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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 경정1리 뱃불마을 민속지

주제 뱃불, 푸른 동해에서 피어나다
조사 경정의 자연과 인문, 사진, 테마, PDF

자연 지리적 경관

경정을 품고 가는 영덕군의 산과 들, 강과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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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정1리 뱃불마을은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에 위치한 어촌마을이다. 한반도의 동남부, 동해안에 연하여 있다. 동서간으로 최장거리 27.4km에 이르는데, 동쪽으로는 병곡면, 영해면, 축산면, 강구면과 남정면이 부분적으로 동해와 접하며, 서쪽으로는 창수면, 영해면, 지품면과 달산면이 영양군, 청송군과 인접하고 있다. 남북간으로 최장거리 45.15km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남정면이 포항시, 북쪽으로는 창수면과 병곡면이 울진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영덕군 기후는 냉온대에 속하며, 동해를 끼고 있어 지독한 추위는 없는 편이다. 특히 동해를 관류하는 해류의 영향으로 연중 한서의 차가 작다. 봄철에는 동북풍, 가을철에는 남동풍이 주기적으로 불고 있어 봄이 짧고 가을이 비교적 길게 나타난다. 따라서 영덕의 여름은 비교적 빠르게 오는 계절적 특성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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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정과 더불어 사는 영덕군 축산면의 산과 들, 하천과 바다

경정1리(뱃불마을) 사람들은 지금은 해안으로 나있는 강축도로를 이용하여 염장들로 가지만, 강축도로가 생기기 이전(1990년대 초반)에는 월부산의 고개를 넘어서 염장들로 들어갔다. 경정이라는 마을의 역사가 조선조를 거치고 오늘날까지 줄곧 지속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마을 북쪽 배후지로 염장들이라는 농업적 생태 기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축산항의 수산물은 축산수협 유통판매과의 관할 아래 공개적으로 행해지는 입찰을 통해 어민 생산자에게서 중매인들에게 유통되는 과정을 거친다. 현재 축산항을 중심으로 놓고 볼 때, 어업생산자의 수산물 입찰권역은 영덕군 영해면(대진리, 사진리)과 축산면(축산1리, 축산3리, 경정1리, 경정2리, 경정3리), 그리고 영덕읍 일부 지역(석동, 노물, 오보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권역의 어업생산자들은 대개 연안어업인들이며 정치망이나 복합양식어업 등과 같은 면허 어업과 ‘통발’이나 나잠어업 등과 같은 신고어업에 종사하고 있다. 그러나 축산항을 이용하는 어선의 어류 어획권은 계절적으로 차이를 보인다. 이유는 양식어업이 발달하지 못한 동해안의 특성을 반영하는 동시에 어류의 회유성도 관련이 깊은데, 특히 오징어잡이 철에 뚜렷이 나타난다. 한편, 동해안 연안의 자연 생태학적 특징으로 육지와 바다가 만나는 해안에 바위 암초가 발달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로 인해 동해안은 큰 어항이 발달하기 어려워 작은 포나 진으로 어촌이 형성되어 나갈 수밖에 없었다. 또한 동해안이 한류성, 난류성 어족이 풍부함에도 불구하고 어로기술이 발달하지 못하던 시기에는 “어장으로서의 이용가치가 적었다.”는 기록( 『세종실록지리지』 참조)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조선 시대의 영해부 남면 어민들뿐만 아니라, 현재의 축산면 어민들은 오래전부터 이러한 생태조건을 생업에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대표적인 생업 방식 중의 하나가 바위를 이용한 ‘자연산 돌미역’ 채취라고 할 수 있다. 이 지역에서 ‘짬’이라 일컬어지는 해안 암초에서 자연 채취 가능한 해조류로는 ‘미역’, ‘천초(우뭇가사리)’, ‘청각’, ‘김’ 등이 있다. 그리고 해변에서 대략 수심 10m 안쪽에서는 잠녀나 잠수부(일명 ‘머구리’)들이 들어가 해수면 아래의 암초와 바다 밑 작업을 통해 해산물을 얻고 있다.



영덕 대소산봉수대에서 바라 본 축산항과 죽도산 모습(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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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정의 자연, 공간과 장소

경정1리를 감싸고 있는 산으로는 남쪽의 북행산, 서쪽의 무술산 그리고 북쪽의 월부산이 있다. 동쪽은 동해와 직접 닿아있으며 해안으로는 아름다운 ‘흰백사장(뱃불)’이 펼쳐져 있다. 그러나 현재는 ‘경정항’이 마을 해안에 들어선 이후 모래밭은 약 700여 m로 축소되었고, 그곳은 ‘장갓불’로 불리는 곳이며 ‘경정해수욕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렇게 산과 바다로 둘러싸여 자리 잡은 경정1리 뱃불마을의 공간적 특징은 0.72㎢의 크기에 170여 남짓한 가구가 밀집해 있다는 것이다. 마을의 취락은 경정2리(차유)와 경정3리(오매)의 취락 모습과 달리 해안에 돌출된 형태가 아니고, 안쪽으로 둥글게 해안선을 그리면서 반달모양을 띠고 있고 그 뒷편에 평지가 위치하고 있다. 이러한 자연 지리적 입지조건은 일반적으로 동해안에 나타나는 어촌의 모습과 다른 장소적 특징을 보여준다. 마을의 집들이 차지하는 공간의 북쪽과 남쪽으로는 지금은 복개가 되어 있지만 실개천이 흐르면서 경정항으로 빠져들고 있다. 북쪽과 남쪽에서 각각 흐르는 두 갈래의 개천은 마을의 북서쪽 방향 즉, 현 축산항초등학교 경정분교 뒤를 가리키는 곰등골과 윗당과 경정교회 그리고 오징어공장이 있는 마을 남서쪽의 ‘큰골’에서 흘러나온다. 곰등골과 큰골은 안쪽으로 들어가면서 또다시 각각 여러 골짜기로 갈라진다. 이러한 곳은 취락과 토지 이용으로 볼 때 경정리 마을 사람들의 역사와 같이 하던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이 두 골짜기가 논과 밭으로 이용되면서 많은 농작물을 수확하던 곳이었다.”는 마을 사람들의 생생한 기억속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아울러 마을 사람들은 “경정1리에 있던 논은 비록 ‘봉답(천수답)’이었지만, 과거에는 안골논 한 마지기는 염장논 두 마지기와도 안바꾼다고 할 정도였다.”고 자부심을 드러내는데, 이는 토질 못지않게 이곳 사람들에게 이 공간이 단순한 논·밭 이상의 소중한 가치를 지녔음을 알게 해 준다. 논으로 경작되는 것은 경정초등학교 뒤 곰등골 입구에서 750평 정도가 유일하다. 그 외 경정1리 내의 토지 대부분은 경작되지 않고 있고 일부에서 고추, 파, 배추, 깨, 상추 등을 재배하여 자가에서 소비할 목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대신 오징어공장 부지 혹은 교회부지 등 과거와는 다른 용도로 이용되는 모습도 발견되고 있다. 현재의 경정1리 어촌마을에서 동쪽 해안 지형 및 그 바다의 이용을 설명하기 위해 우선 경정1리의 동쪽의 육지와 바다의 경계를 살펴야 한다. 앞서 언급한 바, 경정 1리는 북쪽의 차유마을(경정2리)·남쪽의 오매마을(경정3리)과 마을의 경계를 이룬다. 육지의 경계가 산이라면 바다의 경계를 이루는 것은 ‘짬’이라는 해안의 바위이다. 짬은 전통적으로 뱃불마을(경정1리) 생업에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이러한 짬은 인위적으로 구역이 나누어져 이용되어 왔다. 경정1리 어촌계는 현재 동쪽 해안을 따라 8구역의 짬을 관리하고 있다. 이러한 짬들이 펼쳐져 있는 북쪽을 마을 사람들은 ‘다물’ 혹은 ‘단물’이라고 하며, 경정항 남쪽을 ‘장갓불’이라고 통칭하여 부른다. 경정항은 바로 이 짬들 사이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다. 경정항이 들어서면서 짬이 줄어들었다고 볼 수도 있지만 방파제를 따라 데트라포트(TTP, 일명 삼벌이)를 설치하면서 ‘육수암’이라는 큰 짬이 인공적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자연 생태적으로 입지조건이 좋은 경정항은 경정1리 마을 어민들을 비롯하여 가까운 차유마을, 오매마을, 석동마을 어민들이 주로 이용하고 있다.



경정리 원경(경정해수욕장에서)


역사·인문환경

마을의 형성과 변천

경정에는 언제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고 어떤 사람들이 살았을까. 이에 대해 소상히 알려주는 문헌사료는 찾아보기 어렵지만, 옛 지리지들을 통해 대략적인 이 지역 사정을 살필 수 있다. ‘경정’이라는 지명이 최초로 등장하는 문헌사료는 조선조 예종 1년(1469)에 편찬된 『경상도속찬지리지』로 긴관조에 현재의 영덕군 축산면 경정리 포구를 뜻하는 ‘경정포’라는 명칭이 등장한다. 이러한 지명의 등장과 관련하여 눈여겨 볼만한 대목으로는 경정리 마을의 유래와 관련하여 기록하고 있는 『영덕군향토사』 축산면편에 실린 글이다. 조선조 세종 31년(1449)에 영해 박씨 선비가 월부현에 올라 지형을 살펴보고 이곳에 마을을 형성하면 참으로 좋다고 김해 김씨 선비와 이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한다. 마을 앞에 약 2Km 정도 백모래가 청명한 날에는 금빛을 이루니 마을명을 백불이라 칭하였으며 마을 경관이 참으로 아름다워 ‘경정’이라 개칭하다가 서기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으로 ‘경정동’이라 하였다. 조선조에 들어서면서 영해는 태조 6년(1397)에 진으로서 병마절제사겸 부사를 두어 다스려지며15, 태종 14년(1414)에는 영해도호부가 된다. 조선 시대 영해부에서 동쪽으로 14리 떨어져 있던 축산포는 병선 12척, 군사 429명을 거느린 수군 만호가 수어하고 있던 경상좌도의 군사적 요충지 가운데 한 곳이기도 했다. 이와 관련하여 경정포가 『경상도속찬지리지』 긴관조에 기록되는 것도 당시 동해안에 출몰이 잦던 왜구 등을 방어하는 국방상 중요한 곳이었음을 보여준다. 경정에 구체적으로 누가 살면서 마을을 일궈나갔는지에 대한 이해는 조선 후기 마을의 주요 입향조를 통해 그 윤곽을 가늠해 볼 수 있다. 경정은 조선 후기 영조 33년(1757)~영조 41년(1765)간에 각 읍의 읍지를 모아 편찬한 『여지도서』의 경상도 영해 방리조에 “경정은 부의 남쪽 30리에 있다.”고 되어 있다. 또 18세기 후반 전국의 호수와 인구수를 기록한 책인 『호구총수』 경상도 영해를 보면, 당시 경정은 영해도호부의 남면에 속해 있음을 알게 된다. 영해부는 고종 32년(서기 1895년) 영해군으로 바뀌게 된다. 이는 1894년 갑오개혁 때 지방제도에 대한 개혁방침이 결정되었고, 1895년 5월 대대적인 지방행정구역의 개혁이 단행된 결과다. 영해군은 이 당시 조선정부가 새로이 편제한 23부제 아래 총 337개의 군 가운데 하나가 된 것이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이때까지도 영해군 아래에 놓여 있던 남면이나 그 아래의 관할 촌락의 크기나 명칭이 변화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러한 흐름은 일제강점기 들어 시행된 1914년 지방행정구역 개편의 영향을 크게 받게 된다. 당시 ‘영해군’은 ‘영덕군’에 통합되었고, ‘남면’은 ‘축산면’으로 그 명칭이 바뀌게 된다. 이 뿐만 아니라 남면의 촌락간 경계도 부분적으로 조정되는 수순을 밟게 되면서 지역단위에서의 변화가 크게 나타났다. 즉 마을 지명은 조선 후기 이후 시기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



담물 앞 짬에서 우뭇가사리 채취중인 마을주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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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역의 변화

1914년 일제강점기 들어 시행된 지방행정구역개편의 결과 ‘영덕군 축산면’은 도곡동, 기암동, 부곡동, 고곡동, 대독동, 상원동, 경정동(경정, 차유, 지경), 조항동, 축산동, 화천동, 칠성동 등 11개 동으로 개편된다. 1917년 동리명칭일람에서는 기존의 읍지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변화 즉, 경정동의 행정구역이 분명해진다는 점이 특징이다. 다시 말하면 오늘날 경정리 아래 편제되어 있는 경정1리(경정동), 경정2리(차유동 일부), 경정3리(오매동)는 이 당시의 행정체계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왜 남면은 축산면이 되었으며, 축산의 이러한 부각은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여기에는 군사적 생업적 기반에 대한 중요성이 감안되고 있다고 생각된다. 영해부의 남면이었던 시절부터 축산의 존재는 현재에도 대나무로 울창한 ‘죽도’ 혹은 ‘죽산’으로 불리고 있는 축산항에 접해있는 산과 인근에 위치한 대소산 봉수대를 통해 국방상에서 중요한 곳으로 파악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조선 시대 뿐만 아니라 당시 영덕군에서 볼 때, 축산면의 축산리가 점하고 있는 공간은 이 근방에서 어업과 농업 양 측면에서 가장 무게감이 있던 곳 가운데 한 곳이었다. 따라서 영해군이 영덕군으로 합병되면서(1914년) 더 이상 남면은 논리적으로도 영덕군의 남쪽이 될 수 없었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면의 명칭에 대한 새로운 지정이 필요하게 되면서 ‘축산면’으로 불렸을 것으로 생각된다. 1908년 일본은 ‘한국어업법’을 발포하여, 조선에 있어서의 어업제도의 획기적인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 결과 종래 한국 궁내부의 직할어장 또는 부호 양반 등의 독점물이었던 중요 어장은 널리 한일 양국인에 개방되었다. 그런데 이방인에 대한 어업권의 허가는 한국 거주자에 한하도록 되었기 때문에 일본 어민들은 통어에서 이주 어촌경영으로 전환 진출하게 된다. 이렇게 일본정부가 공식적으로 해외출어를 조장한 최초의 정책에 힘입어 일본 어민들은 조선내의 어업상의 유리한 조건을 획득하게 된다. 한국 각지에 일본인의 이주와 거주가 촉발되는 시점에서 이러한 정책적 독려는 경상북도 동해안에 위치한 축산의 중요성도 함께 짐작해 볼 수 있게 해준다. 영덕군 축산면 사무소는 1914년 부곡동에 있었으나, 1941년 4월 부곡동에서 도곡동 43의 3번지로 옮기게 된다. 1963년 8월 23일에는 군조례 제43호에 의하여 축산면 출장소가 축산항에 설치된다. 1988년 5월 1일에는 군조례 제972호에 의하여 ‘동’을 ‘리’로 개칭하게 되는데, 이를 반영하여 현재(2007. 12. 31) 축산면은 축산1, 2, 3리, 경정1, 2, 3리, 고곡1, 2리, 상원리, 부곡리, 칠성1, 2리, 조항리, 대곡리, 기암1, 2리 등으로 18개 리와 10개 법정 리, 그리고 33개의 자연부락과 93개의 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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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화적 경험의 공유

뱃불마을에는 현재 두 곳의 마을 제당이 있다. 이 두 곳의 제당과 마을의 제청인 경흥당은 마을 사람들에게 각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제당의 역사에는 농업과 어업 그리고 ‘반농반어’를 해오던 뱃불마을의 생활방식에 대한 정보가 들어 있고, 또 제당은 ‘양반’과 ‘상놈’ 등에 대한 오래된 관념이 녹아있던 시절의 아이콘이 되기도 한다. 뱃불의 아랫당이 어민들의 제당으로 분리되어 나갔고, 그것은 ‘그다지 오래된 사건이 아니라는 점’에서 뱃불 사람들에게 농사가 주였고, 어업은 마을 사람들에게 선호되지 않았거나 바람직하게 간주되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한편, 뱃불 사람들 중에는 한국전쟁 참전 국가유공자들이 몇 명 있다. 이들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해방을 맞고 한국전쟁에 출전하여 다친 사람들이다. 그들의 친구나 선배들 중에는 물론 전쟁터에 나가 사망한 사람도 있다고 한다. 비록 뱃불이 당시 동해안의 한적한 어촌마을이라고는 하지만 해방 후 어지러웠던 정국의 상황이 비켜지나가지 않았다. 해방 후 공간과 한국전쟁에 대한 기억은 ‘무섭고’, ‘두려운’ 시간들이었지만, 이와 관련된 이야기는 ‘한가할 때’ 나올 법한 ‘지나간’ 과거인 것이다. 그렇다면 전쟁 이야기를 포함하여 마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는 언제, 어디에서 이루어질까? 당연한 이야기 같지만, 전쟁과 같은 경험에 대한 이야기는 주로 남성 주민들이 모이는 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마을의 남성 주민들이 모이는 장소는 마을에 있는 경정수퍼 앞, 경로당, 윗당 근처의 평상, 경정해수욕장에 마련된 정자각, 그리고 마을 앞 경정항 근처의 일터 공간 등으로 나눌 수 있다. 그들이 이렇게 모일 수 있는 것은 어쩌면 그들의 일거리가 점점 줄어들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흥미로운 것은 한담을 위해 활용되는 공간에 모이는 주민들의 그룹은 각기 조금씩 그 성향과 나이 등에서 차이를 보인다는 점이다. 또한 계절에 따라 선호되는 장소가 다른데, 여름철이 가장 분산된 모습을 보이고 상대적으로 추운 겨울에는 경로당이 주로 이용된다. 때문에 이야기 소재 또한 장소에 따라서 차별성을 띠는 경우가 있다. 물론 대부분 현실에 밀착한 이야기들이며, 특히 어촌과 어업에 관련한 이야기들이 회자된다. 그리고 각각의 장소에는 이야기들을 이끌어 가는 주민들이 한둘은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그런 사람들이 없는 경우에는 오수를 즐기거나 조용히 풍경을 즐기다가 헤어져 집으로 들어간다. 모여서 이야기를 하는 시각과 시간의 양은 계절과 장소와 모인 사람들에 따라 다르지만, 아침식사 전 경정수퍼 앞에 모이는 것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연일 볼 수 있는 아침 풍경이다. 1시간 30여 분 동안 이들이 나누는 이야기는 새벽 조업을 마치고 들어오는 배들이 잡은 고기와 고기 수확량, 어장과 어업에 관련한 다양한 정보, 그리고 과거의 어장일을 할 때 자신들의 경험에 관한 것이다. 물론 이곳은 마을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논의들을 위한 토론장이 되기도 한다.



윗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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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적인 시간들

아침식사는 늦봄과 여름이 주로 7시 30분에 이루어지며, 초봄과 가을·겨울은 8시에 시작된다. 아침식사 시간이 되면 일시에 이 공간을 떠나 각자의 집으로 향한다. 이 공간은 다시 아침나절 혹은 점심을 마치고 오후시간대에 또 채워지고 흩어지는데, 오후 늦은 시간까지 있지는 않고 저녁식사 시간 이전에는 헤어진다. 일을 할 수 있는 기력이 있는 주민들에게 봄철 미역건조(3월-5월)와 가을철 오징어건조(9월-12월) 활동은 없어서는 안 될 노동이다. 여기에 대게 판매가 1월-4월경에 이루어진다. 이 계절에 따른 어민들의 생계활동에는 주민들 대다수가 참여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 까닭에 현재(2008년) 경정1리 사람들에게 일년 중 가장 한가로운 때는 5월 미역일을 끝내고 9월 오징어 건조일이 시작되는 기간이라고 할 수 있다. 약 두 달 반가량 마을 사람들은 평소하지 못했던 일들을 하거나 한담을 하면서 소일을 한다. 바로 이 기간은 여성들에게도 어김없이 찾아온다. 남성들 못지않게 여성들은 뱃불의 주요한 노동력이다. 현재 마을어업과 협동양식어업으로 동해안을 끼고 미역을 양식하는 곳은 영덕군에서 단 두 곳, 경정리와 노물리뿐이다. 이 미역일은 연안의 양식어장에서 ‘뎃마선’을 이용하여 미역씨를 감고 미역이 자란 후 미역채취를 하여 항구로 가져오는 과정에서의 남성의 노동이 작용하며 다음 단계는 대부분 여성의 노동으로 남는다. 여성의 노동의 시기가 3월-5월에 걸쳐 있다. 이후 가을철 오징어 건조시기가 도래하기까지 여성들은 한시름 놓게 된다. 이때 여성 주민들은 주요한 소일거리로 관광이나 여행을 간다. 뱃불마을에서 여러 개의 친목계가 발견되고 또 그들이 모여 5월 말-8월 말에 주로 여행이나 관광을 가는 이유도 이러한 노동관행에서 연유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람에 따라 단체여행 같은 것을 다녀오기도 하지만 그래도 시간은 많이 남는다. 그러면 여성들은 그들과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어울려 삼삼오오 화투를 치며 논다. 여성들의 사회적 문화적 경험과 공유가 이루어지는 장소를 꼽으라면 단연 여성들의 일터라고 할 수 있다. 즉 여성 주민들에게 관광이나 여행, 또는 ‘여가와 놀이’의 시간 못지않게 ‘일터’는 여성들의 ‘쉼터’이기도 하다. 그래서 마을 여성들의 일상에서 일터는 매우 중요한 공간이다. 사실 일터에 모이는 사람들이 대개는 서로 친한 사람들이기도 하다. 일의 성격상 여성들의 일터가 주로 여성들로 이루어지는 경향은 있지만, 남성들의 일터와 완전히 분리되지는 않는다. 미역 나는 철에는 어장일을 하는 남성들이 작업을 하는 마을 앞 공터가 여성들의 일차 건조장이 된다. 그래서 이 무렵 마을 앞 경정항 공터는 분주하고 꽉 차 있다. 여기서 오고가는 이야기는 힘든 노동 속에 심리적 위안이 되기도 한다. 미역 건조장이 각자의 집 마당이나 옥상으로 옮겨지면 ‘함께 일하는 쉼터’의 모습은 사라지게 되었다. 오징어 건조철 여성의 일터 또한 쉼터의 기능을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오징어 건조 작업과 미역 건조 작업이 다른 방식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딱히 오징어 건조철 일터를 쉼터라고 말하는 데는 무리가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징어 건조일 또한 주로 여성의 노동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그들이 모이는 장소는 곧 수많은 이야기가 오고 가는 통로가 된다. 다만 이 이야기가 반드시 뱃불 사람들의 ‘공동체성’을 담보해주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같은 혹은 다른 장소에서 같은 일을 하고 같은 이야기를 공유한다고 하여 사회적 문화적 경험이 일체감을 발휘하는 것은 아닌 듯 했다.



마을 슈퍼 앞에 모인 남자 노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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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변화 : 경정항과 길과 교통

20세기 이후 경정1리 뱃불마을의 변화를 이끌어 왔던 큰 동력은 두 가지 측면에서 나누어 살필 수 있다. 우선 생업적인 부분에서 농사와 고기잡이를 업으로 하던 사람들의 삶의 변화에 주목할 수 있다. 가장 큰 차이는 농사를 지어 생활하던 모습이 차츰 사라지고, 어업이 그 자리를 대신하는 양상이다. 이러한 흐름은 일제강점기 1930년대 중반 이후 일본인 ‘닛따’가 당시 경정동의 앞바다(현 장갓불 근방)에 어장을 경영하면서 ‘어장을 꾸미는 기술’이 마을에 보급되는 시기와 깊은 관련을 맺는다. 이후 1960년대 말-70년대 초반부터 ‘미역’과 ‘다시마’ 등 해조류 양식어업이 서서히 보급되면서 바다의 이용과 자원에 대한 주민들의 관심이 커지고 있다. 다음으로 마을의 변화에서 주목할 것은 1970년대부터 시작된 뱃불의 ‘개발’과 관련된다. 말하자면 자연 생태 경관이 변화를 겪으면서 사람들의 생업 방식도 마을의 개발과 함께 연동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것은 경정항 조성사업과 마을을 관통하는 길의 확충이다. 영덕군과 어민들의 노력으로 어업인들을 위한 시설확충의 필요에 따라 경정1리의 흰 백사장을 인공적으로 메워서 조성해 나가게 된다. 마을의 어민들에게 배를 안전하게 댈 곳을 마련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숙원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뱃불의 흰 모래사장은 해수욕장의 존재성보다 어촌 항구로서의 기능을 위해 차츰 사라져 간다. 물론 경정은 오늘날과 같은 항이 생기기 이전에도 작은 어촌 항구의 입지를 충분히 갖추고 있던 곳이다. 마을 사람들은 지금도 아랫당과 가까운 곳에서 배를 대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인근 마을(경정2동, 경정3동, 석동 등)에서도 현재와 같이 배가 닿을 접안 시설이 마련되기 이전 경정1동을 이용했다고 한다. 마을에 인구가 넘쳐 났던 시절이 있었다. 1970년대를 전후하여 이 마을에는 200여 가구에 1천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살았다. 이러한 인구규모는 1964년 경정동이 경정1동, 경정2동, 경정3동으로 분동되고 나서 얼마 후 경정1동을 다시 경정1동과 경정4동으로 분동해야 하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된다. 물론 경정4동은 법정동은 아니었지만 1960년대 후반 이후 마을 내부에서는 1동과 4동으로 나누는 관행이 생겼다고 한다. 경정1리 마을 사람들은 지금도 동쪽을 가리켜 ‘새짝’이라고 하고, 남쪽을 ‘마짝’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러한 ‘새짝’과 ‘마짝’의 구분은 한 마을에 1동과 4동의 동장을 두기도 했다. 정월대보름과 같은 명절날 줄다리기나 ‘경정초등학교’ 행사에서 학부형으로 참가하여 편을 갈라 놀았다. 마을 주민들은 마짝은 농사짓던 사람들이 주로 살고, 새짝은 어업하는 사람들이라고 구분을 해주기도 했다. 도로시설 및 길과 교통로의 발달은 마을의 변화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지표다. 현재 경정1리 마을 앞을 지나는 도로는 918번 지방도다. 영덕군 강구면 강구항과 영덕군 축산면 축산항을 연결하는 이 도로는 일명 ‘강축도로(강구-축산)’로 불리고 있다. 이 길은 1994년 무렵 경정1리(뱃불)의 ‘다물’ 방면으로 경정2리(차유)와 연결되는 도로가 완성되면서 예전에 경정1리 사람들이 염장으로 넘어가던 ‘다불재’는그 이용이 현격히 줄어들게 되었다. 한편, 예부터 ‘다불재’를 이용하던 사람들은 차츰 길이 넓어지게 되면서 자동차와 같은 운송수단을 접하고 이용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 중에는 다불재로 길이 난 이유를 이 지역의 해안으로 통하는 수송로를 위해 육군에서 군사적인 목적으로 만들었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다불재가 넓혀졌다고 하더라도 군내 버스나 다른 이동수단이 될 만한 차량이 직접 마을로 들어오기 전까지는 마을에서 ‘고실’로 넘어가는 도보길의 이용이 잦았다. 다만 다불재가 넓혀지면서 축산천이 흐르는 염장의 너른들이나 축산리 축산항으로 가는 길이 한결 수월해졌다고 한다. 즉 다불재는 918번 지방도가 생기기 전까지 경정1리에서 축산으로 통하는 길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다불재를 넘어 염장의 축산천을 따라 올라가면서 도보로 영해로 가기에는 선호되던 길은 아니었다고 한다.



마을 북쪽 도로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진입로, 표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