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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김제시 진봉면 심포리 심포마을 민속지

주제 바다를 메운땅, 그들이 그곳에 사는 이유
조사 심포마을 이야기, 사진, PDF

땅에 대한 욕망의 실현(마을의 역사)

신천 강씨 강원기의 심포 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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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상으로 확인된 바로는 심포에 가장 먼저 산 사람은 강원기이다. 강원기의 심포 이주 시점인 1392년경부터 심포에는 신천 강씨들이 거주하기 시작했고 지금도 마을 인구의 다수를 점하는 성씨가 신천 강씨이다. 문헌에서는 심포라는 지명을 찾아볼 수 없었는데 다만 조선시대 지방지도 등에는 이 지역을 하일도라고 표기하고 있었다. 심포라는 지명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문헌은 『신천강씨대동보(信川康氏大同譜)』의 만경파 시조 강원기의 묘의 위치를 설명하는 대목이었다. 강원기는 고려말 조선초의 학자로 1383년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여 등극의 뜻을 굳히자 망해가는 고려를 재건하려고 힘을 썼으나, 결국 1392년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자 벼슬을 초개처럼 버리고 물러났다고 한다. 그 후 이성계가 강원기의 학식과 덕망을 인정하여 좌부승지의 벼슬을 내려서 관직에 복귀하도록 청하였으나 두릉의 서쪽 심포에 내려가 은거하였다. 강원기의 심포 이주 시점인 1392년경부터 심포에는 신천 강씨들이 거주하기 시작했고 지금도 마을 인구의 다수를 점하는 성씨가 신천 강씨라는 점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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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이전 심포마을의 자연환경

오늘날과 같이 심포에 지평선이 보일 정도의 드넓은 농지가 펼쳐진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인공적인 방법으로 이곳을 농지로 조성하기 전의 심포마을의 생업환경은 어촌이었다. 지금 우리 눈앞에 보이는 드넓은 논은 일본인들이 간척사업을 하기 전에는 전부 바다였고 지금의 심포마을을 가로지르는 국도변까지도 바닷물이 들어왔다고 한다. 지반이 만조면보다 90cm 정도나 낮았으니 썰물 때는 뻘이 드러나지만 밀물 때는 아마도 현재의 진봉산 근처까지 물이 들어왔을 것이다. 현재와 같은 심포의 모습은 모두 인공적으로 조성된 간척사업의 결과이고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이 확보되기 전의 심포에는 쌀농사를 지을 수 있는 논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이른다. 다만 간척사업으로 농지가 조성되기 전의 심포는 진봉산을 주위로 약간 높은 지대에 약간의 밭이 있었을 것이고 마을 안쪽의 오목한 부분에 빗물만으로 물을 공급받는 논인 천수답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아마도 농지가 생기기 전에 심포에 살던 사람들의 주업은 바다 일이었을 것이다. 바다는 사람에게 육지보다 더 나은 수입을 보장했다. 바다는 주인이 없는 곳이다.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땅과 종자와 농기구 그리고 논밭을 갈 소가 필요했지만 바다는 그렇지가 않았다. 물론 고기잡이를 위해 필요한 배는 가격이 비싸서 가난한 사람들은 쉽게 구입하기 힘든 것이었겠지만 근면성실한 사람들은 선원으로 취직해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썰물 때 드러나는 심포 인근의 넓은 갯벌에서 생산되는 어패류는 호미와 같은 도구만 있으면 누구나 노다지를 캘 수 있는 주요한 생업수단이었을 것이다. 새만금사업으로 인해서 심포 앞바다는 바다가 아닌 거대한 담수호가 되어 가고 있어 심포항 역시 어항으로서의 면모를 점점 상실해가고 있지만 현재도 백여 척 이상의 어선이 정박해 있고 어업도 예전만은 못하지만 제법 왕성하다. 그리고 이곳에서 생산되는 생합 등의 어패류는 지금도 많은 관광객을 끌어모으고 있다.



심포항 정박한 배 김제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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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토로 변한 바다, 어민에서 농민으로의 성공적인 변신

심포마을에서 대규모의 간척사업이 벌어진 것은 일제강점기 일본인 자본가들에 의해서였다. 심포에 조성된 넓은 농경지는 심포마을 사람들의 생업환경에 많은 변화를 몰고 왔다. 심포마을 사람들은 농민이 되었다. 근대적인 토목공사에 의한 간척사업이 진행되기 전에도 원시적인 수준의 간척과 개간은 조선시대에도 빈번히 일어나던 일이었다. 하지만 역시 그 규모는 현재와 비교하기는 힘들다. 심포의 자연환경이 만조 때 지표면이 해수면보다도 90cm 정도나 낮은 환경은 아마도 심포 인근에 어느 정도 원시적인 수준의 간척이 진행되었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일제강점기의 간척방식도 현재와 같은 중장비를 이용한 방식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물이 빠진 썰물 때를 이용해서 방조제를 쌓는 작업을 하고 바닷물이 밀려오는 밀물 때는 작업을 하지 않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방식으로 심포에 조성된 넓은 농경지는 심포 사람들의 생업환경에 많은 변화를 몰고 왔다. 본래 바다일이 주업이었던 심포 사람들은 본래 없었던 농경지를 경작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비록 일본인 지주의 토지를 소작하는 것이었지만 소작 지을 땅조차 없는 사람들에 비해서는 나은 형편임에는 틀림없었다. 한편으로는 드넓은 농지가 생긴 심포에는 외부에서의 이민자들도 증가했다. 현재 심포에 거주하는 신천 강씨 이외의 성씨들이 이주해온 시기를 조사한 결과 거의 대부분 3대를 넘지 못하는 것으로 조사되었고 그 시기는 대부분 1920~30년대였는데 간척사업으로 인해서 이 지역에 농토가 증가한 시점과 동일하다. 어떤 면에서 심포는 이민자들에게는 매력적인 지역임에 틀림없었다. 드넓은 농지를 소작받아서 경작할 수 있는 기회뿐만 아니라 근처에 드넓은 바다가 있어서 바다에서 얻을 수 있는 수입도 만만치 않았다. 심포 사람들은 대부분 일본인 지주 다목의 토지를 경작했다. 현재 심포에서 자신의 토지를 보유하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당시에 다목이 정부에서 운영하도록 허가받은 간척지를 소작받아 경작하다가 광복 이후 토지개혁으로 농지를 유상으로 분배받은 사람들이다. 이것을 반대로 생각해보면 일본인들이 심포에 들어와서 간척사업을 하기 전에는 토지를 보유한 심포 사람들이 적었다는 이야기이다.



새만금 방조제 전경 부안 변산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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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만금사업과 심포마을의 미래

땅에 대한 인간의 끝없는 욕망의 본질은 조선시대의 사람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 그리고 현재 새만금사업을 추진 중인 대한민국 정부나 모두 같은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심포마을에서 일어났던 간척사업은 일제강점기에 종료된 것이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계속 이어지는 진행형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여하튼 새만금사업으로 인해서 심포는 또다시 바다가 없어지고 막대한 농지가 생기는 자연환경의 급속한 변화를 겪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러한 환경의 변화 속에서 심포라는 작은 마을은 또다시 어떤 변화를 겪을 것인가? 아마도 일제강점기 심포에 이주한 사람들이 새로운 토지를 경작할 소작권을 확보하고 바다에서 또다른 수입을 올리며 자신의 생활을 영위하며 살았던 것처럼 새만금사업으로 인해서 생긴 막대한 토지를 경작할 또다른 사람이 등장할 것이고 이들은 현재 우리가 예상하기 힘들 정도로 분화될 것이다. 심포에서 만난 몇 명의 젊은 농부들(심포 기준으로 젊은 농부는 40~50대이다)은 대개 트랙터나 콤바인 같은 농기구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더 많은 토지를 원한다. 현재도 토지 보유자의 고령화로 인해서 임차할 수 있는 토지가 나오면 서로 경작하기 위해 선의의 경쟁도 마다하지 않는다. 아마도 이들 농부들에게 새만금사업으로 생긴 토지는 또다른 기회가 될 것이다. 한편으로는 어업은 더 이상 심포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아주 옛날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동안 심포를 기회의 땅으로 만들어주었던 바다는 짠물이 아닌 민물로 변해 갈 것이고 새만금사업으로 농지가 된 땅에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젖줄이 될 것이다. 아마 현재 심포항을 위시해서 행해지고 있는 어업은 곧 소멸될 가능성이 높으며 어민들은 자연스럽게 새만금 방조제 바깥쪽의 항구로 이동해서 어업에 종사하든지 아니면 전혀 다른 삶을 영위해가며 살아갈 가능성이 크다.



새만금 사람들

떠난 사람과 남은 사람

심포마을도 우리나라의 다른 농촌들과 마찬가지로 1960년대 중반 이후부터 도시로의 이주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신천강씨대동보』의 만경파 부분을 보면 현재 이 마을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여기저기서 볼 수 있는데 현재 심포마을에 살고 있는 신천 강씨들은 큰아들이 많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대부분 장자라는 이유로 부모에게서 재산을 물려받아서 심포에 눌러 살게 된 사연이 있다.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는 아직 농업국이었기 때문에 농토를 상속받는다는 것은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 비해서는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한발 빠른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이에 비해서 당시 농토를 상속받지 못한 동생들은 어떤 길을 택했을까? 이들 중 대부분이 현재 심포에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심포를 떠난 것은 확실한데 일부는 다른 마을로 이사가서 모르는 사람의 농토라도 빌려서 농사를 짓고 산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또 일부는 농촌을 떠나 도시로 갔을 것이다. 심포마을도 우리나라의 다른 농촌들과 마찬가지로 1960년대 중반 이후부터 도시로의 이주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도시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 모진 고초를 겪으면서도 열심히 일하고 결혼도 했다. 그리고 자식을 낳고 열정적으로 가르쳤다. 열심히 일해서 한푼 두푼 모은 돈으로 가게도 차리고 집도 샀다. 차린 가게가 잘되어서 돈을 많이 번 사람도 있다. 심포마을을 떠나서 도시로 간 모든 사람이 성공적으로 도시에 정착하진 못했을 것이지만 필자가 열거한 이야기들처럼 그들의 도시생활은 흘러갔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심포마을에는 남은 사람들과 떠난 사람들 간의 미묘한 갈등이 존재하는데 심포마을을 떠난 사람들이 대체로 남은 사람들보다 여러 면에서 형편이 더 낫다는 점에서 현재 심포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떠난 사람들에 대해서 약간의 박탈감을 느끼고 있다. 이러한 박탈감은 심포마을에 남은 사람들에게 권리보다는 의무가 더 많이 부과되어 있기에 더욱 심해지고 있다. 심포에서 도시로의 이주는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심포마을에 남은 사람들은 심포를 떠나서 다른 곳에서는 먹고살 수 있는 길이 별로 없었다. 그들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 농사나 바다 일이었기 때문에 심포를 떠나서 다른 일을 해볼 생각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자녀들은 달랐다. 그들은 심포 인근의 학교에서 공부하거나 아니면 가까운 전주, 익산 등지의 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그 가운데에는 공부를 제법 잘한 사람도 있어서 명문대에 입학한 사람도 여럿이고 사법고시에 합격해서 판사로 재직하다가 현재는 서울에서 변호사로 개업 중인 사람도 있다.



설 귀성차량 김제 심포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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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에 심포에 온 사람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에 의한 간척사업으로 생긴 토지의 소작권을 매개로 이곳에 몰려든 사람들로 이들은 대개 인근의 만경, 김제, 부안, 익산 등지에서 온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은 대부분 일제강점기 이곳에 거대한 농장을 가지고 있던 일본인 지주 다목의 농지를 경작했다. 하지만 이들은 토지만 경작하진 않았고 그 외의 수입으로 바다 일도 많이 했다. 바다에서 나오는 수입은 논농사처럼 소작료가 없는 수입이었으므로 근면하고 성실한 몸만 있다면 적지 않은 수입도 올릴 수 있었다. 이렇게 심포마을은 외지에서 온 사람들도 토지 경작권을 얻을 수 있었고 바다 일이라는 부수입도 약속된 기회의 땅이었다. 일본인들에 의한 간척사업으로 농지가 대량으로 조성되고 이로 인해서 심포마을에는 인근 지역에서 많은 인구가 유입되었다. 이러한 사실만으로 본다면 일제강점기 무렵의 심포마을은 인공적인 개발사업의 덕을 톡톡히 본 셈이고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여러 가지 혜택이 돌아갔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역사를 한 가지 측면에서만 바라보고 이를 근거로 당시 시대상을 확정해버린다면 크나큰 우를 범할 수 있다. 역사적 가치 판단에는 경제적인 면 이외의 다른 부분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미 많이 알려져 있지만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은 미국과의 전쟁에서 열세에 몰리자 조선인들까지 전쟁터로 몰아넣었다. 심포마을에서도 당시 전쟁터에 다녀온 사람들이 있었는데 전쟁터에 가지 않기 위해서 몸을 피하고 돈을 건네는 등 민심이 매우 흉흉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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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이후 심포로 이주한 사람들

광복 이후에 심포에 온 사람들은 일제강점기에 이주한 사람들처럼 적산을 불하받는 등의 혜택이 없었다. 이들은 대부분 오직 심포의 바다 일에 희망을 걸고 이곳으로 이주해 온 사람들이다. 이들의 고초는 일제강점기에 심포에 온 사람들보다 더 컸는데 이들의 대부분은 농사보다는 바다 일을 주로 했다. 이들은 바다 일로 모은 돈으로 조금씩 농토를 매입해서 재산을 조금씩 늘리며 심포마을에 기반을 마련했다. 당시에 이주한 사람들은 본래 살던 곳에서의 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고 가족단위로 심포로 이주한 사람들인데 일제강점기에 이주한 사람들보다는 더 먼 곳에서 온 것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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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가지는 이점을 좇아서 최근에 이주한 사람들

땅을 보유하지 않은 사람들도 바다에서 열심히 일하면 얼마든지 생계를 유지하고 살 수 있었으며 조금씩 모은 돈으로 집과 땅도 살 수 있다. 심포마을의 바다는 계속해서 사람들을 이곳으로 이주하게 만든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심포에는 바다가 있다. 이것은 다른 곳이 갖지 못한 매우 큰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땅을 보유하지 않은 사람들도 바다에서 열심히 일하면 얼마든지 생계를 유지하고 살 수 있었으며 조금씩 모은 돈으로 집과 땅도 살 수 있다. 심포에 널려 있는 넓은 들은 모두 주인이 있고 경작할 사람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별다른 이점이 될 수 없었지만 바다는 주인이 없는 곳이고, 바다에서 열심히 일한다고 해서 누가 세금을 내라고 하는 사람도 없었으며, 소작료를 달라는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심포마을의 바다는 계속해서 사람들을 이곳으로 이주하게 만든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광복 이후 인구의 이동축은 ‘농촌에서 도시로’였다. 심포마을도 예외는 아니어서 많은 심포마을 사람들이 도시로 이주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역으로 심포마을로 이주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바다 일 때문에 이주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심포마을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가까운 지역에 살던 사람들로 대개 김제와 부안 지역에서 살던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본래 살던 곳에 땅과 주택 등을 보유한 사람들로 거주지의 재산을 모두 처분하고 심포마을에 주택과 농지를 구입해서 생계수단을 마련한 후 이곳으로 이주했다. 그리고 남은 돈으로 바다 일을 위한 배를 구입해서 어업 등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이주한 시점은 이미 새만금사업이 상당히 진행되어서 사실 그들이 바라던 바대로 바다 일에서 나오는 수입이 그리 좋은 때는 아니었다.



해수유통요구 시위대 풍물 김제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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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포마을에 살고 있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

현재 심포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크게 4부류(신천 강씨, 일제강점기 이주자, 광복 이후 이주자, 일정 수준 재산을 보유한 최근 이주자)로 나눌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심포마을에는 이 4부류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도 살고 있었는데 이들을 소수 사례로 살펴보고자 한다. 심포마을에는 근래 들어서 점점 빈집이 늘어가고 있다. 이 집들은 대개 집주인의 고령화로 인해서 그냥 비워두고 도시에 사는 자녀의 집으로 거처를 옮긴 경우들이다. 도시에서는 부동산에 대한 수요가 많아서 이렇게 그냥 빈집으로 방치되는 경우가 거의 없지만 심포마을의 경우는 수년째 주택이 거래된 예가 없으며 외지인이 새만금사업 기대 심리로 전답을 조금씩 구입하는 사례만 있다고 한다. 집을 내놓아도 팔릴 기미는 보이지 않고 집이 팔리길 기다리다가 도시로 이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니 손해를 보더라도 그냥 심포의 집을 비워두고 도시로 이사를 가는 경우가 빈번한 것이다. 이러한 사정은 심포마을 사람들의 고령화가 점점 진행될수록 더욱 심해질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이렇게 심포에 점점 늘어가는 빈집은 또다른 이주민을 출현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빈집이라고 해서 사람이 살지 못할 정도로 나쁘지 않다. 전기도 들어오고 수도시설도 있으며 훌륭한 수세식 화장실과 입식 부엌이 있는 집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이런 빈집들은 아무런 재산도 보유하지 못한 영세민들에게는 아주 좋은 보금자리가 되었다. 이들은 정부보조금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로 생활이 매우 곤란한 사람들이다. 건강 상태도 좋지 않아서 바다일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대개 국가에서 나오는 영세민 보조금만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다만 그들이 거주하는 집은 무단으로 그냥 점거한 것은 아니고 본래 주인에게 살아도 된다는 허락을 받고 사는 것이라고 한다. 심포마을 사람들의 도시 이주가 모두 성공적인 것은 아니었다. 심포마을에는 도시 정착에 실패하고 근래에 심포로 다시 돌아와서 살고 있는 사람도 있었는데 이들은 도시 생활의 고단함으로 인해 건강 상태도 별로 좋지 않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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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사는 곳에는 갈등이 있다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나 갈등은 존재한다. 가장 절친한 관계인 가족 내에서도 갈등이 존재하고 직장, 학교, 동호회 등의 사람이 모인 곳에는 어디나 갈등이 있게 마련이다. 첫번째 갈등요인은 사람들 사이에 나타나는 가장 흔한 갈등 요인인 경제적인 문제인데 그 가운데에서도 토지에 대한 갈등은 매우 첨예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과거 새마을운동기에는 마을의 진입로와 농로를 넓히기 위해서 서로의 논밭을 약간씩 양보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이러한 옛날이야기를 예로 들면서 사유지도 개인재산이긴 하지만 재산권을 행사할 때는 마을 사람들의 편의나 이익도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러한 마을 내부의 관습적인 규칙은 어느 정도 지켜지고 있었다. 이러한 관습적인 규칙에 대한 귀감이 된 사례는 현재의 마을회관 부지를 마련할 때 마을을 떠난 어떤 사람이 자신의 사비를 털어서 마을 사람들을 위해 땅을 매입해준 예가 있었다. 이 일은 지금도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칭송이 자자하다. 하지만 이러한 일들은 지나간 옛 이야기가 되고 있다. 두번째는 세대 간의 갈등이다. 이 마을에 실질적으로 젊은이는 없지만 60세 이하의 사람들은 심포에서는 젊은 층이다. 대부분 이들은 젊은 농부로 마을의 고령자들과는 일정 부분 거리를 두며 살고 있다. 우리들이 같은 나이대의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듯이 이들도 심포마을의 웃어른들이라 할 수 있는 70세 이상의 고령자들과는 약간의 거리를 두고 살고 있다. 세번째 갈등은 심포를 떠난 친지들과의 갈등이다. 이것은 명절날이나 제사 때 매우 극심하다. 현재 심포에 남아 있는 사람들의 상당수는 큰아들이다. 이들은 부모의 재산을 물려받아서 그 토지를 경작하면서 살고 있다. 어떤 면에서는 그들이 받은 혜택으로 부모의 제사 등을 모시는 의무 이행 문제가 자연스럽게 해결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현재는 실질적으로 재산을 물려받지 못하고 그냥 도시로 간 형제들이 그곳에서 획득한 재산의 가치가 훨씬 높아져 이들은 다소 난감해하고 있다. 현재 그들의 상황은 심포마을을 떠난 사람들보다 낫다고 보기 힘들기 때문에 그들이 이행하고 있는 의무에 대해서 도시에 사는 형제들이 좀더 적극적으로 고통분담을 해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이러한 기대는 별로 호응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이들 사이에는 갈등이 나타나고 있다. 네번째 갈등은 심포를 떠난 친구들과의 갈등이다. 도시로 이주한 사람들은 대부분 금의환향한다. 명절이 되면 특히 이런 경우가 많아져 심포마을에 사는 사람들의 스트레스 강도는 높아진다.



옛 마을회관 폐쇄 김제 심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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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포마을 여인들

여성들은 심한 가사노동에 시달리고 힘든 농사일까지 해야 했다. 여성들은 허리 한번 편하게 펼 날이 없을 정도로 고된 노동에 시달렸다. 그리고 요즘처럼 결혼 후 분가해서 사는 경우가 드물었기 때문에 시어머니의 시집살이에 시달리기도 했다. 심포마을의 여성들의 상황도 이와 별로 다르지 않아서 그녀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자연스럽게 예전에 고생했던 이야기들이 나온다. 심포마을은 바다에 접해 있어서 주민들은 예전부터 바다에서 나오는 각종 해산물로 생계를 이어갔다. 특히 갯벌에서 나오는 생합 등의 조개류는 주민들의 주요한 수입원이 되었다. 조개를 캐는 일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주로 여자들의 일이었는데 심포마을에 사는 여자들 가운데 조개 캐는 일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농사일은 추수철에만 수입이 생기는 일이지만 조개를 캐는 일은 그날 캔 조개를 그날 도매상에게 팔기 때문에 바로 현금이 생기는 일로 여기서 나오는 수입은 여자 수입으로는 상당히 괜찮은 편이라고 한다. 요즘은 새만금사업으로 바다에서 나오는 수입이 상당히 줄어들었지만 몇 년 전만 해도 여자들 수입으로 이보다 괜찮은 것이 드물 정도였다고 한다. 이렇게 바다에서 번 돈은 대개 자녀들의 학비에 쓰였다. 그녀들의 고단한 일상 덕에 자녀들은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현재 밝은 미래를 내다보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