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정기는 1950년 1월 5일에 충청북도 괴산군 칠성면 율원리 둔율마을에 있는 현재의 집에서 태어났다. 5남매 중 둘째(장남)인 그는 위로는 여덟 살 많은 누나(오정옥)가 있고 아래로는 두 살 어린 여동생(오정미)과 다섯 살 어린 남동생(오정부), 아홉 살 어린 남동생(오호필)이 있다. 누나는 경기도 이천에, 여동생은 경북 점촌에, 남동생은 각각 경기도 안산과 광명에 거주한다.오정기의 집안은 고창오씨(高敞吳氏) 감정공파로 대대로 경주에서 살았다. 그러다 오정기의 조부인 오철희 대에 충청북도로 이주했다. 오정기는 조부가 혈혈단신 선대들이 살아오던 고향을 떠나 충청북도로 옮겨 온 이유에 대해 부친에게 들은 바가 없다고 한다. 다만 그는 고조부가 산송(山訟) 문제로 재판을 하는 과정에서 재산을 탕진하여 가세가 기운 것이 제일 큰 이유가 아니었을까 짐작하고 있다. 큰 집이라 건사해야 하는 식솔들은 많은데 돈이 없어서 자손들이 다른 집안의 양자로 가는 모습을 고향에서 보고 있기가 힘들어 낯선 곳으로 이주한 것은 아닌가 짐작할 뿐이다. 오정기의 조부가 충청북도로 이주하자 조부를 따라서 오정기에게는 8촌 할아버지가 되는 조부의 사촌 동생 두 명이 경주에서 이주해 왔다. 현재도 그 자손들이 칠성면에 살고 있으며 자주 왕래하고 있다. 충청북도로 이주해 산맥이에 정착한 조부는 오정기의 할머니를 만나 혼인했다. 하지만 오정기의 할머니는 오정기의 부친인 오한영을 임신한지 여덟 달이 되던 해에 돌아가셨다. 유복자 로 태어난 오한영은 2대 독자다. 그래서 오정기에게는 4촌, 6촌도 없고 8촌만 있다. 외삼촌이 만주로 이주해 외갓집의 친척들도 없다. 일가친척이 별로 없고 이모와 외삼촌을 모르고 자란 오 정기는 결혼한 후 촌수를 못 따진다고 지순자에게 자주 혼났다고 한다. 오정기의 부친 오한영은 오정기의 어머니인 장선이를 만나 괴산군 칠성면 삼성리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그때 일본인 공무원을 폭행해 해방 전까지 제천시 덕산면 월앙리로 도망쳐서 살다 가 해방이 되자 송동리로 들어와 농사를 짓고 살았다. 그러다가 오정기가 태어나기 1년 전인 1949년 둔율마을에 있는 현재의 집을 사서 이주했다. 오한영이 45세 되던 해인 1950년 오정기가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전쟁이 터졌다. 아버지, 어머니, 누나, 오정기 이렇게 네 식구는 갈론으로 피난을 갔다. 갈론에서의 피난생활은 그리 길지 않아서 곧바로 둔율집으로 돌아왔다. 마흔다섯의 나이에 늦게 얻은 만큼 귀한 아들이었던 오정기는 집안에서 불면 날아갈까 만지면 깨질까 애지중지 하던 보물단지였다고 한다. 아버지는 귀신이 따라온다고 어머니에게 문지방도 넘지 못하게 하고 소에게 풀을 먹이러 가는 일도 하지 말고 집 안에서 아들만 보고 있으라고 할 정도로 오정기를 아꼈다. 이렇게 귀한 아들이 생후 3개월 무렵 기절을 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온 집안이 발칵 뒤집어졌다. 4월이라 한창 복숭아 잎이 필 무렵이었다. 어머니가 처음으로 아이를 안고 방 밖을 나가 뒤안에 잠깐 나갔었는데 길쭉한 복숭아 잎이 바람에 나풀거리는 것을 보고 오정기가 그만 놀라서 기절을 한 것이다. “보리쌀 한소끔 끓일 시간”동안 까무러쳐 있던 오정기는 뒷집 할머니의 응급처치를 받고서야 겨우 깨어났다. 이때 어찌나 부모님의 마음을 철렁하게 만들었던지 오정기의 어머니는 가끔 그때 얘기를 지순자에게 하며 가슴을 쓸어내리고는 했다고 한다. 그리고 손자, 손녀들 키울 때도 놀라지 않게 조심해서 키워야 한다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아버지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귀한 아들에게 맛있는 것을 먹이기 위해 잘 걷지 도 못하는 어린 아들을 쌀자루 위에 얹어 괴산장에 데리고 가서 국말이밥을 사 먹였다. 국말이밥은 돼지국밥으로 당시에는 최고의 음식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오정기는 건강하게 자라났다. 오정기는 어렸을 때 밥만 먹으면 친구들과 강에 가서 살았다. 아침 먹고 나가서 강에 가서 돌치기를 하고 놀거나 수영을 하다 가 들어와 점심을 먹고는 또 강가에 가서 친구들과 놀았다. 겨울에는 얼음이 언 강에서 썰매를 타고 놀았다. 칠성초등학교에 들어가고 나서도 친구들과 이 마을 저 마을로 많이 돌아다니면서 놀았다. 오정기의 집이 있는 둔율마을 3반에 는 칠성초등학교 동창 4명이 살고 있었는데 오정기는 이 친구들과 잘 어울려 다니고는 했다. 칠성초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오정기는 괴산중학교의 입학시험을 보기 위해 2박 3일 동안 괴산에 머물렀다. 하숙집에 쌀 한 말을 갖다 주고 동창인 윤해운과 방을 같이 쓰면서 시험을 봐서 합격했다. 중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한 오정기에게 아버지는 한학을 배울 것을 권했다. 오정기의 아버지는 고향인 경주에서 친척들이 한문으로 쓴 편지들을 집에 많이 보내오자 오정기에게 한학을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을 일찍부터 하고 있었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너무 어리다고 생각해서 미루다가 중학교 시험에 합격하자 한학을 가르칠 때가 왔다고 판단한 것이다. 아버지의 적극적인 권유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4살 되던 해 봄부터 석장골에 있는 서당을 다니며 최준식 훈장에게 한학을 배웠다. 서당의 수업료는 6개월에 한 번씩 봄, 가을에 쌀로 냈다. 얼마를 주었는지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당시 물가로는 꽤 비싼 편이었다고 한다. 서당을 다니는 아들을 위해 어머니는 한지를 사다가 다듬잇돌에 두드려서 매끈하게 만들어 주고 벼루도 좋은 것을 준비해 주었다. 오정기는 서당에서 명심보감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명심보감을 통해 한자를 어느 정도 깨우치고 소학과 대학, 논어 15권까지 수학했다. 당시 서당에는 학생들이 15명 정도 있었다고 한다. 서당의 수업은 아침에 전날 배운 것을 훈장님 앞에서 외운 후 그날 배울 부분의 진도를 나가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오정기는 다음날 훈장님 앞에서 시험 볼 부분을 서당에서 미리 다 외우고 친구들과 이 동네 저 동네 놀러 다니다 해 질 무렵 집에 들어와서 다시 책을 펼쳐보지 않고 잠자리에 들고는 했다. 당시 오정기는 공부에 별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더구나 한문은 점차 그 중요성이 덜해지고 있는 시점이었기 때문에 아버지가 보내서 억지로 서당에 다니기는 했지만 한학을 열심히 공부 하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었다. 지금 오정기는 그때 더 열심히 한문을 배우지 않았던 것을 후회한다. 예전처럼 서당에서 한문을 배울 기회가 있다면 농사일을 하고 아무리 피곤해도 다시 가서 착실히 배우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공부가 너무 하기 싫었던 오정기는 3년 동안 서당을 다니다가 그만두었다. 친구들이 중학교를 졸업하고 집에 있는 것도 이유로 작용하기는 했다.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다니다보니 자연스럽게 서당에 가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아버지는 서당에 나가지 않는 아들에게 별 말씀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서당을 그만두고 오정기는 17살 때쯤부터 군자산으로 집에서 사용할 나무를 하러 다녔다. 그 전에는 아버지가 산에서 나무를 해오셨다. 초겨울 어느 날 오정기는 처음으로 친구들을 따라서 용두샘 꼭대기까지 나무를 하러 갔다. 자주 나무를 하던 친구들에 비해 낫질이 서툴러서 친구들이 나무를 다 하고 내려간 지 한참만에야 나무 베는 것을 마쳤다. 그런데 이번에는 나무를 지게에 싣는 것이 문제였다. 싣는 방법을 몰라서 아무렇게나 지게에 쌓아서 내려오던 길에 몇 번이나 지게가 넘어졌다. 다행히 한 동네에 살던 아저씨가 나무를 하러 와서 오정기를 보고 지게에 나 무를 차곡차곡 정리해서 잘 쌓아주었다. 그렇게 고생고생을 하며 나무를 해서 집에 내려왔다. 그 나무로 어머니가 바로 불을 땠 으면 별로 재미를 느끼지 못했을 텐데 차곡차곡 아궁이 옆에 쌓아두는 것을 보니 재미가 있었다고 한다. 어린 자신도 부모님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했다는 뿌듯한 보람을 느꼈던 오정기는 이 후 산에 자주 나무를 하러 다녔다. 가끔 나무를 해오는 것을 빼고는 특별히 하는 일 없이 부모님 밑에 있던 오정기는 스물세 살 때인 1972년에 영장이 나와서 그 해 4월에 입대를 했다. 군 생활은 춘천에서 했는데 탱크를 운전 하는 탱크 운전병으로 근무했다. 오정기는 군대에 있으면서 두 번 휴가를 나왔다. 이 두 번의 휴가는 오정기의 인생에 있어서 큰 의미를 지니는 시간이기도 하다. 4월에 첫 휴가를 나온 오정기는 집에 도착해서 논을 갈러 가신 아버지를 마중 나갔다. 저 멀리 지게를 지고 소를 몰고 오는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당시 아버지의 연세는 68세였다. 이때 늙은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오정기는 처음으로 아버지의 일을 도와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처음으로 아버지를 도와서 논을 갈고 볍씨를 넣는 농사일을 했다. 이듬해에도 4월에 휴가를 나와서 아버지의 농사일을 도와드렸다. 오정기는 군대에 입대하고 나서 본인이 철이 들었다고 회상 한다. 그 전에는 당연히 농사일은 부모님이 하는 것이고 본인은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첫 휴가 때 보았던 아버지의 모습은 군생활 내내 오정기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1975년 3월 6일 오정기는 제대를 했다. 본인의 미래에 대해 어느 정도 계획이 잡힌 상태였다. 그래서 제대하고 나서는 아버지의 농사일을 본격적으로 도와드렸다. 이때만 해도 힘을 써야 하는 일들을 많이 하기는 했지만 아버지 일을 도와드린다는 생각으로만 해서 농사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 오정기가 본격적으로 농사일을 하기 시작한 것은 지순자와 결혼을 한 이후 부터였다.
지순자는 1955년 11월 6일에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사기막리에서 태어났다. 4남매 중 장녀로 위로는 여덟 살 많은 오빠(지영조)가 있고 아래로는 열 살 어린 여동생(지영미)과 열두 살 어린 남동생(지한호)이 있다. 오빠는 1981년에 신갈로 이사를 했다가 지순자가 살고 있는 마을로 이사 온 지 3년이 되었다. 여동생과 남동생은 각각 경기도 신갈과 양평에 거주한다. 오빠와 올케는 집이 가까워서 자주 만나지만 멀리 살고 있는 동생들은 자주 보지 못하고 친정아버지 제사, 여름휴가 등 1년에 세 번 정도 만난다. 지순자는 형제들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난다. 당시에는 유아사망률이 높았고 지순자의 위로도 죽은 형제들이 있었다. 1955년에 태어났음에도 출생신고를 늦게 해 주민등록상에는 1957년 생으로 되어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동생들의 주민등록은 학교 갈 때 다 고쳤으나 지순자의 것은 고치지 못했다. 동짓달에 지순자가 태어나자 부모님들은 갓난아이가 추위 속 에 혹시 잘못될까 싶어 솜이불에 감싸서 애지중지 키웠다고 한다. 지순자가 고향에 갈 때면 마을 어른들이 그 때 솜이불에 키운 아이가 이렇게 컸냐고 신기해했다. 어머니의 성격은 조용하고 내성적인 반면 아버지의 성격은 불같아서 무서웠다. 온 식구가 아버지의 말 한 마디에 절절 맬 정도였다. 지순자의 아버지는1994년에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현재 오빠가 모시고 있다. 지순자는 청천면 덕평리에 있는 덕평 초등학교를 다녔다. 이 학교는 2011년 3월 1일자로 문광초등학교로 통합되어 지금은 문 광초등학교 덕평분교이다. 지순자의 집에서 학교까지는 아이가 걸어서 매일 통학하기에는 너무 먼 거리였다. 오솔길을 따라 끊임없이 걷다가 강(달래강)을 건너고 다시 걷기를 반복해 2시간이 넘게 걸어가야 학교가 나왔다. 강에 다리가 생기기 전까지는 나룻배를 타고 건넜다. 여름에 더울 때는 학교 가는 길에 몇 번씩 강물에 들어가 몸을 식혔다가 학교를 가고 해가 짧은 가을에는 등불을 들고 학교에 다녔다. 학교에 가다가 다시 집에 돌아온 적도 많았다. 학교 가는 오솔 길에 당시에는 큰 바위들이 많았는데 거기에서 나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이 밥을 해먹고는 했다. 지순자가 어릴 때는 나환자들 이 진달래꽃 나무 밑에 숨어 있다가 사람을 잡아먹고 간을 떼어 먹는다는 이야기들이 많았다고 한다. 어린 지순자는 바위 근처에서 연기가 나는 것을 보면 무서워서 학교에 가지 못하고 집으로 되돌아오고는 했다. 그러다 보니 학교에 가지 못하는 날이 많았 다. 지순자의 오빠는 동생이 학교에 가지 않으면 학교 가서 공부 하라고 지순자를 많이 혼냈는데 아버지는 어른들이 계신데 동생을 혼낸다고 오빠를 많이 때렸다. 지순자는 오빠의 농사일도 돕고 올케와 어머니와 함께 빨래하고 밥도 하는 등 집안 살림을 도왔다. 지순자의 집은 사기막리에서 농사를 크게 지었다. 산에 있는 한 비탈이 거의 지순자네 밭이었다. 주로 옥수수, 콩, 팥을 심었다. 오빠는 농사일을 잘 안하는 아버지를 대신해 어렸을 때부터 밭일을 많이 했다. 지순자네 밭들은 산비탈에 있어서 소를 이용해 갈 수도 없었다. 밭에 씨를 넣기 위해서는 괭이로 파서 씨앗을 넣어야 했다. 어릴 때부터 지순자도 오빠를 따라다니며 일을 도우면서 농사일을 많이 익혔다. 그래서 시집와서도 농사일은 오정기보다 더 잘 알았다. 지금도 밭에 씨를 어떻게 심어야 하는지에 대한 요령은 지순자가 더 좋다. 그래서 파종하는 일은 지순자가 대부분 맡아서 한다. 주로 옥수수 농사를 많이 지은 지순자네는 옥수수를 내다 팔기도 하고 주식으로도 먹었다. 말린 옥수수의 알을 빼서 방앗간 에 가져가면 껍데기를 벗겨서 쌀처럼 갈아주는데 이것으로 밥을 해 먹었다. 그래서 겨울 내내 지순자는 방에서 송곳으로 옥수수 의 골을 타서 알을 뺐다. 눈이 안 오고 마당이 말랐을 때는 마당에서 도리깨로 두드려 옥수수를 털었다. 봄에는 나물을 뜯느라 바빴다. 도랑가에서 원추리를 뜯고 홑 잎, 묵나물, 다래순을 비롯해 두릅도 땄다. 지순자가 캐온 나물은 거의 반찬을 해 먹었지만 두릅이나 더덕은 식구들에게까지 먹을 차례가 돌아오지 않았다. 어머니가 장에 가져가서 팔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순자는 진짜 좋은 두릅은 어렸을 때 먹어보지 못했다고 한다. 지순자가 살던 집에서 계곡 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큰 바위가 하나 있다. 그 바위 밑으로 얕은 계곡물이 졸졸 내려가는데 이곳이 지순자의 냉장고였다. 지순자는 두릅을 따오면 일단은 여기에 넣어두었다. 그러면 장이 서는 날 어머니가 그것을 갖다 팔았다. 지순자는 어렸을 때 한 동네에 살던 큰 아버지의 딸인 사촌언니 지숙희와 항상 붙어 다녔다. 나이는 지순자와 같았지만 생일이 2월이라 언니라고 불렀다. 어디 갈 때도 항상 같이 가고 앉을 때도 항상 옆에 앉고 잘 때도 옆에서 잤다. 서로를 살뜰하게 챙기는 사이였다. 지금은 언니가 부천에 살고 있어서 자주 만나지는 못하고 집안의 큰 행사가 있을 때나 사촌계를 할 때 한 번씩 보는 정도이다. 하지만 지금도 사촌계에서 언니를 만나면 꼭 둘이 붙어 앉는다. 지순자 가족은 1971년에 사기막리를 떠나 칠성면 사평리로 이주했다. 간첩들이 산에 자주 출몰한다는 이유로 정부에서 강제로 이주시켰다. 이사 나올 때 지순자의 가족들은 조카들까지 모두 합해 열 식구였다. 칠성으로 이사 온 지순자 가족은 감자농사를 지었다. 비가 온 후 감자를 캐는 것이 지순자는 그렇게 싫었다고 한다. 호미가 흙 에 들러붙고 발이 질퍽거려 땅이 말랐을 때 보다 배는 힘들었기 때문이다. 캔 감자를 가마니에 넣어 오빠와 둘이 귀퉁이를 잡고 들어서 리어카까지 가져가서 싣고는 칠성장에 가져다 팔았다. 지금은 칠성에 장이 서지 않지만 당시에는 칠성에 장이 섰다. 감자를 캐내고 나면 대파를 심어서 뽑아다 팔았다. 사기막리에서 비탈 밭에 농사를 지을 때보다 규모가 많이 줄었다. 그래서 지순자의 오빠는 식구들을 벌어 먹이기 위해 밖으로 일을 많이 다녔다고 한다. 지순자네 집은 칠성중학교 바로 옆에 있었다. 사기막리에 살 때는 공부에 대해 별 생각이 없었던 지순자는 이사 와서 교복을 입은 중학생들을 보고 나도 교복을 입었더라면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지순자가 아침에 일어나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마당을 쓰는 것이었다. 마당을 다 쓸고 나면 골목을 쓰는데 그때가 딱 중학생들이 학교에 가는 시간이었다. 교복을 입고 친구들과 나란히 학교에 가는 학생들을 보고 있노라면 교복을 못 입어 본 것이 후회가 되기도 했다. 지순자의 기억 속에는 아직도 고향인 사기막리가 생생하다. 연애시절과 신혼시절에 오정기와 지순자는 김밥을 싸서 오토바이를 타고 지순자의 고향을 자주 찾았다. 틈만 나면 지순자가 자 신의 고향이야기를 해서 오정기는 대단한 곳인가 보다 하고 기대를 잔뜩 하고 갔는데 막상 가서 보니 하늘에는 비행기만 보이고 호랑이가 나오게 생긴 깊은 산골이라서 놀랐다고 한다. 이후 부부는 아이들과 함께 사기막리를 가기도 하고 명절에 친지들이 모이면 소풍 겸 다녀오기도 했다. 요즘에도 농사일이 바쁠 때가 아니면 종종 찾는다. 사평리에서 4년 정도 살다가 오정기와 선을 봐서 그 해 겨울 결혼했다.
1975년 3월 7일 오정기와 지순자는 선을 봤다. 오정기가 군대에서 제대한지 하루만이었다. 선은 칠성다방에서 봤는데 지순자의 아버지 친구들이 중매를 섰다. 선 보기 전에 먼발치에서 지순 자를 본 적이 있던 오정기는 지순자의 앳된 모습에 선을 보러 가기 싫었다고 한다. 하지만 오정기는 선을 본 날 지순자가 꼭 맘에 들었다. 그 결정적인 이유가 재미있다. 막 제대를 하고 온 오정기는 군대의 음식에 입맛이 길들여져서 그런지 집에서 먹는 음식이 입에 잘 안 맞았다. 그래서 집에서 식사를 잘 안하고 있던 차에 선을 본 그날따라 배가 많이 고팠다. 오정기는 지순자 앞에서 연신 “아이 배고파”라는 말을 했고 다방 에서 중화요리 집으로 자리를 옮겨 가락국수을 시켰다. 가락국수가 나오자 지순자는 자신의 가락국수을 오정기의 가락국수그릇에 다 건져주었다. 지순자의 이런 행동에 감동한 오정기는 이 여자는 적어도 내 배는 안 곯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지순자의 배려가 담긴 가락국수 몇 젓가락에 감동을 받아 인연이 되었다는 오정기와 지순자는 선을 본 다음날인 8일에 바로 약혼식을 올렸다. 약혼식은 지순자의 집에서 가족들끼리 식사 를 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식사 후에는 칠성에 있는 제일사진관에 가서 약혼 기념사진을 찍었다. 약혼 기간 중에 지순자가 보고 싶을 때면 오정기는 자전거를 타고 지순자의 집에 갔다. 지순자는 오정기가 집에 놀러가도 수줍어서 잘 나오지 않았다. 그러면 오정기는 지순자의 고종사촌들과 놀다오고는 했다. 오정기는 친척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친척들이 많이 모여서 음식도 해먹고 같이 놀기도 하는 지순자의 집이 재미있었다고 한다. 오정기의 집에서는 약혼식에 이어 결혼식도 바로 이어서 하려 했다. 하지만 지순자의 집에서 준비가 부족하다고 해서 가을 수확을 마치고 12월 2일에(음력 10월 30일) 결혼식을 올렸다. 오정기가 스물여섯, 지순자가 스물한 살 때이다. 지금이야 스물한 살에 결혼하는 것이 이르지만 그 당시는 이른 것이 아니었다. 부부의 결혼에 대한 인터뷰를 할 때 오정기가 “우리는 고속버 스 탔어. 고속버스”라고 말할 정도로 결혼을 서두른 이유는 오정기 부친의 연세가 많았기 때문이다. 오정기는 부친이 환갑이 되 던 해인 열여섯 살 때부터 집에서 장가가라는 말을 들어서 많이 부끄러웠다고 한다. 결혼식은 지순자의 집 마당에서 전통혼례로 치러졌다. 당시에는 예식장이 막 생기기 시작하던 때라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하기도 했지만 오정기의 아버지가 구식 결혼을 원해서 전통혼례를 올렸다. 오정기가 지순자의 집에 도착을 하니 옆집을 신랑대기실로 꾸며 놓았다. 그곳에서 대기를 하다가 시간이 되어 부르는 소리가 들려 마당으로 입장을 했다. 혼례를 올리던 날 지순자는 어찌나 정신이 없고 긴장을 했는지 그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잘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라고 한다. 안방에 있는 지순자의 화장대에는 이들의 결혼식 사진이 놓여 있다. 당시만 해도 축의금보다는 친구들이 선물을 많이 하던 때라 결혼 선물을 가운데 놓고 찍은 사진도 있다. 이때 친구들에 게 받은 결혼식 선물들은 주로 액자와 반상기 세트 등으로 지금도 보관하고 있다. 혼례를 올리고 바로 오정기의 집으로 왔다. 신혼여행은 가지 않았다. 군대에서 제대한지 얼마 안 되었던 때라서 오정기는 금반지를 하는 것도 사치인줄 알았다고 한다. 오정기와 지순자가 탄 택시가 앞장을 서고 장롱과 화장대 이불 등을 실은 짐차가 그 뒤를 따랐다. 장롱은 문이 고장 나서 버렸지만 지순자가 혼수로 해온 화장대와 이불은 결혼하고 처음으로 사용했던 윗방에 그대로 있다. 혼례를 올리고 오정기와 함께 택시를 타고 오면서 지순자는 많이 울었다고 한다. 조카들과 동생들이 눈에 밟혔기 때문이다. 오정기는 옆에서 “울지 마 울지 마”하며 지순자를 달랬다. 지순자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어린 동생들과 조카들을 엄마처럼 업어서 키우다시피 했다. 시집오면서 아이들과 떨어지는 것이 많이 아쉬웠던 지순자는 밥을 하다가도 지나가는 애들이 떠드는 소리가 나면 혹시 조카들이 온 것이 아닌가 싶어서 대문 밖으로 뛰어나갔다고 한다. 시집 온 첫날 시어른들께 인사를 드리고 3~4일 동안 문안인 사를 올린 후 본격적으로 지순자의 결혼생활이 시작되었다. 오정기의 손 위 시누이는 이미 시집을 갔고 여동생은 오정기 부부가 결혼하고 3개월 후에 결혼을 해서 지순자는 시부모님과 시동생 2명과 함께 살았다. 지순자는 친정에서도 열 식구가 북적 북적 살았기 때문에 시댁식구가 많아서 힘든 일은 없었다고 한 다. 다만 시어머니가 무서운 것이 시집살이의 어려움이라면 어려움이었다. 시아버지의 성격은 조용조용하고 찬찬한 반면 시어머니의 성격은 불같아서 시어머니를 많이 무서워했다. 집에서 밥을 해놓고 밖을 내다보다 어머니가 밭일을 하고 집에 돌아오는 것이 보 이면 가슴이 떨릴 정도였다. 아이들을 낳고 키우다 보니 나중에는 이 무서운 감정들이 점차 가라앉았다. 지순자는 시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모셨다. 어디가 조금이라도 편찮으시기만 하면 바로 병원에 모셔다 드리고 외출할 일이 있어도 항상 지순자가 모시고 다녀왔다. 늘 시어머니를 모시고 다니던 지순자에게 사람들이 딸이냐고 물을 정도로 시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모셨다. 마을에서도 시어머니를 지극하게 모시는 지순자를 인정해 효부상을 주기도 했다. 그렇게 무서웠던 시어머니가 어느 순간 “우리 영호애미, 영호애미”를 찾고 “일도 많이 하지 말어라”면서 지순자를 챙겼다. 지순자는 그때 참고 살아온 것에 대한 보람을 느꼈다고 한다. 오정기와 지순자가 부부로 맺어진지 36년이 지났다. 그 시간 동안 부부는 일도, 쉬는 것도, 여행도 늘 함께했다. 행복하고 힘든 일들 또한 함께 웃고 서로 의지하며 겪어냈다. 그래서 그런지 부부의 모습은 어느새 많이 닮아 있다. 오정기는 결혼생활동안 지순자에게 좀 더 잘해주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된다고 한다. 처음에는 결혼기념 사진도 10년 단위로 찍을 생각이었는데 살다보니 어쩌다 20주년 기념사진만 찍게 되었다. 이 또한 지순자에게 많이 미안하다고 한다.