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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옹진군 연평면 남부리 살림살이

주제 김재옥·노숙자 부부의 살림살이
조사 살림살이 이야기, 공간과 살림살이, 사진, PDF

김재옥의 유년 시절과 한국전쟁

닭섬에서의 유년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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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옥(1937년생)은 황해남도 강령군 신암리의 동남쪽에 위치한 닭섬에서 김세환과 서 씨 사이의 5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김재옥의 아버지 김세환은 해주의 조천물 출신이며, 지관이었던 김재옥의 할아버지와 달리 어부가 되었다. 김세환은 생업인 어업이 잘 되는 곳을 찾아 육세미, 가막개, 보현 등으로 수차례 이주를 거듭하였고, 마지막으로 정착한 곳이 닭섬이다. 김재옥의 어머니는 김세환과 해주에서 혼인을 하여 장남 김재준과 장녀 김입분을 낳고, 남편을 따라서 수차례 이주 끝에 닭섬에 정착하면서 김재옥, 김재복, 김숙자를 낳는다. 닭섬은 해안선을 따라 걸으면 한 시간 정도밖에 안 걸리는 작은 섬으로서, 거주 가구가 15가구 전후에 불과했다. 그래서 마을에는 논농사를 생업으로 하는 가구가 없었으며, 가족이 먹거나, 육지에 있는 시장에 팔기 위한 목적으로 기르는 채소와 잡곡 등의 밭농사가 전부였다. 반면, 섬 주변의 바다에는 어종이 풍부하고, 해안을 따라 형성된 넓은 갯벌이 펼쳐져 있어서 어업이 발달하였다. 닭섬 주민은 바다에서 어획한 생선과 갯벌에서 채취한 어패류 등의 수산물을 손질해서 가막개에서 5일에 한 번 씩 열리는 장에 가서 내다팔거나, 섬 가까이에 사는 육지 사람들의 식량과 교환하면서 생활하였다. 이처럼 풍족한 어업 환경 덕분에 어부였던 김세환은 닭섬에 정착한지 2년 만에 낡은 집을 허물고, 해주 목수를 고용해서 새로 집을 크게 지을 만큼 안정적인 기반을 닦을 수 있었다. 김재옥이 태어났던 시기는 일제의 탄압이 극에 달했던 시기였지만, 50여 명의 주민이 사는 작은 섬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작은 규모의 섬이었기 때문에 경찰이 상주하지 않았고, 1년에 몇 번 찾아오는 일도 없었다. 오히려 이러한 이점으로 육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일제의 공출을 피하기 위해서 닭섬에 재물이나 물자를 숨기러 오기도 하였다. 이처럼 풍족하고 평화로운 섬에서 김재옥은 동네 친구들 섬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놀거나, 바다에서 헤엄치는 것이 일상이었다. 놀다가 배가 고프면 갯벌에서 낙지를 잡아먹다가 해가 질 무렵에야 집에 들어가면 그만이었다. 이처럼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온종일 놀던 김재옥은 12세 무렵이 되면서부터 아버지를 도와 뱃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아버지의 배를 타기는 했지만, 이때부터는 아버지를 도와서 바다에 낚시를 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김재옥은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일하는 것이 노는 것보다 더 즐거웠다. 김재옥은 낚시하며 시간 가는 줄 몰랐고, 잡아온 생선을 어머니가 손질해서 내다 팔면 돈과 식량이 되는 것이 무척 좋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생선을 팔고, 생필품을 사기 위해서 가깝게는 가막개부터 멀리는 서울까지 육지 구경을 하러 다니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다. 김재옥은 작은 섬에서 벗어나 넓은 바다에서 일하면서 돈을 버는 것이 좋았고, 무엇보다 배를 타고 닭섬과 떨어진 육지로 나갈 수 있어서 더 좋았다. 그래서 김재옥은 이때부터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어부가 되겠다고 생각했고, 줄곧 아버지의 일을 도우며 뱃일을 배웠다. 그런데 어느 날, 김재옥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아버지와 바다에서 낚시를 하고 있는데 마을 사람 한 명이 배로 다가와 아버지에게 귓속말로 집안 소식을 전했다. 아버지는 김재옥에게 배를 맡기고 마을 사람과 함께 곧장 집으로 향했다. 무슨 영문인지 몰랐던 김재옥은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해안가로 물이 들어올 때를 기다렸다가 배를 몰아서 정박한 뒤에 집으로 갔다. 김재옥이 안방에 문을 열었을 때 어머니가 병환으로 누워있는 것을 보고서야 아버지가 서두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갑작스럽게 집안에 닥친 전염병으로 김재옥은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그의 어머니는 병을 이기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이후 가족은 김재옥의 어머니의 시신을 마을 한쪽에 자리한 산 중턱에 매장하고, 장례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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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발발과 김재옥 가족

풍족하고 평화로운 삶이 계속될 것이라고 여겼던 김재옥에게 어머니의 죽음 이후 더 큰 위기가 닥친 것은 1950년 6월 25일이다. 이날은 한반도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을 고통으로 몰고 갔던 한국전쟁이 일어난 날이다. 광복 이후 한반도는 38선을 기준으로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고, 김재옥이 살던 닭섬은 한반도 서쪽의 남북을 경계로 하는 옹진반도와 가깝게 위치하였다. 옹진반도는 전쟁이 일어나기 이전에도 남북 간의 교전(交戰)이 빈번했던 지역이었다. 하지만 육지와 떨어져 고립된 닭섬에서는 이러한 심각한 상황을 전혀 알 수 없었다. 닭섬의 주민들에게 한국전쟁의 소식이 전해진 것은 전쟁이 일어난 25일 오후가 되어서였다. 간조로 육지와 연결되는 길이 열렸을 때 육지에서 근무하던 순경 두 명이 닭섬으로 건너와 섬 주민들에게 북한이 전쟁을 일으켰고, 옹진반도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음을 알렸다. 그리고 혹시 모를 북한군의 습격에 대비해서 다른 곳으로 피난 갈 준비를 하라고도 하였다. 순경들이 전해준 소식에 닭섬 주민들은 불안했지만, ‘설마 이곳까지 북한군이 쳐들어오겠냐?’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잠시 후에 군부대가 있는 서쪽 편에서 큰 폭발음이 들렸고, 뒤이어 불이 붙은 드럼통이 마을에 떨어졌다. 이에 닭섬 주민들은 전쟁이 났음을 실감했고, 마을이 습격받는 줄 알고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피난을 떠났다. 당시 옹진반도에는 국군 17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17연대는 1949년 11월 15일에 옹진 2장 지구 전투사령부 예하로 옹진반도를 경계하는 임무를 맡았고, 1950년 3월 1일에 육군본부 직할의 독립연대로 개편되었다. 1950년 6월 25일 오전 4시, 38선 전반에 걸친 북한군의 대대적인 남침이 시작되자, 17연대가 담당한 옹진반도를 향해서 북한군 6사단 14연대와 38경비 제3여단으로 구성 된 총병력 1만 5천의 병력이 38선을 넘었다. 국군의 17연대보다 몇 배의 북한군이 옹진반도를 점령하려 쳐들어 온 상황에서 아군의 방어가 힘들게 되자, 국방부 장관이 17연대의 철수를 명령하였다. 17연대는 사곳리와 부포리로 분산하여 후퇴를 시행하였고, 전쟁 발발 3일째인 6월 27일에 병력의 90%가 인천과 군산으로 후퇴하였다. 이러한 급박한 상황에서 김세환은 가족을 데리고 연평도로 피난을 떠나려고 했지만, 짙은 안개 때문에 어려웠다. 또한 낚시배에 가족과 식량, 가재도구 모두를 실어서 다른 먼 곳으로 피난가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김세환은 차선책으로 닭섬의 동쪽에 위치한 대수압도로 피난을 떠났다. 김재옥의 가족이 대수압도에 도착했을 때 이곳의 상황도 닭섬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북한군이 쳐들어오면 전쟁터로 끌려가거나, 죽임을 당한다는 소문이 섬 전체에 퍼졌다. 대수압도의 젊은 사람들은 북한군의 습격을 피하고자 연평도나 남쪽의 다른 지역으로 피난을 떠났고, 그나마 섬에 남아있던 주민은 고된 피난 생활을 견디기 힘든 노인이 대부분이었다. 대수압도에 남아있던 사람들은 다른 지역에서 피난 온 사람들을 경계하지 않았다. 오히려 갑작스러운 피난으로 머물 곳이 마땅치 않았던 피난민에 자신의 집을 내어주고, 음식까지 대접하기도 하였다. 김재옥의 가족은 예정에 없던 피난으로 인해서 충분한 양의 식량을 챙기지 못했던 탓에 대수압도에서 전쟁이 끝나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김세환은 대수압도에 온 지 3일째 되던 날에 가족을 두고 홀로 배를 타고 닭섬 가까이에 가서 섬의 동정을 살폈다. 김세환은 닭섬에 남아있던 주민을 통해서 북한군의 습격이 없었다는 것을 확인하고, 대수압도에 있는 가족을 데리고 돌아왔다. 김재옥의 가족이 돌아왔을 때는 이미 피난을 떠났던 대부분의 주민이 돌아왔다. 닭섬 주민들은 북한군의 주의를 끌지 않기 위해서 생업을 최대한 자제하며 생활하였다. 1950년 9월 15일에 시작된 인천상륙작전으로 유엔군은 인천 월미도에 기습상륙하고, 그다음 날 인천을 함락시켰다. 인천에 상륙한 유엔군은 9월 26일에 서울로 진입하였고, 9월 29일에 서울을 완전하게 수복하였다. 서울을 탈환한 유엔군은 동해안과 서해안을 따라 진격하면서 10월 1일에는 38선을 넘어 북상하였고, 10월 20일에는 평양을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유엔군의 전과는 삽시간에 퍼졌고, 닭섬 사람들은 유엔군이 북한군을 한반도에서 몰아낼 것이라는 믿었다. 하지만 11월 4일에 중공군이 참전을 선언하고, 병력을 한반도로 투입하면서 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20만 명이넘는 공산군의 공격에 유엔군은 후퇴를 거듭하다가 12월에는 평양이 공산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전황이 유엔군에게 불리해지면서 이북의 수많은 사람이 남쪽으로 피난을 떠났고, 그 중에서 해주와 강령에 살던 사람들의 상당수가 닭섬으로 피난을 왔다. 연평도보다 훨씬 작은 닭섬에 많은 수의 피난민이 몰리면서 마을은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마을에 집이 15채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에 많은 수의 피난민을 모두 수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산기슭에 토굴을 파거나, 밭이나 언덕에 막집을 지어서 생활해야 했다. 또한 피난민 중에 북한의 간첩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어서 사람들 간의 경계심도 커졌다. 이처럼 혼란한 상황에서 식수까지 부족하게 되면서 섬 전체는 큰 위기를 맞게 되었다. 섬에 있던 3개의 우물을 섬 안의 모든 사람이 사용하면서 물이 부족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겨울의 언 땅을 파서 새 우물을 파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마땅한 해결책이 없었던 급박한 상황에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우연한 사건으로 섬의 식수 부족 문제를 해결하는 것 외에도, 닭섬 사람들은 마을의 안정을 위해서 갖은 노력을 하였다. 닭섬의 젊은 사람들은 육지에서 온 청년방위대 대원들과 일종의 자경대를 결성하였다. 청년방위대 대원들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썰물 때 섬이 육지와 연결되는 길목을 지키며, 혹시 모를 북한군의 습격과 북한의 간첩 활동을 막는 것이었다. 이에 청년방위대 대원들은 육지와 연결된 길목에서 가까우면서, 터가 넓은 김재옥의 집에 찾아가 숙소를 제공해달라고 요청했다. 김세환은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였고, 10여 명의 대원이 머무를 수 있도록 안방을 비워주었다. 그들의 가족은 그가 머물던 사랑방에 모여서 생활하도록 하였다. 김재옥은 청년방위대 대원들은 한집에 살았기 때문에 그들의 활동을 직접 보고, 갖가지 무용담을 들으며 생활하였다. 피난민은 집에서 가져온 식량이 동이 나자, 식량을 구하기 위해서 밤중에 고향 집과 주변의 친척들이 사는 곳을 왕래하였다. 이들은 혹시 모를 북한군의 습격을 피하기 위해서 인적이 드문 시간을 택해서 몰래 다녀왔는데, 이때 청년방위대 대원들의 도움을 받아서 함께 다녀오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고향집에서 식량을 가지고 오던 피난민과 대원들이 갑작스러운 북한군의 습격을 받았다.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집에서 가져온 식량을 모두 빼앗기고 말았다. 이러한 사건이 발생하자 닭섬 사람들은 마을의 상황을 북한군에게 전달하는 간첩이 있다고 판단했고, 이에 청년방위대 대원들과 청년들은 간첩을 잡기로 결의하였다. 대원들은 한 주민에게서 섬에서 가까운 육지의 한 민가에 사는 두 여자가 닭섬을 감시하는 것을 보았다는 제보를 받았다. 주민의 이야기에 따르면 이 두 여자가 육지와 섬을 오가는 사람들을 먼발치에서 지켜보다가 사라지는 것을 수차례 목격했다는 것이다. 청년방위대 대원들과 청년들은 이 두 사람을 잡기 위해서 육지로 침투하였다. 혹시 모를 북한군의 습격이나 둘의 저항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야심한 새벽 시간을 택해서 몰래 민 2장가로 접근했다. 집 안에는 주민이 말했던 인상착의의 두 여자가 각자 수류탄 한 발씩을 머리맡에 올려둔 채로 자고 있었다. 대원들은 두 사람이 잠이 깰 틈도 주지 않고 재빨리 제압한 뒤에 손과 발을 묶어서 닭섬으로 데려왔다. 날이 밝아 닭섬 사람들은 간첩이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김재옥의 집으로 몰려들었다. 청년방위대 대원들은 광에 가두었던 두 사람을 마당으로 끌고 나와 집에 모인 사람들 앞에서 이들을 심문하였다. 두 사람은 잡혀 온 뒤로 말을 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했고, 이에 화가 난 사람들이 두 사람을 구타하였다. 며칠 동안의 심문 끝에 두 사람은 간첩이라고 자백했다. 이에 대원들은 백사장에 사람들을 모아 놓고, 이들을 처형했다. 청년방위대 대원들은 처형이 끝난 뒤에 시신을 매장하지 않고, 바다에 던져 버렸다. 며칠 동안 닭섬 앞바다에 떠다니던 시신은 파도에 떠밀려 사라졌다. 닭섬 안에서 전투가 벌어지진 않았지만 김재옥을 비롯한 주민들은 전쟁의 치열함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각 집마다 개를 한두 마리씩 기르고 있었는데, 어느 날부턴가 동네 개들이 팔이나 다리같이 토막 난 시신 일부를 물고 돌아다녔다. 이 시신들은 육지에서의 치열한 벌어진 전투의 전사자들의 시신이 파도에 떠밀려 닭섬의 해안가로 밀려온 것이다, 끔찍한 광경을 보기가 힘들었는지, 아니면 혹시 모를 전염병이 발생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였는지는 모르지만 주민들은 집에서 키우던 개들을 모조리 없애버렸다.



닭섬과 대수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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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평도로의 피난과 생존

청년방위대 대원들과 청년들의 활동으로 닭섬의 치안은 유지되고 있었으나, 섬 밖의 육지의 상황은 이와는 달랐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는 역전되고, 전쟁은 장기화할 조짐이 나타났다. 중공군과 북한군의 연합으로 편성된 공산군은 12월 26일에 다시 38선을 넘어 남진하였고, 해주와 강령은 순식간에 함락되었다. 닭섬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공산군의 습격이 임박한 상황을 인지하고, 하루 빨리 남쪽으로 피난을 떠나기 시작하였다. 다행스럽게도 닭섬 사람들은 이와 같은 상황을 염두에 두고 연평도로 피난을 가기 위한 배 한 척을 정박해 두었다. 하지만 배의 크기에 비해서 피난민의 수가 많아서 연평도를 여러 차례 왕복해서 사람들을 실어 나를 수밖에 없었다. 공산군이 언제 습격해 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한 사람이라도 많이 배에 태워야 했기 때문에 식량과 가재도구를 제대로 챙기지 못한 채 거의 몸만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김세환은 대수압도로 피난 갔을 때 식량을 제대로 챙겨가지 못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또한 그때와 달리 이번에는 겨울이었기 때문에 빈손으로 피난을 떠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김세환은 김재옥과 함께 닭섬에 남아서 식량과 가재도구를 챙겨서 떠나기로 하고, 나머지 가족은 장남인 김재준에게 맡긴 뒤에 먼저 연평도로 피난 시켰다. 가족을 피난시킨 날 밤에 인민군에 의해서 닭섬이 습격을 받게 되었고, 김재옥은 끊임없이 들려오는 포성과 총성에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날이 밝아서 집 밖으로 나왔을 때 끔찍한 광경이 펼쳐졌다. 마을 여기저기에 사람들의 시신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았고, 그 중에서 연평도로 가는 배를 타러가는 길목에 가장 많은 시신이 있었다. 빨갱이 첩자가 섬에 있었던게 틀림없다니까. 섬에 사는 사람들이나 아는 길목을 어떻게 알고 기다리고 있었갔나. 거 길목 옆으로 길게 풀이 나있어. 그 새끼들이 거 숨어있다가 습격할 때 다 죽인거야. 어찌나 많이 죽었댔는지 거기를 지나 려면 시신을 밟고 갔어. 피난민은 연평도로 가는 배를 타러 갔다가 길목을 지키고 있던 북한군의 총격과 포격에 죽임을 당한 것이다. 북한군의 습격으로부터 목숨을 건진 사람들과 청년방위대 대원들이 시신을 매장하려고 했다. 하지만 많은 시신을 매장하기에는 인력이 부족했고, 언제 공산군이 들이닥칠지 모르는 급박한 상황 때문에 그 자리에 흙만 덮어두고 피난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김세환과 김재옥은 서둘러 섬을 빠져나가기 위해서 배로 향했다. 그런데 섬에 정박해놓은 배들이 파손되어 있었다. 간밤에 북한군이 주민들의 발을 묶어 두기 위해서 부순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급박한 상황에서 김세환은 임시방편으로 파손된 곳에 널빤지를 대고, 구멍 난 바닥은 피난을 가려고 챙겨온 두꺼운 이불로 막고 배를 띄웠다. 하지만 과거 처음 피난갔을 때처럼 섬 주변의 짙은 안개 때문에 연평도로 갈 수 없었다. 결국, 이번에도 차선책으로 대수압도로 피난을 떠났다. 다행히도 부자가 힘들게 도착한 대수압도에는 공산군의 습격이 없었다. 김세환과 김재옥은 안개가 걷히면 연평도로 바로 떠날 수 있도록 파손된 배를 수리하였다. 하지만 짙게 깔린 안개는 쉽사리 걷히지 않다가 일주일이 지났을 무렵에야 조금씩 걷히기 시작했다. 아직은 배를 띄우기가 쉽지 않은 환경이었지만 연평도로 먼저 떠난 가족을 생각하며 억지로 배를 띄웠다. 연평도로 가는 동안 안개가 걷힌 덕분에 별다른 문제없이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김재옥이 나중에 들었던 이야기로는 부자가 연평도로 떠났던 날 밤에 대수압도를 공산군이 습격하여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쳤다고 하였다. 부자가 구사일생으로 연평도에 도착했을 때는 섬 전체가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당시 약 2,000여 명의 인구가 살던 연평도에 10,000명이 넘는 피난민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연평도에 주민의 수보다 많은 피난민이 몰리면서 마을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전쟁 상황에서 섬의 주민들이 피난민을 도와줄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이에 피난민은 추위로부터 몸을 지키기 위해서 임시방편으로 해안가의 자연 동굴이나 산기슭에 막을 짓고 생활하였다. 이러한 열악한 상황에서 연평도 내 식량과 식수가 부족하여 많은 수의 피난민은 기아에 시달렸고, 비위생적인 주거환경으로 인해서 전염병에 걸리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와 같은 상황은 당시의 신문 기사를 통해서도 알 수 있었다.



김세환 김재옥의 피난 경로


피난민 부부의 연평도에서의 삶

김재옥·노숙자의 결혼

군을 제대하고 동방파제 공사에 참여하고 있을 때, 김재옥은 노숙자와 결혼을 하였다. 노숙자는 4세 때 해주에서 연평도로 피난 온 피난민이다. 노숙자의 어머니는 노숙자를 낳은 뒤에 돌아가셨고, 이후 아버지는 다른 사람을 만나서 재혼을 했는데 현재 노숙자의 어머니다. 노숙자의 아버지는 연평도로 피난 와서 뱃일을 하였고, 노숙자의 어머니는 집안에서 살림을 하였다. 노숙자는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를 도와서 동생들을 돌보면서 갯벌에서 일을 하며 생계를 도왔다. 당시 대부분의 집안의 장녀들이 그러했듯이 노숙자는 가족을 위한 헌신적인 삶을 살았고, 이로 인해서 학교에서의 교육을 받지 못했다. 김재옥과 노숙자를 맺어준 사람은 노숙자의 어머니이다. 김재옥이 군복무 시절 휴가를 나왔을 때 노숙자의 어머니가 찾아와서 그에게 자신의 딸과 연을 맺으면 어떻겠냐며 의중을 물었다. 김재옥은 노숙자를 만나본 적도 없었지만, 자신에 대해서 알아보고 들어온 혼담이 싫지 않았다. 하지만 군복무 중이었기 때문에 확답하기가 힘든 상황이었고, 이를 알고 노숙자의 어머니는 딸에게 편지 한 통만 써주면 제대할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하였다. 이에 김재옥은 노숙자에게 편지를 썼고, 얼마 뒤에 부대로 복귀하였다. 군복무를 마치고 연평도로 돌아온 김재옥이 동방파제 공사를 할 때, 형 김재준이 김재옥을 찾아와서 노숙자와의 혼담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알고 보니 노숙자의 아버지가 김재준이 선장으로 일하는 배의 기관장이었다. 김재옥과 노숙자는 연평초등학교에서 결혼식을 치르고 부부가 되었는데 이때 김재옥이 29세, 노숙자가 19세였다. 김재옥은 결혼식 때 입을 예복을 구입하고, 드레스를 대여해왔다. 두 집안 모두 이북에서 피난 온 피난민이었기 때문에 친지들이 많이 참석하지 못했다. 재옥은 결혼식을 하기 얼마 전 동방파제 공사가 끝나 고기잡이 일을 다시 시작하였다. 과거보다 연평도에서의 조기 어획량이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벌이가 괜찮았고, 김재옥이 가장 잘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큰 고민이 없었다. 김재옥과 노숙자는 작은 집에 세를 얻어서 신혼살림을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한 달 뒤에 김재옥은 조기잡이를 위해서 흑산도로 떠났다. 노숙자는 김재옥이 조기잡이를 위해서 집을 비운 집을 혼자 힘으로 살림을 꾸리며 생활했다. 부부는 결혼한 지 2년 되던 1967년에 장남 김영식을 낳고, 2년 뒤인 1969년에 차남 김동식을 낳았다. 부부는 두 아들이 장성해서 가정을 꾸리는 것에 크게 만족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아쉬움도 있었다. 김재옥·노숙자 부부는 두 자녀를 잘 키우기 위해서 부지런히 노력하였다. 김재옥이 바다에서 열심히 배를 타며 일했고, 노숙자는 이웃 주민이 운영하는 두부 공장에 취직해서 두부 만드는 일을 했다.



김재욱 노숙자의 결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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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1 월 또 다시 피난을 떠나다

김재옥·노숙자 부부에게 있어서 한국전쟁은 큰 아픔이다. 그들은 전쟁으로 인해서 소중한 고향과 가족을 잃었기 때문이다. 특히 김재옥은 당시의 끔찍한 기억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 큰 아픔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처럼 우여곡절 끝에 연평도를 제2의 고향으로 삼고 60년을 살아왔던 부부에게 2010년 11월의 사건은 그동안 잊고 살았던 기억이 악몽으로 되살아난 것처럼 느껴졌다고 한다. 2010년 11월 23일, 김재옥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면에서 실시하는 산림녹화사업을 하기 위해서 마을 뒤편의 산으로 갔다. 산림녹화 사업은 산 이곳저곳을 다니며 나무를 심는 일인데 그날 나무를 심기로 한 곳에 해병대 대원들이 모여 있었다. 김재옥은 공공근로를 위해서 마을 뒤편의 군부대 근처에 있다가 북한군의 1차 포격으로 위험에 처했다가 주민의 도움으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한편, 그 시각 노숙자는 굴을 채취하기 위해서 갯벌에 있었다. 부부는 급박한 상황에 제대로 짐을 챙길 겨를도 없이 통장만 챙겨서 집을 나와서 피난선을 타고 인천으로 갔다. 인천에 도착한 부부는 다른 주민들과 함께 찜질방에 가서 TV로 연평도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부부를 비롯한 연평도 주민들은 찜질방에 한달 가까이 머물면서 정부의 대책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정부에서는 주민들을 김포에 위치한 아파트에 임시거주지를 마련해서 주민들을 머물도록 했다. 김재옥·노숙자 부부는 다른 가족들과 아파트에 머물면서 고향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렸다. 부부가 집으로 돌아온 것은 봄이 되어서였다. 부부는 연평도로 돌아왔을 때 여전히 걱정이 되었지만, 더 이상 집을 비워둘 수 없었다. 오랫동안 집을 비워두어서 집 곳곳이 엉망이 되었다. 노숙자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집을 청소했다.



김재옥 노숙자 부부의 생활

부부의 일상생활

김재옥 노숙자 부부의 하루는 아침 5시부터 시작한다. 환복과 자리정리가 끝나면 부부가 같이 간단한 아침식사를 한다. 연평도의 물때에 따라 김재옥은 3~4시간 갯벌에 나가 해산물을 채취한다. 노숙자는 연평도의 물때와 상관없이 정해진 시간이 되면 환경정화 사업 공공근로를 다닌다. 두 부부가 같이 부재중일 때는 집 앞의 문을 끈으로 묶어 잠근다. 8시부터 11시까지 공공근로가 끝나면 노숙자는 집으로 돌아와 밭일이나 빨래 등을 한다. 12시부터 1시 사이에 점심식사를 하고 나면 게따기 작업을 기다린다. 게따기는 꽃게배가 바다에서 돌아와야 시작하기 때문에 시작 시간과 종료시간이 확실하지 않다. 게따기가 끝나면 노숙자는 집에 돌아와 6시에서 7시 사이에 저녁을 먹고, 9시에 취침한다. 노숙자가 게따기를 하는 동안 김재옥은 오전 혹은 오후에 갯벌에 나가 채취한 해산물을 가져와서 손질하고 보관한다. 김재옥의 손질이 필요 없는 해산물을 채취했거나, 채취한 해산물의 손질이 끝나면 집안일을 돌보며 휴식한다. 점심식사나 저녁식사 시간이 노숙자와 맞으면 같이 식사하지만, 맞지 않는 경우 12시~1시 사이에 점심식사, 5시~6시 사이에 저녁식사를 마치면 TV를 보면서 휴식을 하다 9시에 취침한다. 김재옥과 노숙자는 생업환경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노숙자는 갯벌에 나가 활동하는 시간이 김재옥에 비해 짧다. 대신 노숙자는 김재옥보다 생업활동에 기여하는 시간이 많으며, 다양한 생업활동을 하고 있다. 김재옥 노숙자 부부의 생업활동을 개별적으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또한 김재옥 노숙자 부부의 갯벌활동은 채취하는 종류에 차이를 보이므로, 부부의 활동을 비교해 살펴보았다.



김재옥 노숙자 하루일과


가옥과 살림살이로 보는 가족 이야기

김재옥·노숙자 부부의 가옥 이야기

1. 가옥의 신축 1970년부터 시작된 새마을운동은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연평도에서도 활발히 진행되었다. 연평도 주민들은 섬 곳곳의 통행로와 하천을 정비하고, 초가지붕을 슬레이트로 교체 하는 공사를 실시하였다. 또한 1974년에는 주택개량사업으로 동부리 동북쪽 끝에 위치한 큰소구지에 13채의 집을 짓고, 이듬해에 10채를 더 지었는데 이곳이 현재의 새마을리다. 새마을리의 집은 흙·나무·돌·볏짚 등의 자연재료로 지은 기존의 집과 달리 시멘트 벽돌·시멘트 블록·슬레이트 등의 새로운 재료를 사용하였다. 이처럼 섬에 새로운 형태의 집이 등장하면서 마을 내 다른 집의 건축에 영향을 주었다. 또한 1980년 전후에 시행한 정부의 주택개량사업을 통해서 연평도에는 기존의 흙집을 대체하는 새로운 형태의 집이 등장하였다. 연평도 주민들은 정부의 주택개량사업 지원을 받아서 새집을 지었지만, 김재옥·노숙자부부는 이러한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주택개량사업을 통한 지원은 초가집이나 막집 같은 기존의 구옥(舊屋)을 대상으로 하였기 때문에 집을 소유하지 않았던 이들 부부는 해당되지 않았던 것이다. 마을 곳곳에서 새집이 들어서는 것을 지켜보던 김재옥은 자신도 새집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새 집을 지을 마땅한 터가 없어서 실행에 옮길 수 없었다. 그런데 때마침 이웃의 한 주민이 논 일부를 김재옥·노숙자 부부에게 팔면서 집을 지을 수 있게 되었다. 때마침 좋은 기회로 집 지을 땅을 마련한 부부는 15평 규모의 작은 집을 지었다. 이 집은 정부의 주택개량사업과 관련한 지원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건축 비용 전액을 부부 가 저축했던 돈으로 충당하였다. 집은 방 2개에 부엌과 마루가 있는 구조로서 부부와 초등학생이었던 두 아들이 생활하기에 적합한 크기였다. 부부는 집을 도로에서 조금 떨어진 현재의 마당 위치에 지으려고 했으나, 그곳의 땅 주인이 땅을 팔지 않아서 할 수 없이 도로에 인접한 곳에 집을 지었다. 그러다가 얼마 뒤 집이 완성되면서 뒤쪽 논의 용도가 애매하게 되었고, 땅 주인은 부부에게 그 땅을 판매하였다. 집이 완성된 이후였기 때문에 부부는 건물을 짓지 않고 마당으로 사용하였다. 2. 가옥 내 부속채 신축 김재옥은 가족이 생활하는 본채를 짓고, 그 뒤 나머지 터에 부속채를 추가로 지었다. 본채는 부부와 두 아들이 생활하기에는 큰 불편함이 없었다. 하지만 김재옥은 과거 생계의 어려움으로 뱃일을 그만두고 현재의 새마을리의 집을 짓는 일에 참여했던 경험과 기술을 갖고 있었다. 또한 본채와 달리 창고는 직사각형으로 벽을 쌓은 단순한 형태였다. 그래서 김재옥은 시멘트 벽돌을 사서 창고를 지을 때 지붕 이외의 대부분 공사는 직접함으로써 건축 비용을 줄일 수 있었다. 김재옥의 가족은 한동안 부속채를 창고로 사용하다가 용도를 바꾸게 된다. 처음 집을 지을 당시에는 두 아들이 초등학생이었기 때문에 방 2칸에서 생활하는데 큰 불편함이 없었다. 하지만 두 아들이 성장하고 살림살이가 점점 늘어나게 되면서 별도의 방 한 칸이 더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김재옥은 창고로 사용하던 부속채를 두 아들이 생활하는 방으로 개축하게 되었다. 가장 먼저 창고에 보관해두었던 살림살이를 치우고, 바닥에 난방을 위한 구들을 설치하였다. 이 작업도 부속채를 지었을 때처럼 김재옥이 직접 공사를 하였다. 1978년에 해병대 소속의 문관이 된 김재옥은 부대에서 병사들이 먹을 두부와 콩나물을 만드는 일을 하였다. 그런데 두부를 만들고 남은 비지를 처리하는 일을 고민하였다. 처음에는 비지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도 하였지만 그 양이 점차 늘면서 대부분 버릴 수밖에 없었다. 김재옥은 버려지는 비지가 아까워서 집에 가져다가 돼지를 키우게 되었고, 이러한 과정으로 인해서 집 안에 돈사 한 채를 더 지었다. 김재옥은 돈사를 집에서 가장 넓은 공간인 마당의 북쪽 담벼락에 바짝 붙여서 지었다. 이는 돈사로 인해서 마당의 동선과 공간의 활용성을 극대화하기 위함과 가족이 생활하는 본채에 돼지로 인한 냄새가 들어오는 것을 최소화하기 위해서였다. 돈사는 북쪽 담벼락을 벽체로 해서 ㄱ자 형태이며, 이 중에서 길이가 길고 넓은 공간에 돼지를 키웠고, 그 나머지 공간은 먹이와 사육에 필요한 물품을 보관하는 용도로 사용하였다. 김재옥이 길렀던 돼지들은 식성이 좋아서 부대에서 가져온 비지를 처리하는데 매우 효율적이었다. 또한 다른 가축에 비해서 성장이 빠르기 때문에 수익성도 좋았다. 하지만 돈사에서 기르던 돼지의 수가 10여 마리를 넘어가면서부터 문제가 발생하였다. 늘어난 돼지의 수만큼 돈사에서 나는 냄새가 심해졌고, 밤낮없이 우는 돼지로 인해서 주변 이웃 주민과의 분쟁이 발생하였다. 김재옥은 비지를 처리하는데 유용한 수단이면서 가계에 주요 부수입이었던 돼지 사육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고민 끝에 과거 피난 시절에 막집을 짓고 살았던 집 뒤편의 산기슭에 새 돈사를 짓고 돼지를 그곳으로 옮겼다. 이때부터 마당에 있던 기존의 돈사는 본래의 기능을 할 수 없게 되면서 철거를 계획하였다. 하지만 돈사를 짓는데 들인 비용과 철거로 인한 추가 비용을 아깝게 여긴 김재옥은 돈사를 청소한 후에 창고로 사용하였다. 김재옥이 해병대 소속의 문관으로 재직함으로써 집안의 살림살이가 많이 좋아졌지만, 노숙자는 좀 더 많은 수입을 얻기 위해서 과거처럼 두부를 만들어서 파는 일을 하고자 하였다. 김재옥은 경제적인 어려움이 없는 상황에서 부인이 힘들게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이 못마땅했다. 하지만 김재옥은 부인인 노숙자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고, 대신에 부인이 조금이라도 덜 힘든 환경에서 두부를 만들기를 바라는 뜻에서 본채 옆에 작업장으로 사용할 부속채를 하나 더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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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옥·노숙자 부부의 살림살이 이야기

김재옥·노숙자 부부는 집에 들인 살림살이는 잘 버리지 않고 따로 보관한다. 이는 빈손으로 시작해서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몸에 밴 검소함이 가장 크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연평도라는 지리적 특징도 있다. 연평도는 인천에서 뱃길로 120㎞ 떨어진 섬으로서 육지의 다른 지역에 비해서 물자의 운송이 쉽지 않다. 조사팀이 알아본 바에 의하면 1970년대 인천과 연평도를 오가는 여객선은 1주일에 1회에 불과했고, 이동에 걸리는 시간도 10시간가량 소요되었다. 그나마 조기잡이가 활황이던 1960년대까지는 섬 안에 다양한 종류의 상점이 있었지만, 조기잡이가 쇠퇴하면서 상점 대부분이 폐업을 하였다. 이러한 특성으로 김재옥·노숙자 부부는 한 번 살림을 구입하면 오래도록 사용하며, 고장이 나면 수리해서 사용한다. 필요한 물건을 제때 구입하기 힘든 상황에서 김재옥은 평소 창고에 모아둔 재료를 이용해서 직접 만들어서 사용한다. 어린 시절부터 뱃일을 시작해서 따로 기술을 배우지는 못 했지만 타고난 손재주가 좋았고, 지금도 취미 삼아 장식용 지게를 손수 깎을 만큼 만드는 일을 좋아한다. 그래서 집안 곳곳에는 김재옥의 손길이 닿은 살림살이가 있으며, 지금도 유용하게 쓰인다. 노숙자는 일흔이 넘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경제 활동을 활발히 한다. 오전에는 근로를 하고, 오후에는 꽃게 손질하는 일에 참여하거나, 갯벌에 나가서 굴과 바지락을 채취한다. 일이 없는 날에도 집에서 쉬기보다는 집 근처에 텃밭을 만들어서 부부가 먹거나 가족에게 나눠줄 채소를 직접 재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