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다문화가정 안갑준 투짱 부부의 살림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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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갑준·틴티투짱 부부는 안산시 단원구 와동에 살고 있다. 현재 살고 있는 곳으로 이사 온 지는 약 4년 정도 되었다. 이곳에서 부부, 시어머니, 딸 등 4명이 함께 지낸다. 시어머니 박경순은 충남 홍성군이 고향이지만 결혼 후 예산, 천안에서 생활했다. 그러던 중 아들을 따라 안산으로 오게 되어 함께 지낸 지 약 20년이 되었다. 남편 안갑준은 예산에서 태어나 천안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대 제대 후 안산에 사는 누나의 권유로 이곳에 정착했고, 그 후 반월공단에서 직장생활을 하였다. 부인 틴티투짱은 베트남에서 한국으로 시집 온 지 3년차 접어든다. 2011년 결혼정보회사를 통해 안갑준과 베트남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2013년 딸을 출산했다.
안 씨는 초등학교를 다닐 때 반대표로 출전할만큼 달리기를 잘했다. 중학교 때 는 그림에 소질이 있어 미술선생님의 권유로 대회에 출전하기도 했다. 중학교 졸업 후 가족모두 천안으로 이사를 했다. 그래서 안갑준씨는 이후 천안공업고등학교 기계과로 입학했다. 1991년 2월 고등학교 졸업 후 절삭공구를 생산하는 회사에서 약 1년간 근무했고, 군입대로 퇴사했다. 군대는 보충역으로 입대하여 1993년 8월에 제대했다. 제대 후 누나의 권유로 안산으로 와서 반월공단의 피혁회사 공무과에서 근무했다. 그 곳에서는 가죽기계를 정비하고, 야간에는 보일러 가동과 관리 일을 했다. 약 2년 가까이 일을 했으나 독한 약품, 악취 등으로 인해 건강에 문제가 생겨 1995년 10월에 퇴사했다. 그 후 몇 차례 회사를 이직한 후, 현재는 경기도 화성에 있는 자동차부품회사에 다니고 있다.
1991년 베트남 하이펑(Hai Phong) 도선(Doson)지역 한 가정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고향에서 초중고를 졸업한 뒤 전문대학에서 회계학을 전공했다. 아버지는 1999년 교통사고로 돌아가셨고, 그 후 어머니와 둘이 지냈다. 2011년 6월 베트남에서 안갑준과 약혼식을 했고, 같은 해 9월 베트남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약혼식을 한 뒤에는 한국어 공부에 매진했다. 부부 관련 모든 서류 처리가 완료 된 후 12월 17일 비로소 한국에 도착했다. 한국에 입국한 뒤 한 달 간은 언어 등 여러 문제로 주로 집에 있다가, 2012년 2월부터 6월까지 안산 글로벌다문화센터에서 한국어 수업과 한국문화 등을 배우며 외부활동을 하였다. 이때 한국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틴티투짱을 위해 항상 시어머니가 동행해주었다. 외부활동은 임신과 함께 잠시 중단하게 되었다. 그리고 한국에서의 결혼식은 2012년 6월 3일 안산에서 다시 올렸고, 2013년 1월 21일 딸을 출산했다.
외국인 며느리를 둔 박경순은 일하는 며느리대신 가정생활과 손녀 양육을 맡아서 한다. 박 씨는 충남 홍성이 고향이고, 출생 했을 때 위의 언니가 3살 때 홍역으로 먼저 세상을 떠났다. 당시만하더라도 질병으로 유아사망이 높았고, 출생신고 등도 분명히 하지 않았다. 그래서 박 씨는 사망신고를 하지 않은 언니의 호적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어릴 적 또래보다 체구가 작고 약했던 박 씨는 유난히 기침을 많이 했다. 그러나 시골 마을에서는 천식이라 생각하지 않고, 단순히 감기가 오래 지속된다고 생각했다. 가정형편이 좋지 못했던 박 씨는 어릴 적 큰집에서 생활해야 했고, 학교 갈 무렵 큰집에서 나왔다. 여전히 집안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고, 결국 학업을 포기해야 했다. 그때부터 부모님을 도와 농사일과 집안일을 했다. 1967년 10월, 남편 안상근과 부부가 되었다. 집안 어른들의 중매로 결혼했으며, 결혼식 전 집안 어른들만 참석해 조촐하게 약혼식을 올렸다. 당시 남편은 약혼식 선물로 ‘동동구리무’ 화장품을 줬다. 박 씨는 이때 처음 화장품을 보았다. 남편에게 처음으로 받은 선물이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다. 신혼살림은 남편이 살고 있는 예산군에 마련했고, 결혼 후 1남 1녀의 자녀를 두었다. 박경순은 남편과 함께 1993년에 안산으로 왔다. 딸과 아들 모두 안산에 있었고, 아들 안갑준은 혼자 자취생활을 하며 회사를 다니고 있었다. 안산에는 공장이 많아 부부가 일할 수 있는 곳이 있었고, 또한 혼자 생활하는 아들 뒷바라지를 해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부부는 피혁공장과 아파트 청소, 공공근로 등을 하며 열심히 생활했다. 그러던 중 2005년 남편이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오랜 투병생활을 뒷바라지 했다. 병원에 장기간 입원을 해야 했고, 병원비가 점차 늘어나자 박 씨는 자녀들의 부담을 덜기위해 남편을 집으로 데려와 직접 간호했다. 거동이 힘들었던 남편을 간호하기란 쉽지 않았으나 힘든 내색없이 남편을 돌보았다. 남편은 2010년 71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남편이 별세한 뒤, 오랜 투병생활로 미루었던 아들의 결혼을 추진했다. 그러던 중 주변사람의 권유로 국제결혼을 알게 되었다. 한국에서 힘들게 찾는 것 보다는 오히려 국제결혼을 통해 좋은 며느리를 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아들에게 적극 추천했다. 아들 또한 흔쾌히 받아 들였고, 지인의 소개로 결혼중매업체를 통해 결혼준비를 했다. 2011년 12월 며느리가 처음 집으로 들어왔고, 새 식구를 맞이한 가족들은 모두 며느리를 환영했다. 박경순은 낯선 곳에 온 며느리에게 한국문화와 생활하는 방법을 가까이에서 알려주었다. 처음에는 의사소통이 되지 않아 표정이나 손짓으로 어렵게 대화를 했다. 그러나 곧 며느리가 다문화센터에서 한국어교육을 받게 되었고, 힘들던 대화는 서서히 해결되었다. 박경순은 열심히 적응하려는 며느리를 보면서 고마움을 느꼈고, 특히 한국 음식이 맞지 않아 많이 힘들었을 텐데도 별다른 내색 없이 잘 먹으려고 애쓰는 모습이 좋았다. 2013년 기다리던 손녀 안채은이 태어났고, 현재 맞벌이를 하는 부부를 대신해 손녀를 돌보고 있다. 박 씨의 개인사를 길게 정리한 것은 안갑준〮틴티투짱 가정에 중심 역할을 하기 때문이고, 오늘날 다문화가정의 시어머니 역할을 대변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딸 안채은은 2013년 1월 21일 안산의 열린산부인과에서 오전 11시 45분, 몸무게 3.65kg, 키 50cm로 건강하게 태어났다. 출산 전 자연분만이 되지 않아 제왕절개로 변경되어 가족은 산모와 아기를 걱정했으나, 건강하게 태어났다. 엄마를 닮아 태어날 때부터 유난히 큰 눈을 가진 딸은 산부인과에서도 간호사들과 주변 산모들의 예쁨을 받았다. ‘채은’이라는 이름은 작명소에서 받아온 것으로, 녹봉 채(菜)와 언덕 은(垠)을 썼다. 2014년 6월부터 ‘예쁜사랑 어린이집’에 다니고 있다. 어린이집은 2014년 6월부터 다니기 시작했고, 아직 다닌 지 얼마 되지 않아 등원 길에 할머니와 떨어지는 것이 싫어서 떼를 쓰거나 울기도 한다. 그래도 곧 어린이집에 적응해 또래 친구들과 잘 어울려 점심을 먹고, 낮잠도 잔다. 요즘에는 어린이집에서 배운 동요를 틀어주면 춤을 추고 박수를 치면서 옹알옹알 따라 불러 지켜보는 가족을 즐겁게 한다. 그러나 어린이집에 있을 때를 제외하곤 대부분의 시간을 할머니와 보내고 있는 채은이는 엄마아빠보다 할머니를 더 좋아해서 가끔 틴티투짱을 속상하게 한다.
어머니의 권유로 국제결혼을 알아보고 있던 안갑준은 국제결혼 사이트에 가입했다. 당시 다른 나라보다 베트남 여성들과의 결혼 사례가 많았고, 결혼생활 지속도가 높아서 그는 베트남 여성과의 혼인을 원했다. 사이트에 가입 후 한 달 뒤 결혼업체와 베트남방문일정을 잡았고, 2011년 6월 24일에 5박 6일의 일정으로 출국했다. 베트남 도착 2일차 부터 맞선이 시작됐고, 일정동안 30명의 여성을 만났다. 마지막에 틴티투짱을 만났는데, 그녀의 선택으로 맞선이 성사되었다. 틴티투짱은 비록 짧은 시간 대화를 나눴지만 선한 인상이 마음에 들어 안갑준을 선택했다. 틴티투짱이 한국남자와 결혼을 결심한 이유는 자신의 친구들 중 5명이 이미 한국남자와 결혼해서 한국에서 생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틴티투짱 역시 베트남 현지에 있는 결혼정보업체에 가입해 안갑준을 만나게 되었다. 맞선이 성사되면 베트남 여성의 집에 가서 부모님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 안갑준 역시 틴티투짱의 집에 방문해 가족들과 인사를 했다. 가족들과의 만남에 안갑준은 많이 긴장했고, 집으로 온다는 소식을 들은 틴티투짱의 어머니는 친척들을 불러 안갑준을 환영했다. 틴티투짱의 어머니 또한 안갑준을 마음에 들어 했고, 둘의 결혼에 동의해주었다. 다음 날 야외 웨딩촬영과 약혼식을 했다. 약혼식은 틴티투짱의 어머니와 할머니를 비롯해 친척들 앞에서 조촐하게 올렸다. 약혼식을 올린 뒤 결혼이 성사된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롱베이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1박2일의 짧은 신혼여행을 다녀온 뒤 안갑준 혼자 한국으로 입국했다. 틴티투짱을 한국으로 데려오기 위해 한국에서 혼인신고를 먼저 올려야 했고, 그 서류를 다시 베트남으로 보내는 절차를 거쳐야 했기때문에다. 이 과정은 까다로웠고 베트남에서 혼인신고가 되기까지 6개월 정도 걸렸다. 안갑준은 2011년 9월 28일 틴티투짱의 고향에서 가족과 친지, 친구들이 모인자리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을 올린 뒤 베트남에서 혼인신고를 했고, 서류 통과를 기다리는 기간 동안 틴티투짱은 한국어 공부를 했다. 서류 절차가 통과 된 뒤 2012년 12월 17일 틴티투짱은 한국으로 올 수 있었다. 안갑준과 틴티투짱은 약혼 이후 떨어져 있던 시간 동안 전화통화와 편지를 주고 받았다. 안갑준은 말이 통하지 않는 아내와의 전화통화를 위해 간단한 베트남어를 수첩에 적어 외우기도 했다. 또한 같이 지낼 아내를 위해 침대, 화장대, 이불 등의 신혼살림을 마련했다. 당시 신혼 가구가 들어가기에는 안갑준의 방이 좁았는데, 안방을 사용하던 어머니가 흔쾌히 방을 바꾸어주어 부부방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틴티투짱은 한국에서 생활을 시작했고, 4개월 후 임신 소식을 알게 되었다 . 그 당시 시어머니와 안갑준은 한국에서 결혼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부부는 베트남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이미 법적으로 부부가 되었지만 한국에 있는 가족들과 친지들을 초대해 부부가 됐음을 알리려 했다. 그러나 틴티투짱의 임신소식을 알게 되었고, 가족들은 고민했다. 그러나 결혼일정을 모두 취소하고 미루게 되면 1년 뒤쯤 결혼식을 올려야했다. 그러나 결혼을 미루기에는 친지들에게 모두 알린 상황으로 틴티투짱의 동의를 구해 무리가 되지 않는 선에서 결혼식을 진행했다. 부부는 2012년 6월 8일 안산 루체웨딩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한국에서 결혼생활을 하게 된 틴티투짱은 가족, 음식, 주변 환경 등 모든 것이 낯설었다. 처음 한국에 온 날 밤에는 베트남에 있는 엄마가 보고 싶어 울기도 했다. 시어머니와 시누가 달래주었지만 쉽게 가라앉지 않았고, 한 달 정도는 매일 밤마다 눈물을 흘렸다. 안갑준은 아내가 한국생활을 힘들어 할 때마다 친정어머니와 전화통화를 연결해줬다. 또한 안산 초지동에 있는 글로벌다문화센터로 한국어 교육을 받으러 다니길 권유했고, 틴티투짱은 점차 한국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글로벌다문화센터는 집에서 차로 15분 정도 거리로 가까웠지만 한국에 온지 얼마 안됐던 틴티투짱에게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은 낯선 문화였다. 수업이 있을 때는 시어머니인 박경순이 항상 함께했다. 버스 노선부터 요금 내는 법 등을 알려주었고, 수업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함께 왔다. 틴티투짱은 같은 반에서 공부하던 베트남 사람들과 고향・한국생활 등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친해졌다. 그러 던 중 안산에서 알게 된 고향 친구들을 사귀며 한국생활에 재미를 붙여갔고, 원곡동 다문화거리에 있는 베트남 음식점에서 향수를 달래기도 하였다. 틴티투짱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마음이 홀가분해진 건 안갑준이였다. 누구보다 아내가 빨리 적응하기를 바랐던 남편은 적응을 잘 하는 틴티투짱의 모습이 좋았다고 한다. 도움 없이 스스로 하려는 모습을 보면서 핸드폰을 개통해주는 등 틴티투짱의 사회생활을 지지했다.
틴티투짱은 2012년 4월 쯤 임신사실을 알게 되었다. 월경이 늦어져 걱정했던 틴티투짱은 시누이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했다. 시누이는 임신테스트기를 권했고, 그 결과 임신으로 나왔다. 가족들과 찾은 산부인과에서 검사를 받았고, 임신사실을 알게 되었다 . 아기를 누구보다도 간절히 바랬던 남편과 시어머니는 틴티투짱의 임신사실을 알고 기뻐했다. 특히 적지 않은 아들의 나이 때문에 누구보다도 걱정했었던 시어머니는 가족들에게 임신사실을 알렸다. 남편과 시어머니는 몸조심을 강조했고, 다니던 한국어 교육도 쉬었다. 특별하게 했던 태교는 없었지만 한국어 교육을 들으면서 배웠던 종이접기를 했다. 틈틈이 접었던 학은 시어머니와 시누이에게 선물했고, 주변에서 십자수를 해보라고 권하기도 했지만 어려워서 완성하진 못했다. 임신 6개월에 접어들었을 때 입덧이 심해 힘들었다. 특히 된장과 김치 냄새를 맡으면 모두 게워냈다. 남편은 음식을 먹지 못하는 틴티투짱을 위해 베트남식당에 함께 가서 먹기도 했지만, 매일 해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틴티투짱은 친정에 한 달 정도 다녀오길 원했다. 틴티투짱의 베트남 출국은 가족들에게도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이미 결혼식도 올렸고, 가족임은 분명하지만 가족 간의 정을 느끼기에 1년이 채 되지 않아 부족하다고 여겼다. 주변에서도 남편을 걱정했지만 남편은 틴티투짱을 베트남으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틴티투짱은 임신 6개월 차로 접어든 2012년 9월 베트남으로 출국해 약 1달 간 베트남 친정집에서 머물렀다. 체류기간 내내 친정엄마의 보살핌을 받을 수 있었다. 먹고 싶었던 음식과, 만나고 싶었던 사람들을 만나면서 편히 쉬었다. 그러던 틴티투짱은 다음 달인 10월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고, 시어머니는 다시 돌아온 며느리가 고마웠다. 그리고 2013년 1월 딸 안채은을 출산했다. 출산 후 5개월간 몸조리를 했으며, 몸조리를 끝낸 뒤에는 시어머니와 함께 집에서 소일거리로 여러 가지 부업을 했다. 현재는 반월공단 자동차 부품회사를 시누이와 함께 다니고 있다.
가족은 안채은이 태어나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곧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혔다. 가족 중에서 고정적 수입은 남편이 유일했고, 대부분 가족의 생활비로 지출했다. 시어머니는 틈틈히 소일을 했지만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틴티투짱 또한 집에서 부업을 하면서 조금씩 벌기 시작했다. 평소 알뜰하게 살아온 시어머니는 저축을 권했고 틴티투짱이 번 돈은 대부분 저축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시누이의 소개로 반월 공단에 취직하게 되었고, 부부가 수입이 생기면서 경제적으로 안정되었다. 틴티투짱은 회사에 다니게 되면서 딸 안채은을 걱정했다. 남편과 상의 끝에 시어머니에게 부탁했고, 시어머니도 흔쾌히 돌봐주기로 했다. 부부는 맞벌이 부부가 되었고, 딸 안채은은 시어머니가 돌보았다. 건강이 좋지 않아 지속적으로 아이 보기가 힘들었던 시어머니의 일을 덜기 위해 2014년 6월부터 집 근처 어린이집에 보냈다. 틴티투짱은 취직 후 경제사정은 안정 됐지만 딸을 볼 수 없어 마음이 좋지 않았다. 아침 7시에 집에서 나서면 저녁 7시가 되서야 귀가했다. 퇴근 후 딸과 함께 놀아주려애썼지만 몸이 고단해 일찍 잠드는 때가 대부분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딸 채은이는 엄마인 자신보다 시어머니를 더 따라 마음이 아팠다. 그 모습을 본 뒤로 부부는 딸과 함께 하는 시간을 많이 가지려 노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