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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역시 중구 차이나타운

주제 인천 차이나타운 淸館 청관
조사 인천 차이나타운, 사진, 영상, 녹취, PDF

화교의 공간 차이나타운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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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교라는 용어는 청나라와 조선이 교환한 문서에 따르면 ‘청조인’, ‘화인’, ‘청상’ 등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용어가 등장한 것은 청나라 말기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화교’는 한자어의 의미로 외국 영토에 거주하는 중국인을 모두 통칭한다. 다만 원래는 ‘임시 거처 교(僑)’를 썼으나 요즘 들어 중국과 한국을 이어준다는 의미로 ‘다리 교(橋)’를 쓰는 경우도 있다. 차이나타운 일대의 면적은 30만 평방미터이며, 화교 인구는 3백 가구 약 1천여 명이 살고 있다. 차이나타운 일대의 전체 인구가 약1만 명인 것에 비추어보면, 화교인구가 1/7인 것이다. 인천 전역에 살고 있는 화교의 숫자는 1,000가구, 약 3천 명이다. 인천 전체 화교의 약 1/3 가량이 차이나타운 내에 거주하고 있는 것이다. 인천 차이나타운의 화교는 대만국적이 90% 이상이다. 이들은 대부분 1884년 이후부터 한중수교 이전까지 유입된 화교의 후손들이다. 약 130년간 같은 공간에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초창기 화교들은 이른바 칼을 쓰는 세가지 직업 즉 이발사, 재단사, 요리사 그리고 낫을 쓰는 농사를 주로 생업으로 삼았다. 1세기 이상이 흐른 2011년 현재의 화교 대표 생업은 요식업, 여행업(가이드 등), 무역업, 잡화점, 한의사 등으로 다양해졌다.



차이나타운 경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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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지리적 특징

인천 차이나타운은 산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이는 처음부터 평지를 두고 산으로 올라간 것이 아니라, 1884년 최초 조계지가 설정될 당시 현재의 1패루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기 때문에 무역업을 하기 가장 좋은 조건인 무역항 인근에 자리를 잡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1884년 당시 조성된 조계지 경계 계단을 중심으로 오른쪽은 일본 조계지, 왼쪽은 중국 조계지로 구획하였다. 그 구획선을 따라 건물의 양식도 판이하게 다르다. 일본 조계지 쪽으로는 일본 양식의 은행건물, (구)창고건물 등이 있으며 이를 활용한 박물관과 전시관 등이 자리 잡고 있다. 반면에 조계지 경계 계단의 좌측에 위치한 청국 조계지 구역은 중국 느낌이 물씬 난다. 과거 청국영사관 터에 인천 화교협회 건물이 자리 잡고 있으며, 뒷편에는 구 영사관의 회의청인 중화회관이 위치해 있다. 또한 언제나 대만국기가 나부끼는 화교학교가 있고, 중국음식점, 중국빵집, 만두집, 잡화점, 의선당 등이 위치한 중화가가 자리잡고 있다. 청국 조계지 내에는 또한 3개의 패루와 한중문화회관, 중국어마을 문화체험관, 그리고 짜장면 박물관 등이 위치해 있다. 이 구역에는 화교들도 많이 거주하고 있다. 이렇듯 인천 차이나타운은 130년을 살아온 화교들의 이야기가 있고, 건물 등의 흔적도 여전히 남아 있으며, 현재까지도 과거의 공간을 활용하고 해당 공간에서 거주하며 생업을 이어가고 있는 이른바 생태박물관이다.



차이나타운 경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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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적 특징

인천 화교들의 대다수는 본적이 중국, 국적은 대만, 주소는 인천이다. 선조의 대다수는 1920년대 이후 산동성에서 건너온 농공화교들이다. 이들은 1950년 한국전쟁 이후 국적을 바꿔야만 했다. 한국에서 대만 정부만을 합법 정부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지금 인천의 화교사회는 5세대를 맞이하고 있다. 태어난 곳도 인천이고, 살아가는 곳도 인천이다. 그들은 5세대를 이어오며, 한국 정부의 화교 정책 및 한중 대만관계에 따라 업다운을 겪으며 살아왔다. 부동산 소유를 제한하고 영주비자가 없어, 태어난 고향인 인천에서 외국인과 같은 대접을 받으며 반한감정이 생기기도 하였다. 그러나 내고향 내집 내가 살아야 할 곳이기에 어떻게든 살아가기 위해 노력했다. 한국에서의 취업이 어려워 일본, 대만, 미국, 중국 등으로 다니며 새로운 기회를 잡기도 하였다. 또한 최근에는 이른바, 다문화특구 조성사업 등으로 혜택을 보고 있기도 하다. 130년 이라는 시간의 흐름 속에, 인천의 화교들은 5세대를 맞이하며 ‘전통의 유지와 융합 사이’에서 꾸준히 고민하고 있다. 여전히 고향의 전통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과, 후대를 위해 새로운 시대를 열어주고자 하는 사람들, 그리고 이미 한국이 더 친숙하고 익숙한 요즘 세대들의 이야기가 모두 공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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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1882년, 임오군란때, 조선정부의 참전요청에 의한 청국 군인의 입국: 군함 3척, 상선 2척, 청국군인 3천 명 주둔. 군수보급품 위한 상인 40명(한국 화교의 시작) 1883년, 인천 개항. 일본조계지 설정 1884년, 청국조계지 설정. 돈벌이가 잘되는 곳으로 소문이 퍼져 많은 산동인들이 서해를 건너옴. 1883년, 48명이던 화교가 1년 후에는 5배에 가까운 235명으로 급증함. 중국의 비단, 광목, 농수산품 및 경공업품 등을 수입, 조선의 사금 등을 중국에 보내어 큰 이득을 거둠. 장기 거주를 목적으로 인천에 상가 건물이나 주거할 집을 짓기 위해 중국식 건축에 필요한 목수, 기와공, 미장공들도 인천에 들어옴. 1887년, 농공화교 이주 시작. 조선에 없던 양파, 홍당무, 토마토 등 재배. 경동, 신포동, 용현동, 주안, 부평지역까지 영역을 확대해감 1896년, 청일전쟁 패전 후, 군인 무역업자를 비롯한 많은 화교들 귀국 1940년대, 정치적 혼란. 이 시기에 산둥지역 농민들 인천으로 대거 이주. ‘생계형 화교(농공화교)’ 1948년, 광복, 대한민국 정부 수립. 화교 견제정책 실시. 외국인 출입 규제(중국행 차질 무역업 타격), 외국인 외환거래 규제(은행가의 3배가 넘는 가격으로 암시장에서 외환거래) 1950년대, 외래상품 불법수입 규제를 목적으로 창고 봉쇄 조치. 물건을 대량으로 구입하여 적절 한 시기에 시장에 내놓아 이득을 취하던 화교 무역업에 큰 타격. 한국전쟁 발발. 종전 후, 중공군의 전쟁참여로 인해 화교민들에 대한 부정적 인식 확대. 종전 후, 공산국가인 중국의 국적을 인정하지 않아, 대만 국적으로 전환 1961년, 외국인 토지 소유 금지: 채소농사를 하던 농토, 음식점을 운영하던 점포를 본인 명의로 소유할 수 없게 됨. 한국인의 명의를 빌리거나 한국인 부인의 명의로 재산 등록. 사기 및 배신 등으로 재산을 잃은 경우도 있음. 1962년, 화폐 개혁. 1953년에 이은 두번째 화폐 개혁. 화교들은 언제든 본국으로 떠날 생각으로 재산을 현금으로 보유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음. 일정액 이상은 새 돈으로 교환해 주지 않아, 손실을 입기도 함. 1968년, 외국인 토지소유 제한. 1961년의 금지에서 완화됨. 주거용 200평, 상업용 50평 이내의 토지를 취득허락 후 소유할 수 있게 되었음. 1970년대, 짜장면 값 동결. 절미운동. 중국집에서만 쌀밥을 못팔게 함. 볶음밥 없는 중국집들 성행 1992년, 대만과의 단교, 중국과의 수교. 중국 보따리 장사의 활로가 열림. 1998년, 외국인 토지 소유 제한 해제. 2002년, 영주비자(F5) 발급: 영주권을 인정받게 됨. 2005년, 선거법 개정: 화교들 지방선거권 부여.2000년 대, 인천 차이나타운 활성화 계획 수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