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사이트는 Chrome, IE10 이상의 버전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10 미만 버전일 경우 원활하지 않을 수 있으니 업그레이드 하시기 바랍니다.

충청남도 서천군 서면 월호리 월하성마을 민속지

주제 달빛아래 신선이 노는, 월하성 마을
조사 월하성 마을 이야기, 사진, 영상, 녹취, PDF

월하성 마을

달 모양의 해안을 따라, 월하성

PDF 보기


초승달을 닮은 바닷가마을 월하성(月河城)이 위치한 충청남도 서천군(舒川郡)은 육지로는 동쪽으로 부여군(扶餘郡), 북쪽으로 보령시(保寧市)와 접하고 남쪽은 금강(錦江)을 경계로 전라북도 군산시(群山市)와 마주하고 있다. 해상(海上)으로는 서쪽으로 서해와 닿아있으며 남으로는 고군산군도(古群山群島)와 지리적으로 매우 가깝다. 행정구역상으로 서천군 서면(西面) 월호리(月湖里)에 속하며, 남쪽으로 바다에 접해있다. 월하성 마을이 위치한 지역은 백제에는 비중현(比衆縣)에 소속되었다가 신라에는 서림현(西林縣)의 비비현(比庇縣)에 소속되었다. 고려 현종 9년(1018년)에 임천(林川)의 비인현(庇仁縣) 소속이 되었으며, 조선 말 비인군(庇仁郡) 서면 소속이 되었다. 그 후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 옆 마을인 장동리(長洞里), 호동리(狐洞里), 화동리(花洞里)를 하나로 병합하는 과정에서 월하성과 호동의 앞글자를 따서 월호리라 하여 서천군 서면에 편입되었다. 이때 호동리의 여우 ‘狐’를 호수 ‘湖’로 고쳐 지금의 행정구역명칭인 월호리(月湖里)가 되었다. ‘월하성’이라는 마을 이름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으며 ‘달’과 ‘바다’에 관련된 이야기가 많다. 초승달을 닮은 마을 해안과, 마을 앞 바다에 비친 달그림자를 보고 신선이 반해 내려와 놀았다는 전설에서 월하성(月河城)이라 부른다. 또한 마을 앞 해안가의 지형이 기러기의 날개처럼 굽어진 데에서 비롯하여 월아성(月鵝城)으로도 불렀다. 1864년에 제작된 대동여지도를 보면 월하성 마을이 위치한 곳에 월아산(月牙山)이 보인다. 이곳은 현재 월하성 마을의 서쪽에 있는 옥녀봉으로 추측되는데, 바로 이 월아산에서 월하성이 유래된 것이 아닌가 짐작해 볼 수 있다.



월하성 마을 전경


-
역사 속의 월하성

『호구총수(戶口總數)』는 정조13년(1789년)의 전국의 호구수를 조사하여 정리해 놓은 인구통계자료이다. 월하성 마을은 조선시대 말기까지 비인현(庇仁縣)의 서면(西面)에 속해 있었으며, 비인현은 총 9책의 필사본 중에 제4책에 수록되어 있다. 월하성은 1789년 『호구총수』에서 현재 월호리에 속한 장동(長洞), 호동(狐洞)과 같이 ‘어라성(於羅城)’이라는 명칭으로 처음 등장한다. 또한 서면에는 지금은 전라북도에 속한 연도(烟島), 개야도(介也島, 開也島)도 속해 있어 바닷길을 통해 생활권이 근접했음을 추측해볼 수 있다. 월하성은 고종 15년(1878년)에 『고종실록』과 『승정원일기』에 ‘월하포(月下浦)’라는 이름으로도 등장한다. 원산과 북청 등지의 수심을 측량하던 일본 군함 천성호(天城號)가 비인현 월하포에 도착했다고 비인현감 홍용주(洪用周)가 말한 것을 충청도관찰사 이명응(李明應)이 조정에 보고한다. 또한 열흘 후 보고에서 이명응은 일본 군함이 월하포에 도착한 것을 전라, 충청도에 좋은 항구를 찾기 위함이었다고 답한다. 『한국수산지』에도 월하성이 등장하는데, 월하성에서 어획하는 생선의 종류와 함께 월하성의 위치와 인구에 대한 내용이 기술되어있다. 내용을 보면 월하성은 동서 3정(丁), 남북 2정의 작은 만에 위치하며 8, 90마지기의 논과 100마지기의 밭이 있었다. 또한 약간의 황무지가 있지만 양호한 곳은 이미 개간되어 남은 땅이 적으며, 인가 29호가 모래언덕에 모여 산다고 기술되어 있다.



-
경관 속에 바라본 월하성 마을

월하성은 마을에서 바다를 바라보았을 때, 마을의 오른쪽에 옥녀봉이라 부르는 낮은 산이 할아버지당이 있는 당산을 거쳐 뻗어 내려와 마을을 감싸는 형국을 이룬다. 마을 앞 바다에는 오른쪽에 띠섬, 왼쪽에는 쌍도가 있고 그 사이에는 ‘여(礖)’라고 부르는 여러 개의 암초가 있다. 그리고 위로는 충청남도 보령시, 아래로는 전라북도 군산시, 금강의 하구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 곳 월하성은 어업을 주생업으로 하는 어촌마을로 바람이 생업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대부분의 주민이 어부인 월하성 사람들에게 이로운 바람은 남풍인 ‘마파람’으로 바다와 파도에 영향을 주어 고기를 월하성 앞바다로 몰고 와서 고기를 많이 잡게 해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서풍과 북풍은 마을 뒤의 산을 거쳐 불어오기 때문에 바다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바람의 이름은 풍향에 따라 동풍을 ‘높새바람’, 동동남풍을 ‘산바람’, 동남풍을 ‘내바람’, 남풍을 ‘마파람’, 서남풍을 ‘늦바람’, 북서풍을 ‘하늬바람’이라 부른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바람의 명칭과 약간 다르다. 이러한 지리적 경관과 위치는 마을 사람들에게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내려오는 이야기

쌍도의 이무기와 김총각

나도 인자 옛날 어른들한테 들은 얘긴데, 어느 해인가 홍수가 났어. 여기가 막 비가 와서 홍수가 났어. 홍수가 나며는 해변가에 무언가 떠밀려와. 그런게 그 이웃동네에 사는 김총각이라는 그 사람이 헤엄쳐서 가는 거여. 지가 그걸 차지하려고. 헤엄쳐서 거진 가보니께 그게 통나무가 아니라 말하자면 용이여, 용. 그러니까 김총각 이 사람이 확 돌아서서 도망 오는 거지. 그런데 그 이무기가 쫓아오는데, 물 속에서 사람하고 이무기하고 경쟁이 안 되지. 곧 잡혀먹게 생겼는데, 보니까 그 사람이 헤엄치는게 아니라 널르드라는 거여. 그러니께 알고 보니까 김총각이 겨드랑이에 날개가 들어와 있다는 거여. 그런데 옛날에는 기인, 이상한 장수가 나오면 나라에서 역적질한다고 막 없앴다는 거여. 그래서 집안에서 문중회의를 해가지고 저 아를 살려놓으면 우리 집안이 멸문지화를 당한다. 없애야 한다. 그래가지고서는 참 자고 있는데, 팔다리를 꽁꽁 묶어놓구서는 날개를 짤라버렸어. 그러니께 피가 솟구쳐서 막 천장까지 가고서, 도로 붙으려고 하더라, 날개가. 그래서 거기다 못 붙게 재를 뿌리고. 김총각은 죽었지. 이 설화는 신기한 행적을 보이다 억울하게 죽음을 맞이한 영웅, 장수 이야기의 전형적인 흐름을 보인다. 그런데 월하성 마을 주변에는 집이나 마을이 떠내려 올 만큼 큰 강도 없고, 이야기에 등장하는 큰 강인 금강은 월하성보다 더 남쪽에 있는데 왜 이 이야기에서는 마을 앞에 헌 집이 떠내려 오고 죽은 돼지, 큰 나무 등이 내려왔다고 구술되는 것일까? 바다에는 밀물과 썰물이 있다. 그러나 먼 바다에 나가서 보면 물이 들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고 있다. 월하성에는 금강 하구에서 나온 물이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아 흘러든다. 즉 월하성 앞바다의 해수의 흐름을 반영한 부분으로 볼 수 있다.



쌍도


-
쌍도와 띠섬의 뱀 이야기

큰 뱀이 어른들이 그러는데 띠섬이 암놈이 살고, 쌍도라는데 숫놈이 사는데, 달구질이라고 하려고 뱀이 서로 왔다 갔다 한데요. 때때에. 여기 앞에서 보면 물이 하얗게 되면 뱀이 지나가는 것이 보인다고. 달구질이라고 숫놈이 암놈 만나러 간다고 하고. 옛날에 우리 집이, 그런 이야기를 어떻게 아냐면, 조그만한 오두막집이었는데 노인네들이 많이 왔다갔다 했어요. 이 이야기에서 해수의 흐름에 의해 비가 온 후 유입된 옅은 하늘색의 민물과 검고 짙은 바닷물이 섞이지 않아 두 가지 색을 띄게 된 바다를 뱀이 달구질하러 오간다고 표현했다. 실제로 장마철에 비가 많이 온 직후 검은 바다 위 하얀 띠처럼 쌍도와 띠섬 사이에 물이 서로 섞이지 않는 것을 연구자는 자주 목격할 수 있었다. 띠섬의 꼭대기에는 바위가 웅덩이처럼 파여 있다. 그곳은 사리 때 보면 명주 묶음이 세 개가 들어갈 정도로 깊다. 그 깊이를 두고 용이 살만큼 깊다고 해서 ‘용정끝’이라 불렀다고 한다.



-
용정끝 이야기

옛날 어른들 말씀에 용정끝이란 말이 있는데, 가면, 안에 보면, 거기가 지금 다 메꿔는 졌지만, 거기 보면, 파랗니 바위가 둠벙메로 파져서, 물이 쪘을 때 보며는, 명주꾸리가 세 개가 들어갔데. 거기가 용이 산다고 해서 용정끝이라고 했데요. 지금도 한사리때, 아무리 사리 때도 거기 둠벙 안에는 물이 말로 늘어나요. 거기가가 문여라고 바로 띠섬 밑인데, 띠섬에서 이렇게 뻗어나온 연대 따로 떨어진 바위가 하나 있어요. 여기 가운데가 목정이가 나왔어. 여짝에 보면 네모낳게 둠벙이 있더라고. 거기에서 용이 살았다고.



-
쌍도 이야기

마을 앞의 쌍도에도 이야기가 전해 온다. 쌍도는 사람이 살지 못하는 무인도인데, 같은 모양의 섬이 2개가 가까운 거리에 있어서 쌍도라고 부른다. 여기에는 옛날 쌍둥이를 둔 홀아비가 바다에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 죽자 아들 쌍둥이가 아버지를 애타게 기다리다 죽어 바위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
옥녀봉 이야기

그 높은 산이 옥녀봉이라고 부르는데 옛날 어른들은 옥녀상봉이라고 했어. 높을 상자를 써서. 예전에 비 안 오면 올라가서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어. 정성들여 빌면 비가 온다고 해서 기우제를 지내면 비가 오기도 했어. 떡하고 밥하고 해 가지고. 산 닭 잡아가서 피를 내서 땅에다 파묻고. 그러면 비 오고.



월하성 마을의 시작

마을 성씨 이야기

월하성 마을은 김씨, 홍씨, 서씨, 최씨, 한씨, 이씨 등 여러 성씨로 이루어진 각성바지 마을이다. 마을 사람들은 경주 김씨, 남양 홍씨, 대구 서씨의 순서로 마을에 들어왔다고 이야기하며, 현재에도 이 세 개의 성씨가 마을에서 가장 많이 거주하고 있다. 마을에는 이들의 성씨가 어떠한 연유로 마을에 들어와 무엇을 하고 살았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전승되고 있다. 순흥 안씨, 도둔 이씨 등 월하성 마을에 살지 않는 사람들의 묘가 있다. 이 중에서 도둔 이씨는 ‘도동 이씨’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이들은 경주 이씨의 일파로 주변 마을인 남촌 도둔리에 사는 이씨를 일컫는다. 옥녀봉에 ‘도동(도둔)’ 이씨 산소가 있어 남촌에서 월하성으로 시제를 다녔다. 말자지가 잘리던 당시, 구한말에 도둔 이씨는 진사벼슬을 했는데 지금으로 따지면 군수 정도 되었고 위세가 대단해서 월하성 사람들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 했다. 그 당시 이맹기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머리가 좋았고 그때에는 벼슬을 하지 않았는데 말을 타고 다녔다. 옛날에는 말을 타던 사람도 적었고, 벼슬을 하지 않는데도 말을 타고 다니자 이맹기가 벼슬을 한다는 소문이 났다. 이 소문을 들은 원님이 샘이 나서 이맹기를 잡아들였다. 잡아들여서 무릎을 꿇리어 앉혔다. 원님이 ‘네가 벼슬한다고 헛소문을 내서 말을 타고 다니니까 도리상 안 맞는 일이다’라고 말하자 이맹기가 ‘이맹기가 자기 말 타고 다니는데 누가 함부로 뭐라 하느냐’고 말을 해서 원님이 꼼짝을 못했다. 그 정도로 도둔 이씨의 위세가 세었다. 경주 김씨는 마을에서 사실상 제일 먼저 들어왔다고 이야기되지만, 경주 김씨의 족보에 따르면 김의환으로부터 위로 4대조부터 월하성에 들어왔던 것으로 보인다. 위로 4대조부터 무덤의 위치가 월하성으로 표기되어 있기 때문이다. 경주 김씨의 무덤은 원래 옥녀봉에 있었는데 서울시 서천연수원을 건설하면서 2008년 옆 마을 호동으로 이장했다. 대구 서씨가 11대 이전에 들어왔지만 아무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지 않는 반면, 경주 김씨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는 것은 대구 서씨와 경주 김씨 간의 거주지 위치와 생업의 차이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대구 서씨의 경우 민동굴과 알창이쪽, 바닷가에서 약간 떨어져 산에 인접한 곳에 살았던 반면, 경주 김씨는 바닷가 근처에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경주 김씨들이 바닷가에 살면서 마을에서 거의 처음으로 어업에 종사했기 때문으로 파악된다. 월하성에 가장 먼저 들어온 성씨는 대구 서씨인데 이는 대구 서씨의 족보에 서태석으로부터 11대조부터 월하성에 들어왔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족보에 표기된 무덤의 위치 중에 월하성이라 직접적으로 표기된 곳은 없다. 그런데 무덤의 위치로 민등곡(民登谷), 알찬곡(謁贊谷)이라 표기된 곳이 나온다. 민등곡, 알찬곡이 현재 월하성에서 민동굴, 알창이로 불리는 지명임을 감안할 때 이곳에 그들의 무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곳에 대구 서씨의 선산이 있으며, 17대조부터의 무덤이 있다. 남양 홍씨의 경우도 가승을 따르면 6대조부터 들어와, 월하성에 들어 온 적어도 200년 이상이 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남양 홍씨가 서천에 들어온 시기는 고려시대로 홍두표(洪斗杓, 남, 1932년생)는 추측하였지만, 들어온 이후 10대조 간의 자료가 없다고 한다. 월하성으로 들어온 남양 홍씨는 조운업에 종사하며, 망선을 운영했다고 한다. 경주 최씨 족보상에는 최완수(崔完洙, 남, 1935년생)로부터 3대조부터 월하성에 들어왔던 것으로 보이며, 여러 성씨 중에서 가장 늦다. 그러나 월하성에 있는 경주 최씨의 묘는 6대조부터 있기 때문에 그 이전으로 보아도 타당하다.



남양홍씨 묘


삶의 영위

고기잡이

월하성 주민들은 육지와 가까운 섬을 중심으로 근해어업에 종사해 왔다. 월하성에서 배를 타고 남으로 내려가면 고군산군도의 북쪽부분을 만난다. 월하성 주민들은 주로 이곳에서 어장을 꾸리기도 하였으며 때에 따라서는 더 먼 바다로 나가기도 했다. 이렇게 바다에서 잡아 온 고기를 바다 위에서 바로 판매하거나 육로를 통해 판매했다. 그러나 예전부터 이와 같은 근해어업에 종사해 온 것은 아니다. 과거에는 배의 종류와 어종 그리고 어업을 하는 장소 또한 달랐다. 1930년대 이후 어장은 일제시기 후기에 들어 남쪽으로 흑산도까지 더 확대되었고 북으로는 압록강 유역까지도 나갔지만 대개의 경우 연평도 지역에서의 집중적인 조업이 이루어졌다. 조기잡이는 한식사리에 나갔다가 곡우사리에 연평도에 가서 망종사리까지 다녀오면 끝이 났다. 돛을 단 ‘풍선(風船)’은 바람이 좋으면 연평도까지 3-4일 정도 걸리지만, 바람이 없으면 10일이 걸려도 못 갔다고 한다. 연평도로 나가기 전에는 쌀, 물, 나무(배 위에서 땔 나무)가 마량리에는 없기 때문에 외지에서 사거나 마을에 들어온 장사에게 사가지고 갔다. 배 위에서는 보리밥은 찧어야 하기 때문에 쌀밥 외에는 먹지 못하였으며 소금은 봄에는 별로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 별로 덥지도 않기 때문에 젓갈 담을 용도로 2~3가마 정도만 실고 갔다. 멀리 나가는 배 이외에도 월하성 가까운 바다에서 어업을 했던 소형어선도 있었다. 이들 배는 ‘잔배’ 또는 ‘주낙배’라고 불렀다. 이 배들이 어획하는 것은 주로 대하(大蝦)와 조기였다. 조기와 대하를 잡으러 마을에서 멀리 나가는 것은 봄에만 하는데 개야도와 개야도 뒤쪽의 ‘부용도(비응도)’에서 어업을 진행했다. 개야도(開也島)는 개화도 (開花島)라고도 하는데 1875년 『연행일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개화도는 큰 도회지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어업으로 자생하며 봄과 여름 사이에 상고선이 운집하여 돈과 곡식이 산처럼 쌓이고 사람들은 돈을 탕아처럼 쓴다.’ 또한 조선 후기 지방지도에도 간략히 표기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개야도는 호구가 55호, 인구는 233명이고 관에서 30리 떨어져 있다. 봄에는 여러 곳에서 온 어선이 정박한다. 섬의 뒤쪽에는 층층이 쌓인 암석과 날카로운 바위가 병풍처럼 펼쳐져 있고 앞에는 어장과 어살이 상투 튼 것처럼 펼쳐져 있다.’ 마을 앞바다에서 집중적으로 어업을 시작한 시기는 대략 1960년대부터로 보인다. 그렇지만 주요 돈벌이가 되었던 조기와 갈치가 더 이상 잡히지 않거나, 판매처의 사정이 변화했다. 배가 작아져 먼 바다로 나가기 힘들었기 때문이기도 하며 어업과 관련된 허가가 생기면서 여러 규제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내일 아침 조업 준비


-
객주와 수협

판매경로 또한 교통수단의 발달과 길의 확장 및 생성, 새로운 기관의 설립으로 인해 판매방식과 더불어 변화했다. 현재는 어업 후 그물에서 정리한 고기를 대부분 수협에 위탁판매를 한다. 그러나 1970년대 이전까지 수협 외에 객주도 주요한 유통수단을 장악하고 있었다. 조기나 갈치처럼 수요가 높은 고기를 잡은 경우 바다 위에서 바로 상고선에 팔기도 했다. 중선이 바다 위에서 고기를 많이 잡으면 기를 꽂아 놓았고, 상고선은 그 배가 만선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와 고기를 구매하였으며, 이렇게 구매한 고기를 어판장에 판매를 하든지, 객주에게 팔든지 했다. 객주는 상인들을 소개해 주고 구전(口錢)을 받는다. 어업조합에 고기를 넘긴다는 것을 ‘약관을 굴린다’라고 표현하였으며, 조합은 생선을 팔 때 6할을 가지고, 새우젓은 5할을 가졌다고 한다. 객주는 조합의 반절 정도만 갖기 때문에 객주에게 넘기는 것이 어민 입장에서는 더 유리하다. 그러나 서면 근해에서 어업 하는 많은 배들에게는 서면어업조합이 중요한 판로가 되었다.



-
등짐장수

상인들이 직접 마을로 들어와 고기를 받아다 파는 사례도 많았다. 고기를 받아다 파는 사람들로는 등짐장수와 ‘잉꼴이 장수’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 지역에서는 혼용해서 사용하는 경향이 있지만, 짐꾼으로서의 등짐장수는 조직으로서의 부상조직과는 차이가 있었다. 조선 말기에 월하성 마을은 보상 조직과 부상 조직 모두에 관여했었던 것으로 보인다. 보상 조직은 주로 모시 유통을 담당하는 조직이었으며, 부상 조직은 어물, 수철, 나무, 소금, 어망 등을 담당하는 조직이었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월하성의 최승기도 부상절목에 이름이 등장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어물을 유통시키던 부상 조직은 상인 조직과는 전혀 관계없는 신분 조직으로 변형되어 운영되었다. 또 보상 조직 또한 모시를 담당하는 조직이라기보다는 상인들의 광범위한 조직으로 바뀌었다. 어물을 운반하는 등짐장수는 포구에서 생선을 받아 자기 집으로 돌아가 하루를 지내고, 첫 닭이 울면 시장으로 나가 고기를 팔았다고 한다. 이들 등짐장수는 지게를 지고 장마다 걸어서 다니기도 했지만 육상교통이 발달하면서 리어카 등짐장수나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등짐장수가 등장했다. 이들은 리어카나 자전거 뒤에 짐을 싣고 다녔는데 수레와 차가 나오면서 나중에는 삼륜차를 타고 다니는 등짐장수가 나오기도 했다. 등짐장수들은 수협을 통하기도 하고, 낚싯배에서 갈치 등을 직접 받아가기도 했다. 등짐장수들은 주로 판교장, 홍산장 등 멀리 있는 내륙시장을 다녔는데, 월하성에서 30리쯤 떨어진 통박골은 주변의 어물장수들이 지나가는 요지가 되었다. 등짐장수는 서면 마량리, 도둔리, 월하성리에서 어물을 사 짊어지고 판교장에 가져다 팔았다. 등짐장수가 사라진 이후 그 빈자리를 어업 일을 직접 하지는 않지만 머리에 어물을 지고 운반하는 아주머니들, ‘잉꼴이장수’들이 채웠다. 생선을 떼어다 파는 일이 집에서 농사를 짓는 것 보다 더 많은 이윤이 남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전에 도 가난한 집의 부녀자들이 어물운반에 종사하기는 했지만, 여성노동력 전반에 이러한 변화가 나타난 것은 대략 1960년도부터이며, 여성들이 더 이상 모시를 하지 않게 된 시기와 일치한다.



-
모시의 생산과 판매

월하성이 위치한 서천은 모시를 생산하던 저산팔읍의 한 곳으로 주변의 서천장, 비인장, 판교장에서 모시의 원료인 태모시를 구매하고 다 제조된 모시를 판매했다. 월하성의 주민들은 집집마다 모시를 했다고 전해지지만 모시 가격하락, 어업과 농업에서의 노동력 부족 등을 이유로 1960년대 초반 이후 더 이상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모시를 하려면 원료인 모시풀을 필요로 한다. 모시풀은 바닷가에 인접한 둑에서 많이 자라, 모시풀이 나면 베어서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모시풀을 집집마다 베어다 사용했던 것은 아니고 모시풀을 파는 장사꾼들이 밭에다 심어서 재배해 대량으로 장에서 팔았으며, 주로 이것을 사다가 모시를 짰다. 모시풀은 봄에 나서 8월까지 자란 것을 장사꾼들이 베어 말려서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지고 올라와서 판교장에서 소매로 팔았다. 전라남도와 경상도에서는 대량으로 태모시가 생산되었기 때문에 싼 가격에 대량으로 구매해와 좀더 비싼 가격을 받고 소매로 판매했다. 장터에서 판매되는 모시풀은 베어온 상태 그대로가 아닌, 모시풀의 껍질을 말린 태모시였다. 태모시 3근이면 모시 1필을 만들 수 있었는데, 3근의 양은 한 주먹 정도에 잡히는 정도라 한다. 모시를 만드는 계절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어서 겨울에도 하고 여름에도 했다. 주로 할머니들이 일이 없으니 집안에서 모시풀을 삶고 째고 하여 실을 만들었고, 베를 짜는 일은 며느리나 딸들이 했다. 베 짜는 일은 밤에는 할 수 없기 때문에 날을 잡아서 해야 했으며 베 짜는 일을 잘 하는 사람은 한 필을 짜는 데 사흘이 걸리고, 못 짜는 사람은 5~6일이 걸린다고 한다. 모시를 완성하면 비인장, 한산장, 서천장 등지에 가져가 팔았다고 한다. 모시장은 새벽 3시에서 4시 사이에 열렸는데 모시가 햇볕에 마르면 부스러지기 때문에 이를 방지하기 위해 이 시간에 열린다고도 했다. 그런데 월하성에서 모시를 제조하는 일은 1960년대 초반을 기점으로 점차 사라지게 된다. 이는 월하성의 생업이 어업이었기 때문에 모시를 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당시 모시가격의 하락으로 모시가 소득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모시를 그만둔 이후 여성들의 일은 잡아 온 고기를 인근의 서천, 판교, 웅천, 비인장에서 팔거나 밭농사, 논농사에 투입되었다. 또한 모시가 없어지면서 김 양식을 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