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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 북창리 내창마을 살림살이

주제 오목이네 살림살이
조사 살림살이 이야기, 공간과 살림살이, 통계, PDF

김옥단, 나의 인생

무주군 적상면 괴목리 하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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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김옥단, 고향은 ‘무주군 적상면 괴목리 하조’이다. 부모님은 12살 차이가 나셨고, 아버지 이름은 김봉원, 어머니는 최채빈이다. 내 위로 언니가 넷, 오빠가 하나 있고, 나는 그 중 막내였다. 내가 3살 때 6·25 전쟁이 났다. 전쟁이 나기 전 우리 집은 하조에 논 15마지기, 큰 밭을 4자리나 가진 부자였다. 모두 소작을 주고 집에도 머슴이 있을 정도로 넉넉하게 살았기 때문에 아버지는 특별히 일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저 ‘뽀얀 신’을 신고 담배를 물고 논물이나 보러 다니는 정도였다. 넉넉했기 때문에 ‘집채 무더기같이 나락을 쌓아놓고’ 다 먹지 못할 정도로 여유 있게 살았었다. 전쟁이 나자 우리 가족은 무주로 피난을 갔는데 당시 큰언니는 16살, 둘째언니는 15살, 오빠가 12살, 바로 위의 언니가 6살이었다. 무주로 피난을 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어머니가 원인 모를 병을 앓다가 1950년 2월 23일(음력)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오빠도 아프기 시작해서 ‘오빠가 죽을까봐’ 서둘러 하조로 돌아왔다. 하지만 오빠도 두 달 뒤 에 죽었다. 나는 그때 너무 어렸기 때문에 아무것도 몰랐지만, 나중에 어디 가서 물어보니 좋지 않은 방향으로 이사를 가서 어머니가 죽었고, 오빠도 무주에서부터 어머니와 같이 죽을 운이었기 때문에 돌아와서도 죽음을 면할 수 없었던 것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피난을 가면서 다시 돌아올 것에 대비해 나락 30가마니를 땅에 묻어두고 갔다고 한다. 하지만 집에 돌아와 보니 다 타버려 시커먼 재만 남아 있었고, 원래 행랑, 몸채, 대청마루에 대문까지 있던 집이 모두 불타 없어져버렸다. 전쟁 중에 어머니와 오빠를 잃고, 집과 나락까지 불타 생계는 막막했고, 아버지는 남은 딸 넷을 데리고 혼자 살림을 해야 했다. 그래도 땅이 있었기 때문에 ‘놉’을 얻어 방과 정지가 하나씩 있는 ‘토막집’을 지어 살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젖먹이였기 때문에 아버지는 젖동냥을 다녀야 했다. 그렇게 아버지는 딸네들을 데리고 방 하나에 소복하게 살았고, 우리를 키우느라 고생을 많이 하셨다. 11살 때 나는 홍진[홍역]을 앓았다. 아버지는 자식을 또 잃을까 곁에서 숨골을 후후 불어주었고, 무주까지 30리 되는 거리를 걸어 내려가서 약을 사오기도 했다. 홍진은 약을 먹어도 잘 듣지를 않아서 나는 꼬쟁이같이 말랐었다. 아버지의 극진한 간호 때 문인지 홍진은 그렇게 지나갔다. 나는 아버지가 반찬을 숟가락에 놓아주어야 밥을 먹었다. 김치, 청국장은 냄새가 난다고 먹지도 않았고, 쇠고기 장조림 같은 입에 맞는 반찬만 먹었다. 고등어, 꽁치도 하얀 살만 발라주면 먹고 그것도 몇 번 먹지 않아 아버지가 내게 밥을 먹이느라 애간장을 태웠다. 그때 10원짜리는 시퍼런 지폐였다. 나는 10원짜리 지폐를 주머니에 하나 가득 가지고 다녔었다. 10원은 한 끼 밥을 먹은 대가로 아버지에게서 받은 돈이었다. 그 정도로 나는 밥 먹는 일로 아버지를 힘들게 했었다. 그래도 우리 아버지는 ‘야 이노무 지지바야’라는 소리 한번 안 하고 우리를 키웠다. 가장 심하게 하셨던 소리가 “고얀 놈아, 그라는거 아니다” 정도였다. 아버지는 내가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72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다. 그때만 해도 명이 길다고 했었다. 지금도 아버지 모습이 눈에 선하다. 키가 ‘조그맣고 잘쪽하니 이쁘게’ 생겼었다. 나는 어머니도 아버지도 닮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큰언니는 아버지를 닮아서인지 인물이 좋아 8개 부락에서 1등으로 거론될 정도로 예뻤다. 아버지와 언니들의 보살핌 속에서 어느 새 커서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3학 을 다니다가 그만두었다. 그때는 다들 그랬다. 같은 동네에 시집간 큰언니가 일을 하기 위 해서는 조카를 봐주어야 했기 때문에 조카를 보는 일과 밭을 매는 일 등 가사를 돕기 위해서는 학교에 다닐 수가 없었다. 다니고 싶어도 그때는 다들 그랬기 때문에 학교를 다니고 싶은 간절함 따위는 느낄 수도 없었다. 조카를 보고, 밭을 매고, 밥을 하고, 빨래하고 이불보를 짜고, 삼[삼베]을 삶았다. 밥을 하려면 보리를 찧어 와야 한다. 보리를 여고[이고] 가서 방아를 찧고, 까불린 후 말려서 밥을 해먹었다. 이렇게 결혼하기 전까지 가사를 도우며 큰 애기가 되었다.



감자캐는 김옥단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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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애기 시절 ‘다까나 놀이’

이제는 그 시절이 다시 오지 않겠지만, ‘큰애기’ 때로 한번쯤은 돌아가보고 싶다. 그만큼 너 무 재미있었다. 하조에는 다른 동네 총각들이 눈독을 들일 정도로 큰애기들이 많았다. 하조 청년들은 같은 동네 처녀들을 보호해준답시고 다른 동네 청년들과 싸움을 벌일 정도였다. 나는 11살 먹어서부터 머리를 길러 땋고 다녔다. 14살에는 화장도 하기 시작해서, 눈썹을 그리고, 분을 바르고 볼에 연지도 찍었다. 평상시에는 꼬리치매[꼬리치마]를 입고 ‘자미사(紫薇紗) 저고리’를 입었다. 저고리는 빨간색으로 끝동과 고름, 곁마기를 장식한 삼회장저고리였다. 머리는 땋아서 허리춤까지 ‘질름질름’했고, 빨간 댕기를 드렸다. 버선을 신고 코빼기신을 신고 다녔다. 나는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것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다까나 놀이’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재미난 놀이 중 하나였다. 지금으로 치면 꼬리잡기와 비슷한 놀이이다. 10명 정도가 한편이 되어 선두로 선 사람이 싸우면서 내 편이 잡히지 않도록 하는 것이 규칙이다. 별다르게 재미있지도 않을 법한 놀이지만 그때는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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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과 출산 그리고, 두 아들의 죽음

17살에 결혼을 하면서 북창으로 왔다. 북창에는 이미 바로 위 김옥자 언니가 남편과 같은 집안 사람과 결혼해서 살고 있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인연이 닿아 언니와 남편의 집안 8촌 아저씨의 중매로 1964년 결혼하게 되었다. 나는 5번의 출산을 했다. 큰아들을 20살에 낳았고, 오목이는 24살, 건네는 27살, 남순이는 29살, 막냉이를 31살에 낳았다. 그러고는 더 낳을 수 없었다. 그 중 첫째아들과 ‘막냉이’ 아들을 출산 직후에 잃었다. 결혼 후 바로 첫째아들을 낳았다. 초산이라 그런지 낳을 때 힘이 많이 들었다. 아이도 나오느라 힘이 들었는지 울지를 않았다. 시어머니가 아이를 받아주었는데 아직 울지 않는 아이의 삼을 갈랐다. ‘삼을 가른다’는 말은 태를 끊는다는 말이다. 태를 끊고도 아이는 한참 동안 울지 않았는데 얼마 지나 아이의 입에서 거품이 뿌글뿌글 나오고 몸이 버둥거렸다. 한 30분이 지나자 아이의 몸이 늘어지면서 그만 숨이 끊어져버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이가 한참 울지 않으면 따뜻한 곳에 묻어서 울 때까지 기다렸다가 태를 끊어야 한다고 했다. 이를 몰라 울기 전에 태를 끊었고 그렇게 남편을 많이 닮은 첫째아이를 잃었다. 결혼한 지 3년이 되던 해에 남편이 군대를 갔다. 남편은 36개월간 군생활을 했고 돌아와서 오목이를 낳았다. 오목이는 생긴 것이 오목오목하니 예뻤다. 그래서 내가 ‘오목이’ 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양귀복이라는 이름이 따로 있었지만 식구들과 동네사람들은 모두 오목이라는 이름을 더 많이 썼고, 지금까지 우리 집은 ‘오목이네’로 불리고 있다. 동시에 내 이름도 ‘오목이’가 되었다. 남편은 나를 부를 때 ‘오목아’ 라고 부르고, 사람들도 나를 보고 ‘오목이즈마[오목이엄마]’라고 부른다. 둘째는 오목이랑 4살 터울로 이름은 양미숙이다. 미숙이는 지금 무주에서 학원을 차려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어릴 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무척 야무지다. 미숙이의 별명은 ‘건네’다. 첫째아들을 잃고 오목이를 낳고는 아들을 낳았으면 했는데 딸이었다. 그래서 이번은 ‘건너뛰고’ 아들을 낳을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건네’라고 지어주었다. 건네를 낳고 표고버섯을 재배하기 위해 시누가 살고 있던 영동 학산면 도덕리로 갔다. 남순이는 도덕리에서 낳은 딸이다. 표고 농사는 일이 많았다. 남순이를 낳고 3일 만에 몸조리할 새도 없이 부은 채로 표고대를 세우는 일을 하러 나갔다. 아기를 봐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기저귀로 둘둘 말아서 밭에 데리고 나가 가마떼기를 깔고, 바지기[광주리]를 놓고, 우산을 펴 햇볕을 가린 다음 그 안에 아이를 눕혀놓았다. 오목이와 건네에게 아이를 보라고 하고 나는 일을 했다. 일을 하다가 아이를 보러 가보았더니 아이에게 개미가 바글바글 붙어 있었다. 아기의 배총[배꼽]은 보통 6일 만에 떨어지는데 아직 배총도 떨어지지 않은 아기의 비린내를 맡고 개미들이 모여들었던 것이다. 그때 아이를 보고 속이 상해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조리를 못해 몸이 부은 데다가 너무 울어 눈이 부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남순이는 지금 33살이다. 아직도 어린아이인 것 같은데 결혼을 하고 자식까지 낳아 기르는 것을 보니 얼마나 대견한지 모른다. 아이를 낳으면 보통 6일 정도는 하혈을 한다. 생리대를 ‘가짐’이라고 부르는데 나는 3일 만에 일을 나가서 ‘가짐’ 차고 일을 해야 했다. 조리를 못하고 일을 했더니 입맛이 없어 밥도 못 먹겠고, 미역국도 써서 먹을 수 없을 지경이 되어 꼬쟁이같이 말랐었다. 조리를 잘 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도 관절이 좋지 않다. 아이가 셋이나 되었기 때문에 더욱 열심히 살았다. 아이들 뒤치다꺼리를 하고 놉을 얻어 일을 하면서 지냈다. 2년 후에 임신을 해서 아들을 낳았다. 낳아놓으니 허벅다리가 ‘자룩 자룩 자룩 자룩’ 하니 살이 통통했다. 막냉이[막내]는 나랑 똑같이 생겨서 둥글둥글했다. 코가 ‘둘름하니’ 올라붙었고, 귀가 입술까지 내려올 정도로 귓밥[귓불]이 컸다. 마치 부처님 같았다. 살이 보얗고 잘생겼었는데 지금 같았으면 사진이라도 찍어놓았을 텐데 너무 아깝다. 왜냐하면 막냉이도 낳자마자 내 손을 떠났기 때문이다. 막냉이는 도덕리에서 낳았는데 갑자기 산기가 있어서 아이를 받아줄 사람이 없었다. 시어머니는 북창에 있었고, 영동에 사는 시누 집까지도 10리나 되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남편이 산파노릇을 했다. 아이를 낳고 바로 태를 낳았는데 태를 끊기도 전에 태가 터져 버렸다. 아이가 나오면서 발톱으로 태를 건드린 것이다. 터진 탯줄로 아이의 피가 순식간에 쏟아져 버렸다. 나는 아이를 낳고 힘이 들어 아이 울음소리만 듣고는 기절해버렸다. 정신을 차려 보니 아이의 피가 쏟아지고 있었고, 울던 아이도 울음을 그쳤다. 태라도 얼른 끊었더라면 살았을 텐데 피가 너무 많이 쏟아져서 이미 너무 늦었다. 아이를 또 죽였다는 생각에 정신이 캄캄해졌다. 남편은 아이를 묻으러 갔고 마루에 서서 그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바람이 내 몸으로 다 들어와서 몸이 많이 붓게 되었다. 그 후로 3일 동안은 너무 아팠다. 첫날은 입에서 쇠똥냄새가 나도록 아프더니 나흘 째 되는 날은 멍하니 정신이 없었고 가만히 있다가도 배가 아리고 아팠다. 보통 6일 동안은 하혈을 하는데 이번에는 심상치 않았다. 얼굴이 새카마니 마르고 숨도 겨우 쉴 정도가 되었다. 사람도 잘 못 알아보고 걸음도 겨우 걸었다. 아마도 너무 애가 타서 사람이 ‘탈기(奪氣)가 졌던’ 모양이다. 계속 하혈을 해서 병원에 갔더니 자궁 안의 핏줄이 터져서 피가 멈추지 않는 것이라고 하면서, 배꼽 밑까지 절개를 하여 피가 멈추도록 수술을 하였다. 수술을 하면서 의사는 위험한 상황이라 아이를 더 낳지 않을 거라면 자궁을 들어내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하였고, 남편은 나를 살리기 위해 아들을 낳을 수 있는 가능성을 포기하고 자궁 적출을 결정했다. 나중에서야 알게 된 것이지만, 막냉이를 낳기 일주일 전에 먹은 꿩이 문제였다. 남편이 산에서 꿩을 잡아왔다. 별생각 없이 꿩을 삶아 먹었다. 그러고 나서 일주일 후 막냉이를 낳았다. 점쟁이는 ‘꿩 먹어서 좋은 아들 잘 죽였다’고 하였고 꿩 시늉을 내느라고 발톱으로 태를 터뜨린 것이라고 하였다. 그 소리를 들은 나는 정말이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이렇게 모두 다섯을 출산하였지만 그 중 아들 둘을 잃었다. 애지중지 키운 딸들은 모두 가정을 꾸리고 잘 살고 있고, 효녀 노릇을 단단히 하고 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 아들에 대한 그리움은 나이가 먹을수록 더욱 간절해진다. 내 사주팔자에는 아들 형제가 있다고 했다. 나 자신도 50, 60살이 되어도 아들을 낳아서 키우겠다던 사람이었는데 내 팔자에는 아들이 귀했던 모양이다. 큰아들은 지금 살아 있으면 42살로 큰사위와 동갑이다. 막냉이도 30살 장성한 청년이 되었을 것이다. 특히 막냉이는 갓을 쓰고 높게 앉아 있는 운이라는데, 살았다면 크게 한 자리를 했을지도 모른다. 얼마나 아들에 환장했으면 아이를 데려다 키웠을까. 막냉이를 잃고 수술을 한 후 바로 누가 얘기를 해주어 무주 대차리에서 남자 아이를 데려다 내 젖을 먹여 키웠다. 아이는 내가 우유와 영양제를 사다 먹여서 제법 통통해졌다. 하지만 내 젖을 먹이니까 갑자기 아프기 시작했다. 점을 봤더니 ‘성주 조상이 때려 눕혀서 죽는다’고 하면서 ‘안 죽이려면 데려다줘라’고 해서 얼른 데려다주었다. 그 아이는 장성해서 지금 서울에 가 살고 있다고 한다. 지금도 아들들과 비슷한 또래들을 보면 ‘아이고 나도 아들이 있으면 두갤 텐디…. 저게 다 우리 다 아들이래믄 얼마나 좋으꼬’ 하는 말이 하지 않으려고 해도 나도 모르게 마음에서 우러나온다.



양정기, 김옥단 부부의 일상생활_2007.7.31 낮잠을 청하는 김옥단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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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지중지 키운 딸들… 오목이, 건네, 남순이

지금 딸들은 모두 결혼을 해서 아이도 낳고 잘 산다. 큰딸 오목이는 영동 사람을 만나 결혼 해서 중학교 1학년인 아들과 초등학교 5학년인 딸을 두었다. 건네도 무주에서 남편과 함께 학원을 경영하면서 2007년 8월 17일(음력) 아들을 낳았다. 남순이도 무주 대차리 사람과 결혼을 해서 돌을 지난 딸을 두었다. 내가 키웠지만 다들 장성해서 가정을 꾸리고 사는 것을 보면 신기하고, 대견하다. 그래도 자식 걱정은 예나 지금이나 줄어들지 않는다. 옛날에는 아기를 낳고 일주일 누워 있으면 많이 쉰다고 그랬다. 오목이를 낳고 나흘 만에는 큰시누 대사[결혼]가 있었고, 건네를 낳고는 5일 만에 나와서 일을 했다. 남순이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조리를 잘 하지 못해서 허리 무르팍 마디가 쑤시고 관절이 아프다. 그나마 자식들이 관절에 좋다고 사다준 영양제 등을 먹고 올해 많이 나아졌다. 예전에는 아이를 낳으면 삽작거리에 금줄을 쳐놓았다. 아들을 낳으면 왼산내끼를 꼬아서 꺼멍[숯]과 고추, 명[목화꽃]을 각 3개씩 꽂아 쳐놓았고, 딸을 낳으면 꺼멍과 소깽이[솔가지], 명을 3개씩 꽂았다. 금줄을 치는 이유는 상주나, 궂은 것을 본 사람들은 부정을 탔기 때문에 들어오지 말라는 것이다. 쳐둔지 일주일만에 거두어서 삽작거리에 돌돌말아서 돌로 눌러 놓거나 다무락[담벼락], 훌타리[울타리] 같은 곳에 잡아 매어둔다. 그러면저 절로 어디로 날아가없 어진다. 하지만 우리아이들은 하나도 금줄을 치지 못했다. 오목이 낳고는 대사가 있었고, 건네, 남순이를 낳고도 일을 하느라 챙길 여유가 없었다. 대사가 있으면 이 사람 저 사람들이 많이들어오는데 금줄 밑에서 부정이 탄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치지 않았다. 딸들을 얼마나 애지중지 키웠는지 하루는 시어머니가 “나는 아[애]를 너같이 그렇게 안 키워봤다. 아[애]들을 가지고 그렇게 안절부절 하느냐”고 할 정도였다. 걸어 다니는 것도 예쁘고, 밥 먹는 것도 너무 예뻐서 좋은 것은 다 먹이고 싶었다. 애들이 아파서 조금이라도 머리가 뜨거우면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하룻밤 자고 씻으면 멀쩡했는데도 밤새도록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모른다. 건네는 잠시라도 나와 떨어지지 않으려고 울고 짜고 해서 업어 키우느라 너무 힘이 들었다. 또 국민학교 1학년 때 홍진을 해서 애간장을 태우기도 했다. 열이 너무 나서 아이가 바싹 타들어갔다. 열꽃이 피기 시작하는데 꼭 죽을 것만 같았다. 그래도 건네는 학교를 간다고 졸라댔고 남편이 포대기를 씌워 업어서 학교에 데려다주었다. 홍진을 빨리 낫게 하기 위해서 ‘홍진떡’도 해서 먹였다. 홍진떡은 홍진을 잘 이겨내게 하기 위해서 하는 시루떡이다. 떡을 하기 전에 먼저 ‘기우’를 쳐놔야 한다. 기우는 금줄과 같은 것을 말하는데, 삽작거리에다 왼산내끼를 꽈서 소깽이 3개를 꼽고 작대기를 걸쳐서 사람들이 못 들어오게 해야 한다. 상주나 궂은 사람들이 보면 부정을 타서 아기가 죽기 때문이다. 떡은 쌀 한 사발 정도를 빻아서 시루에다 쌀가루와 팥을 켜켜이 넣고 푹 쪄서 그대로 갖다놓는다. 이 떡은 특별히 침도 한 방울 흘려도 안 되고, 간을 봐서도 안 된다. 떡은 아기부터 3번 떼어 먹이고 식구들이 먹어야 한다. 떡을 먹이고 나니까 열이 가시고 증세가 호전되기 시작하였다. 홍진떡말고도 산토깽이[산토끼] 앞발을 끓여서 먹이면 좋다. 평소에 홍진에 대비해 산토끼를 잡아서 앞발을 잘라 말려놓는다. 어떤 사람들은 뒷발도 쓴다는데 나는 앞발만 썼다. 털채로 그대로 물에 살랑살랑 씻어서 푹 삶아서 그 물을 먹인다. 먹일 때에는 내가 먼저 떠먹는다. 아이보다 먼저 떠먹음으로써 그 죄를 내가 받는 것이다. 홍진을 잘 치러 아이만 살릴 수 있다면 그래도 상관없다. 이렇게 건네는 홍진을 치렀다. 오목이는 홍진 예방주사를 맞혔다. 그래도 홍진이 왔었던 것 같다. 김장할 무렵이었는데 밖에 나가 놀고, 김장하는데 왔다갔다 따라다니더니 머리가 ‘따끈따근’ 해지면서 감기가 들었는데 그게 홍진이었나 보다. 감기가 들더니 그대로 홍진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시집을 간 지금도 홍진 기침을 해서 너무나 안타깝다. 홍진을 하면 아이들을 다 죽이는 것만 같다. 아이는 속이 말라 숨을 잘 쉬지도 못한다. 지금은 약이 좋고 주사가 있으니까 걱정이 없지만 그전에는 주사도 없고, 약도 없었다. 홍진을 하다 죽으면 오로지 갖다 묻을 수밖에 없었다. 동네서 홍진을 하다 아이가 하나 죽으면, 그 동네는 다 쓸어버릴 정도로 무서운 병이었다. 세 아이를 키워낸 내 젖은 참젖이라고 한다. 젖도 물젖이 있고 참젖이 있는데 물젖은 아이들이 설사를 하지만, 참젖은 노랗게 많이 불어나서 아이들이 설사를 안 하고, 살도 딴딴하게 오른다. 한쪽 젖만 먹여도 배가 부를 정도였다. 우리 남순이는 15살 때까지 젖을 먹었다.



양정기, 김옥단 부부의 일상생활_2007.7.31 큰딸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는 김옥단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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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가지 일거리와 ‘대근한’ 삶

남편도 식구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고생을 많이 했지만, 나도 아이들 학용품이라도 사 보낼 수 있는 돈을 벌려고 밤낮으로 일을 했다. 지금은 ‘콧노래 왕노래’를 부르면서 살 정도로 걱정도 없고 편하지만 그전에 어떻게 살았는지 이해가 안 갈 정도로 힘들게 살았다. 밭에는 고추, 천마, 표고, 더덕 등 돈이 되는 작물이라면 농사를 지었다. 이 시기는 지금 같이 농법이 다양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추 농사를 지어도 씨를 뿌려서 밭을 매는 방식으로 지었다. 고추도 지금 생산량의 3분의 1도 안 될 정도로 많이 달리지도 않을뿐더러 농사 기간 에 밭을 8~9번은 매야 했다. 밭을 한없이 매도 징그럽게 풀이 자라나왔다. 고추밭을 매고, 고추를 따는 일 외에도 소의 먹이를 하는 것도 힘든 일 중 하나였다. 농사를 지으려면 밭을 갈 소를 키워야 한다. 거의 ‘삐딱밭’이기 때문에 지금도 트랙터는 엄두도 못 낸다. 소가 겨울에 먹을 먹이를 마련하기 위해서 ‘깔’을 베러 다녔다. 가을에 얻은 짚은 지붕을 해 올렸기 때문에 소를 먹일 것이 부족했다. 깔을 베러 얼마나 산으로 돌아다녔는지 오는 길에는 더워서 죽을 것 같았다. 깔을 베어 다발을 묶어서 젖지 않게 덮어둔다. 비가 오면 썩기 때문에 짚 옆에 놓고 풀로 덮어두었다가 겨울에 조금씩 빼서 짚하고 섞어서 먹였다. 농사를 지을 수 없는 겨울이 되면 삼베질쌈[삼베길쌈]을 하고, 싸리를 해다가 엮어서 광주리 같은 것을 만들어 팔았다. 마을 주변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산에 돌아다니면서 고사리, 버섯 등을 채취해서 내다 팔기도 했다. 여름이 더 바쁘긴 하지만 겨울에도 한 가한 것은 아니었다. 여태까지도 두다리를 쭉 뻗고 놀아본 역사가 없다고 단언할 수 있을 만큼 요리조리 안 해 본 일 없이 가족들을 위해 열심히 살았다. 내가 한 24살 때부터 38살 정도까지는 해마다 겨울이 되면 산에서 싸리를 해다가 만들어 팔았다. 싸리는 동짓달(11월)에 찌러[비러] 간다. 낫으로 싸리를 꺾어 ‘군데군데 다발다발’ 놓아둔다. 집으로 올 때는 모두 거두어서 칡으로 된 끈을 이용해 한 단으로 묶어 짊어지고 온다. 집에 와서는 가마솥에 불을 때고 푹푹 삶는다. 한 3~4시간 익으면 건져서 신발을 신고 발로 비벼서 껍데기를 깐다. 이것을 추려서 묶은 다음 세워서 양달에 말린다. 삶아서 말려둔 것을 만들기 하루 전날 물에 담가서 불린다. 불으면 굵은 것과 가는 것을 고른 후에 끝을 정리한다. 그 중 긴 것만 가지고 만들기 시작한다. 바닥은 十자로 해놓고 만들어 돌아간다. 요리조리 해서 얽어서 만든 후에 어지간히 높이가 되면 우겨 넣는다. 바닥은 ‘귀밥’을 지어 마무리한다. 넓은 채반지나 꽝우리[광주리], 다래끼 등을 만들었다. 다래끼는 오목하게 생겼는데 허리에 줄을 매서 한쪽에 차고 고사리도 꺾고 고추도 딴다. 고사리를 한 다래끼를 꺾으면 말려서 한 근이 조금 넘는다. 싸리를 쪄 와서 한 이틀을 말리고 또 찧어서, 삐져서 만드는 데 며칠이 걸린다. 생각보다 공이 많이 드는 일이다. 내다 팔 때에는 한 20~22개 포개서 이고 새터에 내려가서 버스를 타고 금산이나 영동, 설천장에 간다. 무주에는 이런 것이 흔하기 때문에 잘 팔리지 않지만, 설천 같은 데는 무주보다 장은 작아도 산중이라 이런 것이 많지 않아서 한 집에서 몇 개 씩 ‘버쩍버쩍’ 잘 사갔다. 왜냐하면 생활하는 데 꼭 필요한 물건이기 때문이다. 한 번 내가면 4만~5만원씩 수중에 들어왔다. 공은 많이 들었지만 힘든 줄도 모르고 한 해 겨울에 100개 이상 만들어서 5~6번 넘게 나가서 팔았다. 낮에는 싸리를 만들고, 밤에는 머리를 심었다. 내가 한 34살 정도 되었을 때니까 약 1980년대 초반 즈음에 무주에는 가발 공장이 생겼고, 나뿐 아니라 민아엄마[안말순씨]와 몇몇이 가서 일을 받아왔다. 머리를 한통 심는 데 3000원 정도였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것도 돈이라고, 7~8년 한 것 같다. 보름 만에 한 번 무주에 나가 10~15개 가지고 온다. 하루 종일 심으면 한 통 정도 심을 수 있는데 밤에만 심으면 이틀이 걸렸다. 나무를 해서 팔기도 했다. 장작을 해서 패면, 51개를 한 묶음으로 묶어, 무주에 이고 가서 한 묶음에 100원에 팔았다. 무주에는 나무를 하러 갈 곳이 없어 땔감이 부족했기 때문에, 우리 집뿐만 아니라 집집마다 해다 팔았다. 나같이 아이가 있는 부녀자들은 나가서 일할 상황도 아니었지만, 나가도 지금같이 할 일이 흔치 않았었다. 따라서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열심히 했다. 밤낮으로 일을 해도 큰돈은 되지 않았지만 아이들의 학용품이 필요할 때와 같이 조금씩 돈 쓸 일이 있을 때 요긴하게 썼다.



양정기, 김옥단 부부의 일상생활_비료포대에 담은 고추를 나르는 김옥단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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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쓰는 불의 역사

예전에는 불씨를 관리하는 것이 큰일이었다. 아궁이에 불을 때면 나무토막을 자잔하게 끊어서 사시사철 곁에 두고 불 속에 묻어놓는다. 밤에 묻어두면 밤새 연기가 모락모락 나면서 타다가 아침에 일어나면 벌겋게 달아 있다. 이것을 가지고 불을 붙여 밥을 해먹었다. 아침에 하나, 저녁에 하나가 있어야 제때 불을 붙여 밥을 해먹을 수 있었다. 만약에 불이 꺼지면 채돌[차돌]로 불을 붙였다. 채돌을 맞부딪치면 ‘파딱파딱’ 불이 일어났고, 잘 마른 소깽이 같은 데 불을 붙여서 불씨를 만들어내었다. 많이 꺼지면 1년에 두 세 번 꺼뜨릴 정도였다. 식전에 불씨를 얻으러 가는 일은 욕을 얻어먹을 만큼 어려운 일이 었기 때문에 불씨를 얻으러 가지 않으려고 열심히 나무토막을 묻어놓았다. 그러고 나서 성냥이 나왔다. 성냥은 장에 가서 미리 사다두었다. 성냥 1각에 5원 정도 했고, 조그만 곽에 든 것은 1원이었다. 성냥이 나오니 불씨를 묻어두지 않아도 되었다. 밥을 할 때 마다 성냥으로 불을 붙일 수 있었기 때문에 아궁이에 불을 꺼뜨려도 걱정할 일이 없게 되었다. 그리고 성냥보다 편한 라이터가 나왔지만 입식으로 부엌을 개량하고, 기름보일러로 바꾸면서 불을 때는 일 자체가 없어지게 되었다. 전깃불이 들어오지 않았을 때에는 호롱불로 방을 밝혔다. 불을 붙이는 기름은 ‘쇠기지름’으로 소주병으로 1되짜리 하나씩을 살 수 있었는데 냄새가 고약했다. 호롱불은 들고 다닐 수 있는 등불로도 쓰였다. 호롱 기름을 넣어서 불을 붙여서 네모진 유리문 4개로 된 상자를 올리면 등불이 되었다. 낮에 샴[샘]에 물을 뜨러 가지 못하면 등불을 들고 가서 떠오고, 새벽에 나무장사를 하러 나갈 때 어둔 길을 밝히기 위해 등불을 들고 나갔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늦게 돌아와 어두워지면 새터에서 짚과 성냥을 얻어서 짚에 불을 붙여 들고 걸어 올라오기도 했다. 짚은 어느 정도 가면 금방 꺼지기 때문에 집에 갈 만큼의 짚을 얻어서 중간 중간에 불을 붙여 올라왔다. 지금은 가스레인지 버튼을 누르면 불이 확 올라와 언제든지 밥을 해먹을 수 있다. 흔해 빠진 라이터는 집에 뒹굴어 다닐 정도다. 이렇게 불씨 하나도 묻어놓고 노심초사 힘들게 살 때에는 이런 말도 있었다. 짐승이 되다 되다, 벌거지[벌레]가 되다 되다 될 것이 없어서 인간이 되었단다. 그래서 이 고생을 하고 산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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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졸중으로 한 달 이틀간의 혼수상태, 나 없이는 못 사는 남편

나는 40살이 넘어서부터 이유 없이 아프기 시작했다. 팔 다리가 쑤시고, 오한이 나서 밥을 잘 먹지 못했다. 병원에 가도 낫지 않는 병이었다. 유독 남의 집에서 제사지낸 떡을 먹으면 탈이 났다. 그래서 영동 묵정리에 있는 법사에게 물어 굿을 했는데 하고 나면 말끔히 나았다. 아픈 것이 심해서 1년에 2~3번씩 꼭 굿을 해야 했었다. 법사는 고치기 위해서 툇방에 간단한 신단을 차려주었는데 그것을 하고부터는 아프지 않았다. 툇방 서랍장 위에 종이를 깔고 고깔모자 모양으로 접은 종이에 명주실을 감아놓았고, 초와 물그릇을 두었다. 매일 아침에 세수를 한 후에 물을 떠놓고 안 아프게 해달라고 빈다. 53살에는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동산밭에서 배나무에 열린 배를 종이로 싸고 있었는데 그다음부터 생각이 나지 않는다.남편의 말에 의하면 배를 만지는 듯하더니 그길로 집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고 한다. 내려가는 모양이 이상해서 나를 불렀는데 내가 대답도 하지 않고 휘청거리기에 따라 내려와 보았더니 이미 정신이 혼미해진 상태였다. 남편은 나를 업고서 집으로 내려와병 원으로 향했다.그렇게 한달 이틀이나 죽었다가 기적적으로 깨어났다. 남편은 성격이 ‘퍼르르르’하니 고함을 지를 때도 있지만 정이 많은 사람이다. 내가 쓰러져 혼수상태로 있을 때 많이 울었다고 한다. 남편은 내가 아이들을 키우고, 일만 쌔가 빠지게 했다고 생각했고, 그런 내가 죽어버리지는 않을까 두려웠던 것이다. 내가 깨어난 후에 남편에게 물어봤다. “그때 내가 죽었으면 오목이 아버지 어떻게 됐을까? 여자 얻어서 살았것지?” 했더니 공중에 붕 뜬 것 같고 이게 꿈인지 뭔지 사는 재미가 없어서 살면 뭐하나 하는 생각에 같이 죽으려고 했다고 한다. “그 말 거짓말이지?” 그랬더니 “참말”이라고 했다. 남편은 내가 깨어난 것을 생각하면 겁나게 좋다고 한다. 남편은 내가 입원해 있는 동안 집에서 밥을 한번 해먹어보려고 쌀을 씻어 전기밥솥에 밥을 안쳤다. 밥이 되려면 취사버튼을 눌러야 하는데 밥을 해보지 않은 남편이 그것을 알 리 없었다. 배는 고픈데 아무리 봐도 밥이 끓지 않아서 포기하고, 남은 밥 한 숟갈을 물에 말아 먹었다고 한다. 나중에 그 말을 듣고는 얼마나 불쌍했는지 속이 찢어지듯이 아팠다. 내가 깨어나 집으 로돌아왔어도 한동안 정신은 멍했지만 금방 정신이 돌아왔다. 남편에게 무주딸이 사다준 돼지고기로 날마다 김치찌개를 끓여주었다. 밥을 얼마나 겁나게 먹는지 내가 속으로 ‘아이고 저 양반 왜 이렇게 밥을 먹는가’ 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한 달을 그렇게 먹더니 어느날은 밥을 남겼다. “아이고 오목아 인제 내가 속이 찼는갑다.” 하면서 숟갈을 놓는데남편의 눈에서 눈물이 그렁그렁 하였다. 내가 챙겨주지 못해 배를 많이 곯은데다가 내가 죽지는 않을까 마음을 졸여 속도 허해 있었던 것이다. 이래서 남편은 내가 없으면 못산다. 사는 게 참 묘하다. 내가 죽었다 살아나지를 않나…. 그래서 나는 죽는 것이 두렵지 않다. 큰딸은 아들, 딸 낳고 잘 살고, 무주딸도 시집을 가서 아들을 낳았다. 이제 남순이만 아들 낳고 사는 것을 보면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다.



양정기, 김옥단 부부의 일상생활_막걸리와 맥주마시는 양정기 김옥단 부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