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황인용은 1956년 고 황성익과 고 홍필남의 2남4녀 중 차남으로 은산의 현 살림집에서 태어났다. 안채를 지은 지 8년이 지나서의 일이며, 장남 황인화(1938년생)가 태어나고 18년 만의 일이다. 위 로 세 명의 누나와 아래로 한 명의 누이동생이 있다. 위아래로 터울이 많이 나기 때문에 동기간에 함께 지 낸 시간은 많지 않다. 직장, 출가 등의 이유로 모두들 곧 고향을 떠나 생활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현재 살림집이 있는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은산국민학교를 다녔다. 지금은 은산초등학 교와 중학교가 합병되어 마을 외곽에 새 교사를 짓고 옮겼지만 당시에는 상당히 많은 학생들이 통학하였고 아침마다 선옥이네는 학생들이 등하교하는 소리를 들으며 생활했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다른 또래보다 몸집이 작은 편에 속했고 중학교 진학 한 이후에도 사정이 바뀌지 않았다. 왜소하고 개구쟁이 같은 외모의 어린 시절 황인용은 공부에 큰 뜻이 없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없을 정도로 집안 형편이 나쁘지 않았는데도 진학의 꿈을 접었다. 공부에 큰 뜻을 두지 않았던 아버지는 기술을 배우기 위해 고향을 떠났다. 중학교 졸업 후 기술을 배우기 위해 처음 타향살이를 한 곳은 경기도 안양의 한 자동차정비소였다. 그 곳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2~3년간 열심히 자동차 정비와 용접 기술을 익혔다. 월급은 고사하고 용돈으로 쓰기에도 턱없이 부족한 돈이었지만 미래에 자신의 정비소를 꿈꾸며 고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엔지니어로서의 꿈은 인연이 없었던지 잘 다니던 직장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정비소는 사장 둘이 공동으로 운영하던 곳이었는데, 한 사장이 예비군 훈련을 간 날 다른 사장이 몰래 돈을 빼돌린 사실을 곧이곧대로 말해 버렸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이때 취득한 운전면허증이 있어 운전병으로 1977년 입대하게 되었다. 논산 훈련소와 운 전 후반기 교육을 거쳐 포대로 배치된 후 부식차를 몰게 되었다. 부대의 모든 먹거리를 운송하는 부식차는 속된 말로 ‘끝발’이 좋아서 비교적 편한 군 생활을 할 수 있었다. 1979년 12월27일 제대한 후 집에만 있던 아버지는 갑갑한 마음에 중동행을 결심하게 되었다. 군대에서 운전병으로 근무를 한 경험을 살려 운전으로 일하고 싶었지만 운전직은 신청하고도 오래 기다 려야 갈 수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아버지는 임금은 낮지만 기다리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노가다’라 불리는 건설잡부로 일했다. 지금은 없어진 유원건설에 월 320달러에 고용되었다. 월 320달러라는 보수는 낮은 편이었지만 근무 외 수당이 있어서 그럭저럭 벌이가 나쁘지는 않았다. 1980년 봄부터 약 1년 정도의 해외 근로 현장에서 약간의 돈을 벌어 귀국할 수 있었다. 이때 번 돈은 결국 결혼자금으로 많이 충당되었다. 아버지는 잠시 안양에서 알게 된 선배의 권유로 잠시 트럭 운전을 하며 전국을 누비기도 하였다. 한 대의 트럭을 2인 1조가 교대로 밤낮 가릴 것 없이 핸들을 잡았다. 트럭 두 대분을 한 트럭에 몰아 싣고 운행하는 위법 행위를 저질러야만 했지만 당시 열악한 작업환경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렇게 힘들고 불규칙적이며 일정한 거처 없이 전국을 떠돌아 다녀야 하는 일을 평생 할 수는 없었다. 결혼 이후에는 핸들을 잡지 않았다.
어머니 김희순은 은산에서 그리 멀리 않은 거 전리에서 1958년에 태어났다. 고 김기영(1934~2005) 과 이운예(1935년생)의 2남 3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 언니 김희숙은 어머니와 일란성 쌍둥이로 같은 날 태어났지만 쌍둥이라는 사실이 부끄러웠던 아버지는 언니보다 1년 늦게 출생신고를 하였다. 어머니가 태어난 거전리는 부여와 청양의 경계가 되는 지천의 서쪽 산중턱에 자리한 마을이다. 은 산리가 평지를 중심으로 발달한 곳이라면 거전리는 가파른 경사지에 자리를 잡았다. 거전리 일대는 경주 김씨가 터전을 잡고 10여대를 이어온 곳으로 마을 주변에는 집안 친척들과 조상묘가 많다. ‘쪼그만 것이 생기기만 하면 장에 내다 파는’ 은산에 비하면 거전리는 순수한 농촌 지역이다. 농촌의 인심은 후하다. 그러나 친정아버지 고 김기영의 인심은 남달라서 은산에서도 소문이 자자한 정도이다. 지나가는 버스도 세워서 기사에게 새참을 권하고 다 먹어야만 보내주는가 하면, 마을을 지나가던 군인들이 새참 나오기 전에 그냥 가버리자 차를 타고 가서 데리고 오기도 하였다. 이런 집안 환경은 자연스럽게 어머니에게도 배여 있어서 지금도 먹을 것이 생기기만 하면 이웃과 나누거나 집으로 초대하여 함께 식사한다. 어머니는 마을 앞의 지천을 건너 청양의 화산국민학교를 다녔다. 입학 후 몇 년 안 있어 마을에 국민학교가 생겼지만 어머니는 졸업 때까지 화산국민학교를 계곡 건너 산 너머 다녀야 했다. 학교 다닐 때 줄곧 성적이 상위권이었지만 ‘여자는 자기 이름 정도만 쓸 줄 알면 된다.’는 친정아버지의 고집에 부딪쳐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반면 한 살 연상의 오빠는 서울로 유학을 보내 줄 만큼 집안 사정이 나쁘지 않았지만 유독 딸들은 차별 대우를 받아야만 했다. 어머니는 이것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공부가 아니면 서울에서 기술을 배우겠다고 상경하기도 했지만 이도 여의치 않았다. 10대 후반부터는 친정아버지와 함께 농사일을 거들며 고향에 정착하기로 결심하였다. 선진 영농 기술에도 관심이 많아 현재 수확하는 밤나무는 당시 신품종으로 조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쌍둥이 언니 김희숙(1958년생)과는 둘도 없는 사이이다. 너무 둘이만 딱 붙어 다니면서 어린 시절을 보내서 두 살 어린 여동생의 시샘을 받기도 했다. 언니는 외모에서 부터 성격, 말투, 제스처까지 어머니와 닮 았다. 지금은 강경에서 큰 젓갈 가게를 운영하고 있고, 언니의 소개로 시집 온 여동생 김정자(1960년생)도 길 건너 젓갈 가게를 내고 가깝게 지내고 있다. 쌍둥이 언니와는 지금도 각별한 사이이다. 시시콜콜한 주변 얘 기에서부터 홀로 되신 친정어머니 걱정까지 모든 일들을 숨김없이 털어 놓는 사이이다. 사이좋은 보통의 자매가 그렇듯 먹을거리도 함께 나눈다. 어머니가 수확한 농산물을 보내면 언니는 답례로 강경의 해산물을 보 내준다. 어머니는 새우젓이나 멸치액젓과 같은 기본적인 식재료들은 집에 여유분을 보관해 놓고 있다가 마 을 사람들에게 대신 팔아 주기도 하고 언니는 선옥이네 농산물을 팔아주기도 한다. 이런 동기간 우애는 어려 울 때마다 기댈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거전리의 쌍둥이 자매는 일 년 사이로 각자의 배필을 만나 정든 고향을 떠났다. 한명은 강경으로, 또 한명은 은산으로 자신의 길을 찾아 부모 곁을 떠났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부부의 연으로 맺어준 사람은 어머니의 고종사촌 오빠였다. 마침 고종사촌 오빠 는 선옥이네 아래채에서 세를 들어 살고 있었다. 래채에 살던 고종사촌 오빠가 주인집의 둘째 아들을 눈여겨 보았던 것이다. 말수가 없어 남자다우면 서도 점잖고 반듯한 행동거지며 근면한 성품까지 나무랄 데 없는 총각이었다. 고종사촌 오빠는 은산과 거전을 오가며 중신을 섰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첫 만남은 마을에 있던 명성다방에서 이루어졌다. 부여 시내의 궁남지와 수북정 등을 함께 돌아보는 것으로 데이트를 시작했다. 몇 번의 만남이 이루어지면서 서로에게 호감을 갖기 시작 하던 무렵 연락도 없이 아버지가 잘 차려입은 모습으로 선물꾸러미를 들고 거전리의 친정을 방문했다. 아버지가 왔다는 소식에 어머니는 엉겁결에 마을 뒷산으로 도망치고 말았다. 호감을 갖고는 있었지만 마음의 결정을 내리기 전이어서 많이 당황스러웠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결혼 조건은 한가지였다. 시부모를 모시고 살 수 있겠냐는 것. 어머니는 자식으로서 부모를 모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주저 없이 대답했다. 이 대답은 어머니가 28년 동안 시부모님을 모시며 살게 되는 인생의 첫 장면이 되었다. 1982년 무더운 여름, 반팔 남방셔츠를 입고 처음으로 만나 그 해 겨울을 함께 나기로 결정되었다. 일정이 급박해 약혼식을 생략하자는 어머니의 주장은 친정아버지의 반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급해도 할 건 다 해야 한다.’는 당신의 생각을 꺾을 수는 없었다. 공부하고 싶다던 딸을 진학시키지 못한 미안함 때문인지 혼수도 남부럽지 않을 정도로 모자람이 없었다. 약혼식은 9월19일 부여 시내의 한 식당에서, 결혼식은 11월28일 부여 현대예식장(현재 부은식당 위치)에서 두 달 여 간격으로 이루어 졌다. 신혼여행은 2박 3일로 용인 한국민속촌, 자연농원(현 에버랜드), 아산 현충사, 온양 온천을 버스로 둘러 봤다. 시부모님 여행선물로 털신과 벽시계를 사다 드렸다.
결혼 후 신혼 때부터 아버지와 어머니는 주말 부부생활을 했다. 말이 주말 부부지 실제로는 한 달에 1~2번꼴로 은산에 내려올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아버지는 주로 서울의 건설 현장을 누볐고, 어머니는 은산에서 시부모를 봉양하며 할아버지의 농사일를 거들었다. 아버지는 이따금 어머니에게 서울에서 사온 옷가지를 선물로 주며 떨어져 지내는 아쉬움과 시부모를 모시며 겪었을 고생을 말없이 위로했다. 큰 딸 선옥이가 결혼한 다음해에 태어났다. 큰 딸은 태어나면서부터 병약했다. 자주 아팠고 먹는 것 도 시원치 않아서 가족들의 걱정을 들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둘째를 가졌을 때 다른 것은 몰라도 꼭 건강한 아이를 낳기를 원했다. 다행히 둘째 지숙이는 건강하게 병치레를 하지도 않고 아무거나 잘 먹는 아이로 자랐다. 두 손녀의 재롱이 한창 늘어가던 즈음, 할아버지는 갑자기 중풍이 와 거동이 불편하게 되었다. 그 동안의 농사는 할아버지와 어머니의 몫이었는데, 농사를 짓기는커녕 불편한 할아버지와 연로한 할머니를 모시기에도 어머니 혼자로서는 벅찬 일이었다. 어머니는 양단간의 결정이 필요한 시기였고 선옥이네가 맞은 큰 변환기였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불편한 할아버지를 고향에 버려두고 가족끼리 상경할 성품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았다. 아버지는 서울에서의 꿈을 접고 은산으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아버지에게 은산은 너무나 낯선 곳이었다. 그때까지 아버지는 낫보다는 드라이버가 편한 삶을 살아왔다. 은산에서 태어났지만 농사일은 해 본 적이 없었다. 어머니보다도 낫질이 서툴렀다. 농사일은 아버지 적성에 맞지 않았다. 생각다 못해 아버지는 적성과 경험을 되살려 농기계 정비 일 을 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지만 이마저도 반대하는 할아버지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좌절했던 아버지는 처음 사서 애지중지하던 경운기를 자기 손으로 부쉈다. 설득할 수 없는 할아버지에 대한 처음이자 마지막 무언의 항의였다. 이때부터 아버지는 자신의 꿈을 접고 할아버지의 뜻대로 ‘농사꾼’이 되어갔다. 선옥이네의 첫 번째 전환점이 아버지의 귀농이었다면 두 번째 전환점은 아버지의 건강 문제였다. 2000년대 초 몸이 안 좋아 일찍 귀가하여 누워있던 아버지는 기침과 함께 피가 섞여 나오는 것을 발견 하였다. 구급차에 실려 대전에 있는 건양대학 병원으로 가던 도중 의식을 잃었고 진단결과는 위출혈이었다. 의사한테 힘들 것 같다는 얘기까지 들었다. 아버지의 상태가 위급해 서울로 이송하기도 어렵다는 상황에서 어머니는 서울행을 주장했다. 희망도 없이 대전에 그대로 있기 보다는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서울로 올라가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했다. 어머니의 판단대로 서울로 간 것은 최선의 선택이 되었다.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다시 의식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파열된 혈관에 삽입된 플라스틱 튜브가 언제라도 문제를 일으킬 수 있었기에 힘든 농사일을 계속할 수는 없었다. 큰 수술비로 인해 대출받은 빚도 문제였지만 잠시 휴식할 수 있을 정도로 가계 형편이 넉넉한 것도 아니었다. 어머니의 2년 여 직장생활은 이때 시작되었다. 규암에 있는 정관장 공장에 임시직으로 취직하였는데, 적은 월급이었지만 가계에 적지 않은 보탬이 되었다. 어머니의 근면성과 빠른 적응력은 회사에서도 인정되어 1년 뒤에는 야간 수당이 좋은 부서로 옮길 수 있었다. 아침 일찍 밥을 짓고 버스로 출근하면 할머니와 아버지가 집에서 끼니를 해결했다. 밤늦게까지 야근하는 날이면 버스가 끊기기 때문에 아버지가 차를 끌고 공장으로 나왔다. 고단한 삶이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어머니도 건강상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평소 저혈압인 어머니는 1990년대 초에 잠깐 한쪽 다리가 마비가 되는 일도 있었다. 그 후로는 가을 같은 환절기에 입 주위가 마비되는 신경 계통의 이상 증후가 나타난다. 어머니는 결혼 이후 지금까지 28년 동안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아왔다. 시집 와서 시아버지와 농사를 지으며 집안일을 도맡아 했고, 중풍으로 누워 계실 때는 병수발을 하고, 홀시어머니를 15년간 모시고 살았다. 이 기간 동안 하루 세끼 갓 지은 밥을 올리느라 마음 편히 외출하기도 어려웠다. 여행을 가더라도 당일치기였고, 부부싸움을 하더라도 이불을 뒤집어쓰고 했다. 그러나 오랜 기간 함께 웃고 울면서 살아온 정 때문인지 몇 달 전 돌아가신 시어머니 묘소 앞에만 서면 어머니는 나오는 눈물을 멈추지 못한다. 현재 선옥이네는 두 부부만의 오붓한 생활을 하고 있다. 한 달에 한두 번 찾아오는 딸들을 제외 하면 특별한 방문객도 없다. 딸들의 학비를 벌기 위해 분주하게 이리 뛰고 저리 뛰어야 하는 경제적 압박도 사라졌다. 어머니는 처음 해볼 1박의 산행으로 설레어 있고 아버지는 취미생활로 낚시를 고려중이다.
큰 딸 황선옥은 1983년 은산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작고 마른 체구에 몸도 약하고 잘 먹지 못해서 가족들의 걱정을 한 몸에 받았다. 은산 초등학교 병설 유치원을 1년간 다니고 은산국민학교와 은산중학교를 거쳐 부여여자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입학해서는 줄곧 선생님과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모범생이었다. 성적은 학교에서 꼽을 정도의 상위권이었고, 공부하라는 얘기를 한 번도 듣지 않을 정도로 모든 일을 스스로 알아서 하는 딸이었다. 작은 딸 황지숙도 언니와 같이 줄곧 모범생이라는 칭찬을 듣고 자랐다. 언니와는 3년 터울로 1986년에 어머니의 소원대로 작은 딸은 병약하지 않고 아무거나 잘 먹는 건강한 아이로 태어났다. 언니와 같은 학교를 다녔지만 3년 터울이기 때문에 같은 학교를 다닌 기간은 3년에 불과 하다. 두 딸 모두 조용하면서 내성적인 성격인데, 작은 딸이 좀 더 활달한 경향이 있다. 두 딸 모두 부여 시내에 있는 부여여자 고등학교에 진학했는데, 도시와는 달리 고등학교 시절부터 기숙사 생활을 일찍부터 생활했다. 기숙사는 소수의 한정된 인원에게만 제공되었는데, 입학 성적이 관건이었다. 모두 공부를 잘해서 장학금을 받고 기숙사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한 달에 한 번 외출이 허락될 정도로 기숙사 생활은 스파르타식이지만, 도시에서 흔하게 받는 과외나 학원 에 다닐 필요가 없었다. 부모의 입장에서 기숙사 생활은 학비 외에 기숙사비가 더 들어가지만 사교육비라는 부담을 덜게 해 주었다. 두 딸들의 경제적 자립심은 이때부터 형성되었다. 학용품과 군것질에서부터 입는 것까지 정해진 용돈 한도 내에서 계획적으로 지출해야 했다. 이런 습관은 지금까지 이어져 용돈 이상의 돈을 타서 쓴 적이 한 번도 없었고 필요한 돈은 아르바이트로 해결하고 있다. 감수성이 예민할 고등학교 시절에 부모님의 극진한 뒷바라지나 감시 없이 스스로 모든 일을 해야 하는 습관은 자발적이면서 독립적인 성격을 형성하게 만들었고, 이는 도시와는 분명하게 구별되는 차이점이다. 그러나 집에서 통학 하는 학생들처럼 가족들과 가질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은 것은 기숙사 생활을 하는 지방 학생들만이 갖은 서글픈 현실일 것이다. 대학과 전공의 선택은 집안 사정과 자신의 적성을 고려하여 선택하였다. 넉넉하지 못한 집 안 사정상 사립대로의 진학은 불가능하였다. 큰 딸은 선생님이 되기로 결심했고, 국립대인 공주교육대학교로 진학했다. 처음에는 학생을 가르치는 일이 적성에 맞을지 걱정도 했지만 어릴 때부터 다니던 교회의 성경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자신감이 생겼다. 이런 인연으로 큰 딸은 선옥이네에서 유일한 교인이 되었고 집에 오는 일요일에는 집 앞 은산성결교회에서 예배를 드린다. 4학년 재학 중에 교사 임용고시에 합격하고 지금은 해미초등학교 6학년 담임선생님을 맡고 있는데, 교장선생님 이하 동료 교사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얻고 있다. 현재 직장과 동시에 모교인 공주교대에서 대학원 석사과정을 밟고 있다. 작은 딸 역시 국립대인 충남대학교 무역학과에 진학했다.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서 한 때 미대를 생각하기도 했지만 고등학교를 진학하면서 인문계열의 대학을 희망하게 되었다. 작년에는 일본 훗카이도에 있는 자매결연 대학의 교환학생으로 선발되는 기쁨을 맛보았다. 현재는 1년간의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마치고 4학년 복학을 앞두고 취업 준비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두 딸에 대한 아버지, 어머니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어려서는 총명하고 예쁘면서 부모님 말씀 잘 듣는 아이들이었고, 커서는 잔소리 한 번 안할 만큼 바르고 성실한 학생이었다. 지금은 바쁜 생활 중에도 틈틈이 농사와 집안일을 돕는 착한 효녀들이다. 모범적이고 화목한 가정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행복은 ‘속 썩이지 않고 반듯하게 잘 자라준’ 자식들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