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성(鶴城) 이씨(李氏)는 임진왜란을 전후로 달곡에 입향해서 현재까지 아산(牙山) 장씨(蔣氏), 울산(蔚山) 김씨(金氏)와 함께 마을의 주요 성씨이다. 차화순은 학성 이씨 17세(世) 이현락[李玄洛, 1919~2007]과 혼인한 학성 이씨 집안의 며느리이다.
학성 이씨의 시조는 충숙공 이예(李藝)이다. 이예는 1373년(고려 공민왕 22년)에 태어났으며 조선 세종조에 외교가로서 알려진 인물이다. '학성(鶴城)'은 그의 출신지인 울산의 옛 지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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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학성 이씨 달곡의 입향조 │ 7세 이득곤(李得坤)
달곡에서 학성 이씨의 입향조는 이윤고(李胤高, 1618년생)가 아니라 이윤고의 부(父) 이득곤(李得坤, 1583년생)이다. 이득곤은 학성 이씨의 시존인 충숙공(忠肅公) 이예(李藝, 1373~1445]의 7세(世)로 이경민[李景敏, 1553~1592]의 차남이다. 이경민은 <만력11년계미9월초3일별시방목(萬曆十一年癸未九月初三日別試榜目)>에서 확인할 수 있다. 별시(別試)는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에 보던 임시 과거시험이며, 방목(榜目)은 조선 시대의 과거 합격자 명부이다.
별시방목에 따르면, 급제자 정로위(定虜衛) 이경민은 자(字) 여인(汝仁)이며 계축(癸丑)생이다. 본(本)은 울산(蔚山)이며 사는 곳과 같으며, 부(父)는 봉사(奉事) 학(鶴)이다. 만력 11년은 조선 선조 16년인 1583년이다. 이경민은 계축년인 1553년생이며, 급제 당시는 그가 31세 되던 해이다. 이 해는 차남인 달곡 입향조 이득곤이 태어난 해이기도 하다.
<학성이씨세보>에 의하면 이경민의 장남은 득지(得?)이다. 그러나 이득지는 <기유식장적>을 비롯하여 호적대장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그리고 달곡에서 이득곤은 제주(濟州) 고씨이다. 도안(道安) 이씨는 이후 청당(淸塘)이 합쳐 청안(淸安) 이씨가 된다. 따라서 호적대장에 기록된 도안 이씨는 세보의 청안 이씨와 같다. 그리고 이후에 작성된 호적대장에서 이득곤 자손은 첫째인 영(榮, 1610년생)을 제외하고 제주 고씨를 외가로 한다. 두 명 모두 정부인이란 점에서 이득곤은 도안 이씨와 혼인 후 사별하고, 다시 제주 고씨와 혼인한 것으로 추정된다. 세보에 따르면, 이득곤은 도안 이씨와 제주 고씨 사이에서 7남 3녀를 두었다. 7남은 <울산부호적대장>에서도 확인된다.
# (2) 제주 고씨의 가산을 물려받은 학성 이씨 8세 이윤고(李胤高)
이윤고(李胤高, 1618년생)는 호적대장과 세보에 의하면, 이득곤의 3남으로 학성 이씨 8세이다. 그런데, 이득곤의 자녀는 두 사료에서 한자 표기가 다를지라도, '이윤고'를 제외하고 모두 외자이다. 이와 관련하여 달곡 문중에서는 이윤고가 '제주 고씨 집안을 이었다'는 의미로 이을 윤(胤), 성씨 고(高)라고도 한다. 즉, 이윤고의 원래 이름은 겸(?)이었으나, 재산을 물려받으면서 윤고로 개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조사자는 이윤고의 개명자료를 확인하지 못했다.
<을유식호적대장>과 <갑자식호적대장>에서 이윤고의 처가 다르다. 전자는 김소사, 후자는 이소사인데 <갑자식호적대장>의 오기로 보인다.<을유식호적대장>에서 김소사의 부(父)를 언급했으며, 세보에서도 이윤고의 처는 월성 김씨이다. 이윤고는 처 김씨와의 사이에서 세 아들을 두었는데, 유창(惟昌), 유백(惟伯), 유화(惟華)이다. 다만, 이유화는 호적대장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 (3) 달곡을 알린 명사수 학성 이씨 9세 이유창(李惟昌)
이유창(李惟昌, 1636년생)은 이윤고의 장자로 학성 이씨 9세이다. 이유창은 세보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있다.
_字復興仁祖丁亥生武科建功將軍訓練院副正以名武鳴世所帶弓矢藏干家肅宗辛酉五月四日卒墓月谷家后苽田谷子坐有床石.자는 복흥이다. 인조 정해생이며 무과에 급제하여 건공장군 훈련원 부정으로 무로 세상에 이름을 떨쳤고, 대와 궁시[활과 화살]는 집에 숨겨두고 있다. 숙종 신유년 5월 4일에 죽었으며, 묘는 월곡 집 뒤의 과전곡에 있으며, 좌향은 자좌이며 상석이 있다._
이유창은 문중에서 여러가지 이야기가 전한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장군 이유창은 무과에 급제하고 병자호란(1636.12~1637.1)에서 큰 활약을 해 '달곡'이라는 이름을 세상에 널리 알렸다. 특히, 이유창은 신궁으로 활을 잘 쏘아 그 명성이 더욱 높았다. 다만, 서른 몇 해를 넘기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전쟁터에서 전사했다. 만약, 이유창이 전쟁터에서 죽지 않았으면 더욱 큰 인물이 되었을 것이다. 이유창이 사용하던 활과 화살은 아직도 '달곡' ○○○의 집에 숨겨두고 있는데, 그 활과 화살을 절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후대에 기록된 이유창의 직역은 '급제(及第)', '전력부위권지훈련원봉사(展力副尉權知訓鍊院奉事)'이다. 급제는 과거에 합격한 자, 전력부위는 종9품 무관 품계, 봉사는 종8품 문관의 관직이다. 그런데 이유창의 직역에 권지(權知)가 붙어서 전력부위와 훈련원 봉사를 연결해주고 있다. 권지는 임시직이다. 이유창이 무관의 종9품 품계로 문관의 종8품 관직에 임용되어 권지가 붙은 것이다. 아무튼, 세보에 기록된 그의 지역과는 거리가 있다. 한편, 이유창은 정하, 정전 두 아들을 두었다.
# (4) 달곡의 학성 이씨 10세 이정하(李廷賀)
이정하(李廷賀 또는 李丁賀 1667년생)는 이유창의 장남으로 학성 이씨 10세이다. 1684년 <갑자식호적대장>의 주호 이유창의 기록에 의하면, 이정하는 '강현(强顯)'에서 '정하(廷賀)'로 개명했다. 주호 이정하는 1714년, 1729년, 1735년, 1753년 호적대장에서 4차례 확인된다.
이정하는 1667년 태어나서 1751에서 1753년 사이에 사망했으며 관식을 하지 않았고 1729년을 전후하여 아내와 사별하고 홀아비로 지냈다. 그는 장수하여 조선 시대 80세 이상의 노인에게 주었던 벼슬인 '노직(老職)'으로 문관 정3품 통정(通政)을 받았다. 이정하는 자식으로 '원욱(元彧)'을 두었다.
# (5) 학성 이씨 11세 이원욱(李元彧)
이원욱(李元彧, 李日老, 李元郁, 1701년생)은 이정하의 장남으로 학성 이씨 11세이다. 이원욱은 부(父) 이정하가 주호로 기록된 1714년 <갑오식호적대장>, 1729년 <기유식호적대장>, 1753년 <을묘식호적대장>에서 확인된다. 한편, 주호 이원욱은 1753년 <계유식 호적대장>과 1759년 <기묘식호적대장>에 기록된다. 이원욱은 호적대장에서 '李元彧', '李日老', '李元郁'등 다양하게 표기되며, 일반적인 한자 표기는 '李元彧'이다.
이일로에서 개명한 이원욱은 세보와 호적대장의 기록이 일치하며, 관직을 역임하지 않았다. 호적대장에서 이원욱은 사덕(思德, 1721년생), 사춘(思春, 1724년생), 용주(龍周, 1728년 또는 1729년) 3남을 두었다. 다만, '용주'는 이원욱의 자(子)인지 확실하지 않다. 이원욱은 주호 이적하의 기록에서 자(子)로 나오며 '용주'는 손(孫)으로 기록된다. 용주는 1728년(무신년) 혹은 1729년(기유년)에 태어나 분가하지않은 이원욱의 자(子)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후 호적대장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 (6) 학성 이씨 12세 이사덕(李思德)
이사덕(李思德, 1721년생)은 이원욱의 장남으로써 학성 이씨 12세이다. 이사덕은 호적대장에서 주호로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조사팀은 부(父) 이원욱의 기록을 통해서 추정할 수 있다. 이사덕은 1753년과 1759년에 확인되는데, 1759년의 <기묘식호적대장>에서 해당 사항만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_第四統一戶鰥夫幼學李元彧年伍拾玖辛巳本蔚山(중략) 率子幼學思德年參拾玖辛丑率婦揚氏年肆拾壹己亥籍淸州(이하 생략) 제4통 1호 환부 유학 이원욱은 59세 신사생이며 본은 울산이다. (중략) 솔자 유학 사덕은 39세 신축생이다. 며느리 양씨는 41세 기해생이며 본적은 청주이다._
이 기록에 의하면 이사덕은 1721년에 태어났다. 이후 1819년 <기묘식호적대장>과 1867년 <정묘식호적대장>에 의하면 이사덕은 주호의 부(父) 또는 증조(曾祖)로 확인된다. 그의 직역은 '학생(學生)'이었으며, 관직을 하지 않았다. 이사덕은 청주 양씨와의 사이에서 범조(範祖, 1747년생)와 희조(希條, 1752년생) 2남을 두었다.
# (7) 달곡의 학성 이씨 13세 이희조(李希條)
이희조(李希條, 1752년생)는 이사덕의 차남으로 학성 이씨 13세이다. 이희조는 1819년(순조 19년)에 작성된 <기묘식호적대장>에 주호로 확인된다.
이희조는 세보에 의하면 1759년에 태어나서 1836년에 사망했다. 이희조의 기록은 호적대장과 차이 난다. 그는 호적대장을 근거로 1752년 임신년에 출생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후 호적대장에 '학생'이 직역이 붙는 것으로 보아 그도 관직을 하지 않았다. 이희조는 호적대장에 의하면, 종록(宗祿, 1776년생), 종병(宗秉, 1790년생), 종기(宗基,?) 3남을 두었다. 이종록은 1819년에 작성된 <기묘식호적대장>에 주호로서 기록된다.
# (8) 달곡의 학성 이씨 14세 이종로(李悰魯)
<학성이씨세보>에 의하면 학성 이씨 14세와 15세는 이종로(李悰魯)와 이영창(李永昌)이다. 그러나 조사자는 1819년 <기묘식호적대장> 이후부터 1867년 <정묘식호적대장>까지 호적대장을 확인하지 못했다.두 호적대장의 중간지점의 호적대장을 확인하면 이현락의 직계를 추적할 수 있으나 14세와 15세의 직계는 불확실하다. 그래서 조사자는 호적대장의 주호 표기 방식과 세보를 비교하여 둘의 존재를 추정해 보았다.
먼저 이종로[李悰魯, 1790~1864(추정)]는 이희조의 차남으로서 학성 이씨 14세이다. 세보에 의하면, 이종로는 다음과 같다.
_字 乃坤 正宗 庚戌生 高宗甲子三月十三日卒 墓月谷密田嶝乾坐有床石 자는 내곤, 정종경술생이며 고종 갑자년 3월 13일에 죽었다. 묘는 월곡 밀전등이며, 좌향은 건향이며 상석이 있다._
이종로는 1817년 <기묘식호적대장>의 이종병으로 추정된다. 조사자가 종병을 종로로 추정하는 근거는 두 가지이다. 먼저, 1819년 <기묘식호적대장>에 의하면, 종병은 주호 이희조의 솔자이다. 호적대장이 작성된 시점과 종병의 나이를 계산하면 종병은 1790년생이다. 1790년생의 종병은 세보에 기록된 정조 경술생에 태어난 종로와 일치한다. 두 번째, 세보에 의하면 종로는 이희조의 차남이다. 이희조의 장남은 이종록으로 1819년의 <기묘식호적대장>에 주호로 확인되었다. 그래서 세보에서 확인된 이종로는 호적대장의 이종병으로 추정된다.
# (9) 학성 이씨 15세 이영창(李永昌)
이영창[李永昌, 1841~1886(추정)]은 세보에 의하면 이종로의 3남으로 학성 이씨 15세이다. 이영창은 호적대장에서 직ㆍ간접적으로 추정할 기록이 없으며, 세보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_憲宗辛丑生 高宗丙戌 七月二十七日卒 墓月谷大茅田嶝 乾坐有床石 헌종 신축생이며, 고종 병술년 칠월 이십 칠일에 죽었다. 묘는 월곡 대모전등이며, 좌향은 건향이며 상석이 있다._
비록, 조사자는 1822년부터 1864년까지 호적대장을 확인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조사자가 호적대장의 기록방식[부-조-증조-외조]으로도 '이영창'을 추정할 수 없었다. 세보로 이영창의 생존 시기를 고려하면, 이영창은 1867년에 작성된 <정묘식호적대장>에서 확인되어야 한다. 심지어 조사자는 유포면으로 확대하여 그의 존재를 추적해 보았으나, 확인하지 못했다. 이영창은 달곡과 유포면에 거주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 (10) 달곡의 학성 이씨 16세 이기헌[李基憲, 1875-1957]
이기헌[李基憲, 1875-1957]는 이영창의 장남으로 학성 이씨 16세이다. 이기헌은 무룡동 617번지에서 태어나 1923년 무룡동 612번지로 이사했다. 현재 무룡동 612번지는 달곡1길 128-4로 이현락[李玄洛]의 큰집이다. 제적등본에 의하면, 이기헌은 농업인이며 2남 2녀[두생(斗生, 남), 방구(方求, 여), 희도(喜度, 여), 현락(玄洛, 남)]를 두었다.
이현락[李玄洛, 1919~2007]은 이기헌과 이차년(李且年, 1885년생) 의 2남 2녀 중 차남으로 학성 이씨 17세이다. 이현락은 1919년에 무룡동 612번지에서 태어나 21살인 1939년 여강 이씨인 이석천(李錫千)과 박위희의 딸인 이연이[李連伊, 1921~1985]와 혼인 후 이현락은 현재의 위치인 무룡동 613번지로 분가했다. 그런데 이현락과 이연이는 자녀를 두지 못했다. 그래서 이현락은 1964년 차화순과 다시 혼인했다. 달곡은 농촌이지만, 이현락은 농사일을 하지 않았다. 이현락은 일찍부터 울산 향교에 다니며 한학을 배워 달곡의 큰 어른으로 존경받았다. 조사팀은 살림살이를 조사하면서 집안 곳곳에 이현락이 지은 글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도움을 요청하는 곳이 있으면 그곳이 어떤 곳이라도 가서 직접 글을 지어주었다. 글을 짓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었던 이현락은 종이를 귀하게 여겼다. 심지어 담뱃감에 있는 종이조차도 버리지 않고 글을 짓었으며 그 흔적들은 현재도 남아 있다. 이현락의 글은 다양하지만, 그의 유품 중에서 제문이 가장 많다. 제문은 한문으로 쓴 제문이 가장 많지만, 한글로 쓴 제문도 있다. 그는 정치에도 관심이 많아 1956년 8월 8일 강동면의 제2대 면의원으로 선출되었다. 다만, 조사자는 면의원으로 선출된 자료를 추적해보았으나 확인하지 못했다. 살림살이를 통해 볼 때, 이현락은 글을 통해서 강동면과 울산에 많은 사람과 교류했는데 그는 유학에만 국한하지 않고 다양한 학문에 관심을 가졌다. 유품 중에는 직접 쓴 부적도 있고, 부적을 쓰기 위해 사용한 주사(朱砂)도 있다. 심지어 독학으로 영어를 공부하기도 했다. ![](/media//archive/photo/RD35S/service/RD35S_I465124.PNG) 유품과 자녀들의 구술로 볼 때, 이현락의 자식 사랑은 유난했다. 2남 3녀를 둔 이현락은 모든 자녀의 성적통지표, 표창장, 상장 등을 소중히 보관했다. 그가 마흔을 넘어 자식을 얻은 점도 있지만, 집안을 잇는 것이 중요한 듯하다.
마을에서 구술로 조사된 학성 이씨의 달곡 입향 계기는 다음과 같다. 학성 이씨와 아산 장씨가 달곡에 집성촌을 형성하기 전 달곡에는 다양한 성씨가 살고 있었고, 주요 성씨 중의 하나가 제주 고씨의 예빈시정 고경륜이었다. 그런데 그 집안에는 아들을 두지 못하고 딸만 하나 있었다. 그래서 농소에 살던 학성 이씨 이득곤이 제주 고씨 집안에 장가왔고, 그의 3남 이윤고가 제주 고씨의 가산을 물려받았다. 이후 달곡에서 학성 이씨가 주요 성씨가 되어 학성 이씨 집성촌이 형성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광해군 원년[1609]에 작성된 <기유식장적>에서 이득곤의 외가인 고경륜(高敬倫, 1558년생)이 확인된다. 그러나 조사자는 호적대장을 분석하면서 몇가지 의문을 갖게 되었다. <기유식장적>에 의하면, 고경륜은 '이관'이라는 29세의 아들을 두었다. 학성 이씨가 외가인 제주 고씨의 가산을 물려받았다면, 고이관의 존재를 설명할 수 없다. 물론, 고이관은 1609년의 <기유식장적>에서만 확인된다. 이후 1672년 <을유식호적대장>에서 직·간접적으로 확인되지 않은 점에서 고이관은 좀 더 이른 시기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학성 이씨가 제주 고씨의 가산을 물려받았다고 하기엔 부족하다. 그래서 조사자는 고이관의 직역에 주목했다. 고경륜의 직역이 정3품에 해당하는 예빈시정임에도 불구하고, 고이관의 직역은 일반 양인에 해당하는 '보인(保人)'이다. 보인은 조선시대 번상[番上, 번을 들 차례가 되어 군영에 복무하는 일]한 집의 남은 가족의 재정을 도와주던 양인이다. 즉, 고이관의 직역에 유학을 쓰지 못한 점은 그가 양반이 아니엇다는 것이다.이는 고이관의 경우 모(母)의 신분을 적용한 것으로 보인다. 고경륜은 처 '양씨'와, 첩'최 소사'를 두었다. 일반적으로 '○씨'는 양반가의 여자를, '○ 소사'는 양인 여자를 표기한다. 이는 4조를 기재하는 호적대장의 기재방식에서도 두 사람의 신분을 짐작할 수 있다. 고이관의 어머니는 최소사로 추정된다. 아마도 이 때문에 제주 고씨의 가산이 학성 이씨에 전해진 것인 듯하다. 한편, <기유식장적>에 의하면, 고경륜의 또 다른 딸 '고소사'가 '박은복'의 기록에서 확인된다. _戶守門將朴銀福年肆拾參丁卯本蔚山父正兵銀同祖正兵銀山曾祖正兵承文外祖正兵鄭德春本蔚山妻良女高召史年參拾壹己卯本濟州父禮賓正高敬倫祖參奉億秋曾祖忠順衛諶外祖正兵張彦進本慶州(이하 생략) 수문장 박은복은 43세로 정유생이며 본관은 울산이다. 부는 정병 은동, 조는 정병 은산, 증조는 정병 승문, 외조는 정병 정덕춘이며 본은 울산이다. 처 양인 고소사는 31세로 기묘생이며 본관은 제주이다. 부는 예빈시전 고경륜, 조는 참봉 억추, 증조는 충순위 심, 외조는 정병 장언진이며 본은 경주이다._ _<경상도울산부기유식장적>의 박은복(朴銀福)_ 달곡 학성 이씨 문중에서 전해지듯 제주 고씨 집안은 무남독녀를 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고소사'로 기록된 점, 그녀의 남편 직역이 수문장인 점 등은 고소사도 최소사의 딸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래서 이득곤의 3남인 이윤고가 외가의 가산을 물려받은 것은 이득곤이 '양씨'의 딸에게 장가 들었을 것이다. 다만, 이득곤의 첫 번째 부인은 청안 이씨였으며, 그 이후 이득곤은 제주 고씨에게 다시 장가 들었다.
# 1) 차화순의 어린시절
차화순은 1944년 7월 12일 일본 石川? 羽昨滂洞 昨町目 50번지에서 연안 차씨 차동일(車東馹)의 2남 4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羽昨滂洞은 현재의 이시카와현(石川?) 하쿠이시(羽?市)다. 차화순의 부모님 차동일과 김수연(金壽連)은 결혼 후 경주 양북면 용당리 433번지에서 살았으나, 생계를 위해 첫재 딸 차덕희를 데리고 일본에서 생활하였다. 당시 용당리는 연안 차씨의 집성촌이었는데, 20여 가구가 일본으로 건너가 각지에서 일을 했다. 일본에 건너간 차화순의 친척들 중에는 해방 후 일본에 계속 살게 된 사람들도 있었다. 일본에서 태어난 연안 차씨 아이들은 일본식 이름을 받기도 했는데, 당시 차화순이 받은 이름은 기요코였다.
_**차순환**│혼자 간 게 아니고 마을에 마이(많이) 갔어요._
_? ? ? ? ? ? ? 우리 재종집도 가고 같이 간 사람이 많았어요._
_**차화순**│그 아재 고우리 아재?_
_**차순환**│그래 아재. 그래 갔는데 안오고 일본 그냥 눌르고(눌러앉고)._
_**차화순**│앤 나왔다(안 나왔다) 아이가._
_**차순환**│그러니까 이 도장골에 바이(반이) 갔어. 한둘이 간 게 아이고(아니고)._
_**2016년 7월 21일 용당리로 가는 차내**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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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화순의 아버지는 일본 해군기지 옆 탄광에서 레일 미는 일을 했다. 1941년에 일본에서 찍은 차화순의 가족의 사진이 있었다고 전해지나 현재는 소실되었다. 따라서 차화순의 가족이 언제 일본에 건너가 생활했는지 정확한 기간은 확인할 수 없다. 맏딸 차덕희를 낳을 때는 한국에 있었고 차덕희가 4살 무렵 일본에 건너가 셋째 딸 차옥순을 낳기 전에 일본에서 돌아왔다. 이로 미루어 볼 때 1941~1943년 사이에 일본으로 건너가 해방 후 돌아온 것으로 추정된다. 차화순 일가는 한국으로 돌아온 후 용당리 429번지에서 살았다.
1959년은 차화순에게 잊을 수 없는 해이다. 태풍 사라호가 경상도 일대에 큰 피해를 입힌 때였다. 용당리도 태풍의 피해를 입었는데, 다미뜰 뒤의 둑이 터져 용당리 일대가 물에 잠긴 것이다. 살림살이나 가축도 쓸려 내려갔으며 도정을 끝낸 볏짚들이 떠내려갔다고 한다. 차화순의 가족은 다미뜰 가운데 있었던 정미소가 피해를 입어, 이듬해인 1960년 울산시 북구 창평동으로 이사했다. 당시 차화순의 나이는 16세였다.
차화순의 가족은 북구 창평동에서 9년을 살다 다시 울산시 북구 송정동 13-1로 이사 갔는데, 차화순은 송정으로 이사 가기 전에 이현락과 혼인했다.
![](/media//archive/photo/RD35S/service/RD35S_I465126.PNG)
# 2) 혼인과 '어머니'이야기
1963년 차화순의 언니 차덕희는 결혼해서 부산에 살고 있었다. 차덕희가 태기가 있어 동생이었던 차화순은 언니를 돌보기 위해 1964년 정월 초하루에 부산으로 내려갔다. 대보름이 되어 조카가 태어났고 언니의 아이를 보살피던 중 차동일이 부산을 내려와 차화순에게 결혼날짜와 상대를 알려주었다. 결국 차화순은 결혼 3일 전에 창평동 집으로 올라왔다. 결혼상대의 얼굴을 알지 못했다. 차화순은 1964년 음력 2월 초하루날[3월 14일 토요일]혼인했다.
당시 차화순 가족은 형편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차화순의 가족이 일본에서 벌어 온 돈으로 무리하게 큰 집을 지었고, 정미소를 지었지만 사라호 태풍으로 인해 정미소가 모조리 쓸려갔다. 이사 갈 즈음해서는 빚도 생겼지만 살림하기에는 차화순 가정의 식구가 너무 많았다. 차화순이 결혼 할 즈음에는 혼수를 마련하기도 벅차서 혼수 없이 결혼할 상대를 택한 것이었다.
차화순은 송정에서 전통혼례를 올렸다. 당시 혼례에 참석한 인원이 많지 않았는데 차화순 일가와 친구 몇 명, 이현락 일가와 면장, 의원 유지 몇 명이었다. 혼례를 치르고 이튿날 달곡에 왔을 때, 무룡동 613번지 이현락의 집에서 차화순은 이연이를 만났다.
이연이는 1921년 경상북도 경주군 내동면 진현리 744번지에서 여강 이씨 이석천(李錫千)의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당시 호주는 이연이의 할아버지 이을구(李乙久)였다. 이연이의 어머니는 3살 때 별세(別世)했고 아버지는 일본에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숙모 밑에서 큰 이연이는 혼기가 되기 전인 17세에 당시 19세였던 이현락과 1939년 2월 28일 결혼했다. 이후 26년 동안 달곡에서 이현락과 함께 살면서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이현락은 아이를 낳기 위해 다방면에 걸쳐 알아봤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연이가 아이를 낳기 위해 편수장이가 만들어준 작은 도끼날은 아직도 차화순의 집 삼층장 속 열쇠꾸러미에 달려있다. 결국 이현락은 1964년 차화순과 결혼하게 되었다.
결혼한 차화순은 큰방과 머릿방을 오가며 지냈다. 당시 이연이는 차화순을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시아버지 이기헌과 시어머니 이차년은 차화순이 결혼을 통해 이현락의 집에 들어오기 전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차화순은 이연이를 시어머니처럼 모시고 살았다. 그리고 차화순에게 농사일이 주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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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화순은 1966년 이동립을 낳았다. 이때부터 차화순의 집에서 아래채를 만들기 위한 준비를 했다. 1967년 아래채가 현재의 자리에 완성되었고, 이문화가 태어났다. 아래채는 세 칸이었는데, 부엌은 소의 자리, 끝방은 일꾼의 자리가 되었고, 가운데 사랑방은 이연이가 살게 되었다.
차화순은 이때부터 머릿방에서 기거하면서 이길화[1969], 이수경[1972], 이동설[1975]을 차례로 출산했다. 차화순이 아이를 낳은 때부터 육아는 주로 이연이의 몫이었고, 차화순은 농사일에 매진했다. 이현락은 자녀들의 교육을 담당했다. 이현락의 교육은 엄해서 신발 벗어 놓는 것까지 꼼꼼하게 가르쳤다. 이현락의 가족들은 물건 하나를 허투루 쓰는 법이 없었다. 차화순의 자녀들은 지금도 이현락의 불호령을 기억한다. 한편 농사일이 바쁠 때는 너나 할 것 없이 가족이 모두 논밭에 나갔지만, 새벽부터 일을 시작하는 것은 차화순이었다.
한편 차화순의 자녀들은 이연이를 어머니라 불렀다. 아버지 이현락의 가르침도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지만, 학교를 다닐 때 자녀들의 여러 사정을 주로 이연이가 돌봐주었다. 이동립이 중학교에 진학해 울산 시내로 자취방을 잡았을 때 자취방 청소를 하고 방에 들어설 가구를 고른 것도 이연이였다. 딸들이 학교를 다니는 뒷바라지도 이연이가 주로 했다. 다섯 명의 자녀들은 두 어머니를 차별 없이 대했으며,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 3) 불교로의 귀의
이연이와 이현락은 신흥사에 예불을 드렸다. 달곡과 신흥사의 거리는 직선거리로 약 6.3km, 2016년의 도로로 돌아가면 12.4km 정도이다. 이연이와 이현락이 예불을 드리러 가던 당시에는 집 뒤편의 산과 능선을 따라 신흥사로 갈 수 있는 고갯길이 있었다. 고갯길을 따라 신흥사로 가는 길은 약 8km정도이다. 이연이와 이현락은 이 거리를 걸어서 신흥사를 다녔다. 아침 일찍 신흥사에 다녀오면 한나절은 금방 지나갔다. 특히 이연이는 정성을 다해 예불을 드렸으나, 몸이 불편해진 이후로는 절에 잘 다니지 못했다.
그러자 차화순이 대신 절에 다니기 시작했다. 1981년에는 인도를 포함한 불교성지 순례를 다녀왔는데, 그 때 산옹(山翁)스님에게서 받은 법명은 선심행(善心行)이었다. 이후에도 꾸준히 신흥사를 다니며 예불을 드렸다. 차화순은 신흥사를 꾸준히 다니는 이유를 '업장을 소멸하려고'라고 했다.
이후 1985년 5월 20일 이연이가 별세했다. 당시에는 차화순의 집에 전화가 없어 구장댁에 부탁하여 막내아들에게 전화를 돌렸다. 차화순의 집 아래채에 영정을 걸고 마당에 자리를 펴서 조문객을 맞았다. 자녀들의 친구들이 조문을 많이 왔으며, 이연이의 일가친척들도 조문했다. 이연이가 별세한 이후 아래채는 자녀들이 이용했다. 이현락은 이연이가 사망한 이듬해인 1986년 12월 12일에 차화순과의 혼인을 신고했다.
# 4) 이현락의 별세(別世)와 그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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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락은 2007년 9월 20일[음력 8월 3]일 별세했다. 사망 전까지 식사도 거르지 않고 책을 보면서 지냈기 때문에 이현락의 별세는 갑작스러웠다. 차화순이 홀로 있을 때 돌아가셔서 아들과 사위들에게 전화를 해 수습을 하고 상례가 진행되었다.
이현락의 상례는 집에서 이루어졌다. 이현락은 평소에도 안치소에 들어가고 싶지 않으니 마당에서 장사 지내달라고 했고 자녀들은 그 의견을 존중했다. 아래채의 사랑방 문 위에는 이현락의 영정이 걸렸다. 이 영정은 급하게 이현락의 사진을 구해 확대해서 사용했었다. 그런데 방문하는 사람들이 사진이 너무 젊어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했고, 이동립이 최근에 찍었던 증명 사진을 찾아내 다시 만들었다. 마당은 자리를 깔고 천막을 쳐서 상을 깔고 모자란 상은 주변 집에서 빌려 조문객을 맞았다. 물건을 들거나 치우는 일은 이동립과 같은 구치소에서 일하는 동료들이 도와주었다. 큰사위 장석필이 다니는 회사에서는 큰 버스 한 대를 빌려 단체로 조문을 왔다. 그 밖에 차화순이 다니던 신흥사와 막내아들 이동설이 다니는 서울대 등 각지에서 조문을 왔다.
이후 이현락의 49재 때는 가족이 모두 신흥사에 올라가 재를 지냈다. 이현락이 별세한 후 차화순은 홀로 지냈다. 이동립은 울산에 살면서 필요한 일이 있을 때나 주말에 차화순의 집에 들렀다. 차화순은 신흥사에 더 자주 올라갔고, 신흥사에서 열흘 정도 머무르면서 봉사공양을 하고 내려오기도 했다. 차화순의 자녀들은 이전보다 안부전화를 자주 하게 되었고, 방문도 자주 했다. 차화순의 칠순잔치는 식당을 빌려서 성대하게 치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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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차화순의 현재
차화순은 현재 울산광역시 북구 달곡1길 122에서 살고 있다. 봄, 여름, 가을에 걸쳐 차화순의 집 근처에 있는 밭에서 밭일을 하며, 달곡 사람들과 함께 일하기도 한다. 일하는 때 이외에는 집에서 불경을 외거나 TV를 보며 쉰다. 특별히 초하루나 토요일, 대회(大會)가 있을 때는 신흥사에 가서 예불을 드린다. 명절 때는 자녀들이 가족을 데리고 차화순에 집에 들르며, 차화순의 형제자매도 차화순의 집에 들를 때가 있다. 자녀들이 들리지 않는 때에는 꼬박꼬박 차화순에게 전화하며, 차화순은 누가 몇 번째로 전화했는지 순번을 세서 자녀들을 놀리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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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동립의 이야기 이동립은 1966년 11월 27일 태어났고 1973년에 무룡분국민학교에 입학했다. 무룡분국민학교는 이동립이 다니면서 강동국민학교 무룡분교로 바뀌었다. 1979년 무룡분교를 졸업하고 강동중학교를 다녔다. 이동립은 중학교 때부터 키가 크고 잘생겨서 학교에서 인기가 많았다고 전한다. 1982년에는 중앙고등학교를 다녀 1985년 졸업했다. 이동립이 중앙고등학교를 다닐 때는 마산에서 자취를 했는데, 항상 뒷바라지를 해주던 이연이는 당시에는 몸이 좋지 않아 자취하는 자리를 정리해주지 못했다. 그래서 차화순이 자취에 필요한 물건을 골라주기 위해 마산까지 이동립을 따라갔다. 1983년에는 차화순의 집에 경운기가 들어왔는데, 이 경운기의 운전과 관리를 이동립이 하게 되었다. 그 후 이동립은 경운기를 이용해 집안일을 자주 도왔다. 1990년부터 1992년까지 2년간의 공부 끝에 이동립은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게 되었다. 당시 울산시 중구 태화동에서 동생들과 같이 자취하면서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다 신흥사에 속한 교원에서 생활하면서 공부했다. 산옹(山翁)스님은 당시 이동립을 잘 보살펴 주었고, 이동립은 교원에서 공부하면서 가끔 산짐승을 잡으러 다니곤 했다. 1991년부터 신흥사가 대대적인 중건에 들어갔고, 1992년 8월 이동립은 공무원채용후보자로 등록되었다. 합격한 뒤 하산할 때 산옹스님이 입사(入社)에 도움이 되라고 자금을 마련해 주었으나 이동립은 그 돈을 복전함에 몰래 넣어두고 나왔다. 한편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뒤 이동립은 차화순의 집을 본격적으로 개축할 준비를 했다. 이전부터 동생들과 함께 이현락에게 집을 개축하자는 이야기를 했지만 이현락은 줄곧 반대했다. 이현락의 아버지인 이기헌이 지어준 집을 헐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이동립은 집의 형태를 그대로 유지한 채 내부를 개축했다. 동생들과 함께 당시 500만 원 정도를 모아 본채와 아래채를 개축했다. 이후 1993년부터 공무원이 되어 구치소에서 일하게 되었다. 공무원이 된 이후 지금의 아내인 1967년생 문미향을 만나 1997년 태화호텔에서 결혼했다. 결혼할 때 차화순의 집에서 소를 한 마리 잡아서 음식을 해 가져온 처남을 둔 이동립은 한 명 한 명 소홀하게 대하지 않았다. 문미향은 또 차화순과 이현락에게 깍듯하게 대했다. 차화순은 문미향이 제사음식을 잘 하는 것을 첫번째로 꼽았다. 그리고 1999년 장손 이진희가 태어났다. 이현락은 첫 손자 장성원이 나왔을 때보다 더 기뻐했다. 매일 손자를 어루만졌고, 보행기에 태워 마을을 돌곤 했다. 당시 마을을 한바퀴 돌면서 찍은 사진이 아직 남아있다. 2001년에는 둘째 이원희가 태어났다. 이원희는 태어날 때부터 식욕이 남달랐다. 차화순은 이원희가 명절에 차화순의 집에 놀러오면 아침ㆍ점심ㆍ저녁을 다 먹고도 밤늦게 혼자 일어나 라면을 끓여먹었던 것을 기억한다. 이동립의 집에서도 간식을 자주 사먹는데, 삼겹살을 한 줄만 사와서 혼자 구워먹기도 했다. 2013년에는 문미향이 달곡캠프를 계획하고 달곡에 개장했다. 이동립과 결혼할 때 유치원 교사를 했던 문미향은 결혼 후에도 직업을 유지했었다. 유치원 원장까지 올랐다가 다른 사람에게 유치원을 넘기고 난 뒤 달곡캠프에서 아이들을 대상으로 체험활동을 진행했다. 달곡캠프는 자동차를 주차하고 옆에 캠프를 설치할 수 있는 캠핑장으로 운영되었고, 샤워시설과 화장실을 구비했다. 달곡캠프는 2016년에도 운영 중이다. ![](/media//archive/photo/RD35S/service/RD35S_I465130.PNG) # 2) 이문화의 이야기 이문화는 1969년 1월 10일로 주민등록상 기재되어 있다. 그러나 큰아들 이동립과 문미향, 이문화의 나이 차를 계산하면 1967년에 태어났다. 1976년 강동초등학교 무룡분교에 입학했고, 1982년 졸업하고 강동중학교에 들어갔다. 1985년에는 울산여자고등학교를 다녔다. 이 해에는 이연이가 별세했는데, 학교에서 이문화의 친구들이 조문을 많이 왔다.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차화순의 집과 학교간의 거리가 멀어 울산에서 자취생활을 했다. 이문화는 1988년 울산여자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졸업한 뒤 이문화는 주리원 백화점[남구 남산동 1521-1]에 재직했다. 재직할 당시 백화점에 있던 사은품이나 물건들을 차화순에게 많이 선물했다. 차화순의 집에는 이문화가 주리원 백화점에 다닐 당시 받았던 윷 묶음이 아직 남아있다. 이후 중앙고등학교 서무과에 재직했다. 회사에 다니는 동안 이길화와 이수경이 같이 자취를 하기도 했다. 1993년은 이문화가 장석필과 결혼한 해이다. 이문화는 중앙고등학교 서무과에 재직할 때 이동립의 소개로 장석필을 알게 되었다. 이후 사귀게 되었지만, 차화순과 이현락은 결혼을 반대했었다. 이문화와 장석필은 3년간 가족들을 설득했고, 가족들 또한 결혼을 성사하는 방향으로 기울었다. 결정적으로 이기헌의 제삿날 이문화가 장석필과 함께 이현락을 설득해 결혼하게 되었다. 결혼한 뒤 이문화는 울산에서 살다가 장석필이 일하는 SK에서 대전에 대덕연구소를 완공하자 부부가 함께 올라갔다. 아파트를 장만하고 시어머니, 장석필의 누나와 함께 살면서 1995년 장석원, 1996년 장호원을 낳았다. 대전에서 살게 된 후에는 이문화와 장석필이 명절 때마다 달곡으로 내려왔다. 내려오지 않는 때에는 전화로 차화순의 안부를 물으며, 필요한 물건을 때마다 구입해 차화순에게 부친다.특히 차화순의 옷은 이문화가 신경써서 골라보내며, 화장품도 좋은 것을 구해 보냈다. 이문화의 가족이 여행을 가면 꼭 기념품을 사서 이현락과 차화순에게 주었다. 장석필도 명절에 차화순의 집을 들렀으며, 차화순이 생일잔치를 연 후로는 생일잔치도 참여했다. 이현락의 별세 때도 3일장을 잘 치를 수 있도록 열심히 도왔다. ![](/media//archive/photo/RD35S/service/RD35S_I465131.PNG) # 3) 이길화의 이야기 이길화는 1969년 12월 3일 태어났다. 1976년 강동국민학교 무룡분교에 입학했고, 1982년 졸업했다. 1985년 강동중학교를 졸업했고, 울산여자상업고등학교에 입학해 1988년 졸업했다. 이길화는 학창시절 놀기도 잘 놀았지만 공부도 잘했다. 학교에서 우수상을 받기도 했고, 성적도 좋았다. 졸업한 해인 19세에 대우증권[포항시 죽도2동 203-10]에 들어가 30세가 넘은 2000년대까지 다녔다. 이길화는 꾸미고 다니기를 좋아했으며 성격이 차화순을 닮아 시원시원했다고 한다. 대우증권에 다닐 때는 당시 비싼 가전제품이었던 오디오나 TV, 테이블 등을 차화순에게 선물했다. 1998년에는 연애로 만난 이희우와 결혼했다. 차화순은 이희우가 인사를 올 때부터 마음에 들었다. 이길화와 같은 1969년생이었으며 성격이 시원한 것도 닮았다. 결혼한 이후에는 이희우가 명절 때 찾아와 차화순의 집을 잔치분위기로 만들어주기도 했다. 이길화는 2000년 이상문을 낳았다. ![](/media//archive/photo/RD35S/service/RD35S_I465132.PNG) # 4) 이수경의 이야기 이수경은 1972년 6월 7일에 태어났다. 1979년 강동국민학교 무룡분교를 입학했다. 1985년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강동중학교에 입학했다. 1988년 강동중학교를 졸업한 뒤 울산여자상업고등학교를 다녀 1991년 졸업했다. 이수경은 국민학교 때부터 공부를 잘해 학교에서 상을 많이 타왔다. 국가기술자격증도 여러 개를 보유하고 있다. 차화순의 집에 이수경이 획득한 부기 3급, 주산 3급, 한글타자 3급, 워드프로세서 3급 자격증이 남아있다. 차화순은 이수경에게 공부할 수있는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지 못한 것을 지금까지도 아쉬워한다. 이수경이 울산여자상업고등학교를 다닐 때부터는 언니들과 함께 자취생활을 시작했는데, 태화동, 우정동, 몽정, 반구동으로 이사를 다녔다. 1996년에는 울산 남구 삼산동에서도 살았다. 이사를 다니면서 울산대학 경영학과 2년을 다니고 졸업한 뒤 울산 방어진 농협에서 2년을 근무했다. 이후 2년제 육아교육과를 졸업해 유치원 선생을 하면서 통신대학교 4년을 더 다녔다. 이수경과 김성원은 2000년에 결혼했다. 이수경은 울산대학교를 다닐 때 김성원을 만났고, 연애를 통해 결혼했다. 결혼한 뒤 김성원이 다니는 ST모터스 회사와 가까운 부산에서 살았다. 김성원은 차화순에게도 좋은 사위였지만 이진희, 이원희에게도 좋은 삼촌이 되었다. 차화순의 집에 김성원이 오면 이진희, 이원희와 함께 놀러 다니기도 하고 낚시도 즐겼다. 2009년에는 이수경이 김민준을 낳았다. 김민준을 낳을 때는 김성원의 사정으로 산달에 차화순의 집에 머물렀다. 차화순은 이수경에게 머릿방을 내어줬고, 이수경은 머릿방에 에어컨을 설치했다. 김민준을 낳은 이후에도 이수경과 김성원은 자주 차화순의 집을 들른다. 이건희가 태어난 뒤로는 김민준과 이건희가 단짝이 되었고, 김성원도 장난감을 사올 때 김민준과 이건희 둘의 장난감을 같이 산다. ![](/media//archive/photo/RD35S/service/RD35S_I465133.PNG) # 5)이동설의 이야기 이동설은 1975년 9월 1일에 태어났다. 1982년 강동국민학교에 입학하고, 1988년 졸업했다. 이동설이 국민학교에 다니던 때에 이연이가 별세해서 학교에서 당시 구장의 전화를 받고 집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같은 해 강동중학교에 들어가 1991년 졸업하고, 울산현대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울산현대고등학교를 1993년 졸업한 뒤 울산대학교 생명과학과에 들어가 2001년 졸업하고, 2003년 울산대학교 생명과학과 대학원까지 마쳤다. 국민학교 때부터 이동설은 각종 상을 많이 수상했고 울산대학교에서는 장학금을 받았다. 울산대학교 대학원 석사졸업 이후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에 입학해 2009년에는 우수논문상도 받았다. 이동설은 1996년 충남 논산에서 입대한 뒤 강원도 화천에서 군대 생활을 했다. 당시 친구들과 여러 통의 편지를 주고 받았으며, 가족들과도 편지를 했다. 이동설의 아버지 이현락도 이동설에게 편지를 보내 안부를 전해싿. 이동설은 1980년생 이지현과 학교에서 만나 사귀었으며, 2009년 결혼했다. 이동설은 2007년 이지현과 결혼을 약속하고 상견례 날짜를 잡았었다. 그러나 이현락의 별세로 결혼이 미뤄졌다. 이지현의 부모님은 차화순을 위해 결혼선물에 신경을 많이 썼다. 이지현이 이바지음식과 예단을 두 차에 나눠 싣고 차화순의 집을 올 정도였다. 결혼은 울산에서 진행했으며, 당시 서울대학교에 다니던 이동설의 교수님들이 울산까지 내려왔다. 결혼한 이동설과 이지현은 서울에서 살았으며, 2011년에는 이건희가 태어났다. ![](/media//archive/photo/RD35S/service/RD35S_I465134.PNG)
차화순의 하루 일과는 4시부터 시작한다. 이것은 시집온 뒤부터 지금까지 큰 변동이 없이 지속되었다. 4시에 큰방에서 일어난 차화순은 전날 식사한 그릇을 설거지한 후 기제사 때 모이는 자녀들이 먹거나 가져갈 수 있도록 김치를 만들기 시작했다. 7시가 되어 아침식사를 준비하면서 자녀들과 함께 마실 단술[식혜]에 쓸 엿기름을 짰다. 8시에 식사준비를 모두 끝마치고 아침을 먹었다. 8시 50분경 식사를 끝마친 차화순은 욕실에서 세수를 하고 머릿방에서 단장을 시작했다. 9시 30분경에는 관절약[세레브렉스]을 복용했다.2008년 무릎수술 이후 무릎이 아팠던 적은 없지만 자녀들은 꾸준히 약을 복용할 것을 권한다. 11시가 되어 차화순은 단술에 쓸 단술밥을 앉혔다. 차화순의 집은 명절이나 행사 때 사람들이 많이 모이기 때문에 8인분의 전기압력밥솥 외에도 대형 전기 밥솥이 있다. 당일에도 식혜를 대량으로 만들 예정이어서 단술밥을 전기밥솥에 앉혔다. 12시 정각이 되어 차화순은 자녀들이 쓸 이불이 눅눅하지 않도록 앞마당의 경운기 위에 이불을 전부 꺼내 널어놓았다. 12시 7분경에는 8월 15일에 수확해서 털어놓은 깨를 고르는 작업을 진행했다. 12시 10분에 점심식사를 준비해 25분에는 점심을 먹었다. 오후 1시 20분에 점심식사를 끝내고 끝내고 차화순은 밭에서 뜯어온 고구마줄거리를 다듬기 시작했다. 오후 3시 26분에는 1차적으로 숙성된 단술의 간을 보고 설탕을 더했다. 단술의 간을 맞춘 차화순은 3시 26분부터 4시까지 본채와 아래채의 청소를 시작했다. 4시에 차화순의 청소는 모두 끝났으며, 차화순은 달곡캠프로 올라가 캠프장 주변에 난 잡풀을 제거하는 작업을 5시 30분까지 지속했다. 캠프장 주변 정리 작업을 마친 차화순은 집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5시 55분에 박순자 가옥으로 출발했다. 이 날은 박순자가 마을사람들에게 기제사 때 올린 음식으로 저녁식사를 대접하기로 했다. 저녁식사에는 조일춘 내외와 박순자, 차화순, 그리고 조사팀 4명이 모였고, 오후 6시 30분 저녁식사를 시작해 오후 8시에 끝났다. 박순자 댁에서 출발해 8시 5분에 집에 도착한 차화순은 전기밥솥에서 단술을 냄비에 옮겨 끓이면서 간을 맞췄다. 뉴스를 보며 콩나물을 다듬던 차화순은 즐겨보는 드라마 '별난가족'이 시작하는 8시 25분에 채널을 변경했다. 드라마를 다 본 뒤 9시가 되어 불을 끄고 큰방에서 취침했다.
차화순의 일상생활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그 중 첫 번째는 집안에서 하는 활동이다. 차화순의 일과로 보았을 때는 바깥 활동보다 시간을 덜 할애하지만, 한가지의 활동을 마치고 다음활동을 하기 위한 연결활동으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예를 들어 바깥활동을 마치고 돌아온 차화순이 집 안으로 들어와 세탁이나 식사를 하고, 환복을 한 후 다음 바깥활동이나 특별활동을 진행하는 식이다. # 1)취침 차화순은 취침시간의 대부분을 큰방 혹은 머릿방에서 보낸다. 취침하는 공간은 계절마다 다른데, 겨울이나 봄가을의 주요 취침공간은 큰방이다. 머릿방에서 취침하는 경우는 보통 여름이며, 그 중에서도 열대야나 기온 상승 등으로 더운 때에 주로 취침한다. # 2)환복 및 화장 차화순이 하루에 사용하는 옷은 2벌에서 4벌 정도이다. 바깥 활동이 많은 차화순은 밭일로 인해 옷이 더러워지거나 땀에 젖으면 바로 갈아입으며, 다른 집이나 신흥사로 외출을 해야 할 때에는 반드시 외출복으로 갈아입는다. # 3)취사 및 식사 차화순의 식사시간은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 이것은 차화순의 일상생활이 주로 밭일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아침에 밭에서 할 일이 많은 경우 차화순은 밭일이 끝난 이후에 아침식사를 한다. 점심식사 이후부터 저녁식사 전에 간식을 먹는 것이 일반적이나, 바깥일이 많으면 간식을 거르기도 한다. 차화순은 부엌이나 큰방에서 식사하며 보통은 직접 조리한다.
# 1) 밭일 차화순이 관리하는 밭은 네 곳이다. 집의 앞과 뒤에 하나씩, 그리고 달곡캠프앞의 밭과 달곡지[달곡저수지] 뒤의 2단으로 된 밭이다. 약 600평 정도의 공간이며, 계절마다 심는 작물이 다르다. 이외에도 입구 왼편에 이세걸(1937년생)의 밭 중 길 바로 옆에 위치한 작은 구역을 사용하고 있다. # 2) 마당일 차화순이 마당에서 주로 하는 일은 작물의 가공작업이다. 작물은 차홧누이 재배하여 수확한 밭작물과 소작해서 받은 벼, 달곡마을 주민들과 함께 나눈 작물들이 모두 포함된다. 마당에서 주로 하는 일은 가공작업이지만, 마당을 관리하는 일은 바닥쓸기와 풀뽑기이다. # 3) 장보기 달고그이 주민들은 식재료나 농업용품 등이 필요할 때 장날을 맞춰 한꺼번에 장을 본다. 차화순의 경우 정자장을 주로 이용하며, 좋은 물건이나 정자장에서 팔지 않는 물건을 사야 할 경우에는 울산장을 들른다. 이외에도 차화순은 이동판매차량에서 필요한 식재료를 구입하는 경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