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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시 전동면 반곡리 민속지

주제 반곡리 이주민의 삶과 문화
조사 반곡리 이주민의 삶과 문화, 사진, 영상, 테마, PDF

김호걸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10년 만에 다시 찾은 반곡리



2005년의 흔적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 2015년의 반곡리
村破山河在 마을은 없어졌어도 괴화산과 금강은 그대로인데, 田春人畜無 농토에 봄은 왔지만 사람과 가축은 그 모습 보이지 않네.

중국의 시성인 두보杜甫의「춘망春望」이란 시의 앞 두 구절의 글자를 감히 조금 바꾸어 10년 만에 다시 찾은 반곡리를 묘사해 보았다. 반곡리는 행정중심복합도시인 세종특별자치시 건설로 인해 많은 변화를 겪어야 했던 당시 충남 연기, 공주 지역의 33개 마을법정리 중의 하나다. 사라질 운명에 처한 마을의 사람들과 민속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국립민속박물관에서 2005년부터 2006년까지 민속조사를 하였고, 《반곡리 민속조사보고서》4권를 발간하였다. 당시 필자는 민속지의 ‘주생활’ 부분, 생활재보고서, 민가 보고서에 참여했었다. 그리고 2015년, ‘2016 세종민속문화의 해’ 사업의 하나로 반곡리 주민의 이주과정에서 현재까지의 상황조사를 위해 그곳을 다시 찾았다. 꼭 10년 만에 다시 찾은 셈이다. 조사팀은 2015년 2월부터 10월 7일까지 8개월 여 기간에 걸쳐 세종시 첫마을에 상주하며 반곡리 이주민을 찾아가는 추적조사를 실시했다. 2016년에는 반곡리뿐만 아니라 기타 마을 이주민 조사 등 여러 차례 추가 조사를 실시했고 그 해 2권의 보고서를 발간할 수 있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던가. 2015년의 반곡리에는 괴화산에 있는 산신당을 제외하고 남아있는 건물이 하나도 없었다. 100여 채가 넘던 가옥들, 마을회관, 농협창고, 재실, 정자, 교회 등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단지 조금 다듬어놓은 땅과 현장에 있는 건설회사 현장사무소 건물만 있을 뿐이었다. 10년 전 조사 때 집집마다, 골목마다, 뜸마다 다 돌아다녀보았었지만, 아무 것도 없는 지금의 모습에서 그 때의 모습을 기억해 내기는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었다. 10년 만의 재조사라고는 하지만, 내용이 다 지워진 테이프를 다시 재생할 때 경험하는 당황 그 자체였다. 인류학이나 민속학에서 약간의 시차를 두고 한 지역을 연구하는 사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흔한 것도 아니다. 이러한 영광스런 일을 맡아 다시 찾은 반곡리 조사를 진행하면서 들었던 생각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서로를 떠오르게 하는 것은 10년 전의 ‘전수노트’뿐

이번 조사는 개인의 신분이 아니라 기관 차원에서 진행하는 학술조사였다. 필자는 2005년 조사 이후 업무적으로 다시 반곡리를 찾을 기회가 없었다. 보고서가 발간된 이후, 조사연구 부서에서 다른 부서로 계속 옮겨 다녔고, 업무의 경계가 명확한 상황에서 반곡리에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관심을 가지려면 그것은 순전히 개인의 노력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이제야 자신의 게으름을 탓해 보기도 한다.


그나마 10년 전 조사 때 자주 뵈었던 주민들은 10년 후 갑자기 나타난 조사자를 기억해 주었지만, 그렇지 못했던 분들에게는 여전히 생소한 사람이었고, 필자 또한 그분들의 얼굴을 기억해낼 수 없었다. 남은 것은 당시 집집마다 찾아 다니면서 전수조사를 했던 노트인데, 그걸 보여드리고 설명을 드려야 완전히 낯선 사람임을 모면할 수 있었다. 이번 재조사에서 이 노트는 그야말로 프리패스 할 수 있는 통행권이었기에 항상 가지고 다녀야만 했다. 다음 난관은 “그럼 왜 다시 왔느냐?”는 질문이다. 이럴 때는 으레 “아무런 연락도 없다가 갑자기 무슨 꿍꿍이가 있어 왔느냐?”고 힐난하는 것 같은 자책이 든다.


국립민속박물관의 지역민속조사가 10년이 넘었다. 각 도마다 2~3개의 조사지가 있었는데, 10년 후 과연 이 지역들을 다시 조사할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바라는 것이 있다면 기관 차원에서 조사자와 주민이 지속적으로 연계될 수 있는 어떤 가능한 방법을 함께 모색하여야 하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이번에 현장에서 철수하며 서울로 돌아올 때 한 주민께서 하신 말씀이 귓전에 강하게 맴돈다. “다음에 혹시라도 여기 오게 되면 꼭 연락 해줘야 돼요.”


개발, 신도시, 실향, 이주 모든 것의 중심에 ‘이주민의 행복’ 있어야

다음, 개발과 이주에 관한 것이다. 1978년 작가 문순태가 소설 〈징소리〉에서 고발했듯이, 대한민국 개발의 역사는 실향과 이주 및 마을공동체 해체의 역사와도 맞물려 있다. 그동안 〈징소리〉의 무대인 장성댐을 비롯해 임하댐, 안동댐, 소양강댐, 영주댐, 대곡댐, 충주댐, 주암댐 등과 같은 수몰 지역, 성장과 내 집 마련이란 명목으로 수없이 개발된 신도시, 이에 따른 마을공동체의 해체, 원주민의 실향과 이주 후의 사회적 문제는 끊임없이 반복되어 왔다. 이주민에 대한 제도적 보완은 지속적으로 괄목할만하게 이루어졌지만, 놀랍게도 그때의 상황과 2015년 현재 세종시 개발로 이주한 상황은 ‘이주민의 행복’이란 측면에서 그리 큰 차이가 없는 것 같다. 그것은 왜 그럴까? 행복은 ‘만족’에서 온다고 한다면, 만족할만한 것이 그리 없기 때문일 것이다.


문순태의 〈징소리〉 중 「작가의 말」을 옮겨보며, 개발이란 이름으로 ‘고향’을 없애버리는 일이 줄어들었으면 하고 소망해본다.
“나는 지금 다시 고향을 생각한다. 고향은 우리가 태어나고 자라는 공간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처음 이 소설을 쓰면서 고향을 인간존재양식으로 파악하고자 했다. 고향을 잃어버렸다고 한 것은 인간의 진정성을 상실한 것과 마찬가지다. 이 시대에 고향을 다시 생각하고 그리워한다는 것은 퇴영적 사고이고 낭비적 과거집착이라고 비난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인간관계가 단절되고 파편화된 익명사회에서 고향은 삶의 진정성을 회복하기 위한 마지막 희망이 아닌가 싶다.”


원문 : http://webzine.nfm.go.kr/?p=5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