초 채취 과정 얼음이 녹고 날씨가 따뜻해지던 5월 무렵 조사자들은 고봉진의 약초채취산행에 동행했다. 고봉진은 아침 7시 경 약초를 채취하기 위한 채비를 마치고 집을 나섰다. 이때 복장은 등산복 차림으로 가방을 매는데, 가방 안에는 곡괭이, 호미, 가위 등과 같이 몇 가지의 물건만 챙겼다. 약초를 캐기 위해서 사람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곳으로 장시간 다니는데, 가방이 무거우면 그만큼 더 힘들기 때문에 짐을 최대한 가볍게 하는 것이다. 디지털카메라는 반드시 챙기는 데, 이는 인터넷 카페에 약초를 판매할 때 자신이 직접 채취했다는 것을 증명할 사진을 촬영하기 위함이다. 가는 산은 정해져 있지 않고 그때마다 다르다. **① 곡괭이로 약초가 있는 주변의 흙을 파낸다.** **② 약초가 보이면 손으로 흙을 걷어낸다.** **③ 약초의 주변의 나무 뿌리를 끊어낸다.** **④ 모습이 들어난 약초.** **⑤ 약초를 캐기전 사진을 찍는다.** **약초 정리** 집에 도착해 채취한 약초를 꺼내어 종류별로 정리한다. 그 뒤 약초마다 저울로 무게를 재고, 볼펜을 옆에 두어 크기를 확인 하며 사진으로 기록한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값어치가 더 좋은 약초는 따로 분리해둔다. 특히 이날 채취했던 15년산 도라지의 경우 줄자로 길이를 재는 등 다른 약초에 비해 더 꼼꼼하게 확인하였다. **인터넷을 통한 약초거래** 한 포털사이트에 약초카페를 검색하면 약 3천여 건이 나온다. 물론 활발하게 활동이 이루어지는 곳은 몇 되지 않지만, 카페의 수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사람들이 약초에 대한 관심이 많다는 것을 말한다. 약초카페는 동호회와 다른 성격을 보이는데, 동호회가 정보교환, 모임이 중시되는 곳이라면 약초카페는 판매와 구매가 주가 되어 그 사이에서 정보교환, 정기 모임이 이루어진다. 많은 구매자를 확보하고, 판매가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카페의 활성화가 계속 유지되어야 한다. **약초 배송하기** 전국 방방곳곳에 카페 회원들이 있기 때문에 약초 배송은 택배거래를 주로 이용한다. 택배 회사와 3개월 동안 300개 이상의 택배를 거래 할 시에는 계약이 가능해지는데, 그러면 저렴한 배송비로 택배를 보낼 수 있다. 하지만 산약초는 채취되는 양이 많지 않고, 거래 수를 충족시키지 못한다. 그런 까닭에 약초를 채취하는 2~3사람이 한 팀을 이루어 ‘평창산약초’로 계약하였다. 약초를 보낼 때는 약초 크기에 맞는 아이스박스에 이끼를 깐 뒤에 약초를 정성스럽게 올린 뒤 다시 이끼를 올려 덮는다. 그리고 테이핑을 잘 하여 봉한 뒤 박스에 넣어 보낸다. 약초를 받은 사람은 인증사진을 카페에 올려 고마움을 표하고, 판매자에 대한 신뢰성을 높인다. **중국산 약초소동** 한중수교가 활발해진 이후 약초 업계는 ‘중국산 약초’로 인한 몸살을 앓았다. 중국산 약초를 국산으로 속여 파는 경우가 늘어나 국산 약초의 값도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국산 약초를 본인이 직접 채취한 듯 사진을 찍은 뒤 판매해 소동이 일었다. **제자 키우기** 약 30여 년 간 약초꾼으로 생활해 온 고봉진에게 몇몇 제자들이 있다. 자신에게 직접 찾아와 약초를 배우기를 청하는 사람도 있고, 본인이 나서서 가르쳐준 사람도 있다. 그러나 모든 이들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아니며, 성실하고 ‘끼’가 보이는 사람을 주로 가르쳐준다. 특히 의지가 박약하고 한 두 번만 하다 포기하는 사람은 꺼리는 편이다. 어떤 선생이든 열정이 있고, 오래가는 학생을 가르치고 싶은 것이다. **만족스러운 약초꾼의 삶** 사회생활에서 벗어난 고봉진은 자신의 직업에 자부심을 느낀다. 약초채취를 통해 일정하지는 않지만 수입이 있으며, 사람들 사이에서 힘들어 할 일 없어졌기 때문이다. 오히려 직장에서 받던 스트레스를 모두 떨쳐버릴 수 있었기 때문에 만족한다. 수입 역시 지금 자신의 나이에서 벌 수 있는 금액보다 높다. 또한 건강까지 챙길 수 있으며, 자신이 원하는 시간에 일을 하러 갈 수 있어 만족도가 높은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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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초꾼의 변화

전통 약초꾼에 대한 자료는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에 지금의 약초꾼과 비교하긴 어렵다. 다만 고봉진의 사례를 통해 현대사회의 약초꾼에게 끼친 영향 중에서 거래 방법에 대해 주목하고자 한다. 한국사회의 인터넷 보급은 1994년부터 시작되었다. 인터넷은 물리적인 거리가 무의미해지는 공간이다. 세계 각지의 사람들이 인터넷이라는 공간에서 어느 시간에나 대화가 가능해진 것이다. 이러한 엄청난 변화로 인터넷에는 약초관련 카페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기 시작했고, 그 중 활성화가 잘 이루어진 곳만 지금까지 운영되어 오고 있다. 이 카페들은 단순히 정보 공유뿐만 아니라 거래까지 이루어지고 있다. 또 소통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까닭에 구매자가 원하는 형태로 약초를 구성 혹은 보관해 보내주기도 한다. 인터넷의 등장은 정책으로 어려워진 산약초 시장의 새로운 유통 공간이 되었다. 채취한 산약초는 이제 약재상에 팔아서는 좋은 가격을 받기도 어렵고, 약재로 판매하기도 어렵다. 그런 까닭에 오히려 인터넷상 거래가 더욱 활성화 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산약초는 건강보조를 위한 용도 뿐만 아니라 담금주, 관상용으로도 많이 팔리고 있다. 이처럼 약초와 산에 대한 지식을 충분히 가지고 있는 경우 오히려 약초꾼으로의 생활을 충분히 만족할 수 있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강원도 심마니 이야기

산삼과 심마니에 대한 관심

Panax ginsengC. A. wey라는 학명의 식물은 우리가 흔히 산삼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산삼은 과연 한국에서만 나는 것일까? 산삼의 원산지는 중국 북부지방과 한국으로 다른 곳에서는 산출되지 않는다. 다만 미국의 록키산맥과 캐나다 지역 일부에서 자생하는 것은 한반도에서 자생하는 산삼과 동목이종(同木異種)으로 학명이 아메리카 인삼이라고 한다. 그중 가장 약효가 좋은 것은 한반도에서 자생하는 산삼이다. 산삼은 흔히 신이 내린 약초라고 해서 신이 점지해 준 사람만이 먹을 수 있다고 여겨질 만큼 귀한 존재였다. 학명에서도 산삼의 효능을 알 수 있다. Panax 뜻을 살펴보면 Pan은 ‘모든’을, Axos는 ‘의학’을 나타낸다. 즉, Panax는 결국 ‘만병통치’를 의미한다. 산삼은 시대를 막론하고 아주 귀한 존재로 국가에서 관리하는 물품 중에 하나였으며, 산삼을 함부로 채취하게 되면 처벌을 받았다. ![](/media//archive/photo/S00000066/service/S00000066_I461488.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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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마니가 걸어온 길

# 심마니로의 입문 심마니는 어떤 사람들이며, 어떻게 심마니가 되었을까? 심마니에 대한 조사를 시작하기 전 들었던 의문들이다. 이들은 지금까지 대중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요즘 들어 인터넷 포털 사이트 등에 심마니와 관련한 동호회가 생겨나면서 조금씩 알려지게 되었다. 전통사회에서는 심마니를 전업과 부업으로 구분하기도 했다. 전업은 말 그대로 산삼 채취만을 전문적으로 하고, 부업은 농한기 때 간헐적으로 활동하는 사람을 말한다. # 심마니의 교육 평범한 약초꾼으로 지내다가 산삼을 발견했다고 바로 심마니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하루 아침에 약초꾼에서 심마니로 탈바꿈 하는 것이 마치 손바닥 뒤집는 것처럼 쉽지 않다. 이들은 여전히 약초와 산나물을 채취하러 다니면서 그 주변에 있는 산삼을 찾기 시작한다. 하지만 산삼을 발견하기 전보다는, 산삼을 찾으려는 노력을 더 하는 것은 틀림이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산삼에 관심을 가지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경제적 가치 때문이다. 그럼 이들은 심마니가 되기 위해서 어떤 과정을 거쳤을까? 먼저 주변에 산삼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사람을 찾아가서 산삼에 대한 정보를 얻는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자신이 심마니가 되기로 결심을 하면, 자신을 가르쳐 줄 ‘어인마니’를 찾아야 한다. 어인마니는 심마니를 이끄는 사람으로 산삼에 대한 지식이 매우 뛰어나며, 산삼 서식지에 대한 정보도 많이 가지고 있다. 어인마니는 심마니 무리에서도 경험이 많고, 똑똑하고 현명한 존재로 다른 심마니들에게 존경의 대상이 된다. 특히 어인마니 중에서도 좋은 산삼을 많이 채취하고 심마니 사이에서도 실력뿐 아니라, 인품에서도 인정받은 심마니에게 사람들이 모인다. 일반인이나 약초꾼이 산속에서 우연히 산삼을 채취했을 때 가장 흔히 범하는 실수 중에 하나가 바로 채취하는 산삼의 품질을 고가로 여기는 것이다. 이들이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산삼이라면 고가를 받을 수 있다는 선입견 때문이다. 그렇다고 심마니들이 천종산삼 같은 고가의 산삼을 채취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다. # 심마니의 채삼(採蔘) 활동 심마니들에게 로또는 바로 ‘천종(天種)’산삼이다. 천종산삼은 말 그래도 하늘에서 내려준 산삼이라고 한다. 천종산삼은 산삼의 원종(순수종)으로 심마니들도 평생 한 번 채취하기가 쉽지 않은 매우 귀한 산삼이다.95 하지만 천종산삼을 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심마니들이 비박을 하면서 장기간 산삼을 찾아 다녀도 어떤 경우에는 한 뿌리도 못 캘 수도 있다. 좋은 산삼을 채취하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가? 산삼은 어떤 환경에서 잘 자라는가? 심마니라고 하면 산삼의 특성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산삼이 있는 곳은 산 정산에서 보았을 때 대개 북쪽 지역에 자생할 확률이 매우 높다. 또한 산삼은 반건반습(절반은 건조하고 절반은 습함)한 곳에서 자생하며, 침엽수와 활엽수가 2:3의 비율로 되어 있는 곳이 최적이라고 한다.96 다만 1000m 이상의 높은 산에서는 북향과 남향 같은 방향은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왜냐하면 1000m 이상 높은 산에서는 그 일대 전체가 숲으로 우거져 있기 때문이다. 반면 1000m 이하 고도에서 산삼이 북향에 잘 자라는 것은 남향에 비해 상대적으로 햇빛을 덜 받기 때문이다. 산삼은 햇빛에 장시간 노출이 되면 녹아버리고, 반대로 너무 습한 곳에서는 곰팡이가 핀다고 한다. 전통사회에서 난방 재료는 주로 땔감을 이용하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땔감을 구하기 위해서 산에서 벌목을 자주했다. 하지만 난방 재료가 땔감에서 연탄이나 기름으로 교체되고, 국가에서 산림녹화사업을 추진하면서 숲이 우거지기 시작했다. 이런 변화는 산삼 서식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래서 산의 남향에서도 산삼이 서식하면서 심마니들이 조금씩 채취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산의 북쪽에서도 산삼이 서식을 못할 수 있다. 왜냐하면 북향에 햇빛이 들지 않고 숲이 우거지면서 땅의 습기가 많아져 산삼이 서식할 수 없는 환경이 되기 때문이다. # 심마니의 경제활동 심마니들이 산행하는 방식은 개인형과 팀형으로 구분하는데, 개인형은 당일 산행에서 주로 이루어진다. 반면 팀형은 비박을 할 때 4~5명 정도 팀을 이루어 산행을 하는 방식이다. 물론 당일 산행을 할 때도 2~3명 정도 팀을 이루어 가지만, 개인이 단독으로 산행을 하는 경우가 더 많다. 심마니들이 팀 형태로 산행을 할 때는 각자 팀원들끼리 산삼을 발견할 경우 어떻게 분배할 것인지 미리 정해둔다. 그럼 좀 더 구체적으로 심마니들이 어떻게 산삼을 판매하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심마니들은 비박을 해도 산삼을 채취하기 위해서 함께 다니는 것이 아니라, 각자 이동하면서 개인적으로 산삼을 채취한다. 전통 심마니들은 산삼을 발견하면 “심봤다”를 외치면 주위에 있는 심마니들이 그 장소로 오거나 그 자리에서 주저앉는다고 한다. 산삼을 발견한 심마니는 산삼을 채취한 다음, 팀원들에게 자리를 물려줘야 다른 팀원들이 그 주변에서 산삼을 채취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심마니들은 산삼을 발견하고 난 다음 그것을 어떤 형태로 판매하는지 궁금하다. 산삼의 가격이 천차만별이고, 그것에 대한 객관적인 기준이 아직 없기 때문에 어떻게 가격이 책정되고 판매되는지가 매우 궁금했다. 이런 궁금증을 심마니들의 이야기를 통해 알아보도록 하자. 심마니들이 팀으로 산행을 할 때 수익금 분배 방식은 독매(獨賣)와 동매(同賣)로 나눌 수 있다. 독매는 말 그래도 산삼을 발견한 사람이 모두 그 판매 금액을 차지하는 방식이다. 반면 동매는 팀원들이 발견한 산매의 판매 금액을 팀원의 수로 나누어 분배하는 방식이다. 이런 방식은 팀을 구성할 때 어인마니가 중심이 되어 팀원들과 협의하여 결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