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사이트는 Chrome, IE10 이상의 버전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10 미만 버전일 경우 원활하지 않을 수 있으니 업그레이드 하시기 바랍니다.

충청남도 부여군 은산면 은산1리 민속지

주제 동서남북 열린 길따라, 은산1리
조사 은산1리의 이야기, 사진, 영상, PDF

마을개관

마을의 경관

PDF 보기


은산1리는 29번 국도와 723번 지방도로가 만나는 은산사거리를 중심으로 북서쪽에 형성되어 있다. 서쪽으로는 은산천을 경계로 하고, 북쪽은 신대2리, 남쪽은 가중리, 동쪽은 신대1리가 이어진다. 당산 뒤쪽에서 뻗어 내려오는 낮은 산줄기는 구초등학교 뒤쪽에서 평지로 변하면서 은산1리 마을이 자리잡은 평지를 만든다. 이는 가중리로 가는 농공단지에서 다시 얕은 경사면을 형성해 가는데, 그 사이를 은산천이 가로 지른다. 그래서 은산리를 남북축으로 잘라보면 작은 구릉이 연결되는 평지에 마을이 내려앉은 지세이다. 마을안길 중 주축이 되는 것은 남북축으로 3개와 동서축으로 1개가 있다. 신대리쪽에서 접근이 가까운 남북도로는 사거리 안쪽에서 시작해서 구은산초등학교 앞까지 직선으로 이어지고, 또 하나의 남북도로는 은산2리에서 은산천을 건너 마을로 들어서서 마을 당산목까지 연결된다. 은산천변을 따라 마을의 서쪽에 남북으로 나 있는 도로는 셋 중에서 가장 이용 빈도가 낮은 곳이다. 이는 길의 지면 레벨이 높아 마을 안쪽 혹은 집들로 들어가는 출입구와 연결되는 골목들과의 연계가 어렵게 엮여 있기 때문이다. 동서축으로 나있는 도로는 2개의 마을 전체 구성에서 보면 남측 부분에서 만난다. 특히 동서를 가로지르는 도로를 중심으로 윗부분은 주거용 건물들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아래쪽은 상가 위주의 건물들로 채워져 있다. 또한 이 도로를 중심으로 남쪽에 있는 건물들의 반 이상은 1971년 홍수 때 피해를 크게 입은 후 신축한 것들이 많다. 그래서 3층 혹은 3층 옥상에 다시 간이로 증축을 한 현대식 건물들이 가로변을 채우고 있다. 마을 내부로 들어오면 작은 골목들의 연계가 매우 흥미롭게 이어진다. 은산천에서 마을 안으로 흘러드는 물길은 구은산초등학교 옆을 지나 좁은 도랑으로 마을 안길과 나란히 가는데, 마을에서는 복개공사를 하면서 물길을 다 덮지 않고 일부를 노출시켜 놓았다. 이는 은산천의 물이 깨끗하고 풍광이 좋을 뿐 아니라 빨래터로써도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마을 안까지 물길의 흐름이 이어지지만 정작, 마을 안에 들어서면 그러한 자연적인 경관보다는 건물과 길이 먼저 눈에 들어오는 곳이 은산이라 생각된다. 물로 주변의 자연적인 여건을 일부러 배제해서가 아니라 사람의 생활이 만들어낸 결과가 지금의 은산 경관을 지배하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
마을 공간 구성

마을공간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를 사적공간과 공적인 공간으로 나눌 수 있다. 공적인 공간으로 가장 많은 면적을 차지하는 것은 현재 신축하여 중학교와 함께 자리한 은산초등학교의 옛 교정과 은산별신제 전수회관 등 관련 장소들을 들 수 있다. 이 둘은 넓은 구역을 차지하고 있지만 위치상으로는 마을의 변두리에 위치하고 있다. 그 이외의 공간이 사적인 구역이라고 할 수 있는데, 농사일을 하는 가정이 별로 없는 은산의 특성상 주거지역과 상업지역으로 이루어진다. 상업지역은 은산사거리와 대중교통이 다니는 도로주변에 분포해 있으며, 건물에 따라서 주거 기능을 겸하고 있기도 하다. 마을 남쪽을 동서로 통과하는 도로에서 북으로 이어지는 안길 주변에는 주거 전용 가옥들이 이어지지만, 이 또한 초입에는 사거리 상가건물군이 규모가 축소되면서 꼬리를 물고 일부 이어진다. 주거와 상가공간은 둘 다 사적인 영역이라고 할 수 있으며, 서로 긴밀한 동선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마을의 중심과 또한 외부에서 접근이 가장 용이한 구역을 점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마을 안길의 순수한 주거공간은 예전과는 다른 변화의 과정을 겪은 것이다. 예전에는 당산나무로 이어지는 길은 안쪽까지 영업을 하는 상가들이 이어져 있어 지금과는 공간의 성격이 달랐다. 물론 건물의 형식은 상가지만 은산사거리의 3-4층 건물처럼 현대식으로 지어진 것들은 아니었고, 대부분이 주거를 겸한 구옥의 모습이었다고 한다. 마을 공간 구성의 가장 큰 변화는 은산장의 축소에 따른 상업공간의 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은산 5일장이 성황을 이루던 때에는 마을 안길까지도 상업을 하는 집들이 자리를 하고 있어 지금과는 많이 다른 모습의 마을공간을 구성하고 있었다고 한다. 5일장이 열리는 중심구역은 일반 주거지와는 살림집 자체의 성격도 차이를 보였으며, 시장의 중앙통로에는 이곳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편리하도록 아케이드 형식의 지붕 구조물이 설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5일장이 열릴 당시 상인들은 거래 물목별로 모여 전을 벌였는데,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은 당산나무부터 남쪽으로 뻗은 길이 중앙통로로 성시를 이루었다고 한다. 그 이외에 지금의 은산사거리에서 723번 국도를 따라 북쪽으로 이어지는 길의 왼편 안쪽으로는 생선전, 야채전 등이 열렸으며 이 주변에 국밥집들이 줄지어 장날 상인들과 장을 보러 나온 이들을 대상으로 음식을 팔았다고 한다. 이렇게 마을 안길과 내부에서 번성하던 장터거리는 은산장의 쇄락과 수해복구를 하면서 발생한 상업공간의 이동 등으로 마을의 모습을 점차 예전과 다르게 바꾸어 왔다. 건물의 신축을 위한 작은 필지들의 합병과 용도의 변경에서부터 교통수단의 발전과 대중화 등이 은산의 산업구조를 점진적으로 변화시킨 것이다. 현재 마을에서 가장 번화한 곳은 사거리를 중심으로 한 곳이지만, 예전에는 당산나무 아래에서 남쪽으로 뻗은 길 주변이 장날이면 성시를 이루었다고 한다.



은산1리 전경


-
지명유래

지명유래는 산과 골짜기가 많은 시골마을에서 그 이름과 유래가 풍부하고 잘 전승되지만, 이 마을은 그렇지 못하다. 왜냐하면 평지 위에 들어선 상거래 중심의 상업마을인 탓에 특징적인 지형지물이 없어서 그렇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옛날에서부터 지금까지 교통이 발달한데다, 장시촌의 전통을 가지고 있어서 그것에 맞는 ‘길’과 ‘골목’에 대한 이름과 유래가 소박하게나마 전승되고 있었다. 사거리는 마을의 남쪽에 사방으로 펼쳐진 길이다. 이 주변에 버스정류장, 다방, 마을금고, 약국 등 편의시설이 밀집되어 있다. 학교 가는 길은 시장터 옆 지산반점과 은산교회 앞에 길게 뻗은 길이다. 마을에서는 이 길로 계속 직진하면 구 은산초등학교가 나온다 하여 길의 이름을 ‘학교 가는 길’ 로 일컫는다. 부여 가는 길은 사거리에서 성모약국과 새마을금고 사이가 길의 입구이다. 입구에서 동쪽으로 곧게 뻗어 있다. 마을에서는 이 길로 가면 부여읍이 나온다고 하여 길의 이름을 ‘부여 가는 길’로 일컫는다. 청양 가는 길은 사거리에서 은산할인마트와 사거리식육점 사이가 길의 입구이다. 입구에서 서쪽으로 길이 곧게 뻗어 있다. 마을에서는 이 길로 가면 청양군이 나온다고 하여 길의 이름을 ‘청양 가는 길’로 일컫는다. 싸전골목은 마을의 서쪽에 남북으로 길게 뻗은 골목길이다. 현재 길 옆에 은산국수와 은산가스설비공사가 들어서 있다. 골목의 북쪽 가장 끝에 정자나무가 있다. 안고사티는 은산교회와 구 은산초등학교의 오른쪽에 “S”자 형태로 길게 자리 잡은 골목길이다. 마을 사람들은 이 길의 유래를 ‘마을 안에 있는 골목길’이라 하여 안고사티로 일컫고 있으며, ‘안고사태’라고도 일컫는다. 원뚝은 과거 마을 안에 “S”자로 굽이쳐 흐르던 은산천 물줄기를 마을 밖에 원형으로 돌리기 위해 둑을 만들었는데, 이 둑을 마을에서는 ‘원뚝’이라 한다. 원형으로 물길을 돌리기 위해서 만든 둑이라 하여 일컫는 이름이다.



-
마을의 역사

은산1리가 형성된 시기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부여군 긍곡리에 남아 있는 금강사지의 설립연대를 추정해 보았을 때, 이 마을은 대략 백제시대에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마을은 고려시대에 가림군과 정산군에, 조선 태조 13년에는 부여군 방생면, 공동면, 가좌면에 속하였다. 그리고 조선 인조 24년에는 은진, 이산, 연산을 합하여 만든 은산현에 속하였다. 그 후 1914년 3월 일본에 의해서 이루어진 행정구역 개편에 도성면의 일부 지역과 산직리를 병합하여 구성된 은산면에 속하였다. 그리고 1967년 행정구역 개편 때는 은산1리로 분동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마을은 앞에서도 설명하였듯이 마을을 중심으로 사방에 길이 펼쳐진 곳으로서, 이 일대에서는 교통의 중심지이다. 마을의 이러한 교통 중심지의 성격은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고려 조정은 역참제도를 시행하면서 전국 525개의 역을 22개의 역도로 재편성하면서 역참을 조직하였다. 당시 수원에서 해미로 연결되는 충청주도의 역도 가운데, 지금의 지명과 한자표기가 다르지만 부여의 은산이 이에 속해 있었다. 조선시대 접어들어서도 태종 원년에 은산리에 역을 설치하면서 고려시대 역원제도를 계승하였다. 마을에 군사·외교·행정·경제의 측면에서 중앙 집권 체제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역참이 고려시대부터 있었다는 것은, 이곳이 전통적으로 사통팔달(四通八達)의 요충지임을 반증한다고 하겠다. 상업적 농업이 발달한 18세기에 은산리는 모시생산을 토대로 장시 시장권이 부흥해 나갔다. 19세기 전반(1830년)에 찬술된 『임원경제지』의 「예규지 권4 화식팔영장시」에 의하면, 저포, 연초, 우독, 백어, 제어, 은구어 등을 주된 교역품으로 하는 은산장이 1일과 6일에 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20세기 초인 1900년대만 해도 은산장은 매우 번창하여 장이 서는 날에는 인접지역의 매매인이 약 2천 명이 운집하였다. 그러나 은산장의 모시중심의 상업은 중국 마포의 수입으로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은산장은 인근에서 가장 활발한 경제 유통의 중심지였다. 마을 안에 있는 은산별신제의 하당 터 정자나무 근처로부터 큰 도로에 이르는 공간이 과거 은산장의 중심지로서, 이곳에 모시전, 소전, 어물전, 죽물전, 옹기전, 지게전, 나무전, 싸전, 채소전 등이 즐비하게 난전을 벌인 것이다. 1930년대 후반부터는 청양군 적곡면에 있는 중석광산이 호황을 이루어, 7천여 명의 광부와 그 가족이 생활필수품을 은산장이 공급하면서 대단한 호황을 누렸다. 그러나 1970년대 중석광산이 쇠퇴하여 거의 폐광상태가 되고, 한편 교통의 편리함으로 생활권이 부여로 편입되기 시작했고, 1970년대 중반부터는 시장이었던 은산1리 일대가 주택가로 변화하였다. 그 이후에는 면소재지로서 행정기능만 유지되고 있을 뿐, 과거에 호황을 누렸던 장시문화는 보기 어렵게 되었다.



시장터


크고 작은 모임들

대동계

대동계는 은산1리의 전체 대동 모임을 아우르는 가장 큰 모임으로서 마을의 공동재산을 관리하는 일을 맡고 있다. 대동계의 대표인 대동계장을 중심으로 그 아래에 새마을지도자, 이장, 개발위원, 6개 반의 반장, 노인회, 부녀회, 청년회의 각 회장, 부회장, 총무 등이 은산1리의 전반적인 사회·경제활동을 책임지고 꾸려나간다. 개발위원은 6명이며, 나머지의 직책은 각각 1명씩 맡고 있다. 대동계장의 임기는 3년이며 선발방식은 마을 사람들의 추천을 통한 선발이다. 3년이 임기지만 물려받을 사람이 없을 경우 연임을 한다. 이 마을에서 대동계장은 마을에서 가장 큰 어른으로 인식한다. 그래서 주로 거동이 가능한 고령의 노인이 맡게 된다. 대동계장은 명예직이며 실질적인 행정업무는 마을의 이장이 맡는다. 마을의 공동재산은 무의탁 노인들이 죽기 전에 자신의 땅이나 돈을 대동계에 기부하는 것이 모여져서 만들어졌다. 이 재산 가운데 땅은 몇 년 전까지 대동계에서 그대로 가지고 있었으나, 재산관리를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서 땅을 팔아 현금으로 가지고 있다.



-
노인회

은산1리 노인회는 이 마을에 사는 만 65세 이상 노인들이 중심으로 운영되는 조직이다. 설립시기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약 11년 전으로 추정하고 있다. 회원이 되는 자격은 마을에서 사는 65세 이상의 노인들이라면 누구나 자유롭게 가입할 수 있다. 노인회에서 주로 하는 일은 크게 ‘봉사’와 ‘여가’로 나눌 수 있다. 이 가운데 봉사는 두 달에 한 번씩 날짜를 정해 마을 안 골목청소를 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사거리를 중심으로 싸전골목과 시장터를 다니면서 휴지를 줍는 일이다. 그리고 여가는 1년이나 2년에 한 번씩 국내외 관광을 가는 것인데, 이것에 드는 비용은 정부에서 나오는 운영비 일부와 청년회나 대동계에서 지원해주는 지원금이다. 과거 설립 당시 노인회 인구는 약 100명 정도 되었으며, 현재는 약 50명 정도로 줄었다. 이 마을은 여성노인의 인구가 더 많다. 그래서 노인회의 성비도 여자가 30명인데 반해, 남자는 20명 정도이다. 이러한 비율은 설립당시부터 지금까지 그러하다고 한다. 노인회 회원들은 평소 마을회관에서 바둑이나 장기를 두고, 화투놀이를 하면서 여가생활을 즐긴다. 마을회관이 회원들의 주요 거주영역인 관계로 이러한 마을회관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운영비의 일정부분을 노인회도 내놓는다. 노인회의 운영비는 정부에서 사사분기 형식으로 계절마다 지급되는데, 겨울이 가장 많이 나오며, 그 다음으로 여름, 가장 적게 나올 때가 봄과 가을이다. 이것은 여름과 겨울에 냉난방비가 많이 들기 때문에 정부는 이러한 형평성으로 고려해서 지급해 주는 것이다.



마을경로잔치


-
청년회

은산1리 청년회는 노인회나 부녀회보다 더 오래 전에 생긴 마을청년들의 자치조직이다. 마을 사람들의 제보에 의하면 청년회는 새마을운동 때 4H클럽이 형성되기 전에 이미 매우 체계적으로 조직화되어 있었다고 한다. 과거 청년들이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상여계의 전통을 지속적으로 이어받아 그러한 공동체 정신이 오늘날까지 이어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회원이 되는 자격은 마을에 사는 고등학교 졸업생부터 만 60세 미만의 남성이면 누구든지 가입할 수 있다. 현재 청년회가 마을에서 주로 하는 일은 크게 척사대회, 효도관광, 경로잔치를 주관하는 것이다. 이 세 행사는 모두 마을의 어른들을 대접하고 모시는 것이 공통적이다. 과거에는 이러한 세 행사 외에도 마을에 상이 났을 때 상가를 도와주고 상여를 매주는 일을 청년회가 주도적으로 해왔다. 그러나 8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부터 마을에서는 집에서 상을 치루던 것이 차츰차츰 부여의 장례식장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리고 상례절차를 진행하는 일도 마을 사람들이 도와주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던 것이, 농협을 끼고 있는 장례 전문업체나 기타 상조회사에다 염에서부터 매장까지 그 모든 절차를 맡기는 형태로 변화되었다.



-
부녀회

은산1리 부녀회는 새마을운동 당시 결성되었으며, 그 전통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마을의 대표적인 공식 여성조직이다. 회원이 되는 자격은 마을에 거주하는 여성 가운데 60세 이하면 기혼이든 미혼이든 누구나 가입이 가능하다. 부녀회가 하는 일은 일반적으로 크게 네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첫째, 마을의 애·경사에 대한 협조, 둘째, 마을의 행사에 대한 지원, 셋째, 응급상황 발생 시 투입, 넷째 친목도모를 위한 관광 등이 그것이다. 조직 내에서 의사를 결정할 때는 임원들이 가장 먼저 회의를 한 다음, 그 내용을 회원들이 한 자리에 모인 곳에 통보한다. 그리고는 다수결의 원칙을 적용하여 결정한다. 일을 하다가 문제가 생기면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이장에게 건의한다. 이장은 그 문제를 자신의 선에서 해결할 수 있으면 자신이 알아서 해결해 주고, 자신의 권한 밖이라고 판단되면 그 문제를 대동계장에게 얘기한다. 대동계장은 마을사회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어지간한 일은 대동계장이 다 수렴하여 해결해 줄 수 있다.



-
은산면 노인회

은산면 노인회는 새마을운동 당시에 결성된 면단위의 노인 자치 조직이다. 부여군에는 16개면이 있고, 면마다 면 노인회가 제각기 결성되어 있다. 회원이 되는 자격은 은산면 27개 행정마을에 사는 만 65세 이상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입이 가능하다. 은산면 노인회가 하는 일은 마을 노인회와 마찬가지로 크게 봉사와 여가로 나눈다. 이 가운데 봉사는 봄이나 가을에 일정한 날을 정해 은산면 소재지의 곳곳을 다니면서 쓰레기를 줍는 일과 불우이웃을 돕는 것이다. 그러나 요즘은 마을에 불우한 환경에 처해 있는 사람을 찾아볼 수 없어서, 공식적인 봉사활동은 쓰레기 줍는 일밖에 없다. 그리고 여가는 봄과 가을에 국내여행을 가는 것이며, 여비는 정부에서 주는 지원금이다.



-
은산별신제보존회

은산별신제가 1966년 2월 15일에 제9호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기 전에는 정부나 지방자치단체 및 민간단체의 도움 없이 마을 사람들이 자체적으로 제를 지냈다. 음력 정월 초사흗날에 은산리를 중심으로 주변에 가까운 마을 사람들이 대동모임을 열고, 임시로 ‘기성회’를 조직하고 임원을 선출하여 제를 지냈다. 기성회 임원들은 회의를 통해 제각기 역할을 분담하여 행사를 준비하고 집행했다. 과거 기성회의 전통을 이어받아 은산별신제를 지속적으로 전승시키고자 1978년 1월 10일 사단법인 ‘은산별신제보존협회’가 만들어졌다. 이 협회는 1986년에 이르러 제322호 중요무형문화재 보유단체로 인정되었다. 보유단체로 인정되면서 조직의 명칭이 ‘은산별신제보존회’로 바뀌게 되었고, 조직 명칭의 변경과 함께 임원의 직책이 10개에서 7개로 간소화되었으며, 명칭 또한 변경되었다. 은산별신제보존회는 은산별신제가 잘 보존되기 위해서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일을 한다. 첫번째, 대제와 소제로 이루어진 별신제를 매년 치루기 위한 모든 업무를 총괄 기획한다. 두번째, 임원들의 직급 체계를 상시적으로 관리하며 필요에 따라 융통성 있게 조정한다. 세번째, 별신제를 발전적으로 계승하기 위해 보유자 및 전수조교가 이수자와 전수생들에게 지속적으로 예능교육을 시킨다.



은산별신제


-
개인친목모임

은산에는 다양한 종류의 친목모임이 운영되고 있다. 친목모임은 흔히 말하는 계와 같은 것이다. 모임이 결성되는 동기는 각각 다르지만 결과적으로 추구하는 목적은 계원들의 경조사에 몫돈을 마련하고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서이다. 또한 출가시키지 않은 자식을 둔 여자들은 혼계를 많이 든다. 이 지역 계조직의 발달은 농사일을 하는 사람보다는 상업이나 노동일을 생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들은 하루 단위로 수입이 들어오기 때문에 푼돈으로 써버리지 않고 모으기 위한 수단으로 가능한 한 여러 친목모임에 가입해 몫돈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친목계로는 이웃계, 생일계, 혼계, 우친계, 동창계, 뽑기계, 운우회, 청은회, 은성계, 오씨네계 등이 있다. 크게 남자들의 계모임과 여자들의 계모임으로 구분이 되고, 모임의 동기도 남녀가 차별을 가진다. 남자들은 주로 학연과 사회생활에서 만난 동료들과의 유대를 목적으로 하고, 여자들은 가까운 이웃이나 개인적인 친분이 모임을 만드는 이유로 작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