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우리가 말하는 생활재라는 것은 가정이란 공간 안에 가족으로 이루어진 사람들이 과거에 썼거나 현재 쓰던 물건들로 구입, 증여하거나 제작하는 등의 방법으로 생활재가 형성되어진다. 철저하게 물질 로 이루어진 생활재에 생애사라는 구비형태의 정신적 요소를 덧붙이고자 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가족 구성원 개개인 인생의 한 지점을 기억의 재생과 물질적 증거로써 말할 수 있다. 윤달화가 모아 놓은 탯줄은 자식들의 탄생과 더불어 윤달화가 어떻게 아기를 낳고 산후조리를 했는가에 대해 말할 수 있다. 둘째 가족 구성원 이 특정 생활재를 인식하고 있는 면이 다름을 알 수 있다. 김성원의 해병대복은 6.25 참전과 동료, 해병대 정신, 해병전우회 등을 기억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아내에게 있어서는 해병대복은 해병대원 아내로써 남편이 해병대원이며 해병전우회 모임에 참가할 수 있도록 잘 보관해야 하는 물품이다. 아들들에게 있어서 해병대복은 아버지는 6.25참전 해병대원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생활물품 하나가 가족 구성원들에게 다른 관점과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생활재가 그들의 생애에서 어떤 영향을 줬는가에 따라 달라진다고 볼 수 있다. 김성원은 1932년 제주도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를 거쳤으며 해방과 4.3사건을 겪고 한국전쟁이란 한국 현대사의 굴곡을 거쳤다. 그리고 군을 전역한 후 고향에 거주하면서 농촌의 근대화란 목표를 위해 농촌운동에 매진하였다. 생활개선구락부를 조직하여 마을 사람들의 의식 개혁 및 생활 개선에 힘을 쏟았으며 개인적으로는 황금작물인 감귤 작물 재배를 60년대부터 시작하였다. 이처럼 김성원의 삶은 제주도 현대사와 함께 하고 있다. 개인적 삶의 기록 또한 철저하게 이루어져 있어 아버지 관련 자료 및 군 생활 및 농촌운동 관련 자료들을 기록해 놓았다. 개인사를 통한 지역사 말하기가 얼마나 사료적 가치를 가질지는 모르지만 개인사를 증 명할 수 있는 사료적 뒷받침이 있다면 단지 개인사만으로 한정하기엔 자료적 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다. 윤달화의 삶은 노동의 연속이라할수 있다. 일을할수 있는 나이인 10대 후반부터 평온한 생활을 즐겨야 하는 노년에 이르기까지 윤달화는 하루도 쉬지 않고 일을 하였다. 개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부분은 개인별로 다 다르다.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한 사건이나 계기로 인해 인생에 있어서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생애사를 구술하는데 있어 가장 구체적이며 중요성을 갖고 구술하는 부분이 본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부분일 것이다. 김성원에 있어서 해병대 생활이 김성원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작용하고 있다. 해병대 입대와 더불어 처음으로 제주도를 떠나 뭍 생활을 7년간 하였다. 군 생활 7년은 김성원에게 농촌생활 개선의 기폭제가 되었다. 윤달화에게 있어서 생애는 노동 그 자체로 점철되고 있다. 노동을 할 수 있는 10대 초반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윤달화는 밭농사와 집안일의 연속적 삶을 살았다. 고된 삶의 연속에서 잠시나마 잊을 수 있던 것은 바로 소리였다. 밭에서 일하면서 배웠던 소리는 그녀에게 노동의 고됨을 잊을 수 있는 하나의 탈출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